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뿌리아름]인용자료

서나벌 왕족의 뿌리 : 2. 오환족이 내려온 까닭 - ▩조약돌님

작성자麗輝|작성시간05.08.26|조회수246 목록 댓글 0
서나벌 왕족이 오환족이라면, 그들이 왜 고향을 떠났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요,『삼국지』「오환전」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기록을 읽어봅시다.

“그들의 선조가 흉노에게 격파당한 뒤, 많은 (오환족) 사람들이 다른 세력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했고 그 스스로도 힘이 없어서 흉노의 신하가 돼 복종했다. (오환은 흉노에게) 세세토록 소와 말과 양을 보내야 했으며, 만약 (보내는) 시한을 넘겼는데도 흉노가 요구하는 만큼의 마릿수를 채우지 못하면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흉노의) 종으로 보내야 했다.

오환은 흉노의 일연제(壹衍鞮) 선우가 다스리던 때에 이르러 사나워졌고, (흉노족한테) 장차 모돈(冒頓)이 누운 곳이 박살난 사실을 퍼뜨려 치욕을 안겨주려고 흉노 선우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일연제 선우가 (그 사실을 알고) 몹시 화를 내며 기병 2만명을 내 오환을 쳤다.

대장군 곽광(藿光)은 (소식을) 듣자 도요장군(渡遼將軍) 범명우(范明友)를 보내 그가 기병 3만명을 데리고 요동(군)을 나가 흉노를 치게 했으나, 흉노는 명우를 따르는 군사가 (싸움터에)이르렀을 때 이미 (군사를) 이끌고 떠난지 오래였다.

오환은 그들이 무너진 틈을 타 진격해 마침내 6천여 명의 목을 베고, 세 왕(王)의 머리를 얻어서 돌아간 흉노병(兵)을 피해 또다시 달아나야 했으며, 나중에 몇몇이 다시 변방을 노략질하자 명우가 (오환족 패잔병을) 여러 번 쳐부수었다.”

―『삼국지』「오환전」

(:오환족이 ‘왕(王)’이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을 여러 명 두었다는 기록도 신라의 갈문왕 제도와 거란족의 국구장제가 오환족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려줍니다. 서라벌과 거란은 비슷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비슷한 제도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한(漢)나라의 장군 곽광이 살아 있을 때인 서기전 78년(곽광은 서기전 87년에 대장군이 되었고 서기전 68년에 죽었으므로,「오환전」의 기사는 서기전 87년에서 68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짚어볼 수 있음. 혁거세왕이 태어난 해가 서기전 69년이므로 그 시기를 서기전 87년에서 서기전 69년 사이라고 생각했다),

동호족의 후손인 오환족은 동호를 무너뜨린 흉노에게 복수하려고 싸움을 걸었다가 오히려 지고 쫓겨났는데, 이후 그들은 한나라의 국경지대로 쳐들어왔다가 한군(漢軍)에게 가로막혀 갈 곳이 없어집니다.

----------------------------------------------------------------------------------------------------------------------------

▶보충설명 :

동한(:후한) 사람인 반고(班固)가 지은『한서(漢書)』에는 “원봉(元鳳) 3년(B.C. 78) 1월 태산(泰山) 지역의 내무산(萊蕪山) 남쪽 흉흉(匈匈)에 수천명의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가보니, 큰돌이 스스로 섰는데, 높이가 1장(丈) 5자(尺)이고 크기가 48위(圍)이며, 땅속 깊이 8자(尺)에 돌 세개가 다리를 하여 세워져 있다. 돌이 세워진 곳에는 흰 까마귀(白烏)들이 수천마리 몰려있었다(孝昭元鳳三年正月 泰山萊蕪山南匈匈 有數千人聲 民視之 有大石自立 高丈五尺 大四十八圍 入地深八尺 三石爲足 石立處 有白烏數千集其旁 [:漢書 卷27 五行志]).”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자신들과는 겉모습과 언어(言語)가 전혀 다른 부족이 이상하고 신비스러운 석조물을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邊 光 賢,「고인돌에 대한 기록(記錄)」,『고인돌과 거석문화 - 동아시아 - 』, 도서출판 미리내, 서기 2000년, 302 ~ 303쪽)”되며  

“여기서 말하는 ‘흰가마귀(白烏)’는 겉이 하얀 가마귀가 있을 수 없듯이, 단순하게 가마귀(烏)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흰옷을 입고있는 가마귀와 관련된 부족(部族)을 약간 비유(比喩)하여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흰가마귀(白烏)는 곧 연(燕) 나라의 북쪽에 근거(根據)하고 있었다는 오환족(烏桓族, 東胡)의 유민(遺民)을 비하(卑下)하거나 비유(比喩)하여 말한 것으로, 오환족(烏桓, 烏丸)은 동호족(東胡族)과 흉노족(匈奴族)의 한 갈래이며, 사새(四塞) 안에서 볼 때 야만족이므로 멸시(蔑視)하는 의미에서 이같이 쓰지 않았나 생각된다(변광현, 같은 책).”

“또한 여기서 말하는 흉흉(匈匈)이라는 지명(地名)은 태산(泰山)의 동쪽에 있는 내무산(萊蕪山) 남쪽 기슭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산동반도(山東半島) 제남(濟南)의 동남쪽에 위치한다(변광현, 같은 책).”

당시 전한의 영토였던 산동반도 제남의 동남쪽에 난데없이 오환족이 수천 명이나 나타나 거석 구조물을 세운 사실로 미루어볼 때, 오환족은 서기전 78년 이전이나 또는 그 해에 흉노족에게 쫓겨서 한나라로 침투한 듯하며 서기전 78년은 곽광이 대장군으로 일하던 때이므로『삼국지』「오환전」의 사건이 일어난 해가 서기전 78년임을 알 수 있다.

---------------------------------------------------------------------------------------------------------------------------

오환족은 신(新)나라 왕망과 사이가 나빠져 중국에 자주 쳐들어갔고(『삼국지』「오환전」), 후한 초기에는 고구려 ․ 예 ․ 맥 ․ 선비(鮮卑)족과 함께 후한(後漢)에 쳐들어가기도 했으므로(『후한서』「고구려전」과『삼국사기』「고구려본기」) 그들은 흉노족이 자신들을 짓밟은 다음에도 살아 남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한데, 유목민족의 특성상 싸움에 지면 순순히 무릎꿇기보다 다른 곳을 찾아 달아나는 경우가 많으니만큼(예컨대 흉노족이 한과의 싸움에서 지자 서쪽으로 달아나 훈족이 된 사실이나, 여진족에 깨진 거란족이 중앙아시아로 달아나 ‘카라 키타이[:서요西遼]’왕국을 세운 사실이 좋은 예임)

이 무렵 많은 오환족이 본거지인 흥안령(興安嶺. 몽골초원과 만주를 나누는 산맥임)에서 요하(遼河) 상류인 노합하(老哈河. 라오허) 유역까지 펼쳐진 초원지대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고 짚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난민들은 전쟁이 터진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법이므로, 몽골초원(:흉노의 땅)이나 화북평원(:전한[前漢] 땅)이 아닌 몽골초원의 동남쪽으로 갔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이곳에는 요령성과 흑룡강성, 길림성이 있으며 한/조선 반도도 있으므로 이들의 이동과 서나벌의 건국이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박씨족이 오환족일 수도 있다는 가설은 김성호 박사님이 서기 1982년『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들고 나오신 학설이며, 제 창작물이 아님을 밝힙니다. 비록 박사님이 최근에는 그 가설을 철회하고 박씨족을 스키타이족과 연결지어 생각하시지만, 저는 그분과는 달리 박씨족이 오환족일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서나벌이 세워지기 전, 오환족의 왕족이었을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조선의 유민(『삼국사기』「신라본기」)”인 6촌 사람들과 만난 시기는 오환족이 학살당한 지 10년 뒤인 서기전 69년(「신라본기」에는 혁거세가 서기전 57년, 열세 살 때 즉위했다고 적혀있는데 그렇다면 혁거세의 탄생 시기 - 서나벌 왕족이 내려온 시기 - 는 57 + 12 = 69 여서 서기전 69년이라는 계산이 나옴)입니다.

그리고 6촌 사람들은 몽골초원의 동남쪽인 경기도에 살고 있었죠(천관우/김성호/일도안사설). 그로부터 13년 뒤인 서기전 57년에 서나벌이 세워지며, 이들은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데로 북아시아 유목민의 신화인 천손 신화와, 남아시아 농경민의 신화인 난생 신화가 접목된(김병모 박사의 학설) 혁거세 탄생 설화를 지닌 채 역사에 나타납니다.

이들은 당연히 흉노에 대한 반감과 한(漢)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며, 그 사실은 경주 금척리 고분군에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도 드러나고 있죠 :

=========================================================================================================================

신라가 건국되고 박혁거세 거서간이 열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첫 임금이 되었는데,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려고 언제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느 날 어린 임금이 대궐 뜰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웬 사람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한 뒤 사라졌다.

"저는 천제(天帝)의 사자입니다. 천제께서 지금 '지상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이루어졌는데 새 나라를 축복하기 위해 이 금척(金尺. 황금 자)을 선물로 갖다 드려라.'고 하셔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 금자는 앓는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다시 살아나는 보물입니다.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은 하늘에 절하고 금자를 받아들어 신하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창고에 소중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박혁거세 거서간과 알영 왕비는 백성을 어질게 다스렸으므로 나라 안이 화목하고 농사도 잘 되어 태평세월이 계속되었다. 임금도 백성들도 '이것은 하늘이 축복해준 금자의 덕'인 줄로 알고 금자를 소중히 여겼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한(漢)나라 왕이 신라에 금자라는 보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금자를 잠깐 보고 줄 테니 빌려 달라."고 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린 임금은 신하들을 불러 "금자를 빌려 주는 것이 좋겠소, 안 빌려 주는 편이 좋겠소?"라고 물었다.

한 신하가 나와서 아뢰었다.

"한(漢) 나라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 교만한 나라입니다. 금자를 빌려주면 우리 신라를 업신여겨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신하가 아뢰었다.

"한(漢) 나라는 자기네 나라가 부강한 것을 믿고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만일에 그러한 보물을 한나라가 가진다면 이웃 작은 나라들을 더욱 괴롭힐 것입니다. 금자를 보내서는 아니되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중한 보물이라 하더라도 잠깐만 보고 주겠다는데 그것도 못한다면 어찌 이웃간의 의리가 서겠소, 못 주겠다는 구실이 뚜렷해야 하지 않겠소?"

"그 금자를 땅 속에 묻어버리는 편이 좋을 듯 하옵니다. 사람의 목숨이란 한도가 있는데 죽어야 할 사람을 그러한 보물로써 자꾸만 살려 놓는다면 마지막에는 나라 안에 사람이 차고 넘쳐 새로 세상에 태어날 자손들이 크게 위협받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보물을 가져 공연히 힘센 나라의 욕심을 자극해 침략받을 염려도 없지 않으니 땅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왕은 그 의견을 옳게 여겨 금자를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신하들은 다시 임금에게 아뢰었다.

"한(漢)나라는 넓고 큰 나라입니다. 만일 금자를 땅에 묻었다는 기미를 알게 되면 곧 파내어 가지고 갈 것입니다. 금자무덤 주위에 더 많은 무덤을 만들어서 어느 무덤속에 금자가 들어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그 뒤 한나라 사신이 와서 금자를 빌려 달라고 했다. 왕은

"이웃나라께서 금자를 잠깐 빌려 달라하시니 어찌 못한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금자가 너무 귀중한 보물이라서 땅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래도 도적들이 훔쳐갈까 두려워서 그 주위에 더 많은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자를 묻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금자가 어느 무덤에 들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렵게 먼 길을 오셨는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금자를 보여주지 못하는 까닭을 설명했다.

한(漢)나라 사신은 "있는 무덤을 모두 파보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며 "금자를 묻은 무덤으로 안내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한의 사신은 금자를 묻은 무덤 주위에 너무 많은 무덤이 있어서 파보는 일을 단념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날 이후 무덤 속에 금자를 묻은 사람이 정말 죽었으므로 신라에서도 금자가 들어있는 무덤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도 금자는 금척리 고분군 가운데 어느 한 무덤에 묻혀 있으리라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

이 이야기는 우선 "박혁거세" 거서간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적고 있고 신라의 보물을 탐내는 '이웃'이 한(漢) 나라라고 전하는데, 이는 혁거세왕이 한대(漢代)인 서기전 57년에 즉위하였다는 역사서의 구절과 일치하므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만든 가능성이 큽니다.

한나라는 22년 전 오환족이 학살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오환족 족장의 아들이 새 나라를 세우고 진(辰)을 몰아낸 사실을 안 뒤 새 나라가 한(漢)을 위협할 만큼 힘이 센지를 알려고 사신을 보냈겠죠.

박씨족은 22년 전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기 때문에 한(漢)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신하가 된 "조선의 유민"(:6부)들도 53년전 ― 한漢의 신하이자 연나라 사람이었던 ― 위만이 세운 나라에서 달아나 진(辰)에 망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그리고 위만조선이나 한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어떤 나라와도 왕래하지 않을 정도로 한漢을 미워했으므로) 왕족과 마찬가지로 한(漢)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금척리 전설에서도 신하들이 앞장서서 한나라를 "교만한 나라", "자기네 나라가 부강한 것을 믿고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는 나라라고 욕함. 또 혁거세왕이 한나라를 "이웃"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서나벌이 한나라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암시한다.

오환족은 한나라와 가까운 초원지대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한이 "이웃"나라였다. 만약 6촌 촌장이나 박혁거세가 경상북도의 토착세력이었다면 한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이웃 나라"로 느꼈을 까닭이 없고, 애초에 부딪히지 않으므로 반감을 품을 까닭이 없다)

서기전 57년, 북아시아(:시베리아와 몽골초원)/동아시아에서 이렇게 극심한 반한(反漢)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세력은 한나라와 대립하던 흉노나, 구성원이 한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흉노에게 학살당했으며 나중에 한으로 들어가는 것도 제지당한 오환족, 한때 위만조선에서 조선상(朝鮮相)이라는 벼슬을 지내다가 위우거(우거)와 대립해 고조선 사람들을 이끌고 "동쪽 진(辰) 나라"로 달아난 역계경의 후손밖에 없습니다(역계경의 이야기는『삼국지』「한전」이 인용한『위략』에 실려있음).

그러나 흉노는 - 중국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 나라를 유지하고 오환족을 쳐부술 정도로 강자였고, 따라서 달아나 새 나라를 세울 까닭이 없죠. 또 "조선의 유민"들은 한에 반감을 품긴 했어도 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결국 말을 잘 기르면서 말을 상징으로 삼고 한나라에 대한 반감을 품을 수 있는 무리는 오환족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백(白)은 '서쪽'을 나타내는 빛깔이기도 합니다. 흰 말은 - 목격자인 “조선의 유민”이자 “6촌”의 주민들이 볼 때 - '서쪽에서 온, 말을 잘 다루고 말을 상징으로 삼은 무리'를 은유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은 6촌으로 오기 전에 흉노와 한에게 학살당해 살 곳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죠. 그래서 저는 박혁거세 거서간(불구내)이 오환족의 거수라는 가설을 세운 것입니다.

이 전설은 박씨들이 겪은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다가,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 경주의 전설이 되어 전해 내려왔을 것입니다. 금척리 고분군의 전설은 ‘결과’이며「오환전」의 기록은 ‘원인’인 셈이죠.

결국 혁거세 거서간의 아버지는 서기전1세기 무렵 흉노와 싸워서 지고, 한(漢)에 쳐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오환족 난민들의 지도자이자 ‘거수’라고 불린 왕이며 살기 위해 경기도로 달아나 위만조선의 유민을 굴복시켜 동맹자이자 신하로 삼은 다음 새 나라를 세웠다는 가설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때 성씨를 ‘박’씨로 바꾸었을 것입니다.

Read : 45,  IP : 218.153.157.129
- 2004/01/21 Wed 22:47:58에 올림 → 2004/01/21 Wed 22:51:14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