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36회>
씬 1 황궁 궁예의 대전
궁예가 여전히 종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곳에 있던 강장자, 박지윤, 은부 들도 종간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종간 나라 이름을 대외에 널리 공표해야 하는 이유를 조금 전 신이 말씀해 올렸사옵니다. 이제부터는 내실을 다지면서 영토를 넓히되 하나도 또 둘도 나라 이름인 고려를 앞세워 행해 나가셔야 하옵니다. 그리하여 고려, 고려라는 이름이 결국은 천년사직의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옵니다.
궁예 옳은 말이오. 참으로 옳은 말이오.
종간 (계속) 신은 지금 천년의 역사를 지탱해 갈 기초를 다지기 위해 내원을 만들었고 학인들을 끌어 모으고 있사옵니다. 우리는 왜 삼한을 통일한 신라가 이렇게 힘없이 무너져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옵니다. 더불어, 통일된 나라를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모두들 ........?
종간 자주적인 힘을 구축하는 것이옵니다. 외세가 이 땅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나라는 불행해지는 것이옵니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그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였사옵니다.
궁예 계속하시오.
종간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 고구려가 이 땅에 섰사옵니다. 그리고 사백여 년이 지나 광개토대제가 즉위하여 저 중원대륙의 연나라를 꺾고 대륙의 거의 모두를 차지하였사옵니다. 우리 민족이 대륙을 지배하던 시기였사옵니다. 그리고 또 삼백여 년, 도합 칠백 년의 역사를 폐하께서 다시 이어받으셨사옵니다. 폐하께서 그 옛 영화를 재건하실 것이온데, 어찌 나라안에서만 우물우물 국호를 말할 것이옵니까? 대외에 알리시오소서.
궁예 ....... (비로소 희열에 들뜬 표정위로) 그렇소이다. 지난 날을 상고해 보면 결국은 신라가 당에 군사를 요청해 외세를 끌어들였고 그 외세가 고구려를 깨뜨렸소이다. 그 까닭에 지금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은 풀만 무성해 졌소이다. 어찌 우리가 그 원수를 갚고 옛 영화를 되찾지 않으리오. 내원의 말씀은 참으로 당연하오. 조회를 소집토록 하시오. 이 일을 조정에서 짐이 다시금 주지시키리다.
해설 궁예의 고려국 선포. 기록상으로 보면 그것은 서기 901년 단기로는 3234년의 일이 된다. 그러나 실은 그가 철원에 입성할 때인 서기 895년에 이미 나라 이름을 썼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아마도 이 때에 와서 다시 국호에 관한 일이 거론 된 것은 궁예가 이 때 비로소 국가다운 체계를 완전하게 갖추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으로 풀이된다.
씬 2 그 정전
문무 신료들이 모두 모여 있다. 왕건일행은 보이지 않는다
궁예 경들은 들으오.
모두들 예...
궁예 무릇 한 나라가 중흥하는데는 그에 따르는 필연적인 목표와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오. 땅만 넓다고 하여 큰 나라가 될 수는 없는 것이오. 짐은 내원께서 추진하는 모든 사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며 또 적극 동감하는 바이오. 경들도 이에 동참하여 대 고려국이 이 시대에 우뚝 서는데 혼신을 다해야 할 것이오.
모두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궁예 지금 우리는 다시 삼국시대로 돌아왔소이다. 지난 날 신라가 주도했던 통일이 잘못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오. 그 통일을 다시 우리가 이룰 것이오.
모두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이제부터는 더 큰 제국의 발판을 위해 많은 법령과 지켜야 할 의무들이 생기게 되었소이다. 이보시오, 내원?
종간 예, 폐하.
궁예 내원에서 연구한 새로운 나라법을 신료들에게 일러주시구려.
종간 예, 폐하. (기록을 펴 들고) 폐하의 영을 따라 그동안 내원에서 마련한 여러 방안들을 말씀드리겠소이다. 먼저, 우리 고려국은 고구려의 대통을 이어 복원되었음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모두들 .......
종간 또한 우리가 자주 제국임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여러 국가에 사신을 띄워 제국의 창업을 알릴 것이외다.
궁예 .......
종간 지금은 전시 중이므로 지방고을과 국가 중앙이 일사분란하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지방에 있는 여러 호족과 장자, 태수와 관리들의 자제는 의무적으로 이곳 송악에 올라와 황궁을 보좌하게 될 것이오.
그 말에 장자들이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술렁거린다.
종간 또한 삼한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십 년의 전쟁이 소요될 것인바 이에 대한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부서를 두어 각 곳의 세금을 관리하고 징수하게 될 것이며 백성들은 군역과 축성 등 부역에 대한 의무 또한 저야 할 것이고, 이에 대한 상벌을 엄히 할 것임을 폐하의 영을 받들어 공표하는 바이오.
모두들 ..........
해설 종간이 내세우고 있는 이 새로운 법들, 특히나 국외에 고려국의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그 발상은 다분히 백제의 견훤에게서 본을 따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가 지방 호족들의 자제들을 도읍인 송도에 데려오는 것 또한 변방의 장수들이 배신할 수 없도록 하는 철저한 인질 정책으로써 그 효과가 매우 컸다.
종간 하옵고 폐하.
궁예 말하시오.
종간 이번에 나라법을 증수하면서 폐하께 간청할 일이 하나 있사옵니다.
궁예 말해보오.
종간 이미 폐하의 영토는 넓어서 삼한 중에 으뜸의 제국이 되었사옵니다. 난세에는 백성들의 인심이 쉽게 동요되고 쉽게 돌아서게 되 있사옵니다. 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또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역대 고사를 반추해 보건데 하나같이 제후나 황제들이 순행길에 나섰사옵니다.
궁예 순행........?
종간 그러하옵니다. 이미 백제의 견훤왕도 두 번에 걸쳐 순행을 돌아 민심을 모으고 완산주로 간 일이 있사옵니다. 폐하께서도 이 일을 가벼이 보지 마시오소서.
궁예 순행이라....? 그건 아주 번거롭고 긴 시일을 요구하는 것일 터인데...
박지윤 폐하. 내원의 말이 참으로 일리가 있사옵니다. 순행이란 백성들에게 폐하의 위엄을 보이는 가장 가깝고도 확실한 일이옵니다.
이흔암 듣던 중 반가운 말인 줄로 아옵니다. 폐하, 순행에 나서시오소서.
복지겸 내원의 말씀은 당연하시옵니다. 폐하께서 순행에 나서시면 천하의 인심이 빠르게 폐하께 향할 것이옵니다. 백제나 신라가 더욱 두려움을 갖게 되고 우리 고려국을 가벼이 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환선길 그리하시오소서. 순행에 나서시오소서, 폐하.
모두들 순행에 나서시오소서, 폐하.
궁예 (끄덕이며) 좋소이다. 순행이라.... 하긴 이제 그럴 때도 된 것 같소이다. 이 일을 좀 더 의논하고 준비하여 짐에게
알려주시구려. 종간 예, 폐하.
궁예 순행이라....순행이라....
씬 3 왕건의 집 외경
씬 4 동 집 정원
왕평달과 왕식렴, 왕신, 변사부, 마사부가 함께해 있다. 왕평달이 연못을 보며 중얼거린다.
왕평달 폐하께서 순행길에 나서신다구...?
마사부 예, 어르신. 그 때문에 궁궐안이 시끌시끌한 모양이옵니다.
변사부 순행이라면 어디를 어떻게 가시는 것이옵니까?
왕식렴 순행이라는 것 자체가 폐하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그건 정하기 나름이지요. 얼마나 걸릴지 또 어떤 곳으로 어떻게 가실지...
왕평달 여러 가지 법령도 새로 구비가 되었다 들었는데....
왕식렴 예, 지방에 있는 고을 태수와 호족들의 자제들은 모두 이곳 송악으로 소환한다 하옵니다. 와서 군대에 편입시킨다 들었사옵니다.
마사부 일종의 인질이옵니다.
왕평달 그럴 수 있겠구먼...
변사부 성을 쌓고 군역의 의무를 지고 세금을 내는 것까지 조목조목 감시하고 관할하는 부서들이 생겼다 하옵니다. 모두가 내원에 있는 종간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하옵니다.
왕평달 그거야 오늘의 일이 아니지... 종간이라는 사람이 실은 다 하는 게 야. 포를 치고 장을 부르는 것은 폐하이시지만 그 판을 읽고 두는 것은 종간이라는 사람이거든... 아무튼 바쁘게 생겼구먼... 순행이라..
왕신 아버님, 그러면 일선에 나가있는 건이 형님은 어찌되는 것이옵니까?
왕평달 글세...
씬 5 황궁 외경
씬 6 동 대전 밖
여전히 환관과 내군들 궁녀들이 대기해 있다.
종간 (E) 폐하. 지금 뭐라고 하셨사옵니까?
씬 7 동 대전 안
궁예와 종간이 독대하고 있다.
종간 왕건장군을 부른다 하셨사옵니까?
궁예 내원께서는 왜 그리 놀라시오...?
종간 왕장군은 지금 전장터에 나가 있사옵니다. 일선에 나가 있는 지휘장수를 불러들이시는 이유를 모르겠사옵니다.
궁예 허허... 내원은 아직도 멀었소이다.
종간 예.....?
궁예 짐의 마음을 아직도 읽지 못하니..... 그러고도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관상을 보아오셨소이까? 허허허....
종간 폐하.....?
궁예 순행이란게 무엇이오. 짐의 나라를, 짐의 땅을 일일이 돌아보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관리들을 다독거리고 또 확인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그곳에 누구누구를 데려가야 하겠소?
종간 ..............?
궁예 훗날 이 나라를 책임지고 이 영토를 관할하여 다스릴 수 있는 재목들을 함께 데려가야 하지 않겠소?
종간 (정색을 하며) 폐하. 왕장군은 지금 폐하의 영토 끝자락에 가 있사옵니다. 우리의 적인 백제국과 대치해 있사옵니다.
궁예 (달래듯) 이보시오, 내원?
종간 예, 폐하.
궁예 왕장군은 이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요. 짐을 도와 삼한을 평정하는데는 장군 중에 으뜸이며 도저히 그에 버금갈 다른 장수들이 없소이다. 그런 왕건이 짐을 따라 순행하지 않는다면 이번 길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이까?
종간 폐하. 왕장군을 어여삐 여기시는 것은 알겠사오나 그렇게까지....
궁예 나는 말이오. 내원께서 오른팔이라면 왕건을 왼팔로 봅니다. 두 사람 모두 내 목숨만큼이나 아끼고 있소이다.
종간 폐하...
궁예 이번 순행에 내원께서도 같이 가십시다.
종간 폐하, 폐하께서 도성을 비우시면 누군가가 폐하의 자리를 지켜야 하옵니다. 신은 이곳에 남겠사옵니다.
궁예 (생각하다가) 뭐 그것도 그렇기는 하오마는...나는 이 기회에 왕건장군과 내원을 함께 동행하고 싶었는데.... 짧은 길이 아니지 않소? 아주 먼길이오. 몇 달을 돌아야 하는 길이란 말이오.
종간 아옵니다. 하지만 왕장군의 일은 다시 한번 재고를 하심이..
궁예 그 이야기는 그만 하십시다. 마음을 여세요. 그 마음의 문을 열란 말입니다. 나는 내원의 그 소심함이 참으로 마음에 걸립니다.
종간 ......... (눈을 감으며 안타까움을 참는다)
궁예 밖에 내군장군 있는가?
은부 (E) 예, 폐하.
잠시 후, 은부가 들어와 예를 올린다.
궁예 내군장군은 전령을 보내어 충주에 나가 있는 왕건장군을 즉시 소환하라 이르라.
은부 예, 폐하.
종간 ........
씬 8 길
금대가 장일과 함께 군사 둘을 이끌고 말을 달려가고 있다. 그들이 멀리 사라져 가면...
씬 9 충주 관아 외경
군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다.
왕건(E) 도대체 그곳이 천리 밖이나 된단 말인가? 뭣들 하고 이제야 오는 것인가?
씬 10 동 관아안
박술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능산도 면목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유금필, 홍유, 배현경, 김언, 김락이 지켜보고 있다. 왕건의 서슬 퍼런 질책이 계속된다.
왕건 도대체 왜 그리 시간이 걸렸는가 묻고 있지 않은가?.... 능산이?
능산 예, 장군.
왕건 말해보게, 어찌된 것이야..? 데려간 군사들은 다 어디다 두었는가? 오십여 명이나 보냈는데... 왜 십여 명밖에 돌아오지 못했는가?
능산 그게, 저어..... 백제군의 복병을 만나....
왕건 자네들은 첨병으로서 간 것이야. 적의 동태만을 살피고 오라 하였어. 대체 어찌된 일인가...? 싸움은 피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박술희 ....... (힐끔힐끔 눈치만 본다)
왕건 이보게 술희.
박술희 예.
왕건 어찌된 일인가 말해보아.
박술희 (비로소 무릎을 꿇으며) 장군, 소인을 벌하여 주시오소서. 이놈이 불미하여 씻을 수 없는 대죄를 범하였사옵니다.
왕건 뭐라....? 대죄....? 불미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어?
박술희는 차마 말을 못한다. 모든 장수들이 보고 있다. 유금필은 뭔가 있었던 것을 직감하고 있다. 능산이 입을 연다.
능산 장군, 적과의 교전을 피하려 했사오나..... 뜻밖에 적병을 만났사옵니다. 상대가 바로 견훤왕의 여동생인 대주도금이란 처자였사온데..
그러자 모두들 놀라는 빛으로 다시 이들을 본다.
왕건 무슨 소린가...? 견훤왕의 여동생이.... 어쨋다는 것이야?
능산 견훤왕의 여동생과 여기 술희의 군사들과 접전을 벌렸사온데... 그만 낭패를 보았사옵니다.
왕건 뭐라...? 그렇다면 천하의 박술희가 처자들에게 당했다는 말인가? 그게 사실이야?
박술희 용서하여 주시오소서. 그 낭자의 무예 솜씨와 군사를 다루는 지략이 워낙 뛰어난 지라 그만 망신을 당했사옵니다.
유금필 이보게, 아우. 아니, 그래도 그렇지. 여기 능산아우까지 갔는데... 처자 하나를 당하지 못했단 말인가..?
홍유 허허, 이런....
배현경 기가막힌 일이로고.... 아니 어느 처녀이길래. 범같은 박장군을 망신 주었단 말인가...?
박술희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사옵니다. 소인이 잠시 정신이 나갔나 보옵니다. 처음 보는 처자에게 정신이 홀려서 그만....
왕건 뭐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정신이... 홀려...?
능산 예, 잠시 술희가 그 처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사옵니다마는...
왕건 (한참 기가 막혀 본다) 마음을 빼앗겼다...? 박술희가 말이지...? 아니 그 얼굴에 여자를 다 생각하였단 말인가...?
박술희 .....면목없사옵니다.
왕건 믿기지가 않는구먼... 박술희가 처자를 보고 한눈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견훤왕의 누이가 그토록 무예가 출중하다는 말인가..? 미색도 뛰어나고...?
박술희 예, 장군... 정말 그렇사옵니다. 난생 처음 보는 미색인데다가 신출귀몰하는 그 무예솜씨하고는.... 이놈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처자였사옵니다.
그러자 신이 나서 설명하는 박술희를 능산이 슬며시 쥐어박는다. 박술희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눈치를 본다.
왕건 어찌되었든 간에 부하의 목숨은 중요한 것이네. 장수가 되어서 별 소득도 없이 여러 목숨을 잃었으니 이 죄를 어찌할 것인가?
박술희 ........
왕건 (화가 난 듯) 한낱 계집의 미색에 홀려서 일을 그르쳤다 하니 그러고도 자네가 장수라 할 수 있겠는가? 이야말로 군법을 엄히 적용하자면 목을 칠 수도 있는 중죄일 것이야.
모두들 ........
왕건 한동안 근신하도록 하라. 차후로 이런 실수가 또 있을 시에는 사정없이 군법을 적용할 것이야. 물러들 가라.
박술희 예, 장군.
그러자 박술희와 능산이 군례를 올리고 밖으로 나간다.
홍유 노여움을 푸시오소서, 장군. 전장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옵니다.
왕건 압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기에 혼을 좀 낸 겝니다.
김언 그런데 견훤의 누이가 그렇게 무예가 출중하다니요. 참으로 놀라운 소식을 접했사옵니다. 장군.
김락 그러게 말이옵니다. 소장도 보고 싶사옵니다. 세상에.....견훤의 누이가 장수였다...? 이야말로 희안한 일이 아니옵니까?
씬 11 사벌주 성 외경
씬 12 동 성안
아자개와 대주가 마주해 있다.
아자개 그래, 외곽의 경비는 어떠하느냐?
대주 저들이 조령을 넘어 도망친 이후로 경계를 갑절로 늘였사옵니다.
아자개 음.. 네가 수고가 아주 많았다. 네 오래비가 오는 통에 칭찬도 한마디 못했구나.
대주 아니옵니다, 아버님.
아자개 .....(보다가) 이제 너도 혼례를 치뤄야 할 터인데... 언제까지 사내들이 해야 할 일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대주 소녀는 시집갈 생각이 없사옵니다. 이대로 사는 것이 좋사옵니다.
아자개 그런 말 말거라. 그래도 시집은 가야지...
대주 .........
아자개 너와 짝이 되려면 최소한 대주 너 정도의 무예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런 사내를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구나. 하지만 언젠가는 나타나지 않겠느냐?
대주 ......그것보다도 아버님,
아자개 왜.....?
대주 사벌주 관내의 절반 이상의 군현이 견훤 오라버니에게 항복을 했다고 하옵니다.
아자개 (입맛을 다시며) 알고 있느니라.
대주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아자개 뭐 어차피 우리의 힘이 못 미치니 견훤이가 그 성들을 가져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대주 앞으로가 걱정이옵니다. 오라버니의 도움도 싫다 하시고 그렇다고 북쪽의 고려군은 또 내려올 것인데... 대책이 없지 않사옵니까?
아자개 그건 그렇다. 군사도 적고 성은 외진 곳에 있고... 그렇다고 건방진 견훤이 놈에게 가기도 싫고... 일이 그렇게 되어있구나
아자개, 입맛을 다시며 답답한 표정을 짖는다.
씬 13 완산주 궁궐 외경
씬 14 동 대전 안
견훤 추허조가 상주의 대부분을 함락시켰다고...?
최승우 예, 폐하. 생각 밖으로 많은 전과를 올리고 있다 하옵니다. 하기야, 아자개님께서 모르는 척 눈을 감고 계시니 그야말로 무풍지대가 아니겠사옵니까?
견훤 그건 그러하이.. 허나, 허조는 역시 싸움을 잘해. 전장터라면 늘 신이나는 사람이지, 허허허...
최승우 무한정 땅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꾸고 지키는 일이옵니다. 그 방안을 찾으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견훤 방안이랄게 뭐가 있겠는가..? 믿을만한 수하들을 보내서 지키는 수 밖에...
최승우 그 믿을만한 수하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사옵니까?
견훤 ...........?
최승우 지방의 호족들은 늘 불안한 존재들이옵니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이 세상인심이 아니옵니까?
견훤 뭐, 그거야... 어딘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최승우 지방의 중요한 곳에는 폐하의 분신 같은 존재가 있어야 안심이 되옵니다.
견훤 ..........
최승우 아뢰옵기 황공하옵니다마는, 고비라는 여인은 어찌 생각하시옵니까?
견훤 고비....? 아, 박영규가 선물을 한 처자 말인가...? 대전에서 가끔씩 차를 나르고 있지. 왜...?
최승우 아직도 그리 두고 계시는 걸 보면 마음에 드시지 않나 보옵니다.
견훤 짐이 말인가...? 허어, 사람하고는... 황후가 있는데 여기저기 마음을 두어서야 되겠는가...?
최승우 박영규가 그 처자를 폐하께 바친 것은 깊은 뜻이 있어서이옵니다.
견훤 깊은 뜻이라니...?
최승우 단순히 여흥을 즐기시라는 것이 아니오라, 서로간에 깊은 관계 맺기를 원했을 것이옵니다. 즉, 혼인관계 말이옵니다.
견훤 혼인? 그럼 나더러 장가를 가라 그 말인가?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박영규가 고비를 보내온 뜻은 바로 거기에 있었사옵니다. 서로 혈연을 맺음으로써 영원한 관계를 보장하자는 것이옵니다.
해설 혼인정책.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이 시대에 서로가 서로를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신뢰의 방법중 하나이다. 서로의 피를 섞어 혈연관계를 형성함으로서 신분과 권력을 보장받고 나누는 것이다. 훗날 고려의 태조 왕건이 각지역에 걸쳐 무려 29명의 부인을 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최승우가 그걸 권하고 있는 것이다.
견훤 허어, (비로소 뭔가를 깨닫는다) 하지만.. 짐은 조강지처가 있어.
최승우 하오나 국가의 통치와 관계되는 일이옵니다.
견훤 허허, 글쎄...하지만 워낙 예민한 사안이 되어놔서...
최승우 굳이 싫지 않으시다면은 ...
견훤 아, 뭐 싫을 것이야 있겠는가마는....?
최승우 고비라는 여인을 맞아 들이시오소서.
견훤 (싫지는 않다).....
최승우 나라를 위하는 일이옵니다. 박영규 같은 이를 굳게 붙들어 두시면 서남해의 만년 걱정이 사라질 것이옵니다. 고비를 취하시오소서. 그리고 박영규에겐 공주님을 드리시오소서.
견훤 공주를? 그 아이는 이제 겨우 열 다섯이야...
최승우 폐하께서는 보령 열 다섯에 군인이 되셨사옵니다.
견훤 ........허허허...그거야 그랬네마는....아무래도 황후가......
최승우 이찬 능환님이 지금 황후전에 계시옵니다.
견훤 뭐라...이 일 때문에 말인가...?.
씬 15 황후전
박씨와 공주(국대부인)가 자리해 있고 능환이 와 있다.
박씨 결혼이라니..? 아직 나어린 공주가 아닙니까?
능환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소신이 뵙기에 공주님은 이제 혼기를 충분히 갖추셧사옵니다.
공주 ........
박씨 허면 부마가 될 사람은 누구랍니까? 신랑감 말이예요?
능환 승평군의 박영규라는 사람이옵니다.
박씨 (놀라) 박영규....?
능환 허허.. 무에 그리 놀라시옵니까? 박장자는 신라의 명문 귀족 출신이고 또 상당한 재력을 보유한 서남해의 대호족이옵니다.
박씨 그래도 그렇지, 아니 어떻게 그 나이 많은 사람에게.. 아니 됩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공주 .......
능환 아뢸 말씀은 그 뿐이 아니옵니다.
박씨 또 뭐가 있습니까?
능환 폐하께오서도 박영규의 일가인 고비라는 여인을 맞아들이실 것이옵니다.
박씨 (충격) 뭐, 뭐라구요? 폐하께오서... 첩실을 들이신다는 겝니까?
공주 어마마마?
능환 첩실이 아니라 호족들을 관리하기 위한 혼인 정책의 일환이옵니다. 그 점을 깊히 생각해 주시오소서.
박씨 (쏘아부치듯) 그게 그것이 아닙니까? 정책이니 뭐니 하는 어려운 말은 난 잘 모릅니다. 결국 첩실을 들이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능환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이옵니다. 황후마마께서도 도와주셔야 하옵니다.
박씨 그리는 못합니다. 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사벌주의 아버님이 왜 저리 되셨습니까? 왜 폐하를 미워하시고 멀리 하시느냐는 말입니다. 계모님 때문이 아닙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능환 비교하실 것이 못되옵니다. 사정이 전혀 다르옵니다, 황후마마..
박씨 아버님과 똑같으십니다. 어쩌면 하시는 일마다 그리도 닮으셨단 말입니까? 아니됩니다. 나는 절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능환 마마...?
박씨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숨을 씩씩거린다. 그런 박씨의 모습을 난감하게 보고 있는 능환의 모습에서.....
씬 16 대전 외경
견훤(E) 내 그럴 거라 하지 않았는가?
씬 17 동 대전
견훤이 시무룩해 있다. 능환이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견훤 황후가 그리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야.
능환 소신이 계속해서 황후마마를 설득해 보겠사옵니다. 황후마마께서도 결국엔 받아들이시게 되실 것이옵니다.
견훤이 도리질을 하는데, 그 때 밖에서 내관이 아뢴다.
내관(E) 폐하, 찻상 대령이옵니다.
견훤 들이라.
고비가 시녀에게 찻상을 들려 들어온다. 최승우가 미소를 지으며 고비를 바라본다. 견훤은 왠지 어색한 표정이다. 고비가 조심스럽게 찻잔들을 내려놓고 나가려 하자 최승우가 만류한다.
최승우 잠시만 앉아 계시게.
고비 .....? (견훤을 보면)....?
견훤 (끄덕인다)....
고비가 자리에 앉아 눈을 살포시 내리깐다. 최승우와 능환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짓는다. 견훤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다. 그 때 밖에서 내관이 다시 아뢴다.
내관 폐하, 승평군의 박장자께서 드셨사옵니다.
견훤 들라 하라.
박영규가 들어와 예를 갖춘다.
견훤 어서 오게.. 자 이리 앉게.
박영규 (자리에 앉고는) 어인 부르심이옵니까, 폐하?
견훤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네.
박영규 ........?
견훤 자네는 그동안 적지않이 내게 큰 힘을 실어 주었네. 자네가 있기 때문에 서남해 일대가 안심이란 말이야. 나는 그대와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데...어떤가, 내 사위가 되어보지 않을 텐가?
박영규 ...(놀라) 폐하....?
견훤 왜, 싫은가?
박영규 그,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너무도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견훤 허허허.. 그래.. 그럼 대답을 들은 셈인가?
박영규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허허허..
최승우 황은을 받으셨으니 박공도 폐하께 답례를 드려야 하지 않겠소이까?
박영규 ....? 어인 말씀이시온지....?
최승우 (고비를 바라본다).....
고비 (최승우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눈을 내리깐다) ........
박영규 아 예.. 그 일은 이미 소신이 일가들과 의논을 하여 천거해 올린 것이옵니다. 폐하께오서 고비를 거두어 주시면 참으로 은혜가 백골난망이실 것이옵니다.
견훤 아.. 그건 말일세...여러가지로 황후와 상의를 하고 나서...허허허... 짐에겐 황후가 가장 무서운 사람이거든.
그러면서도 고비를 본다. 고비의 홍조 띤 얼굴에서..
씬 18 황후전
박씨가 노기등등해 있다. 신검과 양검도 그 자리에 와 있다.
박씨 후실을 들이다니 이럴 수는 없느니라....
신검 어마마마.. 그만 노기를 가라 앉히시오소서.
양검 이러시다가 병환을 얻으실까 두렵사옵니다.
박씨 ......(크게 숨을 가라앉히고는) 너희들은 모르느니라. 이 에미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는 줄 아느냐?
신검 소자들이 어찌 어마마마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겠사옵니까? 하오나, 지금과 같은 난세에는 생각을 크게 가지셔야 하옵니다.
박씨 뭐, 뭐라?
신검 이 일은 호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택하시는 것이라 들었사옵니다. .
박씨 허면 폐하께서 후실을 보시는 것이 옳다는 것이냐?
신검 옳고 그름을 떠나 그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알고 있사옵니다. .
박씨 그것이 태자로서 할 소리냐.....?
신검 나라를 위함이옵니다. 어마마마께서 너그럽게 생각을 하시오소서.
박씨 너희는 이 에미가 지금 투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도리질) 아니니라.. 그렇지가 않느니라. 폐하께서 사벌주의 할아버님처럼 되실까 두려워서이니라.. 두 분이 닮아가는 것이 오싹할 정도로 무섭느니라.
신검 아바마마께서는 그러실 리가 없사옵니다. 소자들을 어느 누구보다도 자애하시는 아버님이시옵니다.
박씨 .....(한숨)....너희들마저 이 에미의 마음을 몰라주는구나.. 세상에 내 편은 아무도 없구나... 두고 보아라. 예사로 볼일이 아니다. 이 일은 분명 후회를 가져올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야.
박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서러운 눈물에서.. (디졸브)
씬 19 인서트
대전에서 고비가 박씨와 견훤에게 절을 올리고 있다. 박씨는 차가운 표정으로 외면하며 고비를 본다. 견훤은 싱글벙글이다. 궁녀들이 그런 고비를 부축하여 인도하고 있다. 신료들이 모두 환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디졸브 되면서...
씬 20 동 정전 (인서트)
문무백관들이 가득 도열한 가운데 박영규와 공주의 혼례가 거행되고 있다. 취타대의 흥겨운 연주가 계속 흐르고 있다. 박영규와 공주가 견훤과 박씨에게로 나아가 절을 올린다. 견훤은 흐뭇한 표정이나 박씨는 시무룩한 표정이다. 다시 디졸브 되면서....
씬 21 백제의 정전
견훤이 용상에 높히 앉아 있다. 문무백관들이 가득 모여 있다.
견훤 대소신료들은 들으오.
신료들 예, 폐하..
견훤 경들의 쉼없는 노고로 이 나라 백제가 반석 위에 올려지게 됐소.
신료들 황공하옵니다, 폐하.
견훤 허나 여기에 안주해서는 아니될 것이오. 더욱더 분발하여 백제의 중흥과 나아가 삼한의 완전한 재통합을 위하여 거듭 노고를 아끼지 말야야 할 것이오. 이에 짐은 이 나라 백제의 제 2의 도약을 엄숙히 선포하는 바이오.
신료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짐의 맏아들 신검을 황태자로 삼을 것이며,
신검 ..........
견훤 태자와 둘째 용검을 장군부로 배속시켜 군역의 의무를 담당케 할 것이오. 또한 두 태자의 사부로는 이찬 능환을 유임시킬 것이니. 경은 두 태자들이 나라의 동량이 되도록 올바르게 보필하도록 하라.
능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그리고 또한 박영규를 강주도독으로 삼을 것이며, 김총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을 것이오.
김, 박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그 동안 우리 백제국은 무진주와 강주, 완산주에 이어 사벌주 일부와 웅주 일부로 영토를 넓혀 왔소. 허나 북으로는 궁예가 버티고 있고, 동으로는 신라가 여전히 살아 있소. 이제는 더 이상 갈 곳이 막혀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소이다.
신료들 .........
견훤 지금 우리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소. 궁예와 싸울 것인가, 아니면 신라를 쓰러뜨릴 것인가....? 짐은 경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
능환 신 이찬 능환 아뢰옵니다.
견훤 말해보게.
능환 지금 궁예와 맞붙는다는 것은 시기상조라 사료되옵니다. 지난 번 양길과의 전투에서도 확인됐듯이 궁예의 군사력은 우리 백제에 못지 않사옵니다. 전면적으로 전쟁을 벌인다면 우리도 심각한 타격을 감수해야 할 것이옵니다.
견훤 허면....?
능환 남은 곳은 한 곳 뿐이지 않사옵니까?
견훤 신라를 치자?
신료들이 술렁거린다.
능환 그러하옵니다. 신라는 다 쓰러져 가는 고목이옵니다. 이제 신라를 쳐서 백성들의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어야 할 때가 되었사옵니다.
최승우 (단호게) 그건 아니될 말씀이외다!
견훤 .......?
최승우 비록 신라가 기울어 가는 망국이기는 하나 아직도 백성들은 신라 황실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신라를 친다는 것은 결국 백성들의 민심을 잃게 되는 일입니다.
능환 무슨 소리? 백성들이 신라를 원망하는 소리를 파진찬은 듣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최승우 원망을 하는 마음 속 어딘가엔 경외심 또한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능환 허.. 서라벌 출신이라고 신라를 두둔하는 것은 아닐 테고..
최승우 신라는 곧 스스로 무너집니다. 굳이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신라는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승우와 능환이 설전을 벌이는 위로
해설 그랬다. 오래 전부터 신라는 분명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광대하던 영토는 어느새 서라벌 주변으로 축소되어 있었고, 궁예와 견훤이 각각 나라를 세우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신라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대야성(합천)이 견훤의 후백제를 막고 있었고, 북쪽으로는 아자개의 상주와 궁예의 명주에 맞닿아 있었다.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공왕은 초기에 개혁 정책을 내세우며 신라의 재건을 꾀했으나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폐인이 되어 음사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신라는 살아 있었다. 천년의 저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견훤 그만 됐네. 두 사람의 의견 모두 일리가 있는 것 같네. 그 일은 나중에 다시 의논하도록 하세.
견훤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능환과 최승우가 어색하게 마주보다가 각기 사라진다.
씬 22 백제 대궐 뜰
견훤이 고비와 함께 뜰을 거닐고 있다. 수많은 환관, 상궁들이 뒤를 따르고 있다. 그 때 저만치서 최승우가 다가온다
최승우 찾아 계셨사옵니까, 폐하?
견훤 어서 오게. 날이 좋아 뜰을 거닐고 있었네.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 한 점 없지 않는가?
최승우 ........?
견훤 ...(뜸을 들이다가 던지듯).....왜 그토록 신라를 치는 것을 반대하는가?
최승우 .....이미 말씀드렸듯이 세상 인심이 아직도 신라를 동정하고 있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이옵고,
견훤 그리고?
최승우 천년의 마지막 기세를 꺽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옵니다. 또한 신라를 치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인 대야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이옵니다. 그 곳엔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라 불리우는 김효종과 역시 화랑 출신인 노장수들이 버티고 있사옵니다.
견훤 화랑이라면 나도 좀 알지. 무리지어 어울려 다니면서 술이나 마시고 부녀자나 희롱하는 무리가 아닌가?
최승우 물론 지금의 화랑은 그렇사옵니다. 허나 대야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들은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그들은 화랑의 절개와 전통을 지키고 있는 곧은 사람들이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당백의 전사들이옵니다.
견훤 허허.. 그런 화랑들이 아직도 신라에 남아 있었던가?
최승우 소신의 말을 믿으시오소서. 신라를 치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하옵니다. 통촉해 주시오소서.
견훤 음... 알겠네.. 최학사의 말을 참고하지.. 자 가세..
견훤이 앞서가면 최승우가 도리질을 친다. 그 모습에서...
씬 23 동궁 뜰
신검과 양검이 목검으로 서로 겨루고 있다. 덩치가 큰 신검이 역시 힘이 좋지만 양검도 그에 못지 않게 날쌔게 신검의 공격을 피한다. 능환이 한 쪽에서 신강, 추허조와 함께 흐뭇하게 보고 있다.
추허조 참으로 대단하옵니다. 어느새 저렇게 무예들을 익히셨답니까?
능환 폐하의 황자님들이 아니신가? 그럴만 하지.. 허허허..
신강 (보다가)....어제는 좀 지나치셨던 것 같사옵니다.
능환 지나치다니 뭐가 말인가?
신강 정전에서 파진찬 최승우와 설전을 벌인 일 말이옵니다. 보는 소생들이 조마조마할 정도였사옵니다.
능환 허허허.. 그 일 말인가? 최승우는 이 나라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지..
신강 .......?
능환 허나, 현실 감각이 약간 모자라는 게 흠일세. 아직 삼한 땅의 사정에 어두운 구석이 있어.
신강 하지만 소생이 생각하기에도 현 시점에서 신라를 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것 같사옵니다. 신라를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정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라면 인심이옵니다.
능환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가? 음.. 실망이구만..
신강 천년을 이어온 나라이옵니다. 하루아침에 백성들이 정을 뗄 수 있겠사옵니까?
추허조 거 답답한 소리 좀 하지 마시오. 아 이럴 때 쳐야지 언제 신라를 친답니까?
능환 역시 서책을 통해 세상을 배운 사람들은 어딘가 모르게 현실감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야.. 세상을 머리로만 생각한다는 말씀이야.
신강 허허... 소생을 그리 보십니까?
능환 우리가 미적거리는 동안 궁예가 내려올 수도 있네.. 궁예가 서라벌을 장악해 보세. 삼한의 심장부를 그들의 점령했다고 생각해 보란 말일세. 과연 삼한의 주도권은 누가 쥐겠는가? 폐하인가? 아니면 궁예인가?
신강 .......
능환 잘 생각해 보게. 신라를 치는 것은 단순히 영토를 넓히는 일이 아닐세. 천하의 대세를 좌우하는 주도권을 누가 장악하는냐는 실로 중대한 문제란 말일세.
신강 ........?
그러나 여전히 신강은 능환의 말에 승복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씬 24 견훤의 대전
견훤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견훤(E) 신라... 신라를 친다.. 물론 최승우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야. 천년의 고목이 그리 쉽게 쓰러질 리가 없겠지. 허나.. 한 번 해볼만한 일이 아닌가? 신라를 치우고 내가, 이 견훤이가 서라벌 황궁의 옥좌에 앉는다?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 아닌가? 천년의 도성을 얻어야 비로소 황제라 위엄을 갖출 수 있겠지. 더불어 낙동강을 확보한다면 사방으로 교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내가 먼저 도전해 보는 것이야. 이 견훤이가 무너져 가는 신라를 어찌 이기지 못하겠는가? 그래.. 해 보는 것이야.
견훤이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주먹을 굳게 쥐어본다. 그리고 근엄하고도 우렁찬 목소리로 내관을 부른다.
견훤 밖에 내관 있는가?
환관 예, 폐하..
환관이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온다.
견훤 가서 전하라. 모든 신료들을 정전으로 모이게 하라.
환관 알겠사옵니다, 폐하..
대답하고 다시 밖으로 물러간다. 의욕이 넘쳐나는 견훤의 그 모습에서 디졸브
씬 25 정전
문무 신료들이 모두 모여 있다. 최승우와 능환이 서로 눈을 마주친다. 아직도 어색함이 남아 있는 모습들이다. 견훤이 옥좌에 앉아있다.
견훤 경들을 모이라 한 것은 이 나라의 앞날을 좌우할 중대한 발표를 하기 위함이오.
신료들 ........?
신료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견훤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견훤 짐은 그동안 곰곰이 생각한 끝에 우리 백제가 나아갈 바를 비로소 정했소. 이는 짐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여러 신료들의 의견을 십분 참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오.
능환 .......
최승우 .......
견훤 짐은... 신라를 백제의 영토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하였소이다.
모두들 놀란다.
최승우 폐하?
견훤 (손을 들어 제지하며) 짐이 장고를 한 끝에 내린 결정일세. 이의를 달지 말게.
최승우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능환 ......(미소)
견훤 군사들의 점고가 끝나는 대로 우리는 대야성으로 진격할 것이오. 그리고 나아가 저 신라의 심장부 서라벌을 도모할 것이오. 서라벌을 취함으로써 우리 백제는 명실공히 제 2의 도약을 맞을 것이오. 신라는 우리 백제의 불구대천의 원수요. 옛 백제의 의자왕이 당했던 치욕을 짐이 반드시 이 기회에 갚으려 하니 경들은 짐의 뜻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기 바라오.
장수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
해설 견훤의 서라벌 공략, 어쩌면 그것은 그의 생각 속에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서라벌은 신라의 상징이다. 천년의 역사를 대변하는 곳이었다. 신생국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으로서는 어찌 그 천년의 황도 서라벌이 탐이 나지 않았으랴. 그러나 신라는 망하고 서라벌은 썩어 있었지만 아직도 그곳에는 무너지는 신라의 사직을 부여잡고 있는 늙은 충신들이 있었다. 최승우의 걱정은 그곳에 있었고 견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씬 26 인서트
군사들이 들끓고 있다. 추허조와 김총, 수달 들이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어디론가 이동시키고 있다.
해설 한편, 그 무렵 왕건은 충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날을 기다리며 절치부심하고 있었는데...
씬 27 조령 산맥 외경 (인서트)
산구릉이 이어진 거대한 산 계곡으로 노을이 지고 있다.
씬 28 동 충주 관아 정자
그 노을을 왕건과 유금필, 능산, 박술희 등이 보고 있다.
왕건 저 끝없이 이어진 산줄기는 자연이 빚어놓은 천연의 성곽일세.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능산 그러하옵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이곳에서 발목이 잡힐 것 같사옵니다.
왕건 그러나 대왕 폐하께서는 저 조령의 본 줄기인 태백을 넘어 명주를 얻으셨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유금필 .........
왕건 폐하께서는 과연 하늘이 내린 영웅이실세.
능산 백제를 세운 견훤도 생각해보면 대단한 영웅이라 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변방 장수의 몸으로 오늘날의 백제를 세웠사옵니다.
왕건 그건 그러하이... 힘이 아주 천하 장사일세..
능산 소인도 그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수백 근이 넘는 청동화로를 들어 던졌다지요...?
왕건 나는 오래전 서라벌에서 우리 폐하와 견훤왕이 겨루는 것을 본 적이 있다네.
능산 그렇사옵니까?
왕건 가히 용호상박이었지. 아마 견훤왕도 지금쯤 우리 폐하처럼 삼한을 통일할 꿈을 꾸고 있을 게야.
유금필 그야 그렇겠습지요. 하지만 저희들은 송악의 예언도 잊지를 않고 있사옵니다.
왕건 그건 무슨 소린가...? 송악의 예언이라니...
박술희 도선 대사께서 주군이 천하의 주인이 되실 거라는 그 예언 말이옵니다.
왕건 쓸데없는 소리..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는가..?
박술희 알 사람은 다 아는 얘기가 아니옵니까? 도선비기도 그리 적혀 있다는 얘기를 들었사옵니다마는.... 사실이옵니까?
왕건 그만 두지 못하겠는가? 폐하를 모시는 우리들 일세. 그 얼마나 불경스러운 언사란 말인가? 차후로는 아예 입에 담지 말게.
박술희 예, 주군... 소인들은 하지만 그런 소문이 자랑스럽사옵니다. 천하의 영웅들 속에 우리 주군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 말이옵니다.
왕건 허어, 이 사람들이 그래도.....
그 때 밖에 소란스러워지더니 궁예가 보낸 전령들인 금대와 장일이 다가와 군례를 올린다.
금대 장군, 폐하의 영을 뫼셔 왔사옵니다.
왕건 아니, 내군의 금대 부장이 아니오...?
금대 예, 장군. 폐하의 영을 뫼셔왔사옵니다. 속히 황도로 돌아오라는 폐하의 영이시옵니다.
왕건 황도로 말인가?
금대 그러하옵니다.
유금필 이유가 무엇이오? 장군을 소환하시는 까닭이 있을 것 아니오?
금대 소인은 잘 모르옵니다. 어서 떠날 차비를 하시오소서.
왕건 .....소환령이라.. 폐하께서 어인 일로....?
왕건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한다. 그 모습에서.
씬 29 송악/ 황궁 외경
궁예 (E) 이번 순행길은 꽤 먼 거리가 되겠소이다 그려....
씬 30 동 대전 안
궁예와 종간이 마주해 있다. 궁예는 지도를 짚어보고 있다.
궁예 짐이 지나온 길만을 짚어가더라도 몇 달은 걸리겠소이다.
종간 ...... 그럴 것이옵니다.
궁예 (기대되는 듯) 백성들이 나를 예전의 미륵으로 보아줄까...?
종간 이를 말이옵니까? 분명 그럴 것이옵니다.
궁예 하긴.. 너무 궁에 오래 머물러 있었소이다. 제왕이란 백성들과 자주 마주 보아야 하는 것인데... 왕건장군이 함께 가면 적지 않이 좋은 벗이 되겠구먼....
종간 ........ (표정이 어둡다)
궁예 나는 말이오. 이번에 왕장군과 함께 가면서 백성들에게 왕건이라는 존재를 크게 부각시킬 작정이오.
종간 ........
궁예 백성들이 나를 부처로 생각하는 것처럼 왕장군을 천하무적의 장수로 인식시키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든든해 할 것이고 적들은 무서워 할 것이오. 여러 가지로 득이 많을 것이오.
종간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찌하여 굳이 왕장군만 편애하시옵니까? 폐하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있는 장수들이 숱하게 많사옵니다.
궁예 그렇기는 하지만... 왕장군과는 달라요.
종간 잘못보고 계시옵니다. 왕건장군을 키우는 것은 곧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이옵니다.
궁예 또, 또 그 소리...
종간 폐하, 백성들은 물론이오, 신 종간도 폐하께서 미륵부처님이심을 의심치 않사옵니다. 하오나, 때로는 미륵부처님도 실수를 하실 때가 있사옵니다.
궁예 뭐라....?
종간 범인들이 실수를 하면 그것은 작은 것이지만 부처께서 실수를 하시면 천지에 풍파가 일어나옵니다.
궁예 (몸을 바로 세우며)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오...? 내가 실수를 하고 있다 그 말이오?
종간 그러하옵니다.
궁예 내가....? 내가 말이오....?
종간 그러하옵니다.
궁예 ..........
종간 이곳에 달려오기까지는 폐하께서는 한 점 흩어짐이 없는 미륵이셨사옵니다. 헌데, 언제부턴가 폐하께오서는 미륵에서 미륵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옵니다.
궁예 .......?
종간 신은 두렵고 떨리옵니다. 미륵부처가 실수를 하시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미륵은 영원한 미륵으로 남으셔야 하옵니다.
궁예 이보시오, 내원.
종간 (엎드려 절을 올린다) 폐하, 성정을 되찾으시오소서. 왕건을 멀리하시오소서. 이만한 제국에 만족하지 마시오소서. 폐하께 위기가 오고 있음을 신은 보고 있나이다. 살펴 헤아리시오소서, 폐하.
궁예 ........
(36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