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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상도 安東지방 새색시 가마타고 시집 가는 날 - 회원 4,700명 돌파 특선

작성자하니|작성시간11.11.23|조회수32 목록 댓글 0

 

 

 

 

" 경상도 安東지방 가마타고 시집가는 날"

 

우리나라 옛적 안동가마는 주로 작은집 같이 만들어져 그 안에 사람이 들어앉도록 돼있고, 아랫부분에

가마채가 있어 손으로 들거나 끈으로 묶어 메고 사람이나 물건 등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던 도구로 사용되었다.

가마는 고대 이집트의 그림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들 그림에 의하면 고대 페르시아인들도 ‘가마’를 사용했던 것으로 

해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高句麗) 고분 벽화와 신라시대(新羅時代)의 기와에 새겨진 그림 등에서

나타나 삼국시대에 이미 가마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시절 내고향의 새색시는 대게 9살 전 후였다.

 

 

 9살 새색시

 

 

 잔치 구경 온 동네 어르신네들

 

 

당시의 시아버지 시어머니

 

9살 새색시

 

 

 아홉살 새색시

 

 

아홉살 새색시 

 

옛가마가 등장(登場)하기 전의 교통수단으로는 말과 수레가 있었다.

말을 타는 관습은 삼국시대(三國時代)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왔지만,

중세 이후에는 수레를 대신하는 탈것으로 가마 종류가 널리 이용되었다.

 

 

        ▲ 당시 안동지역 꽃가마의 모습.

 

고려도경에는 당시 중국

(中國) 황제가 고려에 보내는 조서를 맞이할 때 이것을 봉안하는 채여(彩輿)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는 이들을 태우기

 위한 견여(肩輿) 등 가마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서는 ‘가마’ 이용이 양반관료

사회에 보편화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회현동의 ‘회현방’에는 여러 가지 ‘가마’만을 취급하는 전문상점인 교자전

(交子廛)을 두기도 했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동차가 일반화(一般化)되기 이전인 196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마을단위로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큰 것과 작은것 두틀의 가마를 필수적(必須的)으로 갖추어 두고 공동으로 관리하면서 혼례(婚禮) 때마다 약간의 비용

을 지불하고 사용하였다. 경상도 안동지방에는 신랑(新郞)이 안동가마를 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의 안동가마는

 장식이 별로없으나 신부(新婦)가 타는 가마는 채색(彩色)이나 술 등에서 신랑것과는 달리 화려하게 꾸몄다.

이를 꽃가마 또는 신부가마라고 한다.

 

  안동지방 양반 규수가 타고 다니는 화려한 꽃가마

 

신랑이 가마를 타던 시절에는 신랑이 안동가마를 타고 신행(新行)길에 오를때

신랑을 보호하고 가는 상객(上客 ; 신랑의 아버지)도 안동가마를 탔고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갈 때도 신부의 상객(上客 ; 신부의 아버지)이 ‘가마’를 탔다.

이때 신부의 가마에는 흰천으로 휘장을 두르고, 뚜껑에는 호랑이 가죽이나 쓸개를 얹어서 잡귀(雜鬼)를는다.

 

 

경북 안동에서 안동가마를 메고 갈때는 네사람이든 두사람이든 서로 발을 맞추어야 하며

먼길을 갈때에는 피로를 덜기 위해 권마성(勸馬聲 : 발을 맞추기 위해 부르는 노래) 소리를 하고 간다.

대개의 경우 ‘안동가마’의 전면과 측면은 모두 종이로 막혀있으며 덮개 측면(側面)에는 술이 달려 있고 지붕은

녹색 융단(絨緞)으로 덮여 있다. 안동가마는 안동 사람들에 있어 특히 즐거움을 예고(豫告)하는 하나의 도구였다.

처녀가 ‘가마’를 타는 날은 모두가 기다리던 신나는 잔칫날이었기 때문이다.

시집가는 장본인(張本人)은 설렘으로 기다리고, 가족들은 오랫만에 모이는 가족과 친지(親知)들을 만나는

즐거움에 기다리고, 아이들은 또래의 동네 개구장이와 함께 배불리 먹고 뛰노는 즐거움에 손꼽아 기다렸다.

 

 

특히 안동에는 마을처녀가 안동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날은 동네 개구장이들이 더 없이 신나는 날이었다.

쌀 한가마를 주고 이웃마을에서 사온 돼지가 끓는물에 들어가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전을 붙이고 떡을치고

떡국을 끓이며 누구나 배불리 먹을수 있는 잔칫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녀가 안동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날은 마냥 행복(幸福)하고 신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마을 또는 이웃마을에서 또 다른 신행(新行)이 동시에 있을 경우는 먼저 출발하는 가마가 복을 더 받을수

있다는 전설(傳說)에 따라 가마행렬을 먼저 출발시키기 위해 자정(子正)이 넘자마자 서두르기도 했다. 때문에 몇날

몇일을 설렘에 잠못 이룬 처녀들은 더욱 피곤에 지쳤고 때로는 길에서 가마끼리 마주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안동지역은 요즘처럼 길이 넓지도 않던시절 가마행렬은 북쪽 길을 점령해야 한다는 습속(習俗)에 따라 가마꾼은

서로 이쪽 길을 차지하기 위해 밀어붙이기 싸움을 강행(强行)하여 양편이 크게 다치는 불상사도 불러왔다.

이 때문에 때로는 안동가마 속의 신부(新婦)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불상사(不祥事)도 발생했었다.

사정이 이쯤 되면, 신부에 따라서는 그 날만은 천상(天上)의 선녀처럼 가장해야 할 본분을 잊고

상대방(相對方) 신부와 머리채를 움켜쥐고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외국인도 안동지방에 오면 의무적으로 잔통호례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꿉동무 계남이 누나와

분례 누나가 가마를 타기 그 꼴을 보지도 당하지도 않기는 했었다.

그시절 그 광경(光景)을 구구절절이 소개하려면 파일이 너무 길어질것 같아 김세레나가

부른 갑돌이와 갑순이 그리고 이연실이 부른 새색시 시집가네’(제일 뒤쪽에 게재)로 대신한다.

갑돌이와 갑순이부터 먼저 음미한다

 

 

안동에서는무명천으로 창문을 ‘X’ 자로 묶은것은 액(厄)을 쫓는

풍속의 일환으로 신부에게 일체의 불결한 기운이 범접치 못하게 하려는 주술이다.

시간부터 외간 남자는 물론 일체의 잡신의 접근을 금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행길 중에 성황당을 지나게되면 이 천을 잘라 하나씩  매어 달고 간다.

이토록 숭고하고 고결한 의식을 치른 신부가 어떻게  지아비를 등지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겠는가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될수밖에  없을 것이다.

 

싸움이 벌어지는 이유는 상대방의 기세(氣勢)에 밀리거나 싸움에 지면

가마에 타고 있는 사람이 운수(運數)가 사납고 불길하다는 속신(俗信)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다른 가마에 밀리지 않도록 경험이 많고 힘이 센 가마꾼을 구하는데도 애를 쓰곤 했었다.

 

 

  ▲ 최근 안돈지방에 다시 부활하는 꽃가마.

 

 안동에서 새색시가 안동가마를 타는 날은 일생을 통해 가장 슬픈날이 되기도 한다.

가요(歌謠)에 등장하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경우처럼 피를 토하는 상실감과 낭패감(狼狽感)으로

첫날밤에 신랑과 신부의 품에 안기거나 안고서도 한없이 울어야만 했었다.

 

어릴적 매일 같이 신랑각시로 동디깨비하던 갑순이가 내를 건너고 재를 넘어 시집가는날 뒷동산

늙은 감나무를 끌어안고 통곡(痛哭)하던 갑돌이의 모습은 해거리로 사람을 바꾸어 연출(演出)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안동에서는 이토록 사랑과 기대와 기쁨 그리고 슬픔을 교차(交叉)하게 하던 가마와 가마타던 날도

교통수단(交通手段)의 발달과 함께 지난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도시마다 속속 들어서는 현대식 예식장(禮式場)에서

식을 올리고 있고 자가용을 이용하여 국내 관광지나,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濟州島)나 해외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풍속도로 변모해 버렸다.

 

때문에 이제 안동가마는 그 형체조차 자취를 감추어 추억(追憶)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고 TV의 사극 영화속, 민속촌, 박물관(博物館) 등에서만 겨우 구경할수 있게 되었다.

 

 

 ▲ 안동지방에서 사용하던 사인교.

 

그러면 여기에서 안동가마 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안동에는 특히 가마가 널리 이용되었는데, 관리들의

품계(品階)에 따라 가마의 차등을 두는 교여지제(轎輿之制)가 시행되기도 했다.

 

가마의 종류로는 왕(王)이 타던 연(輦)과 가교(駕轎), 왕비와 공주(公主)나 옹주(翁主)가 타던 덩, 종2품 이상이

타던 외바퀴 수레인 초헌(軺軒) 혼인때 신부가 주로 타던 사인교(四人轎), 포장이나 덮개가 없이 의자와 비슷하게

생긴 남여(藍輿) 초상 중에 상제가 타던 삿갓가마(草轎) 지붕위에 사방을 장막으로 친 보교(步轎)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금보(金寶)나 옥책(玉冊) 등을 운반할 때 사용하던 용정자(龍亭子)

왕실에 의식이 있을때 귀중한 물건을 운반하던 채여(彩輿) 음식을 나르던 가자(架子) 등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이르는 안동가마는 일반적으로

백년해로(百年偕老)를 다짐하는 신부가마를 그 전형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이 경우 신랑은 ‘가마’를 타지 않고 당연히 말을 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실제로도 옛적의 신랑들은 거의가 말을 타고 다녔다. 당시의 안동에서는 신랑과 신부들이 대체적(大體的)으로

10세전후의 어린이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고 장가와 시집을 갈때는 그 행색(行色)이

부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상민(常民)들의 자녀들이 신랑과 신부를 놀려주는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새색시 타고 갈 가마

 


 

새색시 고름 매는 순간 

 

 

 

 

 

     새색시 가마 타고 시집 가는 날

 

 

 

아래는 안동 전통혼례식 - 안동경안여자정보고(경안여상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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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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