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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에도 환꽃 피어

8장 명일 아침 동쪽 마을 고운 빛이 사무치리. 명일조선동투리 明日朝鮮東透里 (2)

작성자봄설|작성시간26.06.05|조회수44 목록 댓글 0
자신의 얼굴을 성형수술로써 괴물 추남으로 변형시키겠다고 으름장놓는 여경 매아리와, 그녀가 고용한 의료인들에게 일장 역사강의를 늘어놓고 있는 김일한

 

 

“자, 자. 기억을 돌이켜 보라고. 고구려 멸망의 일등 공신은, 고구려를 배신해 자기 군대와 고구려 서부(연나부) 백성들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해버린 연남생과 그의 아들 연헌성이라고 했지?”

 

김일한의 얼굴은 보자기에 싸여 있어서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충분히 비감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고구려 멸망 전쟁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휘하 고구려인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앞장서서 최선두로 평양성에 진격한 거야.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연남생의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거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나, 산 자가 묘지명에다 그걸 기록해 놓은 거야. 그 묘지명이 낙양성의 북망산에서 발견되었지.”

 

김일한이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반역요승 신성이 평양성문을 열어준 후, 연남생 부자가 이끄는 고구려 반도군과 신라군이, 평양성의 고구려 군대와 처절한 혈전을 벌였지. 평양성의 고구려 군대는 용감했으나 중과부적이었어. 결국 무너질 수 밖에. 같이 따라간 당나라 군대는 별로 힘도 쓰지 않고 평양성을 점령하고, 그 공을 태반이나 자기들이 다 가로채고 말았지.”

 

실내의 모든 사람이 이제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연남생과 연헌성 부자는 당나라에 들어가 호의호식하며 살게 된 거야.”

 

잠시 주변의 공기 흐름을 감지하고자 말을 멈춘 김일한이 묻는다.

 

“이봐, 여경관! 내 말을 잘 듣고 있는 거야?”

 

그는 주의를 환기시킨 후 다시 그 아리수 대하처럼 도도한 말을 이어간다.

 

“우리 역사를 모르니 그 따위 엉터리 짓으로 죄 없는 사람을 납치해 목숨이나 앗아간다 하고, 혼인을 강요하는가 하면 최악의 추남으로 성형수술을 시킨다는 따위의, 말도 안 되는 멍청한 돌대가리 짓을 하는 거야. 지금이 어느 때야? 국사재현 축제 기간이 아니야? 당신은 내 국사 강의 좀 들어야 해. 에헴!”

 

일한은 다시 기침한 후 말했다.

 

“내가 죽더라도 할 말은 하고 죽겠어. 당나라는, 점령한 고구려 영토에 도호부를 설치해 고구려를 직접 통치하지. 물론 고구려 전체가 당나라에 항복한 것은 아니야. 압록강 이북만 하더라도, 항복하지 않은 고구려 성들이 열한 군데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그 열 한 개 성의 이름까지 다 적시되어 있거든.”

 

실내는 묘한 정경을 이루고 있었다. 침대에 팔다리가 묶이고 얼굴까지 수건에 가려진 한 사람의 포로가, 자유롭게 서있는 몇몇 사람에게, 어른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당당하고 의기양양한 음성으로 훈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항복하지 않은 여러 성들을 포함해 고구려의 백성들이 계속 독립운동을 하는가 하면, 신라도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앞 바다의 혈전에서, 신라까지 삼키려던 당나라 군대를 모두 몰아낸 후, 그에 가세해서 당나라가 직영하는 고구려 영토를 마구 먹었지.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은 물론 그 이북의 일부 고구려 영토까지 그 때 신라가 먹었거든. 그래서 당나라는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거야.”

 

김일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실내의 정경은 환했다. 모두 서서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당나라로 사로잡아온, 고구려 마지막 태왕인 보장왕을 다시, 남아있는 고구려 요동 땅으로 보내, ‘조선왕’이라 칭하게 했지. 왜냐하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만주 땅이 원래 옛 단군조선의 영토였거든. 물론 이건 고구려백성을 달래기 위한 조처였지. 근데, 그 무렵에 송화강 북류의 관문인 우리 여기 백악산아사달 성을 중심으로 해서 송화강 동북 지역에는 대중상이라는 고구려 왕실의 먼 종친이 후고구려, 진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있었지. 당에 항복하지 않은 고구려 십일 개 성 가운데 여러 곳을 아우르고 자기 연고지인 동북을 통합해서 나라를 세웠던 거야.”

 

여기서 김일한은 잠시 대중상에 대해 설명했다.

 

“대중상은 원래 고구려 왕족인데, 백제왕족 흑치상지의 선조가 흑치국의 통치자로 봉해진 후 ‘흑치’라는 성을 부여받게 된 것처럼, 그의 선조도 송화강 유역의 말갈족 통치자로 봉해진 후 고구려 왕족 성인 ‘고高’씨를 박탈당했지. 좌우간 그가 고구려 왕족 혈통이라는 건 <구당서> 등 여러 중국 사서에서도 증언하고 있다고.”

 

김일한의 말은 계속된다.

 

“왕실에서 자기 종친들을 멀리 다른 지역의 통치자로 봉한 후 새로운 성을 부여한 것은, 왕실과 겨루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야. 연개소문의 연씨 가문도 본래 고구려 왕족이었음이 연남생의 묘지명에서 밝혀졌지. 좌우간 당나라에 잡혀 갔다가 당나라 조정에 의해 ‘조선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요동의 고구려 땅으로 돌아가 요동의 통치자가 된 보장태왕은 바로 곁의 진국 대중상에게 몰래 밀사를 파견해서, 힘을 합해 고구려를 다시 부흥시키자고 약속했지. 근데 그 기밀을 당나라 첩자들이 캐낸 거야.”

 

이제는 제법 모든 사람이 주의를 집중해서 듣는다.

 

“당나라 조정에서 보장태왕을 가만 두겠어? 소환했지. 근데, 소환하면 가나? 죽을 길인데? 당연히 거부하지. 그러자 그 옛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우리 조선 땅을 침략해 빼앗은 저 한나라 유철(한무제, 서기전 156-87)의 도적놈들 떼거리처럼, 이 비겁한 당나라 도적놈들이 보장태왕을 사로잡고자 군대를 보내는데, 누굴 보냈는지 알아?”

 

장내는 고요하다. 매아리는 대응을 포기한 듯, 말없이 서 있다.

 

“비겁하게도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연남생의 아들인 연헌성을 보낸 거야. 연헌성은 다시 한 번 고구려반군을 이끌고 가서 무용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보장왕을 사로잡아 오지.”

 

포로 된 김일한에게 자유인들이 일장연설을 듣고 있는 이 장면은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당신들은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그 공로로 연헌성은 황족 외의 인물들에게 주는 작위 중 최고 작위인 변국공에 식읍 3천호를 받고, 우위대장군에다 우우림위상하, 그러니까 당나라 황궁수비대의 장수가 되었지. 그만하면 외국인으로서는 당나라에서 출세할 만큼 한 게 아냐?”

 

그 때 갑자기 김일한이 버럭 언성을 높인다.

 

이봐! 대답해보라고! 그게 사실이야 아니야? 대답이 있어야 강의할 흥도 날 게 아닌가? 맞장구를 쳐야 판소리도 더욱 흥이 나지.”

 

그의 요구에 누군가가 정말로 대답한다.

 

그 말이 맞소. 나도 우리 역사를 좀 알지.”

 

의사 가운을 입은 이에게서 나온 소리였다. 김일한은 원군을 얻어 힘이 난 듯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아, 답답해. 내 입 좀 열어줘. 이거 보자기가 꼭 싸고 있으니 말하기가 곤란하거든.”

 

의사 복장의 인물이 여경 매아리를 돌아보자 여경 매아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간호사인 듯한 여성이 잽싸게 다가가 보자기를 젖혀 그의 입 부분을 열어주었다.

 

“아, 시원하고 감사해요. 그런데 그렇게 출세한 연헌성이 어떻게 죽은 지 알아요?”

 

사람들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자, 일한의 언성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당시 당나라 조정에 내준신(651-697)이라는 측천무후(624-705)의 사냥개가 있었죠. 형리刑吏였거든. 이 사람은 원래 강도강간죄로 감옥에 갇혀있던 자인데, 측천무후가 통치하던 당나라에서 그녀가, 지금부터 수백 년 전의 북조선 김씨 일가와 유사한 공포통치를 하며 밀고를 장려할 때, 밀고에 밀고를 거듭하다가 그 중 하나가 우연히 히트치는 바람에 측천무후에게 발탁되어 벼락출세를 하게 된 사람이오. 얼굴이 꽤나 반반한 남자였거든. 측천무후는 꽃미남들을 좋아했죠.”

 

김일한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말을 잇는다.

 

“그 내준신이 연헌성에게 뇌물을 요구한 거요. 거절했지. 그러자 그에게 역모 죄를 뒤집어 씌워 감옥에 가둔 후 결국 목을 매 자결하게 하는데, 그 때 연헌성의 나이 마흔두 살이었소. 말하자면 측천무후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거요.”

 

김일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당나라 황궁에서 누린 이십여 년의 부귀영화도 결국은 일천 칠백 년 전의 옛날이야기일 뿐이오. 그게 다 어디로 갔소? 호화찬란했던 당나라 장안성과 낙양성의 부귀영화는 모두 어디로 갔소? 이렇게 어리석은 게 인간이오. 그의 이름이 역사책에 기록되었다 하여, 그 시대에 조국에서 이름 없이 평범하게 살다 간 범부보다 더 나을 게 뭐가 있겠소?”

 

그 때 누군가도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를 듣던 김일한이 말한다.

 

“돌연 그 옛날 색불루 임금이 지었다는 시가 생각나오.”

 

김일한은 색불루 임금의 시를 그럴 듯하게 읊조린다.

 

 

血 得 天 下 揚 世 名 혈 득 천 하 양 세 명

喜 見 萬 金 似 露 生 희 견 만 금 사 로 생

千 年 光 陰 擧 一 杯 천 년 광 음 거 일 배

別 有 眞 寶 三 七 中 별 유 진 보 삼 칠 중

 

천하를 피로 얻어 이름을 드날리고

만금 보아 기뻐해도 이슬 같은 인생이네

천년의 세월도 한 잔 술에 지나가니

따로이 참 보배가 삼칠 중에 있다오

 

 

김일한은 사람들이 시 감상할 시간을 충분히 준 후 말을 이었다.

 

“좌우간 매우 슬픈 일이오. 결국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망했다기보다 고구려 자신의 내분으로 망한 거지. 우리나라가 명심해야 할 일이오. 나라가 굳게 뭉쳐있으면 결코 망하지 않소. 이스라엘을 보시오. 그 작은 나라가 자기보다 몇 십 배 큰 아랍 제국諸國에 맞서 싸워 승리한 전설적인 역사를 당신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이승만 대통령이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도 그 때문이오.”

 

그 때 녹의여경 매아리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으니, 당신의 역사 강론은 여기서 멈추어야 해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했어요. 나와의 결혼을 고려하겠다고 약속하면 당신에게 최소한 일주일의 기한을 더 주겠어요.”

 

“잠깐! 그에 대한 답을 드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린 게 있으니 이것마저 말하고 마치겠소.”

 

매아리가 이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다. 김일한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백제를 최후로 평정하고, 토번(티베트)을 막아 중국의 우환을 제거하며, 서경업 경유 형제의 반란을 일거에 토벌할 뿐만 아니라, 돌궐인들을 벌벌 떨게 만든 당나라 장수, 전장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는 희대의 영웅이 누구인지 당신들은 아시오?”

 

“···?”

 

“내 힌트를 하나 드리지. 그 사람은 7세기 백제 인이오.”

 

“흑치상지?”

 

“맞소. 백제 왕족이었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경서를 베개 삼아 잠을 청하는가 하면, 청렴결백해 재물을 쌓지 않았고 부하들을 끔찍이 사랑했죠. 나중에는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해, 당나라 통치자 측천무후까지 그를 시기했죠. 그가 없었더라면 과연 측천무후의 황위가 온전히 보장되었을지 의문이지만.”

 

“하지만 그 사람은 백제를 배반한 사람이 아니오?”

 

“맞소. 잠시 내 말을 들어보시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간 후, 남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흑치상지에 대해서만큼은 비난거리를 찾지 못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그는 문무 양면과 인격 면에서까지 뛰어나게 고상한 인물이었죠. 당나라 고종도 매번 그에게 감탄해 그를 칭찬하고 그를 군자로 대우했지. 당나라에서의 최후 영예는 연국공燕國公에 식읍 3천호였으니, 고구려의 연헌성과 맞먹을 정도로 당에서 출세한 거요.”

 

김일한은 마른기침을 한 차례 한 후 덧붙인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나?”

 

“···?”

 

“뻔할 뻔자지. 토사구팽이야. 그도 역시 측천무후에게 개죽음 당했지. 내준신에 버금가는 측천무후의 또 다른 충견, 혹리酷吏 주흥이 그를 모반죄로 투옥하고 옥중에서 목을 매 자결하게 했지.”

 

장내가 다시 고요하다.

 

“그런 영웅이, 한나라 도적들을 물리친 북부여의 고두막 장군, 수나라 대군을 흩어버린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 일본의 수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조선의 이순신 장군 등과 비견될 수 없는 이유가 뭐요?”

 

“그는 본국을 배신한 자요, 민족 배신자였소.”

 

“그렇소. 고구려 멸망 전쟁에서 당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고구려 출신 연남생, 연헌성 부자나 마찬가지지. 무용절륜武勇絶倫도 좋고, 문무겸전도 좋고, 백전불패 신화도 좋고 도덕적인 고결도 좋고 다 좋소. 하지만 충절忠節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나는 믿소.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의사 가운을 입은 자의 대답이다.

 

“형의 고견을 듣고 싶소.”

 

“그 때는 백제가 썩을 대로 썩은 나라였소. 그런 나라는 망하고 신라에 병합되는 게 차라리 나았소.”

 

“그러면 그가 신라에라도 투항해 민족을 위해 공을 세웠어야 하지 않겠소?”

 

“그것도 편협한 민족주의적 시각이오. 당나라면 어떻고 달나라면 어떠하며 딴 나라면 어떻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해 최선을 다해 살면 그만 아니오? 우리 세계인에게 그런 자유가 없겠소?”

 

“귀하의 말이 일리가 있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민족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국가가 무슨 가치가 있겠소?”

 

“내 말이 바로 그거요. 민족과 국경은 아무런 의미가 없소.”

 

“그렇다면, 민족을 구분하고 국경을 나눈 세계인들이 지금까지 미친 짓을 했다는 뜻이군.”

 

“잘 말했소. 모두 미쳐서 서로가 서로를 나누었소. 사해가 한 동포이며 만민이 한 뿌리요. 민족과 국가를 중시하는 그런 태도가 지금까지 온갖 갈등과 전쟁, 재앙을 가져왔소.”

 

“허허, 그럼 민족과 국가를 없애면 세계의 갈등과 전쟁도 없어진다는 말이오?”

 

김일한이 물었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태반이 사라질 거요.”

 

“난 그리 생각하지 않소. 오히려 민족과 국가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으므로 지금까지 온갖 혼란과 갈등, 전쟁, 살인, 방화 등 지옥의 작태가 대부분 억제되었다는 거요. 그리고 자기 피붙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따라서 민족을 형성하는 것도 자연적인 사회적 본능이며, 국가를 가름하는 것도 역사적인 본능이오. 미안하지만 귀하는 지금 비상식적인 궤변을 늘어놓았소.”

 

김일한이 한숨을 한 차례 내쉰 후 묻는다.

 

“국가와 민족의 모든 구분 및 경계를 없애버리고 전 세계가 한 민족, 한 국가로 통일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 그게 이상향적 유토피아 아니겠소?”

 

“그 말 잘했소. 그런 미친 상념을 품은 자가 지상에 꽤나 있었소. 근세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뾰토르, 독일의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 일본 왕 히로히토 등등이지. 하지만 그들은 전쟁으로 지상에 유토피아를 세운 게 아니라, 한바탕 지옥광기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후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지.”

 

“그들이 힘이 없기 때문에 망했지만 그건 앞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오.”

 

“형씨가 그렇게 믿는다면 나도 그 믿음을 존중하오. 하지만, 그 유토피아, 지상낙원, 천국은 악마의 앞잡이들이 건설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악의 원흉인 사탄을 결박하고 사랑으로 건설하실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오. 그 때 가면 인류는 한 족속, 한 나라가 되어 완전한 지상낙원이 실현될 거요. 하지만 악마의 최종 목표는 유토피아 건설을 핑계대고 지구 인류를 싹 쓸어버리는 거요.”

 

“당신이 그런 비합리적인 미친 종교 신념을 소유하고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오.”

 

의사가운의 남자가 침울한 소리로 말했다.

 

“흥! 그건 피장파장이오. 무력으로 전 세계를 통합해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도 광기어린 종교적 신념이나 마찬가지요. 하지만 당신의 주장과 내 언설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점, 아니 하늘과 땅 같은 차이점이 존재하오. 그게 뭔지 알겠소?”

 

“···?”

 

의사의 대꾸가 없자 김일한이 미소를 짓는다.

 

“내가 말해 주리다. 당신은 불가능한 것을 말하고 나는 가능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 양자의 차이점이오.”

 

“그런 공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미친 종교 관념이 어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거요?”

 

“악마는 신을 이길 수 없지만 신이 악마를 제거하는 것은 맘만 먹으면 식은 죽 먹기보다 쉽소. 내 말이 틀렸소?”

 

“그 자체는 맞는 말이오. 하지만 문제는 인간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줄 신이 없다는 거요.”

 

“당신은 아는 소리가 너무 지나치오. 당신이 신의 부재를 증명할 수도 없으면서 신이 없다고 단언하다니 참으로 딱하오.”

 

“신의 존재도 증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요.”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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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6. 6. 5.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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