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48회>
씬 유장자의 집 방안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유장자가 진지하게 왕건을 보고 있다. 왕건은 당황한 눈빛으로 그런 유장자를 보고 있다.
유장자 왕장군, 내 부탁을 들어주겠는가..? 딸아이를 보살펴 달라 하였네.
왕건 장자어른, 제가 어찌 감히 장자어른의 따님을 보살핀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유장자 나는 너무 늙었고 나이에 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누군가가 그 상당부분을 맡아 주지 않으면 아니 되네. 나는 왕장군 자네에게 기대고 싶은 게야.
왕건 잘못 보셨사옵니다. 저는 별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사옵니다. 전장터에 나가 싸우는 일이라면 몰라도....
유장자 그렇지가 않네. 이제 내 딸은 벌써 혼기가 다 찼네. 그러나, 아무에게도 혼인 얘기를 꺼내 본 적이 없네. 그 이유는 내가 보아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 왕장군 자네 말일세.
왕건 (당황하며) 장자어른... 저는 이미 혼인같은 것과는 거리를 둔 사람이옵니다. 어르신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이미 옛날에....
유장자 알고있네. 지금의 황후마마일 말일세. 그 일에 대해서 나처럼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일세. 허나, 그 일은 이제 다 마무리가 되었어.
왕건 장자어른...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따님의 일만은 제가 어찌할 수 없사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유장자 내 분명히 말하겠네. 강요하거나 조건부로 자네를 돕는 것은 아니라고... 그저 때가 되면 보살펴 달라는 것이야. 박대하지 말고..
왕건 장자어른, 그럴 일도 없을 것이고 또 그렇게 될 일도 아니질 않사옵니까..?
유장자 허허, 그럴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일세.
왕건 예...? 아니, 장자어른..
왕건은 의아해서 묻고 유장자는 그저 웃고만 있다.
씬 동 집 방밖
부용이가 하녀와 함께 찻상을 들고 오다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흠칫 선다.
유장자 (E) 사람은 타고난 인연이라는 것이 있네. 나는 내 딸아이와 왕장군 자네가 그 인연이 있다고 보네.
부용 .......
유장자 (E) 특히나 남녀의 인연은 하늘이 정한다고 하였어.
씬 동 방안
유장자 나는 웬지 오래 전부터 자네와 내 딸아이가 꼭 좋은 한쌍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네. 무엇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일세.
왕건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잘못 보셨사옵니다. 저는 그런 일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사옵니다.
유장자 되었네, 이제 그만하세...
그때, 밖에서 부용이의 소리가 들려온다.
부용 (E) 아버님, 찻상 대령이옵니다.
유장자 오, 들어오너라.
부용이가 찻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다. 왕건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고 찻상을 놓고 다시 나가는데...
유장자 얘야...
부용 예, 아버님.
유장자 앞으로 우리 정주에서 몇 개월에 걸쳐 대대적인 큰 공역이 있을 것이니라.
부용 예, 말씀하셔서 알고 있사옵니다.
유장자 큰 배들을 만들고 또, 크고 작은 배들을 사들이고 아마 한동안 우리 정주 포구가 시끄러울 게다. 왕장군이 우리 집에 머물며 그 일을 감찰하게 되어 있느니라. 너에게 이른 것을 차질없이 잘 하도록 하거라.
부용 예, 아버님...
부용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간다.
유장자 이보시게, 왕장군..?
왕건 예, 어르신.
유장자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별채에 자네 거처를 보아 두었네. 아무래도 조용한 곳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야.
왕건 고맙사옵니다, 장자어르신...
유장자 송악과 이곳을 편히 오가면서 자네 할 일을 하게나.
왕건 예, 장자어른.
유장자 우리가 결심을 굳혔으니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네. 그리고 점검해야 할 것들도 많아. 서둘지 말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보세.
왕건 예, 장자어른... 오늘은 일단 송악으로 가 보아야 할 것 같사옵니다. 병부령 복지겸장군과 종간어른이 오시기로 되어 있어서...
유장자 암, 그 사람들 정도는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할 걸세. 가 보시게. 그 동안 별채를 잘 정리해 놓을 테니...
왕건 예, 어르신....
왕건이 일어나 예를 올리고 밖으로 나간다.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장자. 그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씬 동 집 마당
왕건이 걸어나오고 있다. 마침, 부엌 쪽으로 가던 부인이 왕건과 마주친다. 왕건이 예를 올리고 그대로 가면 고개를 갸웃하는 부용 모... 그때, 부용이 부엌 쪽에서 나오다가 어머니를 따라 막 중문을 벗어나고 있는 왕건을 본다. 집사가 왕건을 보내고 있다.
집사장 편히 가시오소서, 장군.
왕건 또 보세.
왕건을 보고 있다가 부용 모가 부용에게 묻는다.
부용 모 얘야, 대체 아버님께서 너에게 무얼 하라 이르신 계냐..?
부용 예...?
부용 모 앞으로 별채에 왕장군이 묵는다면서..?
부용 그렇다 하옵니다. 소녀에게 그 수발을 모두 들라 하셨사옵니다.
부용 모 뭐라...? 아니, 얘야.. 너의 아버님이 제정신이시냐..? 너를 보고 왕장군의 수발을 들라하니, 이런 세상에.... 네가 어디 노비냐, 아니면 술집의 기녀란 말이냐..? 이게 무슨 말씀이시냐?
부용 ...........
부용 모 하이구... 참으로 갑갑한 일이구나. 너의 아버님이 도대체 뭘 보고 왕장군에게 그토록 넋을 빼앗기셨단 말이냐..? 너를 보고... 이렇게 귀엽게 기른 너를 보고 하녀나 노비들이나 하는 그런 일을 하라 하시니... 이런 세상에..
부용 아버님께서 깊은 뜻이 있어 그러시는 것이 아니시겠사옵니까?
부용 모 뭐라고..? 아니, 얘... 너마저..?
놀라는 부용 모의 모습에서..
씬 길
왕건이 가고 있다. 세 가신이 함께 가고 있다.
유금필 주군, 말씀 나누신 일이 잘 되었사옵니까..?
왕건 그렇다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었네.
능산 그렇다면 예정대로 이곳에서 배를 짖고 또 사들이고 하는 것이옵니까..?
왕건 그리 될 것일세.
박술희 엄청나게 많은 재원이 필요하겠사옵니다..?
왕건 그리 될 것이야. 나라에서도 부담을 하겠지만 그 대부분이 우리 송악과 정주의 유장자 어른께서 부담을 해야 할 것일세.
박술희 허어, 대단한 결단이옵니다. 사실 유장자 어른이야 이 일을 하면 그만이고 하기 싫으면 그만 아니옵니까..?
왕건 ........
능산 소인이 보기로는 유장자 어른께서 주군께 별다른 호의가 있으신 것 같사옵니다.
왕건 어서들 가세.
왕건이 대답을 피하듯 그렇게 가면 세 가신이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닫는다.
왕건 (E) 답답한 일이다. 유장자는 나에게 자신의 여식을 맡기려 하고 있다. 그때문에 모든 것을 걸려고 하는 게야. (도리질하며)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있는가..? 나의 지난날을 잘 알고 있는 유장자가 왜 그렇게 집요하게 딸을 맡기려 하는 것일까..? 왜......?
한숨을 쉬며 그들 그렇게 지나쳐 가면....디졸브
씬 황궁 외경
의원 (E) 황후마마, 태중에 아기씨께오선 아주 건강하신 것 같사옵니다.
씬 황후전 밖
제조상궁과 상궁들이 대기해 있다. 진내관과 소속 내관들도 한켠에 서 있고
씬 황후전 안
연화의 배는 많이도 불러 있다. 의원이 막 진맥을 끝내고 의료기구함을 싸고 있다.
백씨 황후마마께서는 괜찮으시겠는가..? 아기씨가 두 분이나 태중에 계신다고 하지 아니 하셨는가..?
강장자 허허, 부인.. 태중에 아기씨들께서 건강하시다 하는데 우리 마마께서도 당연히 건강하시지 않겠소이까..?
의원 그렇사옵니다. 황후마마도 아기씨도 모두 아주 강건하시옵니다. 염려들 놓으시오소서.
백씨 자주자주 들려 주시게. 출산일이 얼마 아니 남았는데 산모를 잘 살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의원 예, 대부인 마님...
의원이 그렇게 물러가고 강장자와 백씨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연화를 본다.
강장자 황후마마, 좀 어떠시옵니까..? 기분은 괜찮사옵니까?
연화 .........
강장자 마마께서 두 분 아기씨를 생산하실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옵니다. 이거 요즘은 인사받느라 바빠서 함부로 바깥 나들이도 못할 지경이옵니다. 허허허.....
백씨 왜 아니 그렇겠사옵니까..? 이 나라의 태자마마가 한꺼번에 두 분이나 이 세상에 나오시는데요, 호호호...
강장자 꼭 아드님을 낳으셔야 하옵니다. 그래야 훗날에 대위를 이어받지요.
연화 ......... (계속 아무 반응이 없다)
강장자 명주에 있다는 그 죽은 북원부인의 아들 말이옵니다.
연화 .........?
강장자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사람들을 놓아 알아보았사온데... 그 굴산사라는 절에서 아주 자취를 감추었다 하옵니다.
백씨 나으리,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강장자 그렇답니다. 어느 날 밤엔가 지나가는 객승과 함께 그 절을 떠나버렸다는 거예요.
백씨 세상에... 그 객승은 누구일꼬..? 그래도 폐하의 혈육인데... 사람들이 찾지 않겠습니까?
강장자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라졌다는 거예요. 아주 자취를 감추었다 이겁니다. 우리 황후마마를 위해서 이만한 다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아주 골치아픈 일이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씨 그렇구 말구요. 아이구 부처님도 고맙기도 하시지... 황후마마, 이제 걱정하실 것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그저 몸조리 잘 하시고 모두가 원하는 태자마마를 낳으세요.
얘기하다 말고 백씨는 연화를 본다. 대꾸가 없다. 이들이 뭐라 하든 연화는 그저 먼 산을 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성한 듯 중얼거린다.
연화 아이를 낳지 않을 수는 없겠사옵니까..?
백씨 ............. (어이없어) 예...?
연화 그냥 이대로 살고 싶습니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요.
강장자 황후마마...?
연화 ........... (눈물 흘리며)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틀림없이 나도.... 북원부인처럼 될 거야.... 그렇게 몸부림치다가 죽을 거야...... 그렇게 죽을 거야.
강장자 황후마마.............?
씬 대전
궁예가 아지태와 마주해 있다.
아지태 폐하, 황후마마께오서 곧 아기씨를 생산하신다 들었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궁예 고맙소... 그래, 내원의 일은 할 만하오..?
아지태 그러하옵니다. 폐하의 황은이 이토록 두텁사옵니다. 어찌 하는 일이 즐겁지 않겠사옵니까..?
궁예 다행이구려. 그곳의 주인은 종간사형이오. 경도 알고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짐의 사형이 되는 사람이외다.
아지태 들어서 잘 알고 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학식이 높고 인품이 넓어서 많은 분들의 존경을 받는다 들었사옵니다.
궁예 더 나아가서 오늘의 짐과 이 나라를 있게 한 사람이 바로 내원의 종간사형이시오.
아지태 그 점도 알고 있사옵니다.
궁예 그 내원이 아학사가 온 이후로 심기가 많이 불편할 것 같소이다. 모쪼록 잘 지내시구려.
아지태 예, 폐하.
궁예 무엇하면 오늘 같이 올걸 그랬구먼...
아지태 내원께서는 보실 일이 있어. 예성강으로 출타하셨사옵니다.
궁예 예성강..?
아지태 예, 폐하. 그곳의 왕장군을 만나러 가시는 듯 싶었사옵니다마는...
궁예 어, 그렇구먼... (끄덕이며) 그럴 일이 있지...
아지태 그럴 일이란 무엇이온지..?
궁예 아주 큰 일이오. 저 백제국 속에다가 우리의 깃발을 꼽는 일이오. 왕장군에게 그 일을 맡겼지.
아지태 대단하시옵니다. 왕장군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는 인물이옵니다.
궁예 워낙 비밀을 요하는 일이라 내원에게도 아직 말을 하지 않았는데...
아지태 잘 하셨사옵니다. 상대를 신임하실 수록 적당한 견제가 계셔야 하옵니다. 내원어른께는 그리하실 필요가 있으시옵니다.
궁예 글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소이다마는... 그보다도 아학사..?
아지태 예, 폐하.
궁예 경은 짐에게 새 도읍을 말하여 주었소. 어디를 생각하고 계시오..?
아지태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신은 철원을 추천해 드리고 싶사옵니다.
궁예 철원...?
아지태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오선 그 곳에서 일어나셨사옵니다. 원래부터 이 곳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셨사옵니다.
궁예 그래요..?
아지태 신이 알기로는 왕장군의 가친인 왕륭이 요설을 믿고 송악에 왕기를 운운하며 폐하께 이곳을 천거해 드렸사옵고 또한, 내원어른께서 그 송악의 기운을 누르려고 무리하여 이 곳으로 오신 것으로 아옵니다. 폐하의 황도는 철원이시옵니다. 그곳이야말로 삼함을 통털어 중심이 되며 앞으로 북쪽을 향해 뻗어나갈 수 있는 대국의 발원지가 될 것이옵니다.
궁예 (한참 보다가) 경은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오. 짐은 실로 처음부터 철원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소이다. 경의 말이 맞소. 철원은 요새 중에 요새이고 마땅히 대 제국의 중심지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오.
아지태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그리하십시다. 적당한 기회에 짐과 함께 철원에 가 보십시다. 가서 황궁의 터를 다시 살펴보십시다. 하지만, 당장은 곤란하오. 왕장군이 맡은 일을 한 연후에 그때, 민심을 다잡아 일사천리로 처리해 버리십시다.
아지태 마땅하고 옳은 일이시옵니다, 폐하.
씬 예성강 길
종간이 복지겸과 은부를 대동하고 가고 있다. 바닷가 길이 계속해 보여온다. 보고 있던 종간이 중얼거린다.
종간 역시 예성강은 기가 막힌 곳이야. 바다와 맞닿아 이만한 길이 없지. 이러니 송악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부를 누릴 수 밖에....
은부 그러하옵니다. 요즘도 장사하는 상인들로 객관이 넘쳐난다 하옵니다.
종간 (끄덕인다) 이보시오, 복장군..?
복지겸 예, 내원어른...
종간 장군은 여기 은장군에 이어 군의 통수권을 맡은 병부령이 되셨소이다. 헌데, 헌데 말이오..? 이번 왕장군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안심이 아니되오.
복지겸 무엇이 말이옵니까..?
종간 아무리 출중하고 훌륭한 장수라 하나 어떻게 백제속에 들어가 그 중심부에 우리의 영토를 만든단 말이오..?
복지겸 그만한 길이 있으니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종간 그렇다 하더라도 그토록 중요한 일을 나와 장군이 몰랐다는 것은 섭섭한 일이오.
복지겸 허허허.. 내원어른, 그 때문에 예성강에 대호족인 왕장군의 숙부 왕평달 장자가 내원어른께 오셨사옵니다. 우리가 또 이렇게 가고 있고 말입니다. 섭섭함을 푸시오소서.
종간 허허허.. 물론이오.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데 마음에 담지는 않소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우리가 먼저 알았어야지..
그들 그렇게 간다. 포구 가까이에 이르자 저만큼 왕건과 왕평달, 두 사부, 그리고 세 가신들과 왕식렴 형제, 장수장들이 이들을 맞고 있다. 이들 가까이 이른다.
씬 그곳
왕건 (앞으로 나서며) 내원어른, 그리고 병부령장군 어려운 걸음을 하셨사옵니다.
왕평달 어서오시오소서.
종간 바쁘다는 이야기 들었소이다. 마중까지 나와주니 반갑구려.
복지겸 오랜만입니다, 왕장군..
왕건 예.. 저 쪽으로들 납시오소서. 객관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사옵니다.
종간 가십시다.
이들 왕건의 안내로 객관 쪽으로 몰려들 간다.
씬 동 객관 외경
많은 내원의 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풍악소리가 들려온다.
씬 동 객관 안
무녀들이 춤을 추고 악공들이 악기를 켜고 있다. 중앙에 종간, 은부, 복지겸을 모셔놓고 그 좌우로 왕평달과 왕건들이 앉아있다.
종간 허허... 호사가 지나친 것 같소이다. 악공과 무희까지 대동을 하다니...
왕건 처음으로 이런 자리를 내원어른을 위해 마련했사옵니다. 너무 꾸중하지 마시오소서.
은부 그리 하시오소서, 내원어른...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받으셔야지요.
종간 알다시피 나는 술을 마실 줄 모르오. 악공과 무희는 당치가 않소이다. 허나 은장군과 복장군도 함께 오셨으니 이번까지만 자리를 함께 하겠소이다. (조금 마시며) 이것은 무슨 차인지 아주 맛이 좋구려.
왕평달 예, 당에서 건너온 차이옵니다. 햇차를 바로 가져온 것인지라 향이 독특하실 것이옵니다. 마음에 드시면 내원에 드실 것을 좀 보내 올리겠사옵니다.
종간 허허허.. 뭐 그렇게 까지야..(다시 한모금 마시며) 자 긴요한 이야기를 하러 왔는데 술자리부터 앉아 있는 것은 온전치 못하다고 보오. 향연은 잠시 후에 하기로 하고 그 이야기부터 들었으면 좋겠소이다.
왕건 편하신대로 하시오소서. 허면...
왕건이 왕평달에게 고개짓을 하자 왕평달이 다시 주변에 모두들 물러가라는 표시를 한다. 악공들과 무희가 물러가고 왕식렴들이 모두 물런간다. 그리고 삽시간에 커튼이 내려진다. 그 방은 회의장으로 변해 버린다.
씬 동 방 밖
염상과 금대 등 군사들이 지켜 서 있고....
씬 다시 동 방안
종간이 냉랭한 모습으로 왕건을 보고 있다. 왕평달, 복지겸, 은부들이 함께 해 있다.
종간 나는 왕장군이 수천의 군사와 백여 척이 넘는 대 함대를 이끌고 백제로 들어간다는 이 엄청난 상륙전을 좀 더 빨리 말해주었더라면 하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왕건 송구하옵니다, 내원어른... 일찍부터 그럴 생각이었사오나 폐하의 재가를 받고 기회를 마련치 못하여 오늘에 이르렀사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병부령께도 송구하옵니다.
복지겸 아니올시다. 이번 일은 그야말로 엄청난 대기획이고 작전이올시다. 마땅히 극비를 요하는 일이예요. 이해를 합니다, 왕장군...
은부 정주의 유장자와 일을 함께 하신다구요..?
왕평달 그러하옵니다. 그분께서 워낙 많은 배들과 상인들과 또한 재력을 갖추고 계셔서...
종간 왕장군에게 물었소이다.
왕평달 아, 예...
종간 언제쯤 시행할 예정이오.
왕건 준비를 마치고 출전하는데 적어도 육개월은 소요될 것이옵니다.
종간 설명을 들어보니 해볼 만한 일인 것 같소이다. 그러나..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가는 일이 육지에서 막는 일보다 갑절은 어려울 것이오. 즉, 쉽지 않은 전쟁이 될 것이란 말이외다.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수천의 군사와 그 엄청난 배들을 모두 수장시키는 결과가 됩니다.
복지겸 ......?
왕평달 그만한 준비야 없겠사옵니까, 내원어른..? (하다가 입을 다물고)
종간 (계속 왕건에게) 그에 대한 책임도 준비가 되었소이까..?
왕건 전선에 나가는 장수에겐 군령이라는 것이 있사옵니다. 수천의 목숨이 죽어 나간다면 제 목숨인들 어찌 걸지 않겠사옵니까..? 실패하면 목숨을 내놓겠사옵니다.
복지겸 아직 싸움도 해보지 않고 실패부터 논한다는 것은 장수된 도리가 아니올시다. 그건 그때 가서 따져도 늦지 않소이다.
종간 좋소이다.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자초지종을 말해주니 오해가 좀 풀렸소이다. 이번 일은 나나 내군의 은장군이나 또 여기 병부령도 모두 적극 지원할 것이외다. 잘해 보시오, 왕장군...
왕건 고맙사옵니다, 내원어른...
종간 자, 그 이야기는 이쯤 하고 무엇하나 좀 물어봅시다, 왕장군...
왕건 말씀하시오소서, 내원어른..
종간 폐하께서는 왕장군에게 도읍을 옮기는 일과 나라 이름을 바꾸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까..?
왕건 ........?
종간 요즘은 폐하를 뵙는 일이 옛날보다 못하오이다. 아지태라는 사람 때문이오. 폐하께서 그에관해 말씀하시지 않터이까..?
왕건 말씀을 하셨사옵니다.
모두들 긴장해서 왕건을 본다.
왕건 나라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미 굳어지신 듯 하고.. 또, 도읍을 다시 옮기신다 하셨사옵니다.
은부 허어, 그런 일이.... 내원어른께는 말씀이 없지 않으셨사옵니까..?
종간 그래서 뭐라고 하셨소이까..?
왕건 맞지 않는다 아뢰었사옵니다. 백성이 고단할 것이라고 말이옵니다.
종간 그러니까 뭐라고 하시더이까..?
왕건 먼 장래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라 하셨사옵니다.
종간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눈을 감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긴다.
종간 아지태라는 요물이 나타나 온 조정을 휘젖고 있소이다. 행여나 왕장군도 그자에 동요되지 않기를 바라오. 내 들으니 패서계 호족들이 심심치 않게 정주의 유장자와 왕장군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다 들었소이다.
모두들 .......?
종간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마시오.
왕건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종간 또... 이보시오, 왕장자..?
왕평달 예, 내원어른...
종간 장자의 자제 왕식렴이라는 젊은이가 별도로 상당히 그 조직이 큰 첩보망을 가동하고 있다 듣고 있소이다. 물론 왕장군을 위한 것이겠지마는.. 경고하는 바이오. 나랏일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시오.
왕평달 아, 예.. 내원어른.....
종간 물론 폐하는 이보다 크고 더 웅장한 제국을 건설하실 분입니다. 나는 그 분의 충직한 개를 자처하는 사람이오. 언제 어느 때든, 어느 곳이든 내가 있다는 것을 명심들 하길 바라오.
왕건 이를 말이겠사옵니까..?
종간 자. 휘장을 여시오. 그대들은 술을 한잔 해야 할 것 아니오. 나는 조금 전에 그 차나 한잔 더 주시오.
왕건 예, 내원어른...
왕평달 얘들아 휘장을 열어라. 악공을 부르고 무희를 들여라. 어서 찻상을 다시 봐 올려라.....
휘장이 열리고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모이면서 장내는 금방 수선스러워진다. 종간이 마시던 찻잔을 입에 대고 조용히 삼키고 있다. 그리고 조용히 왕건의 표정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길게 디졸브되면...
해설 대 금성공략작전. 후삼국의 전투에 있어서 획기적이고도 불가사의한 최고의 작전으로 불리우는 이번 일은 이렇게 해서 막이 오른다. 기록으로 볼 때, 왕건이 훗날 나주로 불리는 금성을 공략한 것은 서기 903년과 909년 두 차례에 걸쳐 보이고 있다. 지금 이 이야기는 903년의 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왕건은 조정에서의 조율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함선을 만들고 또한 그에 필요한 여러 대책들을 본격적으로 서두르기 시작한다. 물에서 자라고 바다에 익숙한 왕건의 기량을 그야말로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대 사건의 시작이었다.
씬 인서트 (정주 포구)
바다 가득히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다. 수많은 배들이 바다 안개를 뚫고 정주 포구로 몰려들고 있다. 그 모습들을 바다 가운데 위에서 왕건과 유장자들이 보고 있다. 뭔가 바다를 가리키며 수군거리고 있는 그들...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유장자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디졸브되면...
씬 인서트 (포구 어느 곳)
수많은 인부들이 목재를 나르고 배를 만들고 통나무들을 끌어올리고 곳곳이 아우성이다. 배를 건조하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왕건이 유장자와 함께 그 현장들을 돌아보고 있다.
씬 인서트 (어느 훈련장)
수군 훈련이 한창이다. 유금필과 능산, 박술희들이 이치와 더불어 군사들을 조련하고 있다. 장수장의 모습도 보인다. 상륙작전을 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그 훈련에서...
해설 왕건은 함선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모든 것을 철저히 위장했다. 군사훈련을 일상적인 훈련처럼 꾸몄고 또한 전함을 만드는 일은 유장자가 상선을 만드는 것으로 꾸몄다. 워낙 극비에 붙여진 일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백성들은 물론 백제나 신라에서는 더더욱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씬 유장자 집 별채 마당
부용이 빨래줄에 빨래를 널고 있다. 시녀가 그 일을 돕고 있다.
시녀 아씨, 참으로 너무 하시옵니다. 이런 일을 손수 하시다니요.
부용 아버님의 명이시니라.
시녀 나으리께서 하셔도 너무 하시옵니다. 곱게만 자라신 아씨를 아니 마치 천한 노비처럼 부리시다니.... 쇤네가 하겠사옵니다, 이리
주시오소서.
부용 그런 말 말거라. 왕장군님의 관한 것은 모두 내가 하라 이르셨느니라. 어찌 어른의 영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이냐...? 가서 저녁 상이나 준비하여라.
시녀 하지만 아씨....
부용 어서...
부용은 빨래를 다 널고 돌아서는데 유장자와 왕건이 막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부용이 인사를 한다.
부용 이제 들어오시옵니까...?
유장자 허허허.. 왕장군의 옷을 빤 모양이로구나. 허허허허....
왕건 (놀라서) 그럴리가요...? 낭자께서 왜 저의 옷을....?
유장자 옷 뿐이겠는가..? 밥상이며 심부름까지 왕장군의 모든 일을 수발들 것일세. 내가 그리하라 하였네.
왕건 아니, 장자어른....
유장자 손님을 뫼시는 예이니 괴념치 말게나. 자, 들어가세. 할 얘기가 아주 많아.
왕건 장자어른... (하다가) 아니, 낭자... 이러시면 아니됩니다. 어떻게 낭자가 이런 일을....
부용 아버님의 영을 받들 뿐이옵니다. 어서 드시오소서.
왕건 하, 나 이런...
씬 동 별채 안
유장자가 함선의 설계도들을 보고 있다. 수많은 설계도들을 이것저것 들추고 있는데 마주 앉아 있는 왕건이 보다가 묻는다.
왕건 장자어른... 아무래도 따님의 일은 너무 하신 것 같사옵니다.
유장자 허허...왕장군..? 큰 일을 하는 사람이 어찌 그런 일에 자꾸 신경이 가 있는가..? 그 일은 괴념치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왕건 하지만 장자어른...
유장자 자 그만하고 이 설계도나 보세나...꽤 듬직하지 않은가..?
왕건 (할 수 없이 설계도 보며) 아, 예...헌데, 배가 너무 크지 않사옵니까..?
유장자 크다.....? 허허허... 전투할 말도 싣고 군량미도 싣고 무기도 싣자면 이만은 해야하지 않겠는가..?
왕건 참으로 대단하옵니다.
유장자 왕장군도 바다에서 산 사람이 아닌가..? 이걸보고 대단하다고 하면 되겠는가.? 규모가 이만은 해야 적들이 겁을 먹지.. 허허허....
해설 이때의 배의 규모, 그것은 우리로서는 상상 이상의 것이다. 한꺼번에 장정이 백 이십 명이나 탈 수 있었고 말과 무기를 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길이로 계산해 보면 폭이 17. 5 미터, 그리고 길이는 35 미터에 달했다. 콜롬보스가 1492년 대서양 횡단 때에 타고간 배는 폭이 17미터에 길이가 28미터 였다. 이미 그들보다도 오백 여년 전에 이들보다도 더 큰 배를 만들 수 있는 놀라운 선박 건조술을 이들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왕건에게 있어서 불안하고 초조한 것은 과연 그들이 금성에 무사히 상륙할 수 있을까 하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고려군과 내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이번 작전은 처음부터 무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던 왕건이 다시금 묻는다.
왕건 장자어른...
유장자 왜 그러시는가..? 아직도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눈치구먼 그래..
왕건 장자어른의 도움으로 이미 모든 일이 시작되었사옵니다. 하온데... 배와 군사가 있다 해도 누군가 금성에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이번 일은 어렵사옵니다.
유장자 (보다가 웃는다) 이보시게, 왕장군... 우리는 처음부터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네. 지금까지 내가 그 대책을 말하지 않은 것은 보다 정확하게 금성과 백제황실에 군사동향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네.
왕건 ........
유장자 물론, 자네의 송악에서도 그리고 황실의 은부장군도 나름대로 첩보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네. 그러나, 직접 그곳과 거래를 하고 있는 우리보다는 떨어질 것이야, 허허허... 이제 다 되었네.
왕건 그렇사옵니까..?
유장자 백제국의 견훤왕은 지금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네. 우리가 배를 만드는 사이 아마도 신라의 서라벌을 취하기 위해서 남해안 쪽으로 대군을 이동해 갈 것일세. 한 서너달 뒤에 말일세.
왕건 그렇사옵니까..?
유장자 견훤왕은 서라벌을 갖고 싶어하네. 아마 그것은 우리 황제폐하도 마찬가지 일게야. 신라의 심장부를 얻어야 다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
왕건 .......?
유장자 이제 때가 되었으니 자네 쪽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 서남해로 들어가게 하게나.
왕건 서남해로 말이옵니까..?
유장자 그곳의 호족들이 흔들리고 있네. 태수 종례라는 사람도 그렇거니와 그곳 호족들 중에 제일 큰 부호라 할 수 있는 오다린이라는 장자가 또한 그러하네. 그들은 모두 그 옛날 장보고 장군의 후예들이네.
왕건 예......?
유장자 모든 바닷사람들의 상징인 장보고 장군이실세. 그분은 백여 년 전 바로 그곳 근처인 진도에 진을 세우고 계셨지.
왕건 맞사옵니다. 그 얘기를 알고 있사옵니다.
유장자 바닷사람들은 바닷사람끼리 통하는 것일세. 우리가 의리라는 것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그들이 도와 줄 것일세.
왕건 그렇게 낙관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일이 아니옵니까...?
유장자 물론 그러하이... 아무나 헤픈 의리를 보이지는 않을 것일세. 그럴만한 믿음을 주어야지. (품 속에서 장도를 꺼내 놓는다) 자, 이 보검을 한 번 보게나.
왕건 아니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유장자 세상에는 이런 칼이 단 세자루가 있네. 하나는 장보고 장군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그곳의 막하장수였던 오씨의 후손 오다린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네.
왕건 ........?
유장자 이 하나는 내가 막대한 재물을 주고 구한 것이네. 바로 당나라 신라방에서 구한 것이지. 말하자면 이 보검은 장보고 장군이 자신의 분신처럼 믿었던 세 가신들에게 내렸던 것일세. 가서 이것을 보여주게. 자네 송악 사람들이야말로 조상이 당나라 신라방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가..? 후손이라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왕건 (감동).... 장자어른...어떻게 이렇게 귀한 것을....
유장자 훗날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오래 전에 구해 둔 것이네... 이제 그 빛을 볼 때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필요로 하는 것이 있네. 오장자나 그곳 태수를 움직이려면 그들을 움직여줄 인물이 필요하네. 바로 그곳에서 멀지않은 백계산 옥룡사일세. 자네의 스승이신 도선대사께서 절 말일세.
왕건 예.......?
유장자 도선비기가 필요하네.
왕건 .........
유장자 자네의 훗날을 예언하고 삼한의 미래를 써 놓았다는 그 도선비기 말일세. 그것을 보여주면 옥룡사의 스님들은 자네를 도와 금성을 움직여줄 것일세. 해 볼만하지 않은가..?
왕건 ............. (비로소 눈이 떠진다) 과연... 과연 그렇사옵니다. 어떻게 그렇게 깊으신 생각을....?
유장자 허허허허.... 자네는 내 백년 손님이 될 걸세. 무엇이 아깝겠는가...?
왕건 장자어른....
유장자 그러나 좀 더 적진의 동태를 살펴보아야 하네. 자네 가인들과 깊은 의논을 해 주게나. 우리는 좀더 백제 쪽을 살펴보겠네 그려, 허허허...
왕건은 여전히 그 보검을 들고서 신기해 하고 있다. 그 왕건의 표정에서....
씬 백제궁 외경
견훤 (E) 이제 준비가 다 되었다...?
씬 동 대전
모든 장수들이 다 모여 있다. 능환, 최승우, 능애, 공직, 박영규, 추허조, 수달, 김총, 방장군, 신검, 양검들이 모여 있다.
견훤 준비가 되었다면 출전을 해야지. 추수도 끝이 났고 농사도 대풍이고, 아니 그런가..?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이 길로 계속 남하하여 대병을 세곳으로 갈라 제 일군이 의령을, 제 이군이 합포를, 그리고 폐하의 철기군이 강주를 넘어 서라벌로 가시는 것이옵니다.
견훤 좋은 생각일세. 거, 대야성을 우회해서 간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리네마는....
최승우 폐하께서 서라벌을 함락시키시면 대야성은 사방 좌우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옵니다. 저절로 백기를 들게 되어 있사옵니다.
견훤 그렇게만 되었으면 좋겠는데..... 제 일군은 누가 맡을 것인가..?
공직 소장에게 맡겨 주시오소서. 이번에 한번 큰 전공을 세워 보이겠사옵니다.
견훤 그리하게. 그렇다면 제 이군은 누가 맡는가...?
박영규 신이 맡겠사옵니다, 폐하.
견훤 좋지... 그리 함세. 내 사위와 그리고 노장 공직장군이 나선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허면, 추장군...
추허조 예, 폐하.
견훤 추장군은 짐과 함께 철기군을 인솔하여 강주를 넘어보세 그려.
추허조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너희 태자 둘은 각각 일군과 이군에 배속하여 전공을 세워 보도록 하라.
신, 양검 망극하옵니다, 아바마마....
견훤 되었어. 한달 동안 마지막 점검을 하고 군사를 각군으로 나누어 목표한 전선으로 이동토록 하라.
모두들 예....
견훤 이번에야말로 대 백제국의 위엄을 천하에 내보여야 할 것이야. 삽시간에 신라 전체를 우리 백제 땅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야. 이번 전투에 모두들 목숨을 걸어 보라고....
모두들 예..폐하....
씬 황후전
황후 박씨와 고비가 찻잔을 마주 놓고 있다.
박씨 이보게, 승평부인...? 차 드시게.
고비 예, 마마....
박씨 지금 대전에서는 전쟁준비로 많은 장군들이 모여 있다네, 아시는가..?
고비 예, 들었사옵니다, 마마...
박씨 그 장군들 속에는 우리 태자가 둘이나 함께 있네. 이번에도 폐하를 모시고 전쟁에 나간다는 게야. 아는가..?
고비 들었사옵니다.
박씨 (차마시며) 자네 보기에 어떠한가..? 우리 두 태자 말일세. 벌써 싸움터에 나가니 의젓하고 장부답지 않은가..? 나는 처음에 염려하고 걱정을 많이 했네마는...결국 사내들이란 제 몫을 해야 대접을 받는다네. 아니 그런가..?
고비 그렇사옵니다...
박씨 배가 많이 불렀네 그려... 곧 아이를 낳을 텐데. 내 생각에는 딸아이였으면 좋겠네 그려.
고비 ........
박씨 중국의 고사를 보면 서자들이 주변의 꼬임에 빠져 옥좌 주변을 얼씬 거리다가 목숨들을 잃는 것을 보았지.
고비 ...... (놀라서) 황후마마.....?
박씨 그래서 교육이란 중요한 것일세. 모든 것은 자네 하기에 달렸어. 아무리 페하의 총애가 넘친다 해도 그 세월이 백년을 가겠는가..? 머지않아 결국은 폐하도 나이를 드시네... 그리되면 큰 태자가 아마도 보위를 이어 받겠지...그렇지 아니 할까..?
고비 (겁먹고) 그, 그렇사옵니다... (끄덕인다)
박씨 차 식네, 이 사람아.... 뭘 그리 겁먹은 얼굴인가..? 다 자네하기 달렸다니까....?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니까... 교육 말일세.
고비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마마...
박씨 호호호호...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차 식네..?
고비 예, 마마....(떨며 차를 마시고)
박씨 세상에 전쟁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꼬.... 폐하께서 친정을 하신다니 온 나라가 이렇게 시끄럽네 그려... (차 마신다)
씬 금성 오다린의 집
마당으로 많은 일꾼들이 짐을 내가고 혹은 곳간에 들이고 있다. 그 한쪽에서 두 명의 집사를 데리고 도영이 그들을 부리고 있다.
도영 저쪽일세. 피륙은 저쪽 헛간에 넣고... 사기그릇은 저쪽일세... (집사에게) 소금은 지금 얼마나 나가고 있는 겐가..?
정집사 한 이백 섬은 되는 것 같사옵니다.
도영 반은 오월국으로 가고 나머지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일세. 셈을 잘 해놓게나.
정집사 예, 아씨...
그때, 오다린과 태수 종례가 그 한쪽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종례 그래도 여전히 바쁘십니다, 오장자님.
오다린 그렇습니다.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이지요. 폐하의 대군이 출전준비를 하고 있다지요.
종례 그렇다 하더이다. 몇 천이 아니라 몇 만의 대군이 움직인다 하더이다. 후방의 모든 호족들에게 그 뒤를 충분히 감당하라는 황명이 다시금 떨어졌소이다.
오다린 .......... (한숨) 그런다고 신라가 쉽게 먹히겠소이까..? 지난 번 대야성에도 큰 낭패를 보았지 않습니까..?
종례 그러게 말입니다. 이 사람도 걱정이올시다. 그렇게 많은 대군이 남쪽으로만 몰려간다면 그러다가... 고려국에서라도 내려오면 전쟁이 아주 복잡해진다 이 말입니다.
오다린 그럴 수도 있지요.
종례 뭐, 우리같은 후방이야, 별일이 없겠지만 말이올시다. 그나저나 또 감독관들이 내려와 시끄러울 겝니다. 군의 뒷수발을 제대로 하나 안하나.... 아주 거덜이 날겝니다.
오다린 생각도 하지 마십시다. 끔찍한 일이니까요...희망이 없소이다. 우리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어요...
그런 그들의 한숨을 쉬는 모습에서...
씬 인서트 (정주 포구)
많은 배들이 도열되어 있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작업이 계속 중이다. 그 위로 노을이 지고 있다.
씬 유장자집 별채 (왕건의 처소)
부용이 하녀와 함께 저녁상을 들고 왕건의 처소로 향하고 있다. 그 앞에 이르러 아뢴다.
부용 장군....저녁상 대령이옵니다.
왕건 (E) 들어오시오.
이들 안으로 들어간다.
씬 동 집 별채 안
왕건이 설계도를 보다가 부용을 맞는다. 부용이 상을 놓고 조용히 물러가려 하는데, 왕건이 묻는다.
왕건 이보시오, 낭자...
부용 예, 장군...
왕건 이것은 좀 지나친 것 같소이다. 아랫사람들이 할 일을 낭자가 계속 한다면 내가 어디 불편하여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부용 아버님의 영이시니 어찌하겠사옵니까..?
왕건 낭자가 싫다고 하면 될 일이 아니겠소?
부용 이미 아버님의 뜻이 정해지셨사온데 어찌 소녀 마음대로 싫다 좋다 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왕건 허어, 나 이런.... 이렇게 해서야.. 내가 어찌 편할 수가 있겠소이까?
부용 소녀 걱정은 마시옵고 어서 드시오소서.
왕건 이 일을 어찌 할꼬...? 도대체 이 일을........?
씬 동 집 유장자 방
부부가 함께 앉아 있다. 부인이 따지듯 묻는다.
부용 모 나으리.. 아예, 우리 부용이를 왕장군의 시녀로 만들 참입니까..?
유장자 허허허... 본래 부부란 서로 시녀도 되고 머슴도 되고 그러는 것이오. 함께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오이까?
부용 모 속이 타옵니다. 저러다가 나으리 뜻대로 아니 되시면 우리 딸아이는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유장자 되고 안되고는 다음에 이야기요. 이미 나의 뜻은 확고하니 더 묻지 마시구려.
부용 모 무엇이 확고하다는 것입니까..?
유장자 우리 부용이도 왕장군이 싫지가 않은 모양이오. 기회를 보아서 두 사람이 함께 잠자리에 들게 할 것이오.
부용 모 (기가 막혀) 나으리.. 그것을 말씀이라고 하시옵니까..? 혼례도 치르지 않고 우리 부용이를.......? 이런 세상에....
유장자 혼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오래오래 같이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오. 기회가 없으면 결과도 없는 것이오. 일단은 그 기회를 만들어주어야 하오.
부용 모 세상에.... 우리 딸이 어디가 못나서.. 그렇게까지 왕장군에게... ?
유장자 그렇소이다. 못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왕장군이 위대하고 큰 인물이기 때문이오. 왕장군은 이 시대에 제일 가는 젊은이자 영웅이오. 혼례같은 것은 못 올려도 좋소이다. 시침을 들인다고 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부용 모 나으리.........? 시침이라니요..?
유장자 더는 말을 마오..
씬 동 집 별채
왕건과 부용이 마주보고 있다.
부용 어서 드시오소서, 장군... 소녀가 성의를 다하여 마련했사옵니다.
왕건 (한참 보다가) 나는 미안하여 이 상을 받지 못하겠소이다. 그리고 송악에 볼 일도 있고 하여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였어요.
부용 장군... 송구하오나 한말씀 여쭙고 싶사옵니다.
왕건 말씀하시구려..
부용 아직도 황후마마를 잊지 못하시옵니까..?
왕건 무엇이오...?
부용 소녀가 뵙기로는 그런 것 같사옵니다. 왜 여인들을 멀리 하시옵니까..?
왕건 그런 일들은 옛날에 다 잊었소이다.
부용 그렇지 않을 것 같사옵니다. 오죽하면 저희 아버님께서 장군과 저를 맺어주시기 위해 소녀를 장군처소에 시녀처럼 들이셨겠사옵니까..?
왕건 ........?
부용 하지만 소녀는 원망하지 않사옵니다. 소녀 또한 장군님을 사모하기 때문이옵니다.
왕건 이보시오, 낭자...?
부용 그리고... 오래도록 한 여인을 그토록 잊지 않고 생각하시는 장군의 그 깊은 정을 참으로 존경하옵니다. 소녀는 그것이 부럽사옵니다.
왕건 이보시오, 낭자....
당황하는 왕건의 표정 위로... 연화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씬 황궁 외경
연화의 비명소리는 계속된다.
씬 황후전 복도
제조상궁과 상궁들이 급히 오가고 있다. 비명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온다.
씬 동 황후전 안
의원들과 궁녀들이 어쩔 줄 모르며 오가고 있다. 연화는 계속 뒹굴고 있다.
백씨 아니, 이보게, 어의..? 어떻게 된 일인가? 오전 전부터 산통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왜 이리 늦는게야..?
의원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소서. 아기씨가 두 분이나 계시는 지라.. 모든 것이 좀 늦나 보옵니다.
제조상궁 아무리 늦다고 하나 이렇게 오래 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의원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소서.
연화 ......... (비명소리 계속되고...)
백씨 세상에, 이 일을 어이할꼬.... 하루종일 산통이 계속되고 아기씨는 보이지 않으니....... 이 일을 대전에는 알려 드렸는가..?
제조상궁 예, 대부인 마님... 진내관이 대전에 간 것으로 아옵니다.
백씨 이 일을 어쩌나... 이 일을 어째.....
연화의 계속되는 비명소리에서 디졸브 되면....
씬 대전
궁예 뭐라..? 황후가 아기를 낳으려 하고 있어..?
진내관 그러하옵니다. 폐하.. 아침부터 산통이 시작되셨사오나 아직까지 아기씨들이 아니 보이신다 하옵니다.
궁예 무엇이 잘못 된 것이 아닌가..?
진내관 자세히는 모르오나 의원의 말로는 아기씨가 두 분씩이나 출생하시기 때문에 어렵고 힘이 드시다 하옵니다.
궁예 그래도 그렇지... 하루종일 산통에 시달린다면 사람이 어찌 견디겠는가..? 아무래도 짐이 가 보아야겠구먼..
진내관 아니 되옵니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아기씨를 생산하시는 곳에 폐하께서 납시는 일은 없사옵니다. 기다리시오소서.
궁예 기다려..? 방금 사람이 죽어간다 하지 않았는가..? 가 보세...
궁예가 일어선다. 그리고 대전을 나서면서 계속되는 연화의 비명소리..
씬 황후전
연화가 죽을 힘을 다해 힘을 쓰고 있다. 비명소리가 처절하다. 그것은 아이를 낳는 다기 보다 신음소리에 가깝다. 제조상궁이 힘을 쓰라고 말하고 있다.
제조 마마, 힘을 쓰시오소서, 좀 더 힘을 쓰시오소서....
백씨 ...........
연화 (비명을 지르다가 절규처럼 중얼거린다) 싫어... 아이를 낳기 싫어...어머니... 나는 아이를 낳기 싫어....
백씨 (놀라서 주변을 보며) 마마.....?
연화 낳기 싫어........! 낳기 싫어.........!
제조 ........?
백씨 ........?
연화 (에코) 아이를 낳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