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본 사람은 죽는다?...구약성경 이 문구의 참뜻[백성호의 궁궁통통]
#궁궁통1
구약성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느님(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는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개신교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하느님의 얼굴을
봤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노아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랬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행여 하느님의 얼굴을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빚어낼까 봐,
극도로 경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손을 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시스 2세의 부탁을 받고
바티칸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에
하느님의 얼굴을 그렸으니까요.
천지창조에서
아담을 창조하는
하느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길고 흰 수염을 휘날리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을까요.
그 얼굴을 보고서
그림을 그린 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하느님의 얼굴은
전적으로
미켈란젤로가 생각한
상상 속의 얼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느님, 하면
그런 이미지를
일정 정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다랗고,
흰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의 모습 말입니다.
#궁궁통2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종교입니다.
세 종교의 조상이 모두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 종교 모두
구약성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났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된 조상이다. >
가톨릭은 비교적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상을 만드는 일에
관대한 편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는 일까지
결정했겠지요.
그렇지만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이에 대해
무척 비판적입니다.
2000년 전
로마의 식민지 시절,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는 것도
크나큰 모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역시
우상숭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의 모스크(사원)에 가보면
우상숭배의 여지가 있는
모든 그림이나 조각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하물며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의 얼굴조차
그리지 않습니다.
역사적 기록화에도
무함마드의 얼굴은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이
민얼굴만 그릴 뿐입니다.
행여
무함마드가 우상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장치입니다.
그 점에서
유대인들은
가톨릭보다 이슬람교가
유대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더군요.
#궁궁통3
그래서일까요.
산상수훈 팔복(八福)에 등장하는
여섯 번째 복은
무척 놀랍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예수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기록돼 있는데
말입니다.
여기에는 대체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걸까요.
그러려면
하느님의 얼굴을 알기 전에,
먼저
마음이 깨끗한 사람부터
알아야겠더군요.
생전의 차동엽 신부에게
이걸 물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여기서 말하는
깨끗함이란 뭘 뜻하나?”
차 신부는
그리스어로 풀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가장 먼저
기록됐으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깨끗함은
그리스어로 ‘카타로스(Katharos)’다.
잡티가 없는 순수함을 뜻한다.”
차 신부는 이 단어가
‘카타르시스’의 어원과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카타르시스와 어원이 같다.
그건 무슨 뜻인가?”
“카타르시스가 언제 오나.
씻겨냄 뒤에 온다.
‘카타로스’도 마찬가지다.
눈물로 씻어내고,
회개로 씻어낸 뒤에
오는 거다.
그게 카타로스다.
가령
그리스도교인은
십자가를 보면서 씻어낸다.
예수의 삶을 묵상하며
자신을 씻는다.
그렇게 씻어낸 뒤에야
마음이 깨끗해지는 거다.”
우리의 마음이
슬픔으로 꽉 찼을 때도
그렇습니다.
실컷 울고 나면
속이 텅 비워집니다.
그렇게
씻어내며
깨끗해지는 것이겠지요.
저는 물음을
이어갔습니다.
“현대인은 바쁘다.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자신의 일상에서
씻어냄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다.
어찌해야 하나?”
차 신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영성가인
카를로 카레토가 여기에
답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이 만약
사막에 갈 수 없다면
당신의 생활 가운데
사막을 만들어야 한다.
거기서
침묵과 기도를 하라.’
그렇게
영혼을 재건하기 위해
고독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게
영성 생활이라고 본다.”
#궁궁통4
궁금하더군요.
그렇게 마음이 깨끗해지면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느님이 과연
머리와 몸과 팔다리를 가진
사람처럼 생겼을까.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처럼
말입니다.
차 신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건 3차원적인 언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꿈에서 하느님을 봤다.’
‘환시를 통해 하느님을 봤다.’
그런데 그건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낮은 수준이다.
가장 위험한 수준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형상이 없는 하느님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본다고 할 때는
‘통함’의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는 걸 좋아합니다.
우상을 만드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뭔가
소유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차 신부는
형상이 없는 하느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는 것보다,
서로 통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통한다는 게 뭔가.”
차 신부는
차분하게 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서로에게 거할 때
서로 통하는 거다.
그때 안테나의 주파수가
서로 맞는 거다.
마음이 깨끗할수록
안테나의 감도도 좋아진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잡음 없이
하느님의 마음을
수신하게 된다.
그게 통함이다.”
듣고 보니
그렇더군요.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고 할 때,
우리는 대부분
형상을 붙잡습니다.
겉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눈과 코와 입을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지을 때
겉모습이 닮게 지은 게 아니라,
속 모습이 닮게 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을 본떠
인간의 속성을 지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건
속성을 본다는 뜻입니다.
속성을 본다는 건,
나의 속성과 하느님의 속성이
통하는 걸 뜻합니다.
내 마음의 속성과
하느님의 마음이 속성이
서로 통할 때,
우리의 마음은 깨끗해집니다.
예수는
그때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얼굴을 볼 때는
이미
에고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겠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눈을 감고서
천천히 소리 내 읽어 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출처:중앙일보] 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