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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아름]인용자료

후한서와 삼국지의 차이: 진왕의 통치국 수 - 김상

작성자麗輝|작성시간04.09.20|조회수235 목록 댓글 0
후한서와 삼국지의 한전은 몇가지 차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진왕이 통치하는 나라의 숫자다.

후한서: 마한 전체와 변진한 24국 전체
삼국지: 마한 전체와 변진한 24국 중 12국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의 기록은 그 주 표현양식이 왜인이냐 왜병이냐에 따라 3기로 나뉜다.

<1> 전기왜 - 왜인
1) 남해11년(AD 8); 왜인이 <병선 100척>으로 해안의 민가를 공격함. 본래는 2)번 다음에 올 기사임.
2) 탈해3년(AD 59) 여름 5월; 왜국과 우호를 맺음 <강화조약 1>
3) 탈해17년(AD 73); 왜인이 목출도를 공격해오나 이기지 못함 - 신라군 패배
4) 지마10년(AD 121) 여름 4월; 왜인이 동변을 침범함.
5) 지마11년(AD 122) 여름 4월; 왜인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백성들이 산곡으로 피난
6) 지마12년(AD 123) 봄 3월; '왜국'과 강화함 <강화조약 2>
7) 아달라5년(AD 158) 봄 3월; 죽령을 개통함. 왜인이 내빙
8) 아달라20년(AD 173) 여름 5월; '왜여왕' 비미호의 사신 내빙- <<일본서기와 일치>>
9) 벌휴10년(AD 193) 여름 6월; 왜인이 큰 기근으로 1000여명이 몰려와 걸식함
10) 내해13년(AD 209) 여름 4월; 왜인이 국경을 넘어와 쫓아냄
* 삼국사기에서 가야가 사라짐
11) 조분3년(AD 232) 여름 4월; 왜인이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여 이를 격퇴함
12) 조분4년(AD 233) 여름 5월; 왜병이 동변을 침구하였으나 우로가 격퇴함
*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13) 첨해3년(AD 249) 여름 4월; 왜인이 우로를 죽임 - <<일본서기와 일치>>

<2> 중기왜 - 왜병
* 미추이사금대에는 왜의 기록이 없음
14) 유례4년(AD 287) 여름 4월;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함
15) 유례6년(AD 289) 여름 5월; 왜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선박과 갑병을 수선함
16) 유례9년(AD 292) 여름 6월;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였으나 대곡이 격퇴함
17) 유례11년(AD 294) 여름;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해왔으나 패함 - 신라군 패배
18) 기림3년(AD 300) 봄 1월; '왜국'과 친교를 맺음 <강화조약 3>
19) 흘해3년(AD 312) 봄 3월; 아찬 급리의 딸을 '왜국'에 시집 보냄
* 초기신라와 중기신라가 나뉘는 지점임
20) 흘해35년(AD 344) 봄 2월; '왜국'의 청혼을 거절함
21) 흘해36년(AD 345) 봄 2월; '왜왕'이 절교의 편지를 보내옴
22) 흘해37년(AD 346); 왜병이 금성을 포위하였으나 강세가 강한 기병으로 격퇴
23) 내물9년(AD 364) 여름 4월; 왜병이 쳐들어왔으나 허수아비 전법으로 격퇴
24) 내물38년(AD 393) 여름 5월; 왜병이 금성을 포위하였으나 격퇴함
25) 실성1년(AD 402) 봄 3월; '왜국'과 우호를 맺고 미사흔을 볼모로 잡힘 <<일본서기와 일치>> <강화조약 4>
26) 실성6년(AD 408) 봄 3월, 여름 6월; 왜인이 동변과 남변을 침범
27) 실성14년(AD 415) 가을 8월;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김
28) 눌지2년(AD 418) 가을; 미사흔이 왜국을 탈출함 <<일본서기와 일치>>
29) 눌지15년(AD 431) 여름 4월; 왜병이 명활성을 포위했다가 돌아감
30) 눌지24년(AD 440) 여름 6월; 왜인이 동변을 침범함
31) 눌지28년(AD 444) 여름 4월; 왜병이 금성을 포위했다가 돌아감

<3> 후기왜 - 왜인
32) 자비2년(AD 459) 여름 4월; 왜인이 <병선 100척>으로 동변을 습격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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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이라 할 때는 어느 국가의 국민이란 뜻이 강하고 왜병이라 할 때는 그 국민이라는 것 보다는 국가 자체의 의미가 강하다. 신라본기를 보면 대략 3세기 후반 미추이사금대를 경계로 왜인이란 표현 대신 왜병이란 표현으로 바뀌는 특징이 있다. 이는 왜 지역이 상당히 독립적인 국가화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미추이사금대는 왜로부터의 공격이 전혀 없는데 이는 적어도 가야지역에 반신라적이 아닌 상당히 중립적인 정권이 들어섰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추이사금 이후 백제와 함께 다시 신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그 정권의 성격은 (韓으로 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고 상당한 자율권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 자율권이 미추이사금시대인 3세기 후반에 상당히 컸다는 뜻이다.

어떤 이유로 3세기 후반에 가야지역에 상당히 독립적인 정부가 들어섰을까? 이것은 3세기 중반에 있었던 고구려-위 전쟁의 결과로 볼 수 밖에 없다. 위군 추격군이 옥저땅에서 고구려군에게 패하여 동해안을 따라 신라땅으로 도망치고(삼국사기를 보면 석우로의 신라군이 막지 못했다), 다시 고구려 추격군이 그 뒤를 쫓아 신라를 거쳐 가야지역까지 가는 추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 추격전이 신라-가야 지역을 흔들어 놓았다.

3년 후 신라가 고구려에 화친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는 것을 보면 이 추격전은 종식되는데 거의 3년이 걸렸으며, 그 결과 귀환이 불가능한 위군으로 참전한 선비족 군대는 그냥 신라와 가야에 남고, 고구려군은 일부는 남고 일부는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여파가 가야지역에 韓으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인 새로운 정권을 수립시켰는데, 이것이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기술한 <전기왜>로부터 <중기왜>로의 전환이다. 이 중기왜는 확실히 신라보다 강국이다.

위군 추격군은 선비족 최정예 기병대로서 우수한 기병부대 운용전술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을 추격한 고구려군 역시 당시 선비족 못지 않은 우수한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였다. 주로 선비족 군대인 이들은 3세기 후반에 가야와 신라에서 각각 왕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러나 미추이사금의 김씨 왕통이 당대에서 끝나는 것을 보면 이들은 수가 적어 장기적인 집권은 불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온 문화는 신라와 가야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따라서 관구검 침공 이전인 3세기 초를 기록한 후한서는 변진한 24국이 모두 한에 속했다고 기록한 것이고, 관구검 전쟁 이후인 대략 260년 경을 기록한 삼국지는 중기왜의 성립에 의한 변한세력의 이탈을 보았기에 한의 진왕은 12국만 다스린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진왕체제에서 이탈한 변한 12국도 역시 변진한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12국이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고 상당한 자율권을 행사한 것이다.

변한 12국의 상당한 이탈이 정확하다는 것은 3세기 후반 중국을 통일한 서진에 마한왕과 진한왕의 사신이 오고 변한왕의 사신이 오지 않는 것으로 부터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변한은 마한이나 진한과 상당히 다른 정책을 펴고 있었다. 광개토왕비를 보면 4세기 말에는 한반도에 고구려, 한(왜), 백잔, 임나, 신라 이렇게 5국이 있었다. 고구려는 비문에서 임나는 한의 영역으로 인정하나, 백잔과 신라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영역으로 주장하고 있다. 즉, 한이 백잔과 신라마져 자신들의 영역에 넣으려고 하니 전쟁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4세기에 중기왜는 백잔이나 신라에 상당할 정도의 독립적인 국가였으나 역시 한의 영향하에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지를 비교해 볼 때 변진한 24국 중 진왕의 통치에서 이탈한 것은 주로 변한계열 12국이다. 그리고 중기왜의 왜왕은 진왕의 통치에서 이탈한 변진한 12국의 왕이 된다. 이 왜왕은 당시 임나왕이다. 5세기에 중국 남조에 간 왜국 사신이 6국도독을 요구하는데 마한과 진한만 있고 변한은 없으며, 그 자리에 임나가 대신 있는 것은, 3세기 중후반에 생긴 전기왜에서 중기왜로의 전환을 뜻한다. 당시 변한은 임나가 중심이었다.

관구검 전쟁 직전에도 왜병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미 한이 가야제국을 통합한 3세기 초반부터 가야지역은 상당히 독립적인 변화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3세기 중반에 이 지역에서 벌어진 대 추격전은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임나가 韓에서 독립하지 못했을 때는 왜인으로, 상당히 독립했을 때는 왜병으로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니면 韓에 속한 변한인은 왜인으로, 韓에서 독립한 변한인은 왜병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5세기 중반 <중기왜>는 다시 <후기왜>로의 전환을 보인다. 이것은 중기왜가 韓을 계승한 백제의 영향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이것을 우리 학계는 임나일본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임나백제부였다고 보고 있다). 즉, 당시 임나지역은 자율성을 상실하고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후기왜가 결정적으로 약해지는 것은 그들의 배후인 구주지역이 6세기 초에 기내조에 점령되어 배후를 상실하면서부터 이다. 반면에 신라는 6세기 이후로 점차 강해져서 법흥왕대에는 임나를 일방적으로 공격하여 병합하기 시작하고 진흥왕대에 멸망시킨다. 이것으로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구주에 걸친 해협국가(가야교역권)가 사라졌다. 이 가야교역권은 이후 백제교역권으로 대치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의 기록은 가야사로서, 가야의 기록보다 3배 이상 많은 가야사의 핵심이다. 따라서 왜의 기록을 빼고 가야사를 논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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