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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아름]참관비평

[학회후기]제1회 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 국제학술대회

작성자麗輝|작성시간05.12.11|조회수246 목록 댓글 0

· 제목 - 景觀의 고고학

· 주최 - 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 
· 발표자 - 김종일, 김범철, 자오지준, 츠지 세이이치로, 타카하시 마나베

· 사회자 - 이홍종, 박양진 
· 일시 - 2005년 11.10(목)~11(금)

· 장소 - 고려대학교 서창캠퍼스 고고환경연구소 
· 批評

우리 연구소가 새롭게 이전한 이후 처음으로 치뤄진 국제학술대회였다. 서창캠퍼스 25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연구소에서 주최한 것이기도 하지만 연구소장님이신 이홍종 선생님이 새롭게 연구소를 옮기면서 이전부터 계획하셨던 것을 실행에 옮긴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미 연구소에서는 지난 9월에 한일취락연구회, (재)호남문화재연구원과 함께 '한일 취락연구의 현황과 과제'라는 타이틀로 제1회 공동연구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연구소 명칭에서도 알 수 있지만 단순히 취락고고학, 지리고고학, 저습지고고학 등에서 더 나아가 주변의 경관까지도 연구대상으로 포함시켜야만 한다는 시각에서 경관고고학의 중요성이 요구되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이런 주제들을 갖고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번 학회에서는 특별하게 학회 전날인 10일(목) 10시부터 17시까지 토기 소성실험을 실시했다. 토기는 배가 불룩하고 저부가 얇은 송국리형토기 50여점을 주문제작해 마련했고 진흙과 짚단, 각종 장작을 구해서 연구소 뒷 공터에서 실험이 시작되었다. 소성실험에는 이미 일본에서 야요이시대 토기소성실험을 수십차례 해오셨던 고바야시 선생님 등을 모시고 우리 연구소 연구교수인 쇼다신야, 손준호 선배님이 참여하여 이뤄졌으며 총 3가지 요지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먼저 직경 1.8m, 깊이 0.3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토기 10여점과 일정량의 장작을 두었다. 그리고 그 위에 짚단을 꼼꼼히 덮고 진흙을 발랐는데 첫번째 경우는 위에서부터 2/3 가량만 진흙을 바르고 밑부분을 개방한 반밀폐형요지였고, 두번째는 바닥까지 다 진흙으로 덮고 윗부분에 숨구멍을 뚫은 밀폐형요지, 마지막은 그냥 맨땅에서 토기를 구운 개방형요지였다.

 

이미 아침 8시 30분경부터 토기소성실험 준비를 하느라 땅을 파고 주변을 정리하고 재료를 갖다놓느라 모두들 분주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요지에는 토기의 안쪽과 바깥쪽, 요지 내부의 바닥과 바깥쪽 바닥 등에 각각 온도계를 설치해 2분마다 온도를 재기로 하였으며 첫번째, 두번째 요지에서 고온을 견디지 못해 토기가 깨져나가자 세번째에서는 먼저 1시간 30분 가량 토기를 그을린 다음에 소성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토기소성실험이 우리나라에서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부 실패로 끝났는데 그 이유는 토기를 제작한 직후 바로 실험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본 야요이시대 토기소성실험을 오래도록 해오셨던 고바야시 선생님의 도움으로 3~5개월 가량 음지에서 천천히 말린 다음에 소성실험을 했는데도 깨져났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토기가 온전하게 남아있어 좋은 결과를 냈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토기들은 다음날 학회에 공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였다.

 

일단 이번 학회는 주인장에게 있어 상당히 뜻깊고 중요한 학회였었다. 먼저 경관고고학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주인장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다지 관심도 없었던 상태에서 굉장히 새롭고 중요한 사실들을 알았기 때문이며, 경관고고학이 앞으로의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주인장이 여기에서 접했던 내용들은 모두 참신했고 또 다양했다.

 

오전 첫발표는 영국에서 경관고고학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온 카이스트 김종일 선생님의 '경관 고고학(Landscape Archaeology)의 이론적 특징과 적용가능성'이었다. 경관고고학은 현재 유럽고고학, 특히 영국고고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분야인데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동안 확보했던 대략 600만장의 항공사진이 기본이 되어 이후 경관연구(Landscape Studies), 경관사(Landscape Histpry)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연구되어왔으며 이는 현재 영국(인)의 정체성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즉, 유럽각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영국을 규정하느냐를 따질때, 영국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전원풍경, 즉 완만한 언덕으로 구성된 경작지와 주거지역 및 숲, 그리고 영국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거석기념물 등을 포함하는 소위 '경관'이야말로 영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는 개념때문이다. 실제 이러한 경관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영국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영국인의 관념은 고대로부터 18~19세기 낭만주의 학파에게까지 주욱 이어졌으며 오늘날에는 경관이라는 개념으로 연구되고 있는 셈이다.

 

그로 인해 발표자는 공간(Space)이 말 그대로 '텅 빈 공간'이 아닌 인간을 비롯한 여러 행위주체들의 사회적 관계와 행위가 이루어지고 또 이러한 관계를 매개하는 동시에 의히화되는 장소(Place)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와 행위는 사회적 성(Gender), 권력(Power), 기억(Memory), 그리고 의미화(Signification) 등을 포함하여 각각의 행위주체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해석 내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 인간주의 지리학이 도입되면서 단순한 환경이나 배경으로써 대상화된 경관이 아닌, 인간주체에 의해 경험되고 해석되는 장소로써, 그리고 인간 존재가 거주(Dwelling)하는 곳으로 경관이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또한 발표자는 경관고고학의 이론적 원칙과 그 사례를 제시했는데 다음과 같다.

 

1. 경관은 대상화되고 타자화된 공간이 아닌 의미화된 장소이다.

2. 경관은 그 자체로 존재성을 드러낸다.

3. 경관의 의미와 해석은 하나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이러한 의미들과 해석은 때로는 갈등하고 경쟁하며 동시에 타협하기도 한다.

4. 경관의 이해와 해석은 단순한 암기나 기억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 이미지는 느낌과 움직임을 통해 형성되고 내재화된다.

5. 경관의 형성과 해석은 권력의 한 해석 방식이다.

6. 경관은 개인 혹은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이 중에서도 주인장이 주목한 부분은 5번이었다. 자연 경관에 인공적 건축물을 세우는 식의 특정한 형태의 경관을 형성하는 경우 그렇게 형성된 가시적 경관이 권력과 관련해서 해석될 수 있다면, 즉 권력의 존재를 보여주거나 과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권력관계를 자연적인 것처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유럽의 환호(Enclosure)나 헨지 유적, 거석기념물이나 주거지 등을 통해 매우 손쉽게 이런 예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B.C 6C경 조성된 독일의 호이네부르그 유적을 보면 이 유적이 방어목적 뿐만 아니라 이 유적에 거주했던 집단이 가졌을 권력을 경관이라는 측면에서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흔적은 우리나라의 경우 송국리 문화 유형의 무덤과 주거지에서 보이는 권력의 행사방식과도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울산 검단리, 창원 남산, 진주 옥방 유적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발표자는 경관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방식을 언급하면서 그것은 경관을 경험하는 몸의 움직임이나 시선을 통제하여 워하는 방식대로 경관을 해석하거나 체험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영국 신석기시대 거석문화의 대표적 유적인 에이브버리(Avebury) 유적의 경우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유적은 제의가 행해지는 헨지 유적 뿐만 아니라 웨스트 케넷(West Kennet) 무덤 유적에서 헨지에 이르는 길(Avenue)을 표시하는 거석들도 세워져 있다. 아마 이 거석들은 헨지 유적에서 행해지는 제의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역할도 했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움직임과 동선을, 길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에 따라 통제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즉, 이러한 움직임과 동선,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하는 참여자의 시선을 통제하면서 원래 의도한 방식으로 헨지 유적을 포함한 경관을 경험하고 해석하게 했다는 소리다. 따라서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움직임과 동선, 그리고 시선의 통제는 통제를 받는 사람들의 경관에 대한 경험을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했을 것이고 따라서 경관을 느끼거나 해석하는 방식도 제한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움직임과 시선을 통제하여 의도한 방식대로 경관을 읽게 하거나 통제하는 방식을 통해 권력을 행사된다는 것인데 오늘날 박물관과 전시관에서의 동선을 잘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는 기존의 고고학적 해석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는데 경관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주인장이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 준 부분이었다.

 

그 다음으로 주인장이 주목했던 발표는 츠지 선생님의 '죠몽시대 생태계와 경관을 둘러싼 과제와 전망'이었다. 식물고고학을 전공하시는 츠지 선생님은 우리 연구소와는 인연도 깊고 이 선생님과도 친분이 깊으신덴 사족을 달자면 일본 주사(酒史) 연구회장이기도 하시다. 그래서 막걸리를 굉장히 즐기시는 애주가이며 우리 학교 막걸리찬가를 일본어로 직역해 부르시기도 한다. 학회 이후 선생님께 현미경을 통한 식물 분석과 당시 식생에 대해서 배우기도 했는데 고고학이 자연과학을 모르면 안 되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는 시간이었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이 발표는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먼저 지금까지 한 유적을 갖고 생태계사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 사례가 많지 않았음에도 그걸 시도했다는 점이 그러하며 아무 시설이 없는 장소, 즉 유구과 유물이 확인되지 않은 공간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밝히기 위해 곡저와 시설이 있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토양의 식물유체 등을 철저하게 검토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존 고고학계의 발굴 관행을 뒤엎는 혁신적인 시도였는데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발표의 대상은 죠몽시대 전기 중엽부터 중기 말까지 존속된 대규모 취락인 산나이마루야마[三內丸山] 유적이었다. 연대측정 결과 B.C 3,900~2,000년의 1,900년간에 걸쳐 취락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으며 죠몽시대 중기 후반에는 거주역, 묘역, 묘열 굴립주건물, 성토, 폐기장, 저장역 등이 넓은 면적으로 정연히 구획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대로 이들 지역 이외의 공터에 대한 연구도 같이 진행되었다.

 

이 곳에서는 엔토카소[圓筒下層]식 토기와 엔토죠소[圓筒上層]식 토기가 같이 출토되었는데 엔토카소식 토기가 출현하면서 동시에 유적이 위치하고 있던 곡저에서 너도밤나무를 주체로 하는 낙엽광엽수림이 인간에 의해 한꺼번에 치워졌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 유적에서는 단기간 안에 밤나무 수림이 성립되어 장기간에 걸쳐 이 상태가 지속된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밤나무숲이 만들어지고 유지관리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실제 밤나무숲의 지표면에서는 약간의 벼과(Poaceae) 식물이나 쑥(Artemisia)류만 검출되었으며 지표면에 풀이 별로 없었던 점을 본다면 밤나무숲이 잡초로 무성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되며 이는 곧 인위적으로 유지관리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가 인간이 본격적으로 이 곳에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인데 밤나무숲은 화분 출현률이 높기 때문에 수림을 구성하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그것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했다. 그 결과, 시설이 확인된 구역에서는 밤나무 화분이 거의 검출되지 않은 데에 비하여 유물이나 유구가 확인되지 않은 구역에서는 상당량의 화분이 검출된 것이다. 즉, 시설이 없는 공간은 밤나무숲으로 이용되었고 취락이 존속하는 기간 내내 밤나무숲이 유지관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적 북부 폐기장에서 출토된 목제품과 목탄에 대한 조직해부학적 조사 결과, 목제품의 약 35%, 목탄의 약 80%가 밤나무였음이 밝혀졌다. 대형 굴립주건물의 거대한 기둥도 역시 밤나무였으며 곡저에서 이루어진 각종 토목공사에 사용된 말뚝 역시 밤나무였다. 즉, 밤나무는 그 열매만 채취한 것이 아니라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했었는데 이처럼 다양하게 밤나무를 이용하면서 자원이 없어지지 않게 인위적으로 유지관리하는 생태계의 구도가 뚜렷하게 확인된 셈이다. 이는 오늘날 자연수림을 유지관리하는 시스템과 흡사한데 이미 수천년전에 자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였음이 밝혀진 셈이었다.

 

덧붙여 죠몽시대의 일반적인 사냥감은 사슴과 멧돼지가 가장 많은데 이 곳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족제비, 여우, 다람쥐, 너구리는 물론 산토끼와 하늘다람쥐의 유체가 전체의 75%를 차지하고 있었고 사슴이나 멧돼지의 대형포유류는 전체의 5%도 되지 않았다. 이는 곧 대형포유류가 생식할 수 없을 정도로 생태계가 인위적으로 개변되었으며 취락 주변 일대의 광범위한 밤나무숲은 연료나 식량을 획득하는 삼림으로 활용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기존에 이 곳에서 발견된 일부 어패류 유체를 통해서 이 곳이 바다가 높았을 무렵, 광대한 간척지에서 나오는 풍부한 해양자원을 활용했던 취락이라는 종래의 견해가 완전히 부정되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주변 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 결과, 산나이마류야마 취락을 온전히 복원하는게 가능해졌다. 특히 주인장이 몸담고 있는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군의 경우, 보루에 대한 조사는 최근에 그나마 전면적으로 실시되고 있지만 아차산 주변 경관까지는 손도 못 대고 있다. 얼마전 아차산 3보루에서 고구려 시대의 디딜방아가 발견되어 주목받았는데 발굴장까지 올라가는 등산로변에서 그와 비슷한 시설물이 확인되어 또 다른 보루의 존재에 대해 고려해보기도 하였다. 그것이 기존 보루의 확장시설이든, 독립시설이든 이는 보루군 주변의 경관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사실일 것이다. 더군다나 보루군에서는 다양한 경제활동을 알려주는 유물, 유구가 등장하는데 비해 그 주변의 논밭 유구에 대한 조사가 없기 때문에 단편적인 연구만이 진행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주인장에게 있어 츠지 선생님의 이 발표가 굉장히 와닿은 것이 많았었다.

 

마지막으로 주인장이 감동받았던 발표는 타카하시 선생님의 '야요이시대 이후의 미지형환경 변화와 토지이용(환경고고학의 시점에서)'이었다. 선생님은 먼저 자연환경이 구석기시대~죠몽시대, 야요이시대까지 주욱 변한 것은 널리 알려져있으나 일반적으로 야요이시대~역사시대의 환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하고 발표를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현재 토기 상황을 나타내는 토기분포도나 지형분류도, 토양도가 마치 고환경 복원도인냥 사용되어 왔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고고학적 문제점을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잠깐 언급한 부분이 일본 열도의 논농사 개시기였다. 일반적으로 B.P 6,500년 전에 장강 중, 하류역에서 본격적인 도작이 행해졌으며 한반도도 그 이후에 도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B.P 2천 수백년부터 논농사가 행해졌기 때문에 중국과의 시간차가 무려 3천년 이상이나 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장강 하구와 고토, 단죠 군도간 거리가 3~4시간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분명히 납득할 수 없는 논리이다. 그래서 발표자는 아오모리나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을 주목했다. 이들 유적에서는 먼 곳에서 생산된 옥과 같은 물품들이 다수 발견됨은 물론이요, 엄청나게 많은 밤나무 화분으로 인해 취락 주변에 대규모 밤나무숲이 조성되었음을 밝혀준 중요한 유적들이다. 즉, 타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기에 죠몽시대 전기~중기 경에는 대륙에서 논농사에 대한 정보나 실제 기술이 몇번 도래했지만 밤나무, 연어, 송어로 대표되는 풍부한 채집식량의 존재때문에 별로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이후 기후 한랭화와 함께 해산물이 풍부한 석호가 매몰되기 시작했으며 B.P 5,500년경 석호 매몰이 시작할 즈음에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겠지만 그로부터 1,000여년이 흐르면서 삼각주나 선상지대에 대규모 삼림이 조성되고 그로부터 다시 1,300여년이 흐르면서 대량의 유목을 포함한 모래, 자갈등이 퇴적되면서 대부분의 식량을 석호 주변에서 채집하던 죠몽인들의 식생에 커다란 변화를 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B.P 3,200년경에는 일본에서도 논농사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극이 충분히 되었고, 비로소 일본에서 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였는데 기존의 고고학적 견해에 비해 과학적인 근거가 확실하였기 때문에 굉장히 참신했고 새로웠다.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다양한 상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발표의 하이라이트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선생님은 환경고고학이란 과거의 환경과 인간활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데 환경고고학의 연구성과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환경고고학이 토지이력과 현재 일어나는 재해에 이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95년 1월 17일, 효고현[兵庫縣]마그니튜드 7.2의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는데 이결과, 진도 7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 지역은 대체로 죠몽시대에 바다였던 지역과 일치하는 곳으로서 마치 두부와 같은 부드럽고 습한 점토층이 퇴적되어 있었기에 타지역에 비해서 피해가 더 컸던 것이다.

 

또 자세하게 본다면 죠몽시대 말 이후에 형성된 구하도(舊河道:예전에 물이 흘렀던 길) 위의 가옥이 붕괴되어 많은 사람들이 압사하였는데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제 고도성장기 이전에 이러한 장소는 경험적으로 수해 등 재해를 당하기 쉬운 장소로 인식되어 주택지로 사용하기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도성장과 수반하여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어 보다 저렴한 토지가 주택지화 되었기 때문에 피해가 생긴 것이다. 만약 도시계획이나 방재계획에 환경고고학을 토앻서 밝혀진 환경사, 개발사, 재해사의 성과를 감안하였다면 큰 재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환경고고학이 현재에 있어 재해 위기관리에 유용하게 쓰이는 점이라고 주장하였다.

 

발표가 끝나고 박순발 선생님으로부터 '정말 감동적인 발표였다'라는 극찬까지 받았는데 실제로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수많은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물론 주인장을 포함해서 말이다. 고고학이라는 것이 단순한 학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발표가 모두 이전에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들, 이전의 관념을 깨는 혁신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충격, 또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학회가 열린지 2달이 넘었음에도 글을 쓰는 것이다. 아직까지 주인장이 그 학회에서 받은 학문적인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정말 재밌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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