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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상간맥맥(相看脈脈),

작성자백장 /서재복|작성시간26.06.12|조회수15 목록 댓글 2

 

 

상간맥맥(相看脈脈)

말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는 뜻으로,

전남 영암 출신 문인 최경창과

함경도 기생 홍랑의 사랑 이야기이다.

     相 : 서로 상
  看 : 볼 간
     脈 : 줄기 맥
     脈 : 줄기 맥

출전 : 남학명(南鶴鳴)의 회은잡설(悔隱雜說)

 

조선 선조 때 홍원(洪原)땅의 예기(藝妓)이자,

재색을 겸비한 여류시인이기도 하였던 홍랑(洪娘)은

이름을 애절(愛節)이라 하였으며,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사대부 가문의 족보에 오르고,

 

선산에 그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을 보면

홍랑이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의 소양과 재질은 양반 사대부나 시인 가객들에 뒤지지 않았다.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많은 남자들의 유혹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신만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고 있었다.

이런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을 만나면서

세세생생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을 엮어가게 된다.

최경창은 탁월한 문장가인데다가 악기를 다루는

재주와 활 솜씨 또한 뛰어났던 인물인데,

 

1568년 과거에 급제하고, 5년 후인 1573년(선조 6년)에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게 된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예로부터 국방의 요지로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경창은 처자를 남겨두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인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은

경성 땅의 기생이던 홍랑의 미모와 재능에 매료된다.

 

이들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홀로 고적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결정적인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결국 홍랑은 군사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최경창과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1574년(선조 7년),

두 사람의 사랑 앞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고,

당시 관아에 속해 있는 관기는 해당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속절없는 이별 앞에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이 서울로 떠나는 날,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가며 최경창을 배웅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옆에 피어있는 산 버들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홍랑은 그 버들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프게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묏버들 가려꺾어...'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고죽의 마음 또한 오죽했으랴.

홍랑으로 부터 건네받은 연정가인,

 

시조 한 수를 한문으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옮겨

'번방곡(飜方曲)'이라고 이름 붙여 각각 나눠 가졌다.

번(飜)이란 '번역한다'는 의미이고,

방(方)이란 '즉시'란 뜻이니,

번방곡은 '즉시 번역한 노래'라는 의미이다.

 

고죽이 번역한 칠언고시 '번방곡'은

그의 문집 '고죽유고(孤竹遺稿)'에 실려 있다.

번방곡(飜方曲)

折楊柳寄與千里(절양유기여천리)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人爲試向庭前種(인위시향정전종)
주무시는 방의 창가에 심어 두고 보시옵소서.


須知一夜生新葉(수지일야생신엽)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면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잎이 시들었다가도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묏버들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

이 연정가(戀情歌)처럼,

 

최경창이 떠난 뒤 홍랑은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이별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이듬해, 병으로 자리에 누워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병석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은 홍랑은

서둘러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러 병석에서

신음하는 최경창을 만난다.

홍낭은 수척해진 최경창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1년 반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쌓였던 그리움을

눈물로 녹여내려는 듯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병 수발을 들었다.

홍랑의 정성으로 최경창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으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이 최경창을 간병하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양계의 금(兩界禁; 함경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을 어겼다는 이유와,

마침 명종 왕비 인순왕후의 국상이 있었던 직후라

정서적인 분위기까지 겹쳐서 파직을 당하게 되었고,

 

홍랑은 서울에서 추방되어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리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서울을 떠났다.

최경창은 떠나는 홍낭을 이별하면서

절절히 가슴을 오려내는 심정을 담아

'송별(送別)'이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相看脈脈贈幽蘭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此去天涯幾日還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말라


至今雲雨暗靑山
지금도 궂은 비구름에 첩첩 청산이 어둡구나.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자신처럼 여겨 달라던 홍랑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을 읊조렸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선조 9년)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부음은

그녀를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라.

이제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다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마땅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앉아서 울고만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 끝에 홍랑은 몸을 씻거나

단장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은 홍랑은 또한 커다란

숯 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스스로 벙어리가 되기까지 했다.

홍랑은 최경창의 삼년상을 무사히 마친 뒤에도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홍랑은 자기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묵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년)

해주 최씨 문중을 찾아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파란 많고 한많은

한 여인의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전 국토가 황폐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내고,

 

최경창과 부인 선산임씨(善山 林氏)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있는 그녀의 묘비에는

'시인 홍랑지묘(詩人 洪娘之墓)'라고 쓰여져 있다.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양반 사대부 문중까지도 감동시켜,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최경창의 묘소 바로

아래에 그녀를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쯤 그들은 이별도 없고, 갈등도 없고,

전쟁도 없는 천상에서 재회하여 전생에

못다 이룬 숭고한 사랑을 만끽하고 있으리라.

홍랑의 무덤 옆에는 1980년대에

전국 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洪娘歌碑'가 다소곳이 서있는데,

 

그 시비 앞면의 '孤竹詩碑'에는 홍랑의 '묏버들...

' 시를 최경창이 漢譯한 翻方曲이 새겨져 있고,

 

뒷면 '洪娘歌碑'에는 그녀의 '묏버들...

' 원문이 새겨져 있는 톡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살아서는 만남과 이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죽은 후에는 영원히 함께

있으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세운 사람의 정성과 재치를

느끼게 하는 노래비가 아닐 수 없다.

최경창(崔慶昌)은 해주 최씨 전한공파(典翰公派 )

19세 손으로 전라남도 영암출생.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1561년 진사과(進士科), 1568년 문과(文科)에 급제.

관직은 부사(府使)에 그쳤고, 청백리에 올랐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귀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간이 최립(簡易 崔笠) 등과 수창(酬唱)하여

그들을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렀으며,

 

송강 정철(宋江 鄭澈), 만죽 서익(萬竹 徐益) 등과도

절친한 교유(交遊)를 가졌다.

시와 문장에 있어서는 당풍(唐風)지향의

시풍을 진작시켜 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

 

손곡 이달(蓀谷 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린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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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백장 /서재복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2 한주를 마감하는 금요일날 아침시간에
    교훈글을 읽으면서 머물다 갑니다 날씨는 대체로 맑은 날씨를 보이겠습니다.
    오늘부터 FIFA 북중미 월드컵 개막이 KBS 2TV는 오전 11시부터 생중계 응원들 하시길 바람니다.~👌
  • 작성자백장 /서재복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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