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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4-21)-2022.6.19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2.06.18|조회수244 목록 댓글 0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4-21)-2022.6.19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있고, 있으나마나 한 사람도 있으며, 차라리 있어서는 안 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 기준은 각 사람이 자기가 처한 곳에서 미치는 존재감 혹은 영향력입니다. 각 사람이 미치는 영향력에 따라 존재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지요. 영향력은 사람이나 환경에 미치는 절대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이른바 영향력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나를 심는 겁니다. 그런데 영향력은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나 파워가 대단합니다. 사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나 영향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하며 살아가지요. 그것은 식물이나 동물도 마찬가지고 사물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영향력에도 선한 영향력이 있고, 악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악한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 지역이나 사회 어디서든지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이에요. 심지어 하나님께도 선한 영향력을 끼쳐 드려야 하고,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에나 일에나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야 하거든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만 가지고 살지 말고,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냐면 누군가는 나의 한 마디 말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기도 하고, 큰 위로를 받기도 하거든요. 혹은 나의 작은 행동 하나에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하지요. 심지어 나의 언행심사로 인해 다른 영혼을 죽이기도 하고, 생명을 구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영향력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은 환경을 변화시키고 분위기를 살려줍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줍니다. 아픔을 싸매주고, 다리를 놓아주며, 마음을 보듬어 줍니다. 상대를 먼저 배려해주고 입장을 이해해줍니다. 때문에 성도된 우리는 지금도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언행심사 무엇에서든지 삼가 조심하고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매사에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며 살아가지요.

 

 그러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완전히 선한 영향력도 없고 악한 영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 비중이 더 높을까요? 물론 각자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선한 영향력이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악한 영향력이 크게 보일 것이지만 대부분의 양심 있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영향력은 선한 영향력이 훨씬 더 크게 보일 것입니다. 각자 자기들이 쓰고 있는 안경을 통해 믿는 자들을 바라보겠지요.

 

그래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가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폄하하는 세력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영향력을 마치 악한 영향력처럼 둔갑시키는 안티세력들이 너무 많아요. 사단의 간사한 계략을 받는 세력들이지요. 그래서 실제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악할수록 더 극심하지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언론이나 메스컴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비리를 자기들의 관점으로 파헤치고 보도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런 것처럼 확대시킵니다. 참으로 속상하고 가슴 아픈 적이 많습니다. 물론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하지요. 그들은 소수의 잘못된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비리나 잘못을 마치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처럼 확대시켜 버리거든요.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런 것처럼 호도시켜 버리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집단이기주의 병폐에요. 그들은 아예 결론을 내려놓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숲을 판단하면 안됩니다. 한쪽만 보고 반대편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공정성을 헤치는 지능적 범죄입니다. 물론 우리 믿는 자들이 우리를 돌아보고 스스로의 자정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근신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다만 가슴 아픈 것은 세상이 우리를 바라보는 기준과 평가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자기들의 잣대로 우리를 평가하려 하거든요.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인들은 훨씬 더 성숙하고 고상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른바 착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다는 말이지요.

 

사실 오늘날 소수의 기독교 안티세력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뭇매를 맞고 있지만 절대 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못된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돕고 섬기는 일에 훨씬 더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지요.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선행을 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흰색 바탕에 검은 점 하나는 눈에 훨씬 더 잘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 하옵는 것은 세상이 믿는 자들을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보아주기 때문에 작은 흠이나 점이나 티가 더 잘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면, 그만큼 그들이 우리를 높은 수준의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로 취급을 해준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작은 실수마저도 용납해주지 않는 것이지요. 그만큼 기대수치가 높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기대치에 실망시키지 말고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소리를 다 들어주라는 말도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들의 소리를 다 들어 준다할지라도 그들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단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이 기대치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세상이 요구하는 수준의 양심이나 도덕률을 가지고 사는 것과 믿음으로 사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리 세상이 원하는 높은 수준의 성인군자 같은 삶을 살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들의 눈높이는 100% 충족시키지 못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을 울리고 깨우쳐주는 자명종이 될 것입니다. 당장은 자기들이 요구하는 기대치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만지고 만져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실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요. 그래서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의 사회적인 기여도를 조사한 통계가 있었습니다. 좋은 종교 좋은 사회라는 도서에 의하면 종교인들은 헌혈, 각막, 골수, 장기기증, 호스피스 봉사 등에도 높은 참여도를 보였습니다. 그중에서 헌혈했던 실적을 비교한 결과 기독교가 83.4%, 천주교가 10.0%, 불교가 0.9%를 차지했다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 따르면, 장기기증등록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무려80%, 불교도가 11%, 천주교도가 9%였답니다. 물론 이런 수치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만 보아도 기독교의 대사회적인 기여도가 월등히 더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통계와는 달리 영향력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통계가 아니기에 수치만 가지고 절대화시키기에는 무리한 측면이 있지요. 그러나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속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보다는 더 높은 수준으로 선한 영향력을 끌어 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영향력으로는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없거든요.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지 못한다면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의도적으로 그 수치를 조작하거나 끌어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교회와 성도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밝고 건강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까지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은 분명합니다. 개인적인 변화는 물론이거니와 가정을 변화시켰고 사회를 변화시켰으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쳐왔지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기독교의 짧은 역사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가장 많이 가장 크게 받은 나라입니다. 기독교 없이 수 천 년의 세월을 지내온 것보다 기독교가 들어와서 미친 백여 년의 역사는 비교도 안되지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종교 등 다방면에서 말입니다.

 

기독교는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며, 낙후된 백성들의 정신혁명과 의식구조를 선도하고 개혁했습니다. 기독교가 끼친 선한 영향력은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지금 우리가 이 정도의 경제적인 부와 평화를 누리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선한 영향력 때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양심이 있다면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돌이킬 수 없는 악한 영향력 때문에 모든 인류가 죽음을 맛보았다면, 제2의 아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 때문에 모든 인류가 생명을 얻게 되는 길이 마련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있는 곳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때와 장소와 형편에 상관없이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에스더는 페르시아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사도 바울의 영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뼈대를 만들고 교리를 체계화시킨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선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기독교에 악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지요. 그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선한 영향력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역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빼놓고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 앞에 당당히 밝힙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입니다(16절).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정상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복음으로 낳은 영적 아비입니다. 그는 복음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으로 양육했습니다.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이 없는 자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자기를 자랑함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본문 16절의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진정한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의 의도는 고린도전서11장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말이에요.

 

바울은 예수를 본받은 사람입니다. 아니 예수님만 본받은 사람이지요.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알기로 작정한 사람이었거든요. 앉으나 서나 예수, 사나 죽으나 예수였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예수가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 안에는 오직 예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러므로 당당하게 자기 안에 있는 예수만 증거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그러기에 확신을 가지고 외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입니다. 결국 자기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말이에요.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셨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은 어디서 나올까요? 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명예나 학벌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내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요. 내안에 거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풍성해질 때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입니다. 감히 누가 본문의 바울처럼 우리 가운데 누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요? 혹시라도 나를 본받을까봐 두렵지 않을까요? 저는 이 말씀 앞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말이 본이 되게 하라

 

 그리스도인은 가장 먼저 말에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이 말입니다. 종교개혁자 위클리프는 ‘혀는 뼈가 없지만 뼈를 부숴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말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지요. 한마디의 말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하고 살기도 합니다. 말에는 상상할 수 없는 영향력이 있지요.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이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은 독약이 되기도 하고, 양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무서운 말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6.25때 피난 가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름대로 한 마디씩 하고 떠나더랍니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죽더라도 피난 가다가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피난 가서 꼭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죽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칼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말은 세상 어떤 것보다 무섭습니다. 그래서 말에 관한 말들도 많고, 책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말에도 씨가 있다’, ‘말에도 귀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도 잠언서18장21절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말을 잘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말만 잘해도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죄는 주로 말을 통해 짓는 죄일 것입니다. 말로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줍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래서 말만 잘해도 받은 은혜를 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말로 받은 은혜를 소멸시켜 버립니다. 정말 어렵게 받은 은혜를 한순간의 말로 다 까먹어 버리지요. 그래서 성도는 말을 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입술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이에요.

 

 무엇보다 성도가 사용하는 말은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선한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무엇보다 진실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말이 정직해야 해요. 일구이언하지 않고 책임질 수 있는 말만 사용해야 합니다. 말에 신뢰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거든요. 그래서 말이 신뢰를 잃으면 만사를 다 잃어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중에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거든요.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콩으로 메주를 쓴다 해도 믿지를 못하지요. 그만큼 말은 중요한 거예요. 말에는 자기 인격이 담겨 있거든요.

 

 그리스도인의 말은 일관성이 있어야 해요. 백번을 말해도 같아야하지요. 그런 말은 파워가 있어요. 진실의 힘이지요. 진실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줍니다. 권세가 있어요. 선한 영향력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는 말에 정직해야 합니다. 죽이는 언어가 아니라 살리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말이 살리는 말은 아닙니다. 죽이는 말도 있고, 살리는 말도 있지요. 성도는 반드시 살리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살리는 언어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생산적입니다. 살리는 언어는 생명언어예요. 생명언어는 예수님이 쓰시는 언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언어는 믿음의 언어요, 생명의 언어요, 영향력이 있는 막강한 언어에요.

 

 오늘날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존귀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언어는 세상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을 살리는 언어요, 고치는 언어요, 축복하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언어는 세상언어와 크게 구분이 안됩니다. 세상이 죽겠다고 할 때 우리도 덩달아서 죽겠다고 탄식합니다. 세상이 안된다고 불평할 때 우리도 덩달아서 불평합니다. 세상이 저주할 때 우리도 덩달아서 저주합니다. 구분이 안돼요.

 

그래도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믿는 자들에게 나름대로 신뢰를 보내었지요. 최소한 믿는 자들은 자기들처럼 거짓말을 안하는 줄 알았지요.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보다 나은 것이 없대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때문에 그들이 실망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그들의 눈에 비친 양치기 소년처럼 되어버리고 만 거예요.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우리를 예전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같은 수준으로 여겨주지 않는 거예요. 오히려 그들은 우리 더러 예수쟁이들은 입만 달고 다닌다고 비난합니다.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언행심사가 일치하지 않다는 거예요. 참으로 비참한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기독교인들이 말과 행실이 다를지 모릅니다. 사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거짓말을 너무 쉽게 너무 자연스럽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마시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공수표를 너무 쉽게 남발합니다. 심지어 공갈과 사기도 칩니다. 불신자들이 우리를 보고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무슨 영향을 받겠습니까? 결코 자신들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신뢰를 잃어버린 말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직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뱉은 말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베드로전서4장11절의 말씀처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말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도는 항상 무슨 말을 하든지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며 영양가 없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삼고초려라는 말을 염두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성도들이 상처를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무의미하게 내뱉는 말 때문입니다. 물론 불신자들이 믿는 자들을 불신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말 때문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일이 본이 되게 하라

 

 그리고 일에도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이든지 성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면 안됩니다.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항상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에베소서6장7절은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 하나님이 감독관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불신 영혼들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는 우리가 어떻게 일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으로 우리를 평가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평가하는 것이지요. 

 

사실 그들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일하는 현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일하는가를 지켜 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하는 현장이 선교의 현장이 되게 하고, 예배의 현장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연중에 우리는 일하는 현장과 예배의 현장을 분리하려고 하지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를 가지고 세상이라는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배의 현장이 삶의 현장이 되며, 삶의 현장이 예배의 현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도들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순서대로 드려지는 예배만 예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외에는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되는 줄로 압니다. 물론 말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지 않을지라도 마치 그런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에요. 이처럼 이원론적인 믿음생활을 하기 때문에 위선적으로 보여 지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는 천사 같은데, 예배외의 시간은 불신자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지요. 성도는 예배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이른바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때문에 우리가 있는 곳이 거룩한 장소요, 우리가 하는 일이 거룩한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함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른바 단 마음으로 한다는 말이에요. 단 마음은 기쁜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하는 마음이 아니라 즐겁고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행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요. 이른바 사람눈치 안보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마음이에요. 그러면 성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는 일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성도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 믿는 성도들이 일에 끊고 맺음이 부족합니다. 일의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말이에요. 언젠가 가까이 지내는 집사님이 사업을 하는데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가급적이면 자기교회 청년들을 자기 회사에 고용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청년들이 회사에 와서 성경을 읽고 교회에 관련된 일을 너무 노골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많이 아프더랍니다. 그것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더 이상 믿는 사람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미안하지만 그는 교회 성도이기 전에 고용관계로 맺어진 관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기의 사적인 시간을 내어서 성경을 보든지, 혹은 교회 일을 해야지요. 근무시간에 사적인 일을 하는 것은 사업주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지요. 다른 사람에게도 덕을 세우는 일은 될 수 없는 것이구요. 그리스도인들이 가끔 주책을 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혜라는 미명으로 경계선을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에요. 이른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맡은 일을 통해 반드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맡은 일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11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봉사가 일입니다.

 

(3) 삶이 본이 되게 하라

 

 또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백 가지를 잘하다가도 한 가지만 잘못하면 세상은 그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고 물어뜯기 일쑤입니다. 성도가 험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억울해도 참아야 합니다. 불이익도 감수해야 합니다. 오해를 받아도 참아야 합니다. 어쩌면 세상은 우리가 입이 없는 채로 살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입이 있어도 참아주기를 바라는 것이겠지요. 때로는 귀머거리로 살기를 원합니다. 듣고서도 못들은 척 해달라는 것이지요. 혹은 눈먼 자로 사는 것을 원합니다. 보고서도 못 본 척 해달라는 것이지요. 그냥 바보처럼 살아주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십니까? 성숙하지 못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마치 우리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으로, 말 못하는 벙어리로,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과연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그것은 우리 힘으로나 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 때 가능한 일이지요. 나는 없고 주님이 계시는 자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예수로 살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말이에요.

 

 사실 성경도 우리가 그런 삶을 살기를 요구합니다. 이른바 전인격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이 듭니까? 하지만 비록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치를 온전히 충족시켜주는 삶을 살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반드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거룩한 영향력을 말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거룩함을 교회 안에서만 찾으려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거룩함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만 거룩한 척하지요. 그러니 교회 안팎이 다른 거예요. 세상에서의 삶과 교회에서의 삶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를 병들게 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거룩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요, 썩어져가는 세상을 정화시키는 소금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선한 영향력이요, 선한 영향력은 거룩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2장2절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잘못된 말 한마디로 우리 주님이 욕을 당하시고, 우리의 잘못된 행실 하나로 우리 주님의 영광이 가리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지금까지 나는 교회와 세상 앞에 어떤 영향력을 주고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비교적 선한 영향력을 제공하고 살았다고 자부하십니까? 아니면 악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시간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과 교회 앞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세상 앞에서도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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