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어>를 압축 표현한 것이 <(너가 성공하기를) 바래>입니다. <바래>는 <바라-+-이>의 결합형으로 <-이>는 <-고 있어>라는 뜻입니다. 이때 <-이>는 “말하는이의 소원이나 당부를 나타내는 간절한 심리작용이 부여된 것”입니다.
○ 너가 꼭 성공하기를 소원해(=소원하고 있어)/기원해(=기원하고 있어)/축원해(=축원하고 있어)/당부해(=당부하고 있어)/부탁해(=부탁하고 있어)...
○ 너가 꼭 성공하기를 빌어(=빌고 있어)...
○ 너가 꼭 성공하기를 바래(=바라고 있어)...등
처럼 어간 뒤에 <-고 있어>의 압축형태 <-여/어/이>가 결합하여 간절한 심리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압축하지 않으면 그대로 <소원(/기원/축원/당부/부탁)하고 있어>와 <바라고 있어>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하위차원인 표기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상위차원인 사람살이 말글문화와 언어심리학적 문제인 것입니다.
<자라[長]고 있어>는 <*자래>, <만나고 있어>는 <*만내>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현재 상황만 서술할 뿐, "말하는이의 소원이나 당부를 나타내는 간절한 심리작용이 부여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물론 반말이 아닌 온말인 경우에는
○ 너가 꼭 성공하기를 소원한다(=소원하고 있다)/기원한다(=기원하고 있다)/축원한다(=축원하고 있다)/당부한다/부탁한다...
○ 너가 꼭 성공하기를 빈다.(=빌고 있다)...
○ 너가 꼭 성공하기를 바란다(=바라고 있다)...등
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일 경우는 <자라자, 만나자, 바라자...등>처럼 쓰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라-+이>바래"와 류사한 압축은 <앉아 있다>의 옛말 "안잿다<안자잇다”와 현대말 <여기에 있다>의 “옛다<예있다”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촉급함>을 드러내는 심리 효과”와도 무관하지 않은 데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바라>는 어간만으로 끝나는 낱말 “가[去]<가아, 자[眠]<자아, 자라[長]<자라아, 만나<만나아...등”처럼 <바라아>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1. 너가 훌륭하게 자라기를 바래(=바라고 있어).
라 해 왔지
○2. 너가 훌륭하게 자라기를 바라(=바라아).
라 해 오지 않았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는이의 간절한 소원이나 당부를 드러내는 형태소 역할을 하는 <-이>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바라>라 해야만 말글규정에 맞다고 하니 말글살이하는 배달겨레는 이를 수용하기보다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말뜻[어의]이 다르고 말맛[어감]이 다른데다 그 동안 써 왔던 관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글규정이란 <합리성, 보편성, 일관성, 편의성, 교육가치성, 문화력사전통성>을 지녀야 말글살이를 하는 배달겨레에게서 큰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라 하면 다른 말들의 용례와 같이 <일관성, 보편성>은 있을지 몰라도, "말뜻[어의]과 말맛[어감]을 정교하게 드러내는 <합리성, 교육가치성, 실용성, 문화력사전통성>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가고 있어, 자고 있어, 자라고 있어...등”은 객관적인 행동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에 “바라고 있어>바래”처럼 “가고 있어>*개, 자고 있어>*재, 자라고 있어>*자래...등”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는 무엇인가 말끝이 닫히지 않은 미흡한 표현이라면, <바래>는 <-이>로 인해 말끝이 닫힌 완전한 표현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례적으로 써 오던 <바래>를 <일관성, 보편성>에만 눈을 두고 <바라>로 바꾸려 할 것이 아니라, 관례대로 쓰도록 하는 것이 배달겨레 말글살이 문화력사적으로 보아 타당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2가 아니라
○관례에 따라 1로 쓰도록 해야 하는 것
입니다. 말이란 참으로 오묘하면서도 신비한 것만큼 <아> 다르고 <어> 다른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