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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산(李貴山) 13??∼1424(세종 6)

작성시간08.05.05|조회수85 목록 댓글 0

이귀산(李貴山)  13??∼1424(세종 6)

조선의 문신,자는 흥서(興瑞)요 호는 괴은(槐隱,塊隱)이니 연안인(延安人)이다.
봉익대부 전공판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원발(元發)의 아들이이며

강호공 귀령(貴齡)의 아우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말을 익힐 무렵에 이미 책을 읽을 줄 알아 어른들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스승앞에 나아가 수업하기 수년에 스스로 지업(志業-경국제세의 학문)에 힘써 문장이 일취월장하였다.

태조때에 과거에 올라 관은 태종 11년 신묘에 강원,전라,갑오에 경상관찰사등 도관찰(都觀察)을 거쳐 형조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특히 태종 13년 계사에 제조가 되어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조(軍調)와 도성수축에 참여하고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의 풍해에 공이 컷고 심만양병등 많은 창안과 진언을 통해 태종등 4조를 역임하며 국초 창업의 기틀을 닦는데 공헌하였다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말년에 용인 구수동으로 물러나 두그루의 괴목(훼나무-또는 느티나무)을 심고 스스로 괴은(槐隱-진안영모각에는 (塊隱)이라 하며 마치 삿갓쓰고 밭갈며 강가에 낚시하니 범인들은 존귀한 분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한다.

세종6년 갑진에 돌아가시니 왕이 부의를 후히 전하시면서 아끼던 인재를 잃었다고 매우 애도하였다 한다

최근 용인 구수동을 둘러 보니 부인 김씨의 묘는 그대로 모셔저 있지만 공의 묘흔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근을 여러곳 찾아 보았다. 공의 묘원과 함께 나의 파조 별좌공 묘소도 구수동에 실전으로 전해저 반드시 찾아야 겠다는 신념으로 관리인과 더물어 찾아 보았으나 없다. 

가까운 곳에 재상의 묘소에만 사용 할 수 있는 동자석과 마멸된 비석조각이 산재하여 있고 이를 방치한 체 아무도 거두는 이가 없어 황량한 분위기에 부인 김씨할머님의 고독한 심사가 더욱 애절해 지면서 못난 자손이 되어 여기를 찾아온 내마음만 가슴을 친다.

한편 고의 후손의 묘원이 부근에 있어 상고해 보니 판관공의 묘원으로 보이기는 하나 그자손들의 종적이 묘연하여 알 수 없었다.

기록에 보니 판관공 후손이 누대를 이어 판서공 내외분 묘원을 보살펴 왔다는 사실이 있기는 하나 그 기록이 이미 수백년정의 기록이라 그 이후의기록에 대하여는 모호하다.

판관공 후손도 부근 마을 기곡에 살고 있다지만 누차 찾아 보기는 하였어도 아무도 사는 이가 없다. 제천에 집거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직은 확인하기 어렵다.

또 용인 시미리에 의정공 삼부자의 흔적이라할 쌍괴나무를 찾아보니 지금도 두포기의고목이 거의지칠대로지친 모습으로 완전한 고목이 되어 다시는 소생하기 어려운 빈사지경에 있음을 보았다. 마침 촬영도구를 챙기지 못하였음이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다. 종중간의분쟁이 자심한 이때에 조산님들의극진한 우애의 모습이 남은 흔적이라도 후세에 남겨보고자 아쉬운 심정으로 다시 그 모습을 살려보고 싶다. 훗날 영명한 후손이 이를 바탕으로 대동단결하는연안이씨의 위상을 상상하면서...       별좌공 후 이 관희 (2008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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