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32회>
씬 1 완산주 궁궐 외경
거대한 성곽과 수없이 이어진 전각들을 카메라가 판한다. 정전 쪽으로 잡아들면 아악소리가 높고 우아하게 흐르고 있다.
씬 2 동 정전 뜰
소리 (E) 황제 폐하 납시오.
대문이 활짝 열려있고 수문장인 군관들이 허리를 숙이며 들어서는 황제 일행을 맞는다. 큰 대북이 계속해 둥둥 울리고 있고 기치창검이 뜰안 가득하다. 견훤이 문 안으로 들어서며 본다. 그 크고 넓은 새 궁궐 뜰안에 문무신료들이 가득히 배석해 있다. 황제복을 입고 왕관을 쓴 견훤이 박씨와 더불어 정전 뜰을 지나 옥좌에 오르고 있다. 문무신료들의 앞을 지나 견훤부부가 옥좌에 앉자 아악이 멈추면서 신료들의 으뜸인 능환이 의식을 집전한다.
능환 국궁........... 바이..............
신료들이 일제히 황제인 견훤에게 절을 올린다. 견훤이 끄덕이며 그 절을 받는다. 국궁, 바이 하는 소리들은 네 번에 걸쳐 이어진다. 그리고 견훤은 드디어 손을 들어 이들에게 답례를 한다.
견훤 참으로 오늘은 가슴이 벅차고 감격스러운 날이오. 대 백제국이 다시 살아난 날이오.
모두들 ......
견훤 완산주 성을 들어서면서 그 많은 백성들과 장졸들의 열화같은 환영을 짐은 보았소이다. 그들이 모두 이 땅에 다시 살아난 백제국의 백성들이였소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무한한 영광과 기상을 가지고 삼한을 주름잡아 왔었소이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선조들의 나라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소. 짐이 완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은 그러한 옛날의 분함을 씻으려 함이오.
신료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해설 견훤, 그가 무진주를 점령하여 왕이 되었을 때는 한창 때인 스물 일곱이었고 지금 완산주에 들어온 이해는 중년의 나이인 서른 다섯이었다. 그만큼 세월과 인심을 익힌 노련한 나이였던 것이다. 그는 백제의 재 건국을 발표하면서 국가 창업의 명분을 대중에 알렸는데 당시의 현황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견훤이 서쪽을 휘돌아 완산주에 이르니 사람들이 맞이해 위로하였다.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에 흡족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 내가 삼국의 시초를 상고해 보건데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혁거세가 발흥했으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따라 일어났다. 이렇듯 백제는 금마산에 나라를 연지 육 백년이 되었는데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 수군 십 삼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다. 이에 신라의 김유신과 세력을 합쳐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백제를 쳐 없앴다. 이제 내가 어찌 감히 완산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의 오랜 분원을 씻지 않으랴" 하고 마침내 후백제 왕을 일컫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직을 나누었으니 신라 효공왕 4년의 일이었다, 라고 되어있다.
해설이 끝날 때까지 견훤의 흥분한 연설 모습과 신료들의 모습이 지나쳐 간다. 그리고 디졸브되면서....
씬 3 동 정전 안
견훤을 중심으로 신료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옥좌 앞으로 처음 보는 얼굴들인 박영규와 공직이 나선다.
능환 폐하. 이쪽은 승평군의 대 호족 박영규라 하옵니다.
박영규 신, 박영규 이옵니다.
능환 또한, 이쪽은 매곡성의 성주 공직이라 하옵니다.
공직 폐하, 공직이옵니다.
능환 승평군의 장자 박영규는 오래 전부터 서남해의 동북방 일대를 다스려왔사옵니다. 이제 폐하께오서 완산에 입성하시니 그동안의 모든 것을 들어 폐하께 바치고 신하가 되고자 귀부하였다 하옵니다.
최승우 폐하, 승평의 박영규 장자에 대해서는 소신도 들어서 알고 있었사옵니다. 덕으로써 고을들을 다스렸고 백성들을 많이 위무하여 인심을 얻었다 들었사옵니다. 스스로 폐하께 머리를 조아려 찾아뵈었으니 크게 위로하시오소서.
견훤 허허허... 박영규라고 하였던가?
박영규 예, 폐하.
견훤 실은 짐도 오래 전 금성에 있을 때부터 장군 수달로부터 경의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오늘 이렇게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구려.
능환 폐하, 여기 공직 장군은 오래 전부터 매곡현을 다스리면서 그 본읍의 장군으로 있었사옵니다. 이제 폐하의 대명을 흠모하여 스스로 그 아들들을 볼모로 보내고 신하되기를 청하여 왔사오니 또한 위로하시오소서.
견훤 매곡현이라....? 그 또한 옛날에 백제 땅이 아닌가? 짐에게 옴은 당연한 일이로다.
능환 뿐만 아니오라 아자개님이 계시는 사벌주와도 아주 가깝게 있사옵니다. 우리의 전선이 되어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견훤 고마운 일이로다. 내 결코 경을 잊지 않으리다.
해설 박영규와 공직. 이 중 박영규는 순천 박씨의 시조이며 훗날 견훤의 사위가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중에 태조를 도와 고려 초에 크게 그 위세를 드러낸 인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신라 경명왕의 아들인 강남대군 박언지의 후손이라는 점이 또한 특이하다. 그러니까 그는 신라의 귀족출신으로써 승주 일대를 다스리다가 견훤에게 귀부하였으니 그 영향력을 알만한 일이다.
견훤 도읍을 옮기면서 이처럼 믿음직한 신하를 또한 얻게 되었으니 하늘의 도우심이라 할 것이다. 모쪼록 모든 신료들과도 더불어 가깝게 지내어 그 신의를 돈독히 하도록 하오.
모두들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견훤 이곳에 도읍을 옮기기 전에 짐은 여러 신료들과 의논하여 관부와 관직을 정하였소이다. (능환에게) 이야기해 주시구려.
능환 (앞으로 나서며) 대소 신료들은 들으시오. 그동안 뚜렷한 관직과 관등이 없었으나 이제는 다르오이다. 폐하께서는 이미 신라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큰 땅을 취하셨소이다. 이에 국가 체계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어 폐하의 영을 받아 관직을 마련하였으니 이에 따르도록들 하오.
모두들 예.
능환 (글을 읽는다) 관직, 제 일등급을 이찬(국무총리 급)이라 하며 신 능환이 이를 제수받았소이다.
모두들 ........
능환 다음으로 관직 제 이등급을 파진찬(부총리 급)이라 하며 이에 신 최승우를 제수한다 하셨소이다.
최승우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능환 다음으로 관직 제 삼등급을 아찬이라 하며......
해설 후백제 견훤정권의 관직과 관등. 그것은 모두 열 네등급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대게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직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사기나 기록에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학계에서 여러 기록을 검토, 추측하여 나누어 본 것이다. 어쨋든 견훤정권의 제 일 공신인 능환의 이름은 이렇게 해서 기록에 보이기 시작한다.
능환이 계속해 관등과 관직을 부른다. (해설이 진행되는 동안의 장면, 확실하게 부르지 않아도 됨)
능환 (계속) 관직 제 사등급을 일길찬이라하고 능애를 명하며, 관직 제 오등급은 시랑이라 하여 추허조를 명하고, 관직 제 육등급을 우장군이라 신강을 명하고, 제 칠등급을 좌장군이라 애술을 명하고 제 팔등급을 해장군 능창을 명하며 제 구등급을 장군이라 하고 제 십등급을 인가 별감이라 칭하여 김총을 명하노라. 또한 제 십일등급을 도독이라 하여 종례장자를 무진주 도독과 그 예하 금성태수를 겸하여 명하노라. 이는 어디까지나 관직일 뿐, 크게 그 등급을 나눈 것은 아니니 대소신료는 명심하도록 하오.
모두들 예
견훤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등급이라기 보다는 직무수행에 필요한 직책에 가까운 것이오. 그리들 아오.
모두들 예, 폐하.
견훤 또한 짐은 파진찬 최승우의 청을 받아들여 우리가 백제국임을 대외에 선포하는 동시에 이를 알리기 위해 오월국과 거란, 일본국에도 사신을 파견키로 하였소이다. 그러나 당나라와는 우리 옛 백제를 침공하고 무너뜨린 죄가 있으니 절대로 국교를 열지 않을 것이오. 경들은 이 점을 명심하기 바라오.
모두들 예.
견훤 짐이 나라를 연지 십여년이 가까워 오고 있는데 오늘처럼 기쁜 날은 처음이로다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요, 국가다운 국가를 연 기분이로다. 앞으로 우리의 적은 저 신라보다도 북쪽에 있는 궁예군이 될 것이오. 경들도 나라의 목표와 정책을 정확히 깨닫고 상하 군신이 서로 도와 삼한의 통일을 앞당기도록 하오. 경들만 믿으오.
모두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한 견훤의 표정에서...
씬 4 송악 어느 들판
훈련이 계속되고 있다. 변사부와 장수장이 주축이 되어 한쪽을 맡았고 능산등 세 가신이 또 한 주축이 되어 군사들을 이끌고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창술과 검술, 방패술들이 계속해 병행되고 있다. 왕건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 한쪽에는 바다가 보이고 숱한 선박들이 수리와 개 보수를 하고 있다. 온통 시끄럽고 복잡해 보인다. 왕식렴과 평달이 왕건 옆에 따라 붙고 있다.
왕평달 이보시게 조카. 그래도 다행일세 그려. 본래 수군이라는 것은 바닷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되는 것인데... 생각 밖으로 많은 군사들이 몰려왔네 그려.
왕식렴 아버님. 그것이 모두다 형님의 명성을 듣고들 온 것이 아니옵니까? 대부분 이 근방의 뱃사람들이었사옵니다.
왕평달 그건 그렇겠지.. 그래도 이천이 넘는 대병을 모으기란 쉽지 않은 것인데.. 그만한 군사들이 몰려와 자원을 했으니 참으로 기적같은 일일세. 훈련도 아주 잘 되고 있고....
왕건 그럭저럭 배들도 많이 끌어 모았고 군사도 모았사오나 과연 이들이 전투에 나가 얼마만큼 싸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옵니다.
왕평달 조카가 하는 일일세. 자네가 하는 일은 늘 빈틈이 없었지 않은가? 이들도 틀림없이 대단한 강군이 될 것이네. 이천의 수군이라....? 허허허.. 말만 들어도 얼마나 듬직한가? 자네는 이제 천하에서 제일 강한 수군을 거느린 장군이 되었네. 다른 건 몰라도 수군만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 이 군대는 오로지 자네만이 움직일 수가 있어. 나는 그것이 불행중 다행이라는 것일세. (강조하듯) 아무도 할 수가 없어. 조카밖에는 아무도 이 군대를 못 다스려. 허허허.....
왕건 ........
씬 5 황궁 외경
궁예 (E) 견훤왕이 완산주로 들어갔다?
씬 6 동 궁예의 대전
궁예와 종간, 은부가 모여있다.
궁예 그예 그리로 갔구먼... 그리고 백제국을 선포했단 말이지?
은부 그러하옵니다, 폐하. 옛 백제를 복원하고 의자왕의 억울함을 푼다하였다 하옵니다.
종간 아주 시의 적절한 명분을 내세웠사옵니다. 그것은 백제 땅이옵니다. 그리고 견훤왕 자신이 백제사람이라 말하고 있사옵니다. 견훤왕이 백제인인지 아닌지는 정확치 않지만 백성들의 인심을 모으기에는 그만한 것이 없을 것이옵니다.
은부 또한, 사신들을 중원에 있는 오월국과 거란, 일본국에도 보냈다 하옵니다. 외교적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사옵니다.
종간 그쪽에도 틀림없이 누군가 바깥 세상에 크게 눈을 뜨고 있는 신료가 있는 것 같사옵니다. 이 경황 속에 외국과의 교류까지 생각하다니 말이옵니다.
궁예 (끄덕이며) 그런 것 같구려.
종간 지금 왕건장군이 새로 모병한 수군들을 훈련시키느라 바쁘다고 들었사옵니다. 이제 나라 사정이 어느만큼 안정이 되었사오니 다시 폐하의 영토를 넓히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옵니다.
궁예 그래야겠지...
종간 왕건장군을 전투에 보내시오소서. 이제부터 남진을 시작하시어 임진강과 서해를 지나 비어있는 신라의 땅들을 모두 접수받으셔야 하옵니다. 그럴 때가 되었사옵니다, 폐하.
은부 그러하옵니다. 왕건장군의 수군은 단기간의 훈련으로도 오랜 군대보다 났사옵니다. 본래 바닷사람들 자체가 명령과 복종에 익숙해 있어서 왕건장군은 단시일에 저들을 정형화 시킨 것으로 보고를 받고 있사옵니다.
궁예 (그말에 신이 난다) 그럴게야. 왕건이라면 그럴게야. 보통이 아니거든.... 단시일내에 정예군대로 만들었다...? 충분히 그럴게야.
두사람 ........
궁예 좋소이다. 남진을 하십시다. 우선 북쪽으로는 환선길과 이흔암, 복지겸 장군을 보내도록 하고, 남진을 하는데는 왕건장군을 총도통사로 하여 다른 장군들을 붙여 주십시다.
종간 이번에도 왕장군을 선봉에 두실 것이옵니까?
궁예 왜요...?
종간 왕장군은 너무 젊사옵니다. 위로 나이가 지긋한 장수들이 수없이 많사온지라.....
궁예 (단호하게) 그런 소리 마오. 목숨이 오가는 전장터요. 거기서 무슨 나이를 따진단 말이오? 내원답지 않은 말씀이오. 총 사령이며 도통사에는 왕건장군을 앞세우도록 하시오.
종간 예, 폐하.
궁예 짐이 친히 왕장군의 수군을 열병할 것이오. 영을 내려 모든 장수들에게 전선으로 나갈 준비를 하라 이르시오.
두사람 예, 폐하.
씬 7 송악길
전령들이 달려가고 있다. 그 위로 들려오는 소리
소리 (E) 폐하의 영이시오. 모든 장군들은 갑옷을 입고 출정준비를 하랍시오. 폐하의 영이시오.
씬 8 왕건의 집 회의장
왕건을 비롯하여 유금필, 능산, 박술희, 왕평달, 왕식렴, 변사부, 마사부, 장수장들이 모여있다.
왕건 드디어 폐하의 영이 내리셨소이다.
박술희 그동안 몹시도 갑갑했는데 드디어 전쟁터로 가는가 보옵니다, 허허허.... 어느 전투로 간다 하옵니까?
능산 왜 이리 경망스러운가? 아직 주군의 말씀도 끝나지 않았는데?
유금필 (왕건에게) 듣자하니 남진을 하라하시는 것 같사온데....
왕평달 남진이라면 남쪽으로 진격을 하라?
왕식렴 그러하옵니다. 북쪽으로는 발해국이 있어서 굳이 싸움을 청하여 갈 이유가 없사옵니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목표를 가진 동족이니까 말이옵니다. 결국은 남쪽이지요.
왕건 그렇다네, 아우. 잘 보았어. 우린 남쪽으로 가네. 아마도 금포(김포), 혈구(강화)를 지나서 한강을 거슬러 내려가 남양만(평택 일부)과 죽주, 북원(원주) 일대와 서원경(청주), 중원경(충주) 쪽으로 뻗어가게 될 것이야. 이 큰 땅덩어리가 명색은 신라라고 하지만 실은 주인이 없다네.
마사부 그러나 백제국의 견훤왕도 이 땅들을 노리고 있을 것이옵니다.
변사부 그러나 쉽지 않소이다. 사벌주와 중원경 사이에는 백두대간이 가로 막혀 있어서 그래서 어지간한 성 열배 보다도 더 험하고 높소이다. 그걸 넘어오기란 쉽지 않지요.
왕건 이번 전쟁을 꾀나 긴 시일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동안 식렴 아우는 아버님을 도와 집안 일을 차질이 없도록 하게 할 것이야.
왕식렴 예, 형님. 명심하겠사옵니다
왕건 그리고 우리가 전투에 나가기 전에 미리 사람을 보내 검포와 혈구, 한강 일대에 이르기까지 그 고을의 수장들을 잘 달래도록 해야 할 겝니다. 그들은 모두 옛날에 우리 바다의 친구들이었어요. 싸우기 보다는 말로 설득함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유금필이 자네가 맡도록 하게.
유금필 예, 주군.
왕건 능산은 우리 수군을 지휘하여 군대를 둘로 나누고 술희와 더불어 그 선봉을 맡게.
능산 예, 주군.
왕건 자, 우리가 전선에 나가기전에 미리미리 서둘러야 할 거야. 일단은 폐하께서 열병을 하신다 하니 모두 준비들을 하도록.....
모두들 예.
씬 9 황궁 앞
수천의 군사들이 도열해 있다. 궁예가 황후와 함께 박지윤등 여러 장자들과 종간, 은부 등을 데리고 열병하고 있다. 왕건이 백마 위에 올라 다가오는 궁예와 황후들에게 군례를 올리고 있다. 황제를 맡는 장졸들의 환호가 물 끓듯이 흐른다. 궁예는 자못 상기되어 왕건을 본다.
궁예 왕장군
왕건 예, 폐하.
궁예 그대는 짐이 믿는 장군이야. 장수중의 장수야. 대 고려국의 상징이야. 비어있는 신라땅을 모두 받아오게나.
왕건 그리하겠사옵니다, 폐하. 삼한의 땅을 모두 되찾아 폐하께 올리겠나이다.
연화 .......
궁예 신라 땅도 돌려받고 나아가 저 백제땅도 모두 받아낼 것이야. 그대라면 할 수가 있어. 짐은 알아.
왕건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궁예 허허허, 이보시오, 황후? 왕장군이 전장터로 가는 길이오. 뭐라 축원의 말을 해야 않겠소?
연화 (그제서야) 장군, 무사히.... 개선하십시오.
궁예 무사히 개선이라...? 핫 하하하........ 겨우 그 말 밖에는 못하오? 삼한의 모든 땅을 다 가지고 개선가를 부르며 오십시오, 이정도는 되어야지. 어쩔 수 없는 여인네로구먼....허허허허......
왕건을 툭 쳐주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궁예. 장졸들의 환호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손으로 그들을 가라앉히는 궁예.
궁예 (대중에게) 장졸들은 들으라. 오늘 그대들은 대 고려국 짐의 군사가 되어 저 적도인 신라 원정길에 나섰느니라. 신라는 우리의 원수이니라. 대 미륵의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서 둘도 없는 마군이니라. 저들에게 항복을 다짐받고 땅을 찾으라. 짐이 그대들을 기도할 것이니라. 하늘과 산천의 신들이 도울 것이니라.
장졸들 와..... (함성)
종간, 은부 ...............
신료들 ................
궁예 출진하라. 가서 짐의 위용을 만천하에 드러내도록 하라.
홍유 출진하랍신다. 폐하의 영을 받들어라. 출진하라.
왕건 출진하라.
대북소리가 울리면서 소라가 운다. 그리고 왕건이 막 군례를 올리고 백마를 몰아 방향을 틀어 가기 시작한다. 유금필, 능산, 박술희와 더불어 장군들로서는 홍유, 배현경, 김락, 김언 등이 궁예 앞을 지나며 군례를 올리고 지나쳐 간다. 그렇게 그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면서 디졸브...
씬 10 몽타주
1. 어느 강변 길, 왕건과 그 일행들이 행군하고 있다. 강심에는 수많은 배들이 돛폭을 올리며 가고 있다.
2. 어느 산중 길, 환선길, 이흔암, 복지겸 들이 가고 있다.
3. 황궁의 대전에서는 대형지도를 탁자 위에 놓고 궁예와 종간, 은부가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디졸브로 넘어가면서...
해설 견훤이 완산에 도읍을 정하고 난 그 이후, 궁예는 비로소 대외에 고려국의 국호를 드러내면서 남정북벌에 나섰다. 이때, 북쪽에는 발해국과 이들 궁예군 사이에 큰 완충지대가 있었다. 이른바 주인이 없는 땅들이었다. 궁예는 그곳으로 환선길을 비롯하여 일진의 군대를 파병하여 정벌에 나섰고 또 남쪽으로는 이렇게 왕건을 시켜 지금의 서울인 한주 일대를 공략하는 전법을 썼다. (지도가 수파된다. 왕건이 지나치는 길로 화살표가 흐른다. 송악으로 하여 예성강, 임진강, 강화, 서울의 한강, 광명, 안산, 수원, 안성, 평택, 원주, 청주 쪽에 이르기까지 화살표가 뻗어가고 있다) 왕건은 그 진공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그의 앞길에는 거의 전투가 없었다. 김포와 강화 지역은 그 옛날 그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고을들이었고 한강 주변도 또한 그러하였다. 그는 군사를 몰아 내려간지 불과 채 한 달도 아니되어 삼십개의 군현을 복종시켰다. 실로 싸움으로 치면 너무도 싱거운 것이었고 그 결과로 말한다면 놀라운 것이었다. 한편 백제의 견훤은 왕건의 발빠른 남진을 첩자들을 통해 보고 받고 있었다.
씬 11 완산주 외경
견훤 (E) 고려의 왕건이 삼십여 군현을 먹어치워?
씬 12 동 대전 안
견훤이 놀라서 최승우를 보고 있다.
견훤 아니, 변변한 싸움도 없이 삼십, 삼십 여개의 군현을 그 어린 왕건이란 아이가 취했단 말인가?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또한 북쪽으로는 고려의 옛 도읍지였던 평양 근처까지 고려의 북군이 북상중이라 하옵니다.
능환 평양까지 말인가?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견훤 북쪽이야 가다보면 발해국에 막힐 것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왕건이가 오고 있는 이 남쪽이 문제가 아닌가?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폐하. 지금 당성진(남양만)을 지나고 있다 하니 그 여세를 몰아 틀림없이 중원경(충주)를 거쳐 서원경(청주)에 이를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조령을 경계로 하여 사벌주를 엿보게 될 것이옵니다.
견훤 (놀라서) 사벌주를....?
능환 그러하옵니다, 폐하. 어떻게 하든 아자개님이 계시는 저 사벌주 성을 해결을 보아야 할 것이옵니다.
견훤 (답답하다) 어떻게 해결을 볼까? 내 아우 능애가 다녀왔고 또 여기 최학사가 다녀왔어. 저 고집불통의 아버님을 어쩌란 말인가? 아이구, 답답하이, 답답해.... 아주 그 사벌주 생각만 하면 십년 묵은 체증이 도로 도지는 것 같으이... 그저 막막하고 답답해... 어이구....
박씨 답답해만 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어떻게 하든 결국은 폐하께서 이 일을 해결하셔야 하옵니다. 아무도 못하옵니다.
견훤 그런데 방법이 없단 말이오, 방법이.... 궁예의 북군이 남진하여 오고 있다고 하지 않소? 결국은 아버님의 성을 노릴 것이란 말이오. 그런데도 나는 속수무책이야. 이런...
능환 왕건의 군대가 온다고 하여도 사벌주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옵니다. 또, 저 험하고 높은 태백 줄기의 조령을 넘는다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옵니다.
최승우 그러나 문제는 언젠가는 틀림없이 온다는 것이옵니다.
견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저들이 틀림없이 온다는 것이야.
최승우 사벌주는 신라 구주의 하나였사옵니다. 그러나 아자개님께서는 그 큰 주를 다 갖고 계시는 것이 아니고 본성과 더불어 세 개의 군만을 가지고 계시옵니다. 나머지는 모두 아직도 신라의 영역이옵니다.
견훤 .........?
최승우 그 땅들을 취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박씨 그래도 아버님의 영지입니다. 어떻게 자식이 되어 아버님의 영지를 치란 말입니까? 사벌주에는 손을 대지 못합니다.
최승우 황후마마. 적들이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적들이 가져갈 것이옵니다.
견훤 어이구... 그만, 그만하세. 아직 시일이 남았으니 그 일은 좀 더 연구를 해 보세나.
그때, 밖에서 김총이 아뢴다.
김총 (E) 폐하, 승평의 박장자께서 드셔 계시옵니다.
견훤 박장자가...? 우리 나가 보세나.
두 사람이 대답하며 견훤이 몸을 일으켜 나간다. 박씨가 한숨을 쉰다.
박씨 대체 어찌하여 이들 부자분은 끝내 화해를 하지 못하시는고...아이구 답답해....
씬 13 동 대전 앞 어느 전각 (접견장)
견훤들이 들어서면 박영규가 고비를 데리고 오다가 예를 올린다.
견훤 어쩐 일인가?
박영규 폐하, 신 박영규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사옵니다.
견훤 오, 앉게나. 이 처자는 누군인가?
박영규 신의 일가에서 데려온 처자이옵니다. 신이 진심으로 폐하께 위로를 드리고자 올리나이다, 가납하시오소서.
견훤 여인을 받으라는 것인가?
최승우 허허허, 폐하. 아마도 폐하께 충성을 다짐하는 의미로써 시침을 올리는 것 같사옵니다.
박영규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 처자는 예의범절은 물론이고 폐하를 모실 수 있는 많은 덕을 공부하였사옵니다. 부디 신의 뜻을 받으시어 폐하의 시종이라도 들게 하여 주시오소서.
견훤, 고비라는 여인을 본다. 미색이 뛰어나다. 마른 침을 삼킨다. 고개를 끄덕인다.
능환 참으로 덕과 복이 뛰어나 보이옵니다, 폐하. 박장자의 충정을 받으시오소서.
견훤 허어, 이 사람들아. 그러다가 황후가 알아보게. 날보고 어쩌라는 것인가?
최승우 지역에 힘이 있는 장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군주로써 당연한 것이옵니다. 서로간의 의중에 피를 섞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겠사옵니까?
견훤 으응......?
능환 고대의 일을 상고해 보아도 본래 군주의 자리에 계시는 분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영향력있는 곳에 혼인정책을 맺는 것이 보편화가 되어 있었사옵니다. 박장자의 뜻을 받으시오소서.
견훤 어허, 나 이런....이 일은 먼저 황후에게 의논을 하게. 이 사람은 무슨 편지풍파를 일으키려고..... 내가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이네마는...황후에게만은 다르네.
모두들 ....(웃는다)
견훤 웃을 일이 아닐세. 하여간에 경의 뜻은 내 충분히 받겠네. 이름이 무엇인가?
고비 고비라 하옵니다, 폐하.
견훤 허어, 이름 또한 아름다운지고.. 고비라....? 일단 대전에 있으면서 짐의 주변을 돕도록 하라.
박영규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고비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경의 충성심은 참으로 고마우이. 자, 자 우리 모처럼 술이나 한잔 하세 그려. 지금 궁예의 왕건장군의 일로 머리가 한참 복잡하였다네. 그 이야기나 좀더 해보세 그려. 하하하하.......
그러면서도 견훤은 연신 고비를 본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씬 14 송도 황궁 외경
씬 15 동 대전
궁예와 종간, 은부가 마주해 있다.
궁예 백제의 최승우라는 자가 있었단 말이지?
은부 그러하옵니다. 첩자들의 보고를 받았사옵니다. 능환이라는 모사와 더불어 당대의 학자인 최승우가 견훤에게 붙어있다 하옵니다.
궁예 그랬었구먼.... 범이 날개를 단 격이네 그려.
종간 그러하옵니다. 그러니까 왕을 칭한지 팔년만에 이제서야 자신감을 얻어 백제국의 복원을 선포한 것이옵니다. 최승우는 역시 대단한 자이옵니다. 어찌 되었든 대외에 국호를 내놓은 일은 여간한 준비나 각오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옵니다.
궁예 우리는 오래 전부터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쓰지 않았소?
종간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대외에 선포한 적은 없었사옵니다.
궁예 지금 전선에 나가있는 장수들이 모두 고려의 깃발과 국호를 쓰고 있소이다. 그것이 바로 대외에 선포한 것이 아니겠소?
종간 그러하옵니다. 따라서, 폐하께서도 이제는 주변국과의 외교관계를 생각치 않을 수 없사옵니다. 발해국, 오월국, 일본국과도 백제처럼 외교관계를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궁예 (끄덕인다) 그럴 필요가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오. 저 신라와 백제를 다 평정하고 나서 생각해 보십시다. 견훤이의 흉내를 낼 수는 없지 않소? 그까짓 오월이나 일본 따위가 무엇이라고 우리가 자청해서 찾아가 인사를 한단 말이오? 그것은 나중에 생각하십시다.
두사람 ........
궁예 나중에 무엇하면 저 일본이나 오월, 아니 중원 대륙을 아예 우리가 평정해 버리면 될 것이 아니오.
종간 그렇기는 하옵니다마는..... 하하하하.... 역시 폐하께오서는 참으로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계시옵니다.
궁예 기왕에 사내들이 되어 천하의 자웅을 겨루기 시작했소이다. 삼한의 끝자락을 쥐고 욕심을 낼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저 대륙의 벌판을 바라봐야지... 옛 고구려처럼 말이오. 허허허......그리 될게야. 벌써 왕건이 삼십여개 성을 함락시켰다 하오. 삼십개의 성이야.
종간 신도 그 소식을 듣고 참으로 놀랐사옵니다.
궁예 벌써 수성군을 넘었다지? 그리고 남양만도 접수하고....?
은부 그러하옵니다, 폐하.
궁예 .......다음은 어디가 되오? .
은부 아무래도 죽주로 향하지 않겠사옵니까? 옛날에 폐하께서 계시던 곳이옵니다.
궁예 죽주라....? 그렇다면 북원이 가깝지 않소?
종간 그리 되옵니다. 북원의 양길이 아무래도 걱정이 되옵니다마는.....
은부 기왕에 죽주로 가고 있다면 아예 이번에 북원성까지 쳐야 할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옵니다.
궁예 그곳은 아니되오. 더 이상은 북원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래도 옛 정이라는 것이 있지 않소?
종간 정리에 이끌리시어서는 아니되옵니다. 이 기회에 북원도 폐하의 영토로 삼으시고 또한 지금 후원에 계시는 마님의 일도 끝을 보셔야 할 것이옵니다.
궁예 이런.... 이런.... 모든 것은 다 순리대로 해야 하오. 그런 말은 입에 담지도 마시오. 양길도 놓아두고 북원부인에 관한 일은 다시는 논하지 마시오.
은부와 종간, 낮은 한숨을 내쉰다. 궁예의 의지가 굳은 얼굴에서......
씬 16 후원 외경
미향 (E) 왕건장군이 승리를 계속하고 있다고?
씬 17 동 후원 방 안
미향 세상에... 싸움에 나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삼십개의 성을 빼앗아...? 대단하구나..
월이 폐하도 기뻐하시고 모든 신료들이 난리라 하옵니다.
미향 싸우는 일들이 무엇이 좋다고 그렇게 난리라더냐?
월이 (바짝 다가들며) 하옵고... 마님.. 아주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미향 희한하다니...? 무슨 이야기인데...?
월이 궁녀들이 수근거리는 이야기를 들었사온데...황후마마 말씀이옵니다. 글세, 궁에 오시기 전에 정인이 계셨다하옵니다. 서로 사모하는 사이 말이옵니다.
미향 그게 무슨 소리냐...? 황후께오서 누구하고....?
월이 왕건장군이라 하옵니다. 그 분과 오래 전부터 정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옵니다.
미향 세상에....어떻게 그런 일이... 허면 폐하께서 그 일을 모르신단 말이냐?
월이 예, 마님. 모두들 쉬쉬했다 하옵니다.
미향 세상에.... 그래서 황후마마의 얼굴이 늘 그늘에 잠겨 계셨구나. 가여운 지고....
그때, 제조상궁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제조상궁 (E) 북원부인께 아뢰옵니다. 황후마마께서 납시셨사옵니다.
미향 ...............?
씬 18 동 방 밖
문이 열리면서 미향과 월이가 허리를 숙이면서 황후를 맞는다.
미향 어서오시오소서. 마마. 어인 왕림이시옵니까?
연화 이몸이 넓은 대궐 안에서 갈 곳이 어디 있겠소? 부인이 보고 싶어 왔다오.
미향 안으로 드시오소서.
연화 그리 하십시다.
황후가 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문이 닫기면서...
씬 19 다시 동 방안
이들 두 사람 차를 마시고 있다.
연화 괜히 귀찮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미향 아니옵니다.
연화 참으로 대궐은 너무 넓어요. 하지만 어디를 봐도 다 막혀 있습니다.
미향 (한숨처럼) 예, 황후마마... 그런 것 같사옵니다.
연화 예전에 궁궐이 서기 전에는 이곳은 모두 왕건이라는 장수의 사가였습니다. 대단했지요.
미향 ..........?
연화 (생각한다) 그 때는 거리와 객관마다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이쪽은 여러 외국 상인들로 넘쳐났어요. 나도 자주 왔었답니다.
미향 예...
연화가 쓸쓸한 미소를 띄운다. 미향이 그런 연화를 본다. 두 사람은 뭔가를 공감하고 있다. 한동안 말이 끊긴다.
연화 (차를 두어 모금 마시다가) 북원부인께서는 폐하께 오시긴 전에 무얼 하셨소?
미향 그저 성안에만 갇혀 살았사옵니다.
연화 혹시.... 폐하께 오시기 전에 누군가를 사모해 본 적이 있습니까?
미향 ........
연화 (한참 보다가 미소) 괜한 말을 했나 봅니다, 호호호....
그러나 그 연화의 웃음은 왠지 쓸쓸하고 허전해 보인다.
연화 여인에게 있어 누군가를 사모한다는 것은 괴로우면서도 기쁜 일이지요. 사내들은 야망을 위해 목숨을 걸지만 우리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겁니다. 남정네들은 우리 여인들을 몰라요.
미향 .......?
연화 그래요.. 결국은 어느 쪽이 더 미련한지 대답이 나오질 않지만....누군가를 사모해 보았다는 것은 두고두고 상처로 남는 것이지요. 그래도 부인에게는 그런 것이 아니 보입니다.
미향 ...........
연화 폐하께서 부인에게는 첫 남정네이셨나 봅니다?
미향 (한참 대답이 없다가 끄덕이며 눈물을 떨군다) 어쩌다 보니 소녀에게 그렇게 되었사옵니다. 폐하께서 첫 남정네이시옵니다.
연화 이런... 부인, 우십니까?
미향 소녀가 원망스러워 그러하옵니다. 제 자식을 빼앗아 가고 저를 외면하고 아버님을 죽이려 하시는 폐하시옵니다.
우리 집안의 원수이옵니다. 연화 ......?
미향 그런데도 이 미련한 것은 어느새 폐하를 사모하고 있사옵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사옵니까? 이것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미향이 드디어 소리내며 흐느낀다. 연화, 연민으로 보다가는 등을 토닥거려 준다.
연화 실컷 우세요, 부인.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원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우세요. 정이라는 것이 그래서 더럽고 무섭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한숨을 쉬며) 아무리 이를 깨물고 버리려고 하여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이) 때로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헤맬 때도 많습니다. 정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랍니다.
허공을 보는 쓸쓸한 그 연화의 표정에서
씬 20 길 (인서트)
왕건이 앞을 섰고 제장들에게 쌓여 행군해 가고 있다. 숱한 기치창검이 길을 수놓고 있다. 그 앞으로 뭉개구름이 한없이 밀려간다.
양길 (E) 뭣이라고, 왕건이 죽주로 오고 있어...?
씬 21 북원성 외경
씬 22 동 성안 양길의 거소
양길은 펄펄 뛰고 있다. 명길과 사위 2가 부장들과 함께해 있다.
양길 죽주로 온단 말이지? 죽주는 나의 관할이야. 이제는 이놈들이 아예 작정을 하고 이 양길이를 업신여기는 구만...
명길 한강주를 비롯한 당성진의 대다수 성들이 그 왕건이라는 애송이에게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하옵니다. 죽주 또한 언제까지나 형님의 눈치만 보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결국은...
양길 결국은.....?
명길 왕건에게 항복할 공산이 크옵니다. 왕건은 이천의 대병을 거느리고 있사옵니다. 물과 뭍에서 단련된 천하무적의 군대라 하옵니다.
양길 천하무적....?
사위2 그러나 그들은 먼 길을 달려오고 있사옵니다. 군대는 피곤해 있고 싸움도 변변히 해보지 못한 터라 한번 붙어 볼만 하옵니다.
명길 하긴 그렇사옵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옵니다. 지난 번에 우리는 가평의 축령산에서 망신을 당하였지만 이번은 다르옵니다.
양길 ....... (끄덕인다)
명길 이곳은 우리의 영역이옵니다. 우리가 지금 서두르면 저들과 죽주의 비뢰성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양길 궁예, 이놈.....
명길 오히려 저들이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했사옵니다. 군사를 일으키시오소서. 아니면 저들은 틀림없이 이곳 북원으로 올 것이옵니다. 우리가 선수를 쳐야 하옵니다.
양길 우리에게 동원될 수 있는 군사가 얼마나 되는가?
명길 삼십여개 성이 있었으나 모두 배반하여 돌아가 버리고 이제 십여 성 만이 남았사옵니다. 그들을 모두 합치면 한 이천을 될 것이옵니다.
양길 (생각하다 결심한다) 어차피 싸워야 하고 또 저 놈들이 이리로 오고 있어. 내 영을 전하라. 전군에 소집령을 내려라. 죽주의 비뢰성으로 갈 것이니라.
이들이 모두 대답하고 결연하게 일어선다. 양길의 모습도 마지막 결전의 결심이 크게 엿보인다. 그 표정에서.... 디졸브.
씬 23 북원성 성곽
북소리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병사들이 뛰어와 군영마당에 집결한다. 명길과 사위들이 병사들을 모으고 있다. 말위에서는 수장들이 대오를 정돈한다. 북원성이 그렇게 들끓기 시작하고 있다.
씬 24 어느 산야 길
군사들과 임시 군영이 설치되어 있다. 왕건이 먼 들판을 보고 있다. 유금필, 능산, 박술희, 홍유, 배현경, 김락, 김언 등이 함께 해 있다.
왕건 죽주를 지나면서 군사를 반으로 나눌 것이네. 일부는 중원경(충주)으로, 또 나머지는 서원경(청주)로 보내야 할 것이야.
유금필 문제는 북원의 양길이옵니다. 그들이 우리가 죽주를 지나가도록 그냥 있을런지요?
능산 그렇지는 않을 겝니다. 자신의 영토를 지나가고 있는데, 그냥 있겠사옵니까? 더구나 양길이가 말이옵니다.
박술희 그렇구 말구요. 틀림없이 군사를 몰고 올 것이옵니다.
홍유 그렇다고 하여 이리저리 피한다면 천하가 웃을 것이외다. 죽주는 반드시 우리 것으로 만들어 놓고 가야 합니다.
배현경 그러하옵니다. 죽주뿐 아니라 북원까지도 밀어 붙여야지요.
김언 북원까지 말이옵니까?
김락 왜 그리 하지 못하겠는가? 어차피 모두 폐하의 땅이 될 것이야.
왕건 그러나 북원의 양길 장군에 관한 일은 폐하의 특별한 영을 받들어야 합니다. 전령을 띄웠으니 하회를 잠시 기다려 보십시다.
그때,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두 필의 말이 급하게 달려와 왕건 앞에 내려선다. 전령들이다. 무릎을 꿇고 아뢴다.
전령 장군, 양길의 군사들이 오고 죽주로 향하고 있사옵니다. 수천의 군사들이옵니다.
왕건 그래...? 이렇게 빨리 군대를 움직였단 말인가...?
전령 아주 빠르게 남하하고 있사옵니다. 머지않아 이리로 당도할 것 같사옵니다.
왕건 전투준비를 갖추시오.
홍유 예, 장군. 모든 장졸들은 전투준비를 갖추라. 자신의 위치에서 영을 기다리라.
북소리가 울리고 장졸들이 이리저리 뛰기 시작한다. 그 부산함을 보는 왕건의 표정에서....
씬 25 길
양길이 전초부대를 인솔하여 오고 있다. 명길과 사위와 십여 성의 성주들이 위풍당당히 오고 있다.
씬 26 송악 궁궐 대전
궁예와 종간, 은부, 염상, 금대, 장일 등이 모여 있다 .
궁예 북원이 군사를 일으켰단 말인가?
은부 예, 폐하. 지금 왕건장군이 있는 죽주로 빠르게 남하하고 있다 하옵니다.
종간 예견된 일이었사옵니다.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궁예 (한숨) 답답하구먼 나는 그래도 과거의 인연이 있어 되도록 북원을 다치고 싶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현실이 이러하니......
궁예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통스러운 듯 맴돈다. 종간이 그러한 궁예를 본다.
종간 언젠가는 꼭 해결해야 할 일이옵니다. 왕건장군은 죽주를 거쳐 그대로 중원경 쪽으로 가려했으나 이번 전투는 양길이 자처했사옵니다. 싸우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지 않사옵니까?
은부 하명을 하시오소서. 시간이 없사옵니다.
궁예 ......
은부 폐하...
궁예 싸울 수는 없소. 나는 그래도 그 사람의 힘을 빌어 오늘에 이르렀소. 사람이란 정리를 알아야 하는 법이오. 지난번에는 그가 직접 처들어온 것이오. 그래서 마지못해 싸웠으나 이번은 우리가 저들의 영토를 건들었어요. 죽주를 우회해서 갈 수는 없을까?
종간 폐하 답지 않으시옵니다. 이미 저들이 군대를 일으켜 우리 군사가 있는 쪽으로 가고 있사옵니다. 폐하. 인정의 고삐를 끊으시오소서. 제국 건설의 방해물을 제거하는 일이옵니다.
궁예 ........ (사이... 오랫동안 고뇌한다) 이렇게 밖에는 아니 되는가? 이렇게... ? 답답한지고.... 북원군이 우리 군대와 마주칠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 같은가?
종간 이틀이면 서로 대치하게 될 것이옵니다.
궁예 이틀이라.....? 우리 송악에서 전선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은부 육로보다는 뱃길이 빠를 것이옵니다. 역시 이틀길이면 족할 것이옵니다.
궁예 송악에 남아있는 모든 군사를 소집하오. 황성에는 내원께서 남아계시고 모든 장졸들은 짐을 따라 죽주로 향할 것이오.
종간 (놀라서) 폐하..? 폐하께서 몸소... 친정하시옵니까?
궁예 그렇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 일은 내가 해결할 것이오. 결자해지라 하였소이다. 내가 관련된 일이니 내가 풀 수밖에.... 이 일만은 내가 할 것이오. 나의 뜻을 병부에 전하도록 하오.
모두들 예. 폐하...
궁예 그러나 이보시게, 내군장군.
은부 예, 폐하.
궁예 우리가 떠나기 전에 그대가 먼저 가게나. 나는 진심으로 북원과 싸우는 것을 원치 않네. 나의 뜻을 북원성에 전해주게나. 우리는 아직도 얼마든지 화해하고 잘 살수 있다고 말일세.
종간 .........?
궁예 알겠는가....?
은부 예, 폐하. 그리하겠사옵니다
궁예 지금 가게. 당장. 나는 전선으로 갈 것이야. 화해가 되면 아니 싸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싸울 수 밖에.....
은부가 장일을 데리고 그곳을 나간다. 결연한 궁예의 얼굴을 종간도 긴장해서 보고 있다.
씬 27 후원 미향의 처소
미향 뭐라고 하였느냐? 폐하께서 군사를 모으고 계셔...?
월이 그러하옵니다. 왕건장군의 군대가 지금 죽주로 들어서고 있다 하옵니다. 그 때문에 북원성의 장군께서 군사를 일으켜 죽주로 향했다 하옵니다.
미향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왜....?
월이 폐하께오서 북원성의 장군님께 입으셨던 옛 의리를 손수 정리하신다 들었사옵니다.
미향 뭐라.....?
월이 아무래도 이번만은 큰 전쟁이 될 것 같사옵니다. 폐하께오서 직접 가신다 하옵니다.
미향 어이할꼬..... 대체 이 일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예 아버님께서도 끝을 보시는가 보다.....
월이 하지만 실날같은 희망은 있사옵니다. 내군의 은부 장군이 폐하의 영을 받아 화평사절로 먼저 떠났다 하옵니다. 혹시....일이 잘 된다면...
미향 (도리질) ...... 아니다. 이 싸움은 누구도 말리지 못할게야. 나는 아버님을 잘 안다. 아마 이번 전쟁에 목숨을 걸으셨을 게다. 그리 하셨을 게야.
월이 마님.....
씬 28 길 (밤)
은부와 장일이 몇 기의 군사들과 함께 말을 달려가고 있다.
씬 29 송악길
궁예가 종희, 금대, 염상들을 앞세우고 군사들을 이끌고 어둠 속을 가고 있다. 온통 불야성이다. 그들의 모습이 계속 되면서...디졸브되면...
씬 30 어느 계곡 길 (낮)
양길이 대군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
양길 죽주는 우리 영역이야. 우리 땅에서 우리가 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 이번에야 말로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 군세도 서로 비슷비슷하고 싸울 만해.
사위2 ........
양길 두 번 다시 당하지는 않을 것이야.
명길 이를 말이옵니까....? 이 아우도 이번 전투에 목숨을 내 놓았사옵니다.
양길 왕건의 군대는 어디쯤에 있다 했는가..?
명길 비뢰성 밖 천변에 진을 쳤다 하옵니다. 비뢰성의 성주가 군사를 이끌고 이미 왕건의 군대와 대치중이라 하옵니다.
양길 그렇다면 내일이면 우리가 만날 수 있겠구먼... 이놈들... 이번에는 내 꼭 빚을 갚으리라.
씬 31 어느 산 언덕 (왕건의 군영) 부감
왕건이 이끄는 군사들이 천변 언덕에 포진해 있다. 그 맞은 편 언덕에는 비뢰성의 군사들이 포진해 있는 것이 보인다.
씬 32 동 군막 앞
왕건이 제장들을 이끌고 천변 건너의 비뢰성 군사들을 보고 있다
홍유 장군. 송악에서도 폐하께오서 군사를 이끌고 떠나셨다 하오이다.
왕건 ......
홍유 내군장군 은부를 보내시어 일단 양길에게 화친을 한다고 하였소이다.
왕건 화친은 아무래도 어려울 겝니다.
배현경 이미 양길군이 가까이 이르고 있소이다.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소이까?
왕건 페하께서 오고 계시고 은부장군이 사자로 갔다면 내일까지는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합니다. 아니 된 일입니다...... (사이) 결국 장인과 사위가 싸우는 격이 아니오이까?
능산 천하를 놓고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옵니다. 장인 사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유금필 이번 전쟁은 참으로 만만치가 않을 것 같사옵니다. 양길이야말로 이번에는 필사적으로 다가올 것이옵니다.
왕건 그럴 것일세. 우리가 송악을 떠난 이후 최대의 격전이 될 것이야.
<32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