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굴의 기도(잠30:7-9)-2021.11.14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중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드립니다. 자기들의 필요를 구하는 식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구하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자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드린다는 말이지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기도를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알라딘의 램프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는지 모릅니다.
‘제자입니까’라는 책의 저자 후안 까를로스 목사님의 책에 있는 것처럼 우리들 기도의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에 쓸데없는 잡동사니 우편물에 불과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못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 기도는 자기혼자서 조잘거리는 푸념이나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지요. 하나님의 의중과는 상관없는 기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는 기도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주문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리는 기도는 가장 인격적인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을 합니다. 소통이 안되는 기도는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소통이 안되는 기도를 드리면서 응답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어린아이가 징징거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 사람의 믿음의 상태를 검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기도일 것입니다. 기도가 각 사람의 믿음을 증명하는 충분한 도구가 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성숙한 자는 성숙한 기도를 드립니다. 성숙한 기도는 화려한 문장이나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이른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는 순수하고 진실합니다. 성경을 보면 성숙한 자들은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기도를 성숙한 기도라고 부르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굴의 기도는 대표적으로 성숙한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고상한 기도요, 고급스러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케 하고 감동시킬만한 기도이지요. 이런 기도를 하나님은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아굴이 어떤 사람입니까? 아굴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은 정보가 없어서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잠언30장의 저자인 아굴은 야게의 아들이요, 이디엘과 우갈의 스승입니다(1절). 그는 자신의 무지함을 아는 겸손한 지혜자요(2-3절), 인간의 한계를 깨달은 자이며(4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5절). 무엇보다 그는 겸손과 진실함으로 기도하는 자입니다(7-9절).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은 기도가 좋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예쁜 사람은 기도가 예쁘다는 말이지요. 본문은 아굴의 기도입니다. 성경에 많은 기도문들이 있지만 아굴의 기도는 보기 드문 기도입니다. 어쩌면 신구약에 나오는 무수한 기도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기도일는지 모릅니다. 아굴의 기도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진실하고 겸손하며,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기도라는 말입니다. 그의 짧은 기도문 속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함축되어 있지요.
(1) 아굴의 기도
아굴은 두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죽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야 할 두 가지의 기도입니다. 하나는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정결케 해달라는 것이지요. 진실함을 위한 기도이지요. 물론 그 기도는 모든 믿는 자들의 기도일 것입니다. 믿는 자는 당연히 진실함을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대부분 진실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아니 믿음이 없을지라도 양심을 가진 자라면 그런 소원을 가질 테지요. 하물며 믿는 자라면 당연히 진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까요?
아굴은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굴의 그 기도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보편적인 사람들의 평범한 수준의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다른 한 가지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자신으로 하여금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말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의 두 문장 속에서도 가난하게 마옵소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요, 누구나 좋아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부하게도 말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8절상).
그 기도는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도는 아닙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이 하기 힘든 아주 특별한 내용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찔리게 합니다. 가난하게 말라는 기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부하게도 말라는 기도는 쉬운 기도가 아닙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자기 마음을 비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 기도는 중용을 지키게 해달라는 기도거든요. 그래서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사는 자들만 할 수 있는 기도예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라는 말이지요. 그 기도는 정말 고상한 기도요, 고급스러운 기도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그런 기도를 평생 드리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도 고백합니다. 자신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입니다(빌4:11). 이른바 자신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빌4:12). 그의 기도와 아굴의 기도는 맥이 같아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사는 자들만 할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에요. 물론 한순간은 자기도 그렇게 기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굴처럼 평생의 기도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굴의 기도가 돋보이는 것입니다. 아굴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차원이 다르거든요. 수준이 다르지요. 솔직히 우리 중에 누군가 이런 기도를 드려 보신 적 있으십니까? 진짜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의 잡동사니 우편물인 것이 맞을는지 모릅니다. 대부분 우리 기도는 우리 욕심을 채워달라는 생떼 같은 것이지요. 물론 가끔씩 우리도 욕심을 비우는 기도를 드릴 테지요. 나로 하여금 부하게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굴처럼 그런 기도를 평생 자기 소원으로 삼는 자가 얼마나 될까요? 단언컨대 요즘 같은 시대에는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제 주변에서는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한 두 번은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지요. 그러나 그 기도가 평생의 기도의 소원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드린 적이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부하게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들도 좀처럼 하기 어려운 기도라는 말이지요. 확언컨대 상당한 수준의 믿음을 가진 자들만 드릴 수 있는 기도요, 복음을 가진 자들만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아굴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요, 은혜를 맛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요,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지요. 성숙한 믿음이 없으면 그런 기도를 할 수 없거든요. 솔직히 지금 우리들을 보십시오. 믿음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의 여부와 상관없이 세상 것을 얼마나 즐거워하는지를 말입니다. 세상 것을 소유하는 데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말입니다. 그것도 많이 가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지요. 다들 부자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에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아굴 같은 기도가 나올 수 있을까요? 결코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굴은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정말 쉽지 않은 기도요, 우리 상식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기도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부자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자기 능력이 안돼서 자포 자기하는 마음으로 부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마시고 자신을 돌아보면 됩니다. 정말 아굴의 기도를 보면서 내 기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기도는 어린아이 같은 기도요, 어리석은 기도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굴의 기도는 정말 성숙한 기도요, 고급스러운 기도이지요.
그러면 아굴은 어떻게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아굴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한 삶을 사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만족하면 세상 것은 별 관심이 없어지지요. 이른바 세상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는 말이에요. 세상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육체를 입은 우리에게 주신 필요하고 충분한 한시적 선물일 뿐이지요. 다 없어질 것들이에요. 지금 내게 있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만큼 주신 것이고, 충분하게 주신 것들이에요. 물론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만족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아굴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 아굴의 기도는 그냥 종교적 기도의 어떤 샘플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주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이른바 주의 종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더라는 말이에요. 그들을 통해 무소유까지는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필요한 것만큼만 구하는 자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마태복음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처럼 말입니다.
부자청년이 주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자 청년은 당당하게 자신은 그런 모든 계명들을 다 지키었다고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종교적인 의무를 다했다는 것이지요.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었다고 고백할 정도라면 불의한 재물이 아니라는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그가 쌓은 재물이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청결한 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최소한 그의 고백이 진실하다면 말입니다. 그는 정직한 부자였던 셈이지요. 아무도 그런 재물에 대해 책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에 대한 만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거예요. 오히려 부에 대한 강한 집착을 드러내지요. 그것이 탐심이에요. 그때 예수님이 부자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누어 주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이 많은 재물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결국 청년은 재물로 인해 주님 곁을 떠나고 맙니다. 물질 때문에 영생을 포기한 것이지요. 그는 재물과 영생 사이에서 미련 없이 영생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세상을 주관하는 신과 같은 거예요.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부자청년이 종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아는 종교인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종교인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청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던 거지요. 복음이 없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는 것이 복음이에요. 복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려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부자 청년은 자기 앞에 있는 영생을 물질 때문에 거절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을 선물로 얻을 수 있었으련만 그는 복된 기회를 차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물질이 주는 파워가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아무도 물질 앞에 자유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재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 영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물질에 매여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영혼들도 많고, 물질을 쫓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도 많고, 물질을 지키려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한 손에는 하나님을, 한손에는 물질을 잡고 갈팡질팡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조건 가난하게 사는 자가 믿음이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어서 부자 된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무엇보다 믿음 좋은 부자들도 많습니다. 믿는 자가 부자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다만 부자된 자가 복되게 살아야 복된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되게 사용해야 복된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 자기 육체를 위해 물질을 허비할 바에는 차라리 가난한 편이 낫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부요를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부요한 것은 아닙니다. 부요할 사람에게만 부요를 허락하십니다. 미안하지만 분명히 부요해서는 안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부요함을 좇는 것이 탐심입니다. 부요해서는 안될 사람이 부요함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부요함이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요함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의 부요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부요함도 믿음을 앞서면 안됩니다. 아니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안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영혼의 독이 되고, 악이 됩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의 특징은 물질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부요할지라도 그들은 물질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습니다. 혹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굴은 자기가 부요해서 하나님을 떠날까 두렵다는 것은 자기의 믿음이 연약하다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재화보다 하나님이 우선이라는 뜻이요, 하나님이 존귀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물질로부터 자기 영혼이 속박되지 않겠다는 자유선언일 것입니다. 아굴의 믿음은 하나님과 물질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믿음은 아닙니다.
비록 그가 부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세상에 하나님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주님보다 귀하지 않다는 고백이라는 말이지요. 찬송가 102장처럼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고백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갖고 있지요. 비록 그것이 재물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나 특기, 취향에 따라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멀리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굴의 기도는 자기를 유혹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기도였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자기 영혼을 지키는 가장 지혜로운 기도였던 셈이지요. 로마서8장6-7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육신의 것과 영의 것은 동시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육신이 부요해지면 영적으로 가난해집니다. 그러나 육신이 가난해지면 영적으로는 부요해지지요. 그런 차원에서 아굴은 자기로 하여금 부하게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탈선할 수 있는 것은 미리서 차단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굴의 기도가 고상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2) 아굴의 기도가 고상한 이유
아굴은 영적원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분명히 그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된다는 원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기도를 평생의 기도로 드린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주어지는 욕심과 정욕에 매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심이 충만합니다. 한마디로 부자 되기를 원하고 더 부자 되기를 원하지요. 그리고 대부분 부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부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부요함을 싫어하는 자를 만나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아니 부하게 마옵소서라는 아굴같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평생의 기도제목으로 말입니다. 물론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굴의 기도가 얼마나 고상하고 고급스러운지 모릅니다. 아굴이 그렇게 기도한 것은 무조건 가난이 미덕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한 이유는 19절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고 할까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부요해지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교만할까봐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인간에게 부요해지면 나타나는 증상이 있지요.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인간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증상이 있어요. 부요해지면 은근히 어깨가 올라가고 목에 힘이 들어가지요. 자기자랑에 열을 내고, 없는 사람을 은근히 디스하기도 합니다. 가난할 때는 하나님만 찾고 하나님 안에서 살던 자가 어느 날 부요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주변을 서성거립니다. 마치 지나가는 아저씨를 쳐다보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야에서 점점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곁을 떠나버리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가난할 때는 몰랐는데 부요해짐으로 자기 영혼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부요는 자기 영혼을 팔아버린 강도인 것이지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가난함이 유익인 것이지요. 우리말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만하고 방자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요. 누구에게나 올챙이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는 개구리로 태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연약하면 그런 현상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종들도 많이 있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아굴은 그런 면에서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도 충분히 그런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부하게 되면 자신도 얼마든지 그런 죄악에 빠질 수 있다는 차원에서 자기 방어적인 기도를 드린 것이지요. 만일 부요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낫겠습니까? 가난해도 하나님 안에서 사는 자가 낫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면 달라지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거예요. 아굴처럼 말입니다. 평생의 기도제목이 된 거예요.
(3) 기도의 수준이 믿음의 수준이다
각 사람의 믿음의 수준은 기도의 수준과 일치합니다. 각 사람의 기도의 수준이 믿음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기도를 우리의 수준에서 판단하면 안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만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기도도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린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은 아굴의 기도가 어떤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굴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한 기도요, 성숙한 기도였지요.
여러분은 아굴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자기 욕심을 위한 어떤 조건도 없이 자기를 내려놓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 부요함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기만의 타협을 시도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를 부요케 하여 주옵소서, 그 부요함으로 많은 사람을 돕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나이다’라고 말입니다. 한쪽으로는 부요의 손을 내밀면서 한쪽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겠다는 타협을 시도할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대부분 그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물론 그런 기도가 잘못된 기도라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기도요, 때로는 필요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진짜 내가 부요하지 못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할지라도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로 하여금 부요케 하지 말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것도 평생의 기도제목으로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쓸 수 있는 물질이나 재물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시는 물질이나 재물이 한정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각 사람마다 주시는 분복이 있다는 말이지요. 물질도 내게 주신 분복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을 만큼만 있는 것도 부요함입니다. 아무리 큰 창고를 쌓아서 물질을 쌓아놓은들 내가 누리지 못하면 나의 분복은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뜻은 나에게 주시는 분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분복을 쌓아두고 자손들이 누리는 것은 미안하지만 내게 주신 분복은 아니에요. 만일 우리 자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더러운 우상이나 죄짓는 것에 사용했다면 결국 그 물질은 분복이 아니라 더러운 죄악의 물질이 되고 만 것이지요. 더 이상 그의 분복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분복은 각자를 통한 하나님의 분깃임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치 있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굴은 자기에게 필요한 양식만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8절하). 필요 그 이상의 것을 구하는 것은 탐심이요,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탐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십니까?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골3:5). 탐심은 필요 그 이상의 것을 가지려는 욕망입니다. 한마디로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나 무모한 집착을 말하는 거예요. 극도의 이기주의지요. 그래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른바 탐심이 우상숭배가 되는 것은 자기 마음에 그리스도 대신 자기를 대체시키려는 것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모셔야 할 자리에 자신을 대체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우상숭배라는 거예요.
분명히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을 소유하는 것이나 간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여 소유하는 것이나 간구하는 것은 탐심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는 탐심이 다 있어요. 정도의 문제일 뿐이지요. 다만 하나님을 잊어버릴만한 탐심, 혹은 하나님을 서운하게 할 정도의 탐심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른다 하거나, 하나님이 누구냐고 말하는 것은 가장 저질스러운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릴만한 것에 집착을 합니다. 없어도 되는 것들에 지나친 집착을 부리지요.
사람이 소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아굴의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조건 부요함을 거절해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부요함을 거절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척도라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아굴의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장애가 되는 그 어떤 것도 단호히 거절한다는 자기신앙의 고백입니다. 세상에 좋아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고, 하나님보다 좋을 수 없다는 다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굴의 기도가 돋보이는 것입니다. 아굴의 기도가 믿음의 기도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아굴의 기도처럼 고상하고 격조 높은 기도, 아름답고 영적 수준이 높은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수준이 곧 믿음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통해 경고하시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5장29-30절을 보면,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영적인 것을 위해 육신의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것을 위해 육신의 것을 도모하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굴의 기도를 대입해 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교만할 바에는 차라리 가난을 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잃는다면 육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것이요, 차라리 육신의 것을 잃고서라도 영적인 것을 얻는 것이 백번 천번 낫다는 말입니다.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부자보다 천국의 가난한 자가 훨씬 더 부자요,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위해 세상을 내려놓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아굴은 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우리는 가난할지라도 주안에서 가난해야 하고, 부할지라도 주안에서 부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안에서 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행하지 않는 것은 다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주님 없는 가난함은 최고로 불쌍한 자요, 주님 없는 부요함도 최고로 불쌍한 자입니다. 하지만 주안에서 가난함이나 부요함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최고의 은혜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모두가 다 가난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다 부요해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나의 육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합당한 기도여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내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나와 함께 천국을 이루고 계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요, 주님의 능력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그런 기도를 드리려면 가장 먼저 내안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른바 주님이 나의 주가 되고, 왕이 되고, 나의 전부이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드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자기 욕심이 없는 기도요,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굴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내 속에 세상 것을 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내 영혼을 적시는 기도, 내 육신을 만족시키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기도자가 되십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