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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아름]대고구려

[문화]2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자면...

작성자麗輝|작성시간17.04.07|조회수79 목록 댓글 2

1. 대방 지역의 묘제에 대한 답변


말씀하신 대로 일정 지역의 묘제는 대대적인 이주, 적극적인 정책 변화 등이 이유가 아니라면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낙랑 · 대방 지역의 묘제가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을 두고 해당 지역의 <자치성>, <반독립성>이 주목받게 된 것이고요. 그에 대해 꼬비에뚜님은 낙랑과 달리 대방까지도 그러했을까? 에 대한 의문을 갖고 계신 듯 합니다.


일단 낙랑 지역의 경우,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인적 · 물적 자원을 투입하기도 했고, 해당 지역의 잠재적 능력을 자국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랑 지역의 묘제가 고구려의 묘제로 변경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듯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전통 묘제라 하면 <적석총>이며, <전축분>이나 <봉토석실분>은 중국제 묘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봤을때 낙랑 · 대방고지의 묘제는 모두 전축분과 봉토석실분입니다. 최근에 이에 대해 논고를 발표한 공석구(2016)의 자료를 살펴보면, 해당 지역에는 궁륭상 전축분에 거대한 판석으로 천장을 덮은 형태(대방태수 장무이묘), 평천장 전축분에 천정 부분을 돌로 덮은 서읍태수 장씨묘, 전축분 벽체 부분의 일부를 석재로 구축한 동리묘, 전축분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석축한 평양역전 벽화고분, 전축분의 전통을 무시하고 완전히 봉토석실분으로 축조한 안악3호분(공석구는 대표적인 안악3호분=동수묘 주창자이죠) 등이 확인되어 고구려 묘제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국내성 부근의 우산하 3319호묘는 오히려 외형이 적석총이지만, 내부는 전축분이고 유물 및 벽화도 중국계여서 일찍이 고구려로 귀화한 중국계 인물의 묘제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낙랑군은 이 정도로 하고 대방군을 살펴보겠습니다. 


3세기 초 대방군이 신설되기 직전 황해도 일대는 '황지(荒地)'라고 표현될 정도였는데, 이것이 실제로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지 못 하는 땅이라는 소리인지, 중국의 통제가 이뤄지지 않아 정치 · 군사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는 것인지는 고민이 좀 필요할 듯 합니다(이에 대해 권오중(2011)은 인구가 희소해 사람의 손길이 좀처럼 미치지 않은 자연 상태에 가까운 지역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죠). 암튼, 공손씨에 의해 대방군이 설치된 뒤 경초 연간(237~239)에 위 명제가 다시 이 지역을 획득하는데, 기록상으로는 '낙랑과 대방을 평정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비록 십수년의 짧은 기간이지만 공손씨가 황지였던 대방 지역을 차지할때 낙랑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 안에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대방군을 매개로 위와 왜 사이에 교섭했다는『삼국지』및『진서』의 기사를 보면 대방군이 3세기 초반 나름 세력을 지닌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진서』를 보면 함녕 2년(276) 창려, 요동, 현도, 대방, 낙랑 등 5개 군국을 묶어 평주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평주의 규모는 총 26개현, 18,100호이고,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려군의 규모는 2개현에 900호(위나라때 설치), 요동속국의 규모는 8개현에 5,400호(진나라때 설치), 낙랑군의 규모는 6개현에 3,700호(한나라때 설치), 현도군의 규모는 3개현에 3,200호(한나라때 설치), 대방군의 규모는 7개현에 4,900호입(공손도가 설치)니다(오히려 낙랑군보다 대방군의 규모가 더 클 정도입니다). 꼬비에뚜님은 대방군의 규모가 작고 고분이 산재해 있으므로 기년명 전실묘를 고구려측에서 유지하고 말고의 여지가 없다고 보시고 있지만 평주의 여타 군현들을 살펴보면 대방군은 요동속국 다음으로 규모가 큰 군현이기 때문에 단순히 규모가 작은 군현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하물며 B.C. 45년의 <낙랑군 호구부>를 보면 대방현(4,346호)을 제외한 나머지 6개현은 인구수가 1천호도 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낙랑군과 예하 6개 속현의 평균 호구수는 3,806호에 달하고요(호구에 기록되지 않은 인구를 감안하면 해당 지역의 인구는 상당한 규모였다고 판단된다).


즉, 일찍부터 한반도 중부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던 낙랑 지역(평양과 평안도 일대)은 3세기를 접어들면서 세력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그 중요도가 인정되었으며, 이전에는 별볼일없던 대방 지역(황해도 일대)은 공손씨가 대방군을 설치하면서 인구도 증가하고 개발도 이뤄지면서 그 중요도가 증가했다고 보고자 합니다. 당연히 고구려 입장에서 보면 3~4세기대에 낙랑과 대방 모두 중요한 전략지였으며, 중요도 면에서 대방이 결코 낙랑보다 뒤떨어지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특히 4세기 초반 낙랑과 대방을 흡수하고, 이후 황해도 일대에 남평양을 구축한 것을 보면(장수산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구축된 관방체계와 대규모 고분군 등) 낙랑의 인적 · 물적 자원뿐만 아니라 대방의 도움(?)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중국계 이주민이 정착해 재지화된 사례는 종종 보이며, 변군에서 지배층 및 일반 주민들이 주변 지역으로 이탈하는 현상도 쉽게 확인 가능하다)


저 표현에서 <수만명에 달하는 고급인재들>은 엄밀히 말하면 낙랑과 대방 양쪽 모두에 속하는 인적 자원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하기는 했습니다. 그보다 앞쪽에 낙랑에 대해 언급하고, 대방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고구려가 이들 지역을 발판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라고 적은 것은 낙랑과 대방을 모두 염두에 둔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꼬비에뚜님 지적을 받고 보니 낙랑과 대방이 병렬로 언급되게 썼지만, 낙랑 다음에 대방이 순차적으로 언급되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 낙랑도 대방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음에도 똑같이 묘제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변했다 하더라도 중국제 묘제 안에서의 변화, 혼재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를 고구려의 묘제로 변경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2) 오히려 3세기를 지나면서 낙랑의 영향력은 줄고, 대방의 영향력을 늘어났기 때문에 고구려 입장에서도 대방을 상대적으로 비전략지역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적다. 오히려 낙랑 지역이었던 평양보다 더 먼저 영역화해 남평양을 구축한 것을 보면 전략화하기에 더 유리한 지역으로 인식해 적극적으로 개발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평양 천도가 그보다 뒤에 이뤄진 것은 낙랑이 대방보다 중국風이 더 지속된, 이국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를 재지화하는데 더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3) 대방군의 인구가 5천여호, 약 2만 5천명 정도로 적다고 볼 수 있지만 동시기 중원왕조의 동북에 위치한 유주와 평주 예하 군현의 규모를 본다면 그 정도는 결코 적은 편이 아니다. 대방군은 유주와 평주 예하의 10여개 군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규모가 큰 행정구역이었다. 또한, 기원전의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오히려 인구가 크게 증가한 셈이 되며, 특히 공손씨가 대방군을 설치하면서 외부인 이주, 현지 개발 등의 상황이 가속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4) 수만명에 달하는 고급인재라는 표현은 낙랑과 대방을 모두 염두에 둔 표현이었으나, 대방 단독으로만 놓고 본다해도 <많은>의 의미로 이해하도 적절할듯 싶다. 정확한 표현을 사용하지 못해 오해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더불어 해당 2군의 인력 중 상당수가 고구려로 흡수되었지만, 백제로 흘러간 집단도 적지 않았기에(해당 부분은 김창석 2016을 참고하였다) 이 부분을 간과한 표현 같아서 추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 황해 남부의 소속 문제


고이왕이 대방군의 속현인 진한 8국의 영토를 차지했다는 것은 고이왕 13년(246)의 기록(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시 낙랑 변방을 습격해 주민을 빼앗았다가 다시 돌려준 일)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재밌는건 인터넷 등에 검색하면 고이왕이 낙랑 변방을 습격한 것까지만 언급하면서 고이왕의 대외업적으로 얘기하지, 주민을 돌려줬다는 내용까지 정리한 링크가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도 참 웃기더라고요), 

암튼, 먼저 이홍두가 인용했다고 한 권오영과 임영진의 논문을 살펴봤습니다. 우선 권오영의 논문에서는 각주 6번에 적힌 해당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억지로 끼워맞춘다면 비스무리한 내용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인 연대와 고이왕, 책계왕이 언급되는 내용은 없었습니다(1986). 임영진의 논문은 찾아보지 않았지만, 거기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고 전제하겠습니다. 즉, 이홍두가 인용한 자료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사건과 관련된 문헌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246년 대방군의 속현인 진한 8국의 영토 운운은『삼국사기』「백제본기」<고이왕 13년조>에 그 전모가 적혀 있습니다. 그해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모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이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게 잡아오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낙랑태수 유무가 분개하였고, 고이왕은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즉, 여기에서 영토 획득에 대한 내용은 없으며, 획득한 포로도 돌려주고 있기 때문에 고이왕이 이때 진한 8국의 영토를 차지했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한편,『삼국지』「동이전」<한전>에 적힌 삼한의 신지와 낙랑 · 대방과의 전투 기사도 살펴보겠습니다. 경초 연간, 즉 237~239년 사이에 신지와 한인들이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습니다. 이에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에 나섰고, 궁준이 전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 했으나 결국 낙랑 · 대방 2군은 한을 滅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주체를 두고 백제, 목지국, 신분고국 등 여러 후보를 거론하고 있는데, 문헌상으로는 특정 집단을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백제의 고이왕이 해당 사건의 배후세력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아마 이홍두는 이 주장을 따르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기리영 전투에 나오는 대방태수 궁준과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후에 등장하는 삭방태수 왕준을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낙랑태수 유무라는 동일인이 등장하기도 하거니와 246년에 왕준이 살아있는데, 그로부터 10여년 전에 궁준이 전사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이는 동일한 사건을 다른 각도로 봐야 한다...는 제멋대로의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왜 멋대로 왕준과 궁준을 동일시하는지...엄연히 담당하는 군현도 다른데).

그리고 286년의 책계왕 관련 기록을 보면, 당시 대방왕(대방태수가 스스로 왕이라 한 것인지, 아니면 대방군과 달리 별도의 대방국이 있었는지 여부는 다루지 않겠습니다)의 딸 보과와 혼인했던 책계왕은 대방을 침공한 고구려에 대항해 군사를 보내 장인을 도와줍니다. 재밌는 점은 고구려가 원망(怨)하였다고 했을 뿐, 어떠한 공식적인 항의나 침공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책계왕은 고구려가 쳐들어올까봐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해 방비할 뿐(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대방국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고구려를 대비해서 해당 성들을 수축했는지도 좀 의문입니다)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도 않습니다. 이를 보면 당시 고구려측에서는 비록 백제가 대방의 사위나라라 하더라도 대방보다는 자기들 손을 들어주리라 믿었던 것 같습니다. 

이 대방이 공손씨 사후 중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반독립적으로 중원 왕조로부터 이탈한 대방군이라면 약 2~3만명 규모의 세력이었을 것이며, 그게 아니라 별도의 집단이라 하더라도 이정도 규모와 비슷했을 듯 합니다. 286년 이후 그 뒤에 대방이 어떻게 되었는지 얘기는 없지만, 313~314년 고구려가 해당 지역을 차지한 것을 보면 존속 기간이 채 30년도 안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백제가 당시 대방왕의 사위나라였지, 백제가 대방 지역까지 차지했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 논문에서 언급한 1~2세기 강화만 하구가 힘의 공백지라는 주장과 그 뒤에 언급한 내용, 참고문헌 등에 오류가 확인된다. 하지만 논자가 해당 지역을 힘의 공백지라고 표현한 含意를 추론해 보자면, 대방의 존재를 의식해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낀 완충세력으로서의 대방이 존재했기 때문에, 완충지대라는 의미를 힘의 공백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2) 246년 고이왕의 진한 8국 차지는 원사료 해석에 있어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사료를 자세히 살펴봤을 때 고이왕은 오히려 포로로 잡은 낙랑 주민을 돌려줬으며, 획득한 영토에 대한 기록도 없다. 그렇다고 해당 지역에서 주변 세력에 대해 정치적 우위에 섰다고 볼만한 근거도 부족하다.

3) 286년 책계왕과 대방과의 사이에서 오히려 혈연적으로 백제는 대방왕의 사위나라였으며, 정치적으로 백제가 대방 지역을 압도하거나 영향력 아래 뒀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 대방 지역에 대한 역사는 3세기 후반~4세기 초반 약 30여년이 공백이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양국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존재했다고 보는게 적절하지, 백제가 선점해 고구려가 대방을 치는 314년까지 30여년간 선점했다고 볼 수 없다.

4) 그러므로 꼬비에뚜님 말씀대로 <황해도 일대가 다시 대방의 확실한 지배권역에 편입되었다>는 근거를 굳이 찾을 것이 아니라 황해도 일대에 대방이 꾸준히 존재했다(세력의 부침은 있겠으나)고 보는 것이 적절할듯 싶다. 그리고 양국 사이에서 수십년간 완충지대로 존재했던 황해도 지역의 재지계 세력(과거 대방보다도 약한 지방 세력들)들은 4세기 초반 황해도 일대로 남하해 뒤늦게 해당 지역에 세력을 뻗치려는 고구려가 4세기 중반 전연에게 수세에 몰리자, 점차 국력이 상승하는 백제쪽으로 기울다가 368년 근초고왕의 자립위왕 이후 대부분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이를 저지하려다가 실패하자, 해당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은 더욱 증대되었을 것이다.
 
5) 즉, '민가 약탈' 운운은 백제측에서 봤을 때 백제가 해당 지역에 탄탄한 기반을 쌓고 있던 상황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다만, 그 탄탄한 기반의 근거가 책계왕대 대방과 혼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도 어느 정도 상관성이 있겠으나, 대방과 백제 사이에 수십년간 그 정도 영향력이 <지속>되었다고 볼만한 근거는 미약하며, 이는 314년 대방 멸망시 백제의 도움이 없었던 것과도 연결시켜 볼 필요가 있겠다(그래서 대방군과 대방국이 다른가 싶기도 하다). 오히려 점점 약해지는 고구려와 점점 강성해지는 백제의 상관관계 속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보다 직접적이고 관련성도 높지 않나 싶으며, 그렇기에 근초고왕 시기의 상황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상입니다. ^^ 답변이 좀 늦어졌습니다. 그래도 보고서 마무리하고 다소 여유가 생겨서 이렇게 답글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그밖에 이미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공석구와 권오중, 김창석의 논문 총 3편을 첨부하겠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권오영 선생님의 1986년 논문도 첨부하겠습니다. 제가 관련 내용을 놓쳤을 수도 있기에...




※ 참고문헌


공석구, 2016,「4세기 고구려 땅에 살았던 중국계 이주민」『고구려발해연구』56, 고구려발해학회.

권오중, 2011,「요동 공손씨정권의 대방군 설치와 그 의미」『대구사학』105, 대구사학회.

김창석, 2016,「중국계 인물의 백제 유입과 활동 양상」『역사문화연구』60,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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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꼬비에뚜 | 작성시간 17.04.11 논문 감사합니다. 대방군 관련해서 더 공부해보겠습니다.
    박사논문이 몇 개 더 있는데 모두 정리하자면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麗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4.11 저도 낙랑, 대방 관련해서는 공부가 많이 부족한 상태라서...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 덕분에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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