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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아름]인용자료

왜 고구려는 한강유역에 큰 성을 축조하지 않았을까? (3) - 김용만님

작성자麗輝|작성시간05.09.27|조회수33 목록 댓글 0
몽촌토성에 고구려 남부군 주둔군의 주력이 머물렀다고 볼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한 일로 구체적인 시점은 475년 이후가 될 것이다.
삼국사기 개로왕 21년 기록을 보면 고구려군이 먼저 북성을 쳐서 7일만에 함락시키고, 옮겨서 남성을 치니 성중이 흉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 개로왕이 도망해 나갔는데, 고구려군이 이를 잡아서, 아단성 밑으로 결박한 체 보내어 살해했다고 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백제의 수도는 북성인 풍납토성이었고, 이어서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옮겨갔다가, 고구려군에 의해 개로왕이 잡혀서 한강 건너편의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은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물론 여기서 백제의 수도를 하남시 춘궁동 유적으로 볼 경우에는 북성이 이성산성, 남성이 춘궁동토성 쯤이 되겠다. 그런데 기록으로 볼 때는 풍납토성설이 더 유력하다. 나는 이 백제 수도문제에 있어서 현재는 8:2 정도로 풍납에 무게를 둔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군이 백제 개로왕을 굳이 아단성 으로 결박하여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래도 백제의 저항이 강한 상태에서 북성이나, 남성에서 왕을 죽일 경우 백제인의 강력한 저항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한강 이북의 아단선에서 죽였다고 하겠다.

고구려군은 분명 한강 이북의 아차산 일대에 주둔했다. 그것도 10여개 이상 보루와 홍련봉 일대에 기와집에 연화문와당까지 한 멋진 건물을 두고 장기간 최소한 1500명 정도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몽촌토성에 주둔한 고구려군은 일시 백제 수도를 장악하여, 그곳을 고구려 영토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주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온돌과 대형 토기는 장기간 고구려군이 머문 흔적으로 볼 수가 있다.

또 이성산성에도 고구려군이 분명 진주했었고, 분명 머물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곳에서 나온 35.6cm 자의 경우가 이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성산성이나,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성벽의 흔적이 찾기 어렵다는 것은 다음 3가지 가능성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 주둔시기가 짧았다.
둘째 기존의 성벽을 이용할 뿐, 새롭게 축조할 필요성이 없었다. 즉 왕이 죽었고, 태자인 문주가 남으로 내려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백제군의 저항이 그리 강할 수가 없었고, 백제군은 적어도 제 2 전선을 한강 주변이 아닌, 수원이나 평택 심지어는 차령산맥 정도로 내려가서 고구려군의 공세에 맞설 수 밖에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셋째 새로 성벽을 보축할 필요성이 분명있었지만, 현지 사정상 기존의 백제 기술자와 백제인을 활용했기 때문에, 고구려식 축성법이 나올 수가 없었다.

자. 여기서 문제는 첫번째 주둔시기의 문제다.
지난번에 김태식 기자도 이 문제를 언급했고, 아차산을 발굴하는 최종택 교수도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가지 언급을 한 바 있고, 김영관, 심광주 등등 여러 사람이 고구려군의 남진의 시점에 대해서 많은 언급이 있었다.
그런데 우선 검토해야 할 것이 475년 이후의 백제의 상황이다. 적어도 475년 이전에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던 것은 인정되는 만큼, 광개토태왕의 남진과 한강 남쪽의 고구려성 축성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강 이북은 광개토태왕과 관련이 있는 만큼 이는 다시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우선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그는 재위한 다음해에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의 민호를 이주시켰다. 한북(漢北)의 백성을 이주했다는 말은 한강 이남을 백제가 지배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새롭게 대두산성(위치는 모른다)을 쌓은 목적으로 볼 때 기존의 북성과 남성(풍납과 몽촌)은 도저히 백제로서는 사람을 거주시킬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거나, 아니면 고구려의 장악하게 있었다는 반증으로 사용될 수 있다.
또 그해(476년)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에 고구려가 길을 막아서 못갔다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고구려군이 관미성 등 과거 백제의 주요 항구를 장악할 만큼 서해상에 강한 해상통제력을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고구려가 한강이남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강한 방증자료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문주왕은 재위 4년에 해구라는 자에게 시해를 당한다.
또 문주왕의 다음왕인 삼근왕은 나이가 어렸고, 좌평 해구와 은솔 연신이 대두성(한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머문)에서 반란을 일으키다가 해구는 죽고, 연신은 고구려로 도주하는 사건이 생겼다. 또한 삼근왕 3년에는 대두성을 두곡(위치 모른다)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는 한북에서 내려온 세력이 웅진(공주) 지역의 사람들과 융화를 못해서 계속 백제의 불만세력으로 남아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백제의 정치가 혼란한 상태에서 삼근왕은 그해 11월(479년)에 죽는다.
불과 4년만에 두 명의 왕이 죽은 것이다.
따라서 혼란한 백제가 고구려군을 한강 이북으로 몰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음에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활을 잘 쏘는 무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런데 그으 재위 4년 9월(482년)에 말갈이 한산성을 습파하고 3백여호를 노획하여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왕이 사냥으로 한산성에 이르러서 군민을 위문하고 10일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자, 여기서 한산성을 과연 현재의 몽촌과 풍납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이때 한산성이 그곳이라고 볼 수 있다면, 첫번째 제기했던 가능성. 즉 고구려군이 몽촌토성에 주둔했던 시기가 짧았다는 말이 실제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군은 475년에 몽촌토성을 장악한 후, 적어도 480년경에 철군했고, 백제가 이를 되찾고 백성들을 3백여호 이상 머물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를 역주한 이병도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적어도 죽령 조령계선까지 내려갔으므로 이때 백제가 한성을 장악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말갈이 고구려의 명을 듣는 세력인 만큼, 고구려가 한성 지역에서 철군한 후, 말갈로 하여금 백제가 이 지역을 다시 장악하여 관리하지 못하게 습격하게 시킨 것으로 본다면 어떨까.
그런데 동성왕 6년(484년)에도 고구려는 백제가 남제에 보낸 사신 약사가 서행중에 이르렀을 때, 이를 저지시킬 만큼 강력한 해상통제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쉽게 포기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동성왕 10년 (488년)에 백제는 북위의 군사를 쳐부수는 위업을 달성한다.
그리고 동성왕 15년(493년)에는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고, 다음해(494년)에는 고구려가 신라와 살수원에 싸우다가 신라가 패해 견아성으로 도망가서 고구려군에게 포위당하고 있었을 때에, 동성왕은 3천의 군사를 보내 구원하기도 한다.
즉 동성왕 15년쯤에는 이미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할 만큼 힘을 충분히 키운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495년에 남제에 사신을 보내서 북위를 격파한 공을 자랑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해에 고구려는 백제 치양성을 포위한다. 문주왕은 신라에게 도움을 청해 고구려군을 물러가게 한다. 이때 치양성에 대해서는 황해도 일대의 치양성이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수가 없고, 황해도 지역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당시 정황상 어렵지 않는가 싶다.

동성왕 20년에는 탐라를 위협하여 이들로 부터 사죄를 받을 만큼 백제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동성왕 21년(499년)에는 한산(漢山)인이 고구려로 도망가는 자가 2천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리고 동성왕 23년(501년)에 좌평 백가의 반란으로 죽는다.
이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한산은 백제의 땅이고, 그 한산은 어디란 말인가. 이것도 현재의 몽촌과 풍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좀 더 뒤 시대를 살펴보자. 무녕왕 원년(502년)에 백제는 군사 5천으로 고구려 수곡성을 친다. 이 수공성은 황해도 신계 지방이라고 비정하기도 한다. 백제가 5천으로 고구려 남부의 주요성을 공격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는 의미는 크다. 이는 곧 이무렵 백제가 분명 힘을 강한 힘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백제에게 말갈이 수시로 쳐들어온다. 무녕왕 3년(504년)에 말갈군이 공격해오고, 무녕왕 6년(507년)에는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공모하여 한성을 공격하다가, 백제군에게 패배한 사건 등으로 볼 때, 이때 백제는 분명코 한성을 장악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 무녕왕 12년(513년)에 백제는 위천가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한다.
결국 무녕왕 21년(514년) 무녕왕은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백제가 앞서 고구려에 패한 바가 되어 여러해 동안 쇠약해 있더니, 이제는 고구려를 여러 차례 격파하겨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상과 같이 백제는 동성왕과 무녕왕 두 임금에 의해 고구려로 부터 받은 충격을 벗어버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문주왕과 삼근왕 시기에 고구려를 몰아내기란 어려웠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480년경에 한강 이남에서 철수하고, 이후에는 한강 이북에만 머물렀다고 보인다.

다시 고구려가 3차 남진(광개토대왕, 장수왕, 다음의 남진)하던 시점과, 475년 시점에서 고구려가 어디까지 남하했는지는 다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첫번째 문제, 즉 고구려가 한강 이남에 주둔하던 시점이 짧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 있다. 즉 한강 이남에 1차로 머물렀던 시점은 불과 475년에서 480년대 초까지 5년 남짓한 시기이므로, 새롭게 축성할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다.

자, 이제 다시 한강 이북 문제 등 아직 풀지 못한 문제들은 다시 또 써보자.

*** 자꾸 횡설수설하면서 앞에 했던 것을 또 쓰면서 문장을 늘리는데, 이것은 양해 바랍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하루에 틈나는 대로 쓰기 때문에, 앞에 말과 중복되는 것도 있고, 또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에 약간의 미묘한 차이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카페에 글을 올릴 때에 이런 점이 재미가 있지요. 나중에 완성된 글과 차이도 있을 수 있구요. 이글은 앞으로 내가 한편의 논문으로 쓸 때 기초자료로 쓰기 위해 손가락 가는대로 올리는 글입니다. 조금 틀려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마음껏 이리 저리 내 생각을 굴리면서 쓰는 글이라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이 얼마나 늘어질 지 모릅니다. 자꾸 생각나는 대로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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