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족은 항상 옮겨 다니며 살므로 사는 지역은 무의미하고 대신 혈통이 중요하다. 반면에 정착하여 사는 농경민족은 혈통은 무의미하고 사는 지역이 중요하다. 중기 이후 신라의 신분제도의 근간을 이룬 골품제는 전형적인 유목민족의 풍습이다.
골품제는 다시 성골과 진골이 중심이 되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기준이 불명하며, 또 그 기준이 하나인지 여러 개인지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골품제라는 용어가 말 그대로 뼈의 신분을 뜻하므로 기준이 여러 개라도 혈통이 주가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신라에서 성골왕의 소멸과 진골왕의 등장을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골품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유사 역시 진골왕의 출현을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上代: 혁거세-진덕왕(28명), 中代: 태종무열왕-혜공왕(8명), 下代: 선덕왕-경순왕(20명);
<삼국유사> 上古: 혁거세-지증마립간(22명), 中古: 법흥왕-진덕왕(6명), 下古: 태종무열왕-경순왕(28명)
신라의 골품제는 법흥왕에 이르러 법률체계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전의 기득권자로부터 자신들의 기득권을 어떻게 보호하느냐가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본다. 법흥왕 때 지배층이 김씨나 박씨로 성을 변경하였다면 이전의 김씨나 박씨와는 무엇이라도 달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골은 미추왕과 내물왕 때 들어온 김씨와 박씨만으로 이루어진 혈통이고, 진골은 여기에 그 이전에 들어온 김씨와 박씨가 섞인 혈통이 아닌가 생각한다.
법흥왕으로부터 약 백년 후에 성골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성골의 조건이 진골에 비하여 매우 엄격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건이 엄격한 것은 역으로 자신들의 세력약화를 가져와 신라에 들어온 지 3백년만인 7세기 중반 2명의 여왕시대를 경계로 진골들에게 왕권을 뺏겼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신라중기의 성골의 소멸은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에게 동화되어 가는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골품제는 다시 성골과 진골이 중심이 되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기준이 불명하며, 또 그 기준이 하나인지 여러 개인지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골품제라는 용어가 말 그대로 뼈의 신분을 뜻하므로 기준이 여러 개라도 혈통이 주가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신라에서 성골왕의 소멸과 진골왕의 등장을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골품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유사 역시 진골왕의 출현을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上代: 혁거세-진덕왕(28명), 中代: 태종무열왕-혜공왕(8명), 下代: 선덕왕-경순왕(20명);
<삼국유사> 上古: 혁거세-지증마립간(22명), 中古: 법흥왕-진덕왕(6명), 下古: 태종무열왕-경순왕(28명)
신라의 골품제는 법흥왕에 이르러 법률체계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전의 기득권자로부터 자신들의 기득권을 어떻게 보호하느냐가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본다. 법흥왕 때 지배층이 김씨나 박씨로 성을 변경하였다면 이전의 김씨나 박씨와는 무엇이라도 달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골은 미추왕과 내물왕 때 들어온 김씨와 박씨만으로 이루어진 혈통이고, 진골은 여기에 그 이전에 들어온 김씨와 박씨가 섞인 혈통이 아닌가 생각한다.
법흥왕으로부터 약 백년 후에 성골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성골의 조건이 진골에 비하여 매우 엄격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건이 엄격한 것은 역으로 자신들의 세력약화를 가져와 신라에 들어온 지 3백년만인 7세기 중반 2명의 여왕시대를 경계로 진골들에게 왕권을 뺏겼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신라중기의 성골의 소멸은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에게 동화되어 가는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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