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에 카페에 들럿네요.
예나 지금이나 조용하고 한적함은 그대로군요.
다가오는 추석 잘 보내시고 건강하시길 바라며 문득 "와비사비"란 글귀가 생각나 자료를 뒤지다 보니
공감가는 글이 있어 올려 봅니다. 좀 긴데 끝까지 읽어 보세요.
우리 "느림의 미학"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 일본의 정신이지만 한번 쯤 읽어보는 것도 괞찬을 것 같네요.
와비사비의 이해
고독 빈궁 자연을 즐기는 와비사비
김응교(시인. 와세다대학 문학부 객원교수)
그윽한 집과 초가지붕
와세다대학 오오쿠마 강당 옆에 있는 너른 잔디가 펼쳐진 일본식 정원이 있다. 바람 솔솔 한껏 쉬고 싶은 날, 잔디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학생들에게 이 잔디밭은 고즈넉한 추억으로 남는다. 이 정원을 찾는 많은 방문객들은 거대한 로얄 리갈 호텔을 배경으로 사진 찍고 돌아간다. 정작 중요한 것을 잊어 버리고.
바로 정원 구석 숲속에 있는 허술한 집 한 채. 판자집 같이 엉성하게 엮어진 누추한 집. 강진의 다산 유배지 건물이 더 화려하고 멋지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한 집 한 채.... 그늘 속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그 집 옆으로 이끼 낀 냇물 흉내만 내고 흐르고 있다. 어느 정도의 축축함과 적막감이 근저(根底)에 흐르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꺼리는 집이다. 정원 쪽에서는 이 집이 잘 보이지 않지만, 이 집 다다미 방에서 정원은 풍경화마냥 정답다.
간지소[完之荘]라는 이 집은 이 정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집은 가장 중요하고 국제적인 손님이 올 때 문을 열어, 손님을 모시는, 전통적인 다다미방을 갖춘 집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와세다대학을 방문했을 때도 로얄 리갈 호텔이 아닌 이 허술한 집 다다미방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실은 일본의 저택에는 이러한 허술한 집이 한 채씩은 있다. 교토의 화사한 금각사나 은각사에 가면, 흔히들 연못 한 가운데 번적이는 금과 은이 붙여진 멋진 집만 사진 찍고 돌아온다. 그런데 정작 그 집을 감상하는 언덕 위 작은 집은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그저 함바집으로 생각하고 지나치기 일쑤다. 옛날 사람들은 바로 이 집에서 금각사와 은각사를 내려다 보며, 차 한잔을 그윽하게 마시며 정원을 감상했었던 차 집이었다.
10여년전 가마쿠라에 처음 갔을 때도 나는 이 집과 같은 집을 많이 보았다.
처음 들른 절은 가마쿠라 역에서 서쪽으로 걸으면 보이는 삼나무길 계단이 인상적인 엔가쿠지[円覺寺]다. 1282년 여몽(麗蒙) 연합군의 침입으로 죽은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절에서 한국에는 보기 드믄 초가지붕의 절을 보았다. 이 절 맞은편에 있는 도케이지[東慶寺]에서도 초가지붕 절을 보았다. 특히 이 절에는 초가지붕 아래 종이 달려 있어 특이했다. 그러고 보니 가마쿠라에는 초가지붕에 덮인 절이 많았다. 이 초가지붕 절은 불교적인 무상관(無常觀)의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듯 했다.
초가지붕 절집에서 난생 처음 차잎을 절구를 곱게 갈아 물에 섞은 '맛차'(抹茶ㆍ가루차)를 마셨다. 일본의 차문화는 가마쿠라 시대 승려 에이사이(榮西)가 송나라에서 차문화를 들여 오면서 시작됐다. 그는 1191년에 맛차 제조법과 묘목을 들여와 전했으며, 당시 주로 사찰에서 마시던 차는 상류층은 물론 서민의 기호품으로 번져나갔다. 지금의 커피같은 기호식품이었다. 초가지붕의 절집 곁에서 맛차를 마시는 분위기는 정말 독특했다. 딸랑 딸랑, 실바람에 실려오는 방울 종소리 들으며 맛차를 마시는 마음에 끝모를 평안이 밀려 왔다.
"이거 형용할 수 없이 평안하고 그윽하네요."
라고 동행했던 일본인 교수님께서 말하자, 그때 교수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이런 분위기를 바로 와비사비라고 하지요."
내가 와비사비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바로 이때였다.
손님을 검소한 방에서 조용히 모시는 전통, 절의 건물도 초가지붕으로 씌우는 그늘진 분위기...... 조금 풀어 표현하자면, 간소(簡素)의 정신 혹은 가난함과 외로움을 즐기는 풍류정신이라고나 할까?
다도의 은근한 멋
쉽게 말하자면, "고독과 빈궁함, 자연의 정취를 있는 그대로 즐긴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예스럽고 한적한 정취를 의미하는 와비사비(わびさび)는 일본의 다도(茶道)에도 중요한 정신적인 미의식으로 기능했다. 와비사비는 중세 전국(戰國)시대의 전란을 거쳐, 그후 모모야마(桃山)시대의 현란하고 화사한 번영을 지나 이윽고 도달한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 원류는 센리큐[千利休, 1522~159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센리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30년간의 정권을 말하는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1573~1603] 시대 때 다도의 대가이다.
이 시기는 날마다 싸움이 전개되는 전국시대였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 무장(武將)들은 다실(茶室)에 가서 침묵을 즐기곤 했다.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릿큐의 차를 아끼고 사랑했다. 조용한 다실에서 차를 우려내는 데 집중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자기자신과 마주하여 정신을 갈고 닦는 구도의 길을 리큐는 전했다. 이 경지가 바로 ‘와비’ 곧 조용하게 맑고 가라앉은 정조를 즐기는 것이다. 리큐는 엄숙하고 따뜻하며 동시에 속된 데가 없이 깔끔한 차를 ‘와비차[わび茶]’라고 했다.
다도에는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라는 말이 있다. “모든 만남은 일생에 딱 한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두 번 다시 못 만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차를 대접하는 마음, 그것을 위해서는 보다 좁은 공간에서 차를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리큐는 다실 문을 겸손히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게 낮게 만들고, 다다미 한 장 반 정도의 작은 방을 구상했다. 하지만 이러한 리큐의 소박한 정신은 조선정벌을 나서며 팽창주의로 치달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마찰을 일으켰고, 마침내 리큐는 69세의 나이에 죽임 당했다.
앞서 와세다대학이나 저택 한 구석이나 언덕에 있다는 허술한 차 집은 바로 리큐의 그러한 정조를 느끼기 위한 조용한 공간인 것이다. 비좁은 곳의 쓸쓸함 속에서 깊이있는 마음의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공간인 것이다.
지금도 일본인은 차를 즐겨 마신다. 서양 음로에 밀려 다도의 위기론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차의 성분과 효능에 대한 과학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인기가 되살아나고 있다. 자동판매기에서 캔음료로 널리 팔리고 있고, 맛차를 넣은 아이스크림도 인기를 끌고 있다.
하이쿠, 생략의 멋
독특한 정형시 하이쿠[俳句]에서도 와비사비 미학은 중요하다. 원숙하고 은근한 멋을 의미하는 와비사비 미학이 하이쿠의 작풍이 된 것은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 때부터이다. 가령,
가는 봄이여 行く春や
새 울며 물고기의 鳥啼き魚の
눈엔 눈물이 目は涙
를 읽어 보자. 어찌 보면 무의미를 지향하는 것 같으나 이 시에는 깊은 맛이 숨겨져 있다. 이 하이쿠는 봄이 지나가는 순간에 정처없이 하늘을 떠도는 새도 울고, 물 속에서 물고기가 눈물 흘린다고 쓴다. 시가 되기에는 너무도 짧은 17음절 속에 바쇼는 일상과 세월의 무상함을 담아내고 있다. 읽는이에 따라서는 물고기 눈의 눈물을 한없는 이별의 눈물로 공감할 수도 있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눈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바쇼는 이상적인 하이쿠[俳句]가 되려면, 한적함을 뜻하는 ‘사비’[さび], 가벼운 일상을 의미하는 ‘카루미’[軽み], 심오한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호소미’[細み]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시의 한적함, 가벼운 일상, 심오한 깊이가 모두 담겨 있다. 여기에는 자잘한 이해(利害)나 번거로운 인간관계를 초월한 아름다운 순간이 담겨 있다.
하이쿠의 생략기법 역시 와비사비와 관계있다. 독자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생략된 공간을 채워야 한다. 이러한 태도가 하이쿠적 커뮤니케이션이다. 메시지에 집착하지 않고, 서로 마음을 열어 정답을 찾기보다는 여러 의견에 귀 기울이는 태도이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 느끼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와비’[わび]란 가난함이나 부족함 가운데에서 마음의 충족을 끌어내는 미의식의 하나이다. 서글프고 한적한 삶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탈속(脫俗)에까지 승화되는 경지, 바로 가난함(貧)의 미의식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본질을 붙잡으려는 정신이다. ‘사비’[寂,さび]란 한적한 곳에서도 더없이 깊고 풍성한 것을 깨닫는 미의식이다. 단순한 호젓함이 아닌, 깊이 파고드는 고요함, 그 속에서 한없는 깊이와 넓이를 깨닫는 미의식이다.
영화, 침묵과 정지의 아름다움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모모노케 히메]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때, 우리는 왠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다른 정지된 화면과 침묵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장면이 빠르고 세세하게 지나가는 미국 애니메이션과 달리, 일본 애니메이션은 가끔 화면이 정지되면서 침묵의 공간이 형성되곤 한다. 물론 처음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그림 숫자를 줄이다 보니, 디즈니랜드 영화보다 일본 만화영화의 인물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보였으나, 이러한 경제적인 이유가 나중에는 오히려 일본의 미학을 살리는 요인이 되었다. 오랫동안 영상이 정지되어 있을 때, 마치 정물화를 감상하듯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비교컨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는 관객은 수동적의 태도가 되는데, 일본 에니메이션을 볼 때는 관객이 능동적으로 상상하며 참여하게 된다고 한다. 디즈니 만화영화는 수동적인 팬을 양상하며 강력한 계몽주의적 담론을 재생산하는 반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능동적인 관객을 훈련시키는 열린 텍스트를 전제하면서, 중독성 있는 메시지를 세뇌시킨다. 바로 정지와 침묵의 공간이 있기에 관객이 그 사이를 상상력으로 매우면서 생기는 능동적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또한 와비사비 미학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인들이 보면 왜 울까 싶을 정도로 일본인들이 눈물 흘리며 보던 [철도원]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평생 눈발이 날리는 호로마이 역을 지키는 주인공 오토는 아이가 아파도, 아내가 병원에서 죽어가도, 기차 하나만 바라보고 산다는 영화다. 오토는 철도시간에 맞추느라 딸과 아내의 죽음조차 보지 못했다. 철도부의 관리에서 이제는 스키장에 취직하게 된 동료 스기우라와 달리 오토의 삶은 너무나 적적하기만 하다
이러한 오토의 삶을 보며 눈물 흐리는 일본인 관객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 삶의 중심에서 완전히 비켜나간 여백과 같은 오토의 삶에 무슨 매력이 있기에 이 영화를 보며 그리도 많은 사람이 울었을까? 그것은 바로 와비사비 정조 때문이다. 힘 빠지고 쓸쓸한 아름다움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젊은 청년이었던 오토가 반백의 노인이 되어 쓸쓸히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은 와비사비의 절정을 보여준다. 보잘 것 없는 한적함과 가난 속에서 가난함에서 제 자리를 지켰던 오토를 보며, 그 쓸쓸함에 감동의 눈물 흘렸던 것이다.
또는 1990년대 일본 문화의 부활을 알린 키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나 [소나티네]에서도 와비사비 미학은 이용되었다. 화면이 갑자기 건너뛰면서 이야기가 과감히 생략되거나, 그럴 때마다 감독 자신이 그린 그림이 끼어들어 화면이 오래간 정지되고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 내거나 하곤 한다. 이 또한 와비사비 미학이랄 수 있겠다.
와비사비와 동양문화
와비사비의 미학은 수필, 와가(和歌) 하이쿠, 회화, 조각, 건축, 정원 유리, 도자기, 차도(茶道), 음악, 무도 뿐만 아니라, 일상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가령 안녕하세요는 일본어로 "곤니찌와"(今日は)인데, 우리말로 직역하면 그저 "오늘은..." 하고 여운을 둔 말에 불과하다. 뒷말이 어떻듯 인사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생략과 여운을 즐기는 것이다.
패전 후 일본은 와비사비와 반대의 길을 걸었지만, 도교라는 대도시를 둘러싼 시타마치[下町] 지역은 옛날 그대로 보관하고 있고 옛날 전차도 볼 수 있다. 분명히 일본인들은 옛것의 그윽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 그윽함을 한번 경험하면 그립기까지 하다. 나 역시 가끔 가마쿠라의 맛차가 그립고, 시타마치에서 살 때 다다미방 건초 냄새가 코 끝에 어른거리곤 한다. 그 그윽함은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이다.
나는 와비사비 미학이 일본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양문화 곳곳에 그러한 요소가 숨어 있다. 그러기에 와비사비를 통해 서로 만날 가능성이 있다.
첫째, 가난과 고독에 찌들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풍성하게 받아들이는 와비사비의 미학은 우리의 풍류(風流)와도 통한다. 가령 지금은 잊혀져가는 한(恨)의 문화도 그러하다. 한스러움을 남에게 탓하지 않고 판소리나 마당극으로 만들어낸 우리 선인들의 지혜도 그러하다. 고독과 자연과 빈궁함을 즐기는 강진에 있는 다산 정약용 유배지 건물도 와비사비 미학과 통한다. 인간의 고독과 빈궁함은 이렇듯 오히려 넉넉함을 만들어 내곤 한다.
둘째, 와비사비의 미학은 다른 동양 문화와 대화할 여지를 준다. 거대함과 신선함과 떠들썩함이 근대화의 키워드로 되어 있는 이 시대에 와비사비의 미학을 회복함은 동아시아 공동의 집을 만드는 검소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 다소 비좁아 보이는 공간에서 당신을 모시려는 일본인이 있다면, 정성을 다해 와비사비의 마음으로 대우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음껏 그윽한 분위기를 누리시기를.
머리는 온갖 잡념에 사로잡혀 있지만 지금 이순간 느긋하게 말차나 한잔 하면서 머리속을 허옇게 만들어야 겠네요.-박삿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