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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발 (李元發) 議政公 (기일 음력 6월 10일 제향 음력 10월10일)

작성시간08.05.05|조회수84 목록 댓글 0

이 원발 (李元發)     議政公 (기일 음력 6월 10일 제향 음력 10월10일)

초명은 총(寵),호는 은봉(隱峯),본관은 연안(延安)이고 고려 공민, 공양왕때 벼슬하여 관위는 전공판서(典工判書)  이르렀으나 고려의 운세가 날로 쇠퇴해지자 강개한 나머지 정치에 뜻을 잃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지우로는 원운곡(元耘谷)이 있는데 덕과 의가 투합하여 5~6일씩 함께 묵으면서 지냈으나 집안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한다. 한번은 노복에게 노자를 두둑히 주어 청석동(靑石洞) 동구로 보내 대기하고 있던 사람에게 우마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주고 오게 하였는데 이 사람은 운곡 원천석으로 원발에게 하직하고 치악으로 떠나는 길이였다.

그의 둘째 아들(貴山)이 관동에 재임할 때에는 봉록을 나누어 운곡의 거처로 보내 주었는데 이는 부친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잠저 시절에 친교가 있어 그가 임금으로 등극한 후에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좌의정을 내렸으나 끝내 응하지 않아 여조에 대한 신하로서 지조를 지켰다.

그가 하세하자 고산현(全北 完州郡 高山面 西 社稷壇後) 燒酎峙에 초장하였다가 세종 21년 4월(1439년) 구성(駒城 지금의 龍仁)의 남쪽 구수동(九水洞 지금의 二東面 西里 불당골) 해좌원(亥坐原)에 천장하였다.

비문에 “오호라 사람이 불우함은 명도요 시대가 불운한 것은 천운이다. 공은 정의와 대도로 공민왕조에 벼슬하여 재덕이 크게 쓰일듯하였는데 그러지 못하였고 벼슬은 열경에 그쳤으며 공양왕이 즉위한지 몇 해 안되어 시골에 숨게 되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랴!

공은 변란의 시대를 당하여서도 높다랗게 우뚝 서 금석을 꿰뜷었으며 신명과 통하였으니 그 출처 진퇴는 뇌락 광명하여 지성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큰일에 다달아 대의를 결함에는 지정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은 잠덕과 의절을 겸하고 있었으니 이것만으로도 불후함이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인군 인물지)

부인은 강덕군 송양군부인 成川金씨(기일 음력8월18일) ,

참고로 延安李氏 太子詹事公派의 상계족보를 보면

시조공 茂 (唐 中朗將 延安侯)

중시조 습홍(襲洪) 극영(克榮) 경무(景茂) 승안(承顔) 정공(靖恭)

        元發-귀령(貴齡-강호공)-4개파

            -귀산(貴山-판서공)-14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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