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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이인충(李仁忠)

작성자삼가동의 멋|작성시간11.12.19|조회수209 목록 댓글 0

이인충(李仁忠)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무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회지(誨之).

증조부는 이귀산(李貴山)이고, 조부는 이속(李續)이며, 부친은 이근건(李根建)이다. 첨지(僉知) 이인문(李仁文)의 아우이다.

1451년(문종 1) 신미증광사마시(辛未增廣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1455년(세조 1)에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했다. 1464년(세조 10)에 갑신춘당대문과(甲申春塘臺文科)에 병과(兵科) 1등으로 급제하고, 1467년(세조 13)에 저작겸선전관(著作兼宣傳官)이 되었다.

이 해 장수의 재질이 있는 자 30인을 뽑았는데 그 가운데 뽑혀 《손자(孫子)》를 공부했다. 1474년(성종 5)에 행사용(行司勇)이 되었고, 이듬해 행부정(行副正)으로 윤대하였고, 또 봉정대부(奉正大夫)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이 해 헌납의 신분으로 허계(許誡)의 투옥이 부당함을 아뢰고, 1476년(성종 7)에는 지평(持平) 서근, 장령(掌令) 이숙문(李淑文)·손비장(孫比長) 등과 한명회(韓明澮)의 죄를 논핵(論劾)했지만 윤허 받지 못했다.

그 후에도 김수온(金守溫), 황효원(黃孝原) 부자의 처벌을 청하는 등 헌납(獻納)으로서 직분에 충실했다. 그 후 이조정랑(吏曹正郞), 평양서윤(平壤庶尹) 등을 거쳐 1480년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사직(司直),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역임하였다. 1481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으나, 5월에 병으로 승지(承旨)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어서 김세적(金世勣)동부승지(同副承旨)로 대신하고, 이인충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잠시 물러났다.

그러나 곧 12월에 절충장군(折衝將軍)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부임하였다. 1482년 경상도병마사 왕종신(王宗信)과 함께 덕도(德島) 개간을 건의하여 허락 받았고, 1484년(성종 15) 통정대부(通政大夫) 행강릉도호부사(行江陵都護府使)에 올랐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진건면(眞乾面) 신월리 솟골에 있다. 아들 이희급(李希伋)은 1582년(선조 15) 임오식년문과(壬午式年文科)에 병과(兵科) 23등으로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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