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과 맹자의 동이족 귀방과 죽서기년 기록+주(周)와 귀방(鬼方)과의 전쟁규모+환단고기 단군세기 속의 귀방과 정벌 - 안원전
작성자麗輝작성시간04.08.23조회수388 목록 댓글 0
경서(經書)의 큰 스승인 정현(鄭玄:마융과 견주는 훈고학자로 자신이 동이족이라 고백)은 「상서대전(尙書大傳)」주(注)에 '남중 일행이 아울러 두 도둑을 평정했다(南仲一行 平二寇)'고 그릇 설명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시경」, 「맹자」의 본의(本意)가 겨우 중복을 피해 문장을 지었으니 그 영향이 후세에 미쳐, 귀방일족(鬼方一族)을 한 손에 쥐고 쫓아내, 힘써 강제로 2 개의 국가로 나뉘고 말았다.
「맹자」가 설명한 바의 "훈죽( )"은 곧 「사기」 <오제본기>의 "훈죽( 粥)"이며, 「주본기(周本紀)」의 "훈육(薰育)"이니, 곧 글자는 다르지만 음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출거편(出車篇)>에서 노래한 바의 험윤( )은 도리어 마땅히 "훈( )", "훈(薰)", "훈( )" 음을 길게 늘인 것이니,
또한 곧 혜갑반(兮甲盤)의 "엄윤(嚴麥允)", 불*돈(不*敦:其+丸밑에女)의 "훈윤( 允)은 곧 음이 와전되어 글자 역시 한결같이 그릇된 것이니, 또한 이로 인해 갑골복사가 명시한 바의 귀(鬼) 자의 원시 의의(意義)인 귀방(鬼方)의 부족연원은 곧 다시금 깊숙이 인몰(湮沒)되어 밝게 드러나지 않아 시초부터 박멸되어 짓밟힌 채 길을 잃고 흩어져 버렸으므로 아무도 가히 연구해 따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기실, 고대 농업의 굴흥( 興:우뚝 솟아 부흥)은 견롱( :견은 강이름 견, 고개이름 롱으로 견은 섬서성에서 발원하여 위수(渭水)로 흘러드는 강, 현재 은 섬서성의 딴 이름이지만 본래는 감숙성 청수(淸水)현 북쪽을 이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주족(周族)의 농업 역시 유기(幽岐)에서 처음 일어난 것으로 가히 모두 설명할 수 있으며 이에, 귀방(鬼方)족의 경영은 전보다 더 참담하고 싱거웠으나 이들의 농업경영은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후일 주(周)나라 사람들이 단순히 귀방만(鬼方蠻)으로 야만시해 정치 선전한 후대보다 크고 광대한 것이었다.
이들의 가장 이른 활동 발자취에 대한 기록만 보아도 '귀방역(鬼方易) 운운', '귀방화역불치위화(鬼方和易不致爲禍)', '고종벌귀방(高宗伐鬼方) 「易 旣濟」', '진용벌귀방(震用伐鬼方) 「易未濟」'주 왕계벌서락귀융(周 王季伐西落鬼戎) 「후한서 서강(西羌)전」<죽서기년 인용 注>'
섬서성 미현( 縣) 예촌(禮村)이란 곳에서 소우정(小盂鼎:작은 주발솥)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비록 주(周)나라가 귀방을 정벌한 전쟁결과가 기록되어 있지만 귀방의 옛 치세 역시 강성하여 솥의 손상된 문장 나머지 글귀는 전쟁의 방대한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우(盂)」는 곧 귀방 사람을 정벌하라는 주왕의 명을 받든 것으로, 왕국유(王國維)의 「귀방곤이험윤고(鬼方昆夷 考)」에 풀어 설명한 것에 의하면, 혹(或) 자 입 구(口)의 한 一 밑에 한 一을 하나 더 긋고 3점(연화발)을 찍은 글자는 곧 首或 자로, 곧 고대 전쟁에서 포로를 잡아 귀를 자른 형벌이니 부(孚)는 곧 부( )의 본 글자이며,
3천을 뜻해 한 일을 4개 겹쳐 긋고 위에서 아래로 그은 글자(干에 二를 더 그은 글자)라든가, 수(獸:우측 개 견 삭제)는 수(首)로 「집수(執獸:개견 삭제)」라는 기록은 곧 「역(易)」 「유가절수(有嘉折首)」의 목을 벴다는 절수(折首)를 말한다.
이를 근거로 이 전역(戰役)을 풀어 해석하면, 귀방(鬼方)은 거듭해 소, 양, 차량을 심히 많이 손실 당했으며, 포로가 된 전투원이 무려 13,081 명에 달하고, 그 중 피살자가 1인, 귀를 잘린 사람이 약간 명이니, 과연 가히 대규모의 전쟁이라 이를 만 했다. 고대 중국의 유명한 전쟁인 춘추시대 진초(晉楚) 성복(城 )의 전쟁은 규모 면에서 이보다 한 수 아래다.
그때의 진(晉)국의 병력은 두예(杜預)가 어림잡아 계산한 것에 의하면, 불과 5만 2천 5백인에 불과하고, 초(楚)의 포로를 사로잡은 것이 불과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인 사(駟)가 백 승(乘), 보병 일 천명에 불과했으니 포로와 병력대비로 비교하면 이는 주(周)와 귀방(鬼方)과의 전쟁규모의 20분의 1도 못 미치는 것이다.
이로 추정하면 귀방(鬼方)의 포로가 된 병사는 물경 1만 3천여 명에 이르며 그 동원병력은 반드시 20만 이상에 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로 헤아려 보면 주방(周方)의 군대 역시 이와 비슷한 20만 군대 이상을 동원할 수 있는 수준에 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 그보다 강했던 옛날 귀방(鬼方)의 부강함과 웅후함은 가히 상상이 가는 바이다.
이 신농족의 세석기 문화는 역사이전과 역사이후에 있어 한결같이 중국의 혜성이 되었다. 그럼 이번에는 대륙의 사가들이 보는 귀방(鬼方)의 미스테리에 대한 종합적인 측면을 알아보기로 한다. 이는 필자가 대륙의 향토사료에서 발췌해 번역 소개한다.
-「역경(易經)」, 「시경(詩經)」, 「상서(尙書)」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 갑골문자에 이르기까지의 선진(先秦) 문헌은 모두 귀방(鬼方)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귀방(鬼方)이 상(商)에 있었고, 주(周) 나라시기에 존재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확정적이다.
귀방(鬼方)은 궁극적으로 어느 지방에 있었는가?
오늘날의 귀주(貴州)를 포괄하고 있는가? 오랜 세월이 지난 이래 이를 보는 시각이 한결같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한(漢), 당(唐) 기간의 학자들인, 공안국(孔安國), 양웅(揚雄), 반고(班固), 응소(應 ), 서소(書昭), 우번(虞 ), 범엽(范曄), 송충(宋衷), 간보(干寶), 공영달(孔潁達), 안사고(顔師古) 등은 모두 그들의 유관 경사(經史) 주석이나 혹 저술 가운데서 귀방(鬼方)을 먼 지방 북방국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혹자는 직접 귀방(鬼方)이 바로 서강(西羌)이라고 말한다.
송(宋), 원(元) 이후에 미치면, 비로소 왕질(王質), 주희(朱熹), 범회( ), 유월(兪 ), 혜동(惠棟), 모기령(毛奇齡), 이방담(李方湛), 장수(張澍), 유심원(劉心沅)등의 학자들이 나와서 「죽서(竹書)」등을 근거하여 별도로 새로운 학설을 창설하게 되는데, 귀방(鬼方)을 지금의 서남일대라고 밝히게 된다.
이때, 일시에 각 가(家)가 동시에 일어나게 되니 필경 각기 그 학설이 되었으므로, 마치 구 학설을 압도하는 형세 같이 보였으나, 사실에 대해 부족한 부분으로 인해 공인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북서설(北西說)은 거듭해 몇 몇 학자만 굳게 믿고 있는데, 이는 마치 왕국유(王國維)가 지은 「귀방곤이험윤고(鬼方昆夷 考)」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은(殷)대의 귀방(鬼方)은 곧 후대의 곤이(昆夷:형 곤, 맏이 곤), 험윤( ), 융(戎), 적(狄), 흉노(匈奴)이며, 그 땅은 대륙의 서북에 있어 북방의 광대한 영역까지 바라보고 있다고 인정한다.
이 주장의 결론은 기본적으로 실제와 부합하여, 근대 대다수의 학자들이 공인을 얻어냈으니 이들의 예는 다음과 같다. 곽말약(郭末若), 전백찬(전伯贊), 여진우(呂振羽), 담기양(潭其 ), 상월(尙鉞) 등은 그들의 저작 혹은 도책(圖冊) 가운데서 모두 기본적으로 왕(王)씨의 고증을 근거로 했다.
곽말약(郭末若)이 지은 「중국사고(中國史稿)」는, 다시금 귀방(鬼方)의 구체적 지역이 "지금의 섬북(陝北:섬은 섬서성이고 섬주는 하남성 서부) 내몽(內蒙) 및 그 이북의 멀고 먼(遼闊) 지구"가 된다고 말한다.(수정본 1책 제 164항)
왕(王)씨의 고증으로 말미암아, 정면으로 논리를 세운 후, 송 원이래 제가(諸家)가 위에 서술한 학설의 착오를 지적한 이가 없었으니 서남설(西南說)은 거듭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임가징(任可澄)이 민국(民國) 시기에 「귀주통지(貴州通志)」를 주관해 편수하던 기간에, 그의 「차동정집(且同亭集)·귀방고(鬼方考)」(이하 「귀방고(鬼方考)」로 간칭)의 한 글 중에, 거듭 귀방(鬼方)이 지금의 서남에 펼쳐졌다고 주장하고, 아울러 이러한 관점은 「귀주통지(貴州通志)」의 관련부분에 편입되었다.
1980년 귀주인민출판사의 「귀주사전제고(貴州史專題考)·은주귀방변(殷周鬼方辨)」(이하 「귀방변(鬼方辨)」로 간칭)의 한 글 중에, 다시금 송, 원 이래의 제 학자들의 논설을 종합하여, 왕국유(王國維)씨의 고증이 족히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겼으며, 은주(殷周) 시기의 귀방(鬼方)에 대해 이르기를, "곧 지금의 호남성 서북변, 귀주 대부분(동남부 제외)과 연접한 사천 동남변 계림 북부와 이어진 곁으로 운남 동변 일 구역이다."
-필자가 보기엔 동이족의 귀방이 가히 대륙의 중앙무대에 우뚝 서 오히려 구석에 처박힌 주(周)가 옹색해 보일 지경으로까지 보이는데 실제로 서량지가 고고학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주(周) 왕실과 동이 귀방족은 사활을 건 엄청난 전쟁을 벌인 바 있다.
문제는 귀방족이 동이족 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며 동이 제 부족의 여러 갈래 중 한 갈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귀방과 강방 문제만 제대로 파헤쳐도 대륙상고사의 실루엣속에 드러나고 있는 동이족의 웅대한 발자취를 생동감있게 느낄 수 있다.
서량지와 임혜상은 바로 대륙사의 주인공이 동이족의 역사였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면,
http://homechina.co.kr/data/maptochina.gif
「귀방변(鬼方辨)」을 발표한 지 오래지 않아서, <귀주사회과학> 1980년 제 3호에서 발표한 「"귀방(鬼方)" 서남설의 오류를 증명함(鬼方西南說證誤)」(이하 「증오(證誤)」로 간칭)의 한 글에는,
송원(宋元) 이래의 제가(諸家)가 "귀방(鬼方)"이 지금의 서남(西南)에 있는 주요 증거를 고증한데 대해 침을 찔러, 뒤쫓아 고변(考辨)을 진행했다. 「귀방변(鬼方辨)」과 「증오(證誤)」2개의 문건은 기본적으로 한당(漢唐)에서 송원(宋元)에 이르기까지의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2 종류의 내용과 쌍방의 논쟁의 초점, 그리고 다음과 같은 3개의 주요 문제를 집중적으로 개괄하고 있다.
즉 그 하나는, 은(殷) 고종(高宗)이 "형(荊)"에 주둔한 귀방(鬼方) 군대를 정벌했다는 것은, 형주(荊州)가 아니며, 둘째는, 육락(陸絡) 씨의 옛 땅은 초국(楚國)으로 봉해진 지구가 아니며, 세 번째는, "만(蠻)" 자는 남방 소수민족의 전문적 칭호에 대한 선진(先秦)시기에 속하지 않는다.
책이라는 매체에 한정해, 현재 이 3개 문제를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장수(張澍)의 「양태당집(養泰堂集)」, 유심원(劉心沅)의 「귀방고(鬼方考)」와 임가징(任可澄) 의 「차동정집(且同亭集)·귀방고(鬼方考)」등 논저는 모두 <대대례(大戴禮)>의 "남벽의민왈만(南 義民曰蠻)-남쪽 궁벽한 곳의 의로운 백성을 왈 만",<예기 왕제(王制)>의 ""남방왈만(南方曰蠻)"이라 기재된 것을 근거해,
만(蠻)이 곧 남방 소수민족을 전적으로 칭하는 것으로 여겼으니, 그렇게 귀방(鬼方)은 곧 만(蠻)을 칭하는 것이 되었다. 이리하여 곧 남방종족이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절대로 서북의 융적(戎狄)이 아니다.
「귀방고(鬼方考)」는 제가(諸家)의 의견을 종합, 귀납 상술(上述)하여, "선진(先秦) 전적이 기재한바, .....동서남북 각 토착족을 전담해 일컫는 호칭, ,....'만(蠻)'은 동서남북을 혼용하지 않았으며, 아직 '동만(東蠻)', '서만(西蠻)', 북만(北蠻)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으니, 가히 '만(蠻)'은 남방종족을 전담한 칭호가 되며, 귀방만(鬼方蠻)은 바로 남방족을 가리킨다."
「증오(證誤)>로 생각컨대, 현존하는 선진(先秦) 고적(古籍)은 위에 인용한<대대례(大戴禮)>, <예기 왕제(王制)> 등에서와 같이, 비록 동서남북의 각 민족을 이(夷), 만(蠻), 융(戎), 적(狄)으로 분별 전칭(專稱)해 기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체불명하여 불확실한 것이 선진(先秦) 고적(古籍)의 본래 진면목이었다.
위에 거론한 <대대례(大戴禮)>, <예기 왕제(王制)>와 같이, 비록 선진고적(先秦古籍)에 이름이 의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은 한인(漢人)이 저술한 것으로, 내용을 서술한 각 절은 근거가 없지 아니하나, 다만 그 중에 지나 한인(漢人)들의 관념을 적지 않게 찬입(纂入)해 넣은 것이 확실하니, 소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의 설이 곧 이러한 종류의 가탁(假託), 다시 말해 거짓말을 마치 진짜인 것처럼 기록해 인용하는 가탁(假託) 찬입(纂入)에 속한다.
소위 사이(四夷)를 전담해 이르는 이러한 가짜 칭호의 기재는, 선진(先秦) 이래로 지나 한인(漢人)들이 전통적으로 써 먹어온 수법임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은 옛날로 들어갔으나 멀리 가지는 못했고, 또 <대대례(大戴禮)>, <예기 왕제(王制)>의 작자와 더불어 동시에 제대로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왜곡된 것을 좇아 따르지 않는 것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史記)」<흉노열전(匈奴列傳)>중,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흉노(匈奴)는 그 선조가 하후(夏后)씨의 묘예(苗裔:후예)가 흥(興)한 것으로, 순유(淳維)라 부른다. 당우(唐虞:唐堯와 虞舜) 이전에, 산융(山戎), 험윤( ), 훈죽( 粥)이 있어 북만(北蠻)에 거주했다"
여기에서 사마천은 흉노(匈奴)를 북만(北蠻)이라 명백히 칭하고 있는데, 소위 "만(蠻)"은 단지 남방종족에서만 능히 쓰여진 것임을 가히 볼 수 있으니, 이는 선진(先秦) 시기에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진한(秦漢) 시기에도 이미 일치 공인된 것이 없었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를 종합하면 가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귀방변(鬼方辨)」「증오(證誤)」의 두 글은, 귀주성이 근년 들어 이 역사적인 현안의 연구성과를 탐구 토론했을 뿐만 아니라, 한당(漢唐)으로부터 송원(宋元)에 이르기까지 상기의 두 종류의 서로 다른 관점을 주요 내용으로 기본상 개괄하고 있다.
그러나 귀방(鬼方)은 필경 서북 아니면 서남에 있으며, 오늘날의 귀주(貴州)를 포괄하고 있는가? 눈앞에 벌어진 논쟁의 정황을 보면, 비록 쌍방의 자료가 근거하고 있는 바가 가히 믿을만한 정도가 된다 해도, 이를 명확히 판가름하기는 어려우니, 아직 이에 대한 통일된 인식이 없고, 지금까지도 거듭 논쟁하여 미해결 된 듯 하니, 이 문화의 미스테리는 더 진일보된 깊은 연구를 기다려 보아야겠다!(李成丕)-
이러한 두 관점과 앞서 고고학적으로 설명한 다음의 설명, 즉 "이들의 복쪽 경계는 가히 영하(寧夏) 동남으로 발전해 들어갔으며, 수동구(水洞溝) 지역 등 세석기 문화의 주인이 되었으며, 동·서·남 3면이 (小臼) 양( ), 강(羌), 촉(蜀)과 서로 인근했으니 다시금 복사(卜辭)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이들은 무정(武丁)시대에 존재하고 있음을 가히 알 수 있는데, 섬서의 서북, 서남 일대를 타고 넘어갔으며, 특히 서남은 사천과 동화하여 괴(壞)에 접하고, 서북은 다시금 감숙 영하(寧夏) 일부분의 광대한 땅을 할거했다."는 대목을 합해 생각하면 우리는 귀방(鬼方)이 서남, 서북으로부터 남부대륙에 이르기까지 광역화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김을 부인할 수 없다.
참고자료: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환단고기 단군세기)
갑진 원년(BC 1337) 은나라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임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 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25세 단군 솔나(率那)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 B.C. 1112년에 영고탑(寧古塔)으로 천도하였고 이후로 후단군 시대라고 하였다. B.C. 1185년 단군 색불루가 녕성의 녹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즉위하여 일단 서우여를 제압했지만, 축출되었던 서우여가 3년만에 다시 일어나고 39년에는 변방장수 신독(申督)이 단군 도성인 녹산 아사달을 점령하였다.
색불루 단군은 영고 탑으로 파천하였고 다음 단군 아홀(阿忽)에 이르러서야 수복하였으니, 그동안 서우여의 기자문화(奇子文化) 세력은 요동 중심을 장악하였고, 그 이후 B.C. 1120년경 은나라 기자의 동래로 인하여 서우여 번한 조선과 은나라 기자의 압력을 받는 후 단군 조선은 내몽고 서부 영고 탑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비록 <단군세기>나 「규원사화」에는 기록이 없어도 단군 솔나 대에는 영고탑(寧古塔)으로 천도한 것으로 추정한다. 천도의 이유는 「규원사화」에서 보면 "달팽이도 집이 있는데 우리 백성들은 어찌하여 떠돌아다니는가?" 하고 한탄하면서 넓은 데에 옮겨 살게 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규원사화」에서 40세 달음 단군조에 부여사람들이 알유( 猶)땅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 그곳에서 맥족(貊族)이라 불리었고, 뒤에는 산서 지방의 엄려(嚴慮)로 옮겨서 단군 제후국중 가장 번성했던 남국(藍國)에 흡수되었다고 하였다.
남씨는 남국(藍國)이며 본래 난하(난河)에 살아서 오늘날의 난하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가장 중요한 기록은 <마한세가> 마지막 문장이다. 마지막 단군 고열가가 해모수에게 멸국당하는데, 진조선(眞朝鮮)이 진시황에게 복종하고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단군 시대 종말을 맞았다는 것이다.
B.C. 이 진시황에게 빼앗긴 진 조선(眞朝鮮)은 악이다사고원의 영고탑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무령왕(趙武靈王)에게 먼저 빼앗긴 임호(林胡) 땅, 양성현(凉城縣)이나 화림격이(和林格爾)보다도 서남쪽인 악이다사 고원이 최후로 진시황에게 빼앗긴 진조선 도읍 땅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곳이 본래 귀방(鬼方)이었다. 「단기고사」는 어느 책보다 후 단군 조선이 자세하다. 이는 「단기고사」가 대야발에 의해 돌궐국에서 얻은 고기를 토대로 해서 편찬되어서 단군 서쪽 시대에 대해 어느 책보다 자세한 것으로 고려된다.
B.C. 색불루가 녹산에서 즉위하기 전에 먼저 반란하고 즉위한 곳이 부여신궁 (夫餘新宮)이었다. 이곳이 그의 부여 군대가 은나라 서북방에 살던 귀방을 멸망시키고 부여인으로 나라를 세웠던 곳이며, 은기(殷紀) 중의 녹방(鹿方)이다. 춘추시대에는 악방(鄂方)이라고 했다.
섬서성(陝西城)의 녹주(鹿州)는 지금 부현(富縣)이 되었는데 B.C. 7세기에 백적(白翟)인들이 살던 곳이다. 백적은 흰옷을 입어서 생긴 별명이며 섬서성(陜西城) 연안(延安)에 있다가 하북성 중산국으로 동천하였다.
녹주는 바로 연안(延安)의 남쪽 마을 이었다. 이 적인들이 B.C. 637년에 주나라와 통혼까지 하였고 주나라를 위해 정나라와 싸웠고 춘추말, B.C. 476년 이전에는 하북성에 중산국을 세웠다. 통혼의 결과는 단군 마물의 배필이 된 주나라 공주와 주나라 황비가 된 적후(翟后)였다. 그런데 적녀(翟女)는 귀씨(鬼氏) 였다고도 전하니, 색불루 부여군에게 복종하게 된 귀방인(鬼方人)들이다.
따라서 부여신궁은 귀방의 북쪽 본래의 악방(鄂方)에 있었을 것으로 고려되는데 오늘날의 악이다사(鄂爾多斯) 고원이다. 부여인들의 도래로 인하여, 녹방(鹿方) 이라고 바뀌었다가 다시 춘추시대에 악방이 된 것이다. 부여신궁은 단군 강역중 서부 지역이고 이는 고등(高登) 때에 얻어진 것이며, 색불루가 지켜야 했던 곳이다. 그리하여 색불루의 중신들이 단군을 타도하고 녹산에 들어간 색불루에게 다시 영고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여인들의 수도 이름이 영고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이다사 고원의 부여신궁도 첫번째 영고탑이고, 뒤에 지도자를 잃은 이들이 내몽고 사막을 헤매다니니, 솔나 단군이 그들 에게 동북방으로 옮겨서 다시 살 곳을 마련해주고 천도한 곳이 두번째 영고탑 이다.
훨씬 뒤에 해모수 북부여의 수도 육가자(六家子)를 점령하고 들어간 졸본부여의 2세 단군이 졸본천에서 즉위해놓고 즉위 다음해에 순행했던 영고탑은 바로 북부여인의 수도 육가자인 것이며, 3번째 영고탑인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시경」, 「맹자」의 본의(本意)가 겨우 중복을 피해 문장을 지었으니 그 영향이 후세에 미쳐, 귀방일족(鬼方一族)을 한 손에 쥐고 쫓아내, 힘써 강제로 2 개의 국가로 나뉘고 말았다.
「맹자」가 설명한 바의 "훈죽( )"은 곧 「사기」 <오제본기>의 "훈죽( 粥)"이며, 「주본기(周本紀)」의 "훈육(薰育)"이니, 곧 글자는 다르지만 음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출거편(出車篇)>에서 노래한 바의 험윤( )은 도리어 마땅히 "훈( )", "훈(薰)", "훈( )" 음을 길게 늘인 것이니,
또한 곧 혜갑반(兮甲盤)의 "엄윤(嚴麥允)", 불*돈(不*敦:其+丸밑에女)의 "훈윤( 允)은 곧 음이 와전되어 글자 역시 한결같이 그릇된 것이니, 또한 이로 인해 갑골복사가 명시한 바의 귀(鬼) 자의 원시 의의(意義)인 귀방(鬼方)의 부족연원은 곧 다시금 깊숙이 인몰(湮沒)되어 밝게 드러나지 않아 시초부터 박멸되어 짓밟힌 채 길을 잃고 흩어져 버렸으므로 아무도 가히 연구해 따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기실, 고대 농업의 굴흥( 興:우뚝 솟아 부흥)은 견롱( :견은 강이름 견, 고개이름 롱으로 견은 섬서성에서 발원하여 위수(渭水)로 흘러드는 강, 현재 은 섬서성의 딴 이름이지만 본래는 감숙성 청수(淸水)현 북쪽을 이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주족(周族)의 농업 역시 유기(幽岐)에서 처음 일어난 것으로 가히 모두 설명할 수 있으며 이에, 귀방(鬼方)족의 경영은 전보다 더 참담하고 싱거웠으나 이들의 농업경영은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후일 주(周)나라 사람들이 단순히 귀방만(鬼方蠻)으로 야만시해 정치 선전한 후대보다 크고 광대한 것이었다.
이들의 가장 이른 활동 발자취에 대한 기록만 보아도 '귀방역(鬼方易) 운운', '귀방화역불치위화(鬼方和易不致爲禍)', '고종벌귀방(高宗伐鬼方) 「易 旣濟」', '진용벌귀방(震用伐鬼方) 「易未濟」'주 왕계벌서락귀융(周 王季伐西落鬼戎) 「후한서 서강(西羌)전」<죽서기년 인용 注>'
섬서성 미현( 縣) 예촌(禮村)이란 곳에서 소우정(小盂鼎:작은 주발솥)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비록 주(周)나라가 귀방을 정벌한 전쟁결과가 기록되어 있지만 귀방의 옛 치세 역시 강성하여 솥의 손상된 문장 나머지 글귀는 전쟁의 방대한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우(盂)」는 곧 귀방 사람을 정벌하라는 주왕의 명을 받든 것으로, 왕국유(王國維)의 「귀방곤이험윤고(鬼方昆夷 考)」에 풀어 설명한 것에 의하면, 혹(或) 자 입 구(口)의 한 一 밑에 한 一을 하나 더 긋고 3점(연화발)을 찍은 글자는 곧 首或 자로, 곧 고대 전쟁에서 포로를 잡아 귀를 자른 형벌이니 부(孚)는 곧 부( )의 본 글자이며,
3천을 뜻해 한 일을 4개 겹쳐 긋고 위에서 아래로 그은 글자(干에 二를 더 그은 글자)라든가, 수(獸:우측 개 견 삭제)는 수(首)로 「집수(執獸:개견 삭제)」라는 기록은 곧 「역(易)」 「유가절수(有嘉折首)」의 목을 벴다는 절수(折首)를 말한다.
이를 근거로 이 전역(戰役)을 풀어 해석하면, 귀방(鬼方)은 거듭해 소, 양, 차량을 심히 많이 손실 당했으며, 포로가 된 전투원이 무려 13,081 명에 달하고, 그 중 피살자가 1인, 귀를 잘린 사람이 약간 명이니, 과연 가히 대규모의 전쟁이라 이를 만 했다. 고대 중국의 유명한 전쟁인 춘추시대 진초(晉楚) 성복(城 )의 전쟁은 규모 면에서 이보다 한 수 아래다.
그때의 진(晉)국의 병력은 두예(杜預)가 어림잡아 계산한 것에 의하면, 불과 5만 2천 5백인에 불과하고, 초(楚)의 포로를 사로잡은 것이 불과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인 사(駟)가 백 승(乘), 보병 일 천명에 불과했으니 포로와 병력대비로 비교하면 이는 주(周)와 귀방(鬼方)과의 전쟁규모의 20분의 1도 못 미치는 것이다.
이로 추정하면 귀방(鬼方)의 포로가 된 병사는 물경 1만 3천여 명에 이르며 그 동원병력은 반드시 20만 이상에 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로 헤아려 보면 주방(周方)의 군대 역시 이와 비슷한 20만 군대 이상을 동원할 수 있는 수준에 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 그보다 강했던 옛날 귀방(鬼方)의 부강함과 웅후함은 가히 상상이 가는 바이다.
이 신농족의 세석기 문화는 역사이전과 역사이후에 있어 한결같이 중국의 혜성이 되었다. 그럼 이번에는 대륙의 사가들이 보는 귀방(鬼方)의 미스테리에 대한 종합적인 측면을 알아보기로 한다. 이는 필자가 대륙의 향토사료에서 발췌해 번역 소개한다.
-「역경(易經)」, 「시경(詩經)」, 「상서(尙書)」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 갑골문자에 이르기까지의 선진(先秦) 문헌은 모두 귀방(鬼方)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귀방(鬼方)이 상(商)에 있었고, 주(周) 나라시기에 존재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확정적이다.
귀방(鬼方)은 궁극적으로 어느 지방에 있었는가?
오늘날의 귀주(貴州)를 포괄하고 있는가? 오랜 세월이 지난 이래 이를 보는 시각이 한결같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한(漢), 당(唐) 기간의 학자들인, 공안국(孔安國), 양웅(揚雄), 반고(班固), 응소(應 ), 서소(書昭), 우번(虞 ), 범엽(范曄), 송충(宋衷), 간보(干寶), 공영달(孔潁達), 안사고(顔師古) 등은 모두 그들의 유관 경사(經史) 주석이나 혹 저술 가운데서 귀방(鬼方)을 먼 지방 북방국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혹자는 직접 귀방(鬼方)이 바로 서강(西羌)이라고 말한다.
송(宋), 원(元) 이후에 미치면, 비로소 왕질(王質), 주희(朱熹), 범회( ), 유월(兪 ), 혜동(惠棟), 모기령(毛奇齡), 이방담(李方湛), 장수(張澍), 유심원(劉心沅)등의 학자들이 나와서 「죽서(竹書)」등을 근거하여 별도로 새로운 학설을 창설하게 되는데, 귀방(鬼方)을 지금의 서남일대라고 밝히게 된다.
이때, 일시에 각 가(家)가 동시에 일어나게 되니 필경 각기 그 학설이 되었으므로, 마치 구 학설을 압도하는 형세 같이 보였으나, 사실에 대해 부족한 부분으로 인해 공인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북서설(北西說)은 거듭해 몇 몇 학자만 굳게 믿고 있는데, 이는 마치 왕국유(王國維)가 지은 「귀방곤이험윤고(鬼方昆夷 考)」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은(殷)대의 귀방(鬼方)은 곧 후대의 곤이(昆夷:형 곤, 맏이 곤), 험윤( ), 융(戎), 적(狄), 흉노(匈奴)이며, 그 땅은 대륙의 서북에 있어 북방의 광대한 영역까지 바라보고 있다고 인정한다.
이 주장의 결론은 기본적으로 실제와 부합하여, 근대 대다수의 학자들이 공인을 얻어냈으니 이들의 예는 다음과 같다. 곽말약(郭末若), 전백찬(전伯贊), 여진우(呂振羽), 담기양(潭其 ), 상월(尙鉞) 등은 그들의 저작 혹은 도책(圖冊) 가운데서 모두 기본적으로 왕(王)씨의 고증을 근거로 했다.
곽말약(郭末若)이 지은 「중국사고(中國史稿)」는, 다시금 귀방(鬼方)의 구체적 지역이 "지금의 섬북(陝北:섬은 섬서성이고 섬주는 하남성 서부) 내몽(內蒙) 및 그 이북의 멀고 먼(遼闊) 지구"가 된다고 말한다.(수정본 1책 제 164항)
왕(王)씨의 고증으로 말미암아, 정면으로 논리를 세운 후, 송 원이래 제가(諸家)가 위에 서술한 학설의 착오를 지적한 이가 없었으니 서남설(西南說)은 거듭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임가징(任可澄)이 민국(民國) 시기에 「귀주통지(貴州通志)」를 주관해 편수하던 기간에, 그의 「차동정집(且同亭集)·귀방고(鬼方考)」(이하 「귀방고(鬼方考)」로 간칭)의 한 글 중에, 거듭 귀방(鬼方)이 지금의 서남에 펼쳐졌다고 주장하고, 아울러 이러한 관점은 「귀주통지(貴州通志)」의 관련부분에 편입되었다.
1980년 귀주인민출판사의 「귀주사전제고(貴州史專題考)·은주귀방변(殷周鬼方辨)」(이하 「귀방변(鬼方辨)」로 간칭)의 한 글 중에, 다시금 송, 원 이래의 제 학자들의 논설을 종합하여, 왕국유(王國維)씨의 고증이 족히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겼으며, 은주(殷周) 시기의 귀방(鬼方)에 대해 이르기를, "곧 지금의 호남성 서북변, 귀주 대부분(동남부 제외)과 연접한 사천 동남변 계림 북부와 이어진 곁으로 운남 동변 일 구역이다."
-필자가 보기엔 동이족의 귀방이 가히 대륙의 중앙무대에 우뚝 서 오히려 구석에 처박힌 주(周)가 옹색해 보일 지경으로까지 보이는데 실제로 서량지가 고고학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주(周) 왕실과 동이 귀방족은 사활을 건 엄청난 전쟁을 벌인 바 있다.
문제는 귀방족이 동이족 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며 동이 제 부족의 여러 갈래 중 한 갈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귀방과 강방 문제만 제대로 파헤쳐도 대륙상고사의 실루엣속에 드러나고 있는 동이족의 웅대한 발자취를 생동감있게 느낄 수 있다.
서량지와 임혜상은 바로 대륙사의 주인공이 동이족의 역사였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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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방변(鬼方辨)」을 발표한 지 오래지 않아서, <귀주사회과학> 1980년 제 3호에서 발표한 「"귀방(鬼方)" 서남설의 오류를 증명함(鬼方西南說證誤)」(이하 「증오(證誤)」로 간칭)의 한 글에는,
송원(宋元) 이래의 제가(諸家)가 "귀방(鬼方)"이 지금의 서남(西南)에 있는 주요 증거를 고증한데 대해 침을 찔러, 뒤쫓아 고변(考辨)을 진행했다. 「귀방변(鬼方辨)」과 「증오(證誤)」2개의 문건은 기본적으로 한당(漢唐)에서 송원(宋元)에 이르기까지의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2 종류의 내용과 쌍방의 논쟁의 초점, 그리고 다음과 같은 3개의 주요 문제를 집중적으로 개괄하고 있다.
즉 그 하나는, 은(殷) 고종(高宗)이 "형(荊)"에 주둔한 귀방(鬼方) 군대를 정벌했다는 것은, 형주(荊州)가 아니며, 둘째는, 육락(陸絡) 씨의 옛 땅은 초국(楚國)으로 봉해진 지구가 아니며, 세 번째는, "만(蠻)" 자는 남방 소수민족의 전문적 칭호에 대한 선진(先秦)시기에 속하지 않는다.
책이라는 매체에 한정해, 현재 이 3개 문제를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장수(張澍)의 「양태당집(養泰堂集)」, 유심원(劉心沅)의 「귀방고(鬼方考)」와 임가징(任可澄) 의 「차동정집(且同亭集)·귀방고(鬼方考)」등 논저는 모두 <대대례(大戴禮)>의 "남벽의민왈만(南 義民曰蠻)-남쪽 궁벽한 곳의 의로운 백성을 왈 만",<예기 왕제(王制)>의 ""남방왈만(南方曰蠻)"이라 기재된 것을 근거해,
만(蠻)이 곧 남방 소수민족을 전적으로 칭하는 것으로 여겼으니, 그렇게 귀방(鬼方)은 곧 만(蠻)을 칭하는 것이 되었다. 이리하여 곧 남방종족이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절대로 서북의 융적(戎狄)이 아니다.
「귀방고(鬼方考)」는 제가(諸家)의 의견을 종합, 귀납 상술(上述)하여, "선진(先秦) 전적이 기재한바, .....동서남북 각 토착족을 전담해 일컫는 호칭, ,....'만(蠻)'은 동서남북을 혼용하지 않았으며, 아직 '동만(東蠻)', '서만(西蠻)', 북만(北蠻)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으니, 가히 '만(蠻)'은 남방종족을 전담한 칭호가 되며, 귀방만(鬼方蠻)은 바로 남방족을 가리킨다."
「증오(證誤)>로 생각컨대, 현존하는 선진(先秦) 고적(古籍)은 위에 인용한<대대례(大戴禮)>, <예기 왕제(王制)> 등에서와 같이, 비록 동서남북의 각 민족을 이(夷), 만(蠻), 융(戎), 적(狄)으로 분별 전칭(專稱)해 기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체불명하여 불확실한 것이 선진(先秦) 고적(古籍)의 본래 진면목이었다.
위에 거론한 <대대례(大戴禮)>, <예기 왕제(王制)>와 같이, 비록 선진고적(先秦古籍)에 이름이 의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은 한인(漢人)이 저술한 것으로, 내용을 서술한 각 절은 근거가 없지 아니하나, 다만 그 중에 지나 한인(漢人)들의 관념을 적지 않게 찬입(纂入)해 넣은 것이 확실하니, 소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의 설이 곧 이러한 종류의 가탁(假託), 다시 말해 거짓말을 마치 진짜인 것처럼 기록해 인용하는 가탁(假託) 찬입(纂入)에 속한다.
소위 사이(四夷)를 전담해 이르는 이러한 가짜 칭호의 기재는, 선진(先秦) 이래로 지나 한인(漢人)들이 전통적으로 써 먹어온 수법임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은 옛날로 들어갔으나 멀리 가지는 못했고, 또 <대대례(大戴禮)>, <예기 왕제(王制)>의 작자와 더불어 동시에 제대로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왜곡된 것을 좇아 따르지 않는 것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史記)」<흉노열전(匈奴列傳)>중,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흉노(匈奴)는 그 선조가 하후(夏后)씨의 묘예(苗裔:후예)가 흥(興)한 것으로, 순유(淳維)라 부른다. 당우(唐虞:唐堯와 虞舜) 이전에, 산융(山戎), 험윤( ), 훈죽( 粥)이 있어 북만(北蠻)에 거주했다"
여기에서 사마천은 흉노(匈奴)를 북만(北蠻)이라 명백히 칭하고 있는데, 소위 "만(蠻)"은 단지 남방종족에서만 능히 쓰여진 것임을 가히 볼 수 있으니, 이는 선진(先秦) 시기에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진한(秦漢) 시기에도 이미 일치 공인된 것이 없었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를 종합하면 가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귀방변(鬼方辨)」「증오(證誤)」의 두 글은, 귀주성이 근년 들어 이 역사적인 현안의 연구성과를 탐구 토론했을 뿐만 아니라, 한당(漢唐)으로부터 송원(宋元)에 이르기까지 상기의 두 종류의 서로 다른 관점을 주요 내용으로 기본상 개괄하고 있다.
그러나 귀방(鬼方)은 필경 서북 아니면 서남에 있으며, 오늘날의 귀주(貴州)를 포괄하고 있는가? 눈앞에 벌어진 논쟁의 정황을 보면, 비록 쌍방의 자료가 근거하고 있는 바가 가히 믿을만한 정도가 된다 해도, 이를 명확히 판가름하기는 어려우니, 아직 이에 대한 통일된 인식이 없고, 지금까지도 거듭 논쟁하여 미해결 된 듯 하니, 이 문화의 미스테리는 더 진일보된 깊은 연구를 기다려 보아야겠다!(李成丕)-
이러한 두 관점과 앞서 고고학적으로 설명한 다음의 설명, 즉 "이들의 복쪽 경계는 가히 영하(寧夏) 동남으로 발전해 들어갔으며, 수동구(水洞溝) 지역 등 세석기 문화의 주인이 되었으며, 동·서·남 3면이 (小臼) 양( ), 강(羌), 촉(蜀)과 서로 인근했으니 다시금 복사(卜辭)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이들은 무정(武丁)시대에 존재하고 있음을 가히 알 수 있는데, 섬서의 서북, 서남 일대를 타고 넘어갔으며, 특히 서남은 사천과 동화하여 괴(壞)에 접하고, 서북은 다시금 감숙 영하(寧夏) 일부분의 광대한 땅을 할거했다."는 대목을 합해 생각하면 우리는 귀방(鬼方)이 서남, 서북으로부터 남부대륙에 이르기까지 광역화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김을 부인할 수 없다.
참고자료: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환단고기 단군세기)
갑진 원년(BC 1337) 은나라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임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 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25세 단군 솔나(率那)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 B.C. 1112년에 영고탑(寧古塔)으로 천도하였고 이후로 후단군 시대라고 하였다. B.C. 1185년 단군 색불루가 녕성의 녹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즉위하여 일단 서우여를 제압했지만, 축출되었던 서우여가 3년만에 다시 일어나고 39년에는 변방장수 신독(申督)이 단군 도성인 녹산 아사달을 점령하였다.
색불루 단군은 영고 탑으로 파천하였고 다음 단군 아홀(阿忽)에 이르러서야 수복하였으니, 그동안 서우여의 기자문화(奇子文化) 세력은 요동 중심을 장악하였고, 그 이후 B.C. 1120년경 은나라 기자의 동래로 인하여 서우여 번한 조선과 은나라 기자의 압력을 받는 후 단군 조선은 내몽고 서부 영고 탑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비록 <단군세기>나 「규원사화」에는 기록이 없어도 단군 솔나 대에는 영고탑(寧古塔)으로 천도한 것으로 추정한다. 천도의 이유는 「규원사화」에서 보면 "달팽이도 집이 있는데 우리 백성들은 어찌하여 떠돌아다니는가?" 하고 한탄하면서 넓은 데에 옮겨 살게 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규원사화」에서 40세 달음 단군조에 부여사람들이 알유( 猶)땅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 그곳에서 맥족(貊族)이라 불리었고, 뒤에는 산서 지방의 엄려(嚴慮)로 옮겨서 단군 제후국중 가장 번성했던 남국(藍國)에 흡수되었다고 하였다.
남씨는 남국(藍國)이며 본래 난하(난河)에 살아서 오늘날의 난하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가장 중요한 기록은 <마한세가> 마지막 문장이다. 마지막 단군 고열가가 해모수에게 멸국당하는데, 진조선(眞朝鮮)이 진시황에게 복종하고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단군 시대 종말을 맞았다는 것이다.
B.C. 이 진시황에게 빼앗긴 진 조선(眞朝鮮)은 악이다사고원의 영고탑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무령왕(趙武靈王)에게 먼저 빼앗긴 임호(林胡) 땅, 양성현(凉城縣)이나 화림격이(和林格爾)보다도 서남쪽인 악이다사 고원이 최후로 진시황에게 빼앗긴 진조선 도읍 땅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곳이 본래 귀방(鬼方)이었다. 「단기고사」는 어느 책보다 후 단군 조선이 자세하다. 이는 「단기고사」가 대야발에 의해 돌궐국에서 얻은 고기를 토대로 해서 편찬되어서 단군 서쪽 시대에 대해 어느 책보다 자세한 것으로 고려된다.
B.C. 색불루가 녹산에서 즉위하기 전에 먼저 반란하고 즉위한 곳이 부여신궁 (夫餘新宮)이었다. 이곳이 그의 부여 군대가 은나라 서북방에 살던 귀방을 멸망시키고 부여인으로 나라를 세웠던 곳이며, 은기(殷紀) 중의 녹방(鹿方)이다. 춘추시대에는 악방(鄂方)이라고 했다.
섬서성(陝西城)의 녹주(鹿州)는 지금 부현(富縣)이 되었는데 B.C. 7세기에 백적(白翟)인들이 살던 곳이다. 백적은 흰옷을 입어서 생긴 별명이며 섬서성(陜西城) 연안(延安)에 있다가 하북성 중산국으로 동천하였다.
녹주는 바로 연안(延安)의 남쪽 마을 이었다. 이 적인들이 B.C. 637년에 주나라와 통혼까지 하였고 주나라를 위해 정나라와 싸웠고 춘추말, B.C. 476년 이전에는 하북성에 중산국을 세웠다. 통혼의 결과는 단군 마물의 배필이 된 주나라 공주와 주나라 황비가 된 적후(翟后)였다. 그런데 적녀(翟女)는 귀씨(鬼氏) 였다고도 전하니, 색불루 부여군에게 복종하게 된 귀방인(鬼方人)들이다.
따라서 부여신궁은 귀방의 북쪽 본래의 악방(鄂方)에 있었을 것으로 고려되는데 오늘날의 악이다사(鄂爾多斯) 고원이다. 부여인들의 도래로 인하여, 녹방(鹿方) 이라고 바뀌었다가 다시 춘추시대에 악방이 된 것이다. 부여신궁은 단군 강역중 서부 지역이고 이는 고등(高登) 때에 얻어진 것이며, 색불루가 지켜야 했던 곳이다. 그리하여 색불루의 중신들이 단군을 타도하고 녹산에 들어간 색불루에게 다시 영고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여인들의 수도 이름이 영고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이다사 고원의 부여신궁도 첫번째 영고탑이고, 뒤에 지도자를 잃은 이들이 내몽고 사막을 헤매다니니, 솔나 단군이 그들 에게 동북방으로 옮겨서 다시 살 곳을 마련해주고 천도한 곳이 두번째 영고탑 이다.
훨씬 뒤에 해모수 북부여의 수도 육가자(六家子)를 점령하고 들어간 졸본부여의 2세 단군이 졸본천에서 즉위해놓고 즉위 다음해에 순행했던 영고탑은 바로 북부여인의 수도 육가자인 것이며, 3번째 영고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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