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을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시편60:1-12)-2022.2.13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지쳐있습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바이러스와 3년째 전쟁을 치르고 있지요. 우리나라만 해도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지금 5만 명을 훨씬 넘어버렸습니다. 심각한 것은 아직도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제는 예전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경험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평범한 일상들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하다못해 어디를 출입해도 반드시 백신주사를 맞았는지 여부와 출입을 체크해야 합니다. 때로는 너무나 불편하고 불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비대면으로 이루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제는 체질이 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삶이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지쳐있고, 경제적으로도, 육신적으로도 지쳐있습니다. 한마디로 심신이 지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회복이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특별히 성도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이 회복되고, 믿음이 회복되며, 가정이 회복되고, 삶이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회복이 내가 발버둥을 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참된 회복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으로만 되어지는 것이지요. 이른바 우리 인간을 회복시키는 주체가 인생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우리 주안에서 회복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통 우리가 회복을 말할 때 육체적인 회복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영적회복이 먼저입니다. 영적 회복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옥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회복되면 육신의 회복은 당연히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탄식하는 영혼들이 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불안한 심령을 가진 자가 평안한 심령을 갖게 되는 것이요, 교만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입만 열면 거짓을 말하던 사람이 정직한 영혼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영혼이 회복되면 육신은 자동적으로 회복이 되는 거예요. 이른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먼저 우리는 영적인 회복을 간구해야 하는 거예요.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앞에 붙어있는 부제로 볼 때, 본 시편은 사무엘하8장을 근거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사무엘하8장의 내용은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한 기록들입니다. 알다시피 다윗은 전쟁의 영웅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주변 나라들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기게 하신 것이지요. 이유는 다윗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했고, 하나님은 그를 형통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며 하나님이 주신 지경을 넓혀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크게 확대시켜 나간 것이지요.
사무엘하 8장에 보면, 다윗은 예루살렘 서쪽의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받았고, 또 사해 동쪽의 모압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까지 바친 것입니다(삼하8:2). 또한 요단 동편의 암몬과 아말렉을 정복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멀리까지 나아가 소바와 다메섹 아람까지 굴복시켰습니다. 한마디로 다윗은 블레셋과 모압과 아람과 하맛과 에돔을 차례로 정복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주변의 대적관계에 있던 모든 열방들을 정복한 것이지요. 남쪽으로는 애굽 시내에서 북쪽으로는 유브라데 서편까지 차지한 거예요.
그런데 사무엘하8장9-12절의 말씀을 근가로 본 시편을 추측해보면, 다윗이 아람의 동맹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나님께 노략물들은 드립니다. 왜냐면 이것이 하나님이 개입하신 헤렘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다윗의 군대는 에돔 족속과 염곡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유는 에돔 족속이 다윗이 아람 동맹군들과 싸우는 동안 이스라엘 남부가 무방비 상태인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남부지역을 약탈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식을 들은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사해의 염곡으로 내려가서 그들을 궤멸시킨 것이지요.
하지만 본 시편의 분위기로 볼 때 에돔과의 전쟁에서 초장에는 밀렸던 것 같습니다. 초장에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본 시편은 매우 우울했던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흩으셨고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1절). 그래서 자기들이 속한 땅이 진동했으며 갈라져서 틈이 생겼다는 것이지요(2절).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 백성들이 비척거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3절). 아마도 에돔과의 전쟁이 초반에 쉽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은 에돔과의 전쟁에 대한 아픈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다윗의 군대는 에돔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에돔 사람을 일만팔천명을 쳐 죽이고 명예를 얻은 것입니다(삼하8:13).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다윗의 군대를 주춤하게 했던 전쟁이었던 것이지요. 그 전쟁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움을 더욱 간절하게 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윗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비온 뒤에 땅이 굳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해지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지요. 하나님은 인생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던 우리 인생에 브레이크를 밟아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믿는 자라고 해서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도 실패합니다. 믿는 자도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 앞에도 넘어야 할 장벽들이 많이 있지요. 문제는 그런 문제 앞에서 믿는 자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한마디로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될 수도 있고, 비록 큰 산이라 할지라도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시편은 역경의 순간에 신앙인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른바 다윗의 자세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반추해 보라는 것이지요.
다윗은 당시 상심했던 마음을 리얼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1-3절). 당시 그는 마음이 착잡하고, 생각이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패배의 원인을 하나님 앞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패배원인을 발견한 거예요. 무엇보다 문제 앞에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승리와 패배의 모든 원인을 하나님으로부터 찾는 영적 자세가 필요해요. 그래야 실마리가 보이거든요. 사실 믿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모든 일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에요.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실패는 성공을 가져오는 과정이요, 승리를 이루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전쟁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본 것입니다. 승리나 패배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한 것이지요. 대단한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강점이에요. 대부분의 성도들이 승리나 실패의 주도권이 자신들에게 있는 줄 알아요. 그러니까 승리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실패해도 하나님 앞에서 답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승리하면 여러 가지 자신들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실패하면 다양한 변명거리를 내어놓지요. 그러나 다윗은 실패한 후에도 하나님 앞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1,2,3,10절)라는 고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패배의 원인도 주안에 답이 있다는 거예요.
물론 패배한 그들이 하나님께 어떤 죄악을 범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패배의 원인을 하나님 안에서 찾으려는 발상은 정말 잘한 것입니다. 실패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수확이지요. 본 시편은 우리 앞에 부닥친 역경의 순간에 성도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게는 두 종류로 나타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은 역경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그는 전천후 신앙인이었기 때문이지요.
더 이상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들을 주의 백성(3절), 주를 경외하는 자(4절), 주의 사랑하시는 자(5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문제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회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의 공동체적인 회복을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다윗은 그들의 패배원인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분노하사 자기 백성들을 치셨고, 흩으셨다는 것이지요. 마치 하나님이 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어 비척거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자신들을 회복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1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실패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의 이름에 합당한 승리를 원하시지요. 그렇다면 그들을 실패케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 이유없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치시고 때리고 흩으시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들이 패한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서 회개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회복해 주실 것이지요.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패배한 원인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파괴하는 무서운 독이거든요.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지요.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어놓는 거예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아버리는 장벽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과 멀어지면 하나님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릴 수 있는 가장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토설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회개하여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실패의 현장에서 회복하여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패배의 현장에서 회복하여 승리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진정한 회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회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너진 신앙을 보수하는 것입니다.
(1) 보수하는 것입니다(1-3절)
회복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본 시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너진 신앙을 보수하는 것입니다. 보수는 틀어졌거나 망가졌거나 깨졌거나 부셔졌거나 정상이 아닌 상태를 원 상태로 바로 잡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지요.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길을 마련하신 거예요. 그래서 진정한 회복은 무너진 신앙을 개조하는 것이요, 보수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성공도 원인이 있고, 실패도 원인이 있습니다. 실패도 원인을 분석해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이 에돔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은 분명히 원인이 있다는 거예요. 이른바 자기 백성들의 흩어지고 땅이 갈라지고, 백성들이 비틀거린 것은 분명히 원인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증상은 다양하지만 원인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죄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아주 다양한 반응이 나타난 것이지요.
한마디로 영육 간에 그들의 마음이 붕괴되고, 주변 환경이나 여건이 악화되며, 정신까지 혼미한 상태가 되어버린 상황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르지요. 그러나 다윗은 자기 백성들의 그런 상황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던 다윗의 군대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문제를 다른 것으로부터 찾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안에 답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다윗의 믿음의 강점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을 가진 자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주도하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실패 원인을 다른 것에서 찾으려 했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윗의 강점은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승승장구하던 다윗에게 브레이크를 한번 밟아서 그를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고도의 전략이 숨겨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그런 하나님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믿음의 사람에게 필요한 영분별입니다. 영분별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알지 못하면서 영분별 운운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영분별 운운하면서 하나님의 의중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이상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 자기들의 기분이나 감정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그런 자들은 성경에도 없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성경과 상관없는 행동들을 너무 당당하게 저지르지요.
다윗은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의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고, 싸울만한 의지도 없으며, 주변 상황마저 그들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그런 모든 것들의 주도권이 주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버리셨고, 흩으셨으며, 분노하셨다고 고백합니다(1절). 또한 2절에서 주께서 땅을 진동케 하셨고, 갈라지게 하셨으며, 요동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주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이른바 포도주를 마시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 모든 배후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깨달은 것이지요. 모든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은 거예요.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지금 우리를 회복시켜달라고 말입니다(1절하). 이른바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모으시고, 주변 여건으로부터 마음을 상심치 말게 하시며, 그들의 무너진 정신력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지요(1-3절). 결론적으로 자기 백성들의 무너진 것을 보수해 달라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회복입니다. 또한 다윗이 간구하는 또 하나의 회복은 기를 달게 해달라는 것입니다(4절).
(2) 기를 달게 하는 것입니다(4절)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달게 하십니다. 기가 무엇입니까? 아마도 깃발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기는 특정단체나 소속을 상징하기 위한 것입니다. 깃발은 소속이나 정체성, 대표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공기관에도 자기들을 상징하는 기가 있고, 스포츠 팀을 보아도 기가 있으며, 어느 단체를 보아도 자기들을 상징하는 깃발이 있습니다. 또한 각 나라를 상징하는 기도 있지요. 우리나라는 태극기, 미국은 성조기, 일본은 일장기, 북한은 인공기, 중국은 오성홍기입니다.
기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 높이 달아 놓습니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가이드가 깃발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면 기만 보고 따라 다니면 큰 문제없어요. 강화도 역사박물관에 가면, 2층 올라가는 통로에 큰 기가 하나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수자기”입니다. 한문으로“수”자가 선명하게 쓰여진 깃발이지요. 수자기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꽂는 깃발입니다. 거기 있는 깃발은 어재연 장군(1823-1871)의 수자기입니다. 어재연 장군은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침략한 미군이 광성보를 점령하고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가 2007년에 우리나라로 넘겨준 거예요.
기는 전쟁에서 승리를 상징합니다. 전쟁에서 기를 빼앗기면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군인들은 자기들의 깃발을 보면서 용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이기면 가장 먼저 승리의 깃발을 꽂게 되지요. 1950년 한국전쟁 때 9월15일 맥아더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고 가장 먼저 중앙청에 기를 꽂았습니다. 국군 제17연대와 해병대 용사들이 가장 먼저 중앙청으로 돌입하여 태극기를 꽂은 거예요. 이것이 서울 수복작전이지요. 그만큼 기가 상징하는 의미가 큰 것입니다.
전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기마전을 자주했습니다. 기마전할 때 기수가 기를 빼앗기면 심판은 패배를 선언했지요. 그래서 기를 가장 높은 곳에 다는 것입니다. 기수도 가장 날렵하고 강한 사람을 세웠지요. 그만큼 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는 소속감과 일체감을 줍니다. 기는 절대 적에게 빼앗기면 안됩니다. 기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기가 나옵니다. 출애굽기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치릅니다. 그때 모세는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군대를 소집하여 전쟁을 치르지요.
그런데 모세가 피곤하여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희한한 전쟁이었지요. 그런데 한참동안 밀고 당기는 전쟁을 한 거예요. 모세도 사람인지라 모세의 손이 올라가기도 하고, 피곤하면 내려오기도 한 것이지요. 그때 모세의 양손을 받쳐주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론과 훌이지요. 그들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받쳐주어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지요. 그때 모세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여호와께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출17:15)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승리의 깃발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깃발이십니다. 아니 우리의 깃발이십니다. 우리는 전쟁의 능하신 하나님의 군사요, 교회는 그분의 깃발아래 모여진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깃발아래 모여야 합니다. 본문 4절에서 우리 주께서 우리의 깃발이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세워진 교회위에 당신의 깃발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영적을 치를지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전쟁의 목표는 오직 ‘진리를 위하여’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절대 주님이 맡겨놓으신 승리의 깃발을 원수마귀에게 빼앗기면 안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주님의 기가 없는 교회가 많습니다. 주님의 깃발이 없는 목회자도 많고, 성도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승리의 깃발을 높이 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믿는 자의 자존심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존감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위하여서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높여주시는 주님으로부터의 회복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높이사 자존감을 회복해주시기 원하십니다. 또한 진정한 회복은 승리케 하시는 것입니다(11-12절).
(3) 승리케 하시는 것입니다(11-12절)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회복은 승리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회복입니다. 물론 전쟁에서만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로 하여금 이기고 승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패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반드시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하시지요. 그러므로 성도는 승리를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회복입니다. 때문에 믿는 자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최후승리를 얻기까지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대적을 치게 하심은 물론이거니와 12절에서 대적을 발로 밟아 버리십니다. 대적들을 발로 밟아버리심은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믿는 자의 싸움은 어떤 싸움일까요? 에베소서6장12절을 보면, 믿는 자의 싸움의 대상이 나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원수마귀와의 싸움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믿는 성도들이 싸움의 대상을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별 의미 없는 일에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진짜 싸워야 할 전쟁에서 패하고 맙니다.
성도는 영적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원수마귀 악한 것들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패하면 마귀가 춤을 춥니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영적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성도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도의 원수가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인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육신의 원수는 사랑하고 용서할 대상이지만, 영적인 원수는 반드시 박멸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케 하십니다. 다윗은 본문 9절에서 견고한 진을 치고 있는 에돔의 진영으로 누가 자기를 인도할꼬(9절)라는 독백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시인하는 고백입니다.
“나의 힘이 되시는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시편18편1절의 고백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한마디로 다윗으로 하여금 에돔으로 인도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견고한 에돔 진영이라 할지라도 자기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들어가실 분은 만군의 하나님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군대가 에돔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사무엘하8장13절과14절을 보면,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사람 일만 팔천명을 쳐 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한마디로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에돔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60편9절의 고백은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에돔으로 인도하여 승리케 하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에돔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다윗의 능력이 아니라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삶속에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깨어지고 부셔질 수 있습니다. 절대 넘어질 것 같지 않던 엘리야도 한때 낙심과 실망에 좌절에 빠진 적이 있었지요. 불과 며칠 전 갈멜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엘리야도 그랬지요. 당시 엘리야는 죽음을 불사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낙심에 빠졌어요. 이것이 인간이에요. 인간은 이처럼 약한 존재에요.
그러나 그에게 새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북돋아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의 사명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해요. 실패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실패한 그 현장에서 일어서는 것은 중요해요. 더욱 확대시켜 말씀드리면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죄를 짓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나 환란이 닥쳐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새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붙드시고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무너진 삶의 현장에서 나의 손을 붙드시고 일으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약한 나로 하여금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삶의 무게 앞에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승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복은 다윗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특별히 모든 성도들에게 더욱 필요합니다. 반드시 우리는 주안에서 참된 회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눈동자처럼 살피시고 감찰하십니다. 나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새 힘으로 승리하기를 소원하십니다. 절대 세상 것으로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승부하여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