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01
씬1. 바닷가 (부감)
지평선이다. 가득한 먹구름들이 수평선 가득히 몰려오고 있다.
카메라 천천히 팬하여 보여주면 폭풍전야를 예고하듯 엄청난 바람이 해안 모랫벌을 휩쓸어 오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로 그 수를 헬 수 없는 무수한 군마가 백사장을 덮으며 나타나고 있다.
카메라 서서히 빨려들 듯 다가가면........
씬2. 그 바닷가
환선길의 기마부대를 선두로 하여 궁예의 대 부대가 자욱한 모랫바람을 일으키며 진군해 오고 있다.
말을 탄 병사 하나가 수기를 흔들면서 끝도 없이 몰려오고 있는 대군 사이를 쾌속으로 질주하며
본진의 영을 전하여 달리고 있다.
병사1 : (큰 소리로) 제 1--- 마군, --- 좌----향! 제 1 마군, 좌---향!
그러자 앞의 기수 하나가 복창을 하며 전령의 영을 접수한 듯 수기를 흔들며 환선길에게 전하고 있다.
병사2 : 제 1 마군------, 좌------향!
그러면 선두에서 부장단에 에워쌓여 기마군을 인솔해 가고 있던 장수 환선길이 방천화극을 꼬나쥔 채
전령을 보고 고개를 끄덕하고는 다시 소리 지른다.
환선길 : 방향을 틀어라!
그러자 대군의 선두가 바닷가를 벗어나 좌측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무수한 깃발이 모래사장을 덮으며 끝도 없이 펄럭이고 있다.
수백필의 기마대가 방패와 창을 꼰아쥔 채 질서정연 하게 선두를 서고 있고
그 환선길의 기마부대에 이어 궁예를 에워싼 미륵군의 본진이 대장군기와 함께 가고 있다.
궁예는 백마에 승복을 입었고 검을 찼다. 한 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리고 머리를 깍은 그의 모습은 완연한 전투 차림이다.
그 주변으로 궁예의 군사이며 심복 장수들인 종간과 은부가 함께 가고 있다.
그들은 대군의 방향이 바닷가를 벗어나 산악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따르고 있다.
뭔가 끄떡이는 궁예. 잠시 하늘을 보더니 주변을 본다. 가득히 그의 군대가 물결처럼 출렁이며 따르고 있다.
수천의 깃발과 행열 속에는 여러 장수들의 모습도 차례로 스쳐 지나간다.
선봉인 기마대를 이끌고 가는 환선길에 이어 궁예의 본진이 지나가고
이어서 백옥삼(훗날 배현경), 홍술(홍유), 복사귀(복지겸), 이흔암, 신훤, 원회 등이 각자의 깃발과 부장들을 거느리고 가고 있다.
행열이 그렇게 길게 지나쳐 가면...
씬3. 산야 (부감)
하늘은 여전히 흐려있고 때때로 천둥번개가 때려오기 시작한다.
카메라 팬-다운하면 서서히 드러나는 산구릉과 기암괴석의 능선들...
물안개가 자욱한 계곡길을 대군이 개미떼처럼 넘고 있다.
대군의 뒤를 쫓아 궁병, 창병, 공병들의 중장비들도 질서정연하게 뒤를 잇고 있다.
그 뒤로는 군량미 따위를 실은 수레와 석포, 운제등 병기부대가 따르고 있고......
씬4. 그 산야 어느 곳
숲 속에서 숨어 있던 신라군의 첩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경악한 표정이다.
그의 시야로 궁예의 수천 대군이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며 움직이는 것이 한 눈에 보여온다.
아예 계곡을 지나 온 벌판을 물들이고 있는 궁예의 대군에 첩자는 겁에 질려 뒷걸음치며 도망치듯 달려간다.
씬5. 그 산야 어느 평원
저만큼 비탈로 끝없는 개활지가 보인다. 그 평원 저쪽으로 강이 흐르고 있다.
산 계곡을 넘어 온 궁예군의 깃발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미 환선길의 선두 기마부대는 궁예 본진의 수기에 의한 지시에 의해
좌향정군, 우향정군, 소리를 복창하며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고
‘대미륵성전(大彌勒聖戰)’ ‘불국정토(佛國淨土)’의 깃발과 함께 궁예가 전면 중앙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각 대열의 장군들이 주변 으로 몰려든다.
그들 모두 평원의 강 쪽을 본다. 천둥과 번개, 바람 소리는 점차 극렬해 지고 있다.
적진을 보고 있는 궁예의 날카로운 외눈이 반짝이고 있다.
종간 : 장군.. 철원이옵니다.
궁예 :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종간 :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궁예 : .....
종간 : 대 고려의 시작이옵니다.
궁예 : .....!
씬6. 그 강변의 철원군 진지
신라군의 방어선인 철원성의 전진 기지이다.
궁예군과의 사이로 강을 앞에 두고 있고 곳곳에 망루와 목책 장애물을 세워 강을 건너 올 궁예군을 대비하고 있다.
그들 뒤로 아득히 철원성의 외곽이 보이고 있고.....
씬7. 그 곳
멀리 물보라를 일으키며 군사 하나가 신라군의 기를 등에 꽂은 채 급하게 강을 건너오고 있다.
점차 가까워지면 그는 궁예군을 정탐했던 첩자다. 그는 강을 건너 수많은 목책과 군사들 사이를 지나 계속해 달려간다.
야전 지휘탑에 이르자 첩자가 말 고삐를 힘껏 당겨 세우며 군례를 올린다. 말이 앞 발을 들며 몸부림친다.
장수들이 보고 있다.
장수 : 정탐을 나갔던 병사가 아닌가? 무슨 일인가?
첩자 : (급하게) 장군, 대군이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미륵의 군사들이옵니다.
장수 : (놀라) 뭐라, 미륵의 군사가 벌써
첩자 : 시각을 다투는 일이옵니다. 소인은 성주님께 가 뵈어야 합니다.
첩자, 다시 말잔등을 차며 부리나케 성 쪽으로 달려간다.
장수들, 그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는데 강변 목책진지 쪽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장수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면.... 눈이 점점 커지며 경악스런 표정을 짓는다.
저 멀리 깃발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흙먼지가 날리고 시커먼 군사들이 개미떼처럼 모습을 점차 드러낸다. 궁예의 대군인 것이다.
장수들,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보다가.....
장수 : (두려움으로) 적이 왔다. 적군이 왔다. 전투 준비하라! 준비하라!
북소리가 다급히 울리기 시작한다. 소라 소리도 다급하다.
군사들이 일제히 술렁거리며 부산해진다.
지휘탑의 장수는 표정이 굳어져 있다. 그것은 공포와도 같다.
씬8. 강변 건너편 (궁예)
궁예가 높은 곳으로 올라 건너편의 목책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과 천둥, 번개소리는 여전히 드높다.
종간이 궁예를 바라보며 명을 기다린다. 궁예, 종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종간 : 각 군은 진을 세우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환선길이 우렁찬 목소리로 ‘진을 세우라!’ 소리치면
각 부대의 전령들이 영을 받아 말을 달리며 계속해 전하고 있다. 그리고 북소리가 울려퍼지고 소라 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친다.
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진을 세우기 시작한다.
궁예, 그 가운데 서서 말없이 저 편을 응시하고 있다. 한 쪽 뿐인 그의 눈이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다.
궁예의 그 엄숙한 표정 위로...
해설 : (E) 단기 3229년. 서기로는 896년인 신라 진성여왕 10년의 그해 여름,
궁예는 제세구민의 구호를 내어걸고 대군을 일으켜 마침내 철원성에 이르렀다.
신라의 김춘추가 삼국을 통일한 지 230여년이 흐른 때였다. 이 때의 신라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진골 귀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은 오랫동안 끝없이 이어져 왔고,
백성들은 계속되는 가뭄과 전염병, 날로 가중되는 조세 압박에 시달리며 곳곳에서 도적이 되거나 난을 일으켜
조정에 대항했다. 그리고 신라의 귀족들이며 동시에 지금의 도에 해당하는 각주의 도독과 총관들 역시도
힘없는 중앙 정부에 등을 돌리며 나름대로의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 했으니
이른바 영웅들의 출현을 예고하는 춘추전국시대가 도래 하였던 것이다.
그들 중 훗날의 주인공 왕건은 이때만해도 소리없이 송악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옛 백제 땅인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서는 견훤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일어나 왕을 자칭하고 있었으며,
옛 고구려 지역은 바로 궁예가 이처럼 승려의 몸으로서 군사를 일으켜 지금의 강릉인 명주를 점령하고 철원까지 이르니
통일 신라의 옛 고구려 땅 상당부분이 신라의 지배권에서 멀어져 궁예의 손안에 들게 되었다.
이는 곧 후삼국의 태동을 알리는 그 전조였다. 그랬다. 그것은 새로운 삼국 시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종간 : 장군께서 철원성을 점령하시면 신라는 북으로 향하는 대동맥이 끊기는 것이옵니다.
궁예 : ..........
종간 : 북쪽 옛 고구려의 영토가 모두 장군의 영을 받들게 될 것이옵니다.
궁예 : 송악까지는 이르러야 할 것이오.
종간 : 송악은 작은 고을이옵니다.
궁예 : 작은 고을이라... 결코 그렇지가 않소이다.
종간 : 허허허... 장군답지 않으십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송악을 잘 아시는 장군이시옵니다.
궁예 : 허허허, 그건 그러하오. 송악이라..... 땅은 작지만 그곳이야말로 대호가 숨어 있는 곳이에요. 큰 호랑이 말이요.
종간 : 장군, 이 땅에 큰 호랑이는 장군 외에는 아무도 없사옵니다. 송악의 왕륭은 이미 늙은 삵쾡이에 불과 하옵니다.
궁예 : ......
종간 : 대업이 눈 앞에 있사옵니다. 지난 인정에 연연하지 마시오소서.
이번 전투가 끝나면 장군께서는 대왕으로 불리우실 것이옵니다. 대왕이시옵니다.
궁예 : .......(미소)......
씬9. 철원성 앞
첩자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다. 등에 꽃혀 있던 깃발을 뽑아 흔들며 목이 터져라 외친다.
첩자 : 성문을 열라! 급전이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성문이 열린다. 첩자, 그 안으로 쏜살같이 빨려들어간다.
카메라, 첩자의 뒷모습을 쫓다가 그대로 성문을 넘으면 성안의 모습이 펼쳐진다.
첩자, 중앙로를 따라 장대(장군들의 지휘소)쪽으로 달려가 말을 멈추고 뛰어 내려 그 위로 올라간다.
씬10. 장대 안
성주와 수하 장수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첩자가 뛰어 들어와 부복하며 군례를 올린다.
첩자 : 성주님, 급보이옵니다. 수만의 적도들이 이미 강가로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놀라는 성주와 제장들.
부장1 : 수, 수만이라 했느냐?
첩자 : 예, 군사들의 수가 끝도 없었사옵니다.
성주 : 수기는 보았느냐?
첩자 : 예... 대미륵성전, 불국정토라 쓰여 있었사옵니다.
성주 : 미륵....성전?
부장2 : 궁예의 미륵군이 틀림없사옵니다.
성주 : 음..... (주먹을 불끈 쥔다) 도대체 지원군은 어찌 아무런 소식도 없단 말인가?
(첩자에게) 너는 이 길로 송악성으로 가거라. 철원성의 사정이 풍전등화와 같으니 속히 군사를 보내라 이르거라.
이를 어길 시에는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 전하라.
첩자, 대답하고 일어서려는데......
성주 : 아니 아니다. 부장이 함께 가시오. 전령 혼자 보내서 될 일이 아니오.
장수(황) : 예.
성주 : 반드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지원군을 데려와야 할 것이오.
장수(황) :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황장군, 첩자와 함께 밖으로 나간다.
장수들, 말이 없다. 모두 겁에 질려 긴장한 표정이다.
성주 : (서탁을 치며) 뭣들 하고 있는 게요? 속히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하시오!
장수들, 대답하고 일어나 나가면 성주와 부장1, 2만이 남는다.
북소리가 긴장을 고조시키며 울리기 시작한다.
성주 : ....미륵이라....미륵군이라.... (고개를 저으며) 미천한 중놈이 감히 미륵을 참칭하다니......
부장1 : 성 밖에 나가 있는 방어진이 얼마나 버틸까 모르겠사옵니다. 그 때까지 지원군이 와야하지 않겠사옵니까?
성주 : .......
부장2 : 저들이 과연 지원군을 보내겠사옵니까?
성주 : .......
댓구를 하지 못하는 철원 성주의 그 착잡한 표정 위로 북소리는 계속 다가오는 전투를 예고하고 있다.
씬11. 그 강변
부감으로 보여오는 궁예군의 위용.
바람 소리는 여전하다. 이미 전군은 진용을 갖추고 있다.
종간 : (E) 그리 오래 끌지 않을 것이외다.
씬12. 휘장 안
사각으로 둘러싸인 휘장이 심한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다.
궁예를 중심으로 여러 장수들이 키낮은 의자에 앉아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다.
종간이 한 쪽에서 지휘봉으로 커다란 가죽지도를 가리키고 있다.
종간 : 적은 이미 사기를 잃었소이다.
모두들 : .........
종간 : 첨병의 보고에 의하면 적의 주력군은 성으로 통하는 이 길 강 언덕에 집중되어 방어진을 치고 있소이다.
하지만 이곳을 직접 공략한다면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것이니 위계를 써야 할 것이외다.
궁예 : ......
백옥삼 : 위계라 하십니까, 군사?
종간 : 그렇소이다. 이 쪽은 수심이 깊고 천혜의 요새라서 만만치가 않습니다. 반면에 우측은 일견 튼실해 보이나 허장성세지요.
이렇게 멀리 우회해서 후위를 치면 손쉽게 붕괴될 것입니다.
환선길 : 허허 이것 참..... 이보시오, 군사. 뭐가 그리 복잡하오이까?
명만 내리시오소서. 이 환선길이에게 선봉을 맡겨 주시면 단숨에 성문을 열겠소이다.
궁예 : ......(미소).....
종간 : (미소)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전력을 다한다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철원성의 군사들은 신라의 정예병들이예요.
이흔암 : 저들의 전력을 너무 높이 평가 하시는 게 아니오이까? 우리는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져본 적이 없는 불패의 군대요.
신훤 :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다릅니다. 저 성은 신라의 진골 출신이 지키고 있소이다.
환선길 : 허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요? 진골이든 개뼉다귀든 다 늙고 지쳐있는 시체 덩어리들에 불과하외다.
원회 : .......
복사귀 : 실제로 염려되는 것은 평주와 송악 일대의 군사력입니다.
그들이 철원의 군사들과 합세 한다면 어려운 전쟁이 될 겝니다.
궁예 : ........
백옥삼 : 저들 후방의 병력은 대략 어느 정도라 하오이까?
종간 : 평주의 군사가 천, 송악이 오백을 조금 웃돈다 하고...
신천, 백주, 패강진 등의 군사를 모두 끌어 모으면 한 이천쯤 될 것이오.
백옥삼 : 이천이라....
종간 : 그들은 철원을 지원하지 않을 겝니다.
궁예 : ...(물끄러미 바라본다)......?
홍술 : 군사께서 그걸 어찌 장담하실 수 있소이까?
종간 : 예전에 대장군과 소생은 송악에 잠시 인연이 있었소이다.
그 사람들은 불구덩이 속을 제발로 걸어들어올 만큼 아둔하고 무모한 사람들은 아니외다.
홍술 : ........(끄덕인다).....
궁예 : 얘기는 이쯤 끝내도록 하십시다. 여러 장군들께서는 모두 지형과 적의 동태를 숙지하셨소이다.
모두들 : ..........
궁예 : 그러나 부처님 세계에서는 천지간에 피어있는 하나의 들꽃도 그 생명이 소중하다 하셨소이다.
하물며 사람의 목숨이겠소이까?
제장들 : .......?
궁예 : 저들도 우리의 대군이 온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니 일단은 전령을 보내 설득해 보십시다.
환선길 : 장군, 저들이 순순히 항복하겠사옵니까? 소장에게 선봉을 주시오소서.
이흔암 : 아니옵니다. 이번에는 소장이 선봉을 맡겠사옵니다.
배현경 : 그렇지 않소이다. 이번에는 소장이 앞을 서오리다.
종간 : 허허허... 선봉은 장군님의 영을 따라야 할것이요.
환선길 : 전령을 보내는 일은 소용이 없을 터인데요...
궁예 : 그래도 보내도록 하시오. 적이든 아군이든 사람의 목숨은 모두 귀한 것이오.
전투는 전령이 다녀온 다음에 결정될 것이오. 모두 돌아가 영을 기다리시오.
모두들 : 예......
씬13. 그 강변
궁예군 소속 전령 네명이 궁예기와 백기를 들고 벌판을 달려가고 있다.
궁예와 종간들이 지휘소에서 멀리 사라지는 전령들을 보고 있다. 그들이 막 강을 건너가고 있다.
씬14. 그 목책
목책을 지키고 있는 신라 병사들이 멀리 강물을 건너 다가오는 전령들을 보고 술렁거린다.
궁예의 전령들은 이윽고 저만큼 목책 지휘소 진지 아래에 서서 백기를 두어번 흔든다.
장수 : 웬 놈들이냐?
전령1 : 우리는 전령이오. 궁예 대장군의 영을 가지고 왔소.
장수 : 용기가 가상하구나. 감히 여기가 어느 곳인 줄 알고 찾아왔느냐?
전령1 : 우리는 다만 대장군님의 뜻을 전하러 왔을 뿐이오.
장수 : 대장군? 초적의 괴수가 대장군이라. 하하하하.....
전령2 : 우리는 의로서 일어난 군사들이오. 초적의 무리가 아니오.
장수 : 뭐라?
전령1 : 우리 대장군께서는 피를 원치 않으시오. 거룩한 미륵 성전에 그대들도 동참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자고 하시오.
장수 : (일그러지며) 지금 투항을 하라고 하는 게냐?
전령1 : 투항이 아니오. 미륵불의 가르침을 따라 의로운 길을 함께 가자는 것이오.
장수 : 하하하, 네 이놈, 미륵이라니? 그 애꾸놈이 미륵이란 말이냐?
전령2 : 말씀이 지나치시오. 지금껏 어느 누구도 우리 군사들을 막지 못했소.
장수 : (버럭) 네 이놈! 듣자듣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천하의 상것들이 감히 여왕폐하의 군대를 겁박하려 들다니...!
전령2 : 살길은 그것 뿐이오. 저항은 곧 죽음이오.
장수 : (분이 넘쳐) 이 이놈이 그래도... 내가 우리 성주님의 뜻을 대신 전하여 주마.
갑자기 전통의 화살을 뽑아 날린다.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모두들 경악하는 표정이다.
전령2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말 위에서 떨어진다.
전령1이 굳어진 채 본다.
전령1 : 적의 사자를 죽이는 법은 없소이다. 후회할 것이외다.
장수 : 네 놈마저 죽여줄까?
전령1 : ........
장수 : 가서 전하라. 너희들은 결코 이 성을 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뒤에는 많은 대군이 있느니라.
반드시 너희 도적의 무리를 응징해 관의 지엄함을 보이겠다는 것이 우리 성주님의 뜻이니라. 알겠느냐?
전령1 : .....후회하게 될 것이오. 이것은 대장군님의 마지막 권고시오.
장수 : 어서 돌아가지 못할까!
전령1, 분노의 표정으로 말에서 내려 전령2를 그의 말에 싣고 자신도 말에 올라타 돌아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장수가 혼자 큰 소리로 웃어댄다. 그러나 철원군 병사들은 멀어지는 전령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아득한 그들 쪽으로 희미한 햇줄기가 먹구름 속에 져가고 있다. 여전한 천둥 번개 소리.
이윽고 웃고 있던 장수의 얼굴에도 불안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 장수가 자신의 목책 뒤를 멀리본다. 바람 소리.. 바람 소리...
씬15. 장대
바람 소리는 여기서도 극성이다.
성주와 부장1, 2가 앉아 있다. 침통한 표정들이다.
부장1 : 성주님, 해가 저물고 있사옵니다.
성주 : ......
부장1 : 궁예의 사자가 다녀간 것은 최후의 통첩이 아니겠사옵니까?
성주 : ........
부장1 : (초조하여) 지원군은 아니올 것이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소식이 없을 수 있사옵니까?
성주 : .....(한숨).....
부장2 : 참으로 불충한 자들이옵니다. 도적이 폐하의 영토를 욕보이고 있는데도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니요?
성주 : .....조금 더 기다려 보세..
부장1 : 그 자들은 아니올 것이옵니다.
성주 : ....
부장1 : 조정에서 명이 내려와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따르지 않고, 저희들의 세력을 부풀리는 데만 충실하지 않았사옵니까?
부장2 : 그러하옵니다. 평주의 박지윤만 해도 그렇사옵니다. 얼마간의 군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오만하기가 그지없사옵니다.
스스로를 대모달이라 한다 하지 않사옵니까? 그것은 고구려의 장군이란 뜻이옵니다.
이미 신라인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성주 : 하지만 그들 모두 아직은 폐하의 신하일세.
부장1 : 아니옵니다, 성주님. 지원군은 없사옵니다.
성주 : ......송악의 왕 성주는 어떠한가?
부장1 : 왕륭 그 사람은 본시가 장사꾼이옵니다. 지금의 벼슬도 서라벌과 연결하여 어거지로 주운 것이 아니옵니까?
그 사람은 아니옵니다.
성주 : ....(한숨)....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평주의 박지윤도 아니 오고, 송악의 왕륭이도 아니 온다면...
부장들 : .......
성주 : 대체 어쩌다가 대 신라국이 이토록 도적의 말발굽 아래 밟히게 되었단 말인가?
지원군이 오든 아니 오든 우리는 싸울 것일세. 최후의 일전을 준비토록 하게..
부장들 : .......(마지못해) 예, 성주님..
성주, 입술을 깨물고 멀리 송악 쪽을 바라본다.
씬16. 송악의 예성강 포구 길
이곳에서도 먹구름 사이로 핏빛 낙조가 숨어들고 있다.
철원성의 전령들이 숨가쁘게 말을 몰아 예성강 포구를 지나치고 있다.
지나치던 백성들이 불안하게 보고 있다.
그대로 성내 쪽으로 달리면....
씬17. 송악 읍성 길
철원의 전령들이 말을 달려오고 있다.
그들은 작은 성문을 지나 드디어 송악 성주 왕륭이 있는 관사로 다가간다.
씬18. 왕륭의 관사 앞
이미 전시 체제를 갖춘 장졸들이 다가오는 그들을 막아선다.
군사들의 우두머리인 장수장이 앞으로 나선다.
장수장 : 무슨 일이요?
장수(황) : 물렀거라. 철원성에서 왔느니라.
장수장 : 철원성에서 무슨 일로 오시었소?
장수(황) : 네이놈! 철원성에서 왔다지 않느냐? 어서 비키지 못하겠느냐?
그 때 왕식렴이 문 안에서 나와 그리로 다가온다. 장수장이 예를 올리며 비켜준다.
왕식렴 : 웬 소란들인가? (보고) 무슨 일이요?
장수(황) : 급한 일이오. 속히 성주님을 뵙게 해 주시오.
왕식렴 : 성주님은 지금 다른 성의 여러 어른들과 논의 중이시오. 무슨 일인지 내게 말씀하시오. 전해드리리다.
장수(황) : 한 시가 급한 일이오. 철원성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소이다. 적도들이 턱 앞에 와 있소이다.
어서 성주님께 안내해 주시오.
왕식렴 : 중요한 일을 논의 중시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계셨소.
장수(황) : 급한 일이라 하지 않았소?
왕식렴 : 아니되면 아니 되는 것이오!
장수(황) : 뭐라! (검자루에 손이 가면)
순간, 장수장과 송악 군사들이 장수(황)를 가로막는다.
장수(황) : 이.. 이런 자들을 보았는가?
왕식렴 : 말씀은 전해드릴 터이니 그만 돌아가시오. 아마 자리가 길어지실 게요. (돌아서간다)
장수(황) : 이런 자들이 있는가, 이런... 적군이 목전에 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송악의 군사들은 여전히 거대한 장벽처럼 무표정하게 버티고 있다.
씬19. 동 내아 별실 앞
변씨, 마씨, 왕평달이 별실 쪽을 보며 대기해 서있다.
그리고 거구의 유금필이 무표정하게 검을 쥔 채 기다려 서있고......
씬20. 왕륭의 집 안/별실
왕륭과 왕건 부자, 강씨와 연화, 박지윤과 그의 아들들인 박수문, 수경 형제, 유장자(유천궁), 왕평달,
그리고 장자1, 장자2들이 모여 있다. 모두들 침통한 표정으로 말이 없다.
박지윤 : 이제 가부간 결정을 내야하지 않겠소이까?
모두들 : ...(말없이 눈치들만 보고 있고).....
박지윤 : 허... 답답들 하시구려... 왜들 말씀이 없으십니까?
장자1 : 지금까지 아무도 궁예의 미륵군을 이기지 못했소이다.
유장자 : 허면 궁예에게 목을 내놓자 이 말씀입니까?
장자1 : 목을 내놓다니요? 내 듣기로 궁예는 투항한 자들에게 아주 관대하다 하였소이다.
왕건 : .......
강장자 : 하지만 그 사람이 과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관대할지 모르겠소이다.
장자2 : 그렇게 속단할 일이 아닙니다. 명주만 해도 신라 구주의 하나올시다. 그 큰 성의 성주 김순식이도 궁예에게 무릎을 꿇었고
그리고 여전히 성주로서 그곳을 다스리고 있다지 않습니까?
유장자 : 그렇기는 하지만은 속사정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 무슨 거래가 있었겠지요..
박지윤 : 어쨌든, 궁예가 대병을 이끌고 철원까지 왔소이다. 우리는 뭔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장자2 : 결국 공연한 희생을 치룰 필요가 없다는 데는 모두가 동감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목숨과 재산이 아니겠소이까? 궁예가 그것만 보장해 준다면.....
왕륭 : ......(뭔가 생각에 잡혀 있다) 궁예라... 궁예...
왕건 : .......?
강장자 : 궁예 그 자는 가난한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농민군이 몰려든다는 거예요.
왕건 : .........
박지윤 : 왕성주의 생각은 어떻소이까?
왕륭 : ......답답할 뿐입니다. 이 몸은 이미 늙었소이다. 이 송악의 모든 대소사는 내 아들 건이가 하고 있어서.....
박지윤 : 그렇다면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왕건 : 워낙 중대하고 다급한 일이라서 그저 여러 어르신들의 말씀을 경청할 뿐이옵니다.
박지윤 : 허허, 이것 참..... 철원이 떨어지고 나면 다음은 우리들 차례올시다. 시간이 없소이다. 뭔가를 결정해야 해요.
왕륭 : ........궁예라..... 궁예라.... 승려 출신이라고 했던가요?
씬21. 강변/궁예 진영 (밤)
해는 저물어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다.
바람은 계속해 불어대고 있고, 간간이 천지를 가르는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전령들이 전령2의 시신과 함께 있다. 궁예와 장수들이 보고 있다.
전령1 : 장군.... (오열한다)
궁예 : (다가가 시신을 어루만지며) 상대의 사자를 죽이다니 참담한 일이로고...안타까운 일이야....
(눈물이 글썽이며) 피를 흘려서 어찌하자는 것인가?
종간 : .......
궁예 : 딱한 일이로다. 참으로 딱한 일이야...
모두들 : .......
궁예 : 이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희생을 막고자 했던 성스러운 죽음이로다. 부처님의 가호가 있을 것이니라.
도솔천에 올라 영생불멸할 것이니라. 나무서가모니불....
궁예가 정중하게 한 손을 들어 합장을 한다. 군사들이 말위의 시체를 끌고간다.
궁예는 이내 차가운 표정이 되며 제장들을 돌아본다.
환선길 : 장군, 소장이 뭐라고 하였사옵니까? 영을 내리시오소서. 내 이놈들을... (방천화극을 부서져라 쥐며 목책 쪽을 노려본다)
제장들 : 영을 내리시오소서.
종간 : ......
궁예 : ......
모두들 불타오르는 눈빛이다.
천둥번개에 드러나는 궁예의 모습이 섬뜩하다. 궁예의 눈빛도 일렁이고 있다.
궁예 : 무지몽매한 자들이 피를 원하니 어찌하리오, 어리석음을 일깨워줄 밖에... 각군은 영을 대기토록 하오.
장수들 : (일제히) 예...!
궁예 : 선봉은 이번에도 환장군이 맡도록 하오.
환선길 : 은혜가 백골난망이옵니다, 장군.
종간 : 각군은 전투태세를 갖추라!
은부 : 전투태세를 갖추랍신다!
궁예의 비장한 그 모습 위로 북소리가 들려온다.
씬22. 동 장소
높은 곳에서 한 군사가 거대한 북을 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 소라 소리가 울려퍼진다.
군사들, 분주히 움직이며 전열을 정비한다.
기마대들이 한 편에 정렬을 하고, 창병과 보병들도 대열을 갖춘다. 그리고 운제와 석포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침내 전열이 정비되면 궁예가 높은 곳에 올라 선다.
궁예 : 장졸들은 들으라! 우리가 칼을 든 것은 미륵의 세상을 이루기 위함이니라.
미륵이 무엇인가? 헐벗지 않으며 굶주리지 않으며 무서움과 절망이 없는 낙원의 세상이니라.
그대들의 처자와 그대들 자신이 살 땅을 건설하는 것이니라.
저들이 누구인가? 그대들의 처자를 죽이고 그대들의 곡식을 빼앗고 그대들을 헐벗고 굶주리게 하여
거리로 내쫓은 자들이 아닌가? 이제 그대들의 것을 되찾을 것이니라. 그리하여 영원한 낙원의 세계를 건설할 것이니라.
함성이 이어진다. 마치 부처님을 마주하듯 군사들은 하나로 동화되어 두 손을 치켜들며 열광하고 있다.
제장들과 종간도 보고 있다.
그들은 마치 홀린 듯 감동처럼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궁예를 본다. 그에겐 절대적인 위압감과 위엄이 보인다.
궁예 :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들이 흘린 피는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니라.
그대들의 생과 사를 부처님께서 맡고 계시느니라.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랴.
함성이 또다시 터져나온다. 종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다.
궁예 : 나는 미륵의 현신으로 왔느니라. 미륵부처가 하실 일을 내가 맡았느니라.
그대들을 위해 죽을 것이며 그대들을 영원한 피안으로 이끌 것이니라.
진군하라. 모두 두려워 말고 싸워라. 부처님께서 그대들의 등 뒤에 서 계시느니라. 진군하라.
궁예의 말을 받아 진군하라는 복창이 이어진다.
제1대인 선발부대인 환선길의 기마부대가 지축을 울리며 앞서가기 시작한다.
깃발이 파도처럼 물결치고, 북소리와 소라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장졸들을 내려다보는 궁예의 그 신념에 찬 표정에서......
씬23. 강변 벌판
칠흑 같은 어둠이다. 수 백필의 기마대가 앞장을 서 나가고, 창병, 보병이 뒤를 따른다.
기마대는 어느 쯤에서 양편으로 갈라져 환선길과 백옥삼이 각각 군사들을 이끈다.
그리고 그 중앙으로 창병과 보병이 나아간다.
수천개의 횃불이 밤하늘을 수놓고, 깃발들도 춤을 춘다.
씬24. 그 곳 강가
희미한 달빛 아래 기마대가 빠른 속도로 적의 진영으로 달려가고 있다.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 물살을 헤치며 적진으로 뛰어드는데.......
씬25. 강변 건너
어둠 속으로 수를 헬 수 없는 군사들이 몰려오자 아연 실색하는 철원 군사들. 모두들 공포에 질린 모습이다.
장수가 칼을 빼들고 전투를 독려한다.
장수 : 각자 자기 위치를 사수하라. 화병들은 불을 준비하라. 궁병은 화살을 쏘아라!
철원군, 파도처럼 밀려오는 궁예군의 선봉 기마대를 향하여 화살을 비처럼 퍼부어댄다.
몇몇 군사들이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강물에 처박히지만 기마대는 지옥의 전령들처럼 계속 돌진해 들어간다.
목책에서 밑으로 비탈을 타고 수많은 불덩어리들이 굴러내려온다. 아비규환이다.
그러나 궁예군은 희생을 내면서도 목책 가까이로 접근하고 있다.
씬26. 그 전장의 어느 곳
궁예가 그의 본진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투를 보고 있다.
온 벌판과 계곡이 들끓고 있다.
씬27. 그 전장터
환선길의 기마대가 마침내 목책에 이르러 장창으로 철원군사들을 찌르고, 베고, 목책을 무너뜨린다.
순식간에 철원군의 왼쪽 방어선이 뚫리고 만다.
뒤이어 창병이 근접전투를 벌이고, 목책들이 치워지고 불살라지기 시작한다.
접전이다. 필사적인 양측의 접전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마치 여포와도 같은 환선길의 방천화극이 눈부시게 번쩍이고 있다.
그 때마다 적병들의 머리가 마치 공처럼 굴러떨어진다.
전장은 넓어 온 벌판이 아비규환이다. 곳곳에서 궁예 장수들의 위용이 돋보이고 있다.
드디어 전령을 죽였던 신라군의 장수와 환선길의 싸움이 붙는다.
환선길 : 네 이놈, 신라의 졸개야 내 창을 받거라.
장수 : 어서 오너라. 이 역적 놈들아.
치열한 접전이다. 그러나 수 십합의 교전 끝에 신라의 장수는 목숨을 잃는다.
환선길 : 적장이 죽었다. 돌진하라. 돌진하라.
계속해 어둠 속을 돌진하는 환선길의 부대. 지리멸렬하는 신라군들.
백병전은 이어지고 있다.
씬28. 철원성 안/장대
저 멀리 보이는 어둠 속 강변에서 곳곳에 불길이 치솟고 있다.
성주와 부장1, 2가 지켜 보고 있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다.
부장1 : (긴장해서) 예상대로인 것 같사옵니다. 적도들의 수가 너무도 많사옵니다.
성주 : ......
그때 급히 뛰어들어오는 전령.
전령 : (급하게) 성주님. 적군이 사면으로 몰려들고 있사옵니다. 우측 방어선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사옵니다.
성주 : 뭐라? 그 쪽으로 예비부대를 투입하라. 우측을 막아라! 그 쪽이 뚫려서는 아니되느니라. 부장이 직접 가라.
부장1 : 예, 성주님..
부장1이 가고나면 성주의 표정은 초조와 긴장으로 어쩔 줄 모른다.
불바다다. 그의 시야로 들어오는 저 멀리 방어진은 천지가 불로 덮혀 있다.
씬29. 그 곳 방어진
전장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온 산야와 벌판이 혈전에 소용돌이 치고 있다.
신라군의 패배가 확연히 보여지기 시작한다.
궁예가 여전히 정황을 살펴보고 있다. 종간은 미소를 짖고 있다.
궁예가 고개를 끄떡이자 그들 본진이 서서히 움직여 앞으로 나가기 시작 한다.
씬30. 그 곳 어느 곳
철원성의 부장1이 급히 한 떼의 군사를 몰고 성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미 곳곳이 시체로 덮혀 있다.
얼마쯤을 달려가는데 어디선가 함성이 터지고 있다.
백옥삼을 선봉장으로 오른편 산 쪽으로 우회한 기마대가 지축을 흔드는 듯한 함성과 함께
그들의 전열을 무너뜨리며 돌파해 오고 있다.
그들은 곧 치열한 접전을 벌인다. 그러나 부장1은 수 십합의 접전 끝에 그예 백옥삼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러자 신라군이 ‘우’ 흩어지며 도망친다.
백옥삼 : 진격하라! 저 쪽 능선의 진지를 점령하면 바로 철원성이니라.
사기가 오른 궁예군이 닥치는 대로 철원군을 베고 찌른다.
씬31. 그 곳 다른 쪽
환선길의 기마대가 적진을 휘젓고 달려오고 있다.
홍술, 복사귀, 신훤, 원회 등도 창병, 보병들을 독려하며 적군을 무참히 유린하고 있다.
곳곳에서 불길이 일고 있다. 목책이 송두리째 무너진다.
환선길 : 진군하라! 성문이 멀지 않았다. 계속 진군하라!
군사들은 그렇게 달려가고 어느 계곡 큰 길에 이를 무렵
저만큼 계곡 벌판을 가로질러 한 떼의 군마가 달려오고 있다. 백옥삼의 부대이다.
환선길 : (보다가) 오 백장군,
백옥삼 : 방어진을 넘으셨구려? 우리도 적의 후미를 궤멸시켰소이다.
환선길 : 철원성의 함락도 얼마 안남았구려. 하하하...
그때 군사들의 사이를 가르며 은부가 이끄는 호위대를 따라 유유히 다가오는 궁예.
제장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린다.
환선길 : 장군, 철원성이 보이옵니다. 이미 방어진은 무너졌사옵니다.
궁예 : 수고 하셨소. 군사들을 재정비 하도록 하오.
환선길 : 예.. (제장들에게) 각군은 전열을 정비하시오.
장수들이 대답을 하며 일제히 흩어진다.
궁예는 여전히 멀리 있는 철원성을 보고 있다.
씬32. 철원성/장대
피투성이가 된 전령이 급히 들어와 쓰러지듯 부복한다.
전령 : 성주님.. 성밖의 방어진이 무너졌사옵니다.
성주 : (참담하다) ....!
전령 : 방어진의 진장은 전사하였사옵고, 성주님께서 보내신 부장님 또한 전사한 것으로 아옵니다.
성주 : .......
부장2 : 성주님, 일단 성을 버리고 피하시오소서. 후일을 기약하시오소서.
성주 : 도대체 송악으로 간 전령은 어찌 되었단 말이냐? 송악으로 간 전령은 어찌 되었어?
부장2 : 성주님, 그들은 오지 않사옵니다. 지원군은 없다하지 않았사옵니까?
성주 : 배은망덕한 놈들.. 제 놈들도 신라의 벼슬을 받은 자들이건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부장2 : 미륵군이 성밖으로 몰려들고 있사옵니다. 피하시오소서.
성주 : 닥치거라! 나는 왕실의 후예이며 신라의 화랑이니라. 이 성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이야.
북을 치거라. 싸우라 하라.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라 하라.
부장2 : 성주님!
성주 : 어서 북을 쳐라! 모두 성곽을 지켜라.
북소리가 최고조에 이르기 시작한다.
궁예군의 석포는 이곳까지도 날아들어 모든 것을 부수기 시작한다. 군사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아우성이다.
부장2는 절망적으로 눈을 감는다.
적군들의 불빛이 점점 몰려들고 있다. 그것은 온통 불야성이다.
씬33. 송악/왕륭 집 외경 (밤)
송악의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도열해 영을 기다리고 있다.
집안의 곳곳에 횃불이 훤히 밝혀져 있다. 그것은 무거운 침묵이다.
박지윤(E) : 지금쯤 철원성이 함락되었을 것이오.
씬34. 동 집 안/별실
계속해 자리해 있는 그들.. 온통 표정들이 굳어있다.
강장자 : 그렇게 되었겠지요. ..... (눈치보다가) 이제는 우리 차례가 아니겠소이까?
왕륭 : .......
유장자 : 오랜 시각을 이렇게 모여 있었소이다. 철원이 함락되었다면 우리도 뭔가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니겠소이까?
장자2 : 우선 목숨이나마 부지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게 아니겠소이까?
유장자 : ........
장자1 : 어차피 신라는 끝이오. 사방이 들끓고 있소이다. 무진주의 견훤, 북원의 양길, 그리고 궁예..
이제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오. 우리는 그 중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오이다.
이번에 궁예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도 우리를 보존해 줄 것이오. 아니 지금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될 지도 모르지요.
강장자 : .......과연 그렇게 해 줄까요?
박지윤 : 허허허. 비로소 갈 길이 정해진 모양이외다.
모두들 : .......?
박지윤 : 결론이 난 것 같으니 이 사람은 그만 일어나보겠소이다.
박지윤과 그의 아들들이 일어난다.
유장자 : 나도 그만 일어나야겠소이다.
강장자 : 이보시오들.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지 않소이까?
박지윤 : 서로의 심중을 알았으면 됐지 더 무엇이 필요하겠소이까?
강장자 : 허지만.
박지윤 : 한 시가 급하오이다. 평주성에선 지금 이 사람만 기다리고 있소이다.
강장자 : 허.... 이거야...
왕륭 : .........
박지윤 : 모두들 다시 뵙기를 바라오이다.
모두들 그런 박지윤을 본다.
박지윤 부자가 나가자 눈치를 보고 있던 유장자, 장자1, 장자2 들이 헛기침을 날리며 일어선다.
남아 있던 강장자가 왕륭 부자를 빤히 보다 입을 연다.
강장자 : 철원성은 끝이 났소이다. ..... (사이) 모두들 궁예 쪽으로 결론을 낸 것 같지 않사옵니까?
왕륭 : ........
강장자 : 궁예의 미륵군은 대병이올습니다. 어찌 하시려는지요?
왕륭 : 글쎄올시다.
강장자 : 기왕에 투항을 하시려면 남보다 빨리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왕륭 : 글쎄올습니다. 궁예라.. 궁예... 허허허 그 자가 그 참...
강장자는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일어난다.
연화도 눈치를 보며 왕건과 시선을 주고 받다가 일어난다.
왕건 : 가시겠사옵니까?
강장자 : 어쩌겠는가? 살 길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저 그럼 이만...
그제서야 왕륭은 일어선다. 왕건과 함께 그들을 배웅한다.
왕륭 : 조심해 가시구려.. 연화도 잘 가거라.
연화 : 예, 성주님..
씬35. 동 밖
강장자 모녀 나오면 왕건이 밖까지 배웅을 한다. 연화의 시선이 각별하다.
대기하고 있던 유금필이 다가와 강장자에게 예를 올리며 앞선다.
강장자 : 이보게 건이.
왕건 : 예. 장자어른.......
강장자 : 송악의 운명이 달린 일일세. 이번 일은 처신이 빠르면 빠를수록 득이 클 것일세. 아버님께 잘 말씀 드리게.
왕건 : 예, 장자어른...... 연화 아씨 잘 가시오.
연화 : 예... 다시 뵙겠습니다.
왕건과 밖에 있던 왕식렴, 장수장들이 강장자에게 목례를 올려 전송한다.
그들 속에는 왕륭의 3가신인 왕건의 무예사부 변씨. 글공부 스승인 마씨. 왕륭의 동생 왕평달들이다.
왕건 : 모두 안으로 드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모두 왕륭이 있는 별실로 들어간다.
왕건은 답답한 듯 하늘을 본다.
왕건 : (혼잣소리로) 궁예가 오고 있다. 태풍이 몰아치듯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다. ......
(사이) 모두들 그가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다. .....(사이) 우리는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가 오고 있다는 것을........
궁예... 그 사람이 드디어 천하를 훔치기 시작했다.
씬36. 철원성 밖
궁예가 어둠 속에 포진해 영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군대를 보고 있다.
모두들 성을 바라보며 긴장을 누르고 있다. 횃불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종간 : 군사가 재정비 되었사옵니다.
궁예 : .........
종간 : 장군, 이제 입성을 해야할 때이옵니다. 진군의 영을 내리시오소서.
장군들 : .........
궁예 : 이 곳이 장차 우리들의 도읍지라 하였던가요?
종간 : 그러하옵니다. 대 제국의 꿈을 펼치는 첫 번째 근거지가 될 것이옵니다.
궁예 : (끄떡인다) 송악에서도 이 일을 알고 있을까....?
종간 : .......(보다가) 왕륭이나 왕건이 누구이옵니까.... 모를 리가 있사옵니까? 곧 찾아와 하례를 드릴 것이옵니다.
궁예 : (다시 끄떡인다) 좋소, 진공하시오.
궁예가 지휘봉을 들어 가리키자 드디어 기수가 큰 기가 흔들어댄다. 동시에 북소리와 소라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와’ 하는 함성이 어둠 속을 덮는다.
종간 : 전 군은 성을 함락하라!
씬37. 그 성곽
궁예군이 벌떼처럼 성벽으로 달려가고 있다.
석포며 운제가 돌덩어리를 성으로 날리고 성 위에서는 화살이 비처럼 쏟아진다.
사다리가 걸쳐지고 성벽을 기어오르고, 엄청난 혼선 속에서 피아간에 희생이 속출한다.
석포로 날아온 궁예군의 돌덩어리가 성의 망루를 부수고, 성벽을 파괴한다.
엄청난 사상자들 속에서도 집요한 성문 공격은 계속된다.
성 위에서는 성주가 목이 터져라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다.
성주 : 물러서지 마라. 성문을 지켜라.
석포가 계속 돌을 날려와 모든 것을 부수고 있다. 한 쪽에서는 부서진 망루를 군사들이 황급히 보수하고 있다.
성벽을 타고 넘어오는 궁예군들이 신라군과 처절한 싸움을 벌리고 있다.
그러나 중과 부적이다. 궁예군은 계속해 성벽을 넘어 오고 있다.
씬38. 그 성문
궁예군들이 성위에서 쏟아지는 화살비를 방패로 막으며 성문을 부수고 있다.
방패로 가리운다. 그래도 사상자는 속출하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성문은 부서져 나간다.
그 안에도 군사들은 많았다. 백병전이 이어진다.
성안 곳곳에서 근거리 육박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불길이 치솟는다.
환선길이 방천화극을 돌리며 그 화려한 무공을 자랑하고,
이흔암은 쌍도끼를 들고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며 적병들을 쓰러뜨리고 있다.
그리고 백옥삼 등 장수들도 칼을 빼들고 분투하고 있다.
씬39. 그 곳 장대
성주와 부장2가 장대로 올라와 사방을 살피다가 절망한다.
성주 : 물러서지 마라. 절대 물러서지 마라! 적도들을 막아라.
그러나 궁예군은 장대까지 몰려오고 있다.
이제 성주와 부장들도 칼을 빼들고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병사들 몇은 벨 수 있었으나 황소같은 환선길을 당해낼 수는 없다.
마침내 성주가 칼을 떨구고 어깨를 베이며 쓰러진다.
신라군은 이미 칼과 창을 버리며 땅에 엎드리기 시작한다.
그 시각 성문 앞에선 궁예가 백마를 타고 종간, 은부와 함께 입성을 한다.
군사들이 환호하며 궁예를 맞는다.
궁예, 성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씬40. 왕륭의 집 외경
장수장이 군사들과 지키고 있다. 여전히 긴장이다.
씬41. 동 집/별실 안
왕륭을 중심으로 하여 세 가신과 왕건이 함께 해 있다. 오랜 침묵이 감돌고 있다. 왕식렴도 있고...
왕건 :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왕륭 : ...............
변씨 : 주군께서는 이 송악땅을 삼대째 일구어 지켜오셨사옵니다. 허망하게 내줄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마씨 : 그러하옵니다. 언제적 궁예였사옵니까? 그자도 별 볼일이 없는 떠돌이 거지중이 아니었사옵니까?
왕평달 : 이를 말이옵니까? 그 자는 예전에 형님께 적지 아니 신세를 진 적도 있었사옵니다.
왕건 : 지난 일을 말할 때가 아니옵니다. 그는 지금 장군을 칭하고 있고, 거대한 신라의 국토를 남과 북으로 토막내 버렸사옵니다.
철원성을 함락하였으니 불원간에 대왕을 칭할 것입니다.
왕륭 : 일리 있는 말이다. 그 자는 옛날의 떠돌이 중이 아니야. 한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자다.
모두들 : ........?
왕륭 : 이제 옛 고구려땅은 궁예의 것이야. 우리와 자리를 함께 했던 여러 호족들이 지금쯤 바쁘게
궁예 쪽으로 달려가고 있을 게야. 기왕에 머리를 숙이고 그 앞에 줄을 설 바에야 빠를 수록 좋은 일이니까..
모두들 : ........?
왕륭 : 모두들 나름대로 엄청난 선물더미를 들고 갈 게야. 그리고 궁예가 선물 값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줄 것인가.....
계산들을 하겠지.
왕건 : .....아버님께선 무엇을 내실 것이오니까?
왕륭 : 가장 값이 비싼 것이지. 궁예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 남들이 가져갈 수 없는 것, 그래서 도저히 값이 없는 것......
모두들 : .........?
왕륭 : 바다야. 대를 이어 백여년동안 가꾸어 온 바다.
마씨 : 바다라 하셨습니까?
왕륭 : 바다를 알지 못하고는 천하를 도모하지 못하거든.... 그것은 오랜 경험으로만 만들어지는 귀한 재산이지.
이 일대에서는 송악만이 그것을 가지고 있어.
왕건 : .........?
모두들 : .........?
마씨 : 형편이 급박한데 좋은 거래가 되겠사옵니까?
왕륭 : 급하다고 밑가는 장사를 할 수야 있겠는가? 궁예는 이 송악의 값을 알고 있어.
이제 우리는 이 곳을 궁예에게 내주고 후한 값을 받아내야 할 것이야.
왕건 : .........그것이 가능하겠사옵니까?
왕륭 : 허허허허...... 이 세상에 하고자 해서 가능치 못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우리 왕씨 가문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잊었느냐?
모두들 : .......... (숙연하고)
왕륭 : 아니그러하냐 건아?
왕건 : .....
왕륭 : 너 식렴이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왕씨들은 말이다.
왕식렴 : 예 백부님.
왕륭 : 조상님 대대로 삼대를 이어와 송악의 터전을 닦았느니.... 바닷길 수 만리를 넘나들면서 수많은 나라와 신라의 방방곡곡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길을 닦았느니.... 이것은 결국 모두 건이를 위해서 예비한 것이 되었느니라.
왕건 : .......?
왕륭 :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느니... 급할수록 여유를 두어야 하느니..... 궁예는 이 송악의 값을 아느니라.
왕건 : .......?
왕륭 : 이 모두를 던져 궁예에게 주고 훗날 더 큰 것을 받아야 하느니라. 더 큰 것.
왕건 : ......?
모두들 : ......?
씬42. 철원성
장대에 올라 서 있는 궁예.
엄청난 바람이 계속해서 불고 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천둥과 번개가 지나치고 있다.
군사들이 창과 깃발을 높이 치켜들며 환호해 마지않는다.
잠시 후 성주가 장대 아래 마당으로 끌려나온다.
궁예 : 그대가 이곳의 성주인가?
성주 : 말을 삼가라. 내 비록 패장이 되어 너의 발 밑에 끌려왔다만 나는 신라의 진골이니라.
궁예 : 진골이라.. 허허.. 그것을 따지는 것으로 하여 오늘의 신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니라.
그대들의 잘못된 생각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을 고통과 죽음 속에 몰아넣은 줄을 아는가?
성주 : 긴말할 것 없다. 어서 내 목을 베어라!
궁예 : 가상하구나. 다 쓰러진 왕실을 위해 끝까지 버틴 너의 기상이 아름답도다.
허나 어이하랴? 너의 어리석음으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버려졌는고?
너의 죽음을 원망하지 마라. 이 자를 끌어다 참하여 그 목을 성루에 달도록 하라!
대답과 함께 성주가 끌려나간다.
잠시 후 궁예가 앞으로 나선다.
궁예 : 장졸들은 들으라. 이제 철원은 부처님의 땅이 되었느니라. 곳간이란 곳간은 모두 문을 활짝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줄 것이며, 사로잡힌 병사들은 모두 용서해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니라.
환호하는 군사들.
궁예 : 또한 상처를 입은 병사는 피아간을 막론하고 모두 돌보아 줄 것이며,
나를 따라 대미륵 성전에 참여하고 싶은 군사들은 그 누구든 받아들일 것이니라. 우리는 모두가 한 백성이니라...
우리에게 패배는 없느니라, 머지않아 삼한의 모든 땅이 나 궁예와 그대들 앞에 영광을 돌리고 머리를 조아릴 것이니라.
다시 환호하는 군사들...
궁예가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그 모습을 종간이 황홀한 듯 보고 있다가 두 손을 들어올리며 만세를 제청한다.
종간 : 대왕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그러자 수많은 장군들과 군사들이 대왕폐하 만세를 연창한다.
울부짖는 바람소리, 천둥소리들과 어울어지는 그 아우성 같은 환호의 물결에서....
계속 손을 들어 답하는 궁예.
해설 : 궁예. 그는 철원을 함락하면서 대왕을 칭했다. 이것은 후백제를 창업한 견훤에 이은 두 번째의 일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군사를 일으켰을 초창기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궁예는 전쟁에 임함에 있어 병사들과 더불어 쓰고 단것과 수고로움과 편안함을 같이 하였다.
또한 주고 빼앗는데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그가 어떻게 인심을 모았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궁예는 어느 누구보다도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훗날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왕건과 만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