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67회>
씬 황궁 대전 앞 뜰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궁예의 위엄 있는 표정이 법석 아래의 대중들을 굽어 보고 있다. 숨소리 하나 없이 사람들은 그렇게 얼어붙어 궁예를 보고 있다.
궁예 나는 분명 말하였노라. 내가 참 미륵이라는 것을..... 미륵은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예비된 부처이니라.
모두들 .......
궁예 그대들은 보았을 것이다. 이 세상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에 겨운가?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석가모니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니라.
석총이 숨을 삼킨다. 눈을 크게 부릅뜨며 궁예를 본다. 허월은 그만 눈을 감는다. 박지윤도 왕건도 숨을 삼킨다. 장자들은 모두 굳어 있고, 연화도 표정이 굳었다. 궁예의 설법은 계속된다.
궁예 석가모니가 누구인가? 바로 나의 자리를 훔친 도적이니라.
대중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여지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궁예가 다시 주장자로 바닥을 몇 번 친다. 석총의 눈은 파르르 떨고 있다. 허월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고......아지태는 만족한 미소를 띄우고 있다. 박유는 그런 아지태와 궁예를 번갈아 보며 도리질을 한다.
궁예 그 옛날 지나간 세상에 나 미륵과 함께 석가가 수행을 하였느니라. 우리는 수행 도중에 누가 먼저 도를 이루어 저 세상으로 나가 불쌍한 중생들을 교화하겠는가 내기를 하였노라.
모두들 .......
궁예 우리는 한 방에 자면서 누구의 무릎에 먼저 모란꽃이 피는가를 시험하였노라. 과연 누가 이겼겠는가? (사이) 참 미륵인 내 무릎에 그 꽃이 피었노라.
종간 ...........( 얼굴에 근육이 경련하고 있다, 마른 침을 삼킨다)
궁예 그러나 도둑 석가가 거짓으로 잠든 체 하고 있다가 내 꽃을 가져다가 제 무릎에 꽂았노라.
석총이 드디어 일어나려고 한다. 그것을 허월이 지긋이 누른다.
허월 미륵께서 하시는 말씀이세. 더 들어보시게나.
궁예 (계속) 나는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석가에게 양보를 하였느니라. 그리하여 석가에게 이렇게 말하였노라. 더럽다, 참으로 더럽다. 네가 먼저 세상을 맡아서 하거라.
궁예는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돌아본다. 누구도 말이 없다.
궁예 대중들은 들으라. 세상이 그리하여 고단해진 것이니라. 모두가 석가의 마음을 따라 도둑의 마음이 생겨 혼탁해졌느니라. 허나, 이제 때는 이르렀고 곧 나, 참 미륵이 이 세상에 왔노라. 그대들은 모두 나를 따라 이 세상 고통의 짐을 벗고 모두가 낙원에 이를 것이니라. 나를 따르는 자는 누구나 천상의 세계, 저 도솔천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
갑자기 아지태가 일어나며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친다.
아지태 미륵 부처님, 만세! 미륵 부처님, 만세!!
그러자, 몇몇 호족들이 따라 일어나며 두 손을 번쩍 든다. 그리고,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호족들 미륵 부처님 만세!! 미륵부처님 만세!!
그러자, 종간과 박지윤을 비롯한 모든 문무신료들이 따라 일어나며 복창을 한다.
모두들 미륵 부처님 만세!! 미륵부처님 만세!!
아지태 황제 폐하, 만세!!
모두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열광이다. 일제히 염불 소리가 터지기 시작한다. 궁예는 그 위에 더욱 더 목청을 높여 열변을 토한다.
궁예 그 옛날 원효는 나무아미타불만 불러도 불법을 다 알 수 있다 하였느니라. 옳은 말이니라.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주문이 있노라. 그대들은 외울지어다. 집에서나 길에서나 잘 때나 일을 할 때나 모두 외울지어다. “ 옴마니 반메홈” 을 외우도록 하라. 이것은 석가도 알았고 나도 알았던 불경의 모든 것이니라. 이 주문이 그대들을 이 지옥의 땅에서 천상으로 이끌 것이니라.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계속)
대중들이 모두 주술처럼 그 옴마니 반메홈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넓은 정전 뜰이 그 소리로 가득하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계속되는 대중들과 궁예의 표정 위로....
해설 궁예가 지은 경전, 우리는 지난 회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궁예가 지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함흥 무가의 사설을 보면 적지 아니 그 속 뜻을 추측해 볼 근거가 있다. 그것이 바로 미륵과 석가모니 부처의 사이에 있었다는 모란꽃에 얽힌 이야기이다. 궁예는 자신이 미륵임을 그렇게 내세우며 경전을 짓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씬 동 법회 장소
수많은 호족들 사이로 지나치며 궁예가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있다. 고승들은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고, 아무도 말이 없다. 궁예가 그 쪽으로 온다. 허월을 보자, 궁예가 웃으며 다가간다.
궁예 오, 허월대사가 아니시오이까?
허월 예, 폐하.
궁예 참으로 오랜만이외다. 아직도 그렇게 이 산 저 산 다니시오이까?
허월 그러하옵니다, 폐하.
궁예 (석총을 보며) 헌데 이 스님은 누구신고?
허월 법상종의 회주 석총 스님이라 하옵니다.
궁예 법상종이라?...... 하하하, 그렇다면 대사야 말로 누구보다도 미륵에 대하여는 잘 알겠구료.
석총 .........(고개만 숙일뿐)
궁예 어떻소이까? 미륵을 모시는 불가의 종주로써 오늘의 설법을 어찌보시오?
석총 ..........(대답이 없다)
궁예 나는 대사에게 어찌 보느냐고 묻고 있소이다.
석총 이 몸은 귀가 멀고 눈이 어두워 들은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어찌 대답을 올릴 수 있겠사옵니까?
궁예 (굳어지며) 눈도 멀고 귀도 멀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일시에 다시 굳어진다. 석총은 그렇게 태연히 서있다. 종간이 나서며 말한다.
종간 산속에서만 살아 온 노승이 무엇을 알겠사옵니까? 너무 궤념치 마시오소서, 폐하.
궁예 ........하하하. 하긴 그렇지.. 속고만 살아 온 중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앞으로는 짐이 지은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오.
궁예는 그렇게 지나친다. 아지태가 다가온다.
아지태 폐하, 참으로 이 나라의 영광스러운 대 미륵이시옵니다. 많은 이들이 마음으로 감복하였을 것이옵니다.
궁예 허허허,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이까? 깨달음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 많은 이들이 노력하여 배워야 할 것이야. 자, 황후 가십시다.
연화 예, 폐하.
은부 내군들은 무엇하느냐? 폐하를 뫼시어라.
내군들이 부산하게 다가온다. 동남동녀들이 다시 앞을 서는데, 궁예가 왕건에게 이른다.
궁예 아, 참 왕장군.
왕건 예, 폐하.
궁예 법회에 오기 전에 소식을 들었네. 드디어 아우의 첫 부인이자 내게는 제수씨가 되는 그 낭자를 찾았다지?
왕건 예, 폐하.
궁예 하하하... 기쁜 소식이로고.... 허면, 약속대로 혼례를 집전해 주어야 겠구먼. 이보시오, 대룡부령.
유장자 예, 폐하.
궁예 여기 왕장군은 다시금 전선으로 가야 하오. 되도록이면 혼례를 빨리 서두르는 것이 좋겠소이다.
유장자 망극하옵니다, 페하. 그리하겠사옵니다. 모든 준비는 이미 갖추어져 있사옵니다.
궁예 그거 잘되었구료. 이보시오, 광평서사.
평달 예, 폐하.
궁예 서두르시구료. 짐이 곧 정주로 가리다.
평달 예, 폐하. 망극하옵니다.
궁예가 그렇게 몇 발자국 더 걷는데, 아지태가 허리를 굽히며 다시 말한다.
아지태 폐하, 신은 이 길로 떠나겠사옵니다. 철원의 일이 급하옵니다.
궁예 허허허. 역시 아학사요. 그렇게하오. 아학사와 짐의 마음이 늘 같소이다. 어서 가시구료.
아지태 예, 폐하.
은부 어서 폐하를 뫼시어라.
궁예는 그렇게 군중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디졸브되면...
씬 유장자의 집 외경(밤)
부용모 (E) 하늘이 도왔구나. 하늘이 도왔어.
씬 동 집 안채 방
부용모와 부용이 마주해 있다.
부용모 하늘이 돕지 않고서야 네가 어찌 이렇게 살아서 올 수 있단 말이냐? 아버님과 이 에미는 지금까지 뜬 눈으로 지샜단다 이것아.
부용 ..........
부용모 그래, 내가 참으로 그동안 왕장군을 잘못 보았다. 저만큼 의리가 깊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약속을 지켜 그 경황 속에서도 너를 이렇게 데려 오지 않았느냐?
부용 ..........
부용모 폐하께서 이번 혼례를 주관해 주신다하니, 이보다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느냐? 잘 되었다. 이제 정말 눈을 감고 죽을 수가 있겠구나. 그나저나 그 머리는 어찌할꼬?......
부용 ..........무엇이 그리 급하옵니까? 지금까지도 기다려오지 않았사옵니까? 머리를 기를 때까지.........
부용모 아니다, 아니야. 나는 그 동안 애간장이 다 탔다. 그까짓 머리야 비단 두건을 쓰면 될 것이 아니냐. 절대로 더 미루어서는 아니 된다.
부용 어머니...
부용모 예쁘게 비단으로 두건을 만들어 주마. 곳깔처럼 예쁘게 만들어 주마. 그것이 무슨 대수냐? 이번에도 혼례를 못 올리면 이 험한 세상에 어찌 될 줄 알겠느냐? 절대로 아니된다. 이 에미는 서두를 것이야.
부용 ..........
씬 황궁 외경(밤)
불안한 정적이 감돌고 있다. 내군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
씬 동 내원
종간과 박유가 마주해 있다.
박유 그예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사옵니다. 이제부터 계획된 독재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종간 .....(무거운 신음만).....
박유 부처를 부정하셨사옵니다.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곧 세상의 법이 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옵니다. 감히 어느 누가 나서서 폐하께 바른 말로 간언을 올릴 수 있겠사옵니까?
종간 .....(역시 말이 없다).....
박유 이대로는 아니 되옵니다. 멀리 가셔도 한참이나 멀리 가셨사옵니다. 폐하께서 아무리 옳고 정당한 의도를 가지고 계시다 해도 독선은 결국 그릇되고 편향된 결과를 낳을 뿐이옵니다.
종간 (한숨처럼) 답답한 일이오.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는구료.
박유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수수방관만 하실 것이옵니까? 폐하의 독주를 견제하실 분은 내원 어른 밖에 없사옵니다. 어떻게든 성심을 되돌려 놓으셔야 하옵니다. 그 옛날 백성들과 동고동락 하시던 그 모습으로 말이옵니다.
종간 이 사람도 힘이 없소이다. 폐하께서 그 아지태라는 자의 요설에 빠져 눈과 귀를 닫고 계시오. 내군에 일러 사찰을 강화하라 했지만 아지태 그 자가 쉽게 걸려 들 것 같지는 않고...
박유 그런 방법으로는 아니 되옵니다. 대국적 견지에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충신들을 규합해 정국의 ‘흐름’을 바꿔야 하옵니다.
종간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소? 그리고 아지태 그 자는 술책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고, 폐하께서도 정치력이 탁월한 분이시오. 이번 일만 해도 그렇소. 백성들의 정신을 강력히 통제하면서 밖으로는 백제와 대치하며 시간을 벌자는 것이 아니오? 실로 감탄할 만한 양동작전이 아니겠소? (쓴웃음)
박유 그러는 동안 결국 죽어나는 것은 백성들 뿐이옵니다. 백성들이란 물과 같아서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때로는 배를 덮쳐 가라앉히기도 하는 법이옵니다. 언젠가는 그들의 불만과 저항이 봇물처럼 터져나올 것이옵니다. 이것이 터져나올 때는 그야말로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 것이옵니다.
종간 막아야지요.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러한 파국은 막아야겠지요. 어떻게 해서 이룩된 나라인데...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소이다.
종간의 어두운 표정 위로 궁예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씬 대전 복도
궁예의 웃음 소리가 이어진다. 대전내관과 제조상궁들이 대기해 있다.
궁예(E) 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씬 대전
궁예와 연화가 마주해 있다.
궁예 (여전히 웃음기를 띤 채) 법문이 황후에겐 어려웠나 보구료. 그런 게요?
연화 신첩은 지금도 가슴이 떨리옵니다. 부처님을 부정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서운 일이 아니옵니까?
궁예 허허허 허긴 그럴 테지...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게요. 허나 석가 또한 인간이었고, 결국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소이다. 세상은 여전히 지옥이고, 중생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소이다.
연화 ........
궁예 허나 나 미륵은 다르오. 나는 중생들을 구제키 위해 이 사바세계에 내려온 것이오. 석가가 하지 못한 일을 하려는 내가 석가를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연화 하오나 그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궁예 (단호히) 그렇지가 않소이다. 지금은 정신의 일대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오. 다 버리고 새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말이오. 석가도 버리고 그의 법도 버려야 하오. 이기적인 욕심도, 그 썩어빠진 노예근성도 모두 다 버려야 하오.
연화 ..........
궁예 우리의 앞날은 훤히 열려 있소. 나 미륵의 법을 따르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소이다. 허지만 지금 우리 백성들이나 호족들은 그렇지가 못하오.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길을 외면하고 나 하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안일하고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있소이다. 나는, 바로 그러한 잘못된 생각들을 깨우쳐 주고자 오늘의 법회를 연 것이오.
연화 ...........
궁예 앞으로도 법회는 계속될 것이고, 더욱더 엄히 그들을 다그쳐 깨우칠 생각이오. 그리고 필요하다면 매를 드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오.
연화 (놀라) 매를.. 드시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궁예 정신을 개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오. 무지몽매한 자들에게는 매가 때론 약이 되는 법이오.
연화 하오나 폐하, 신첩은 왠지 불안하옵니다. 폐하께서는 백성들에게 있어 인자한 아버지 같은 분이셨사옵니다. 하온데 지금 뵙는 폐하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궁예 허허허.. 그렇소이다. 나는 만백성의 어버이오. 허지만 어버이란 때때로 회초리도 들어야 하는 것이오. 그래야
자식이 비뚤어 나가지 않지..
연화 하오나 무지한 사람들이 행여 폐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궁예 걱정마시구료. 황후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내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머지 않아 백성들은 짐의 뜻을 알게 될 것이오. 대제국은 결코 짐의 것이 아니외다. 그 영화는 백성들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게 될 것이고, 자손만대에 걸쳐 영원토록 미륵의 낙원에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오.
연화 .......(여전히 불안하지만)............
궁예 자...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십시다. 밤을 지새도 끝이 없을 것 같구료. 그나저나 왕건 아우가 첫째 부인을 찾았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소. 허허허... 나도 이렇게 기쁜데 아우는 얼마나 기쁘고 반가웠을꼬...? 아니 그렇소, 황후?
연화 그럴 것이옵니다.
궁예 내 대룡부령과 광평서사에게 혼례를 서두르라고 일렀소이다. 황후께서도 황실의 일이다 생각하고 각별히 관심을 가져주시구료. 시동생의 혼사가 아니오? 허허허...
연화 예, 폐하...
궁예 아우가 뒤늦게 여복이 터진 게야... 이리 될 것을 가지고 그 동안 왜 그리 고집을 피웠단 말인가? 아무튼 잘 된 일이야.. 허허허....
궁예의 웃음에서 디졸브 되면...
씬 왕건의 집 마당(낮)
시끌시끌하다. 장사꾼들이 짐바리를 짊어지고 들어서고 있다. 장수장이 그들을 맞고 있다.
장사꾼1 다녀왔습니다요, 장수장 어른..
장수장 어서들 오게. 고생들 했네..
장사꾼2 어디로 가져갈깝쇼?
장수장 잠시만 기다리게. 곧 작은 마님께서 나오실 걸세.
그 때 오씨가 인기척을 하며 나온다. 모두들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춘다.
오씨 수고들 했네... 지시한 것들 중에서 빠뜨린 물건은 없겠지?
장사꾼들 예..
오씨 웃돈을 주더라도 가장 상품으로 구하라 했는데, 그리들 하였는가?
장사꾼들 예, 마님..
오씨 미리 일러두었지만 그 물건들은 유장자 댁에 예물로 보낼 것일세. 조금이라도 천해 보이거나 품위가 떨어진다면 다시 걸음을 해야 할 것이야.
장사꾼들 ........
오씨 자 그럼 일단 안으로 들이게..
장사꾼들이 안채로 향한다. 오씨가 여유로운 미소를 짓다가 장수장에게 묻는다.
오씨 나으리께선 사랑에 계시는가?
장수장 예, 장자 어르신과 말씀을 나누고 계시옵니다.
오씨 .....허긴... 그러실 게야. 하실 말씀들이 많으실 게야.
오씨의 의미심장한 표정에서..
씬 동 사랑
왕건과 왕평달, 왕식렴, 왕신이 모여 있다.
평달 이보게 조카.
왕건 예, 숙부님..
평달 자네는 어찌 보았는가? 어제 있었던 그 법회 말일세....
왕건 ....(작게 한숨)....실은 저도 전혀 뜻밖의 일이었사옵니다. 왜 그런 법문을 하셨을까... 밤새 생각이 많았사옵니다.
평달 나도 한숨도 못잤다네.. 눈 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답답해서 말일세.. 세상에 그런 법문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부처님이 세상을 망치다니... 하늘이 노하실 일일세.
왕건 ...........
평달 영민하신 폐하께서 실수로 그런 엄청난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테고...
식렴 백성들의 정신을 강력히 통제하시려는 의도가 아니겠사옵니까? 철원천도 문제로 백성들과 호족들의 불만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때이옵니다.
평달 위기야.. 이 나라가 세워진 이래 가장 큰 위기가 닥쳐오고 있어..
왕건 .....그렇사옵니다. 위기는 위기이옵니다. 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 신하들이 폐하께 힘이 되어 드려야지 않겠사옵니까?
평달 ...? 힘이 되어 드려야 한다?
왕건 막중한 국가의 대사가 진행되고 있사옵니다. 온나라, 온백성이 뜻을 하나로 모으지 않는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지요. 폐하께서도 고심 끝에 내리신 처방일 것이옵니다.
식렴 하지만 형님, 그런 처방으로 얼마를 버틸 수가 있겠사옵니까? 겉으로는 폐하의 법문에 만세로써 화답을 했지만, 개개인의 속마음은 그렇지가 않을 것이옵니다.
왕건 ......
평달 식렴이 말이 맞네.. 다들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대해 참으로 걱정이 많을 게야. 무엇보다 우리 호족들에 대한 단속이 한층 더 강화될 것일세..
왕건 ........
평달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조카가 전쟁터로 떠난다는 것이야.. 이럴 때는 그저 멀리 떨어져서 지내는 것이 좋겠지.. 잘못 휘말리면 조카마저 위태로울 수가 있네..
왕건 .........?
씬 유장자의 집 외경
박지윤(E) 참으로 앞날이 까마득합니다, 그려...
씬 동 안
박지윤과 유장자, 장자1, 2가 모여 있다.
박지윤 하루하루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소이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장자1 그렇게 무서운 폐하의 모습을 뵌 것은 처음이었사옵니다. 소생은 등꼴이 다 오싹했사옵니다.
장자2 결국 우리 호족들을 옥죄시기 위한 수순이 아니겠사옵니까? 이제 황제의 권위를 뛰어넘어 부처님의 윗자리에 앉게 되셨으니 앞으로 뭐라고 하시든 무조건 따를 도리밖에 없지 않겠사옵니까?
박지윤 (한숨) 그러게 말입니다.
유장자 폐하께서 너무나 큰 무리수를 두셨소이다. 아마도 적지 않은 반발이 터져나올 것이예요.
장자1 반발...이라니요? 어느 누가 감히 폐하께....?
유장자 억누르면 언젠가는 튀어나오는 법이외다. 어제 법회만 해도, 특히나 고승들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오이까?
박지윤 하긴 그렇소이다. 그 석총이라는 스님이 심상치가 않았어요. 다들 보시지 않았소이까?
장자2 (끄덕인다).......
유장자 어제는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지만 앞으로도 법회는 계속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크게 일어날 겝니다. 두 번은 용서치 않는 폐하가 아니십니까?
씬 산사 길
허월과 석총, 두 노승이 나란히 산을 오르고 있다.
허월 무에 그리 생각이 많으신가?
석총 ......(묵묵히)........
허월 벙어리가 되신 겐가? 왜 아무 말도 없는가?
석총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구먼.. 무슨 낯으로 부처님을 대한단 말인가?
허월 석총이 자네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일세.. 죽더라도 나같은 땡초가 먼저 죽어야지..
석총 ........이제야 가면을 벗은 게야.. 궁예는 미륵이 아닐세. 사악한 요승일 뿐이야.
허월 ...........
석총 육자진언인 옴마니 반메홈의 주문은 불경의 모든 것일세. 최고의 주문이고 최상의 중생구제의 서원일세. 그러나 궁예는 그것을 잘못 써먹고 있네.. 삼십오억년 후에나 나타난다는 미륵이 자신이라고 떠벌이고 있네..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허월 어찌하겠는가? 우리로서는 아무 힘이 없네...
석총 허월이 자네가 큰 실수를 한 게야. 그 때 명주성을 내주는 것이 아니었어.
허월 허허허.. 그러고 보니 내 잘못이 크구먼... 허지만 명주성을 내줄 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네.. 궁예왕이 큰 미륵이 아니라는 것을 말일세.
석총 ........(물끄러미 바라본다).......?
허월 진정한 새주인이 오기까지 잠시 그 자리를 맡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지..
석총 새주인이라... 그게 누구인가?
허월 글세.. 그거야 부처님만이 아시겠지...
석총 ............
허월 허나 새날이 밝으려면 아직은 멀었네.. 앞으로도 피의 세월은 계속될 것일세.. 전쟁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많은 사람이 죽어갈 게야.
석총 (무겁게 도리질을 치며) 끝이 보이지가 않는구먼... 이토록 암담한 세월이 있단 말인가?
씬 충주성 외경
자막 : 충주
중무장한 군사들이 삼엄히 경계를 서고 있다.
유금필(E) 충주에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롭구먼..
씬 동 지휘소
유금필, 능산, 박술희가 멀리 조령을 바라보며 서 있다.
유금필 그 때는 하급 군관에 불과했는데.. 이제 우리도 일약 장수의 반열에 서게 되었어..
능산 그만큼 책무도 막중해진 것이 아니옵니까?
유금필 맞네.. 자리가 높아질수록 어깨는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지.. 허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위세를 부리려고만 한다네.. 우리도 그리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고.. 허허허.....
능산 스스로 늘 경계를 해야겠지요. 병사들과 하급 군관들이 있기에 장수도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유금필 (끄덕이며) 옳은 말일세.. (사이) 한데 술희 자네는 무얼 그리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가?
박술희 ...........
능산 그야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령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님을 그리워하는 것이겠지요. 헛허허....
박술희 너무 그러지들 마십시오. 이 술희는 애간장이 다 타버릴 지경이옵니다.
능산 왜 아니 그렇겠는가? 이웃이 처가집인데 가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적이 되어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말일세.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도 참으로 안타깝네 그려.. 아니 그렇습니까, 형님?
유금필 하하하.. 이를 말인가? 하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일세.. 시대의 비극이 아닌가? 술희 아우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박술희 ...........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 조령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 모습 위로..
아자개(E) 마진군이 충주에 도착했다 했느냐?
씬 사불성/아자개의 처소
아자개와 계모, 대주, 용개, 보개 등이 모여 있다.
아자개 허면 박술희 그 사람도 왔겠구나?
용개 그러하옵니다.
아자개 어찌하고 있다더냐? 군사들의 동태는....?
보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고 하옵니다.
아자개 허허허, 그럴 게야. 거 보거라.. 박술희가 오는 이상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다고 하지 않더냐?
대주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아버님.. 전쟁은 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군령이 떨어지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일개 장수에 불과하옵니다.
아자개 (혀를 차며) 너는 어째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느냐? 궁예왕이 우리와 전쟁을 할 생각이라면 왜 박술희를 충주로 보냈겠느냐? 박술희와 우리의 사이를 잘 알면서 말이다.
대주 .....하오나....
계모 아버님 말씀이 맞느니라. 박술희 그 사람이 설마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겠느냐?
대주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어제의 동맹이 하루아침에 적으로 돌아서는 전장이옵니다.
용개 누이의 말이 맞사옵니다. 경계를 늦춰서는 아니될 것이옵니다.
보개 그러하옵니다.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하옵니다, 아버님..
아자개 대비야 해야겠지.. 대주 네 말대로 세상일이란 모르는 것이니까.. 허지만 이 애빈 누가 뭐래도 박술희를 믿느니라.. 대주 너만 좋다면 이번 기회에 아예 사위를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만은...?
대주 아버님...?
계모 무에 그리 기겁을 한단 말이냐? 그만한 신랑감 구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더냐? 아니 그렇사옵니까, 나으리?
아자개 그야 그렇지.. 무예도 출중하고 학문도 겸비했고, 인물도 그만하면 사내답게 생기지 않았느냐? 허허허...
대주 아버님,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니지 않사옵니까?
아자개 알았다, 알았어.. 그 일이야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는 것이고... 그나저나 마진국의 군사들이 충주에 온 것을 알면 견훤이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인데......?
씬 백제 황궁 외경
견훤(E) 북군이 둘로 나뉘어졌다.......?
씬 동 대전
견훤과 신료들이 모여 있다. 최승우, 능환, 능애, 수달, 추허조, 방장군 등이다.
견훤 한쪽은 충주에 도착해 있고, 다른 한 쪽은 조령을 넘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양쪽에서 협공을 해오겠다는 것인데... 우리 군사들은 어찌하고 있는가?
최승우 매곡성에 도착해 폐하의 다음 영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견훤 음.... 아무래도 군사들을 더보내야겠어.
최승우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폐하?
견훤 저들이 군사를 양쪽으로 나누었으니 우리도 그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추허조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폐하. 이번엔 소장이 가겠사옵니다.
최승우 하오나 폐하, 저들이 그렇게 한 것은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을 벌이겠다는 의도이옵니다. 성문을 굳게 닫고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지금의 군사들로도 충분히 적을 막을 수가 있사옵니다.
견훤 아니야.. 그렇지가 않아.. 이번 전쟁은 소극적인 방어전이 아닐세. 저들에게 우리 백제군의 진면목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야.
능환 그러하옵니다, 폐하.. 파진찬의 말대로 마진이 흔들리고 있다고 하니 지금이야 말로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사옵니까?
최승우 .........
견훤 (끄덕이며) 옳은 말이야.. 그리하도록 하세. 이보게 추장군.
추허조 예, 폐하..
견훤 속히 군사들을 이끌고 상주로 가도록 하라.
추허조 알겠사옵니다, 폐하.
견훤 그리고 방장군도 함께 가도록 하라.
방장군 예, 폐하..
수달 소장도 가겠사옵니다. 금성에서 진 빚을 갚을 기회를 허락해 주시오소서.
견훤 다 가고 나면 황도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그리고 금성은 어찌할 것이야? 자네는 남아 있어.
수달 ..........
견훤 상주의 도착하면 호족들을 잘 단속해야 할 것이야. 상주 일대 읍성들을 우리가 대부분 점령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미덥지가 못해.
추허조 잘 알겠사옵니다, 폐하..
능환 하옵고 폐하.. 사불성의 어르신께 다시 한 번 특사를 보내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견훤 아버님께...? 그만 두게.. 결과가 뻔한 일을 뭐하러 한단 말인가?
능환 하오나 어차피 전쟁이 벌어지면 어르신과 만나게 될 것이옵니다. 미리 사자를 보내두시는 것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최승우 이찬 어른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그리하시오소서.
방장군 그리하시오소서, 폐하..
견훤 허 이거야...
능환 태자 마마들을 뫼시고 가면 한결 너그럽게 대해주실 것이옵니다. 지난 번에도 그러시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리고 가는 길이니 이번에는 추장군을 사자로 보내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견훤 그 일은 알아서들 하게.. 나는 아버님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파...
씬 동 황후전
박씨와 옥이가 마주해 있다.
박씨 태자들을 아버님께 사자로 보낸단 말이냐?
옥이 예, 황후마마... 방금 전 그리 결정이 났다 하옵니다.
박씨 하기사... 손주들 만큼은 박대하지 않는 분이시니까... 그리고 군사들이 또 상주로 간다고 하였느냐?
옥이 예, 그러하옵니다.
박씨 생각했던 것 보다 전쟁이 크게 벌어질 모양이구나.. 참으로 바람 잘 날이 없구나..
박씨의 한숨에서...
씬 길
‘대백제국’의 수기를 앞세우고 추허조와 방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상주로 떠나고 있다.
추허조 기다리거라. 이 추허조가 갈 것이니라. 왕건이 이놈... 이번에는 꼭 금성의 설욕을 하고 말 것이니라..
추허조의 결연한 모습 위로
왕건(E) 백제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니요?
씬 송악/병부 관아
왕건과 복지겸이 마주해 있다.
왕건 자세히 좀 말씀해 보시지요. 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이 움직이길래...?
복지겸 백제의 군사 대부분이 상주로 이동하고 있소이다. 나주 전투를 설욕하고자 단단히 벼른 모양입니다.
왕건 ....(끄덕이며)....그렇겠지요.
복지겸 하지만 여러모로 보아 전면전은 어려울 것입니다. 조령과 죽령이 가로 막고 있고, 또 아자개가 상주 한복판에 버티고 있으니 말입니다.
왕건 작은 읍성 단위로 국지전을 벌이면서 시간을 끌어야겠지요.
복지겸 옳은 말씀입니다. 금성 전투 이후 아군의 전력이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번 잘못되면 겉잡을 수 없이 밀리게 될 것입니다. 나라의 재정도 바닥이 났고, 또 지난 번 아학사 사건에서 보듯이 내분의 골도 깊어져 있는 실정이 아니겠습니까?
왕건 ....그 일은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사이) 어쨌든 소장이 하루 속히 전장으로 가야 할 터인데 이렇게 개인적인 일로 주저앉아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복지겸 그래 봐야 이틀 후면 떠나시옵니다. ....소장은 전선으로 가시는 왕장군이 부럽소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사람도 다 털어버리고 전장으로 나가고 싶습니다만...
왕건 어인 말씀이신지요?
복지겸 (한숨처럼) 나라 안의 사정이 너무나 어지러워서요.
왕건 ..........?
씬 황궁 (밤)
은부와 염상이 내원으로 향하고 있다.
씬 동 내원
박유가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잠시 후 은부들이 들어온다.
은부 박학사께서 계셨구료?
박유 어서 오시오소서.
은부 내원께선 안에 계시오?
박유 폐하께서 찾아 계셔 대전으로 가셨사옵니다.
은부 대전에....?
씬 대전
궁예와 종간이 마주해 있다.
궁예 전선의 사정이 급박해졌구료. 백제의 대군이 상주로 몰려오고 있다.....?
종간 더욱 염려가 되는 것은 총사령인 왕장군이 아직 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옵니다.
궁예 그래도 혼례는 치르고 가야지.. 왕장군이 없다고 해서 사나흘쯤 버티지 못하겠소? 그래도 다들 내노라 하는 장수들이 아니오?
종간 물론 그렇사옵니다만은....
궁예 전선의 사정은 그렇고.. 이보시오 내원.
종간 예, 말씀하시오소서.
궁예 신료들의 기강도 쇄신할 겸 조정의 인사를 개편해야겠소이다.
종간 ........?
궁예 우선 광치나 박지윤은 너무 늙었소.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나라의 사정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소이다.
종간 허면.... 후임은 어떤 사람을 염두에 두고 계시옵니까?
궁예 광평성 서사로 있는 왕평달이 어떻겠소?
종간 .........
궁예 (한참보다가) 왜요? 마음에 아니드시는 모양이구료?
종간 그런 것 보다도..... 왕건 장군의 숙부가 아니옵니까? 한 집안에서 많은 권력을 나누어 갖게되면....
궁예 허허허.. 괜한 걱정일 것이오. 그렇게 충성스러운 왕장군의 숙부요. 힘을 합친다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어요.
종간 알겠사옵니다. 소신이 어찌 인사에 관여를 하겠사옵니까? 폐하의 뜻대로 하시오소서.
궁예 그리고 아학사를 내봉성령으로 임명할까 하오.
종간 .....? 아학사를 말이옵니까? 폐하의 영을 뫼시는 내봉성령으로 말이옵니까?
궁예 그렇소이다. 내봉성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황실을 대변하는 곳이오. 아학사가 적임일 것 같소이다. 그리하십시다.
종간 ..........예..
씬 동 내원
여전히 박유와 은부, 염상이 모여 있다.
염상 내원께서 좀 늦으시는 모양이옵니다?
은부 ....그러게 말일세..
박유 은장군께선 현 시국을 어찌 보시옵니까?
은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박유 장군께선 나라 안 곳곳의 사정을 살피는 내군의 수장이 아니시옵니까?
은부 그야 박학사께서도 느끼고 있을 것이 아니오? 법회 이후로 민심이 더욱 얼어붙고 있소이다.
박유 허면 이 난국을 어떻게 풀면 좋겠사옵니까?
은부 글쎄올시다. 내원께서도 어찌하시지 못하는 일이 아니오? 도무지 길이 아니보입니다.
박유 (한참 보다가 미소) 가까운 곳에 길이 있습니다. 허나 그 길을 내원께서는 어찌 생각하실지....
은부 말씀해 주시구료.. 그 길이 무엇이오이까?
박유 쉬운 일이올습니다. 내원께서 왕장군과 손을 잡으시는 것이옵니다.
은부와 염상이 모두 놀란다.
박유 어느 누구보다 폐하의 신임이 대단한 왕장군이 아니옵니까? 두분이 힘을 합치시면 폐하께서도 생각을 달리 하실 것이옵니다.
은부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나..........
박유 단언하건대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 밖에 없사옵니다.
염상 하지만 내원께서 그리 하시겠소이까?
박유 내원께서 왕장군을 경계한다는 것은 소생도 어렴풋이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우선은 공동의 적을 함께 막아야 하옵니다. 아지태 말이옵니다.
은부 ........
박유 시간이 없사옵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하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고 있사옵니다.
씬 인서트
- 군사들이 어느 집에 들이닥쳐 곳간을 뒤져 곡식들을 징발하고 있다. 노인과 부녀자들이 울며 매달리지만 군사들은
아랑곳 않고 곡식들을 가져간다.
- 또다른 길.. 군사들이 장정들을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지켜보는 백성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도리질을 친다.
씬 철원 공역장
황량한 그 곳에 매서운 바람이 불어대고 있다. 힘겨운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곳곳에 전각들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지태(E) 그게 무슨 소린가?
씬 동 지휘소
아지태와 그 수하 공사 감독관인 입전, 신방이 마주해 있다.
아지태 공역을 늦추라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입전 이렇게 가다가는 인부들이 견디지 못할 것이옵니다. 곳곳에서 원망의 소리들이 터져나오고 있사옵니다.
아지태 원망이라니? 성스러운 황궁의 역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감히 원망의 소리가 나와?
신방 인부들의 사정을 살피시오소서. 벌써 여러 명의 인부들이 견디다 못해 도망을 쳤사옵니다.
아지태 뭐라, 도망을 쳐?
입전 사실이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더욱 늘어날 것이옵니다.
아지태 닥치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자네들은 그 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인부를 관리하는 것이 자네들의 소임이 아닌가?
입전,신방 .............
아지태 내가 송악에 다녀오는 동안 기강이 형편없이 무너져 버린 게야. 이런 못난 사람들 같으니라구..
입전, 신방 ...........
아지태 다그치게. 더욱 바짝 조이란 말일세. 참고 기다리면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미 이곳 철원은 더 이상 철원이 아닐세.. 우리 청주인들의 땅이 되었단 말일세.
입전, 신방 ............
아지태 알아들었으면 그만 나가보게.
입전, 신방 예..
그들이 밖으로 나가면 아지태가 도리질을 친다.
아지태 아니 되겠어. 여기서 고삐를 더욱 죄지 않으면 사태는 겉잡을 수가 없을 것이야.. (생각).....그나저나 송악은 어찌 돌아가고 있을꼬...? 허 그러고 보니 내일이면 왕장군이 혼례를 치르겠구먼.. 허허허 왕건이라... 왕건... 그 사람 또한 이 시대의 영웅이 분명하지. 머지 않아 그사람의 세상이 올 게야..
씬 29 유장자의 집 마당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건의 혼례식이 치뤄지고 있다.
혼례상을 사이에 놓고 왕건과 부용이 마주해 있다. 그리고 정면에는 궁예와 연화가 자리해 있다.
집사 신부 배례!
부용이 절을 한다. 나주에서의 혼례 때처럼 할 때마다 집사는 일배, 재배를 소리친다. 부용이 절을 마치자 집사가 다시 소리친다.
집사 신랑 배례!
이번에는 왕건이 절을 한 번 한다.
집사 합근례.................! 자, 신부는 신랑께 술을 올리시오!
부용이 하님의 도움을 받아 공손히 예를 갖춰 술을 받은 후 왕건에게 건넨다. 그러면 왕건이 그것을 입에 대었다가 다시 하님을 통해 부용에게 권한다. 부용이 그것을 조금 마신다.
집사 합근례를 통하여 이들이 부부가 되었음을 하늘에 고했사옵니다! 모두들 이들을 축복해 주시오소서!!
그러자 먼저 궁예가 밤과 대추를 그들 위에 던져 준다.
궁예 아들 딸 많이 낳고, 오래도록 잘 살게나!
연화 (역시 밤과 대추를 던지며) 잘들 사시오!
모두들 잘들 사시오!!
이곳저곳에서 밤과 대추가 무수히 날아 온다. 닭이 날아오르고, 풍악소리가 겹쳐들면서 사람들의 면면히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이윽고 왕건과 부용이 궁예에게 다가가 절을 올린다. 궁예가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
궁예 참으로 어렵게 맺어진 인연인 만큼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할 것이야. 알겠는가?
왕건,부용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허허허.. 황후께서도 한 말씀 해주시구려.
연화 .......잘 사십시오.
궁예 허허허.. 그게 다요? 이런 이런... 글세 우리 황후가 이렇다니까..
연화 ..........
왕건 ..........
궁예 오늘은 다 잊고 편히 쉬도록 하게.. 그리고 좋은 꿈을 꾸게나. 아우와 내가 이 삼한을 통일하고 제국의 대업을 이루는 큰 꿈을 말이야. 우리는 할 수 있네.. 아우와 이 형은 다 할 수 있어.. 우리가 만년 제국의 터를 만들고 나면 우리의 후손들이 그 제국을 길이 보전하는 큰 꿈을 꾸게나. 아주 큰 꿈을 말이야. 하하하하...
(67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