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일본판 「환단고기」를 번역소개한 가시마 노보루는 일본사의 혁명적인 대륙사와 문명서래설을 보여준다. 다음의 「환단고기」 서문 내용 중 "북왜, 남왜설"에 대한 내용과 "<단군세기(檀君世紀)>-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내용 및 "단군세기(檀君世紀)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니기하야히)과 산와(山窩)"에 대한 내용, "「단군세기」-왜한(倭韓) 양족과 솔로몬의 선단", "<북부여기(北夫餘紀)>-단군조선과 시황제(始皇帝)"에 대한 대륙사관적 견해를 들어본다. 중요한 것은 이 학설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 전에 가시마는 일본인 학자로서 「환단고기」를 100% 인정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사를 북왜설과 서래설의 대륙사로 끌어올리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사관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국내 식민지 노예 사학자들에게 좋은 경종을 울려 줄 것이다. 참고로 그간 강단 식민사학자군과 재야 민족사학계 사이에 「환단고기」의 진위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어왔음에도 막상 일역판 환단고기의 역자 가시마가 쓴 다음의 내용은 필자가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것이다.
북왜(北倭)와 남왜(南倭)
-「일본서기」가 감추려 한 것은 천황가-정확히는 환무(桓武)가 백제 망명자였다는 사실이지만, 이 역사위조의 원점에 만주에 있던 왜인(北倭)라는 문제가 있었다. 「산해경」<해내북경>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사무산(蛇巫山) 위에는 어떤 사람이 몽둥이를 잡고 동쪽을 향해 서 있다. 혹은 구산(龜山)이라고도 한다.…능문산(凌門山)도 황하가 그 가운데서 흘러나온다. 왕자야(王子夜)의 시(尸)는 두 손, 두 다리, 가슴, 머리가 모두 끊어져 따로 있다. 순(舜)의 부인 등비(登比)씨가 소명(宵明)과 촉광(燭光)을 낳았다. (이들은) 황하의 대택(大澤)에 살았는데, 두 여인은 신통력으로 이곳 사방 100리를 비출 수 있었다. 혹은 등북(登北)씨라고도 한다. 개국(蓋國)이 거연(鋸燕)의 남쪽, 왜(倭)의 북쪽에 있다.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 조선(朝鮮)이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열양(列陽)은 연(燕)에 속한다. 열고야(列姑射)가 바다 가운데의 섬 속에 있다. 야고국(射姑國)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데 열고야(列姑射)에 속하며 서남쪽을 산이 에워싸고 있다. 큰 게(大蟹)가 바다 한가운데에 산다. 능어(陵魚)는 사람의 얼굴에 팔 다리가 있고 몸둥이는 물고기인데 바다 한가운데에 산다. 큰 방어( 魚)는 바다 한가운데에 산다. 명조읍(明組邑)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봉래산(蓬萊山)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대인(大人)들의 저자(市場)가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또한 「산해경」<해내동경>에는 거연(鉅燕)은 동북의 변두리에 있다고 했다. 이것을 백기소일랑(白崎昭一郞)은 다음 그림과 같이 비정(比定)했다.
(왜의 위치 도표그림)
연(燕)의 동북에 거연(鉅燕), 거연의 남쪽에 개국(蓋國), 다시 그 남쪽에 왜(倭)
그러나, 이 문장에는 실은 문제가 있다. 즉, <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이라는 문장을 강호(江戶) 시대까지는 <개국은 거연에 있다. 남왜와 북왜는 연에 속한다>고 읽지만, 명치이후 '남왜와 북왜'로는 곤란해서 <개국은 거연의 남, 왜의 북에 있다. 왜는 연에 속한다>고 고쳐 읽은 것이다. 이 부분이 한문의 중요부분으로 문장을 고쳐 읽기도 하고, 심한 것은 「일본서기」 등의 흠이 있는 글자 보정(補正)시, 한자를 2-3자 바꾸면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실로 태양이 서에서 떠오르는 것이 된다.
한편, 여기서 거연(鉅燕)과 연(燕)의 관계인데, 「왜인흥망사」 제 24장은 진운은(辰 殷:箕氏朝鮮)을 지회씨(智淮氏) 연(燕)으로 하고, 소연(邵燕)과 별도의 것으로 하기 때문에, 거연(鉅燕)은 기씨 조선의 지회씨(智淮氏) 연(燕)으로, 개국(蓋國)은 기씨조선의 영역, 즉 대능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된다. 다음에 동서 제 31장은 '이것보다 앞서 완(宛)의 서(徐), 바다를 건너 박진(舶臻)씨, 은(殷:辰 殷:箕氏朝鮮)에 의지하여 완난(宛難:塔子河)에 머물고 땅을 격한 것이 수 천리, 현모달(弦牟達:摩天嶺)에 성을 쌓고, 곤막성(昆莫城)을 칭하고, 나라를 서가은(徐珂殷)이라 부른다'고 되어있고, 또한 서가은은 후에 부여(夫餘)에 합친 것으로 되어, 개국(蓋國)이 거연(기씨조선)에 있다는 것은, 개국이 서하은 후의 부여인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역시 '개국은 거연에 있다'고 읽어야 하고 '거연의 남에 있다'는 해석이 틀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남왜, 북왜란 도대체 무엇일까. 평야방웅(平野邦雄)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규슈(九州)에 있어서의 고대호족과 대륙」「고대 아시아와 규슈(九州)」에 수록)
-송촌무웅(松村武雄)씨는 규슈의 아담(阿曇)씨는 남양계 민족으로 준인족( 人族)과 함께 인도네시아 계일 것으로 보고, 우원우길(羽原又吉)씨는 찌꾸젠(築前)을 본거로 하는 안담(安曇)족 계통의 해인족(海人族)을 야마또(大和)족으로 구별하여, 이 양 족을 매개로 한 것이 안담기량(安曇磯良)으로 상징되는 인물로, 해인족(海人族)의 본원지는 인도네시아 섬들이고, 그들은 복건, 광동의 민월( 越:전통적 동이족 거주지) 지방으로 이주하여 단민(蛋民)이 되고, 북상하여 남서 여러 섬에서 규슈에 걸쳐 있고, 금관장부(金關丈夫)씨는, 아마도 일본에 미생(彌生)문화를 옮긴 것은 그들 해인족(海人族)의 조상으로, 수전가일랑(藪田嘉一郞)씨는, 아담(阿曇)족 즉, 일본의 월족(越族)은 남지나에서 우리 서남 지방으로 도항한 족속으로, 해인(海人)을 백수랑(白水郞)으로도 쓰는 것은 남지나 천주(泉州)의 수인(水人)이라는 의미의 샘 천(泉)의 의미를 백(白)과 수(水)로 나눈 것으로 생각되고, 그들은 원래 물속으로 잠수하여 진주를 캐던 백성으로, 월(越)족의 용사(龍蛇) 토템(복희씨 토템)을 갖고, 이들 남방 민족은 무수히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도래했지만, 후에 소수집단의 북방민족(조선족)에게 압도되어, 농천정차랑(瀧川政次郞)씨는 준인족( 人族), 아담족(阿曇族)이 그 원주지인 화남(華南)에서 초래한 집돼지, 즉, 돼지를 기르는 것이 저감부(猪甘部)로, 이 양 종족은 원래 동일종족으로, 공히 문신의 풍속이 있고, 용사(龍蛇)의 토템을 갖고, 단민(蛋民), 결국 민월( 越)족과 같다. 아마 기원 전 1, 2 세기에 백월(百越:임혜상에 의하면 동이족이다) 백성은 한무제에 의한 한(漢) 족 남진에 의해 해상으로 도망가, 흑조(黑潮)를 타고 북규슈에 도착한 아담(阿曇)족과 남규슈에 도착한 준인족( 人族)으로 나뉜 것으로, 삼품창영(三品彰英)씨는, 해인족(海人族)의 고기잡이법이나 문신의 습속은 직접적으로는 남조선에서 도래한 것으로, 한족(韓族) 가운데에서도 진한(辰韓)과 변진(弁辰)의 부족간에는, 남방 해양 제 민족에 계통한 문화요소를 전승하고 있는 면이 적지않지만, 이것은 해류 기타 지리적 조건으로 볼때 이살한 것은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농천정차랑은 화남(華南)에서 왔다는 <저감부(猪甘部)>가 한무제를 피해 일본으로 이동했다고 하는데, 이들을 이끈 것이 진(秦) 왕조의 일족으로 우리 나라의 원전언(猿田彦)이다. 한무제때 창오(蒼梧)의 진왕(秦王)이 이끈 남월(南越)의 백성이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도망간 것에 대해서는 필자도 「반첸·왜인의 뿌리」에서 상세히 서술했다. 여기서 삼품창영(三品彰英)이 한반도로부터 왜인이 왔다는 것은 <북왜>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북왜인 것과 함께 부여(夫餘)의 저가( 加)로, 우리나라의 저가부(猪加部), 안담수군(安曇水軍)으로, 왜의 수군과는 원래 니기하야히의 예국(濊國)-부여에 속해 있던 아마쯔마라의 수군으로 생각된다.
곽박의 「산해경」<대황동경> 대인지국(大人之國)의 조주(條注)에, '고회(高會)는 말하길, 왜국 사람이 모두가 바람을 만나, 바람에 불려 대해 밖으로 건너, 일국을 봤지만, 모두 키가 크고 형상은 호(胡)와 닮았다고 되어있다. 적송문삼우(赤松文三祐)는 이것을 인용하여, '고회(高會)는 평주(平州)의 양평(襄平)에서 왜인으로부터 이것을 듣고, 건강(建康)에 도착해 곽박에게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쓰고 있다.
「후한서」<동이열전>은 '단석외(檀石 ), 왜망포(倭網捕)를 도와준다고 듣고, 동쪽 사람이 왜인국을 공격하여 천여가(千餘家)를 얻다. 따라서 진수(秦水)의 위에 놓고 고기를 잡다'라고 쓰여있다. 그런데,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일본이 가장 오래고 또한 크다. 그 땅 흑룡강의 북에서 시작되고, 제주의 남에 도달하여 오끼나와와 서로 접한다.'고 쓰여있다. 따라서 <북왜>의 영토는 흑룡강의 북에 이른다.
력도원( 道元) 「수경주(水經注)」대요수고평천(大遼水高平川)의 조(條)에, '물은 서북 평천(平川)으로 나오고, 동류하여 왜성(倭城)의 북을 지난다. 단 왜지의 사람은 이것에 따른다' 고 되어있고, 「원경(元經)」진(晋) 태원 7년의 조는 '왕통(王通)이 9월 동이 5국에 와 조공하다'고 기록하고 그 설목(薛牧)의 전(傳)은 '동이 5국이란 부여, 3한, 숙신(肅愼), 왜인, 비리(裨離)이다. 현토(玄 )의 동북에 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발해의 시대 흑룡강의 유역에는, 흑수물길부(黑水勿吉部)가 있고, 물길 7부족 가운데 가장 정예롭고 강하다(精强)고 한다. 흑수부는 후에 고려의 망명자를 왕으로 하여 거란(요)을 멸하고 금(金)국을 세웠다. 「산해경」이 쓴 북왜는 이 흑수부나 백산부(白山部)에 섞여 들어간 것(混入)이 아닌가. 이 백산부가 우리 예다(穢多:えた)의 뿌리인 것 같다.
거란의 사서 「왜인흥망사」는 기씨(箕氏) 조선사가 바탕이 되지만, 부여, 고구려, 왜국의 건국사가 첨부되어 있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봐도, 거란의 가운데에 <북왜>가 있었던 것은 인정된다. 더욱이 「고려기」대명홍무(大明洪武) 21년조에, 수척(水尺:무자리), 재인(才人), 경종(耕種:농사)을 일로 하지 않고 산 계곡(山谷)에 모여 왜적이라 칭하다. 그 힘이 무섭다. 운운' 되어있다. 또한 거란군이 고려에 침입하면, 백정들이 우리는 왜인이라 하고 호응했다 한다. <백정(白丁)>은 백정준인(白丁 人)과 같고, 조선의 예다(穢多:えた)이고, 수척재인(水尺才人)은 조선의 산와(山窩:움집)이지만, 함께 반도잔류의 <북왜>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단군세기> 제 35대 단군 사벌(沙伐)의 무오 50년 조는 '제(帝),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파견하여, 해상의 웅습(熊襲:꾸마소, 구마모또)을 평정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언파불합이란 우리나라(일본)의 우가야 "우가야 후끼아에즈"로, 정확히는 우가야 1대왕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이다. 우가야 후끼아에즈가 「일본서기」에는 "언파렴무로자초집불합존(彦波 武 草葺不合尊)」이 되고, 「고사기(古事記)에는 "천진일고일자파한건제집초집불합존(天津日高日子波限建 葺草葺不合尊)」이 되는 것은 유아라도 알 수 있다. 「구사기( 事紀)(3중판))에는, 「로자초집불합존( 草葺不合尊)」이 되는데, 삼서(三書)는, 우가야 왕조의 전대(全代)를 1대에 압축하여, 신무(神武)의 부(父)를 1인의 우가야 왕으로서, 소위 "키세르 계도(系圖)" 를 위조한 것이다.
-잠시 보완설명 인용-정일영은 「고대사 동방대제국」에서 언파불합의 꾸마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은나라가 망한 후 은의 덕망 있는 신료가 주나라에 항복해서 봉작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은나라의 당시 선진의 도덕성은 그와 같았으며 은나라 사람들이 그 당시 부른 시에도 오랑캐(周나라)가 침입하여 물리칠 수 없는 터에 유왕이 色情에 침적하여 충신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아니 한다고 한탄하였다. 기자를 朝鮮王에 봉했다는 변조는 당시 무제가 힌 4군을 설치했다는 역사 날조를 하기 위하여 안사고에게 강요했음이랴! 아니면 후기에 당태종이 한 짓인지.
안사고는 문제가 역사를 변조하면서 {시전} {서전} 등에 기록을 모조리 없애는 작업을 소홀했다. 이러한 고서 기록이 남아 있음으로서 역사를 바르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은 무왕이 조선왕을 봉했다는 것과 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두 가지 허위 사실을 모든 후세 역사 기록에 강조하여 古代 東夷 군자국의 문화 사회에 뒤떨어진 국민의 열등감을 씻고자 이를 항상 앞세워 기술하는 역사 서적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일제 식민 교과서는 이를 근거로 한층 조선 고대사를 말살하여 일본사를 위조하고 이것을 근거로 삼아 식민 사관을 보급하였다.
여기서 부동한 식민 사관이 생겨 신중한 古代史 記錄을 참고 없이 국민의 역사관을 오도한 것이다.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면서도 기자나 伯夷 叔齊같은 주나라에 불복하고 봉작도 받지 아니하는 인사들을 충절 지사라고 찬양하는 철학자로서 충효 사상의 윤리 도덕을 존중하는 성인이였다. 당시 주나라 사람들이 무왕을 성군이라 하였으나 공자는 무왕이 무력으로 통일을 했다고 왕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무왕은 각부 추장들을 그대로 두어 조선 제국 제도를 본따 제후에 봉하고 주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이 되게 하고 종주국으로서 관할권을 가졌으며 제후 추장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주왕의 딸들을 시집보내여 사돈을 삼았다.
비빈이 많았으니 딸도 많았을 것이다. 주왕의 딸은 姓이 姬氏니 王姬라고 불렀다. 그리고 타고 다니는 수레와 입고 다니는 옷은 화려한 성장이였다. (周王之女姬姓故曰姬下嫁於諸侯車腹之盛 {侍典}) 주왕은 제후 추장들에 가혹한 조공을 받지 아니하고 종주국으로 인정케하는 것으로 그치고 은나라 국민도 반항자를 학살하지 아니하고 노예로 포섭하여 차츰 주나라에 동화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가들은 그를 역시 성군이라고 호칭하였다. 공자는 물론 올바른 인군이 아니라고 평하였다. 이 때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 영토를 중원의 중심 지역뿐이고 지금의 하북 하남 산동성과 황하 일대는 모두 대단군 영토였다.
단군세기({환단고기})에 BC 909년 제30대 단군 나휼(나휴) 천왕이 청구(靑丘, 수도)의 정사를 살피고 치우천왕의 공덕을 돌에 세기고 서쪽으로 엄록홀에서 列國汗들이 모여 열병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으며 흉노가 조공을 받쳤다고 하였다. BC 723년에는 웅습(熊襲)이 반란을 일으켜 대장 언파불합을 海上의 熊襲에게 보내 평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는 後記할 것이나 해상이라 함은 倭國에 위치한 큐슈(九洲) 쓰시마(對馬島) 이키(臺岐) 시곡(四國) 등 4개 섬을 말하며 거기 강력한 추장 구마소(熊襲)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토벌한 것이다. 근래에 와서 일본의 역사책은 이것을 일본의 고대사에 편입하여 일본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倭國의 고대 인명에 무슨 마로(磨呂), 무슨 미고도(尊), 무슨 히꼬(彦)라는 것들은 당시 그곳의 통치 계급인 조선인이다.
日本史에 熊襲을 구마소라고 하는 것은 熊襲 즉 곰습을 일본 발음으로 구마소라 부른 것이다. 일본 고대사에 웅습에 관한 기록은 물론 후세에 와서 삽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 반도에 인적이 드물고 남부 해안 지역에 약간의 사람들이 살고 거기서 가까운 일본 열도의 서남단에 있는 구주 지방과 교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단군 제국의 월주지역 (上海 부근)과 행상으로 통하여 단군 제국 광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는 반여언(磐余彦:神武)을 이도국(伊都國) 왕(王)으로 하는데, 「세기(世紀)」의 언파불합(彦波弗哈)은, 단군 사벌(前(B.C.) 711-643)의 시(時), "해상의 웅습(熊襲)을 평정한" 왕이므로, 멀리 후세, 왜의 대란당시의 이도국왕(伊都國王)·신무(神武)의 부(父)일리가 없다. 따라서 「세기(世紀)」의 기술은 우가야 후끼아에즈를 한 명의 왕이 아닌 일계(一系)의 왕조로 하는 『상기(上記)』『궁하(宮下)』 등이 옳은 것을 입증하고 있다. 「세기(世紀)」는 언파불합(彦波弗哈)을 신무시대가 아니라, 전(前) 8-7세기의 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 이 왕은 우가야조(朝) 초두(初頭)의 왕이다.
그런데, 『궁하문서(宮下文書)』는 제 1대 우가야 왕을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으로 기록하고, 이 왕명(王名)은 3서에 비교하면 가장 언파불합(彦波弗哈)과 유사하다. 즉, 1)언(彦)이 일자(日子) 2)파(波)가 파(波: ) 3)불(弗)이 무(武) 4)합(哈)이 (言) 합(合)과 도일하고, 2)에서는 파(波)와 염( ), 4)에는 언(言)과 합(合)이 동어(同語) 중복되어 있다. 전부터 나는, 본서(환단고기)를 인식하기 전에, 졸저 「실크로드의 왜인」에서 우가야 제 왕의 왕대를 고증했지만, 거기서 추리한 우가야 1대 왕과 이의 언파불합(彦波弗哈)과는, 거의 거의 같은 시대였다.
이와같은 「세기(世紀)」와 『궁하문서(宮下文書)』에 있어서의 우가야 1대왕의 연대 및 왕명(王名)의 유사는, 전혀 별개로 전해진 양서(兩書)의 신뢰성이, 함께 극히 높은 것을 보여준다. 시험삼아 왕명(王名) 만을 들어도, 후의 후의 3서(書)의 왕명(王名)은, 언어학적으로는 『궁하문서(宮下文書)』의 왕명(王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편, 저는 졸저 「실크로드의 왜인」에서, 우가야 1대왕이 우랄토의 영주(英主) "아르기슈팃슈"라고 지적했다. 대저 언파(彦波)는 겐하도, "하(아르)기"의 역기(逆記)이고, 불합(弗哈)은 훗사흐-휫슈여서 이 네 글자를 합계하면, 아르기슈팃슈가 된다.
그 위에, 『궁하문서(宮下文書)』는 우가야 1대왕의 어린시절 이름(幼名)을 「아조남명(阿祖男命)」으로 하여, 아르기슈팃슈의 "아르"를 나타내고, 그 왕명(王名) 을 「가기도왕명(家基都王命)」으로 하여, 아(카)르기(키) 슈·릿(츠)슈라고 표음(表音)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이의 한자(漢字)의 선택방법은 표음적일 뿐 아니라, 표의(表意)적이기도 하여, 어의(語義)상으로도 아르기슈팃슈를 가리키고 있다. 1)언(彦)은 재덕(才德)이 뛰어난 남자 또는 그 미칭이다. 2)파(波)는 존자(尊者)의 경칭(敬稱)이다. 「오선록(吳船錄)」에 "촉중(蜀中), 존노(尊老)의 자(者)를 칭하여 파(波)가 된다. 조(祖) 및 외조(外祖)는 모두 파(波)라고 부른다. 또한, 소위 천파(天波)·일파(日波)·월파(月波)인 자(者) 있다"고 되어있다.
1)·2)를 총합하면, <언파(彦波)>는 재덕(才德)있는 조왕(祖王)이라는 게 된다. 3)불(弗)은,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불기(弗忌)는 희성(姬姓)이다. 진(晋)의 대부(大夫) 난불기(欒弗忌)의 후(後)가 된다고 하여, 함께 불성(弗姓)이 진계(晋系)의 성(姓)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별도로, 「만성통보(萬姓統譜)」에는, "불롱(弗 ), 인속(印 )을 보다"로 되어있고, 「위서(魏書)·관씨지(官氏志)」에는, "후에, 위(魏)의 출불(黜弗)씨, 철불(鐵弗)씨, 연불(燕弗)씨, 모두, 다시 불(弗)씨가 되다"라고 되어있다. 4)합(哈)은 「정자통(正子通)」이, 「합(哈)은 외국 성(姓)이다. 범서(梵書)에, 합(哈)은 알와번( )이라 읽는다고 쓰여있다. 나는 졸저 「한반도의 우가야사」에서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가 단군왕조의 왕과 함께, 3진(三晋)의 조(趙)의 왕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알고 있던 옛날의 한자(漢字) 사용자가, 아르기슈팃슈를 언파불합(彦波弗哈)으로서 한자(漢字) 표현 한 것은, 어의(語義)에 따른 것이 아닌가.
그 후, 『궁하문서(宮下文書)』의 "일자파렴무언합(日子波 武言合)"이, 「기기(記紀:고사기,일본서기)」나 「구사기( 事紀)」의 왕명(王名)으로 변화한 과정에 대해서는, 장래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연구되겠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부언하면, 언(彦)을 히꼬로 읽고, 일자(日子)로 쓴 것은, 히꼬가 원래 병아리의 의미로, 봉(鳳)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에, '변하여 새가 된다. 그 이름을 건여골(乾餘骨: 키요꼬·히요꼬)이라고 했다로 되어있고, 병명관우(浜名寬祐)는, '제어(齊語)에는 "키요꼬"라 하고, 국어(國語)에서 "히요꼬"가 된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이 "언파불합(彦波弗哈)"에 관계된 기록은, 「왜인흥망사」제 25, 6장에도 나와있다.
-제25장;무백산군기(武伯山軍冀)에, 규합하여, 남으로 도파(跳破)할 때, 때때로 영의추기(寧義 其)의 주사(舟師) 및 노족(弩族:쇠뇌족)을 투림( 淋)에서 만나다. 고령(高令), 나라를 들어 전주(前走:앞으로 나가)하고, 노래하길, 단납번(鄲納番), 달모맹(達謨孟). 가찬금(珂讚 ), 운질맹(隕 孟). 이삭솔진모검돌(伊朔率秦牟黔突). 압나남왕명맹(壓娜 旺鳴孟).-
무백(武伯)의 산군(山軍)이 병사를 정비하여 남하할 때, 때때로 니기씨가 그의 군선(軍船)과 궁병(弓兵)을 갖고 해변에 도착했다. 고령(高令)이 나라를 들어 선진(先陣)을 모아 노래했다. '옥의비녀(玉依比女)가 원수를 무찌르다.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은 원수를 쫓다'
-제 26장; 무백(武伯)이 쫓아 하막차(夏莫且)를 얻고, 영의추(寧義 )를 베어 묻다. 제족(諸族) 희약향(喜躍響) 응(應)하다. 전(傳)하여 유우입(兪宇入)의 주살(誅殺)이라 한다.-
「환단고기·세기(桓檀古記·世紀)」와의 조합(照合)의 결과, 이소스스의 명(命)이 언파불합(彦波弗哈)인 것을 확실히 했다. 앞서서 서술한 것처럼, 언파불합(彦波弗哈)은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여서, 약음(略音)한 "기스티스"가 사투리로 "이소스스"가 되었다. 아르기슈팃슈 1세는 전(前) 780년경, 즉위하여 반 호안(湖岸)에 새겨진 「호루호루 연대기」에 의하면, 메누아슈 뒤를 이어 디아우에히로 원정(遠征)하여, 코르키스 남부국경을 거쳐, 치르도일 호(湖)와 쿠르 하(河) 상류로 나아가, 아라가츠 산을 돌아 아라쿠스 하곡(河谷)을 거쳐 귀환했다.
전(前) 774년, 왕은 디야라 하곡(河谷)에서 앗시리아군과 충돌하고, 더욱이 자카후카스, 우르미아 호안(湖岸) 지방, 앗시리아 변경 속주(屬州)에, 재삼 원정하여, 그때, 1년간 3만인의 노예를 노획했다. 여기서 "쿠만"은 무엇일까.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 1세가 앗시리아 왕 샤르마네사르 4세(前782-773)를 격파한 것은 주사(周史)에서 '견융(犬戎)이 유(幽)왕을 죽였다'고 되어있어, "쿠만"이란 유왕(幽王), 즉 "샤르마네사르→카르마네소루"이다. 이것이 '해상(海上)의 쿠만이 된 것은, 전장이 반 호(湖), 또는 우르미야 호(湖)였기때문이 아닐까. -호(湖)에서 수군이 싸우고, 페니키아인(니기氏)이 우랄토에 참가했다는 추리이다. 앞에서 서술했지만, 주(周)의 책명금문(冊命金文)의 관습(習)이 유왕(幽王) 후에 끊어져 없게 된 것은, 앗시리아(周)가 우랄토(견융)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단군세기」와 「마한세가」는, 전(前) 7세기경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이 전선(戰船) 500을 데리고 왜인의 반란을 평정(定)했다'고 했다. 협야후(陝野侯)가 「왜인흥망사」의 "니기시"이고, "완(宛)의 서(徐)"이고, 중국사의 예왕(濊王)이고, 「구사기( 事紀)」의 니기하야히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때의 "왜인의 반란"이란 것은 갠지스 유역의 사건이 아닐까. 인도 최대의 왕조는 반도족(바라따족,쿠르·판차라족)의 왕, 파시쿠시토로 전(前) 9세기 경의 쿠르국의 왕였다. 이 왕조가 쇠퇴하자, 전(前) 7세기경, 비데하 8국의 자나카 왕이 유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중의 왕을 의미하는 사무라이(統王)로 불렸지만, 이것은 일본어의 사무라이의 어원이 되었다.(저자는 백제의 싸움아비에서 나온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본의 역사를 서래설에 꿰어 맞추다 보니 이러한 얼토당토 아닌 사실까지 유츄해 내고 있다. 다음을 계속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이누족에 한반도 계와 남방해양족이 섞인 하이브리드 튀기족인 그로서 그저 역사가 오래만 된다면 이곳 저곳에 끌어부치려는 의도에 오히려 환단고기의 정통성에 누가 될까 걱정이다:안원전)
비데하 8국의 주변에는 쿠르국, 판차라국, 카시국, 코사라국 등이 있고, 마가다국은 아직 유력하지 않았다. 이중에 우선 강대해진 것은, 바라나시(베나레스)를 수도로 하는 카시국이었다. 이 나라는 원래 바라타족의 왕가였지만, 비데하 8왕가에서 분리된 브라흐마닷다 왕조가 되고, 아자타샤토르가 왕이 되었다. 또한 코사라는 아우도를 도읍으로, 그 왕은 이크슈바크 왕의 말예(末裔)라고 칭했다. 그러나 자이나교에 의하면, '카시국은 맛라키족(마라족)의 9인의 왕이 통치하고, 코사라국은 릿차비족(밧지족의 상류계급으로 카시국의 왕비의 후예이다)의 9인의 왕이 통치했다'고 되어있다.
「본생담(本生譚)에는 '카시왕 브라흐마닷다가 코사라 왕을 죽이고, 그 비(妃)를 빼앗고, 앙가국의 도읍 포타리를 뺏고, 또 바라나시의 왕(카시왕)마이자가, 코사라, 앙가, 마가다 왕을 정복했다'고 한다. 카시국은 장기적으로 서로 패권을 유지했지만, 후에 코사라 왕 카무사에 병합되었다. 한편, 코사라의 수도 아우도는 페니키아인의 일파 아르와도 인을 어원(語源)으로 한다. 또한 카시의 지배자 맛라키족(마라족)은, 니기하야히의 선장 "아마츠마라"의 일족이지만, 국명(國名)의 카시는 문다어족 계 카시족의 땅을 의미한다.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 또는 "니기하야히"를 페니키아 왕으로 읽고, 코사라왕이 되면, 니기하야히의 선장이 마라족였다는 것은, 카시국의 수군이 되고, 그의 인민인 왜인은 카시족 등의 문다계 제 족이 되는 게 아닐까.
프라나에 의하면, 코사라 왕을 의미하는 "이크슈바크의 계보"는, 브라도바라, 브라크사야,우르크사야, 프라이비오마로 읽지만, 이 Pra tiv yoma를 배폐명(裵幣命) 또는 니기하야히로 하고, 아자타샤토르를 아시스키타카히꼬네로 하면, 나의 반설( 說)은 전부 완성되는데 어떠신지.
단군세기(檀君世紀)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니기하야히)과 산와(山窩)
「환단고기」<단군세기>에 등장하는 언파불합(彦波弗哈)이 우가야 왕조의 시조인것과, 또 한 사람, <단군세기>와 <마한세가>에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이라는 왕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서술했다. 이 협야후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도 쓰여있다. 또한 <북부여기>에는, 협야후(陝野侯) 의 자손인 듯한 협보(陜父)라는 왕(또는 왕족)이,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덕우(德友)가 되고, 후에 남하하여 웅본(熊本)에서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우고, 이것이 「고사기(古事記)」의 니기하야히에 상당한다고 생각된다.
<북부여기>는 상하 2권으로 나뉘어, 상권은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해모수(解慕漱) 왕조로, 후에 동부여의 해부루(解夫婁) 왕조가 된다. 하권은 동명왕(東明王) 왕조로, 고구려의 주몽(朱蒙)에 이어져 있다. 그리고 하권의 말기에 "협보(陜父)가 등장하는데, 「왜인흥망사」의 기록과 병행하면, 이 왕조는 "배폐명(裵幣命)" 또는 "완의서(宛의 徐)"씨를 시조로 하는 예국(濊國) 즉 서가은(徐珂殷) 왕조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폐명(裵幣命)이 우리들의 니기하야히의 시조라는게 되는데,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실마리로써 산와(山窩:움집,굴)를 들어보자.
산와의 뿌리는 극히 흥미로운 문제이다. 그것은 곤란하지만, 전혀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산와중에 석천청(石川淸)이라든가, 우전천일랑(隅田川一郞) 등, 내 천(川)의 이름을 성씨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수서(隋書)」<실위전(室韋傳)>에, '심말달실위(深末 室韋)는 천(川)의 이름에 이어 부족명을 붙인다'고 되어있고, 또한 보루네오의 다와야크족 중에서도 내 천의 이름을 부족의 성(姓)으로 하는 게 있다.
더욱이, 데칸고원 북동부의 쵸타나구풀 고원의 문다족 가운데, 보도어(語)족은 내 천(川)을 "테" 또는 "데"라 하여, 천(川)의 이름을 데블, 데크,데힌, 데혼, 데본, 데샤,데판, 데무라, 테·라오, 테스타 등으로 말하고, 이것을 부족명으로 한 것 같다. 산와(山窩) 중의 오랜 유예부족(遊藝部族)에 "테코나"라는 여예인(女藝人)이 있지만, 이것은 "천(川)의 여자(女)"의 뜻이 아닐까.
또 고구려에 "수척(水尺), 재인(才人), 백정(白丁)"이라는 비 농경부족이 있어, 각각 우리나라의 산와(山窩), 유예(遊藝), 백정준인(白丁 人)(에타)에 상당한다. 재인(才人)은 「일본서기」에도 쓰여져 있지만 천(川)의 사람의 의미이다. "상카"라는 말도 힌두어의 "상가"로, 원래는 이해를 같이하는 동료의 의미로, 후에 불교도, 공화제(共和制)라는 말로 변했다.
쵸타·나구풀 고원의 문다 족은 도루멘을 선조숭배의 장(場)으로 하여 와까모노야토(若者宿:동네 젊은이들이 밤에 모여 일도 하고 이야기하는 숙소, 사랑방)를 갖는 것도 있고, "신·봉가"라는 최고신을 갖는다. 또한 세습에 의한 제사적 추장과 세속적 추장을 갖고, 후자를 "문다"라고 한다. "신·봉가"는 화명신(火明神:홍아신)이고, "문다"는 산와(山窩)의 아문다 무리(衆)이다. 이와같이 생각하면, 산와(山窩)의 뿌리는 문다족으로 봐도 좋다. 문다어(語)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하나로, 몬 크멜어, 카시어,니코발어, 등과 같은 계통이다.
현재 문다족은 쵸타·나구풀 고원을 중심으로, 웃탈·부라데슈 주(州)의 일부의 마하데오 구릉, 히말라야 산지, 벵갈 등에 약 70만인 정도 있는데, 예전에는 인도 전역을 덮고 있었다. 밀림과 죽수(竹藪:대나무 덤불 늪) 가운데서 생활하고, 현재도 수렵과 야생식물에 의해 생활하고 있다. 이 곳도 산와(山窩)와 매우 닮아 있다. 문다족 중의 콜 족이라는 이름은 돈(豚) 족이라는 의미로, 아리아인이 붙인 경멸스런 명칭이지만, 부여(扶余) 6축(畜)의 저가(猪家:돼지 저)나, 우리나라의 저감부(猪甘部)(安曇海人)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또한 원시불교에는 "크샤트리아, 바라몬, 바이샤, 바이샤, 슈드라, 챤다라, 부츠쿠사"라는 6개의 카스트(계급)가 있는데, 이 중 챤다라는 도살, 부츠쿠사는 오물 청소자였다. 챤다라는 앗삼족이 있던 쵸타·나구풀의 주민을 의미하고, 고오베(神戶) 시 등의 미해방부락의 장전족(長田族)의 뿌리는 아닐까. 장전족은 산이현(山梨縣)을 거쳐 회진(會津) 지방으로 이동했는데, 이것은 졸저 「왜(倭)와 진국(辰國)」에서 서술했다.
그런데, 산와(山窩)에는 제철에 관한 전승이 있지만, 문다족은 원래 철의 문화를 이루고, 인도에 철을 들여 온 것은 아리아인이었다. 전(前) 13세기 이후, 철제 무기를 갖고, 기마전(騎馬戰)을 특기로 하는 아리아인이 몇 갠가의 그룹이 되어 인도에 침입했다. 아리아 어 최고의 문헌 「리그베다」에 의하면, 아리아인은 우선, 오하(五河) 지대의 펀잡에 침입하여, 선주민을 정복했는데, 이 선주민의 언어는 드라비다어 혹은 문다 어였다.
처음에 있던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을 지중해 방면에서 침입한 드라비다 어족이 쫓아내(驅逐) 인더스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문다족과 같은 오스트로·아시아어 계 제 족은 히말라야 산계(山系)에서 갠지스하(河) 유역에 분산되고, 더욱이 그 후 침입한 아리아 어족 때문에 양(兩) 언어(語)가 동방과 서방 인도로 쫓겨나게(驅逐) 되었다.
「고사기(古事記)」의 와니 조작 신화에서도, 이 아리아 족의 침입과 드라비다 수군(水軍)의 관계를 전하고 있다. (참고:와니(窩泥:움집와, 진흙니)는 漢족에게 동화된 양자강 유역의 동이 9족 계열인 묘(苗)와 요( )계의 분파인 라라면전(羅羅緬甸)계에서 다시 분파된 라라(羅羅)족이 본 줄기를 제외하고 곁가지 분파로 율속(栗粟), 라무(羅 :별이름 무), 와니(窩泥:움집와, 진흙니) 등의 부족으로 나뉜 3부족 중 하나다.:안원전) 4국의 "금비라(金毘羅)" 신은, 실은 갠지스 하(河)의 와니의 "콘피라"로, 염포수군(鹽飽水軍) 등의 신앙였지만, 앞으로도 알 수 있듯이, 와니는 사신(蛇神) 신앙(동이족 복희씨의 인두사신과 확실한 연계를 상징. 임 혜상은 양자강 유역의 사천성, 절강성 등의 동이 묘요계, 형오계, 백월계가 인도, 인도챠이나로 내려갔음을 고고학적, 문화인류학적으로 밝히고 있음을 참고하라 :안원전)을 갖는 드라비다족의 수군이었다. 와니 조작 설화의 원형은, 말레 반도에 있어 '사슴이 솔로몬 왕의 명에 의해 와니를 일렬로 줄을 세워 정렬시켰다'로 되는데, 「리그베다」에서는 사슴을 아리아인의 왕권으로, 와니(드라비다 수군)를 속인 사슴이란 아리아인을 가리킨다. 정확히 말하면, 혼혈 아리아인의 수군 에브스인 또는 페니키아인이다.
전(前) 18세기-17세기에, 우가릿드, 알와드, 비브로스, 베이루트, 시돈, 틸스, 아츠코 등에 아리아·후츠리 계 제족과 크레타·미케네 족이 침입하여, 선주족 야페테 제 족과 혼혈했다. 그래서 이 자손인 에브스인이나 페니키아 인은 혼혈 아리아인였다.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비데가·마타바는 입 안에 성화(聖火)를 갖고 있다. 성화(聖火)가 입에서 나와 동방으로 향하고, 대지를 태우면서 나아가 결국 사다니라 하(河)에 다다랐다. 그리고 불(火)은 아타바로, "너의 주소는 더욱 더 동방이라"고 했다. 이 하(河)는 지금도 아타바의 자손인 코사라인과 비데하인의 경계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코사라와 비데하는 인도 16왕조의 국가로, 앞에 서술했듯이, 코사라란 문다어(語)이고, 코사라의 수도 아요디아(아우도)는, 페니키아인의 정(町:밭) 알와드여서, 이 신화는 펀잡 아리아인과 페니키아계 알와드인이 문다족이 사는 코사라에 침입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산와(山窩)는 성화(聖火) 신앙을 전하고, 그 조상은 천화명신(天火明神)이다. 앞서 문다족의 "신·봉가"가 화명신(火明神)이라 했지만, 문다족은 수우(水牛:신농 도등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을 갖고, 한편 거란족은 "키키타에"라는 우신(牛神)신앙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소민장래(蘇民將來) 신앙과 동일한데, 그 뿌리는 카난의 지나간 축제이다. 천화명신(天火明神)이라는 신명(神名)에서도 성화(聖火)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천화명신(天火明神)은 "니기하야히"라고도 하고, 「기기(記紀):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이계(異系)의 신화지만, 「구사기( 事紀)」에서는 중심적인 신이었다. 「구사기( 事紀)」는 천황가 이전에 니기하야히의 일족이 야마다이국(邪馬臺國)을 세운 때의 사서였지만, 후에 백제인의 환무(桓武)가 만든 「서기(書紀):일본서기」에 맞춰 개찬되었다. 그 원형은 개찬 후의 10권본이 아니라, 「30권본 구사기」에 남아있고, 삼중정량(三重貞亮)이 뛰어난 연구를 남기고 있다.
그 천신본기(天神本紀)는, 니기하야히의 선단(船團)에 대하여, '읍취(揖取)·하도조(河刀造)의 조천마량신(祖天麻良神), 선자(船子)·단야씨(鍛冶氏:쇠불릴 단, 야금할 야)의 조천진진신(祖天津眞神), 천진마량신(天津麻良神), 천진적마량신(天津赤麻良神)'이라고 쓰고 있지만, "단야씨(鍛冶氏)의 아마츠마라"란 제철부족인 마라족을 나타내고 있다. 단야 인이란 아리아인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단야씨의 선조를 이끈 "니기하야히"는 아리아인이어야만 하지만, 메르츠하 인(人)은 카르데아 또는 페니키아 계의 혼혈 아리아였다.
한편, 산와(山窩) 문자는 브라흐미·카로시티 문자의 계통였지만, 전자는 페니키아인의 문자이고, 후자는 아케메네스·페르시아가 마가다에게 전한 문자였다. 문다족의 땅 코사라에 페니키아인이 침입했다고 가정하면, 그때 문다족은 페니키아 문자를 배웠을 것이다.
북왜(北倭)와 남왜(南倭)
-「일본서기」가 감추려 한 것은 천황가-정확히는 환무(桓武)가 백제 망명자였다는 사실이지만, 이 역사위조의 원점에 만주에 있던 왜인(北倭)라는 문제가 있었다. 「산해경」<해내북경>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사무산(蛇巫山) 위에는 어떤 사람이 몽둥이를 잡고 동쪽을 향해 서 있다. 혹은 구산(龜山)이라고도 한다.…능문산(凌門山)도 황하가 그 가운데서 흘러나온다. 왕자야(王子夜)의 시(尸)는 두 손, 두 다리, 가슴, 머리가 모두 끊어져 따로 있다. 순(舜)의 부인 등비(登比)씨가 소명(宵明)과 촉광(燭光)을 낳았다. (이들은) 황하의 대택(大澤)에 살았는데, 두 여인은 신통력으로 이곳 사방 100리를 비출 수 있었다. 혹은 등북(登北)씨라고도 한다. 개국(蓋國)이 거연(鋸燕)의 남쪽, 왜(倭)의 북쪽에 있다.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 조선(朝鮮)이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열양(列陽)은 연(燕)에 속한다. 열고야(列姑射)가 바다 가운데의 섬 속에 있다. 야고국(射姑國)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데 열고야(列姑射)에 속하며 서남쪽을 산이 에워싸고 있다. 큰 게(大蟹)가 바다 한가운데에 산다. 능어(陵魚)는 사람의 얼굴에 팔 다리가 있고 몸둥이는 물고기인데 바다 한가운데에 산다. 큰 방어( 魚)는 바다 한가운데에 산다. 명조읍(明組邑)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봉래산(蓬萊山)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대인(大人)들의 저자(市場)가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또한 「산해경」<해내동경>에는 거연(鉅燕)은 동북의 변두리에 있다고 했다. 이것을 백기소일랑(白崎昭一郞)은 다음 그림과 같이 비정(比定)했다.
(왜의 위치 도표그림)
연(燕)의 동북에 거연(鉅燕), 거연의 남쪽에 개국(蓋國), 다시 그 남쪽에 왜(倭)
그러나, 이 문장에는 실은 문제가 있다. 즉, <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이라는 문장을 강호(江戶) 시대까지는 <개국은 거연에 있다. 남왜와 북왜는 연에 속한다>고 읽지만, 명치이후 '남왜와 북왜'로는 곤란해서 <개국은 거연의 남, 왜의 북에 있다. 왜는 연에 속한다>고 고쳐 읽은 것이다. 이 부분이 한문의 중요부분으로 문장을 고쳐 읽기도 하고, 심한 것은 「일본서기」 등의 흠이 있는 글자 보정(補正)시, 한자를 2-3자 바꾸면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실로 태양이 서에서 떠오르는 것이 된다.
한편, 여기서 거연(鉅燕)과 연(燕)의 관계인데, 「왜인흥망사」 제 24장은 진운은(辰 殷:箕氏朝鮮)을 지회씨(智淮氏) 연(燕)으로 하고, 소연(邵燕)과 별도의 것으로 하기 때문에, 거연(鉅燕)은 기씨 조선의 지회씨(智淮氏) 연(燕)으로, 개국(蓋國)은 기씨조선의 영역, 즉 대능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된다. 다음에 동서 제 31장은 '이것보다 앞서 완(宛)의 서(徐), 바다를 건너 박진(舶臻)씨, 은(殷:辰 殷:箕氏朝鮮)에 의지하여 완난(宛難:塔子河)에 머물고 땅을 격한 것이 수 천리, 현모달(弦牟達:摩天嶺)에 성을 쌓고, 곤막성(昆莫城)을 칭하고, 나라를 서가은(徐珂殷)이라 부른다'고 되어있고, 또한 서가은은 후에 부여(夫餘)에 합친 것으로 되어, 개국(蓋國)이 거연(기씨조선)에 있다는 것은, 개국이 서하은 후의 부여인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역시 '개국은 거연에 있다'고 읽어야 하고 '거연의 남에 있다'는 해석이 틀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남왜, 북왜란 도대체 무엇일까. 평야방웅(平野邦雄)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규슈(九州)에 있어서의 고대호족과 대륙」「고대 아시아와 규슈(九州)」에 수록)
-송촌무웅(松村武雄)씨는 규슈의 아담(阿曇)씨는 남양계 민족으로 준인족( 人族)과 함께 인도네시아 계일 것으로 보고, 우원우길(羽原又吉)씨는 찌꾸젠(築前)을 본거로 하는 안담(安曇)족 계통의 해인족(海人族)을 야마또(大和)족으로 구별하여, 이 양 족을 매개로 한 것이 안담기량(安曇磯良)으로 상징되는 인물로, 해인족(海人族)의 본원지는 인도네시아 섬들이고, 그들은 복건, 광동의 민월( 越:전통적 동이족 거주지) 지방으로 이주하여 단민(蛋民)이 되고, 북상하여 남서 여러 섬에서 규슈에 걸쳐 있고, 금관장부(金關丈夫)씨는, 아마도 일본에 미생(彌生)문화를 옮긴 것은 그들 해인족(海人族)의 조상으로, 수전가일랑(藪田嘉一郞)씨는, 아담(阿曇)족 즉, 일본의 월족(越族)은 남지나에서 우리 서남 지방으로 도항한 족속으로, 해인(海人)을 백수랑(白水郞)으로도 쓰는 것은 남지나 천주(泉州)의 수인(水人)이라는 의미의 샘 천(泉)의 의미를 백(白)과 수(水)로 나눈 것으로 생각되고, 그들은 원래 물속으로 잠수하여 진주를 캐던 백성으로, 월(越)족의 용사(龍蛇) 토템(복희씨 토템)을 갖고, 이들 남방 민족은 무수히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도래했지만, 후에 소수집단의 북방민족(조선족)에게 압도되어, 농천정차랑(瀧川政次郞)씨는 준인족( 人族), 아담족(阿曇族)이 그 원주지인 화남(華南)에서 초래한 집돼지, 즉, 돼지를 기르는 것이 저감부(猪甘部)로, 이 양 종족은 원래 동일종족으로, 공히 문신의 풍속이 있고, 용사(龍蛇)의 토템을 갖고, 단민(蛋民), 결국 민월( 越)족과 같다. 아마 기원 전 1, 2 세기에 백월(百越:임혜상에 의하면 동이족이다) 백성은 한무제에 의한 한(漢) 족 남진에 의해 해상으로 도망가, 흑조(黑潮)를 타고 북규슈에 도착한 아담(阿曇)족과 남규슈에 도착한 준인족( 人族)으로 나뉜 것으로, 삼품창영(三品彰英)씨는, 해인족(海人族)의 고기잡이법이나 문신의 습속은 직접적으로는 남조선에서 도래한 것으로, 한족(韓族) 가운데에서도 진한(辰韓)과 변진(弁辰)의 부족간에는, 남방 해양 제 민족에 계통한 문화요소를 전승하고 있는 면이 적지않지만, 이것은 해류 기타 지리적 조건으로 볼때 이살한 것은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농천정차랑은 화남(華南)에서 왔다는 <저감부(猪甘部)>가 한무제를 피해 일본으로 이동했다고 하는데, 이들을 이끈 것이 진(秦) 왕조의 일족으로 우리 나라의 원전언(猿田彦)이다. 한무제때 창오(蒼梧)의 진왕(秦王)이 이끈 남월(南越)의 백성이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도망간 것에 대해서는 필자도 「반첸·왜인의 뿌리」에서 상세히 서술했다. 여기서 삼품창영(三品彰英)이 한반도로부터 왜인이 왔다는 것은 <북왜>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북왜인 것과 함께 부여(夫餘)의 저가( 加)로, 우리나라의 저가부(猪加部), 안담수군(安曇水軍)으로, 왜의 수군과는 원래 니기하야히의 예국(濊國)-부여에 속해 있던 아마쯔마라의 수군으로 생각된다.
곽박의 「산해경」<대황동경> 대인지국(大人之國)의 조주(條注)에, '고회(高會)는 말하길, 왜국 사람이 모두가 바람을 만나, 바람에 불려 대해 밖으로 건너, 일국을 봤지만, 모두 키가 크고 형상은 호(胡)와 닮았다고 되어있다. 적송문삼우(赤松文三祐)는 이것을 인용하여, '고회(高會)는 평주(平州)의 양평(襄平)에서 왜인으로부터 이것을 듣고, 건강(建康)에 도착해 곽박에게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쓰고 있다.
「후한서」<동이열전>은 '단석외(檀石 ), 왜망포(倭網捕)를 도와준다고 듣고, 동쪽 사람이 왜인국을 공격하여 천여가(千餘家)를 얻다. 따라서 진수(秦水)의 위에 놓고 고기를 잡다'라고 쓰여있다. 그런데,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일본이 가장 오래고 또한 크다. 그 땅 흑룡강의 북에서 시작되고, 제주의 남에 도달하여 오끼나와와 서로 접한다.'고 쓰여있다. 따라서 <북왜>의 영토는 흑룡강의 북에 이른다.
력도원( 道元) 「수경주(水經注)」대요수고평천(大遼水高平川)의 조(條)에, '물은 서북 평천(平川)으로 나오고, 동류하여 왜성(倭城)의 북을 지난다. 단 왜지의 사람은 이것에 따른다' 고 되어있고, 「원경(元經)」진(晋) 태원 7년의 조는 '왕통(王通)이 9월 동이 5국에 와 조공하다'고 기록하고 그 설목(薛牧)의 전(傳)은 '동이 5국이란 부여, 3한, 숙신(肅愼), 왜인, 비리(裨離)이다. 현토(玄 )의 동북에 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발해의 시대 흑룡강의 유역에는, 흑수물길부(黑水勿吉部)가 있고, 물길 7부족 가운데 가장 정예롭고 강하다(精强)고 한다. 흑수부는 후에 고려의 망명자를 왕으로 하여 거란(요)을 멸하고 금(金)국을 세웠다. 「산해경」이 쓴 북왜는 이 흑수부나 백산부(白山部)에 섞여 들어간 것(混入)이 아닌가. 이 백산부가 우리 예다(穢多:えた)의 뿌리인 것 같다.
거란의 사서 「왜인흥망사」는 기씨(箕氏) 조선사가 바탕이 되지만, 부여, 고구려, 왜국의 건국사가 첨부되어 있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봐도, 거란의 가운데에 <북왜>가 있었던 것은 인정된다. 더욱이 「고려기」대명홍무(大明洪武) 21년조에, 수척(水尺:무자리), 재인(才人), 경종(耕種:농사)을 일로 하지 않고 산 계곡(山谷)에 모여 왜적이라 칭하다. 그 힘이 무섭다. 운운' 되어있다. 또한 거란군이 고려에 침입하면, 백정들이 우리는 왜인이라 하고 호응했다 한다. <백정(白丁)>은 백정준인(白丁 人)과 같고, 조선의 예다(穢多:えた)이고, 수척재인(水尺才人)은 조선의 산와(山窩:움집)이지만, 함께 반도잔류의 <북왜>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단군세기> 제 35대 단군 사벌(沙伐)의 무오 50년 조는 '제(帝),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파견하여, 해상의 웅습(熊襲:꾸마소, 구마모또)을 평정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언파불합이란 우리나라(일본)의 우가야 "우가야 후끼아에즈"로, 정확히는 우가야 1대왕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이다. 우가야 후끼아에즈가 「일본서기」에는 "언파렴무로자초집불합존(彦波 武 草葺不合尊)」이 되고, 「고사기(古事記)에는 "천진일고일자파한건제집초집불합존(天津日高日子波限建 葺草葺不合尊)」이 되는 것은 유아라도 알 수 있다. 「구사기( 事紀)(3중판))에는, 「로자초집불합존( 草葺不合尊)」이 되는데, 삼서(三書)는, 우가야 왕조의 전대(全代)를 1대에 압축하여, 신무(神武)의 부(父)를 1인의 우가야 왕으로서, 소위 "키세르 계도(系圖)" 를 위조한 것이다.
-잠시 보완설명 인용-정일영은 「고대사 동방대제국」에서 언파불합의 꾸마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은나라가 망한 후 은의 덕망 있는 신료가 주나라에 항복해서 봉작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은나라의 당시 선진의 도덕성은 그와 같았으며 은나라 사람들이 그 당시 부른 시에도 오랑캐(周나라)가 침입하여 물리칠 수 없는 터에 유왕이 色情에 침적하여 충신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아니 한다고 한탄하였다. 기자를 朝鮮王에 봉했다는 변조는 당시 무제가 힌 4군을 설치했다는 역사 날조를 하기 위하여 안사고에게 강요했음이랴! 아니면 후기에 당태종이 한 짓인지.
안사고는 문제가 역사를 변조하면서 {시전} {서전} 등에 기록을 모조리 없애는 작업을 소홀했다. 이러한 고서 기록이 남아 있음으로서 역사를 바르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은 무왕이 조선왕을 봉했다는 것과 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두 가지 허위 사실을 모든 후세 역사 기록에 강조하여 古代 東夷 군자국의 문화 사회에 뒤떨어진 국민의 열등감을 씻고자 이를 항상 앞세워 기술하는 역사 서적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일제 식민 교과서는 이를 근거로 한층 조선 고대사를 말살하여 일본사를 위조하고 이것을 근거로 삼아 식민 사관을 보급하였다.
여기서 부동한 식민 사관이 생겨 신중한 古代史 記錄을 참고 없이 국민의 역사관을 오도한 것이다.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면서도 기자나 伯夷 叔齊같은 주나라에 불복하고 봉작도 받지 아니하는 인사들을 충절 지사라고 찬양하는 철학자로서 충효 사상의 윤리 도덕을 존중하는 성인이였다. 당시 주나라 사람들이 무왕을 성군이라 하였으나 공자는 무왕이 무력으로 통일을 했다고 왕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무왕은 각부 추장들을 그대로 두어 조선 제국 제도를 본따 제후에 봉하고 주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이 되게 하고 종주국으로서 관할권을 가졌으며 제후 추장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주왕의 딸들을 시집보내여 사돈을 삼았다.
비빈이 많았으니 딸도 많았을 것이다. 주왕의 딸은 姓이 姬氏니 王姬라고 불렀다. 그리고 타고 다니는 수레와 입고 다니는 옷은 화려한 성장이였다. (周王之女姬姓故曰姬下嫁於諸侯車腹之盛 {侍典}) 주왕은 제후 추장들에 가혹한 조공을 받지 아니하고 종주국으로 인정케하는 것으로 그치고 은나라 국민도 반항자를 학살하지 아니하고 노예로 포섭하여 차츰 주나라에 동화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가들은 그를 역시 성군이라고 호칭하였다. 공자는 물론 올바른 인군이 아니라고 평하였다. 이 때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 영토를 중원의 중심 지역뿐이고 지금의 하북 하남 산동성과 황하 일대는 모두 대단군 영토였다.
단군세기({환단고기})에 BC 909년 제30대 단군 나휼(나휴) 천왕이 청구(靑丘, 수도)의 정사를 살피고 치우천왕의 공덕을 돌에 세기고 서쪽으로 엄록홀에서 列國汗들이 모여 열병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으며 흉노가 조공을 받쳤다고 하였다. BC 723년에는 웅습(熊襲)이 반란을 일으켜 대장 언파불합을 海上의 熊襲에게 보내 평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는 後記할 것이나 해상이라 함은 倭國에 위치한 큐슈(九洲) 쓰시마(對馬島) 이키(臺岐) 시곡(四國) 등 4개 섬을 말하며 거기 강력한 추장 구마소(熊襲)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토벌한 것이다. 근래에 와서 일본의 역사책은 이것을 일본의 고대사에 편입하여 일본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倭國의 고대 인명에 무슨 마로(磨呂), 무슨 미고도(尊), 무슨 히꼬(彦)라는 것들은 당시 그곳의 통치 계급인 조선인이다.
日本史에 熊襲을 구마소라고 하는 것은 熊襲 즉 곰습을 일본 발음으로 구마소라 부른 것이다. 일본 고대사에 웅습에 관한 기록은 물론 후세에 와서 삽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 반도에 인적이 드물고 남부 해안 지역에 약간의 사람들이 살고 거기서 가까운 일본 열도의 서남단에 있는 구주 지방과 교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단군 제국의 월주지역 (上海 부근)과 행상으로 통하여 단군 제국 광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는 반여언(磐余彦:神武)을 이도국(伊都國) 왕(王)으로 하는데, 「세기(世紀)」의 언파불합(彦波弗哈)은, 단군 사벌(前(B.C.) 711-643)의 시(時), "해상의 웅습(熊襲)을 평정한" 왕이므로, 멀리 후세, 왜의 대란당시의 이도국왕(伊都國王)·신무(神武)의 부(父)일리가 없다. 따라서 「세기(世紀)」의 기술은 우가야 후끼아에즈를 한 명의 왕이 아닌 일계(一系)의 왕조로 하는 『상기(上記)』『궁하(宮下)』 등이 옳은 것을 입증하고 있다. 「세기(世紀)」는 언파불합(彦波弗哈)을 신무시대가 아니라, 전(前) 8-7세기의 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 이 왕은 우가야조(朝) 초두(初頭)의 왕이다.
그런데, 『궁하문서(宮下文書)』는 제 1대 우가야 왕을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으로 기록하고, 이 왕명(王名)은 3서에 비교하면 가장 언파불합(彦波弗哈)과 유사하다. 즉, 1)언(彦)이 일자(日子) 2)파(波)가 파(波: ) 3)불(弗)이 무(武) 4)합(哈)이 (言) 합(合)과 도일하고, 2)에서는 파(波)와 염( ), 4)에는 언(言)과 합(合)이 동어(同語) 중복되어 있다. 전부터 나는, 본서(환단고기)를 인식하기 전에, 졸저 「실크로드의 왜인」에서 우가야 제 왕의 왕대를 고증했지만, 거기서 추리한 우가야 1대 왕과 이의 언파불합(彦波弗哈)과는, 거의 거의 같은 시대였다.
이와같은 「세기(世紀)」와 『궁하문서(宮下文書)』에 있어서의 우가야 1대왕의 연대 및 왕명(王名)의 유사는, 전혀 별개로 전해진 양서(兩書)의 신뢰성이, 함께 극히 높은 것을 보여준다. 시험삼아 왕명(王名) 만을 들어도, 후의 후의 3서(書)의 왕명(王名)은, 언어학적으로는 『궁하문서(宮下文書)』의 왕명(王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편, 저는 졸저 「실크로드의 왜인」에서, 우가야 1대왕이 우랄토의 영주(英主) "아르기슈팃슈"라고 지적했다. 대저 언파(彦波)는 겐하도, "하(아르)기"의 역기(逆記)이고, 불합(弗哈)은 훗사흐-휫슈여서 이 네 글자를 합계하면, 아르기슈팃슈가 된다.
그 위에, 『궁하문서(宮下文書)』는 우가야 1대왕의 어린시절 이름(幼名)을 「아조남명(阿祖男命)」으로 하여, 아르기슈팃슈의 "아르"를 나타내고, 그 왕명(王名) 을 「가기도왕명(家基都王命)」으로 하여, 아(카)르기(키) 슈·릿(츠)슈라고 표음(表音)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이의 한자(漢字)의 선택방법은 표음적일 뿐 아니라, 표의(表意)적이기도 하여, 어의(語義)상으로도 아르기슈팃슈를 가리키고 있다. 1)언(彦)은 재덕(才德)이 뛰어난 남자 또는 그 미칭이다. 2)파(波)는 존자(尊者)의 경칭(敬稱)이다. 「오선록(吳船錄)」에 "촉중(蜀中), 존노(尊老)의 자(者)를 칭하여 파(波)가 된다. 조(祖) 및 외조(外祖)는 모두 파(波)라고 부른다. 또한, 소위 천파(天波)·일파(日波)·월파(月波)인 자(者) 있다"고 되어있다.
1)·2)를 총합하면, <언파(彦波)>는 재덕(才德)있는 조왕(祖王)이라는 게 된다. 3)불(弗)은,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불기(弗忌)는 희성(姬姓)이다. 진(晋)의 대부(大夫) 난불기(欒弗忌)의 후(後)가 된다고 하여, 함께 불성(弗姓)이 진계(晋系)의 성(姓)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별도로, 「만성통보(萬姓統譜)」에는, "불롱(弗 ), 인속(印 )을 보다"로 되어있고, 「위서(魏書)·관씨지(官氏志)」에는, "후에, 위(魏)의 출불(黜弗)씨, 철불(鐵弗)씨, 연불(燕弗)씨, 모두, 다시 불(弗)씨가 되다"라고 되어있다. 4)합(哈)은 「정자통(正子通)」이, 「합(哈)은 외국 성(姓)이다. 범서(梵書)에, 합(哈)은 알와번( )이라 읽는다고 쓰여있다. 나는 졸저 「한반도의 우가야사」에서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가 단군왕조의 왕과 함께, 3진(三晋)의 조(趙)의 왕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알고 있던 옛날의 한자(漢字) 사용자가, 아르기슈팃슈를 언파불합(彦波弗哈)으로서 한자(漢字) 표현 한 것은, 어의(語義)에 따른 것이 아닌가.
그 후, 『궁하문서(宮下文書)』의 "일자파렴무언합(日子波 武言合)"이, 「기기(記紀:고사기,일본서기)」나 「구사기( 事紀)」의 왕명(王名)으로 변화한 과정에 대해서는, 장래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연구되겠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부언하면, 언(彦)을 히꼬로 읽고, 일자(日子)로 쓴 것은, 히꼬가 원래 병아리의 의미로, 봉(鳳)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에, '변하여 새가 된다. 그 이름을 건여골(乾餘骨: 키요꼬·히요꼬)이라고 했다로 되어있고, 병명관우(浜名寬祐)는, '제어(齊語)에는 "키요꼬"라 하고, 국어(國語)에서 "히요꼬"가 된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이 "언파불합(彦波弗哈)"에 관계된 기록은, 「왜인흥망사」제 25, 6장에도 나와있다.
-제25장;무백산군기(武伯山軍冀)에, 규합하여, 남으로 도파(跳破)할 때, 때때로 영의추기(寧義 其)의 주사(舟師) 및 노족(弩族:쇠뇌족)을 투림( 淋)에서 만나다. 고령(高令), 나라를 들어 전주(前走:앞으로 나가)하고, 노래하길, 단납번(鄲納番), 달모맹(達謨孟). 가찬금(珂讚 ), 운질맹(隕 孟). 이삭솔진모검돌(伊朔率秦牟黔突). 압나남왕명맹(壓娜 旺鳴孟).-
무백(武伯)의 산군(山軍)이 병사를 정비하여 남하할 때, 때때로 니기씨가 그의 군선(軍船)과 궁병(弓兵)을 갖고 해변에 도착했다. 고령(高令)이 나라를 들어 선진(先陣)을 모아 노래했다. '옥의비녀(玉依比女)가 원수를 무찌르다.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은 원수를 쫓다'
-제 26장; 무백(武伯)이 쫓아 하막차(夏莫且)를 얻고, 영의추(寧義 )를 베어 묻다. 제족(諸族) 희약향(喜躍響) 응(應)하다. 전(傳)하여 유우입(兪宇入)의 주살(誅殺)이라 한다.-
「환단고기·세기(桓檀古記·世紀)」와의 조합(照合)의 결과, 이소스스의 명(命)이 언파불합(彦波弗哈)인 것을 확실히 했다. 앞서서 서술한 것처럼, 언파불합(彦波弗哈)은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여서, 약음(略音)한 "기스티스"가 사투리로 "이소스스"가 되었다. 아르기슈팃슈 1세는 전(前) 780년경, 즉위하여 반 호안(湖岸)에 새겨진 「호루호루 연대기」에 의하면, 메누아슈 뒤를 이어 디아우에히로 원정(遠征)하여, 코르키스 남부국경을 거쳐, 치르도일 호(湖)와 쿠르 하(河) 상류로 나아가, 아라가츠 산을 돌아 아라쿠스 하곡(河谷)을 거쳐 귀환했다.
전(前) 774년, 왕은 디야라 하곡(河谷)에서 앗시리아군과 충돌하고, 더욱이 자카후카스, 우르미아 호안(湖岸) 지방, 앗시리아 변경 속주(屬州)에, 재삼 원정하여, 그때, 1년간 3만인의 노예를 노획했다. 여기서 "쿠만"은 무엇일까.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 1세가 앗시리아 왕 샤르마네사르 4세(前782-773)를 격파한 것은 주사(周史)에서 '견융(犬戎)이 유(幽)왕을 죽였다'고 되어있어, "쿠만"이란 유왕(幽王), 즉 "샤르마네사르→카르마네소루"이다. 이것이 '해상(海上)의 쿠만이 된 것은, 전장이 반 호(湖), 또는 우르미야 호(湖)였기때문이 아닐까. -호(湖)에서 수군이 싸우고, 페니키아인(니기氏)이 우랄토에 참가했다는 추리이다. 앞에서 서술했지만, 주(周)의 책명금문(冊命金文)의 관습(習)이 유왕(幽王) 후에 끊어져 없게 된 것은, 앗시리아(周)가 우랄토(견융)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단군세기」와 「마한세가」는, 전(前) 7세기경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이 전선(戰船) 500을 데리고 왜인의 반란을 평정(定)했다'고 했다. 협야후(陝野侯)가 「왜인흥망사」의 "니기시"이고, "완(宛)의 서(徐)"이고, 중국사의 예왕(濊王)이고, 「구사기( 事紀)」의 니기하야히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때의 "왜인의 반란"이란 것은 갠지스 유역의 사건이 아닐까. 인도 최대의 왕조는 반도족(바라따족,쿠르·판차라족)의 왕, 파시쿠시토로 전(前) 9세기 경의 쿠르국의 왕였다. 이 왕조가 쇠퇴하자, 전(前) 7세기경, 비데하 8국의 자나카 왕이 유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중의 왕을 의미하는 사무라이(統王)로 불렸지만, 이것은 일본어의 사무라이의 어원이 되었다.(저자는 백제의 싸움아비에서 나온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본의 역사를 서래설에 꿰어 맞추다 보니 이러한 얼토당토 아닌 사실까지 유츄해 내고 있다. 다음을 계속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이누족에 한반도 계와 남방해양족이 섞인 하이브리드 튀기족인 그로서 그저 역사가 오래만 된다면 이곳 저곳에 끌어부치려는 의도에 오히려 환단고기의 정통성에 누가 될까 걱정이다:안원전)
비데하 8국의 주변에는 쿠르국, 판차라국, 카시국, 코사라국 등이 있고, 마가다국은 아직 유력하지 않았다. 이중에 우선 강대해진 것은, 바라나시(베나레스)를 수도로 하는 카시국이었다. 이 나라는 원래 바라타족의 왕가였지만, 비데하 8왕가에서 분리된 브라흐마닷다 왕조가 되고, 아자타샤토르가 왕이 되었다. 또한 코사라는 아우도를 도읍으로, 그 왕은 이크슈바크 왕의 말예(末裔)라고 칭했다. 그러나 자이나교에 의하면, '카시국은 맛라키족(마라족)의 9인의 왕이 통치하고, 코사라국은 릿차비족(밧지족의 상류계급으로 카시국의 왕비의 후예이다)의 9인의 왕이 통치했다'고 되어있다.
「본생담(本生譚)에는 '카시왕 브라흐마닷다가 코사라 왕을 죽이고, 그 비(妃)를 빼앗고, 앙가국의 도읍 포타리를 뺏고, 또 바라나시의 왕(카시왕)마이자가, 코사라, 앙가, 마가다 왕을 정복했다'고 한다. 카시국은 장기적으로 서로 패권을 유지했지만, 후에 코사라 왕 카무사에 병합되었다. 한편, 코사라의 수도 아우도는 페니키아인의 일파 아르와도 인을 어원(語源)으로 한다. 또한 카시의 지배자 맛라키족(마라족)은, 니기하야히의 선장 "아마츠마라"의 일족이지만, 국명(國名)의 카시는 문다어족 계 카시족의 땅을 의미한다.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 또는 "니기하야히"를 페니키아 왕으로 읽고, 코사라왕이 되면, 니기하야히의 선장이 마라족였다는 것은, 카시국의 수군이 되고, 그의 인민인 왜인은 카시족 등의 문다계 제 족이 되는 게 아닐까.
프라나에 의하면, 코사라 왕을 의미하는 "이크슈바크의 계보"는, 브라도바라, 브라크사야,우르크사야, 프라이비오마로 읽지만, 이 Pra tiv yoma를 배폐명(裵幣命) 또는 니기하야히로 하고, 아자타샤토르를 아시스키타카히꼬네로 하면, 나의 반설( 說)은 전부 완성되는데 어떠신지.
단군세기(檀君世紀)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니기하야히)과 산와(山窩)
「환단고기」<단군세기>에 등장하는 언파불합(彦波弗哈)이 우가야 왕조의 시조인것과, 또 한 사람, <단군세기>와 <마한세가>에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이라는 왕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서술했다. 이 협야후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도 쓰여있다. 또한 <북부여기>에는, 협야후(陝野侯) 의 자손인 듯한 협보(陜父)라는 왕(또는 왕족)이,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덕우(德友)가 되고, 후에 남하하여 웅본(熊本)에서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우고, 이것이 「고사기(古事記)」의 니기하야히에 상당한다고 생각된다.
<북부여기>는 상하 2권으로 나뉘어, 상권은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해모수(解慕漱) 왕조로, 후에 동부여의 해부루(解夫婁) 왕조가 된다. 하권은 동명왕(東明王) 왕조로, 고구려의 주몽(朱蒙)에 이어져 있다. 그리고 하권의 말기에 "협보(陜父)가 등장하는데, 「왜인흥망사」의 기록과 병행하면, 이 왕조는 "배폐명(裵幣命)" 또는 "완의서(宛의 徐)"씨를 시조로 하는 예국(濊國) 즉 서가은(徐珂殷) 왕조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폐명(裵幣命)이 우리들의 니기하야히의 시조라는게 되는데,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실마리로써 산와(山窩:움집,굴)를 들어보자.
산와의 뿌리는 극히 흥미로운 문제이다. 그것은 곤란하지만, 전혀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산와중에 석천청(石川淸)이라든가, 우전천일랑(隅田川一郞) 등, 내 천(川)의 이름을 성씨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수서(隋書)」<실위전(室韋傳)>에, '심말달실위(深末 室韋)는 천(川)의 이름에 이어 부족명을 붙인다'고 되어있고, 또한 보루네오의 다와야크족 중에서도 내 천의 이름을 부족의 성(姓)으로 하는 게 있다.
더욱이, 데칸고원 북동부의 쵸타나구풀 고원의 문다족 가운데, 보도어(語)족은 내 천(川)을 "테" 또는 "데"라 하여, 천(川)의 이름을 데블, 데크,데힌, 데혼, 데본, 데샤,데판, 데무라, 테·라오, 테스타 등으로 말하고, 이것을 부족명으로 한 것 같다. 산와(山窩) 중의 오랜 유예부족(遊藝部族)에 "테코나"라는 여예인(女藝人)이 있지만, 이것은 "천(川)의 여자(女)"의 뜻이 아닐까.
또 고구려에 "수척(水尺), 재인(才人), 백정(白丁)"이라는 비 농경부족이 있어, 각각 우리나라의 산와(山窩), 유예(遊藝), 백정준인(白丁 人)(에타)에 상당한다. 재인(才人)은 「일본서기」에도 쓰여져 있지만 천(川)의 사람의 의미이다. "상카"라는 말도 힌두어의 "상가"로, 원래는 이해를 같이하는 동료의 의미로, 후에 불교도, 공화제(共和制)라는 말로 변했다.
쵸타·나구풀 고원의 문다 족은 도루멘을 선조숭배의 장(場)으로 하여 와까모노야토(若者宿:동네 젊은이들이 밤에 모여 일도 하고 이야기하는 숙소, 사랑방)를 갖는 것도 있고, "신·봉가"라는 최고신을 갖는다. 또한 세습에 의한 제사적 추장과 세속적 추장을 갖고, 후자를 "문다"라고 한다. "신·봉가"는 화명신(火明神:홍아신)이고, "문다"는 산와(山窩)의 아문다 무리(衆)이다. 이와같이 생각하면, 산와(山窩)의 뿌리는 문다족으로 봐도 좋다. 문다어(語)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하나로, 몬 크멜어, 카시어,니코발어, 등과 같은 계통이다.
현재 문다족은 쵸타·나구풀 고원을 중심으로, 웃탈·부라데슈 주(州)의 일부의 마하데오 구릉, 히말라야 산지, 벵갈 등에 약 70만인 정도 있는데, 예전에는 인도 전역을 덮고 있었다. 밀림과 죽수(竹藪:대나무 덤불 늪) 가운데서 생활하고, 현재도 수렵과 야생식물에 의해 생활하고 있다. 이 곳도 산와(山窩)와 매우 닮아 있다. 문다족 중의 콜 족이라는 이름은 돈(豚) 족이라는 의미로, 아리아인이 붙인 경멸스런 명칭이지만, 부여(扶余) 6축(畜)의 저가(猪家:돼지 저)나, 우리나라의 저감부(猪甘部)(安曇海人)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또한 원시불교에는 "크샤트리아, 바라몬, 바이샤, 바이샤, 슈드라, 챤다라, 부츠쿠사"라는 6개의 카스트(계급)가 있는데, 이 중 챤다라는 도살, 부츠쿠사는 오물 청소자였다. 챤다라는 앗삼족이 있던 쵸타·나구풀의 주민을 의미하고, 고오베(神戶) 시 등의 미해방부락의 장전족(長田族)의 뿌리는 아닐까. 장전족은 산이현(山梨縣)을 거쳐 회진(會津) 지방으로 이동했는데, 이것은 졸저 「왜(倭)와 진국(辰國)」에서 서술했다.
그런데, 산와(山窩)에는 제철에 관한 전승이 있지만, 문다족은 원래 철의 문화를 이루고, 인도에 철을 들여 온 것은 아리아인이었다. 전(前) 13세기 이후, 철제 무기를 갖고, 기마전(騎馬戰)을 특기로 하는 아리아인이 몇 갠가의 그룹이 되어 인도에 침입했다. 아리아 어 최고의 문헌 「리그베다」에 의하면, 아리아인은 우선, 오하(五河) 지대의 펀잡에 침입하여, 선주민을 정복했는데, 이 선주민의 언어는 드라비다어 혹은 문다 어였다.
처음에 있던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을 지중해 방면에서 침입한 드라비다 어족이 쫓아내(驅逐) 인더스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문다족과 같은 오스트로·아시아어 계 제 족은 히말라야 산계(山系)에서 갠지스하(河) 유역에 분산되고, 더욱이 그 후 침입한 아리아 어족 때문에 양(兩) 언어(語)가 동방과 서방 인도로 쫓겨나게(驅逐) 되었다.
「고사기(古事記)」의 와니 조작 신화에서도, 이 아리아 족의 침입과 드라비다 수군(水軍)의 관계를 전하고 있다. (참고:와니(窩泥:움집와, 진흙니)는 漢족에게 동화된 양자강 유역의 동이 9족 계열인 묘(苗)와 요( )계의 분파인 라라면전(羅羅緬甸)계에서 다시 분파된 라라(羅羅)족이 본 줄기를 제외하고 곁가지 분파로 율속(栗粟), 라무(羅 :별이름 무), 와니(窩泥:움집와, 진흙니) 등의 부족으로 나뉜 3부족 중 하나다.:안원전) 4국의 "금비라(金毘羅)" 신은, 실은 갠지스 하(河)의 와니의 "콘피라"로, 염포수군(鹽飽水軍) 등의 신앙였지만, 앞으로도 알 수 있듯이, 와니는 사신(蛇神) 신앙(동이족 복희씨의 인두사신과 확실한 연계를 상징. 임 혜상은 양자강 유역의 사천성, 절강성 등의 동이 묘요계, 형오계, 백월계가 인도, 인도챠이나로 내려갔음을 고고학적, 문화인류학적으로 밝히고 있음을 참고하라 :안원전)을 갖는 드라비다족의 수군이었다. 와니 조작 설화의 원형은, 말레 반도에 있어 '사슴이 솔로몬 왕의 명에 의해 와니를 일렬로 줄을 세워 정렬시켰다'로 되는데, 「리그베다」에서는 사슴을 아리아인의 왕권으로, 와니(드라비다 수군)를 속인 사슴이란 아리아인을 가리킨다. 정확히 말하면, 혼혈 아리아인의 수군 에브스인 또는 페니키아인이다.
전(前) 18세기-17세기에, 우가릿드, 알와드, 비브로스, 베이루트, 시돈, 틸스, 아츠코 등에 아리아·후츠리 계 제족과 크레타·미케네 족이 침입하여, 선주족 야페테 제 족과 혼혈했다. 그래서 이 자손인 에브스인이나 페니키아 인은 혼혈 아리아인였다.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비데가·마타바는 입 안에 성화(聖火)를 갖고 있다. 성화(聖火)가 입에서 나와 동방으로 향하고, 대지를 태우면서 나아가 결국 사다니라 하(河)에 다다랐다. 그리고 불(火)은 아타바로, "너의 주소는 더욱 더 동방이라"고 했다. 이 하(河)는 지금도 아타바의 자손인 코사라인과 비데하인의 경계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코사라와 비데하는 인도 16왕조의 국가로, 앞에 서술했듯이, 코사라란 문다어(語)이고, 코사라의 수도 아요디아(아우도)는, 페니키아인의 정(町:밭) 알와드여서, 이 신화는 펀잡 아리아인과 페니키아계 알와드인이 문다족이 사는 코사라에 침입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산와(山窩)는 성화(聖火) 신앙을 전하고, 그 조상은 천화명신(天火明神)이다. 앞서 문다족의 "신·봉가"가 화명신(火明神)이라 했지만, 문다족은 수우(水牛:신농 도등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을 갖고, 한편 거란족은 "키키타에"라는 우신(牛神)신앙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소민장래(蘇民將來) 신앙과 동일한데, 그 뿌리는 카난의 지나간 축제이다. 천화명신(天火明神)이라는 신명(神名)에서도 성화(聖火)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천화명신(天火明神)은 "니기하야히"라고도 하고, 「기기(記紀):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이계(異系)의 신화지만, 「구사기( 事紀)」에서는 중심적인 신이었다. 「구사기( 事紀)」는 천황가 이전에 니기하야히의 일족이 야마다이국(邪馬臺國)을 세운 때의 사서였지만, 후에 백제인의 환무(桓武)가 만든 「서기(書紀):일본서기」에 맞춰 개찬되었다. 그 원형은 개찬 후의 10권본이 아니라, 「30권본 구사기」에 남아있고, 삼중정량(三重貞亮)이 뛰어난 연구를 남기고 있다.
그 천신본기(天神本紀)는, 니기하야히의 선단(船團)에 대하여, '읍취(揖取)·하도조(河刀造)의 조천마량신(祖天麻良神), 선자(船子)·단야씨(鍛冶氏:쇠불릴 단, 야금할 야)의 조천진진신(祖天津眞神), 천진마량신(天津麻良神), 천진적마량신(天津赤麻良神)'이라고 쓰고 있지만, "단야씨(鍛冶氏)의 아마츠마라"란 제철부족인 마라족을 나타내고 있다. 단야 인이란 아리아인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단야씨의 선조를 이끈 "니기하야히"는 아리아인이어야만 하지만, 메르츠하 인(人)은 카르데아 또는 페니키아 계의 혼혈 아리아였다.
한편, 산와(山窩) 문자는 브라흐미·카로시티 문자의 계통였지만, 전자는 페니키아인의 문자이고, 후자는 아케메네스·페르시아가 마가다에게 전한 문자였다. 문다족의 땅 코사라에 페니키아인이 침입했다고 가정하면, 그때 문다족은 페니키아 문자를 배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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