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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

작성자송 운|작성시간16.06.17|조회수771,786 목록 댓글 11




 
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을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 글(詩) : 도종환 
▶ 낭송 : 전향미
▶ 편집 : 송 운(松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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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어진할매 | 작성시간 16.06.22 남은날의 삶을 보람있게 살아야겠음을 느낍니다 !
          좋은글 가슴에 담아갑니다. 지기님 좋은날 되시길여~
        • 답댓글 작성자松韻 | 작성시간 16.06.27 고맙습니다 행복하신 여름 되세요
        • 작성자hyj4321 | 작성시간 16.10.16 향수에 젖어들게하는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 많이 보고 싶네요.
        • 작성자송죽암 | 작성시간 17.08.15 시골길과 대문간에 흐드러지게 핀 접시꽃 감상적입니다
        • 작성자삼천궁 | 작성시간 18.02.08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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