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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상 - '한그림' 원형 탐구 40년의 궤적.!!

작성자이태관|작성시간06.01.06|조회수98 목록 댓글 1

이종상 - '한그림' 원형 탐구 40년의 궤적

윤범모 <미술비평>

새로운 기법으로 원형상 연작을 창작해 온 이종상이 회고전(5. 4~19 가나아트센터)을 열었다. 전시 주제는 ‘일랑 이종상 한그림 40년’. 실험적인 진경산수화·문인화로부터 신벽화·동유벽화·장지벽화의 대형 설치작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자생미학을 추구한 그의 다채로운 예술세계가 선보인다.

 

 

회갑을 맞이한 일랑 이종상 화백이 화력 40년을 되돌아보는 회고전을 개최했다.

가나아트센터 전관을 가득히 메운 작품들은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화단 데뷔시절의 사실적 묘사에 의한 작품으로부터 진경정신에 입각한 우리의 산천을 그린 작품들, 그리고 벽화라든가 동유화·원형상 시리즈 등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기간에 가진 행사 가운데는 제자들에 의한 출판기념회도 있었다.

 

 

제자들 모임인 낭우회가 엮은 《한그림 40년》이라는 두터운 책은 그동안 우리 미술계에서 보기 어려웠던 단행본이었다. 이 책은 앞으로 일랑 연구를 위한 하나의 ‘교과서’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믿어진다.

 

 

기록과 자료정리가 생활화되어 있지 않은 우리 풍토에서, 한 작가에 대한 이같은 일차적 자료의 집대성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느껴진다.

제자들이 봉정한 출판물로는 《한그림 40년》 이외에 《한국미술의 자생성》이란 역저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이야말로 일찍이 유례가 없었던 형식의 출판물이 아닌가 한다. 기왕의 상투적인 회갑 논총의 방식에서 벗어나 ‘자생성’이란 주제 아래 선사시대에서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을 조명한 논문 모음집이기 때문이다. 자생성 문제에 천착해온 일랑의 뜻을 제자들이 헤아려 제작한 이번 논총은 우리 미술계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출판 기념회 석상에 운집한 하객, 특히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의 면면은 그만큼 일랑 예술 애호가의 폭을 가늠케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폭 넓은 행동반경과 함께 역량을 짐작하게 했다. 역시 일랑이다.

 

작업에의 열정 못지 않게 평소 이론적 배경에도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주인공과 대좌했다. 그는 언제나 처럼 논리 정연한 이론 무장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소개했다. ‘이론가 이종상’ ‘문무를 겸비한 화가’, 이 또한 우리 미술계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에 ‘철학박사 이종상’의 육성을 지상 중계한다.

 

 

이번에 가나아트센터 전관에서 <한그림 40년>이라는 제목의 회고전을 개최하여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화력 40년의 전시에 임한 감회를 우선 듣고자 합니다.

 

“제가 59학번이니까 미술이란 전공을 선택한 지 금년으로 꼭 40년이 됩니다. 이를 기념해 지난 세월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반성의 계기 혹은 충전의 계기로 삼고자 겸허한 마음으로 가나아트센터의 기획에 응했던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 임하면서 감회를 말하라면 한마디로 한국 미학의 본질에 더욱더 천착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전시 제목에 ‘한그림’이라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글쎄, 한마디로 요약하기가 쉽지 않군요. 1938년생인 저는 해방 조국에서 교육을 받은 제1세대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해방이 되었고, 졸업할 때 6·25전쟁을 맞이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나폴레옹 행진곡을 들으면서 일본 그림을 모사해야 했던 불행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현재 저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습니다.

 

 

대학시절에는 4·19혁명을 최전선에서 맞이했고 그 1년 뒤에는 5·16쿠데타를 만났습니다. 식민지 교육을 받은 세대로부터 어설픈 서양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오면서 역사의 부침, 힘의 논리, 민중의 생활과 내 예술의 의무 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욱더 역사의식이 투철해져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제 작품을 볼 때는 저희 세대의 역사적 배경도 아울러 읽어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대학시절 국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현실에 기반을 둔 작품이었습니다. 당시의 화단에는 현실 기반의 작품 대신 음풍농월을 노래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노동현장이나 도시민의 애환을 그렸습니다.‘동양화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여서인지 말들이 많았습니다. 예컨대 “왜 그림 속에 전신주를 넣어 산수화를 망치느냐”라는 힐난 등이 그것입니다. 당시 저는 동양화다 뭐다 하는 장르 구별에 연연해 본 일이 없습니다.

 

 

장르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그릴까 하는 것에 촉각이 곤두서 있을 때지요. 화가는 과거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월간미술 1999.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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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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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관산지악 | 작성시간 05.04.03 선생님 글 잘 보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 밥만 먹으려 한것은 아니지만 저또한 영화에 빠진적이 있었어요.^^약간은 이해가 됩니다. 이제 부터라도 그림을 더 공부 하고 지식을 넓히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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