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님의 치명적 결점 - 임나가야는 부산인가?
작성자 : 관객
임나가야를 국문학을 전공한 부산대 교수였던 이병선 박사는 대마도라고 했습니다. 김성호 박사는 부산 가야동 일대라고 했습니다. 동의할 수 없는 두 설의 공통점은 사학 전공자가 아닌 분들이 들고 나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마도가 임나가야라는 설은 국문학적 언어분석적 치밀한 연구 끝에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으나 기본적인 위치 즉 임나는 계림의 서남에 있다라는 구절을 완전 무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도 왜와 임나를 구별하고 있으며, 대마도를 왜의 거점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참고 삼국사기> ; 實聖尼師今七年(408); 春二月 王聞倭人於對馬島 置營貯以兵革資粮.
임나 대마도설은 설 땅이 없습니다.
더구나 임나가 부산이라는 설은 참으로 웃기는 설입니다. 단지 부산에 가야동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렇다면 가야산에도 임나의 본거지가 있었는지 찾아 보아야하는 초보적 논리입니다. 금관국이 김해에 존재하고 임나는 부산에 조그마하게 존재했습니다(김성호논리). 그런데 이 조그만 임나 때문에 그렇게 일본의 조정이 난리를 칩니까?
<참고 일본서기> 임나를 잃고 일본의 태자와 대신은 피를 토하듯 울고 원한을 품었다(일본서기 흠명23년6월) 흠명천왕은 죽으면서 황태자에게 남긴 유일한 유언이 임나에 관한 것이었다.(흠명26년4월) 임나를 회복하라고 하고는 죽었다. 그의 아들 민달은 죽기전 선천왕의 칙을 배반하지 말고 임나의 일을 잘해라 라고 용명천왕에게 유언했다(민달14년 3월)
일본천왕들이 동일한 일로 두번 유언을 남긴 유일한 사건이 바로 임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임나가 망했다는 흠명23년은 신라 진흥왕23년(562)으로 이때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가 모반하여 이사부가 가야를 항복시켰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참고 삼국사기> 眞興王 二十三年: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斯多含副之...異斯夫引兵臨之日時盡降..
일본서기의 진위여부를 떠나 임나를 부산지역으로 국한하고 나면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임나자체를 부정하던지 아니면 임나가 상당히 큰 세력이었음을 인정하던지 해야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부산이 신라에 편입된 것은 위의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흠명23년(562)이 아닙니다. 부산이 562년에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말하면 무식하다는 소리 듣습니다. 부산지역의 신라편입은 무려 200년 가량 이전인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봅니다. 출토되는 신라식 금동관과 가야식 토기가 신라계 토기로 변하는 시점이 그렇지요. 김상님의 말대로라면 이미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임나를 신라가 다시 가져간 것이고 그래서 일본은 태자와 대신이 울고불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일본서기를 믿을 경우).
일본서기에는 임나와 가야가 동일지역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임나는 가야의 한 지역으로 격하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임나가 가야와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하고 지역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혼란을 보입니다. 어설프게 임나를 부산으로 비정하면 일본서기에도 맞지 않고 삼국사기에도 맞출 수 없는 불구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사학계의 다수설을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기본이 안되어 있는 부산설은 치명적인 악수를 계속 두게 하지요. 왜 임나인 부산이 4세기말 5세기 초에 망해버렸는지요? 임나가 부산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이 통설을 거부할 수 있는 김상님의 답변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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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1) 임나는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숭신천황 65년).
2) 신라는 遂致强盛 襲가라임나諸國滅之 - 通典 신라전 -> 가야와 임나는 별개다.
3) 가라임나 昔爲신라所滅 - 翰苑 신라전 -> 가라와 임나는 별개다.
4) 가라임나 竝在國칠팔백리 - 翰苑 신라전 -> 가라와 임나는 동서로 나란히 있다.
5) 임나와 신라는 경계를 접한다(흠명천황 2년) -> 임나와 신라는 국경을 접한다.
6) 다다랑公 出自 御間名國主(임나왕) - 신찬성씨록, 다다랑 = 부산 다대포(일본학자 학설)
7) 임나왕족 草拔聖枝 (10세기초 진경대사 탑비) -> 초발이 임나지역에 있는 지명이다.
8) 왜를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추격(광개토왕비문) -> 임나는 왜로 가는 출구다.
9) 임나가야왕 모류지(신찬성씨록) -> 가야의 왕성은 모두 김씨이나 임나의 왕성에는 모씨도 있다.
위를 보면 김해가야와 임나가야는 서로 다른 나라입니다. 지도를 펴놓고 계림의 바로 남쪽이 어디이며 서남쪽은 어디인가 보시기 바랍니다. 얼핏 생각하면 남쪽이 부산이고 서남쪽이 김해일 것 같으나 지도를 보면 둘 다 서남쪽입니다. 그리고 대마도도 서남쪽에 있습니다.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는 표현이 임나-대마도설의 중요 근거중 하나인데, 당시의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북쪽이 바다로 막힌 곳은 보기에 따라서는 계림의 서남쪽에 여럿 있습니다. 당시 김해평야는 상당부분이 바다였고 부산은 동서로 길게 뻗은 반도라서 부산반도에서 보면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었습니다.
"實聖尼師今 七年(408); 春二月 王聞倭人於對馬島 置營貯以兵革資粮..>
임나 대마도설은 설 땅이 없습니다." - 관객
<실성이사금 7년> 봄 2월, 왕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정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시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저는 '병기란 흉물스런 도구요... 상책입니다." 왕이 (계획을 중지하고) 이 의견을 따랐다. - 000
대마도 토론은 사건이 아닙니다. 대마도를 임나로 보는 분은 여러분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위의 기록을 몰라서 임나 대마도설을 주장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 모두 위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위의 실성이사금 7년에는 그와 관련된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임나-대마도설을 주장하시는 분들 말씀대로, 이것은 판정의 자료가 못됩니다. 사건이 아닌 토론은 또 있습니다. 이것도 역사학 판정의 자료가 아닙니다.
<유례 이사금 12년> 봄에 왕이 신하에게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다. 내가 백제와 함께 계획을 세워 백제와 우리가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이 계획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서불한 홍권(弘權)이 말하기를"... "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듣고 "옳다" 하였다.
당시의 한일사이의 바다에 있던 대 세력은 임나가야입니다. 6세기 김해가야는 임나가야는 물론이고 고령의 대가야보다도 열세인, 그래서 싸우지도 못하고 신라에 항복할 정도로 작은 세력이었습니다. 반면에 임나가야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해안이 그의 주 영역이지만, 대마도를 건너 구주에 야마대를 건국하였습니다(숭신천황). 따라서 대마도와 북구주까지 그들의 영향권이었습니다.
"임나가 망했다는 흠명23년은 신라 진흥왕 23년(562)으로, 이때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가 모반하여 이사부가 가야를 항복시켰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 관객
(a) 멸망한 달이 서로 다릅니다.
- 임나가야는 1월이고, 대가야(김해가야가 아님)는 9월입니다. 이 무렵은 신라가 성왕의 백제군을 전멸시키고 창녕 순수비를 세울 무렵으로, 가야계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들어갑니다.
(b) 멸망의 과정이 다릅니다.
- 가야는 거의 무혈이고 임나는 처절한 유혈이었습니다.
(c) 멸망 후 처우가 다릅니다.
- 항복한 김해가야는 문무왕 이후 신라로부터 대우받고 그대로 김해지방에 남아있는데(고려사의 기록), 토벌된 임나가야는 충북내륙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d) 사료의 존속이 다릅니다.
- 가야는 왕력을 남겼으나(삼국유사 가락국기 ) 임나는 왕력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5세기의 신라가 부산일대에서 활동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 외에 4세기말 5세기초 신라식 금동관이 가야지역에서 발견되는 이유도 모씨신라, 좌지왕 등에서 이미 여러 번 올렸습니다. 영락 17년의 남정으로 후기가야가 신라의 지원하에 건국하였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적으로 4말5초에 신라지역이 가야지역보다 뚜렸한 우위에 서지 못했습니다. 4세기까지는 부산지역의 문화가 신라지역의 문화보다 우세하며, 5세기에 서로 경쟁하다 점차 역전되어, 6세기에 신라지역이 확실한 우세를 확립합니다. 그러면 신라가 부산지역을 합병하는 것은 6세기가 합당합니다. 문화는 국력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만 임나때문에 그렇게 일본의 조정이 난리를 칩니까?" - 관객
-> 임나는 한반도에서 왜국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임나가 왜국에게 중요한 이유는 왜국의 국가 건국과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임나가 막히면 사람들이 건너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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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일본서기 숭신기에서 "임나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다."는 부분을 따서 임나의 위치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면 같은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다음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 xxx
일본서기 흠명기;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극, 합해서 10국이다"
[답변] 이 기록은 임나를 실제보다 큰 나라로 기록하여 중요성을 부각시킨 과장입니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 3-4세기(중기왜를 뜻함) 모든 가야제국은 멸망하고 임나만 남아 가야 전체를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임나가 망하자 전성기였던 그때를 회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성자 : 관객
임나가야를 국문학을 전공한 부산대 교수였던 이병선 박사는 대마도라고 했습니다. 김성호 박사는 부산 가야동 일대라고 했습니다. 동의할 수 없는 두 설의 공통점은 사학 전공자가 아닌 분들이 들고 나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마도가 임나가야라는 설은 국문학적 언어분석적 치밀한 연구 끝에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으나 기본적인 위치 즉 임나는 계림의 서남에 있다라는 구절을 완전 무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도 왜와 임나를 구별하고 있으며, 대마도를 왜의 거점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참고 삼국사기> ; 實聖尼師今七年(408); 春二月 王聞倭人於對馬島 置營貯以兵革資粮.
임나 대마도설은 설 땅이 없습니다.
더구나 임나가 부산이라는 설은 참으로 웃기는 설입니다. 단지 부산에 가야동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렇다면 가야산에도 임나의 본거지가 있었는지 찾아 보아야하는 초보적 논리입니다. 금관국이 김해에 존재하고 임나는 부산에 조그마하게 존재했습니다(김성호논리). 그런데 이 조그만 임나 때문에 그렇게 일본의 조정이 난리를 칩니까?
<참고 일본서기> 임나를 잃고 일본의 태자와 대신은 피를 토하듯 울고 원한을 품었다(일본서기 흠명23년6월) 흠명천왕은 죽으면서 황태자에게 남긴 유일한 유언이 임나에 관한 것이었다.(흠명26년4월) 임나를 회복하라고 하고는 죽었다. 그의 아들 민달은 죽기전 선천왕의 칙을 배반하지 말고 임나의 일을 잘해라 라고 용명천왕에게 유언했다(민달14년 3월)
일본천왕들이 동일한 일로 두번 유언을 남긴 유일한 사건이 바로 임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임나가 망했다는 흠명23년은 신라 진흥왕23년(562)으로 이때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가 모반하여 이사부가 가야를 항복시켰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참고 삼국사기> 眞興王 二十三年: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斯多含副之...異斯夫引兵臨之日時盡降..
일본서기의 진위여부를 떠나 임나를 부산지역으로 국한하고 나면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임나자체를 부정하던지 아니면 임나가 상당히 큰 세력이었음을 인정하던지 해야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부산이 신라에 편입된 것은 위의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흠명23년(562)이 아닙니다. 부산이 562년에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말하면 무식하다는 소리 듣습니다. 부산지역의 신라편입은 무려 200년 가량 이전인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봅니다. 출토되는 신라식 금동관과 가야식 토기가 신라계 토기로 변하는 시점이 그렇지요. 김상님의 말대로라면 이미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임나를 신라가 다시 가져간 것이고 그래서 일본은 태자와 대신이 울고불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일본서기를 믿을 경우).
일본서기에는 임나와 가야가 동일지역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임나는 가야의 한 지역으로 격하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임나가 가야와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하고 지역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혼란을 보입니다. 어설프게 임나를 부산으로 비정하면 일본서기에도 맞지 않고 삼국사기에도 맞출 수 없는 불구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사학계의 다수설을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기본이 안되어 있는 부산설은 치명적인 악수를 계속 두게 하지요. 왜 임나인 부산이 4세기말 5세기 초에 망해버렸는지요? 임나가 부산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이 통설을 거부할 수 있는 김상님의 답변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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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나는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숭신천황 65년).
2) 신라는 遂致强盛 襲가라임나諸國滅之 - 通典 신라전 -> 가야와 임나는 별개다.
3) 가라임나 昔爲신라所滅 - 翰苑 신라전 -> 가라와 임나는 별개다.
4) 가라임나 竝在國칠팔백리 - 翰苑 신라전 -> 가라와 임나는 동서로 나란히 있다.
5) 임나와 신라는 경계를 접한다(흠명천황 2년) -> 임나와 신라는 국경을 접한다.
6) 다다랑公 出自 御間名國主(임나왕) - 신찬성씨록, 다다랑 = 부산 다대포(일본학자 학설)
7) 임나왕족 草拔聖枝 (10세기초 진경대사 탑비) -> 초발이 임나지역에 있는 지명이다.
8) 왜를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추격(광개토왕비문) -> 임나는 왜로 가는 출구다.
9) 임나가야왕 모류지(신찬성씨록) -> 가야의 왕성은 모두 김씨이나 임나의 왕성에는 모씨도 있다.
위를 보면 김해가야와 임나가야는 서로 다른 나라입니다. 지도를 펴놓고 계림의 바로 남쪽이 어디이며 서남쪽은 어디인가 보시기 바랍니다. 얼핏 생각하면 남쪽이 부산이고 서남쪽이 김해일 것 같으나 지도를 보면 둘 다 서남쪽입니다. 그리고 대마도도 서남쪽에 있습니다.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는 표현이 임나-대마도설의 중요 근거중 하나인데, 당시의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북쪽이 바다로 막힌 곳은 보기에 따라서는 계림의 서남쪽에 여럿 있습니다. 당시 김해평야는 상당부분이 바다였고 부산은 동서로 길게 뻗은 반도라서 부산반도에서 보면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었습니다.
"實聖尼師今 七年(408); 春二月 王聞倭人於對馬島 置營貯以兵革資粮..>
임나 대마도설은 설 땅이 없습니다." - 관객
<실성이사금 7년> 봄 2월, 왕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정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시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저는 '병기란 흉물스런 도구요... 상책입니다." 왕이 (계획을 중지하고) 이 의견을 따랐다. - 000
대마도 토론은 사건이 아닙니다. 대마도를 임나로 보는 분은 여러분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위의 기록을 몰라서 임나 대마도설을 주장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 모두 위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위의 실성이사금 7년에는 그와 관련된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임나-대마도설을 주장하시는 분들 말씀대로, 이것은 판정의 자료가 못됩니다. 사건이 아닌 토론은 또 있습니다. 이것도 역사학 판정의 자료가 아닙니다.
<유례 이사금 12년> 봄에 왕이 신하에게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다. 내가 백제와 함께 계획을 세워 백제와 우리가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이 계획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서불한 홍권(弘權)이 말하기를"... "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듣고 "옳다" 하였다.
당시의 한일사이의 바다에 있던 대 세력은 임나가야입니다. 6세기 김해가야는 임나가야는 물론이고 고령의 대가야보다도 열세인, 그래서 싸우지도 못하고 신라에 항복할 정도로 작은 세력이었습니다. 반면에 임나가야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해안이 그의 주 영역이지만, 대마도를 건너 구주에 야마대를 건국하였습니다(숭신천황). 따라서 대마도와 북구주까지 그들의 영향권이었습니다.
"임나가 망했다는 흠명23년은 신라 진흥왕 23년(562)으로, 이때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가 모반하여 이사부가 가야를 항복시켰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 관객
(a) 멸망한 달이 서로 다릅니다.
- 임나가야는 1월이고, 대가야(김해가야가 아님)는 9월입니다. 이 무렵은 신라가 성왕의 백제군을 전멸시키고 창녕 순수비를 세울 무렵으로, 가야계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들어갑니다.
(b) 멸망의 과정이 다릅니다.
- 가야는 거의 무혈이고 임나는 처절한 유혈이었습니다.
(c) 멸망 후 처우가 다릅니다.
- 항복한 김해가야는 문무왕 이후 신라로부터 대우받고 그대로 김해지방에 남아있는데(고려사의 기록), 토벌된 임나가야는 충북내륙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d) 사료의 존속이 다릅니다.
- 가야는 왕력을 남겼으나(삼국유사 가락국기 ) 임나는 왕력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5세기의 신라가 부산일대에서 활동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 외에 4세기말 5세기초 신라식 금동관이 가야지역에서 발견되는 이유도 모씨신라, 좌지왕 등에서 이미 여러 번 올렸습니다. 영락 17년의 남정으로 후기가야가 신라의 지원하에 건국하였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적으로 4말5초에 신라지역이 가야지역보다 뚜렸한 우위에 서지 못했습니다. 4세기까지는 부산지역의 문화가 신라지역의 문화보다 우세하며, 5세기에 서로 경쟁하다 점차 역전되어, 6세기에 신라지역이 확실한 우세를 확립합니다. 그러면 신라가 부산지역을 합병하는 것은 6세기가 합당합니다. 문화는 국력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만 임나때문에 그렇게 일본의 조정이 난리를 칩니까?" - 관객
-> 임나는 한반도에서 왜국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임나가 왜국에게 중요한 이유는 왜국의 국가 건국과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임나가 막히면 사람들이 건너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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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일본서기 숭신기에서 "임나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다."는 부분을 따서 임나의 위치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면 같은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다음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 xxx
일본서기 흠명기;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극, 합해서 10국이다"
[답변] 이 기록은 임나를 실제보다 큰 나라로 기록하여 중요성을 부각시킨 과장입니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 3-4세기(중기왜를 뜻함) 모든 가야제국은 멸망하고 임나만 남아 가야 전체를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임나가 망하자 전성기였던 그때를 회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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