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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아름]인용자료

말갈백제 6. 대방국 - 김상

작성자麗輝|작성시간04.09.02|조회수109 목록 댓글 0
낙랑의 기록은 대방과 함께 만주의 요서와 한반도로 이원화되어 있다. 낙랑이 한반도에 나타나는 이유는 만주의 낙랑인들이 한반도로 남하하여 낙랑국을 건국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면 대방국은 어떤가? 낙랑과 대방의 지역적 2원화를 평생동안 연구하신 윤내현 교수님도 대방국의 건국만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후 韓의 북쪽 경계에는 또 한 번의 변화가 있었다. ... 황해도 지역에 대방국이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대방국은 난하유역에 위치해있던 대방군 사람들이 이주해서 세웠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들은 원래 고조선의 국민들이었다. 대방국은 그리 큰 세력은 아니었으며 오래 존속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 건국시기도 분명하지 않다." - 고조선 연구, 526쪽/윤내현

나는 백제의 발해만 건국설을 낼 때 백제가 건국하였다는 대방고지가 3세기 초에 낙랑군의 남쪽을 떼어 설치한 것이라면, 백제본기 초에 낙랑이 국가의 북쪽에 있다고 나와야지 왜 남쪽에 있다고 나오느냐는 질문을 받고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백제가 한 때 있었다는 대방고지는 도대체 한반도인가? 만주인가?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자. 하지만 훗날 백제왕이 받은 시호에 "대방왕"이라는 것이 있어서 백제는 대방과 틀림없이 무슨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3세기 초에 요하 하류를 장악한 공손씨가 낙랑군의 남쪽에 대방군을 세우자 그 지역의 고구려인들이 공손씨의 탄압을 피하여 한반도 쪽으로 대거 이동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 중북부에 대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3세기 초에 거의 백여년만에 다시 나타나는 말갈의 대규모 침입이다. 공손씨가 낙랑군 남쪽을 대방군이라 이름한 것은 그 지역이 본래 대방이라 불렸기 때문일 것이다. 대방지역에서 피난온 고구려인들이 한반도로 들어왔으나 평안도는 이미 낙랑이 있어서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남하하게 되었다.

이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 당시 힘의 공백지대인 황해도 북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이주민의 숫자가 너무 많아 이들은 황해도에 다 정착하지 못하고 주력이 멸악산맥을 넘어 생산력이 더 뛰어난 경기지역으로 계속 남하하니, 한성백제와 신라뿐만 아니라 한강유역에 있었던 한의 소국들은 모두 이들의 침입을 받게 된다. 당시 신라에 비해 백제가 월등히 말갈의 침입을 많이 받은 것은 말갈이 강원도 쪽이 아니라 황해도 쪽에서 내려왔다는 증거이다.

경기도에 내려온 말갈의 주력은 한성백제의 왕권을 장악하였다. 형식은 혼인을 통한 결합이지만 실제로는 힘에 의한 정복이고, 고이왕은 그 말갈군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고이왕이 말갈군을 지휘하고 내려올 때 보따리를 싼 수많은 피난민이 뒤를 따랐을 것이다. 고이왕이 한성백제의 왕이 되어 정권기반을 확실히 닦았다는 소식을 들은 황해도 지역의 말갈 지도자가 축하선물을 보내니 이것이 고이왕 25년의 기록이다.

고이 25년(258년), 봄, 말갈의 長 羅渴이 좋은 말 10필을 바치니 왕은 그 사자를 후대하여 보냈다.

나갈이 말갈의 '추장'이 아니고 그냥 지도자를 뜻하는 '長'이다. 고구려왕이나 신라왕의 이름도 잘 올리지 않는 백제왕실의 기록에 하찮은(?) 말갈의 長이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후 황해도 지역의 말갈은 어떻게 되었을까? 백제본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갈이 선물을 보낸 약 30년 후인 286년, 황해도 지역의 대방국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백제에 구원을 청한다. 나갈 이후 말갈은 국가를 칭하고 자립한 것이고, 그 국명은 낙랑국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과거 자신들이 살았던 지역의 이름을 따서 대방국이라 했을 것이다.

말갈의 지도자 나갈은 대방국의 시조대왕이다. 長이라 칭한 것은 '추장'에서 '왕'으로 가는 중간단계다. 책계왕의 왕비인 대방공주 寶果는 나갈의 딸이었을지도 모른다. 백제와 대방이 혼인한 것은 단순히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정략적 결혼이 아니라 두 나라는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갈국가였기 때문이리라.

고이왕이 53년을 재위하였다는 것은 그가 결혼할 젊은 나이에 즉위하였다는 뜻이다. 대개 결혼 후 25년 쯤 지나면 자식을 혼인시키게 된다. 고이왕 25년에 말갈사자가 올 때 혹시 보과공주가 시집온 것은 아닌지. 만일 그렇다면 보과의 아들인 분서왕은 260년대 초에 태어나, 40대 초반에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죽었을 것이다(304년). 그러나 40대 초반이면 그의 아들인 계왕(설왕)은 적어도 10대 후반 - 20세 정도 되어,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광개토왕도 18세에 왕위에 올랐다. 혹시 그의 아버지인 분서왕이 요서에서 갑자기 전사하여 왕위를 구 왕통인 비류왕에게 내준 것은 아닌지.

고구려가 대방국을 공격하였다는 백제본기의 기록이 고구려본기 서천왕조에는 없다. 대방국은 백제의 입장에서나 국가이지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일부일 뿐 국가가 아니다. 서천왕때 고구려가 대방국을 공격한 것은 대방이 독립을 추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대방국은 고구려에게 귀속되고 그 지도층은 300년에 신라에 귀복함으로써 대방국 역사는 막을 내린다. 대방국은 고이왕 25년 직후인 260년경에 건국되어, 약 40년 정도 유지되다가, 나갈이 고이왕과 비슷한 연배라고 보면 그의 손자 정도에서 멸망한 나라였다. 대방국의 존속은 말갈시절까지 따져도 70년 불과하지만, 그 자취는 한국사에 오래 남아, 황해도 지역을 계속 대방이라 불렀고, 훗날 고구려가 대방군을 멸망시켰을 때 그 포로들을 다시 이곳에 이주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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