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02
씬1. 철원성 외경
천둥과 번개가 계속되고 있다. 먹구름 속에 바람이 계속 울부짖고 있다.
성루에는 가득히 궁예의 깃발들이 꽃혀있다.
씬2. 동 성안
군사들이 곳곳을 지켜서 있다.
한 쪽에서는 성을 공격했던 장비들이 줄지어 서있고 대열을 이룬 군사들이 이리저리 이동하고 있다.
씬3. 동 성안 내아
여러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가운데 넓은 건물이 보여온다.
이른바 궁예가 임시 처소를 마련해 놓은 정전과도 같은 곳이다.
군사들이 그 밖을 지키고 있고.....
씬4. 동 건물 안
궁예를 중심으로 하여 십여 명의 제장들이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대형 지도가 걸려있다.
종간 : (지도를 가리키며) 우리는 이제 명실공히 신라의 북단을 평정하였고 옛 고구려의 고토를 점령하였소이다.
일찍이 준비해왔던 그대로 우리는 이 철원을 근거지로 하여 제국의 발판을 마련할 것이외다.
모두들 : ......
종간 : 대왕폐하께오서는 한 동안 군사를 정비하신 후에 다시 송악을 넘겨받고
이어서 양주와 견주를 넘어 신라의 영지를 공략하게 되실 것이오.
환선길 : 대왕폐하, 저까짓 송악을 치는데 무슨 군사를 다시 또 정비한다 하시오니까?
이 길로 영을 내리시어 송악과 평주, 백주, 신천 등을 이참에 싹 쓸어 버리시오소서.
이흔암 : 환장군의 말이 지극히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저들이 방자하여 폐하께오서 철원을 함락한 줄 뻔히 알면서도
아직도 예를 드리러 오지 않고 있사옵니다. 일벌백계 하시오소서.
궁예 : ..... (미소만)
백옥삼 : 이미 요새중의 요새인 철원성을 우리의 도읍으로 삼았사옵니다. 서두르심은 옳지 않을 줄로 아뢰옵니다.
환선길 : 이보시오, 백장군. 서두르다니오? 저들이 방자하여 아직도 대왕폐하를 알현하러 오지 않고 있는데
그냥 두란 말씀이오?
복사귀 : 그렇지 않소이다. 평주의 박지윤은 지방호족으로서 그 영향력이 대단한 사람이오.
또한 송악의 왕륭도 많은 백성들이 어버이처럼 그를 따른다 들었소이다.
성 하나를 얻기보다도 지금은 인심 하나를 지키는 것이 더 절실한 때인 줄로 아옵니다.
궁예 : (비로소 나서며) 옳은 말이오. 강압으로 억누를 것이 아니라 모두 달래고 어루만져서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오. 그것이 미륵의 자비를 보여주는 진정한 길일 것이요.
종간 :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대왕폐하께오서는 지금까지 덕으로서 숱한 적들을 제압해 오셨사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면 저들 모두 내왕폐하의 발아래 스스로 무릎을 꿇어올 것이옵니다..
궁예 : 나도 그렇게 믿습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것을 이깁니다.
천하는 지금 무섭게 변하고 있소이다. 아래로는 후백제의 왕 견훤이 놀라운 힘으로 북상중에 있고
전국 곳곳에서 내노라는 호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소이다.
이들을 제압하려면 힘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덕이 앞서야 할 것이오. 제장들은 이 점을 명심하기 바라오.
장수들 : (일제히) 예!
궁예 : 무릇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에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기본적인 질서와 법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군사께서는 이를 위한 관부를 제정하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도처에서 창궐하는 도적들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시오.
종간 : 예, 대왕폐하. 지당하신 하명이시옵니다.
궁예 : 또한 아직 기회를 찾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여러 호족들에게 시간을 주어
그들이 안심하고 우리에게 동참할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토록 하오.
종간 : 폐하의 말씀을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씬5. 길
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산길을 박지윤과 그의 아들들인 수문, 수경 형제가 일단의 군사들과 함께
진상품과 여인들을 말에 태워오고 있다.
얼마쯤을 오고 있는데 저 만큼 옆 길에서 장자1, 2가 몇몇 수행원들과 역시 가득한 짐바리들을 싣고 오고 있다.
그들은 곧 가까워진다.
장자1 : 허허. 대모달 박공이 아니십니까?
박지윤 : 천장자시구려. 이 빗길에 어디를 가십니까? 백장자님도 함께 가시는구려.
장자1 : 철원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장군께서도 그리로 가시는 게 아니신지요?
박지윤 : 그렇소이다. 우리도 궁예대왕께 가는 길이외다. 어서들 가십시다.
장자2 : 공연히 회의니 뭐니 그 동안 시간만 낭비해왔소이다. 천하의 누가 궁예대왕을 당하겠소이까? 아니 그렇소이까?
그때 또 저 만큼 샛길에서 강장자 일행이 유금필을 앞세워 나오고 있다.
이들은 서로 계면쩍게 마주 보고 시선을 외면한다.
강장자 : 허허.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 벌써들 가십니다, 그려. 모두 철원성으로 가시는 것이겠지요?
박지윤 : 어서들 가십시다. (이들 움직이며) 헌데 송악성의 왕륭 성주께서는 아니 보이시는군요.
강장자 : 그분대로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어디 남의 말을 듣는 분입니까?
박지윤 : 그래도 두 분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십니까?
강장자 : 생사를 오가는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서들 가십시다. 하, 이거 웬 바람이 이렇게 부는가?
그들 그렇게 간다.
씬6. 송악 왕륭의 집 외경
여전히 몇몇 군사들이 지키고 있다.
장수장이 점검하며 지나쳐 간다.
씬7. 동 집 안 정원
바람이 집안 뜨락을 휩쓸어가고 있다.
카메라 왕륭의 방 쪽을 비추면.....
씬8. 동 집 방 안
왕륭이 침묵에 잠겨있다.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왕륭 앞에 왕건과 세 가신, 왕식렴이 앉아있다. 오랜 침묵이 흐른다.
왕륭 : 바람이 극성이로구먼.
모두들 : ....... (초조)
왕륭 : 신천의 강장자도 철원으로 갔다고 하였든가?
왕평달 : 그러하옵니다, 형님. 강장자뿐 아니라 평주의 박지윤공과 백주의 천장자도 떠났다 하옵니다.
왕륭 : 불안한가?
왕평달 : 솔직히 그렇기는.... 하옵니다. 궁예가 형님의 말씀대로 정말 우리를 반갑게 찾아줄 것인지요?
왕륭 : (끄덕이며) 온다. 그 사람은 반드시 그리 할 것이야.
왕평달 : 만약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일전을 불사해야 할 것이옵니다.
왕륭 : 궁예는 우리가 잘 안다. 그자는 온다. 중요한 것은 그대들일 것이야.
모두들 : .......? (보면)
왕륭 : 평달이....
왕평달 : 예, 형님.....
왕륭 : 너는 나의 아우로서 오랫동안 집안을 일으키는데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왕평달 : ....................
왕륭 : 우리는 본래 벼슬아치라기 보다는 장사꾼이 아니었드냐? 그 동안 나와 건이가 주도해온 이 모든 가업을
이후로는 아우에게 맡길 것이니라.
왕평달 :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형님?
왕륭 : 궁예가 오게 되면 나와 건이는 더 이상 장사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야.
그 일을 아우가 대신해 달라는 것이야. 조카 식렴비도 이제 제 넋을 다하고 있고허니.
왕식렴 : .........
왕릉 : 알겠는가?
왕편달 : 예 형님... 그리 하겠사옵니다.
왕륭 : 그러니까 겉으로 이 집안은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이 없느니라. 각자의 역할만 바뀌는 것이야.
마사부..... 그리고 변사부.....
두 사람 : 예, 주군.
왕륭 : 그대들은 오랫동안 건이를 위해 그대들의 출중한 문장과 뛰어난 무예를 전해준 스승들일세.
두 사람 : .......
왕륭 : 내가 송악을 순순히 궁예에게 주기로 결심한 것은 그대들과 그대들이 영도하는 일당 백의 충성스러운 군사들이
있기 때문이었네. 바다의 사내들은 목숨보다 의를 중하게 여기고 살았느니,
왕건 : .......
왕륭 : 명심들 하라. 지금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큰 거래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니라.
그것은 그대들의 충정을 밑천으로 한 것이니라. 알아들 듣겠는가?
모두들 : 이를 말이옵니까, 주군. 신명을 다하오리다.
모두들 복창하며 머리를 조아린다.
왕건이 그런 그들은 보고 있다.
씬9. 철원성
성문 가까이 호족들이 다가오고 있다.
환선길이 이흔암과 함께 거만하게 성루 위에서 그들을 내려보고 있다.
환선길 : 맨 앞에 오시는 분이 누구시오?
박지윤 : 평주의 대모달 박지윤이라고 하외다.
환선길 : 어찌하여 오시었소?
박지윤 : 대왕폐하를 알현하고 하례를 드리러 왔소이다. 장군은 뉘시요?
환선길 : 나는 대 궁예대왕 폐하의 막하 장수인 환선길이라는 사람이오. 대왕폐하께 드릴 선물은 많이 가져오시었소?
박지윤 : 성의를 다하였소이다.
환선길 : 조금만 늦게 왔다면 그대들의 영지는 지금쯤 모두 불바다가 되어 있을 것이오. 성문을 열어라!
박지윤을 비롯해 호족들은 하얗게 질린 채 성문이 열리면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러자 병사들이 그들을 안내해 안으로 들어간다.
많은 행렬들이 그들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씬10. 그곳 내아 외경
궁예가 쓰고 있는 이른바 대전(임금의 집무실)인 셈이다. 그 밖에 은부와 그의 수하들이 지키고 있다.
종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은부에게 묻는다.
종간 : 대왕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은부 : 예, 군사 어른.
종간 : 알리시게.
은부 : 대왕폐하, 종간 군사께서 오셨사옵니다.
씬11. 그곳 내아 (대전)
궁예가 입정(참선)에 들어있다.
밖에서 다시 은부의 소리가 들려온다.
은부 : (E) 대왕폐하, 종간 군사께서 오셨사옵니다.
그제서야 궁예는 조용히 눈을 뜬다. 여전한 승려의 모습 그대로이다. 단아한 몸매, 날카로운 외눈.
방 안에는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있을 뿐, 그는 돗자리 위에 앉아 참선에 들어있다.
그리고 방 안에 아무 장식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놀라운 검소함이다.
궁예 : 드시라하게.
잠시 후, 종간이 들어와 예를 표하고 앉는다.
종간 : 대왕폐하, 소신이 폐하의 참선을 방해드렸나 보옵니다. (사이) 저들이 왔사옵니다.
궁예 : ......?
종간 : 평주의 대모달 박지윤과 백주, 신천의 호족들이 폐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하례차 온 것으로 아옵니다.
궁예 : 그래요.
종간 : 나가서 맞으시오소서.
궁예 : (끄덕이며) 그래야겠지요.
종간 : 하옵고, 폐하.... 신의 생각으로서는 이제 대왕폐하께오서도 폐하로서의 위엄을 갖추실 필요가 있다고 보옵니다.
궁예 : 무슨 말씀이시오?
종간 : 무릇 일국의 대왕이 되셨사옵니다. 그에 합당한 위용을 갖추심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궁녀들과 내관들도 두시옵고 또한 옥좌도 크게 갖추시고 화려근엄한 용포도 갖추시오소서.
궁예 : 하하하하. 종간 군사답지 않은 말씀이시오. 그대와 나는 승려요. 그까짓 옥좌나 황제의 옷이 무엇이 필요하단 말이오?
종간 : 하오나 대왕폐하.....
궁예 :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대 제국을 꿈꾸는 우리가 이 정도의 영토에서 옥좌나 화려한 용포 따위에 마음을 둔다면
그야말로 천하가 웃을 것입니다. 내가 옥좌에 앉을 때는 그에 합당한 영토를 얻었을 때일 것입니다.
그까짓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마십시다.
종간 : 과연 대왕이시옵니다. 속없는 말을 지껄인 신이 부끄럽사옵니다.
궁예 : 자, 가보십시다. 저들이 어떠한 예물을 가지고 왔는지 가보십시다.
씬12. 그곳 정전 앞
기다리고 있던 호족들이 ‘대왕폐하 납시오’하는 은부의 굵직한 목소리에 일제히 엎드려 부복한다.
궁예가 마련된 의자에 가 앉는다.
궁예 : 이렇게 찾아와들 주니 반갑소이다.
박지윤 : 신들이야말로 대왕폐하의 용안을 뵈오니 참으로 광영이옵니다. 신은 평주의 박지윤이라 하옵니다.
궁예 : 대명을 많이 듣고 있었소이다.
박지윤 : 하잘것 없는 이름을 기억해주시니 부끄럽사옵니다.
궁예 : 그대는 이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나를 위하여 이렇게 달려와주니 고맙소,
다른 분들은......
강장자 : 신은 신천의 강자라 하옵니다. 작은 고을을 맡고 있으면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사옵니다.
궁예 : (한참 보다가) 그러고 보니 옛날에 뵌 적이 있는 것 같소이다. 송악에서였지요, 아마.......
강장자 : 예, 폐하.
그러자 모두들 강장자와 궁예 쪽을 번갈아 본다.
장자들이 다투어 자신을 알린다.
장자1 : 신은 백주의 천가라 하옵니다.
장자2 : 신은 패강진의 백가라 하옵니다. 대왕폐하를 뵙게되어 무궁한 영광이옵니다.
궁예 : 고맙소이다. 참으로 고맙소이다. 헌데 저들은 다 무엇이오?
궁예가 한 켠에 서있는 여인들과 무수한 짐바리들을 보고 묻는다.
박지윤 : 대왕폐하께 올릴 진상품들이옵니다.
궁예 : 허허, 그래요. 여인들은 또 무엇이오?
박지윤 : 패서지역 최고의 미인들이옵니다. 거두어 주시오소서.
궁예 : (한참 보다가) 나를 보고 시침을 들라 그 말씀이오?
박지윤 : 전장터에서 얼마나 노고가 크시었사옵니까? 소인들의 성의이오니.....
궁예 : (말을 막으며) 나는 불문의 제자올시다. 비록 칼을 들고 일어났으나
계율을 지켜야 할 승려가 어찌 여색을 탐할 수가 있겠소이까?
그 말에 모두들 입을 열지 못한다.
그들 : ......
궁예 : 백성은 나의 수족이오, 나의 부모요, 나의 자식이라 하였소이다.
적지 않은 힘이 있다하여 이들을 핍박하고 이들을 탈취하고 이들의 생사를 마음대로 한다면
어찌 하늘이 가만히 있겠소이까? 그러니까 나라가 어지럽고 천하가 도탄에 빠진 것이 아니겠소이까?
박지윤 : (식은땀을 흘리며) 신들의 생각이 미처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였사옵니다.
궁예 : 물론 나도 전장터의 관례를 알고 있소이다. 승리한 장수는 여인의 시침을 받도록 되어 있다지요?
허나 나는 아니외다.
박지윤 : 용서하시오소서.
궁예 : 지금부터라도 그대들이 다스리는 고을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하시오.
강한 자에게는 눈치를 보며 온갖 것을 다 바치고 약한 자에게는 범처럼 달려들어 있는 것을 모두 빼앗는다면
그 어찌 백성의 어버이라 할 수 있으리요?
박지윤 : 대왕폐하의 말씀을 깊이 새기겠사옵니다. 이번만은 신들의 정성을 거두어 주시오소서.
궁예 : 모처럼의 성의이니 원하는 여인들은 궁에 남아 일을 돌보게 할 것이며 가지고 온 것들은 군비에 충당토록 할 것이오.
일제히 : 대왕의 은혜가 참으로 크시옵니다.
궁예 : 군사!
종간 : 예, 폐하.
궁예 : 먼 길을 온 분들이오. 노고를 위로해 주어야 하지 않겠소?
종간 : 이미 소연이 마련되어 있사옵니다.
궁예 : 그래요, 모두 들어가십시다.
씬13. 그곳 내아 연회장
궁예를 중심으로 하여 한 쪽에는 호족들이 한 쪽에는 장수들이 줄지어 앉았다.
악사나 악공은 없다. 무희도 없고 식탁의 음식들도 놀랍도록 조촐하다.
박지윤과 강장자는 애써 상을 보며 태연하려 한다.
궁예 : 공들께서는 주안상이 초라하여 내심 섭섭들 하실 겝니다.
모두들 : ..........
궁예 : 허나 우리는 백성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백성의 군대요. 저들은 굶주리고 기아에 허덕이는데
우리가 주지육림에 희희낙낙 한다면 누가 따르겠소이까? 이 점들을 이해해 주길 바라오.
모두들 : 예.....
궁예 : 그리고 오늘부터는 모두 같은 운명이 되었소이다. 공들이 진정으로 이 궁예의 신하가 되었다면
이 모든 전장에 몸을 아끼지 말고 참여해야 할 것이오.
박지윤 : 하명만 내리시오소서.
궁예 : 고맙소, 자, 모두들 드십시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라 곡차까지 내왔소이다. 즐겁게들 드시오. 드십시다.
그들 모두 잔을 들어 마신다. 비로소 분위기가 풀어진다.
종간 : 한데 오늘 꼭 오실 분께서 아니오신 것 같습니다. 송악의 왕성주님 말씀입니다,
박지윤 : 예... 그것이 저......
강장자 : ...... (눈치를 본다) 무슨 사정이... 좀 있는 듯 하옵니다만...
궁예 : 그럴수도 있겠지요.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박공께서는 송악을 어찌 보시는지요?
박지윤 : 장사꾼이라고는 하지만 나라와 나라를 상대하는 거상이올습니다.
궁예 : 허허, 그렇군요.
박지윤 : 당나라와 일본, 유구, 섬라곡국(태국), 교지국(베트남 지역) 등을 비롯하여 바다 밖에 멀리 있는 나라들은 물론이고
신라 왕실도 송악의 왕성주와 오랜 거래를 해오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강장자 : 뿐만 아니라 왕성주의 가신들 또한 의리가 매우 두텁고 용맹하기가 그지 없으며
군사들 역시도 그 수는 적으나 바다와 땅에서 수많은 실전을 거친 최고의 정예병들인 것으로 아옵니다.
환선길 : (기분 나쁘다) .......
궁예 : 음....... (생각) ........박공의 평주와 비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박지윤 : ......세력은 저의 평주가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인물은 왕성주이옵니다.
궁예 : 허허허..... 그래요?
이흔암 : 송악이 그토록 대단하단 말이오? 그래서 아직까지 버티고 있단 말이오? 이런 무엄한 것들이 있나!
궁예가 눈치를 주자 이흔암이 입을 다문다.
종간이 화제를 바꾸려는 듯 강장자 뒤에 서있는 거구의 유금필을 본다. 그는 목석처럼 아무 표정 없이 그렇게 서있다.
종간 : 강장자님 뒤에 계시는 분은 자제분이신가요?
강장자 : 아, 아니올습니다. 저의 가인이올습니다. 소인과 함께 신천 고을을 지켜온 무장이올습니다.
궁예 : 풍채가 대단하구려. 이름이 무엇인가?
유금필 : 유금필이라 하옵니다.
강장자 : 오래전, 백두산에서 무업을 닦고 하산하던 길에 소신과 만났사옵니다. 신의 어려움을 많이 도와주고 있사옵니다.
궁예 : 귀상이로다. 범상치 않은 풍채요.
유금필 : 황공하옵니다, 폐하.
환선길 : 폐하, 모처럼 군신간에 자리를 함께하는 기쁜 자리이옵니다. 신이 검무를 추어 흥을 돋구고 싶사옵니다.
이흔암 : 검무라.. 그거 좋지! 폐하, 허락하시오소서.
궁예 : 환장군의 검무는 가히 일품이구말구. 손님들을 위해 흥을 좀 내주시구려.
환선길 : 황공하옵니다.
환선길이 일어나 방천화극을 빼들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의 춤사위는 처음에는 혼자 추는 듯 하더니
이윽고 무서운 쇳소리를 내며 위협적으로 호족들의 목과 얼굴 부분으로 파고 들기 시작한다.
호족들은 곧 공포에 사로 잡힌다.
혼자가 되었다가 다시 호족들에게 다가들다가 쉴 사이 움직이는 창날은 무지개 빛을 그리며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어느새 호족들의 표정은 모두 굳어진다. 그중 강장자의 표정은 아예 사색에 가깝다.
궁예와 종간이 그런 호족들을 보고 있는데
슬며시 유금필이 보다못해 앞으로 나선다.
유금필 : 장군, 검무는 혼자보다 둘이 제격일 것이옵니다.
모두들 : .......?
유금필 : 소인이 몇 수 받아보면 어떻겠습니까?
환선길 : (가소롭다는 듯) 지금 뭐라고 하였는가? 일개 고을의 수문장지기가 나의 창을 받아보겠다는 것인가? 후회하지 않으렷다?
유금필 : 이를 말씀이옵니까?
환선길 : 재미 있겠군. 자, 그럼 추어볼까.
두어 번 창날을 돌리며 위협적으로 다가서는 환선길.
드디어 두 사람은 맞붙는다. 막상막하, 우열을 가리기 힘든 서로의 검투가 불꽃을 일으킨다.
십 합이 넘어가자 환선길의 미소도 사라졌다. 이들은 점차 살기띈 수를 펼치기 시작한다.
아슬아슬한 위기가 수없이 스쳐간다. 찰나만 실수를 해도 죽음에 이르는 살수들이 오고 간다.
얼마 만큼 그들이 접전이 계속 되었을까? 궁예가 손뼉을 치며 이들을 만류한다.
궁예 : 하하하하. 그만, 그만. 그만들하오. 유금필이라고 하였든가?
유금필 : 예, 폐하.
궁예 : 좋은 구경을 하였도다. 감히 천하의 환선길 장군을 대적하여 물러서지 않다니 믿기지가 않는구나.
이보시오, 강장자.
강장자 : 예.
궁예 : 좋은 가인을 두었소이다. 언젠가는 저 무예를 크게 쓸 날이 올 것이외다.
참으로 기쁜 날이오. 모두 즐겁게들 드시오. 자, 자 드십시다.
모두들 잔을 들면서 뜻밖에 등장한 유금필을 본다.
여러 장수들은 물론이오 환선길도 믿기지 않는 듯 유금필을 보며 씩 웃는다.
환선길 : 만나서 반가웠네. 다음에 승부를 가르기로 하세나.
유금필 : 불러주시면 기꺼이 달려가겠사옵니다.
궁예 : 자, 마음껏들 드시오. 이제 우리는 한 배에 올랐소이다. 대 제국의 그날까지 우리 모두 목숨을 함께 할 것이외다.
자, 드십시다.
DIS
씬14. 예성강 포구
바람이 계속되고 있다. 태풍이다. 포구에는 많은 배들이 모여있다.
장수장과 종자 두 명이 뒤를 따르고 있고 왕륭과 왕건이 나란히 오고 있다.
그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멀리 바다를 본다. 거센 파도가 때려오고 있다.
왕륭 : 건아!
왕건 : 예, 아버님.
왕륭 : 저 바다를 보아라.
왕건 : ......
왕륭 : 어려서부터 너는 이 아비를 따라 여러 곳을 다녀보았을 것이야. 우린 때때로 많은 적들을 만났었지.
거친 풍랑과 파도도 만났고 해적도 만났었지.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이겨 내왔었다. 장보고 장군을 기억하느냐?
왕건 : 예. 해상왕국을 세웠던 대장군이 아니시옵니까?
왕륭 : 그렇지. 너희 할아버지와 같이 당나라에서 이곳 신라로 건너오신 분이니라.
그때는 모든 해적들이 얼씬을 하지 못하였지. 삼국을 통일한 신라조정도 벌벌 떨었어. 그 일을 아느냐?
왕건 : 예. 아버님께서 늘상 말씀하지시 않으셨사옵니까?
왕륭 : 장보고 장군께서 간악한 무리에 의해 세상을 떠나신 후에 너의 증조부님께서는 이곳 송악에 터를 잡으셨느니라.
그리고 서원을 하셨지.
왕건 : .......
왕륭 : 하찮은 장사꾼이 아니라 천하를 도모하는 대업을 일으키시겠다고.....
왕건 : .......
왕륭 : 그리고 너까지 어느새 4대째 이르렀느니라.
조상님들의 원은 결코 헛되지 않아서 너는 태어날 때부터 대예언을 점지 받았느니라.
왕륭, 잠시 말을 멈춘다. 무섭게 일렁이고 있는 파도를 본다.
왕륭 : (혼잣말로) 그래, 이제 그 예언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구나. 조상님들의 음덕이 너에게 이른 것이야..
나는 지금도 그 예언을 잊지 않고 있느니라. 참으로 엄청나고도 무서운 예언이었지.
그 바람소리와 파도소리에서.. 그리고 왕륭의 얼굴에서.....
도선 : (E) 아드님은 용의 운명을 타고 나실 겝니다.
장차 한 나라를 세워 삼한을 다스릴 대 성인이 태어나실 것이외다. 대 성인이외다.
씬15. 회상 (집터, 20년 전)
인부들이 집터 다지기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왕륭과 왕평달이 한 쪽에서 그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보고 있다.
왕륭 : 어떠한가? 이만하면 집터로서는 손색이 없지 않은가?
왕평달 : 송악에서 제일가는 자리옵니다. 이번에 벼슬도 받으시고 송악 성주님이 되셨으니 그럴듯한 저택을 가져야 합지요.
주변을 돌아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저 만큼 웬 걸승 하나가 오고 있다.
왕륭 곁에서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집터를 본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다.
왕륭이 그 모습을 본다.
도선 : 이런 쯧쯧쯧..... 메기장을 심을 자리에 베를 심는구먼....!
왕륭 : .......?
도선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 곳을 지나치는데,
왕륭이 불현 듯 뭔가를 느끼고 뒤늦게 도선을 부른다.
왕륭 : 스님, 스님..
도선 : (돌아본다).....?
왕륭 : 방금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도선 : 허허허.. 빈도의 허언을 들으셨나 보오이다.
왕륭 :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메기장은 무엇이고 베는 또 무엇이옵니까?
도선 : (물끄러미 보다가) 이 터가 그렇다는 말씀이오.
왕륭 : 이 터가요?
도선 : 허허허허. 이거 오늘 뜻하지 않게 하늘에 죄를 짓게 되었구먼.
왕륭 : .......?
도선 : 천기누설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나는 도선이라는 중이외다.
왕륭 : 도선.....? 아니 그럼 스님께서 그 고명하신...... 도선대사이시오니까?
도선 : 허허허. 고명은 무슨...... 그저 발 가는대로 가다가 성주님을 보게 되었소이다. 이 땅은 명당중에 명당인 마두명당이외다.
왕륭 : (충격) 대사님, 뭐라 하셨습니까? 마... 마두명당....?
도선 : 그렇소이다. 이 땅의 지맥은 멀리 북쪽의 백두산 줄기를 타고 이어져 내려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떨어졌소이다.
그것을 풍수지리학적으로 수모목간(水母木幹)이라 하지요.
성주님의 운수는 물 수자라, 물의 운명이니 수지대수(水之大數)의 작우륙(作宇六)이라,
이곳에 집을 짓되 서른 여섯 칸으로 짓고 방향을 이 쪽으로 잡을 것이며
저 쪽에 소나무를 심어 허한 곳을 막고 이곳에도 바위를 쌓아 기의 흩어짐을 막아야 할 것이오.
왕륭 : ......
도선 : 지금까지 자손이 없었을 것이외다. 이 집을 짓고 나면 명년에 아들을 얻을 것이오.
그 이름을 세울 건자, 건(建)이라고 하시오.
왕륭 : .......
도선 : 아드님은 용의 운명을 타고 나실 겝니다. 장차 한 나라를 세워 삼한을 다스릴 대 성인이 태어나실 것이외다.
대 성인이외다.
씬16. 현실
왕륭의 표정이 아직도 충격에 사로 잡혀 있다.
파도 소리가 ‘쏴’하니 때려오고 있다.
왕륭 : 도선대사는 온 나라가 다 알아뫼시는 신승이셨느니라. 하늘이 내리신 스님이시라는 말씀이야.
왕건 : 그 분을 소자가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왕륭 : 그 분의 예언에 따라 너는 태어났느니라. 그 예언이 거짓이 아니라면 지금 궁예가 오고 있는 것은
바로 너의 앞길을 예비하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
왕건 : 아버님, 하지만 지금은 저희의 형편이 어렵사옵니다. 어찌 그런......
왕륭 : 은인자중하여라. 어찌 되었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고 있느니라. 새로운 세상이야......
그때 한 필의 말이 달려온다. 연화다. 멈추어 서며 왕륭 부자에게 예를 올린다.
왕륭 : 연화로구나.
연화 : 예, 성주님. 아버님께서 가뵈시라하여 왔사옵니다. 걱정을 많이 하시옵니다.
속히 철원성으로 가시는 것이 옳을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왕륭 : 그래, 그래. 고맙구나, 이렇게 와주어서.....
연화 : 어인 말씀을......
왕륭 : 건아.....
왕건 : 예, 아버님.
왕륭 : 이제 되었다. 연화가 왔으니 바닷바람이라도 쏘여 주려므나.
왕륭은 헛기침을 날리며 돌아선다.
왕건이 예를 올리고 연화를 보며 웃는다. 두 사람 서서히 그곳을 빠져나간다.
씬17. 그곳 일각
연화와 왕건이 말을 매어놓은 쪽으로 걸어온다.
연화 : 주변 사정이 급하온데 송악은 어찌하여 이리 조용하십니까? 왜 궁예대왕에게 가지 않는 것이옵니까?
왕건 : 아버님의 영을 따를 뿐이오.
연화 : 궁예라는 사람은 항복하지 않는 상대에겐 무자비하다 들었습니다.
왕건 : ...........
연화 : 아버님은 가시면서 소녀에게 신신당부를 하셨사옵니다. 송악분들도 속히 철원으로 뒤따라 오시라구요.
왕건 : 그렇게 염려 안해도 될 것이외다.
연화 : 어찌 염려가 안된단 말씀입니까?
왕건 : 다 잘 될 것입니다. 자 연화 아씨, 모처럼 이곳에 오셨는데 우리 함께 해안을 달려보면 어떻겠소이까?
연화 : 지금 그렇게 한가로운 말씀을 하실 때이옵니까?
왕건 : (말에 오르며) 자, 따라오시구려, 낭자.
자신이 말에 오르며 고삐를 낚아채고 달려가면 연화도 곧 어쩔 수 없는 듯 그 뒤를 따라 맹렬히 쫓는다.
그 모습을 왕륭이 끄덕이며 보고 있다.
하늘에선 뇌성벽력이 친다. 우울하게 그 하늘을 보는 왕륭.
씬18. 철원성 내아 외경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쏟아지고 있다.
궁예가 방 안에서 문을 열어놓고 그 비를 보고 있다. 종간도 그 옆에 앉아있다.
그들은 찻잔을 들고 있다.
씬19. 그 방
종간 : (한참 비를 보다가) 며칠째 뇌성벽력이 몰아치더니 그에 비가 쏟아지옵니다.
궁예 : 그러게 말이오. 장마인 것 같구려. 호족들은.....?
종간 : 모두들 대취하여 돌아갔사옵니다. (사이) 대왕폐하, 송악은 어찌 하실 것이옵니까?
궁예 : .......
종간 : 누군가를 보내어 폐하의 뜻을 전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항복을 할 것인지 아니면......
궁예 : 무력으로는 아니되오.
종간 : 신의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천하는 이제 신라를 가운데로 두고 폐하와 무진주의 견훤으로 양분되어가고 있사옵니다.
견훤은 바다를 알고 있으나 대왕께오서는 그렇지가 못하시옵니다. 송악만 우리에게 와준다면.....
궁예 : 그래야 합니다. 예를 갖추어 사람들을 보내 보십시다. 나는 아직도 왕건이라는 어린 소년을 생각한답니다.
그 총명함이 그대로 이어져 자랐다하니 만나보고 싶구려.
종간 : 대왕폐하의 뜻대로 되실 것이옵니다. 은부를 그곳으로 보내겠사옵니다.
궁예 : 그리하십시다. (사이) 허허. 날씨가 점점 더 사나워지는구려. 태풍이 오려는 모양이야.
종간 : ...... (궁예를 따라 하늘을 본다. 그리고 궁예의 눈치를 살핀다)
궁예 : 송악이라...... 적지 않은 인연이지. 우리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오백 생의 인연이라고 하지 않소이까?
종간 : 매사 냉철하신 폐하께오서 송악의 일들만은 그렇지가 않으신가 보옵니다.
궁예 : (미소) .......그럴수 밖에요.
종간 : ........너무 인정에 연연하심은 경계해야 하실 것이옵니다.
왕륭이란 사람은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옵니다. 그 혼자만이 오지 않고 폐하를 시험하고 있사옵니다.
궁예 : (끄떡인다) .......지금은 난세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존심이 얼마나 대견합니까?
별것 아닌 재물이나 계집 따위를 들고 찾아오는 호족들보다야 낫지 않겠소이까?
종간 : 그렇기는 하오나....... 왕륭 그 자가 너무도 빤히 우리의 심중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궁예 : 군사답지 않은 말씀이시오. 인정할 것은 인정하십시다.
저들의 가치는 우리에게 왔다가 간 호족들의 몇 십배 보다 클 것이요.
종간 : 그렇기는 하옵니다마는.......
궁예 : 이상한 일이요. 그들과 나는 아마도 전생에 인연이 깊었던가 봅니다.... (사이) ....이번의 만남이 세 번째 일 것이오.
종간 : ........그러나 경계는 두고 계시오소서.
궁예 : 아니오. 나는 그들을 믿고 싶소.
종간 : ......그들의 상을 알고 있사옵니다. 대왕폐하와는 상극의 상이옵니다.
궁예 : 천하를 도모하는 우리가 그런 것들에 연연하리오..... 부처님의 제자인 우리가 말이요.
그들에게 예우를 다해 부르시오.
종간 : (마지못해) 예, 폐하.
궁예 : 이것은 운명이요, 왠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운명 말이요.
이들은 오랫동안 말없이 멀리 쏟아지고 있는 비를 본다. 천둥과 번개가 더욱 요란하다.
궁예 : 그래요. 그 때도 이렇게 궂은 날이었어요. 몹시 바람이 불었었지.
종간 : ..........
궁예 : 엄청난 눈바람이었어.....(사이) .......그때 우리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었소이다.
저 먼 기억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그의 흐린 눈빛 위로 다급한 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온다..!
씬20. 송악/어느 산길 (20년 전, 회상)
신라의 군사들 두어 명이 누군가를 추격해 오고 있다. 심한 눈발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앞서 가고 있던 군사1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본다.
군사1 : 더이상 발자욱이 보이지 않사옵니다.
장수 : (하늘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게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보도록 하여라.
군사들, 대답하고 흩어진다. 군사들이 그렇게 달려가면......
씬21. 그곳 산길
잡목 숲이 가득한 협곡이다.
궁예모가 막고 있던 어린 궁예의 입을 풀어주며 주변을 경계한다. 힘겨운 듯 거친 숨을 몰아 쉰다.
궁예 : 어머니?
유모 : (간신히) ....그래...... 어서 가자꾸나....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쓰러져선 안된다. 가자...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는 유모. 병든 기색이 완연한데다 피 흘린 상처가 곳곳에 나 있는 몰골이다. 밭은 기침을 계속 한다.
모자는 힘겹게 그 잡목 숲을 헤쳐나간다.
궁예 : 어머니, 왜 이렇게 도망쳐야 해요?
유모 : 나중에 얘기 해주마.... 어서.. 가자.
궁예 : 군사들이 왜 쫓아오는 거지요?
유모 :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란다.
궁예 : 우리를 왜요?
유모 : 다 알게 될게다. 범교 스님을 만나면 ...다.. 얘기해 주실게야...
기침을 계속 한다. 비틀거린다. 기침을 계속 하다간 피를 왈칵 쏟는다.
그들 그렇게 가면.. 다시 저만큼 들려 오는 군사들의 소리.
그들 모자는 다시 몸을 숨긴다. 군사들이 지나쳐 간다..
유모 : 범교 스님에게... 가야 한다. (쓰러질듯 비틀거리며) 거기까지는.. 가야 한다... 세달사, 범교..스님.... 세달사.....
여전히 눈보라는 극성이다.
쓰러질 듯 일어서며, 그들 모자는 눈보라 속으로 멀어진다. 필사적인 유모의 목숨은 그러나 그리 길어 보이지 않는다.
짙은 눈보라가 그들의 모습을 감추면.....
씬22. 예성강 포구
이곳에서도 심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수많은 인파가 북적거리고 있다. 여러 척의 상선들이 보이고 많은 물건들이 하역되고 있다.
씬23. 그 한쪽
상선에서 왕륭 일행이 내리고 있다. 변씨, 마씨 장수장 등 가신들과 군사들이 호종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던 왕평달과 장자들이 반갑게 영접한다.
왕평달 : 먼 길에 고생하시었사옵니다, 형님.
왕륭 : 고생은 무슨..... 늘 하는 일이 아닌가?
강장자 : 어서 오십시오. 왕성주.
유장자 : 배마다 물건이 가득 하옵니다. 가라 안지 않고 오신 것이 대견하오이다.
왕륭 : 허허허. 강장자님, 유장자님 모두 오셨구려......
왕평달 : 형님, 정말이지 때를 맞추어 오셨사옵니다. 형수님께서 곧 해산하실 것 같사옵니다.
왕륭 : 알고 있네.. 그래서 서둘러 온 것이 아닌가? 자 들 가십시다.
그들 일행 포구를 빠져나간다.
씬24. 포구 마을
군사들과 사람들로 마치 장날같이 시끌벅적하다.
궁예와 유모가 거의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오고 있다.
저쪽에서 행인들 두엇이 온다. 그 앞을 가로막는 유모.
유모 : 저.... 여기가.... 여기가... 어디랍니까?
행인1 : (뜨악하게) 여기요? 아 여기가 예성강 포구 아니오?
유모 : 예성강이라면.. 송악이란 말이지요..?
행인2 : 그렇다니까요..
유모 : 허면.. 세달사.. 가는 길을... 알고 계시는지요?
행인1 : 세달사? 세달사라면 저기, 저 산 너머에 있는데..... 한 삼십 리는 더 가야 할텐데... 거기 가서 다시 물어보슈.
귀찮은 듯 외면하며 오고 있는 왕륭 일행들을 구경하고 있다.
그러나 유모는 필사적이다. 가물거리는 정신을 고추세우며 다시 묻는다.
유모 : 저.. 이보..시우.. 이보시우... 세, 세달..사 길이.. 저기... 저... 저쪽...
그러나 행인은 아예 귀찮은 듯 외면해 버린다.
유모는 그러나 더욱 다가서다가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댄다.
하얀 눈 위로 검붉은 각혈이 떨어진다. 그리고는 그예 힘에 부쳐 주저 앉으며 쓰러진다.
궁예 : (걱정스레) 어머니.. 어머니... 정신차리세요, 어머니... 어머니....
유모 : 구...궁예야, 궁예...야.
정신을 잃어 간다. 사람들이 ‘우’ 쳐다본다.
그때 왕륭들이 다가 온다. 군사들 눈치를 채고 유모들을 치우려 하는데......
왕평달 : 무슨 일이냐?
군사 : 떠도는 걸인들 같사옵니다.
왕륭 : 저런, 피를 토하지 않았느냐? 병이 중한 모양이로구나.
궁예 : 나으리, 살려주시어요. 어머니좀 살려 주시어요, 나으리....
왕륭 : 이 엄동설한에 가여운 일이로구나. 거두어 주어라.
장수장 : 하..하지만 이런 거러지들을.... 어디에...?
왕륭 : 관아로 데려가거라.
왕평달 : 어서 치우거라.
장수장 : 예, (군사들에게) 데려가거라.
군사들이 대답하며 급히 유모를 부축해 간다. 일행은 다시 움직여 간다.
씬25. 왕륭의 집 (관아)
열린 대문 안으로 왕륭들이 들어선다.
온 가솔들과 병사들이 그들을 맞는다.
씬26. 동 집안
모두들 : 어서 오시오소서.
왕륭 : (장자들에게) 별채에서 뵙겠습니다. 내자를 보고 곧 가겠소이다.
강장자 : 아 그리하셔야지요. 다녀 오십시요..
강장자들이 집사의 인도로 별실로 가면, 왕륭은 중문을 넘어 안채로 들어간다.
씬27. 동 안채
기다리고 있던 계집종이 나와 고개를 숙인다. 산고에 시달리는 한씨의 신음소리들이 들려 온다.
왕륭이 안으로 들어간다.
씬28. 방안
배가 남산만하여 고통 속에 있던 한씨가 어렵게 몸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다.
몸종이 곁에서 거들어준다.
왕륭 : (다가가며) 오 그대로 계시오.
한씨 : 나으리......
왕륭 : 괜찮소. 누워 계시구려..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한씨 : 소첩이 무슨 고생이랄 게 있겠사옵니까? 나으리께서 고생이 많으셨겠지요?
왕륭 : 나야 땅보다 배 위가 더 편한 사람이 아니오? 허허허.. 고생이야 지금 부인이 하고 계시는구료.
한씨 : .......(신음) 아, 아니옵니다.
왕륭 : (손을 잡아주며) 내 부인의 산달을 알고 있었소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왔어요.
한씨 : 잊지 않으셨으니..... 다행이옵니다.
왕륭 : 도선대사께서 예언해주신 그대로예요. 참으로 신묘한 일이 아니겠소이까 부인?
아들일 겝니다. 대사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한씨 : (고통 속에 미소)......
왕륭 : 아이의 이름은 벌써 정해졌소이다. 건이에요, 건이, 왕건이에요. 우리 가문의 사대 손이올시다. 허허허...
한씨의 산고가 더욱 심해진다.
왕륭 : 고통이 심하신 모양이구료. 여봐라, 의원은 어디 있느냐?
몸종 : 밖에 대령중이옵니다.
왕륭 : 부인 힘을 내시구료. 힘을 내세요.
씬29. 마당 별채 근처 어느방
유모가 부축되어와 구석방에 들여지고 있다. 어린 궁예가 입을 앙다물고 보고 있다.
장식장 : 천만 다행인 줄 아슈. 우리 성주님을 만났으니 이만했지 꼼짝없이 얼어죽었을 게구먼.
유모가 안으로 넣어지고 막 궁예가 들어가려는데 왕륭이 안채에서 나오고 있다. 별채로 가는 중인 것이다.
궁예와 시선이 마주친다.
왕륭 : 오, 아까참에 보았던 아이로구나. 그 아낙은 좀 어떠한가?
장식장 : 정신을 못 차리고 있사옵니다. 아무래도 힘들어 보이옵니다.
왕륭 : 저런, 쯧쯧쯧....... 잘 거두어 주라고 일러라.
장식장 : 예 주군!
왕륭 : (궁예에게) 총명하게 생겼구나. 이름이 무엇인고?
궁예 : 궁예라 하옵니다.
왕륭 : 그래, 고생을 많이 한 것 같구나. 쉬거라.
왕륭이 다시 사랑 쪽으로 향한다. 궁예,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본다.
씬30. 동 집 안채
한씨의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다. 밖에서는 하녀들이 전전긍긍이다.
씬31. 동 방 안
의원이 진맥을 하고 있다. 난감하고 당황한 듯 어쩔줄을 모른다.
계속되는 한씨의 신음소리.
하녀 : 어떻게 좀 해보시어요? 시간이 너무 오래지 않습니까?
의원 : 그러게 말이오. 허, 이거 참......
한씨의 비명은 더욱 더 커져간다.
씬32. 그곳 별채
왕륭과 가신들 그리고 강장자, 유장자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웃음 소리들. 한참 담소를 하는 중인데......
강장자 : 사방이 시끄러운 때 입니다. 노중에 어려움이 많으셨겠습니다.
유장자 : 그러셨겠지요.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가셨다구요?
왕륭 : 예. 일본의 니니와라는 곳에서 한동안 머물렀었지요. 그리고 서라벌을 들렸다오는 길이올시다.
강장자 : 서라벌까지요?
왕륭 : 예. 여러가지로 왕실의 사정도 좀 볼 겸해서요.
왕평달 : 그곳도 매우 어지럽다고 들었사옵니다마는.....
왕륭 : 당나라도 그렇고 서라벌도 그렇고, 요즈음 어지럽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가져간 물건들은 모두 동이 났다네.
강장자 : 어련하셨겠습니까? 왕성주께서 실어오는 물건들은 모두가 진귀한 것인데요. 서로 차지하려고 몸싸움들깨나 했겠습니다.
모두 ‘와’ 웃는다.
씬33. 구석방이 보이는 동 집 마당
한씨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하녀들이 급히 오가고 있다.
씬34. 그 구석방
이곳에서도 어렴풋이 한씨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유모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있다.
유모 : 궁예야..... 여.. 여기가... 어디냐....?
궁예 : 이젠 살았어요, 어머니. 여기 성주님이 우릴 구해주셨어요. 먹을 것도 갖다 주었어요. 밥이에요. 보세요, 어머니.
궁예가 구석에 있는 밥상을 가리킨다.
유모 : 어서.... 먹... 먹지.. 않구....
궁예 : 어머니와 함께 먹겠어요. 보세요, 흰 쌀밥이에요.
유모 : (측은히 보다가) 아무래도... 나는... 여기서.. 일어나기 어려울 것... 같구나....
궁예 : .......?
유모 : 세달사가... 여기서.. 얼마나 남았다... 하더냐...?
궁예 : 삼십 리는 더 가야 한다고 했어요. 일어나세요. 우리는 며칠이나 굶었잖아요.
그러나 유모는 기운이 없는 듯 다시 눈을 감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몰아낸다. 간장이 끊어지듯 계속되는 그 기침소리. 더욱 숨이 가빠온다.
궁예를 본다.
궁예 : 왜 그러셔요, 어머니?
유모 : 우... 우리가... 그... 못된 놈들의.... 손아귀는 벗어난... 모양이다....
어서... 세달사로 가야... 하는데..... 버..범교 스님을.... 만나야 한다....
궁예 :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어머니, 왜 그러셔요? 정신 차리세요.
유모 : 내... 내가... 죽더라도... 세달사를... 찾아갈 수 있겠지....? 그렇지.... 궁예야...?
궁예 : 어머니가 왜 죽나요?
유모 : 이젠.... 다 되었다.... 아... 아... 세달사까지는... 가야 하는데.... 여기서 눈을... 감게 되었...구나.... 궁예야..
궁예 : 어머니......?
유모 : 그.. 보퉁이... 그 보퉁이를... 이리... 내거라....
궁예가 보퉁이를 끌어당긴다.
유모가 죽어가며 필사적인 힘으로 그 보퉁이를 풀어 무언가를 꺼낸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봉황의 노리개이다.
유모 : 가까이.... 가까이.... 오.. 오너라.....
궁예 : 왜 그러셔요, 어머니?
그러면서도 가까이 가면 유모가 떨며 그것을 쥐어준다.
유모 : 잘... 간수.. 하거라....
궁예 : 이게 무엇입니까?
유모 : 시.. 신라... 왕실의.. 증표이니라...... 와... 왕실의 증표....
궁예 : .......?
유모 : 잘.. 듣거라....너는..왕실의... 사람이니라... 왕자님..이시니라... 그 때문에... 우리는.. 쫓기는 것..이니라....
궁예 : (놀라서) 어머니!
그때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온다.
장식장 : (E) 무엄하오. 여기는 송악성의 성주님이 계신 내아요.
소리2 : 역적의 무리가 이곳에 숨었다 들었소. 문을 여시오!
장수장 : (E) 어허, 대체 여기가 어딘줄 알고 이러시오?
유모 : (놀라며) 어서... 그것을... 깊이... 가.. 감추어라... 어서.....
요란한 소리들이 계속된다.
유모가 독기를 품으며 비수를 빼어든다.
씬35. 그곳 대문
산길에서 이들을 쫓던 군사들이 몰려와 있다. 장수광과 군사들이 그들을 막아서고 있다.
변씨 : (나오며) 무슨 일들이신가?
군관 : 우리는 각간 위홍님의 명을 받고 역적의 무리를 쫓는 중이외다. 이곳에 수상한 자가 들었다 들었는데 내어주셨으면 하오.
변씨 : 이곳이 성주님이 계신 곳이라는 것을 아는가?
군관 : 알고 있소. 허나 우리는 위홍님의 명을 받고 왔단 말이오.
변씨 : 네 이놈! 이곳은 송악이고 여기는 송악의 성주님께서 계시는 곳이다. 네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이냐?
그 사이 왕륭이 저 만큼 보고 있다.
이들 비로소모두 허리를 굽히고 예를 표한다. 추적해온 군관들도 마찬가지다.
왕륭 : 지금 각간 위홍님의 함자를 들먹거렸느냐?
군관 : 그러하옵니다. 소관은 한산주 남천정의 군관이온데 서라벌의 영을 받고 대역죄인의 뒤를 쫓는 중이옵니다.
각간 위홍님의 특별한 명이시옵니다.
왕륭 : 나 또한 각간님과 아주 각별한 사이이니라. 역적의 무리라면 잘못 짚었느니라.
군관 : 분명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왕륭 : 그런 자들은 없느니라. 안채에 산모가 있어 소란을 금하고 있으니 돌아가도록 하거라.
군관 : 성주님......!
왕륭 : 그런 자들은 없다고 하였느니, 다른 곳에 알아보거라. 문을 닫아라.
변씨 : 문을 닫으랍신다!
장수장 : 예... 문을 닫아라.
그러자 지키던 군사들이 문을 닫는다.
씬36. 동 집안 마당
다시 별채 쪽으로 가려던 왕륭이 이상한 듯 구석방을 본다.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왕륭의 눈치를 보는 변씨.
변씨 : 주군, 저 걸인 아낙을 닦달해 보아야겠사옵니다. 대역죄인이라 하지 않사옵니까?
왕륭 : (도리질)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난세일세. 걸핏하면 대역죄인이 만들어지고 있어.
기왕에 길 잃은 새가 우리 둥지에 피해들어 왔네. 놓아두게.
변씨 : 예, 주군.
그때 안채에서는 여전히 한씨의 비명이 다급해지고 있다.
왕륭이 고개를 갸웃하며 근심같은 표정으로 안채로 간다.
변씨가 다시 한 번 구석방을 바라보고는 사라지고.....
씬37. 그 구석방
유모가 듣고 있다가 사람들이 사라지자 스르르 비수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무너진다.
궁예가 달려가 손을 잡는다.
이미 유모의 동공이 풀려가고 있다. 그리고 더욱 가빠진 숨소리.
궁예 : 어머니, 왜 이러세요?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
유모 : (죽어가며) 구...궁예.. 왕자님....
궁예 :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흔들며) 제발 정신좀 차리세요. 왕자님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유모 : 잘.. 들으세요.... 궁예님은.. 나의 아들이 아니라......
궁예 : 어머니?
유모 : 구... 궁예님은... 왕자..님이십니다..... 나는.. 어머니가... 아니라.. 유모이옵니다...
궁예 : .......?
유모 : 그... 신표.. 신표를.... 범교..스님께.... 드리세요..... 그.. 신표..
궁예 : (다급하다) 어머니? 어머니?
그 위로 들려오는 한씨의 비명소리.
어쩔줄 모르는 궁예.
더욱 크게 들려오는 한씨의 비명소리에서......
씬38. 안채 한씨의 방 앞
왕륭이 어쩔줄 모르고 서성거리고 있다.
의원이 송구스러운 듯 방안 동정을 귀담아 듣고 있다.
왕륭 : 자네는 의원이 아닌가? 왜 이렇게 출산이 늦단 말인가?
의원 : 산모께서..... 늦은... 초산이신지라.....
왕륭 : 허.. 이거 참.....
씬39. 동 방 안
모두들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다.
한씨는 초죽음이 되어가고 있다. 하녀들이 줄을 단단히 잡으라고 이르고 있다. 힘을 주라고 소리치는 하녀도 있다.
그 찢어지는 비명소리.
씬40. 그 구석방
한씨의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떨고 있는 궁예. 유모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궁예 : 어머니... 어머니...
유모 : (죽어가며) 세달사... 세달사로.. 가야.. 합니다..... 오.. 오... 불쌍한... 우리 왕자님.....
이.. 유모는... 어머니가... 아니랍니다.... 아... 아... 마지막으로... 절이라도.. 올려야 하는데.... 아.. 아.. 우리.. 왕자님....
궁예 : 죽지 마세요. 어머니, 죽지 마세요.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 어머니!
유모 : .....세.. 세달...사.... 세달사...
유모의 동공이 멈추어졌다. 죽은 것이다.
궁예 : (절규) 어머니! 어머니!
그때 저쪽에서 한씨의 비명 끝에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씬41. 그 안채 방 밖
여전히 왕륭이 서성거리고 있다. 그러나 아기의 목소리에 기쁜 표정이 확연하다.
왕륭이 즐거워하다가 놀란 듯 하늘을 본다. 마당 하늘 가득히 자주빛 광채가 마당으로 내려서며 휘돌기 시작한다.
하녀 하나가 달려나온다. 그녀도 놀란 듯 이 성스러운 기운을 본다. 그러다가 왕륭에게 이른다.
하녀1 : 성주님 기뻐하시오소서. 아기씨는 사내 아기씨이옵니다.
왕륭 : 뭐라.....?
하녀1 : 사내 아기씨이옵니다.
왕륭 : 오, 그래.... 사내란 말이지? 아들이란 말이지? 으하하하하하. 아들이다. 아들이야.
도선대사의 말씀이 신묘하기만 하구나.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니라.
이 가득한 빛을 보아라. 이는 하늘이 내리신 것이니라. 하늘이 내리신 아들이니라.
해설 : 서기 877년 정월, 마지막 날 후삼국을 통일하고 대고려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게 되는 태조 왕건은 이렇게 태어났다.
고려사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태조 신성대왕의 성은 왕씨요, 이름은 건이요, 자는 약천이니, 송악군 사람이다.
그는 세조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위숙왕후 한씨이다. 정유년 정월 별술일에 송악 남쪽 저택에서 나시니
그때에 신기한 광채와 빛의 기운이 자욱하여 방을 비추고 뜰에 가득하여 서리었다라고 씌여있다.
씬42. 동 방안
아기가 울고 있다. 하녀들의 손놀림이 부산하다.
한씨가 지친 듯 누워있다.
씬43. 그 마당
장자들은 보이지 않고 가신들과 집안의 주요 인사들이 왕륭을 향해 일제히 축하를 드리고 있다.
일동 : 아드님의 생산을 경하드리옵니다.
왕륭 : 고맙소. 나도 기쁘오. 오늘은 모두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취하라.
광문을 활짝 열고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오거라. 내 오늘 풍성한 잔치를 열 것이니라.
일동 : 성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시옵니다.
마씨 : 자, 우리 모두 아기씨의 나심을 축원하십시다. 아기씨 만세! 건이 아기씨 만세!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다. 온통 시끄럽고 부산하다.
그때 장수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변씨에게 뭔가를 전해준다. 변씨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변씨 : 뭐라....? 그.. 아낙이 죽어?
장수장 : 예, 변 사부님.
변씨 : 음.... 하필 이런 날에......
씬44. 그 구석방
유모가 마지막 모습 그대로 누워있다. 궁예가 눈물을 흘리며 앉아있다.
문이 벌컥 열린다. 그리고 변씨가 이들을 보고 있다.
궁예 : .......?
변씨 : 네 어미가 숨을 거두었다고? 얘야, 어미가 죽었느냐?
궁예 : .......
변씨 : 너는 어디서 왔느냐?
궁예 : ........ (입을 굳게 다문다)
변씨 : 너는 어디서 왔어? 말해 보거라. 너희들은 누구이며, 왜 관군들에게 쫓겼느냐? 말해 보거라. 너희들은 누구냐?
궁예 : ........
그 야무지고 당찬 외눈박이 궁예의 모습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