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삼국사기 남해왕조를 보면 5년(AD 8)에 탈해를 사위 삼았고 7년(AD 10)에는 대보로 임명하여 군국정사를 맡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탈해가 62세로 AD 57년에 즉위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역산하여보면 탈해는 BC 5년에 태어나, 13세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15세에 군국정사를 맡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박씨도 아닌 다른 계열 사람이 15세에 군국정사의 대권을 맡는 일이 상식적으로 가능하기나 한 일입니까?
거기에 탈해이사금조에는 혁거세 재위 39년째인 임인년(BC 19)에 금관가야의 포구에서 태어났다고 했는데, 그러면 BC 5년에 태어났다고 한 것과 서로 모순 아닙니까? 삼국유사를 보면 일년 역시 이 모순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락국기는 더 이상합니다. 가락국기는 수로왕 3년경인 AD 44년경에 금관가야에 상륙하려는 석탈해를 쫓아내고 있습니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이때 탈해는 신라에 있어야 하는데 가야를 만나고 있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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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의 시조인 석탈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가락국기에 등장하는데 출생연도가 이상하게 BC 19년과 BC 5년으로 14년 차이를 두고 2원화 되어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역시 이 기록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초기신라의 여러 왕들 중 석탈해에 한해서만 출생연도를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면 금방 출생연도를 찾을 것 같으나 이와 같이 모순을 내포한다. 즉,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에 삼국사기는 석탈해의 나이를 남긴 것이다.
석탈해의 출생연도는 김부식이 모순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원사료로 추정되는 구삼국사에 이미 모순되게 적혀있었다고 본다. 구삼국사는 신라가 삼한통일을 완수한 8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는 아마 대부분의 초기 왕들에 대한 출생연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 중 석탈해만 남은 것은 어떤 사연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국가사서에 모순되는 기록을 이유 없이 남길 사관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석탈해가 혁거세 39년에 태어났다면 27세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29세에 군국정사의 대권을 행사하는 것이 되어 보다 합리적이다. 하지만 76세에 왕이 되고 99세에 사망한 것이 되어 모순이다. 그러면 수로왕 4년경에 금관가야에 상륙을 시도한 석탈해는 또 누구인가? 수로왕과 싸운 석탈해는 BC 5년경에 태어난 50세 경의 인물이 되어, BC 19년에 태어난 사람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이 석탈해 기록의 2중성 문제는 당시 신라에 2명의 왕이 있어서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즉, 남해왕 시절 한강유역의 신라에서 대보가 된 석탈해와 남해안에서 수로왕과 싸운 석탈해가 다른 것이다. 이 두 석탈해 중 대보가 된 석탈해를 편의상 <대보왕>으로 다른 석탈해와 구분하고자 한다. 그러면 2명의 석탈해는 다음과 같다.
(1) 대보왕과 또 1명의 박씨왕
혁거세 39년(BC 19) 한강북부에서 탄생
남해 5년(AD 8) 27세에 왕의 사위가 됨
남해 7년(AD 10) 29세에 군국정사의 대권을 행사
유리 20년(AD 43) 62세에 신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함
탈해 8년(AD 64) 백제와의 전투 - 최초의 충북지역 기사
탈해 14년(AD 70) 백제가 침범해 옴 - 충북지역 기사
탈해 18년(AD 74) 백제가 침범해 옴 - 충북지역 기사
탈해 20년(AD 76) 9월 와산성을 탈환함 - 마지막 충북지역 기사
* 백제에 패배한 신라가 충남지역과 호남지역 대신에 영남지역으로 남하함.
탈해 21년(AD 77) 8월 가야를 격파함 - 최초의 가야기사(파진찬 길문은 박씨왕조의 인물)
* 이후 석씨왕조를 만남
(2) 탈해왕
혁거세 53년(BC 5) 황해 바닷가에 위치한 용성국에서 탄생
유리 21년경(AD 44) 50세경, 낙동강 서쪽에 상륙하려다 수로왕에게 쫓겨남
탈해 3년(AD 59) 64세, 낙동강 동쪽에 상륙
탈해 17년(AD 73) 78세, 낙동강 동쪽에서 쫓겨남(각간 우오는 석씨왕조의 인물)
탈해 18년경(AD 74) 79세경, 월성지역에 상륙
탈해 24년(AD 80) 85세로 사망하고 다시 왕권이 박씨에게 넘어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탈해왕력은 기본적으로 남해바다를 건너온 석탈해의 왕력이다. 하지만 그 앞에 한강유역에서 신라를 이끌고 내려온 왕과 합해지다보니 이상하게 석탈해가 2중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신라본기는 왕성이 바뀔 때마다 사위로 만들어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석탈해 외에도 미추왕이 첨해왕의 사위로, 내물왕과 실성왕이 미추왕의 사위로 되어있으나 이 중에 미추왕을 제외하고는 가능성이 적다.
바다를 건너온 석탈해는 왕의 사위가 아니고 스스로 석씨왕조의 건국자이자 처음부터 왕이었다. 그를 왕의 사위로 만든 것은 정통성 때문이며, 남해왕의 대보가 된 사람은 다른 인물이다. 신라본기 유리이사금조는 19년이 실제로는 마지막이며 이후 31년 기사가 나와 그 사이 11년이 공백이다. 31년 부터도 괴이한 기사 뿐이다. 이는 유리 20년 부터 말년인 34년까지는 대보왕이 실제 신라왕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보왕은 남하 중 사망하였으며 다른 박씨왕이 이를 이었을 것이다. 이 대보왕은 유리이사금 후반기와 탈해이사금 초반기와 겹치는 관계로 자신의 왕력은 남기지 못했으나, 유리이사금조의 공백과 탈해이사금조에 모순된 기록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고 본다.
초기신라는 <혁거세-남해-유리>의 3왕이 한반도 중부의 기록이며, 박씨왕조는 대보왕 때가 남하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백제에게 패하여 한반도 동부로 들어가, 가야에게 밀려 남해안을 돌아온 석씨왕조를 만난다. 박씨왕조와 석씨왕조의 만남은 탈해 말년부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탈해 21년 최초의 가야기사 이후이다. 그 이유는 석씨왕조는 이미 오래 전에 가야를 만났으나, 박씨왕조는 이때 낙동강유역에 들어오며 영남지역의 관문을 지키던 가야군을 황산진에서 격파한 것이다. 이 가야 기사부터는 기록의 이중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보왕 이후 박씨왕조를 이끌고 남하한 지도자는 석탈해와 겹쳐 흡수된 관계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본다. 석씨왕조와 박씨왕조의 최초 만남은 박씨왕조의 승리로 끝났다. 신라의 경북지역 정복은 두 왕조를 통합한 파사이사금에 의하여 단행된다.
거기에 탈해이사금조에는 혁거세 재위 39년째인 임인년(BC 19)에 금관가야의 포구에서 태어났다고 했는데, 그러면 BC 5년에 태어났다고 한 것과 서로 모순 아닙니까? 삼국유사를 보면 일년 역시 이 모순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락국기는 더 이상합니다. 가락국기는 수로왕 3년경인 AD 44년경에 금관가야에 상륙하려는 석탈해를 쫓아내고 있습니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이때 탈해는 신라에 있어야 하는데 가야를 만나고 있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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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의 시조인 석탈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가락국기에 등장하는데 출생연도가 이상하게 BC 19년과 BC 5년으로 14년 차이를 두고 2원화 되어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역시 이 기록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초기신라의 여러 왕들 중 석탈해에 한해서만 출생연도를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면 금방 출생연도를 찾을 것 같으나 이와 같이 모순을 내포한다. 즉,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에 삼국사기는 석탈해의 나이를 남긴 것이다.
석탈해의 출생연도는 김부식이 모순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원사료로 추정되는 구삼국사에 이미 모순되게 적혀있었다고 본다. 구삼국사는 신라가 삼한통일을 완수한 8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는 아마 대부분의 초기 왕들에 대한 출생연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 중 석탈해만 남은 것은 어떤 사연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국가사서에 모순되는 기록을 이유 없이 남길 사관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석탈해가 혁거세 39년에 태어났다면 27세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29세에 군국정사의 대권을 행사하는 것이 되어 보다 합리적이다. 하지만 76세에 왕이 되고 99세에 사망한 것이 되어 모순이다. 그러면 수로왕 4년경에 금관가야에 상륙을 시도한 석탈해는 또 누구인가? 수로왕과 싸운 석탈해는 BC 5년경에 태어난 50세 경의 인물이 되어, BC 19년에 태어난 사람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이 석탈해 기록의 2중성 문제는 당시 신라에 2명의 왕이 있어서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즉, 남해왕 시절 한강유역의 신라에서 대보가 된 석탈해와 남해안에서 수로왕과 싸운 석탈해가 다른 것이다. 이 두 석탈해 중 대보가 된 석탈해를 편의상 <대보왕>으로 다른 석탈해와 구분하고자 한다. 그러면 2명의 석탈해는 다음과 같다.
(1) 대보왕과 또 1명의 박씨왕
혁거세 39년(BC 19) 한강북부에서 탄생
남해 5년(AD 8) 27세에 왕의 사위가 됨
남해 7년(AD 10) 29세에 군국정사의 대권을 행사
유리 20년(AD 43) 62세에 신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함
탈해 8년(AD 64) 백제와의 전투 - 최초의 충북지역 기사
탈해 14년(AD 70) 백제가 침범해 옴 - 충북지역 기사
탈해 18년(AD 74) 백제가 침범해 옴 - 충북지역 기사
탈해 20년(AD 76) 9월 와산성을 탈환함 - 마지막 충북지역 기사
* 백제에 패배한 신라가 충남지역과 호남지역 대신에 영남지역으로 남하함.
탈해 21년(AD 77) 8월 가야를 격파함 - 최초의 가야기사(파진찬 길문은 박씨왕조의 인물)
* 이후 석씨왕조를 만남
(2) 탈해왕
혁거세 53년(BC 5) 황해 바닷가에 위치한 용성국에서 탄생
유리 21년경(AD 44) 50세경, 낙동강 서쪽에 상륙하려다 수로왕에게 쫓겨남
탈해 3년(AD 59) 64세, 낙동강 동쪽에 상륙
탈해 17년(AD 73) 78세, 낙동강 동쪽에서 쫓겨남(각간 우오는 석씨왕조의 인물)
탈해 18년경(AD 74) 79세경, 월성지역에 상륙
탈해 24년(AD 80) 85세로 사망하고 다시 왕권이 박씨에게 넘어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탈해왕력은 기본적으로 남해바다를 건너온 석탈해의 왕력이다. 하지만 그 앞에 한강유역에서 신라를 이끌고 내려온 왕과 합해지다보니 이상하게 석탈해가 2중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신라본기는 왕성이 바뀔 때마다 사위로 만들어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석탈해 외에도 미추왕이 첨해왕의 사위로, 내물왕과 실성왕이 미추왕의 사위로 되어있으나 이 중에 미추왕을 제외하고는 가능성이 적다.
바다를 건너온 석탈해는 왕의 사위가 아니고 스스로 석씨왕조의 건국자이자 처음부터 왕이었다. 그를 왕의 사위로 만든 것은 정통성 때문이며, 남해왕의 대보가 된 사람은 다른 인물이다. 신라본기 유리이사금조는 19년이 실제로는 마지막이며 이후 31년 기사가 나와 그 사이 11년이 공백이다. 31년 부터도 괴이한 기사 뿐이다. 이는 유리 20년 부터 말년인 34년까지는 대보왕이 실제 신라왕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보왕은 남하 중 사망하였으며 다른 박씨왕이 이를 이었을 것이다. 이 대보왕은 유리이사금 후반기와 탈해이사금 초반기와 겹치는 관계로 자신의 왕력은 남기지 못했으나, 유리이사금조의 공백과 탈해이사금조에 모순된 기록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고 본다.
초기신라는 <혁거세-남해-유리>의 3왕이 한반도 중부의 기록이며, 박씨왕조는 대보왕 때가 남하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백제에게 패하여 한반도 동부로 들어가, 가야에게 밀려 남해안을 돌아온 석씨왕조를 만난다. 박씨왕조와 석씨왕조의 만남은 탈해 말년부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탈해 21년 최초의 가야기사 이후이다. 그 이유는 석씨왕조는 이미 오래 전에 가야를 만났으나, 박씨왕조는 이때 낙동강유역에 들어오며 영남지역의 관문을 지키던 가야군을 황산진에서 격파한 것이다. 이 가야 기사부터는 기록의 이중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보왕 이후 박씨왕조를 이끌고 남하한 지도자는 석탈해와 겹쳐 흡수된 관계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본다. 석씨왕조와 박씨왕조의 최초 만남은 박씨왕조의 승리로 끝났다. 신라의 경북지역 정복은 두 왕조를 통합한 파사이사금에 의하여 단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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