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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14)-2021.10.31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1.10.30|조회수211 목록 댓글 0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14)-2021.10.31

 

사람이 가장 사람다운 것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요,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분께 모든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지요.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미미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아무리 바빠도 감사의 마음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서로 돕고 도움을 입으며 살아갑니다. 이 말은 세상에 존재 의미가 없는 인간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분명히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요, 나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때문에 내 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당신이 나와 동시대에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내 곁에 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감사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른바 감사에 대한 피드백이 있어야 해요. 말 못하는 동물도 자기가 입은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있지요.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를 말합니다. 이른바 자식이 자라서 어버이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을 이르는 말이에요. 하물며 까마귀도 그러할진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어떠할까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는 미련한 자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지 않는 자는 사악한 자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은혜에 대한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모두 다 주셨습니다. 다만 누군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각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동일하게 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주셨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맞춤형 은혜를 주신 것이지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불만과 불평, 대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똑같이 창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각 사람을 개성 있게 만드신 것이지요. 그런데 그 개성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평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똑같은 나무에서 수확한 사과도 모양이 다르고, 맛이 다릅니다. 어떤 것은 달고, 어떤 것은 시고, 어떤 것은 떫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무시하는 미련한 것입니다. 한 사람도 똑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분복이 다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각자에게 주신 은혜를 무시하고, 다른 은혜를 구하며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년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해 보십시다. 계수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찬송가 460장의 가사 말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사함이 은혜요, 구원이 은혜이며, 영생이 은혜입니다. 영적으로 받은 은혜, 삶의 현장에서 받은 육신의 은혜를 우리가 무엇으로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해와 달과 별, 빛과 공기와 자연이 주는 혜택만 해도 무엇으로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받지 못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솔직히 지금 내가 받지 못했다고 감사치 않는 것들의 대부분은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거나, 평소 내가 관심을 갖지 아니 하는 것들일 것입니다. 정말 내가 간절히 필요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구했을 터이요,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요? 금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가요? 아니 얼마나 감사하며 살았던가요? 불과 두 달 밖에 남지 않는 달력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는지 생각해 봅시다. 솔직히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 형편을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속인들 그분이 속겠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색한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앉고 섬을 잘 아시며, 나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나의 감사의 수준을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요? 본 시편은 저자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다만 그의 일생이 그다지 평탄치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의 고백으로 볼 때 그가 겪은 고난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마도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요, 눈물 골짜기를 경험한 사람이며, 죽음의 사선을 넘어 본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도 한때 모든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11절). 경겁 중에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12절). 그러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12)

 

은혜에 보답하려면 먼저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은혜에 보답하라는 말은 쇠귀에 경 읽기지요. 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은혜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은혜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물론 사람들은 나름대로 은혜에 대해서 말들을 합니다. 상당한 지식과 소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경험이나 철학을 바탕으로 은혜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도 은혜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은혜를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모든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모릅니다. 은혜의 출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은혜의 출처를 모르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은혜는 금방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 싸구려 은혜에 불과합니다. 그런 자들은 모든 은혜가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은혜는 절대적인 은혜가 아니라 상대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은혜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은혜는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쥐어진 것만 은혜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가치가 주관적인 감정에 따라 요동을 치는 겁니다. 수시로 바뀌는 것이지요. 똑 같은 것도 어떤 날에는 은혜가 되는데, 어떤 날에는 은혜가 안됩니다. 자기감정에 따라 수시로 바뀌거든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 은혜가 바뀝니다. 똑 같은 것도 어떤 사람은 은혜가 되는데, 어떤 사람은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환경에 따라 은혜가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절대적으로 변할 수 없는 것까지 은혜의 가치가 바뀌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처럼 은혜의 출처를 아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은혜와, 은혜의 출처를 모르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은혜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은혜의 가치가 다르다는 말이에요. 은혜의 출처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은혜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만, 은혜의 출처를 모르는 사람은 은혜의 영광을 자기 공로로 돌리거나, 썩어질 우상에게 헌납하고 맙니다. 얼핏 보기에는 같은 은혜처럼 보이지만 은혜의 영광을 돌리는 대상이 다른 거예요. 물론 은혜의 가치를 모르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물질 때문에 시름하던 차에 누군가의 손을 통해 거금이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때 은혜의 출처가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사람은 은혜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출처를 모르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가 인생을 잘못 산 것이 아니라고 자화자찬을 할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들이 믿는 신이 도움을 주셨다고 난리를 칠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니까요. 그러나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 은혜의 가치가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알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은혜를 알 수 있거든요. 모든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아니하든지 은혜의 모든 출처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출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출처를 모르면 더러운 우상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헌납해 버리고 말거든요. 하나님으로 받은 은혜를 가지고 마치 더러운 우상이 준 것처럼 말입니다. 이보다 가증한 죄악이 없어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악이지요.

 

구약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바알에게 바치고 감사했거든요.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가지고 바알을 섬겼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과 금을 가지고 바알이 준 것처럼 배은망덕한 삶을 살았던 거예요(호2:8). 은혜를 모르면 이렇게 더러운 우상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헌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도로 찾겠다고 말씀하시고, 다시 빼앗겠다고 경고하신 거예요(호2:9). 하나님이 얼마나 서운하시면 그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은혜의 영광을 자기 조상들에게 돌리고 맙니다. 물론 우상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가치를 헌납하는 것과, 자기 조상들에게 헌납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기 조상들에게 헌납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합당치 못한 거예요. 물론 자기 조상들도 자기 후손에게 은혜를 준 것도 사실이지요. 우리는 결코 조상들의 은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후손들이 조상들의 은덕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해야 합니다. 왜냐면 조상들을 통해 후손들이 받은 은혜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거든요.

 

이른바 조상들을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 역시 출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분들도 음으로나 양으로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후손들에게 물려준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모든 출처가 하나님께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비록 우리 조상들을 통해 물려받은 은혜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만일 그분들이 받은 은혜가 그분들이 믿었던 우상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절대 은혜의 출처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출처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은혜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은혜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수고와 공로의 산물이요, 우상들이 베푸는 무가치한 허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은혜의 가치가 보다 선명하고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2) 은혜를 고백해야 합니다(13절)

 

은혜를 누리는 것은 은혜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은혜의 가치를 인정함이요, 은혜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은혜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백되지 못한 은혜는 문제가 있습니다. 정박되어 있는 배는 배가 아니요, 고백되지 않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도 고백이 중요하고, 신앙도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은혜도 고백이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고백하고, 받을 은혜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고백받기를 즐거워하십니다.

 

은혜에 대한 최고의 보답은 고백입니다. 입술의 고백이든지, 삶의 고백이든지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한 확신은 고백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고백하지 않으면 전달이 안됩니다. 물론 사랑의 표현도 여러 가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한 증명은 고백입니다. 고백보다 확실한 증명은 없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에 대한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주신 은혜 감사하고, 주실 은혜도 감사하십시다. 은혜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13절은 은혜에 대한 고백입니다. 기자는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의 잔을 드는 것은 행위의 고백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입술의 고백입니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실 그는 상황이나 여건으로 볼 때 은혜로 여길만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큰 곤란을 당하였다고 고백합니다(10절). 그 곤란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십시오(3절).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간구했습니다(1절).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했더니 자기 영혼을 건져주셨다고 고백합니다(4절). 자기 영혼을 사망에서, 자기 눈을 눈물에서, 자기 발을 넘어짐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8절).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절). 한마디로 속상해서 내뱉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열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는 고로 말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한 것입니다(10절).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직접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가 곤란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5절에서 말하기를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오, 의로우신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곤란이나 위험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고백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여호와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요, 사나 죽으나 하나님과 함께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는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본 사람이요, 죽음의 사선을 넘어 본 사람입니다.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사람이지요. 인생의 막다른 절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12절).

 

(3)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14절)

 

인간이 감히 무엇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라는 단어 자체가 웃기지 않나요? 천하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감히 무엇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손에 들려진 재물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 가진 것은 먼지와 티끌에 불과할 뿐이지요. 결코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없는 거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인데 무엇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어요. 로마서11장36절을 보면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구약 미가 선지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미가서6:6-8절을 읽어보십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재물이 아니요, 제물도 아닙니다. 재물은 자기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이요, 제물은 종교적인 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물질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없는 거예요. 그나마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간절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보답할 수 있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보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믿음과 마음뿐이라는 말이에요.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뿐입니다. 미가서6장8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내게 있는 소유가 아니요, 나의 종교적인 열심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금년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금년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계수해 볼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어떤 것인가요? 아니 얼마나 될까요? 만일 누군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계수 할 수 있다면 참 연약한 믿음이요, 무지한 믿음이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솔직히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계수할 수 있을까요? 찬송가 404장의 가사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있을까요? 과연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계수할 수 있겠냐는 말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편으로 작은 정성을 드릴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드리는 헌물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셀 수 없는 은혜,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지만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냉랭하고 인색할 뿐이지요. 한마디로 우리의 믿음만큼 드릴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각자의 믿음의 그릇인 겁니다. 바라옵기는 이번 추수감사절을 통해 우리 믿음의 그릇을 키워보십시다.

 

사실 해마다 드리는 감사주일은 우리 믿음을 한 단계 점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믿음도 점프할 수 있는 계기가 있거든요. 어떤 이는 평생을 믿음의 답보상태로 지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떤 것을 계기로 자기 믿음을 점프하는 기회로 삼는 자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가난으로 인해서 자기 믿음을 점프하는 자도 있고, 어떤 이는 실패를 통해서 점프하는 사람도 있으며, 어떤 이는 질병으로 말미암아 자기 믿음을 점프하는 자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가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자기 믿음을 점핑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자도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요.

 

예전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부흥회를 연례행사처럼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흥회를 통해 자기 믿음을 점프하는 기회로 삼았지요. 혹은 해마다 드리는 절기를 통해 자기 믿음을 한 단계 점핑하는 계기로 삼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계기가 없으면 발전과 성장이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점프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영적 기회가 절기신앙입니다. 바라옵기는 이번 추수감사절을 통해 감사가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감사가 풍성해지고, 충만해지고, 성숙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감사입니다. 감사보다 은혜에 보답할 수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할수록 좋고, 할수록 풍성해집니다. 감사가 인색하면 불평이 커집니다. 감사와 불평은 시소게임과 마찬가지거든요. 감사가 올라가면 불평이 내려가고, 감사가 내려가면 불평이 올라갑니다. 이른바 감사가 풍년이 들면 불평이 흉년이 들고, 감사가 흉년이 들면 불평이 풍년이 드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것을 좋아하실는지 생각해 보세요.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의 고백처럼 감사도 해보고 불평도 해보지만 감사가 훨씬 더 좋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수시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감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는 우리 믿음의 척도요, 그릇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감사하고, 장차 하나님이 하실 일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는 감사치 못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에는 사람들이 감사치 않는다고 경고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감사를 자기 잣대로 판단하여 감사하려고 합니다. 감사할 일과 감사치 못할 일을 자기 관점으로 판단하여 결정한다는 거예요.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오직 모든 감사의 결정권자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전에는 감사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마귀의 사전에는 감사가 없지요. 우리는 감사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본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어떤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고백하는 이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탄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죄송하고 송구스런 마음으로 그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고백이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마음이지요. 믿음이 없으면 가질 수 없는 마음이에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과연 지금 우리 시대에 그런 마음을 갖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바라옵기는 시편 기자의 그 마음이 내 마음 되기를 사모합니다. 아니 우리 모두의 마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기자는 모든 백성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고백합니다(14절). 자신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겠다고 말입니다(14절). 물론 우리는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서원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116편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볼 때 그의 서원은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서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혹은 여호와 앞에서 평생을 살아가겠다는 서원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9절).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맹세였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겠다는 서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과 수많은 약속을 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혹은 이렇게 살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약속은 거의 지켜지지 않고 공수표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자기의 서원을 갚겠다고 공개석상에서 고백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최상의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존중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갚는 것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존중해 드리는 최상의 행위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드림보다 마음으로 다짐했던 것을 지켜드리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최고의 길이요, 최상의 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자는 고백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는 것입니다(17절). 그가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서원도 갚아야 하겠지만, 감사제사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서원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감사 제사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겠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제사를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기자는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17절). 제사는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물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시편50편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최고의 제사는 감사제사입니다. 감사제사는 은혜의 모든 영광을 우리 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지 마십시다. 은혜에 대한 최고의 반응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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