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조 노부코) 35.
● 제III부 제7장 바위산 벙커
하에바루 탈출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마을 같아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마을은 모든 것이 돌로 되어 있었다. 집도, 울타리도, 곳간도, 마구간도 모두 석조였다. 도로에도 돌이 깔려 있었다. 젊은 여자들이 돌로된 우물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에바루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서는 걷고 싶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들과 동반하기로 결정했다. 후지무라(藤村) 부장이 육군 대위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하에바루 사람들인가요?" 라고 대위가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라고 후지무라(藤村) 부장이 대답했다. "확인차 물었을 뿐입니다. 관계없는 사람을 벙커에 넣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으니까요. 나를 따라와 주세요.” 곧 우리 일행은 바위산의 옆구리를 뚫어 만든 벙커 입구로 안내받았다. 벙커의 입구는 젖어 있었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가 암벽을 타고 흘러내려 입구 부근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벙커 내에서도 물이 새고 있었다. 바다 속의 용궁성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캠퍼스천을 이용해 꾸민 세 개의 변소가 눈에 비쳤을 때 아름다운 환상이 사라졌다. 대위가 벙커의 수용에 대해 상관과 의논하는 동안,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대위는 10분 정도 후에 돌아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아왔다고 전했다. 나는 좁고 작은 벙커 벽을 따라 놓여 있는 벤치가 우리가 일시 머물 장소라는 말을 듣고 실망했다.
나는 벤치에 앉아 물에 젖는 작업화에서 아픈 발을 뽑았다. 내 발과 다리는 지쳐 있었다. 세게 잡아당기자 작업화 끈 구멍의 쇠붙이가 빠졌다. 신발을 벗은 다리를 벤치에서 앞으로 뻩은 채 투박한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후지무라(藤村) 부장이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나는 태양이 밝게 내리쬐는 길, 온통 녹색의 들판, 완만한 언덕, 조용히 흐르는 개울가를 걷고 있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군용 신발이 물을 튀겨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군용 신발 중 하나가 내 앞에서 멈추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노부코(信子) 씨. 노부코 씨군요." 나는 눈을 떴다. 오키나와전이 시작되고 나서 만난 적이 없는 급우인 미츠코(光子)였다. 미츠코 또한 자원 간호사였지만, 하에바루 병원이 아니라 자신의 마을에 주둔하는 군의 위생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학교 때의 그녀는 머리를 예쁘게 묶고, 얼굴색도 건강하고, 밝은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나는 비에 젖어 구겨지고 불결한 옷을 입었고, 머리는 흐트러졌으며, 얼굴은 더럽고, 손톱이 검고 길게 자라고 있었다. 나는 위축되어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미츠코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애처로운 듯한 표정을 하고 다가왔다.
"적이 하에바루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는 게 사실이야. 당신들을 겨냥해서 총을 쏘아 댔다는 게 정말이야?" "진짜야." 옆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자신에게 묻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간호사는 피곤해서 눈을 감은 채였다.
"나라면 무서워서 정신을 잃었을지도 몰라. 이렇게 적에게 근접한 적이 없었어. 함포나 폭탄 소리는 매우 무섭구나. 하지만 이 벙커보다 안전한 곳이 없다고 말하고 있어, 나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만족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단단한 바위산을 뚫고 판 벙커는 겉보기에는 정말 튼튼해 보였다. 청결하기도 했다. 전등갓이 없는 전구가 반짝이며 벙커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연기가 나는 어두컴컴한 석유 램프에 익숙해진 내 눈에는 전기가 너무 눈부셨다.
장교와 군인들이 전등 아래 모여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활기차 보였다. 벙커 안은 시끄러웠다. 활기찬 시끄러움이었다. 하에바루와는 달리 소리지르거나 신음하는 환자들은 없었다. 짜증스럽게 주위를 꾸짖는 군의관도 없었다. 히스테릭한 간호사들의 목소리도 없었다.
늠름한 군화 소리, 장교들이 허리에 찬 군도가 부딪히는 소리, 풀이 빳빳한 군복 스치는 소리 등 여기에는 일본 육군이 건재하고 있는 곳 같았다. "여기는 정말 좋은 곳이네"라고 나는 미츠코에게 말했다. "장교 중에 친구가 있어. 그 사람에게 당신이 여기에 있을 수 있도록 부탁해 볼게" 라고 그녀는 말했다. 누군가가 미츠코의 이름을 불렀다.
"곧 올 테니까 기다려"라고 말하면서 미츠코는 어딘가로 가버렸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곳 벙커가 절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 같았다. 적의 파괴력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조만간 이 곳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 생각할 처지가 아니다. 나는 지쳐 있었다.
마카베(真壁)는 아직 멀다. 조금이라도 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자고 있었는지 모른다. 또 호출을 받았다. 이번 목소리는 나와 함께 하에바루를 출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물이 많은 곳을 찾았어. 함께 가보자. 너도 좋아할 거야."
잠을 깨우는 것은 싫었지만, 물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일어나서 따라갔다. 생각보다 넓은 벙커 안쪽을 들어갔다. 장교들이 피우는 솔잎 담배 냄새가 침대의 캔버스 커튼의 칸막이 넘어로 지나는 사람의 코에 들어왔다. 우리는 벙커 안을 더 나아가 반대편 입구까지 와서 멈췄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낮임을 알 수 있었다.
돌벽의 틈 사이에서 솟아나온 물이 벙커 입구에서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몸을 닦거나 빨래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맨발에 차가운 물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친구가 구급 상자에서 손수건을 꺼내 씻기 시작했다. 나도 씻어보고 싶어졌다. 별로 더러운 것은 없었지만, 이 차갑고 깨끗한 물을 그냥 버려두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지하고 있던 짐들을 펼쳐서 뭔가 씻을 것이 없나 하고 뒤적거려 보았지만 적당한 것이 없어 속치마를 씻기로 했다. 그러다 다음으로 씻은 것은 겉옷, 그 다음은 팬츠, 결국 소지물품 대부분을 물에 담구게 되어 버렸다. (277p)
빨래가 한창일 때, 누군가가 벙커 입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오키나와의 지방 방위대원이었다. 한쪽 팔에 상처를 입고 앙상한 어깨에서 붕대로 매달고 있었다. 붕대가 새것임으로 볼 때의 부상을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젊은 여자가 둘밖에 없음을 보고, 성큼성큼 벙커 안으로 들어 왔다. 한손으로 모자를 벗어 모자의 차양을 잡고 물속에서 모자를 헹구기 시작했다. 친구가 방위대원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가,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 모자, 씻어 줄까요?" "부탁합니다"라고 군인이 부탁했다. 모자가 물에 담긴 부근은 기름이 띠를 만들어 수면에 떴다. 더러운 물이 내 쪽으로 퍼져왔다. 나는 그 기름띠가 내 세탁물에 묻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서둘러 세탁물을 건져 올렸다.
이 사람은 왜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것일까. 우리는 모처럼 좋은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하고 나는 짜증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처 입은 자, 붕대 감은 자, 불구자, 병으로 고통받는 자,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보기싫은 존재들이었다. 나는 친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씻은 모자를 방위대원에게 건넨 후 그의 팔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군인은 앵무새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요, 고마워요."하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붕대가 완전히 풀리자 상처에서 피가 뚝뚝 물속으로 떨어졌다. 친구는 피로 물든 붕대를 빨았다. 물이 복숭아색으로 변했다. 나는 빨래하기를 포기했다. 그녀는 젖은 붕대를 방어병의 팔에 감기 시작했다.
군인은 그녀의 붕대를 감는 손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번에는 상처받지 않은 한 쪽 손으로 상의 단추를 풀려고 했다. "잠깐만요" 라고 그녀는 상냥하게 저지했다. "상의를 씻는 것은 곤란합니다. 바로 마르지 않으니까요. 지금 이곳의 공기가 습한 걸 보니 오늘도 분명 하루 종일 계속 비가 내릴 것 같아요”라며 단추를 풀려는 그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군요. 알았어요" 그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벙커를 떠났다. "저 사람은 뻔뻔하구나" 라고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은 우리 같은 멀쩡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우리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아. 아까 그 사람은 진짜 군인이 아니잖아. 그냥 방어대원이잖아." "안쓰러웠어"라고 친구는 중얼거렸다. 피로 얼룩진 발밑의 물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 사람, 우리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어. 우리 아버지도 방위대에 들어가 있어. 오키나와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을 거야. 본토에서 온 일본군이 친절하게 대해주면 좋겠는데... 이런 얘기 들어 봤어? 오키나와의 젊은 방위대원 중 한 명이 다이너마이트를 팔에 안고 적의 탱크를 향해 뛰어들었대. 일본 본토에서 온 다른 군인들은 모두 떨어져서 바라보고만 있었대."
"아니, 그런 얘기 아직 못 들었어. 하지만 방위대가 잡일꾼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총알을 운반하거나, 장작을 해오거나, 장교들의 팬티를 세탁하거나, 빨래할 물을 운반하고 있다는 것은 들었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올까”라고 친구는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