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 1751년, 종이에 수묵, 79.2 cm × 138.2 cm, 국보216호, 호암미술관 )
인왕제색도는 겸재가 76세 때 그림.
인왕(仁王)은 서울에 있는 인왕산을 말하는 것이고
제색(霽色)이란 큰 비가 온 뒤 맑게 갠 모습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비 개인 인왕산 그림인데
인왕산은 산 전체가 백색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바위산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백색 화강암을 그리려면 흰색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온통 진한 묵으로 그렸습니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 그림을 보다보면 감상자의 시선이 어느덧 자연스럽게 우측 앞에 있는 조그마한 집으로 모아집니다.
그림 감상에서 시선이 모아진다면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분명 화가가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림의 주제이자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저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일까요?
정선이 조선후기 진경산수의 거장 이였다면
사천은 일만 삼천수가 넘는 시를 지은 대문장가이자 진경시인이었습니다.
사천과 겸재는 10대부터 스승인 김창흡 아래 동문수학한 벗이였습니다.
각각 81세, 84세까지 장수하면서 한동네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자란 형제 같은 사이였습니다.
겸재 정선의 '시화상간도' [경교명승첩]中 (1740~41, 비단에 담채, 29 x 26.4 cm 간송미술관 )
사천과 겸재가 마주앉아 시와 그림을 주고 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
서로 바로 보는 표정이 오랫동안 함께했던 지기끼리만 나눌 수 있는 표정입니다.
겸재 자신의 피붙이와 다름없는 사천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겸재는 60여년을 형제처럼 지내온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가 막힌 심정이었을까요.
바로 인왕제색도는 사천 이병연이 어두운 비구름이 개이듯 병이 나아
저 당당한 인왕산처럼 다시금 웅장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낸 그림입니다.
겸재가 사천의 집 주위를 수목들이 호위하듯이 빙 둘러 그려낸 것만 보아도
사천이 병을 이겨내고 당당한 소나무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겸재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겸재 화첩 그림 21점의 여정은 드라마틱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의 작품 수십 점이 독일 땅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유준영(전 이화여대 미대 교수)씨였다.
1974년 독일에서 유학하던 유씨는
당시 성오틸리엔수도원장인 노베르트 베버의 저서인
'금강산 여행기'를 읽다 베버가 갖고 있다는 겸재 그림 사진 석 장을 접했다.
그는 무작정 오틸리엔수도원으로 달려갔다.
선교 문물을 전시해 놓은 수도원 내 박물관 한 켠에서
한국의 고무신.곰방대와 나란히 놓여 있는 겸재의 화첩을 발견했다.
유씨는
"이국 땅에서 조선시대 최고 화가의 작품을 봤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박물관 측의 양해를 얻어 작품 사진을 찍는 등 기록으로 남겼다"고 말했다.
유씨는 이를 바탕으로 '독일에 있는 겸재의 회화,
오틸리엔수도원에 있는 수장 화첩의 첫 공개'(77년)라는 글로
화첩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유씨의 연구에 따르면 겸재의 그림은
베버 원장이 독일로 돌아갈 때 함께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25년 한국에 가톨릭 교구를 시찰하러 온 베버 원장은 금강산 여행 길에
지인들이 구입한 겸재 그림 21점을 선물로 받았고, 이후 오틸리엔수도원에 기증했다.
그림은 수도원의 작은 박물관에 전시됐다.
본래는 하나씩 분리돼 있었으나 독일에서 화첩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오틸리엔수도원을 방문한 한국인들이
수도원 관계자에게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라며
"저렇게 둘 물건이 아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전해진다.
수도원 측은 그 이후 허술한 보안을 우려해
겸재 화첩을 박물관 캐비닛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왜관 성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선지훈 신부는
그 무렵 7년간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수행 생활을 하게 된다.
왜관수도원과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은 본부와 지부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수행자를 교환하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는 오틸리엔이 소장한 방대한 한국 관련 필름 자료와
문화재 등을 접한 뒤 한국으로 가져갈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회가 왔다.
그가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수행할 당시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이던
예레미야스 슈뢰더가 오틸리엔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된 것이다.
수도원 관계자는
"선 신부는 2009년이면 오틸리엔수도원이 한국에 진출한 지
100년이 되는 특별한 해임을 강조하며
특별 행사로 한국문화재의 반환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선 신부는 "설득 과정이 참으로 힘들어 때로는 압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며
"해외에 반출된 문화재를 의미 있게 반환한 선례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오틸리엔수도원 관계자는
"반환을 결정한 직접적 계기는 미술품 경매업체인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화첩에 눈독을 들이고 팔 것을 여러 차례 집요하게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아무리 가격을 올려도
경매업체에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거부했다는 것.
이후 수도원에선 오히려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이 기회에 돌려 주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한다.
크리스티경매 측은 화첩에 50억원이란 가상 경매가를 매기기도 했다고 한다.
◆ 오틸리엔수도원과 한국의 인연=한국에서 베네딕도회는
1909년 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서울에 파견되면서 시작됐다.
27년에는 당시 교회의 필요성 때문에 수도원을
원산 지역 덕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34년에는 중국 옌지에도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전후해 모두 폐쇄됐다.
52년 뿔뿔이 흩어진 수도자들이 다시 모여
베네딕도회 수도회 생활을 시작한 곳이
지금의 왜관수도원이다.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원이기도 하다.
대구=송의호 기자, 서울=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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