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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아름]가야와왜

[인물]임나 사신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 (3)

작성자麗輝|작성시간04.08.23|조회수185 목록 댓글 0
그럼 마지막으로 이 소나갈질지라는 인물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자.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一書에 말하였다. 숭신천황의 대에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배 한척을 타고 越國의 사반포(□飯浦)에 정박하였다. 고로 그곳을 각록(角鹿)이라 한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라고 물으니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 이름을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다른 이름을 '우사기아리질지우기(于斯岐阿利叱智于岐)' 라 한다(우기는 小國의 王號). 일본국에 성황이 계시다는 것을 듣고서 귀화하였다. 혈문(穴門-長門)에 왔을때 그 나라에 '이도도비고(伊都都比古)' 라는 사람이 있었다. 신에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빼고는 두 왕이 없다. 고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 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이 그 사람됨을 잘 보니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시 돌아왔다. 길을 잘 몰라서 섬들을 거쳐 북해로 돌아서 출운국(出雲國)을 경유하여 여기에 왔다." 라고 하였다.

이때 천황이 붕하여서 여기에 머무르며 수인천황을 섬겨 3년이 되었다. 천황이 도노아아라사등에 "그대의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 라고 물었다. 대답하여 "몹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천황은 아라사등에게 명하여 "그대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었으면 선황께도 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의 나라 이름을 어문성천황(御問城天皇-숭신)의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으로 하라." 고 하였다.

그리고 붉은 비단을 아라사등에 주어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고로 그 국호를 미마나국(彌摩那國-미마나노구니)이라 함은 이것이 연유가 된 것이다. 아라사등은 받은 붉은 비단을 자기 나라의 군부(郡府)에 거두어 두었다. 신라인이 그것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와서 붉은 비단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망하는 시초라고 한다 --

여기에 보면 앞선 내용과 비슷하지만 주인공이 다르다. 바로 임나가야의 왕자라고 하는 도노아아라사등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다. '아라사등' 으로 계속 기록된 것으로 봐서 앞의 '도노아' 는 성이거나 미칭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사람의 다른 이름이 '우사기아리질지우기' 라고 한다. 뒷부분의 '우기' 가 소국의 왕호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본다면 이 사람은 임나가야의 왕이라기 보다는 임나가야에 소속된 소국(제후국)의 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질지' 라는 부분은 소나갈질지에도 보이는데 '꾸짖을 질(叱)' 에 '지혜 지(智)' 자의 합성어로서 이 단어는 미칭으로 여기고 싶다. 다시 말하면 '소나갈' 이나 '우사기아리' 가 실제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여기서 소나갈질지와 우사기아리질지를 동일 인물로 보고 싶다. '우사' 는 '소' 로 발음이 변질되었을 것이며 '기아리' 가 '갈' 로 단음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외양에 대해서 이마에 뿔이 나 있었다고 하는데 흡사 삼국사기 열전의 강수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주인장은 소나갈질지가 실은 임나가야의 단순한 사신이 아니라 왜 열도의 속국으로 건너온 임나가야왕의 왕자였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다음 보위를 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나온 기록을 더 적어보도록 하겠다.

-- 一書에 말하였다. 처음에 '도노아아라사등' 이 제 나라에 있을때 황우에 농구를 싣고 시골에 갔었다. 황우가 갑자기 없어졌다. 그 자취를 찾아갔다. 자취는 어떤 군위(郡衛) 속에 머물렀다. 한 노인이, "그대가 찾는 소는 이 군위에 들어갔다. 그런데 군공(郡公-군의 관리)들이 '소가 지고 있는 물건으로 보니 반드시 잡아먹으려고 한듯 하다. 만일 그 주인이 오면 물건으로 보상을 하려 한다.' 라고 말하고 잡아서 먹어버렸다. 만일 '소값으로 무엇을 가지려는가?' 라고 물으면 재물을 달라고 하지 말고 '군내에서 제사지내는 神을 달라.' 라고 하시오." 라고 하였다.

조금 있으니 군공들이 와서 "소값으로 무엇을 가지겠는가?" 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노인이 말한 대로 하였다. 그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돌이었다. 그래서 흰돌을 소값으로 받았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침실 속에 두었다. 그 神石이 아름다운 소녀로 변했다. 이에 아라사등은 몹시 좋아하여 교합(交合)하려 하였다. 그런데 아라사등이 다른 곳에 간 사이에 소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라사등은 크게 놀라 자기 처에게 "소녀는 어디로 갔는가?" 라고 물었다. "동방으로 갔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곧 찾아 쫓아갔다. 드디어 멀리 바다 건너 일본국으로 들어왔다. 찾는 소녀는 난파(難波)에 와서 비매어증사(比賣語曾社)의 神이 되었다. 또 풍국(豊國)이 국전군(國前郡)에 와서 다시 비매어증사의 神이 되었다. 두 곳에서 제사지낸다고 한다 --

이것은 임나왕자 아라사등과 관련된 일화를 적어넣은 듯 하다. 임나의 군내에서 제사지내던 흰돌이 일본으로 건너와 역시 신이 되었다는 것으로 미뤄봐서 임나가야의 야마대국 정복과 연결시키면 어떨까 한다. 도노아아라사등이라는 임나왕자가 숭신의 야마대국 정벌때 참전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같이 해보려고 한다.

여기에 보면 알겠지만 아 아라사등이라는 왕자는 어쩌면 숭신과 혈연적인 관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서 50대의 숭신이라면 그는 임나가야 내에서 원로대신이었을 것이다. 아마 왕권에서는 물러난 왕실의 어른 정도로 보고 있는데 임나가야를 건국한 거도의 혈족 등으로 생각된다. 주인장은 임나가야의 건국을 7~14년의 1세기 초로 보고 있기 때문에 100년에 50대의 나이인 숭신이 북구주를 정복했다면 그는 거도 이후 2세대 뒤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임나가야는 이 시기 최소한 3대 왕이 즉위하고 있었을 것이며 숭신은 원정군 대장으로서 바다 건너 북구주로 건너오게 된다. 그리고 아라사등은 이 왕의 아들 정도로서 같이 정벌전에 참여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숭신이 죽고 임나가야에서는 북구주 정벌전때 참여했었던 아라사등을 다시 보내 야마대국 조정을 보살피라고 했을 것이다. 실력으로 태자위를 차지한 수인은 본국에서 왕자가 직접 오자 대단히 황송했을 것이다. 마침 숭신이 죽고 혼란할법한 야마대국은 본국에서 온 왕자때문에 조용히 수인에게로 왕권이 넘어가고 별문제 없이 새 정권이 출범하게 된다. 3년상 동안 일본서기는 천황 즉위, 숭신 장례, 황후와 황태후 책봉 등의 의례를 무사히 마치고 임나왕자는 다시 본국으로 귀환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3년상을 마치고 임나가야의 왕자가 귀환한다는 소식은 임나와 신라 양측 다 전해들었을 것이고 무사히 귀환한 임나왕자가 있는 임나군 진영을 신라군이 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인장이 늘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 왜 신라군이 비단을 빼앗아갔을 것이다, 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기록은 비단에 집중해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 그 당시 임나-신라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임나가야 왕자의 복귀를 담당한 임나군은 신라군에게 패했던 것이다. 당연히 비단은 전리품으로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 비단이 보통 비단이 아니고 야마대국에서 본국으로 바치는 물건으로 그 수량이 엄청난지라 임나측에서도 이를 알고 분개했을 것이다. 신라군 역시 그것을 알고 전리품으로 당당히 들고 갔었고 말이다.

이듬해인 119년 봄 3월에 신라에서 '천일창' 이라는 왕자가 왜 열도, 야마대국에 도착해 7개의 보물을 주고 간다. 이때 신라에는 수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고 한다. 천일창 일행은 신라의 공식 사절로서 당시 야마대국의 본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신라는 후국인 야마대국을 포섭하려고 했을 것이다. 앞서 신라는 야마대국이 임나에 바친 비단 100필을 빼앗아간 것에 대해 사례하는 의미로 값비싼 보물까지 주었을 것이다. 이때는 신라와 임나간의 공방전이 한창일 때인데 신라는 이를 두고 외교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다음해에도 역시 임나와 신라간의 공방전은 계속되고 이 시기 야마대국에서는 황후의 동모형인 '협수언왕(狹穗彦王)' 이 반란을 일으켜 사직이 위태로워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시기 임나에 대해 크게 승리했던 신라는 이듬해인 지마이사금 10년(121) 봄 2월에 부산 일대에 대증산성을 쌓고 아예 자리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곧 임나의 반격에 의해서 무너지고 만다. 두달 뒤에 왜가 동쪽 변경을 공격하고 신라가 대증산성을 쌓으면서 차지하려고 했던 부산 일대는 신라의 손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후 왜의 신라 공세로 전세는 바뀌고 결국 지마이사금 12년(123)에 신라는 왜와 강화하고 전쟁은 끝이 난다.

대략 7~8년여간 계속된 전쟁에서 신라군은 결국 물러나고 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의 경남 지역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천일창을 파견해 외교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은 좋았지만 그다지 별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결국 값비싼 보물까지 주면서 차지하려던 부산 일대는 신라가 훗날 고구려의 힘을 빌어 이 지역에 수비병을 두는 5세기때까지 영영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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