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복음’, 다채로운 풀이
본문 이사야 52: 7, 고린도전서 12: 4-6/ 찬송 36(주 예수 이름 높이어), 102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341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교독 8 (시편 19편).
1. 사경회 주제 논의
지난 주일 글로벌 예배에 이어 사경회 주제를 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예람교회답게 활발한 참여가 돋보였습니다. 회의를 통해 우리 교회가 다져온 전통의 무게가 가볍지 않고, ‘예수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식견이 높은 ‘믿음의 기품’을 갖추어야 한다는 지향성과 그 위상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다가오는 사경회 때 나눌 내용을 준비하며 많이 공부하고, 동료 예람들의 발표를 들으며 또 많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예람들이 어떤 내용을 적어 발표할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졌고, 생각하며 배우고 깨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설레게도 되었습니다.
아직 구체화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 논의에 함께하며 저마다 발표문의 얼개도 그려보았을 줄 압니다. 저 또한 그러했습니다. 특히 그날의 설교를 되새기며 조금 더 다듬어볼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사경회 주제의 핵심 항목인 ‘복음’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본문에 터하여 ‘복음’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복음’서의 짜임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이라는 말을 모를 리 없고,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이 낱말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이름을 단 네 ‘복음서’에 대하여 수도 없이 들었을 테니, ‘복음’이라는 말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합니다.
복음서는 한 마디로 ‘예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 그 영향과 여파,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Gospel)은 ‘기쁜 소식’ 또는 ‘좋은 소식’을 뜻하는(베인턴, 「세계교회사」, 53쪽) 그리스 말(Euangelion)이었습니다. 이 낱말이 ‘복된(福) 소리(音)라는 뜻의 ‘복음’으로 옮겨졌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근본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뜻에서 참으로 복된 소식이고, 참으로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이를 일러 ‘좋은 소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인간사에서 말하는 통상의 복이나 기쁨, 좋음과는 구별되는 영원한 ‘근본의 복’이자 ‘근본의 기쁨’, ‘근본의 좋음’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표현으로, ‘구원’의 선포입니다.
복음서는 역사 ‘사실’을 전합니다. 네 복음서 가운데, 마태, 마가,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는 ‘큰 틀’에서 ‘함께, 같이’ 이 사실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공관(共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견주어보면, 기록자의 관심과 목적이 서로 달라 자료의 선택과 배열, 나아가 해석 방식과 내용에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은 이들과 달리 태초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우주의 안목에서 깊은 상징과 은유를 구사하며 기술합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음서는 ‘사실’의 기록만을 담고 있는 문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의 기술 그 속에 담아둔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모두 이 ‘사실’의 의미를 풀이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각기 다른 관심과, 이를 기록하고자 하는 특유의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해, 복음서에는 ‘사실의 기록’과 함께 ‘사실의 해석’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 놀라운 삶을 살았고, 인간을 근본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는 삶의 길을 제시했다는 점은 같지만, 이를 풀어가는 방식과 내용까지 모두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복음서들은 서로 다릅니다. 복음서마다 저마다의 고유한 색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기를 들어, 마태복음은 앞머리에 긴 족보를 적어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임을 강조합니다. 이를 근거로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쓴 문서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러한 족보가 없습니다. 유대의 관습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집필한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예수의 삶을 전합니다. 유대인이라는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 그리스도인, 특히 당대의 지식층을 향해 기록한 책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관복음 이후에 기록된 요한복음에는 사실 그 너머의 신령한 뜻과 신학의 사유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3. 사실과 해석
이처럼 성경은 다채롭습니다. 기록자의 관심과 목적, 그리고 의도에 따라 ‘사실’을 제시하고 이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한 가지 사실 기술로 규격화되어 있지 않고, 한 가지 풀이 방식으로 모형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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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가톨릭과 달리, 종교개혁은 복음서가 지닌 이러한 다채로움에 새 기운을 불어넣었습니다. 롤란드 베인턴은 종교개혁 이후 ‘여러’ 고백 전통이 나타나기 시작한 역사를 상세히 보여줍니다(「세계교회사」, 9~10장). 오직 ‘말씀’을 내세운 종교개혁은 ‘말씀’ 위에 그 어떤 권위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베인턴의 교회사 책을 공부하면서 다시 살피게 되었지만, 개신교 교회는 때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기도 하고,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숱한 분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개혁 전통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제도 권력의 우두머리가 내리는 어느 한 가지 해석을 절대화하거나 강요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말씀’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교권이 독점한 해석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신학자의 이론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화려한 의복을 입고 권위를 부리며 군림하려는 대주교나 교황의 지시와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개신교도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강제된 하나의 해석을 최종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실체에 대한 그 어떤 풀이도 절대화하지 않고, 그 모든 해석에 대해 논의하고 성찰할 여지를 남겨두고자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근본의 결함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함을 가진 ‘한계 존재’로서의 인간이 개입된 현실 세계는 결함을 가진 불완전한 ‘한계 체제’임을 전제한 결과였습니다.
인간이 내놓는 복음의 풀이란 그 어떤 것이든 결코 완전무결하지 못하며, 인간이 만든 조직체가 제시하는 복음의 풀이 또한 그 어떤 것이든 결코 완전무흠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한계를 지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은 겸허히 자기 한계를 고백하며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더 온전한 해석을 향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늘 마음을 추스르고 다집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바탕을 두고 있는 신앙 고백과 그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이 곧 ‘복음’의 절대무오한 완전한 표현이자 해석이라며 우상화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기도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여 찾아낸 하나의 표현이자 해석이며, 신앙 고백이라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겸허함 속에서 복음 해석의 마당이 열리고, 여러 빛깔을 내는 해석들이 피어나옵니다. 이 해석들이 만나 서로 부딪히고 어울리는 길 걸음에서 서로를 존중할 필요성도 깨닫습니다. 이 때문에 개혁주의 전통이 ‘관용’을 품게 되었고, 관용의 세계를 진중하게 존중할 수 있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다]"고 한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 바로 이러한 태도를 뒷받침해 줍니다.
4. 해석과 해석
종교개혁 이후 복음에 대한 여러 갈래의 해석이 가능해졌습니다. 실제로 끊임없이 여러 가지 해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어느 한 가지 해석만을 고집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성경을 자국어로 옮긴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모두가 직접 ‘말씀’을 마주하며 해석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도출된 해석을 스스로 분별할 책임도 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따금 말씀드리듯,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모두 ‘신학하기’의 길에 들어서야 하고, ‘신학하기’의 새로운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종교개혁 전통의 ‘만인제사장론’과 궤를 같이하는, ‘만인 신학자론’이라 부를 수 있는 믿음의 지향성입니다.
비록 우리가 전문 신학자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는 감당해야 할 ‘신학 행위’의 과제가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보여주듯, ‘이제, 여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주님의 삶과 가르침이 무엇을 뜻하고 명하는지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 막강한 로마 제국 밑에서 살았던 초대교회의 교인들처럼, 오늘날 거대한 제국과도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현실의 삶에 의미 있게 이어놓을 것인지 깊이 새기고 풀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신학하기’는 골방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늘 강조하듯,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열린 마음으로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역동의 과정에서 일궈가야 할 믿는 자의 마땅한 삶입니다.
오늘날 복음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는 여러 갈래의 해석과 신앙 고백, 그리고 수많은 신학이 함께 들어서 있습니다. 어떤 이는 순복음교회의 노선을 강조하고, 어떤 이는 회중교회의 전통이 마음에 든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해방신학이 이 시대의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대로 믿는 바를 분명히 세워두고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주장들이 엇갈려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현실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살면서’ 자신의 이해 능력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가는 믿음의 인내를 길러야 할 따름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 역시 예수님의 삶 33년과 그의 공생애 3년의 역사를 빠짐없이 다 기록하지도 않았고 또 다 기록할 수도 없었듯이, 역사 속에서 빗발치는 그 어떤 주장도 스스로의 완전함과 완결됨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만약 이를 내세운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로 치올라 서려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인간의 독선이자 자기 우상화입니다. 결함을 지닌 한계 인간이고 한계 조직이기에, 우리는 겸허히 다양한 해석의 소리에 마음 문을 열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말씀’에 터하여 이 모두를 충실히 살피고 가늠하며 분별하는 ‘해석의 해석’을 멈추지 않고 이어가야 합니다.
5. 맺으며
‘복음’은 다채로운 색깔을 지니고 있으며, 그 겹겹의 층 위에는 수많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 어떤 교회 그 어떤 신학자도 완벽한 단답형으로 정의할 수 없고, 단숨에 풀어낼 수 없는 깊은 가르침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독선의 위험과 그 어리석음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깊은 논의의 대상이자,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신앙의 유산이고 뿌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로 섣부른 결론을 단호히 내리고는 그것이 유일무이한 정답이자 최종의 풀이라며 절대화하곤 합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우둔함 없고, 이처럼 터무니없는 오만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음과 고집불통을 곧잘 저지릅니다. 이는 실제로 우리 교회 안에서 겪어본 아픈 체험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와 성도는 이를 경계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신앙 고백의 전통에 겸허히 마음을 열고, 협소한 자기의 인식 세계를 넘어서고자 분투합니다. 나아가 이 복음이 지닌 다채로운 색깔을 바라보며, 복음이 내는 다채로운 소리를 품고자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처럼 이 복음을 널리 전하며 펼칩니다.
<기도>
하나님,
겸손히 ‘복음’을 마주하기 원합니다.
겸손히 ‘복음’을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겸허히 복음을 새김질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