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시기획의 배경과 과정
한국 근대회화사에서 안 심전(心田), 조 소림(小琳) 다음으로 그 작가적 역량을 높이 평가받았던 심산의 회화세계는 그 동안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고 또한 수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견고하고 안정된 구도를 바탕으로 부드럽고 시원한 느낌의 먹과 담채의 효과에 부감법(俯瞰法)에 의한 바위와 고목의 형태가 잘 어울리는 조형세계를 보여주었던 심산의 제자로는 석성 김형수, 심경 박세원, 지목 이영찬, 이석 임송희, 백계 정탁영, 일랑 이종상, 창운 이열모, 노석 신영상, 우현 송영방, 심제영, 양정자 등 수많은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그의 예술세계는 상대적으로 그 진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묻혀져 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6년 전의 대규모 회고전 이후 처음으로 개최되는 『심산 노수현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그런 의미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1920년대 초기작부터 1970년대 말기작까지 그의 전 생애를 거쳐 제작되었던 작품 60여 점이다.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면 산수화, 기명절지, 선화, 도석인물화, 괴석도, 석란도 등 다양한 소재를 아우르고 있으며 병풍, 선면화 등 폭넓은 형식의 작품을 제작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타계하기 직전 그가 말기에 제작했던 미완성작 두 점 중 한 점이 출품되어 그의 회화세계의 전모를 밝히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공간을 비추어볼 때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에서 개최됨으로써 고고한 기품의 작품성격과 우아하고 짜임새 있는 전시공간이 잘 어우러져 이번 전시가 더욱 빚이 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전시작품들은 대부분이 개인이나 기관, 또는 갤러리 등에서 소중하게 보관했던 작품들로 작품의 규모를 떠나 내용적으로 우수한 뛰어난 작품들이 출품되었다.한국방송공사를 비롯하여 일민미술관, 송암미술관, 경희대학교 박물관, 서강대학교 박물관, 서울대학교 박물관,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가나화랑, 동산방, 동문당, 선화랑, 예화랑, 현대화랑 등과 일부 미술관, 개인 소장가들이 이번 전시를 위하여 그동안 보관해왔던 애장품을 기꺼이 대여해 주었으며 이열모, 이종상, 정탁영, 송영방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제자분들이 보기 드문 초기작이나 미공개 작품들을 수집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심으로서 이 전시가 선생의 생애를 반추해 보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전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작품을 선별하는 데 있어서는 그가 심전의 문하에 막 입문한 당시의 초기작에서부터 작고하기 불과 한두 해 전에 그린 미완성 작품에 이르기까지 총 100여 점이 수집되었으며 이들 수집 작품 중 미술사적 가치를 지니거나 용묵이나 용필 등 기법적으로 뛰어난 60여점의 작품을 엄선하여 전시하게 되었다.
전시 작품을 연대별로 분류해 보면 1910년대 전통 산수화 1점, 20년대의 동물화, 산수화 2점, 30년대 사계 산수 병풍 1점, 산수화 3점, 화조화 1점, 40년대 산수 병풍 1점, 산수화 3점, 도석 인물화 2점, 괴석도 2점, 50년대 산수화 8점, 60년대 산수화 7점, 70년대 산수화 15점, 괴석도 2점, 기타 선면화, 묵란도 10여점 등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출품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 조사 연구하고 수집 대상의 작품들을 초기작부터 분류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점은 선생이 선천적으로 예술적 재능을 타고났기도 하거니와 그 재주를 믿지 않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점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초기 작품들인 동물화, 산수화 작품들이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정확한 표현력으로 그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과 몇 년 사이에 작품상의 묘사력, 준법, 구도 등의 변화의 발전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타고난 재능에 끊임없는 노력이 더해졌으니 화면상에 있어 필법의 숙달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는 작품을 대할 때 확연히 느낄 수 있었던 부분들이다. 선생은 산수화, 화조화, 인물도, 괴석도, 묵란도 등 폭넓고 다양한 화제를 능숙하게 소화해 내었으며 자연과 그 이치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일신의 경지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 처음 출품되는 미공개 작품 중의 하나인 <한강어락(寒江漁樂), 32×30, 1940년대>은 뛰어난 필법과 고아한 풍취가 가득한 작품으로 상대적으로 소폭 제작된 겨울풍경을 그린 작품이며 단아하고 운기넘치는 선생의 정신세계와 회화적 역량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뛰어난 수작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또한 5점에 이르는 병풍화를 살펴보면 기암괴봉이나, 대해, 무릉도원(상징적인 이상향) 등의 소재를 투시원근법에 의한 직접투시의 시각과 수평선 위로 직립한 암산이나 토산의 수평수직구도, 몰골법을 준에 도입한 沒骨 法을3) 섬세한 감각의 선염법에 혼용하여 표현함으로써 창조적이면서도 유원한 심산 특유의 작품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계산정취(溪山情趣)나 도원조행(桃源早行) 같은 작품은 한국의 정경을 해석함에 있어 체질적으로 암산이든 평원이든 현실과 유리된 이상향을 상징하는 이념산수(理念山水)를 지향하였던 심산 예술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특히 준법에 있어서도 남북종화의 각종 준과 몰골준법을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극도로 절제된 담묵을 곱게 우려서 가을날의 청명한 대기와도 같은 건조한 화풍의 특징을 보여준다.
심산은 이들 작품에서 처음부터 농담이 계획되고 조절된 중봉직필의 용필법으로 가깝고 강조하여야 할 앞부분은 진하게 그리고 차츰 멀리 있는 대상은 엷게 그린 후 수차례의 섬세한 선염(渲染)으로 바위의 양감이나 음영, 입체감을 강조해주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초기 심산의 작품들에서 심전이나 소림(특히 심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면 중기나 후기로 오면서는 점차 우리 전통회화 양식을 기반으로 서구적인 사생법이나 시각법을 도입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고 있으며 중국의 남화풍이나 일본의 채색화 등 화풍으로부터 전통화풍을 고수하여 후대에 계승시킨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후대로 오면서 몰골준의 창안과 우점 표현의 특징을 보여줌으로써 심산 특유의 독창적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심산은 평소 "기개를 살려서 어떠한 양식의 회화건 자주 그려 연습함으로써 자기 길을 찾을 수 밖에 없다"고 작화정신에 관해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에 귀의하면서도 그 속에서 새로운 자기 세계를 찾으려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흔히 심산을 가장 전통적 화가로 일컫고 있는데 이는 이조 회화를 이끌어온 도화서풍 즉, 북송의 이곽파나 남송의 마하파화풍의 원체화풍4)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실히 심산의 작품들은 이런 전통 화풍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체화풍의 장식성에 구애되거나 당시 풍미하던 남화풍의 취향이 잘못 빚어낸 격조 없는 또 하나의 형식에 식상됨이 없이 남북양파를 초월하는 엄격한 양식의 자기화를 이룩하였음을 이번 전시작품들을 통하여 다시 한번 보여준다고 하겠다.
특히 전시작품들의 형식과 구도를 토대로 그의 회화의 공간미에 대해 살펴보면 한마디로 점점 확대되어가고 깊어져가는 공간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초기에 많이 그리고 남는 여백의 공간에서 시작하여 점점 불필요한 사물을 제거하여 대기의 기운을 화면에 감돌게 하는데 원숙한 말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한에 가서도 공간이 시선을 화면 밖으로 유도하여 끝없는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있다. 이런 면에서 같은 그림의 화면 속에 심산처럼 깊고 너른 공간의미를 함축시킨 작가는 극히 드물다 할 수 있다.
심산은 그의 80년에 걸친 생애에서 엄정한 구도의 전통산수화양식과 마치 후추 알과 같은 우점(雨點) 준법5), 바위를 그릴 때 특히 강하게 나타나는 몰골준을 중심으로 그의 특유의 원대한 이상향의 관념산수화풍을 완성시켰으며 특히 3원 구도의 계승발전을 통하여 서양미술사조가 급격히 밀려들던 근대기, 과도기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근대미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또한 후학들에게는 전통의 계승과 발전에 있어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 뛰어난 예술가였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심산은 무르익은 전통 속에 새로움을 창조하는 끈질긴 노력의 작가로 동양예술의 진수인 산수화를 충분한 전통의 섭렵 위에 끈질기게 추구함으로써 독창적인 자기세계를 개척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
| 2. 사승관계 - 화가로 들어거기까지
특유의 암골미를 바탕으로 한 한국적 전통 산수화의 한 전형을 창안한 심산은 단순히 산수화가라기보다는 화조화, 인물도, 사군자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조형세계를 보여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99년 3월 16일(음) 황해도 곡산에서 부친 노재석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한 심산은 유년 시절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조부 노헌용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를 키운 조부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분으로 천도교에 재직하고 있으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다 체포되어 극심한 고생을 한 민족지사였으며, 의식이 깨어있던 선각자였던 까닭에 그가 화가의 길을 걷는데 주저 없이 그 용기를 북돋아주셨던 분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조부 슬하에서 성장한 심산은 보성소학교를 마치고 15세때(1914년) 보성중학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때 학교를 그만두고 우리 나라 최초의 미술학교인 서화미술협회6)에 들어가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문하에서 서화를 배우고 익히게 되었다.
심산의 스승들인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은 근대의 여명기에 조선 회화의 전통을 후대로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한 인물들로 그들은 도화서 화원이었던 오원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그들 자신이 화원이었으므로 도화서를 통해서 내려오는 남·북종화의 양화법을 고루 익힐 수 있었기에 이런 화법을 필요에 따라 동시에 구사하면서 조형미를 탐구했던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었다.
심전은 단아하고 섬세한 필치로 오원의 화풍에서 약간의 주관적 변모를 가져온 청록산수(靑綠山水) 계열의 작품과 남화풍의 작품을 남겼으며 말년에 이르러 시대의식이 담긴 근대적 사생작품을 남겨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를 적극적으로 전개시키는 계기를 만든 작가였다. 한편 소림의 화풍은 그의 조부인 임전 조정국으로부터 익힌 남화풍의 터전 위에 오원 화풍의 활달한 화풍을 가미한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 주었는데 심산은 이들 심전과 소림 외에도 서화미술회에서 정대유(丁大有), 김응원(金應元), 이도영(李道榮) 등으로부터 전통회화의 기본을 수학하였다.7) 따라서 조선조 화원 회화의 전통을 근대로 이행시키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한 이들 밑에서 수학한 심산은 중국화본의 임모(臨暮)와 자연을 대상으로 한 진지한 사생의 수업방식을 통해서 그의 특유의 회화 세계의 기초를 정립해냈던 것이다.
그후 1918년 청전 이상범, 연제 최우석과 함께 서화미술회를 졸업한 그는 졸업한 후에도 청진동에 있는 심전의 화실 경묵당에서 문화생을 겸한 조수의 자격으로 1919년 심전이 59세로 작고할 때까지 화도에 정진하였으며, 이때 노수현은 심전으로부터 心字를 물려받아 "心汕"이란 아호를 물려받았고 이상범은 田字를 물려받아 "청전(靑田)"이란 아호를 이어 받았다.8) 현재 이 아호는 얼마전 작고한 심경(心耕) 박세원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921년부터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주로 도안과 삽화를 그렸는데 이때의 신문 4단 만화는 한국신문 만화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해 4월에는 중앙학교 강당에서 열린 제 1회 서화협회전이 개최되어 심산은 이 전시회 회원으로 출품하게 되었는데 이 전시회는 한국최초의 단체전이었으며 "꿈속에 있던 조선서화계(朝鮮書畵界)를 깨우는 첫 소리요, 만애(漫哀)하기, 거의 극한(極限)에 이렇다할 우리의 서화 계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첫 금을 그으려 하는 새 운동이었다"9)는 평을 들은 전시회였다. 그후 23년부터 조선일보, 중외일보사의 기자 생활을 거친 후 선전 1회부터 11회까지 작품을 발표하여 자신의 환경을 모색해 나갔으며 30세를 전후하여 전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호연지기를 기르는 한편, 창윤(倉潤)하면서도 유현(幽玄)한 심산 특유의 산수화풍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48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초기에 그가 채득하였던 전통 원채화풍과 북종화풍 속에 붓을 굴리는 듯한 독특한 흘림체 양식의 용법을 더하여 심산 특유의 몰골준법(沒骨峻法)을 창안하기까지 그의 작품세계를 제자인 박세원과 박노수는 "한국적인 일취를 보여주는 노수현 선생의 작품에서는 오원 장승업과 심전 안중식 이 두 분의 영향이 보인다. 특히 그 준법에서도 그렇다. 또 생애를 통하여 꾸준히 연구하는 가운데 서양화의 수법도 가미한 때가 있었으며 훨씬 생각을 거듭하여 화면을 간결하게 처리하는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는 등 온아한 정취가 화폭에 넘친다"고 회고했다.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안일한 유법을 답습하고 자기의 세계를 발굴해 내지 못하며 방황하고 있을 때 심산은 홀로 전통적인 낡은 껍질을 벗어나 새롭고 특유한 자신의 경지를 개척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
| 3. 작품세계의 변천
정형적이면서도 엄정한 구도위에 암골미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화풍을 지녔던 심산의 작품세계는 크게 초기, 중기, 후기 등의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세계의 초반기는 20대 초반부터 40대까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때는 그가 서울 보성중학교를 수료하고 이상범과 함께 안중식, 조석진으로부터 서화를 배우던 시기에서 시작하여 30대 초반 심전산수화의 바탕 위에 새롭고 독창적인 관념산수 화풍이 가미되는 전통산수화의 또다른 변모를 시도하여 한 작가로서의 화도를 추구하였던 시기라고 얘기할 수 있다.
1918년 3월 서화미술회를 졸업한 노수현은 이상범과 함께 스승인 안중식의 화실에서 문화생으로 더 배우게 되었는데 1919년 스승 심전이 오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경묵당에서 독립하였다. 노수현은 그때부터 스스로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22세 때 <개벽>잡지의 창간호 권두화인 <개척>을 그렸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창덕궁 벽화가운데 하나인 경훈각 벽화, <조일서관(朝日仙觀)>을 그렸다.10) 이 그림은 원체화풍으로 그린 청록산수화로 화려한 채색을 쓴 북종화법으로 그려져 우리 근대채색화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하는 한국회화사적인 측면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노수현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안중식의 화풍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으니 가까이는 안중식 화풍을 멀리는 중국 원체화풍의 장식적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한편으로 보면 전통화법이라는 미명아래 창조성이 결여된 중국식 산수화풍을 추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이상범과 함께 2인전을 열기도 하였던 심산이 서화협회 조선미술전람회 등에 출품하거나 변관식, 이용우, 이상범 등과 함께 동연사를 조직하여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시키는 한편 전국의 유명사찰과 산을 찾아 화도의 정진을 꾀했던 수행의 시절이었다고 보인다. 이때의 한국적 정감과 야취로의 행보는 "1920년대에 활발히 추구되었던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의 직접적이고 다양했던 현실시각의 풍경화 전개는 1940년을 전후해서부터 어느덧 고법산수(古法山水)의 작풍으로 복귀하거나 각기 자기양식의 비직접적 심상경(心想景)으로 독자성을 정립시키고 있었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11)
이처럼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던 청년기의 심산은 작품세계에서도 점차 전통산수화에 독자적인 새로운 감각을 담으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구축하였는데 소림원수(疏林遠岫), 모추(暮秋), 봉래춘색(蓬萊春色), 신록(新綠), 도원조행(桃源早行) 등은 모두 사경을 바탕으로 제작된 창조적 상상력이 발휘된 그의 초기의 새로운 작품들이었다. 특히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록산수<신록>은 1920년대 제작된 작품으로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대작이며 야심작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도화서풍을 떠난 철저한 사생에 의존(依存)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주목(注目)된다. 확실히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산사로 통하는 오솔길가의 풍경이며 전원과 게곡의 물살의 표현이며, 돋아나는 신록을 두르며 의연하게 솟아있는 산봉우리들이 심전으로부터 물려받은 진채산수(眞彩山水)의 기법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며 심산의 천재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심산의 정확한 묘사력과 표현기교는 그 당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날카로움이 있었으며 그후 제작된 많은 작품들 속에서 성숙되어가는 정신적 깊이와 함께 더욱 심오한 방향으로 전개되어간다. 그리고 그 후에 그려진 석성 김형수 화백 소장의 <도원조행(桃源早行)>은 마치 조선 전기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그의 이상향(理想鄕)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거대한 바위를 수직준과 부벽론을 혼합하여 표현한 수법과 안정되고 짜임새있는 구도, 적절한 먹색의 농담변화가 바위 끝에 섬세하게 묘사되어있는 복사꽃의 형태들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화면에서 느껴지는 심오한 정신미와 화격이 가히 당대를 대표할 만한 선생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후 중기에 들어서는 서울대교수 생활이 병행되는 시기로 49년 제 1회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면서 67년 제 16회 국전심사위원을 마칠 때까지 국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대학출강을 계기로 작품의 품격과 색채, 구성 등에 보다 격정적이며 참신한 요소를 불어넣는 등 그의 작가 생애에 있어 가장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특히 50년대 초부터 70년대까지는 화려하고 붉은 갈색의 바위산의 암골미가 추구되는 시기로 마른 붓으로 거듭 칠한 바위주름과 옅은 초록색의 점묘로 표현된 나무 형상들,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폭포와 계곡 물, 근경, 중경, 원경 등의 3원법의 구도가 서로 복잡하게 교차하는 노수현의 산수화의 정형이 수립되는 시점이었다.12)
사실 심산처럼 근본적인 것을 중요시한 화가도 드물다. 그는 튼튼한 암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예술인이었다. 이 시대의 화가들 중 아무도 심산처럼 돌을 철저하게 그린 사람은 없다. 심산은 돌을 돌답게 그린 화가이다. 그는 금강산의 아름다움 중 특히 돌의 골격(骨格)에 매료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개자원(芥子園),산석보(山石譜)에는 "돌은 천지의 뼈요, 기도 그 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돌을 운근(雲根)이라 한다. 구름이 생기는 근원이 돌이라는 생각이다. 기가 없는 돌은 죽은 돌임을 밝힌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기가 없는 뼈가 썩은 뼈인 것과 같다"13) 하였다. 이처럼 심산의 산수화는 사물의 외형에 머물지 않고 내면의 조화와 기운을 표현하려 하였으며 특히 산과 바위의 골격을 중요시 여기는 그의 예술 세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강산(江山) 추색(秋色) 산촌(山村), 계산정취(溪山情趣), 무릉도원(武陵桃源) 등이 있는데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산촌>은 근경, 중경, 원경을 3단으로 확연히 구분하여 구축적으로 전개시킨 작품으로 중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근경과 중경을 근접 사이는 안개로 처리하여 그윽하고 신비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으며 바위를 그리는 준법과 사물의 외관을 그리는 설색에도 차이를 두어 유연하면서도 빼어난 심산 산수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얘기할 수 있다.
또한 용인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계산정취는 심산이 지향한 이상산수의 한 전형이 되는 작품으로 이리저리 겹쳐진 바위나 그 사이의 나무들의 부드러움이 양, 음, 정과 동, 강약으로 표현되어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암곡미와 특유의 준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무렵의 노수현의 작품은 완전히 전통적인 구각에서 탈피하여 새롭고 특유한 경지를 개척하였는데 대체로 다른 작가들이 남화계통의 유법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반하여 그는 양화파의 장점을 절충 유도하여 관능적인 기법에 형사 이상의 구법을 구사하여 오고가는 수묵과 명쾌한 담채 사이로 심오한 산수를 요리하였다.14)
바야흐로 50년대 초반부터 60년대 말기까지에 걸쳐 의경화되는 노수현 산수화의 한 전초와 같은 작품이 제작되는 시기인 것이다. 의경(意境)이란 원대한 자연의 일부를 한 장의 화폭 위에 집약시켜 놓은 한 점으로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사물을 마음 속에서 조화를 일으켜 나타낸 새로운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가슴 속의 이상향을 그리고 싶어했던 심산의 조형세계와 정신세계의 방향이 서서히 그들을 잡게되는 중요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중기의 시기는 그 이전시기와는 다른 전통적인 형식을 탈퇴하여 심오하고 원숙미 넘치는 심산 특유의 정형미 넘치는 산수화를 그려낸 기간이었다. 말기라 할 수 있는 제 3기는 70년대 초부터 작고할 때까지의 시기인 8년 남짓한 기간으로 고풍한 산악들의 모습이 중첩되며 이루는 절경을 그리는 등 더욱 정제된 산수화풍을 보여주는 시기다.
이때는 그가 서울특별시 문화상(1955)에 이어 문화의 날에 문화훈장(1974) 등을 수여받고 그의 회고전이 74년도(동아일보사)에 열리기도 한 시점으로 부드럽고 원만한 원경의 숲 속에 감싸여 있는 험준한 바위산의 자태가 노대가의 광대한 기질과 제작의욕을 보여주었던 기간이었다.
특히 말기작품에서 나타나는 험준한 산악의 형상들은 서로 중첩되어 표현되며 마치 동그란 후추알 형태의 무수한 점들이 화면의 공간을 가득 채우는 우점(雨點)들이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우점들은 70년대 작품에서 새로운 모습 새로운 색깔로 현전해 왔으니 신록의 녹색이나 단풍색깔의 먹점들이 분홍바탕에 호분과 먹의 우점들과 어울려 골짜기를 채우고 산마루를 덮고 혹은 거의 화면 전체의 풍경과 원경까지를 가득 채운다. 나무도 풀도 가지도 없이 온통 오점들만이 만발한 신록이나 꽃이나 단풍처럼 화려하게 바위산 사이사이에 가득히 피고 때로는 산 전체에 핀다. 험준한 바위산을 부드러운 초목의 옷으로 감싸듯 화면의 곳곳에 경영되는 것이다.15)
심산의 이러한 작품경향은 78세 때인 76년부터 가속화되어 세상을 등지는 80세때까지 계속 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그는 수십 점의 대작을 제작하여 그의 작품세계의 화려한 대미를 장식하였다.
<추강 홍엽(秋江紅葉)>, <조춘(早春)>, <성하어은(盛夏漁隱)>, <하산야취(夏山野趣)>, <강안추색(江岸秋色)> 등이 말년을 대표할만한 작품들이며 특히 심산은 <조춘>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른봄을 맞이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의 생생한 기운을 대각선 구도와 묵점과 녹점이 어우러지는 말년 특유의 우점준법, 그리고 힘찬 필세의 힘을 통해 더욱 정제된 산수화풍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심산의 회화는 수묵이든 청록이든 다양하고 활력적인 기법과 구도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도 산과 바위의 단단한 형태를 그리려는 것이 특색이다. 이 때문에 그의 산수는 사명감보다는 조형성에 치중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조형의 대상이 가능한 작가적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짐으로 관념산수가 많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관념산수화는 청명하고 호쾌한 대륙적 미감에 접근하여 차츰 후기로 가면서 한국적 이상미를 표현하게 된다.16)
이렇듯 그의 세계는 명징(明徵)한 일기(一氣)와 토속적 정서가 서로 조화된 독특한 세계였으며 고답한 성품과 문기 넘치는 정신세계가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전통은 단순히 과거의 문화유산의 흔적이 아니라 내일을 창조하기 위한 하나의 밑거름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의 흐름이다. 따라서 전통은 고수되어야 하며 현대적 변형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심산 노수현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모든 예술은 시대에 따라 변천 변모하는데 그 과정이 서서히 그리고 내적 변화를 일으키며 전통에서 창조에로 이행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심산은 전통적인 산수화 특히 북종산수화(北宗山水畵를)를 바탕으로 그의 독창적 세계를 이루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 III. 결 론
회화의 본질은 자연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다. 산수화가 지닌 상징성·은유성을 통하여 볼 때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지혜를 찾는 것이 바로 산수화의 정신세계다. 친자연과 귀자연의 동양적 자연관 아래서 자연을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병행한 관념적, 이상적 장소로 상징화하고자 했던 한국의 전통산수화는 우리 정신의 기저에 깔려있던 정서적이고 민족적인 의식에 따라 한국적 정서와 미감에 맞는 전통회화 양식으로 재창출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근대기를 거치며 팽배해진 민족주의에 토대를 두고 의식화된 상태로 계승 발전되어 以堂, 深香, 心汕, 靑田, 小亭, 毅齊 등의 6대가 양식으로 자리잡은 바 있다.
우리 삶의 불변적 모태이며 근원적 질서인 자연과의 합일적 조화에 기초하는 전통회화 사상은 서구의 사상과 문명이 급속히 밀려들던 구한말의 시대를 거쳐 민족의 비극의 시기에 역사적 사회적 대립의 상태를 화해시키는 정신문화적 소통의 원리를 지탱하는 주요한 힘으로써 한국미술 문화 속에 내재되어 왔다. 요사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의식은 현대의 물질적 가치관과 산업사회의 삭막한 소외문화 형태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젼으로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산수화는 종래의 속세에서 벗어나 은거하고 있는 경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근대 산업문명으로부터 오염되어 가는 삶의 본질을 회복하고 인간성을 되살리려는 친자연주의 사상의 중심, 즉 순수한 조형매체로서의 자각을 강조하고 있다.
심산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변혁 속에서 기울어 가는 국운과 일제의 탄압,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쳐오면서도 오로지 예술 속에 자기 나름의 역사를 서술하여 온 진정한 화가였다. 또한 전통회화의 맥락을 고수하면서도 한국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자연과 더불어 세속에 감염되지 않고 오직 화도의 외길만을 정진한 그의 노정은 오늘의 후학들에게 깊은 정신적 지표가 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심산회화를 논함에 있어 그가 추구했던 무릉도원(理想鄕)의 세계 즉 내면의 정신적 의경(意景)인 정신미의 구현을 고차적인 안목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심산이 한국산수의 암골미와 풍취를 의경의 독창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현대적 진경산수화(眞境山水畵)의 또 다른 한 전형을 창안해 낸 까닭이다.
따라서 이러한 면에 비추어 볼 때 심산은 한국 근·현대 회화사적인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며 그의 이상향적인 관념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적(合一的) 경지, 즉 천(天)-지(地)-인(人)-합(合)의 사상으로 귀결되고 있다.
북송의 곽희는 "經文衆多, 取之精粹"라 하였다.17) 이것은 화가는 무릇 많은 것을 경험하여 정선된 것을 화폭에 옮긴다면 훌륭한 창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심산은 이당, 청전, 소정 등과 동시대인으로 이조 후기와 현대의 한국화를 연결하는 고량 역할을 한 중요한 시점에 위치한다. 그러나 다른 화가들이 점유하고 있는 작가적 위치에 상대적으로 그 인식도가 낮아졌다는 느낌도 없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심산은 이조 회화의 마지막 보루라고 일컬어지는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문하에서 수업하여 그들의 화업을 계승하고 있어, 이조회화전통의 마지막 잔영을 이끌고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대의 대부분의 산수화가들이 남화풍의 시대적 풍조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감염된 데 반하여 엄격한 격식과 품격을 잃지 않는 전형적인 양식에다 자신을 옭아매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 준다.
이 점은 이조시대의 화원풍 그림이 갖는 형식주의적 매너리즘을 의식하면서도 오히려 그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추적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으며 특히 한일합방 이후 물밀 듯 밀려온 일본식 남화풍에 의한 극심한 감염을 배제할 수 있었던 자기 고수의 끈질긴 노력과 성찰로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18)라고 말한바 있다.
전통회화에 대한 가치가 외래 문화의 대량 유입과 서구식 미술교육의 주도로 인해 그 생명력이 미약하게 된 오늘날 한국회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혼란기의 급격한 미술사조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전통정신과 미의식을 지키기 위해 지조를 굽히지 않았던 작가의 예술세계가 그 진의를 인정받는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심산 노수현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현재 우리 전통산수화 분야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작가의 정신과 미의식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새겨 보기 위해 기획된 전시라고 볼 수 있으며 그런 의미로 볼 때 이번 전시는 우리 한국 회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중요한 전시가 되는 한편 앞으로 우리 화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밝혀주는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