백부장 고넬료의 믿음(행10:1-8)-2021.9.19
신약성경에는 다섯 명의 백부장이 나오는데 비교적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8장에 나오는 가버나움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다가 예수님께 나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친히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시자 마8:8절에서 그 유명한 어록을 남깁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주님이 크게 감동하십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극찬을 하십니다(마8:10).
또 한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장에 있었던 백부장입니다. 마가복음15장39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백부장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는 장면을 바라보던 백부장은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던 백부장 율리오가 나옵니다(행27:1). 그는 로마로 가던 배가 유라굴로 풍랑을 만나 난파직전에 있을 때 바울의 말을 듣고 바울의 명령에 따라준 인물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22장25절에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던 백부장이 나옵니다(행22:25).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백부장들은 하나님의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우호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백부장의 역할이나 성격이 신구약에서 다르게 나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백부장은 모세를 통해 세워진 행정조직으로 행정관료 혹은 재판관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나오는 백부장은 로마군대에서 백명의 군대를 통솔하는 우두머리였습니다. 오늘 우리식으로 말하면 중대장급에 해당되는 장교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문은 고넬료라는 이름을 가진 백부장의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한 기독교인이라면 고넬료라는 이름을 한 두번 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고넬료는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른바 사도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교회사적으로 정말 중요한 사건입니다. 로마 사람 고넬료는 참으로 귀하고 복된 믿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주님께서도 인정해주시는 믿음이요, 유대인들로부터도 인정받는 믿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믿음을 가진 자였다는 말입니다.
가장 좋은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먼저 인정받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참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으로부터도 인정받으며, 사단에게도 인정을 받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우리가 우선해야 할 것은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 인정받으면 주변으로부터도 인정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종교가 의식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불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참선이라든지 고행을 하는 거지요. 그리고 유교는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제사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의식합니다. 영적인 종교라서 그래요. 하나님을 의식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거든요.
고넬료는 로마에서 파견한 군대 장교였지만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을 의식했습니다. 사실 쉽지 않지요. 지배하는 나라의 군대장교가 피지배국 종교를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깊은 신앙심까지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없으면 불가능한 거예요. 본문은 고넬료에 대해 경건하고, 하나님의 경외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요, 유대백성들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결코 보기 드문 경건한 사람입니다. 신앙심이나 성품이나 인품으로 보더라도 존경받을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준비하신 인물이지요.
사실 고넬료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이방인의 첫 열매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고넬료를 통해 복음이 유대인의 장벽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수출되는 전기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감히 유대인의 복음이 이방 땅으로 넘어간 거예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감히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조차도 받아드리지 못했거든요. 그만큼 유대인들은 병적인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복음이 유대인의 종교적인 장벽을 무너뜨린 거예요.
그리고 사실상 고넬료라는 사람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첫 열매를 삼으신 거지요. 기독교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세계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된 거예요. 이방선교의 새로운 기틀이 마련된 셈이지요. 이는 이방인 고넬료라는 한 사람의 변화가 아닙니다. 고넬료 자신은 물론 자기 가정을 복음화 시키는 주인공이 되었지요. 그는 일가와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인물이 된 거예요(24절).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들의 믿음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하는 일대 획기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이번 주간이 추석명절 연휴기간입니다. 비록 코로나 시국이지만 작년보다는 많은 분들이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을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전에서 예배하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명절은 좋습니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명절은 모처럼 사람의 도리를 할 수 있는 기회요, 사랑하는 분들을 만나서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고 충전시킬 수 있는 좋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사에게는 우상숭배가 명절을 통해 극성을 부리기 때문에 거룩한 근심이 떠나지 않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범죄행위거든요. 절대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우리의 심령이 무너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명절 때 마음의 자세가 흐트러져 범죄하기도 쉽습니다. 이럴 때 자신을 잘 추스르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자신을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신앙의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자칫하면 우리가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거룩한 긴장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깁니다. 원수마귀 대적하는 영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앙의 본을 세운 고넬료의 믿음을 추억해 보려고 합니다.
고넬료 같은 믿음만 가진다면 최소한 우상숭배 같은 것에 넘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정말 귀한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의 믿음은 주님께서도 기억해 주셨지만, 유대인들로부터도 칭찬이 자자했던 인물입니다(22절). 오죽하면 유대인들은 고넬료를 향해 의인이라고 불렀겠습니까?(22절). 그만큼 선한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고넬료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환경을 초월한 신앙인입니다
고넬료는 기독교 역사상 굉장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한 로마 관저를 경비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군대의 장교 백부장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 백부장의 위치는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좋은 군사학교를 졸업한 중간층의 간부들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군복무에 참여한 로마 군인들은 마치 굶주린 늑대처럼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하는 야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 군대는 대부분 황제숭배를 비롯해 우상숭배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장교들은 자동적으로 황제를 신처럼 숭배하는 사상을 가진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좋지 않는 분위기, 이른바 타락한 군대 조직 문화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는 황제를 신처럼 숭배하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것도 로마군대의 조직에서는 절대적으로 황제를 숭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고넬료가 황제숭배를 포기하고 자기들이 지배하고 있는 유대나라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당시 로마인의 자존심은 대단했거든요. 지배하는 자들이 지배당하는 나라의 신을 섬기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지요.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무엇보다 콧대 높은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포기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한마디로 고넬료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가 누구로부터 어떤 정보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어쩌면 유대인들보다 더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고넬료에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소개해 주었는지 모르지만 고넬료는 대단한 믿음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교두보로 준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거든요. 물론고넬료가 하나님을 믿기에는 수많은 장벽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수용하기도 쉽지 않았을 뿐 더러, 자존심 강한 로마 군대의 장교의 파격적인 결단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군대 조직상 상급자들의 눈치도 살폈을 것입니다. 그만큼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지요. 왜냐면 로마 장교인 그는 자기만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종교를 갖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히 개종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개종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파면을 당할 수도 있고, 처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황제숭배 사상이 강한 로마시대에 황제이외의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증거하고 있거든요.
사실 신앙은 자기 신분이나 환경,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극단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요즘 타 종교권의 이탈행위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특별히 이슬람 종교를 보십시오. 자기들이 믿는 알라신을 버리면 배우자나 자식이나 형제도 가차없이 죽입니다. 그것도 잔인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위험한 일이 없었겠습니까? 어쩌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믿었을는지 모릅니다. 신앙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의 문제에요. 영생과 영벌의 문제라는 말이에요.
고넬료는 환경을 초월한 신앙인입니다. 사실상 우리 주변에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 자들의 대부분은 자기들의 처한 환경을 탓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들어보면 모두 자기들이 처한 환경이 여의치 못해서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넋두리를 합니다. 마음이나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혹은 집안이 다른 종교라서, 혹은 아직 예수 믿을 환경이 아니라서 라는 등 수많은 변명을 쏟아냅니다. 사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하는 변명들입니다. 마음과 시간이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하고, 가족 모두가 다른 종교를 믿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환경이 여의치 못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장애물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주로 환경을 탓합니다. 자기들의 믿음 없는 것을 주변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킵니다. 아주 비열하고 무책임한 것들이지요. 고넬료는 자기 주변의 열악한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믿음은 죽음도 초월합니다.
(2) 가족구원에 성공한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고넬료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은혜는 자기 가족구원에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혼자만 믿는 솔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2절에 보면 그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가족전체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자기 가족 모두에게 소개했을 것이고, 온 집안 모든 식구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던 것이지요. 고넬료는 가족구원에 성공한 인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복음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내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고넬료는 자기가 믿은 하나님을 가장 먼저 자기 가족에게 소개했을 것입니다. 고넬료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받았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자기 가족들에게 소개하는데 어떠한 고민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가족들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가족 구원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건하지 못하면 어렵습니다.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면 더욱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가족관계에 갈등이 없어야 합니다. 그만큼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자기 가족에게 먼저 전해야 합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의 광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 복음의 향수가 진동했습니다. 우리는 고넬료의 믿음을 통해서 진지하게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가정에서 어떤 존재인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의 가정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요? 우리는 우리 가정의 복음화를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 가족들의 영혼을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요?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좋다면 그들에게 어찌하여 복음을 전해줄 수 없는지요?
사실 우리는 가족 복음화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의 생각은 변명이요, 핑계에 불과합니다. 솔직히 우리 가족들의 영혼구원에 대해 얼마나 기도해 보셨는지요? 그 영혼들을 부둥켜안고 얼마나 기도해 보셨는지요? 우리가 우리 가족들의 영혼구원에 대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셨는지요? 대부분 너무나 무관심하고, 무책임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 의식도 없이 말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 가족들의 구원에 대해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너무 쉽게 우리가 단정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요? 정말 그렇게 말하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아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가 가정의 복음화에 대해 소홀한 것은 우리가 그만큼 복음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것이요, 복음의 긴급함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번 추석명절 기간이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냥 만나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분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보십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의 향기를 전달해 보십시다.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마련해 보십시다. 그리고 지혜롭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가족구원이 가장 우선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파급 경로를 보십시오. 사도행전1장8절을 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입니다. 마치 물결의 파장처럼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모든 일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신을 잊어버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멀리 가서 이방사람 구원하지 못해도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가장 먼저 내 사랑하는 가족들의 영혼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가정의 구원을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하시고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이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듯이 우리 모든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신행이 일치한 신앙인입니다
고넬료는 행동파 신앙입니다. 그는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른바 신행일치의 삶을 보여준 인물이지요. 그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말씀합니다(2절).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가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점령지에서 점령군의 역할은 대단히 막강했을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당시 로마 군인들은 난폭하고 무자비하여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지배국 로마의 자존심도 없었습니다. 군인들의 무자비함이나 난폭함도 없었습니다. 교만하고 무례함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성품이나 인품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자비롭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유대백성들을 구제했겠지요. 그렇게 그는 이웃 사랑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에 말로만 예수 사랑을 외치는 우리들과는 전혀 수준이 다른 사람이었는 모릅니다. 그는 분명히 신행이 일치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신앙의 안마당과 뒷마당이 같았던 인물이에요. 누가 뭐래도 신앙인은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선행을 기억하셨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만 상달되는 것이 아니라 구제도 상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된 거예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신계명이요, 구제는 인간과의 대인계명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달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상달된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대신관계만 잘되면 끝나는 줄 압니다. 이른바 기도만하면 되는 줄로 착각한다는 말이에요. 아닙니다. 기도는 당연하거니와 구제도 병행해야 합니다. 구제는 행실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성도들이 기도는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구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구제는 핑계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둘 다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기도는 당연한 일이지만 기도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에요.
마태복음19장17절에서24절에 보면, 부자청년의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청년이 한번은 주님 앞에 나와서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청년은 당당하게 주님께 다시 묻습니다. 어느 계명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은 주로 대인관계에 해당되는 계명들이었습니다.
청년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기가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느냐고 따지듯이 묻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청년의 믿음을 칭찬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청년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네게 있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마19:21).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아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두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입니다(마19:23-24절). 이것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탐심입니다. 복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욕심으로 사는 자들이거든요. 그러나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으며, 복음으로 사는 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받아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자들이지요. 그래서 자기 욕심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게 되지요.
오늘 우리는 고넬료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말로만의 신앙이 아니라 정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말입니다. 이번 추석에 우리 이웃을 한번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코로나 시국인지라 다들 힘들어 합니다. 너도 나도 어렵다고 난리들입니다. 틀림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어렵다고 탄식할 때 우리 주변을 한번 돌아보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는지요? 물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말입니다(마6:3-4). 우리는 고넬료의 믿음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정말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고넬료를 통해 우리는 큰 감동을 받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본문 가운데 나타난 고넬료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냐는 것입니다. 율법의 믿음인지, 복음의 믿음인지 분별해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만 가지고 고넬료가 복음의 믿음을 가진 자라고 속단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접근해 볼 것이 있습니다. 고넬료는 율법주의 신앙을 먼저 배웠다는 말이지요. 최소한 본문속에서는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고넬료의 신앙은 율법주의 신앙이 농후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항상 기도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복음을 듣지 못했고, 복음을 영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항상 기도하며, 많은 사람을 구제할지라도 자기의 의로움을 통한 열심이었다는 것이지요. 그가 제 구시쯤 기도하는 것도 역시 율법주의자들의 기도시간을 그대로 답습한 충분한 단서가 됩니다. 그는 분명히 그 사회의 주류층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경건함에 매력을 느끼고 그들의 신앙을 전수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속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함이라든지 혹은 기도가 상달되었다는 말을 듣고 복음을 영접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복음이 없어도 그런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에요.
사실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주의자들보다 훨씬 경건하게 보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율법주의자들의 기도도 들으시고 구제도 상달해주십니다. 다만 이것이 구원과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으로 구원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에요. 반드시 구원은 복음을 들어야 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고넬료가 율법주의 믿음으로 살았다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 베드로를 만나게 하심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베드로를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거든요(22절). 이른바 복음을 들으라는 것이지요.
만일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기전에 복음을 들었다면, 혹은 복음을 믿었다면 굳이 베드로를 만나서 베드로의 복음을 듣게 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만나게 주선하십니다. 물론 베드로를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고넬료를 만나기 전까지 베드로도 역시 유대주의 종교적인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거든요. 그동안 베드로도 유대인이나 유대교에 귀의한 헬라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파했지요. 은근히 베드로 안에도 선민사상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고넬료라는 이방인을 만나서 어떻게 복음이 역사하는지를 보여주시고자 함이지요. 그리고 고넬료 역시 복음을 들어 구원받는 역사를 보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동안 고넬료도 역시 율법주의 믿음에 갇혀 있었던 거예요. 그런 고넬료가 비록 유대 율법주의 믿음으로 출발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해 놓으셨던 것이지요. 이른바 복음을 주시기로 예정해 놓으셨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주선하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의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입니다. 고넬료는 복음을 듣게 하심이요, 베드로는 복음의 확산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당시 베드로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여 복음을 듣게 하십니다. 복음을 들어야 구원받는 믿음이 일어나고,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을 만나기전에 일찍이 고넬료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배우게 하시고, 믿게 하셨던 것이지요. 왜냐면 복음을 만나기전에 율법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율법을 모르면 복음을 알 수 없는 거예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복음이신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거예요. 때문에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어 복음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의 종교성이 오히려 복음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마디로 율법적이라도 종교성이 깊은 사람이 복음 안으로 들어오면 복음의 진수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사도 바울 같은 경우지요. 율법 안에 살던 사울의 믿음은 결국 복음 안으로 들어온 바울의 믿음을 순교자적인 믿음으로 승화시켜준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무조건 비난하면 안돼요. 율법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일 뿐이지요.
드디어 고넬료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하여 복음을 들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가족들과 가까운 일가친척, 친구들까지 말입니다(24절).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은 화평의 복음이었습니다(36절). 화평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34-48절).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을 전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해 오신 화목제물이셨습니다. 화평을 이루러 오신 분이시지요. 그래서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이 사흘 만에 살리사 우리 가운데 나타내셨다고 증거합니다(40절).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이 친히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자라는 것입니다(42절). 또한 그분을 믿는 자는 그분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전합니다(43절). 그러자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십니다(44절). 비록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진 것입니다(45절). 그들이 방언도 말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48절). 한마디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불같이 임한 것입니다. 성령이 고넬료의 가정을 강타한 거예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지요. 물론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고넬료의 간절한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율법에서 출발하여 복음의 진수를 맛본 고넬료처럼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