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68회>
씬 1 유장자의 집 외경(밤)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다. 멀리서 산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왕건(E) 부인, 이리 가까이 오시구료...
씬 동 신방
호롱불이 타오르고 있다. 왕건과 부용이 침상에서 마주해 있다.
왕건 자 어서요.
부용이 조금 다가앉으면 왕건이 부용의 손을 움켜잡는다. 부용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포시 돌린다.
왕건 이제 우리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소. 무에 그리 부끄러워 하신단 말이오?
부용 ..........
왕건 그 동안 부인에게 미안한 일이 참으로 많았소이다.
부용 아니옵니다. 소첩이 경솔하게 처신을 했사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왕건 아니오.. 본의는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로 내 잘못이 크오.
부용 하지만 이렇게 약조를 지켜주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소첩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눈물)
왕건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우리는 이제 막 시작을 했소이다.
부용 ...........
왕건 오늘의 이 마음을 절대 변치 말고 사십시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서로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모두 다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오.
부용 ....(울며) 서방님.......
부용이 왕건의 품에 안긴다. 왕건이 등을 토닥여 준다.
부용 고맙사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사옵니다.
왕건 은혜라니요?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떨어지며) 앞으로 고생이 많을 게요. 집안 일을 잘 부탁하오.
부용 알겠사옵니다.
왕건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먼저 이 집에 온 둘째 부인과도 서로 화목하게 지내시구료.
부용 그 또한 명심하겠사옵니다.
왕건 고맙소.. 덕이 많은 부인이니 잘 하리라 믿소.
씬 인서트
밤하늘에 보름달이 걸려 있다.
씬 왕건의 집 마당
오씨가 쓸쓸히 그 달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 시녀가 안쓰러운 듯 오씨를 본다.
시녀 그만 주무시오소서, 마님..
오씨 왠 일인지 잠이 오지를 않는구나. 세상에... 달이 참 밝기도 하지..
시녀 모두들 큰 마님 혼례 때문에 정신없이 요 며칠을 보낸 것 같사옵니다.
오씨 왜 아니 그렇겠느냐? 이 집안에 제일 큰 안주인을 뫼시는 날이 아니더냐?
시녀 하지만 마님께오서 먼저 안살림을 맡으셨사옵니다.
오씨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엄연히 그 분은 내 윗전이시고 형님이 되시느니라. 너도 각별히 유의하여라.
시녀 예, 마님..
오씨 오늘은 통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구나..
시녀 .......
오씨 먼저 들어가 자거라. 나는 좀 더 있다 들어가마.
시녀 예, 마님...
시녀가 들어가면 오씨가 눈가에 눈물이 맺히며 중얼거린다.
오씨 참으로 나 도영이 답지 않구나.. 내가 왜 이리 허전해 있단 말인고.. 이미 다 각오하고 그렇게 받아들인 일인 것을....
그런 오씨의 표정에서.
씬 황궁 외경(밤)
종간(E) 그게 무슨 소린가? 왕장군과 손을 잡으라?
씬 동 내원
종간과 은부, 염상이 모여 있다.
종간 왕장군과.... 내가 힘을 합치라 이 말인가?
은부 그러하옵니다, 내원어른.. 저 앞뒤 없이 날뛰는 아지태를 누르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는 달리 없사옵니다.
염상 소장의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내원 어른..
종간 .............(생각이 많다).......
은부 이대로 그 자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대국적인 결단을 내리실 때가 되었사옵니다.
종간 (한참만에 괴로운 듯) 박학사 그 사람이 그리 말하던가?
은부 어떻게 아셨사옵니까? 실은 얼마 전 그에 대하여 의논이 있었사옵니다.
종간 왕건 장군과 손을 잡는다... 왕건과.. 왕건과 손을 잡아? (쓴 웃음을 짓는다) 일리는 있네.. 하기사, 정치라는 것이 본래 그런 것이지.. 때에 따라서는 적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지.. (한숨)... 알겠네.. 한 번 생각해 보세. 달리 움츠리고 뛸 수도 없게 되지 않았는가?
고심하는 종간의 모습에서 디졸브 되면...
씬 유장자의 집 외경(아침)
씬 동 안
왕건과 부용이 유장자와 부용모에게 절을 올리고 있다.
유장자 그래, 간밤에 좋은 꿈 좀 꾸었는가?
왕건 ......(미소)......
부용모 (눈물이 글썽이며) 이것아, 이리 될 것을 가지고 왜 그리 애를 태웠단 말이냐?
유장자 허, 지난 얘기를 왜 또 꺼내시는 게요?
부용모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좋아서 그러지요. 이보시게, 사위.
왕건 예, 말씀하시오소서.
부용모 곱게만 자라온 아이일세. 집안 일이 서툴더라도 사위가 너그럽게 이해해 주게.
왕건 이를 말씀이겠사옵니까? 염려 놓으시오소서.
부용모 고맙네..
유장자 자, 이제 그만 일어나보게. 속히 송악으로 가봐야하지 않겠는가? 자네를 기다리는 일들이 너무 많아. 어서 가보게.
왕건 예, 장인어른.. 허면 이만 일어나 보겠사옵니다. 자 부인 일어나십시다.
부용 ........
부용모 그래 어서들 가봐요. 어서들...
그들 일어서며...
씬 길
왕건과 부용이 말을 타고 나란히 가고 있다. 그 뒤로 호위 군사들이 따른다.
씬 왕건의 집 마당
문이 소리나게 열리면서 염상이 들어선다.
장수장 (의아해) 내군의 염부장님이 아니시옵니까?
염상 왕장자께선 안에 계시는가?
장수장 예, 그러하옵니다만...?
염상 안내하게.
장수장 예... (수하들에게) 뫼셔라.
장수장들의 안내로 염상이 안으로 향한다.
씬 동 집 사랑
왕평달과 식렴이 차를 마시고 있는데 장수장의 소리가 들려온다.
장수장(E) 나으리, 내군의 염상 부장께서 오셨사옵니다.
평달 ...? 염부장이? 드시라 하게..
염상이 들어온다. 평달과 식렴이 일어나 맞는다.
왕평달 허 이게 누구십니까? 염부장이 우리 집을 다 찾아주시고... 허허허... 이리 앉으시지요.
염상 예... (자리에 앉는다)
왕평달 한데 어인 일로...?
염상 내원 어른께서 보내시는 서찰을 한 통 뫼셔왔사옵니다.
왕평달 서찰? 내원께서 보내셨단 말이오?
염상 그러하옵니다. 여기,......
왕평달이 염사이 주는 종간의 서찰을 긴장하며 받아 본다. 모두들 긴장 속에서 읽고 있는 평달을 본다. 평달이 고개를 번쩍 든다.
왕평달 내원께서 나와 조카를 만나시겠다?
염상 예, 서사 어른.. 아마도 긴히 의논드릴 일이 있으실 것이옵니다.
왕평달 음... 이렇게 황공할 때가 있는가? 내원께서 우리를 청해주시다니.. 허긴... 우리 사이에 만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소이까? 알겠소이다. 그리하겠다 전해 주시오.
염상 허면 소장은 이만 가보겠사옵니다.
왕평달 허 차라도 한 잔 하시지 않고?
염상 황궁에 바쁜 일이 많사옵니다. 허면.. (일어선다)
왕평달 (일어서며) 그래도 그렇지.. 장수장 게 있는가?
장수장이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온다.
왕평달 염부장께서 가신다 하니 정중히 바래 드리게.
장수장 예, 나으리...
염상 그럼 소장은 이만...
예를 갖추고 밖으로 나간다.
왕식렴 대체 내원이란 사람이 무슨 일로 아버님과 형님을 만나뵙자 하는 것일까요?
왕평달 조정의 중대사를 의논해 보자는 것이야.
왕식렴 허지만 왜 갑자기 이런 서찰을.......?
왕평달 그러게 말이다. 그 동안 내원은 우리 송악을 심할 정도로 경계해 온 사람이야. 이렇게 은밀히 만남을 청해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왕식렴 사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이 한두가지겠사옵니까? 내원으로서도 이쯤 되면 누군가 의논할 상대가 필요해진 것이옵니다. 그래서 아버님과 형님을 보자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왕평달 일리 있는 말이다. 십중팔구 그럴 것이야.
왕식렴 하오나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할 것이옵니다. 내원을 어찌 믿을 수 있사옵니까?
왕평달 허지만 내원은 지금도 변함없이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두번째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청해 왔는데 아니 만날 수 없지 않느냐?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자꾸나.. 음..
씬 황궁 내원
상소문이 가득 쌓여 있다. 종간이 보다가 한숨을 지으며 내려 놓는다.
종간 이것들이 모두 여러 지방의 호족들과 수령들이 보내온 것이란 말이지..?
은부 그러하옵니다. 거의가 다 비슷한 내용들이옵니다.
종간 갈수록 태산이구먼... (장계들을 밀치며) 모두 가져다 태워 버리게.
은부 예?
종간 폐하께서 보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은부 ......
종간 장계를 보시지 않아도 폐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네. 그 처방약으로 법회를 서두르고 계시지 않는가? 백성들도 그렇고 지방의 수령방백들도 그렇고 또 우리도 마찬가지일세. 폐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네. 백성들과 우리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단 말일세.
은부 도대체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종간 지켜볼 수 밖에... 좀 더 시간이 가다보면 폐하께서도 마음의 틈새를 여실지 누가 알겠는가?
그 때 염상이 밖에서 아뢴다.
염상(E) 내원어른, 소장 염상이옵니다.
종간 어서 들어오게.
염상이 안으로 들어온다.
염상 왕장군의 집에 다녀오는 길이옵니다. 왕장군은 아니 보이기에 광평서사 왕평달 장자에게 서찰을 전했사옵니다.
은부 그래 뭐라고 하던가?
염상 왕장자께서 내원 어른의 청을 고맙게 여기시며 잘 알아 모시겠다고 전하라 하였사옵니다.
종간 ...........(지금도 마땅치 않다)
은부 수고했네.. 그래, 왕장군은 언제쯤 정주에서 돌아온다던가?
염상 저녁녘에는 도착할 것이라 들었사옵니다.
은부 그렇겠구먼.. 저녁이라.. (종간을 보며) 내원 어른, 저들도 지금까지 내원 어른의 부르심을 실은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옵니다. 지금 누구 하나 이 정국을 걱정하지 않는 이들이 없사옵니다. 특히나 나라 이름을 바꾼 이후 패서인들의 걱정은 보지 않아도 뻔하지 않사옵니까? 따지고 보면 송악의 왕장군도 그 중의 하나이옵니다.
염상 물론이옵니다. 그럴 것이옵니다.
은부 내원어른께서 이번에 저들에게 일별을 주신 것은 아주 잘하신 일이옵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사옵니다.
종간 글쎄... 허허허... 좋은 결과라... 어쩌다가 일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내가 왕건을 찾을 만큼 이렇게 여유를 잃었단 말인가? 허허허.. 이 종간이가 말일세..
두 사람 .............
종간 이 종간이가.....
씬 왕건의 집 앞 (밤)
왕식렴 형제와 오씨, 두 사부, 장수장들이 나와 왕건을 기다리고 있다. 사방에서 하인들이 횃불을 들고 있어 주위는 대낮같이 밝다. 그 때 저만치서 왕건들의 모습이 보여온다. 그들 가까이 다가오면...
모두들 어서 오시오소서.
왕건이 말에서 내려 부용과 함께 다가온다.
오씨 어서들 오시오소서. 형님, 아우이옵니다. 어서오시오소서.
부용 고맙소..
오씨 형님께서 제자리에 돌아오시니 온 집안이 비로소 가득한 것 같사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오소서. 서방님도 어서 안으로 드시오소서.
왕건 고맙소. 날이 차가운데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소?
오씨 날씨가 무슨 상관이옵니까? 자 안으로 드시지요.
왕건 자 부인 들어가십시다.
그들 오씨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향한다. 그 뒤로 두 사부가 고개를 끄떡이며 미소를 짓는다. 왕식렴 형제도 밝게 웃고 있다.
변사부 작은 마님의 말씀이 옳은 것 같소이다. 정말 큰 마님께서 오시니 집안이 가득한 것 같지 않습니까?
마사부 그러게 말입니다. 왠지 그 동안 허전했던 것들이 눈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소이다. 우리는 늘 주군께서 빨리 자리를 잡으셔야 한다고 걱정해 오지 않았소이까?
변사부 그러게 말입니다. 오래도록 우리가 지켜 보아왔지만 큰 마님은 참으로 정이 많고 덕이 커 보이십니다.
마사부 암요.. 작은 마님과는 모든 것이 아주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허허.
씬 동 사랑
왕건과 부용이 이곳에서도 평달에게 절을 올리고 있다. 평달이 고개를 끄덕인다.
평달 먼길 오느라 고생들 했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끝내 우리 집안의 큰며느리를 이렇게 보게 되었네 그려.. 반가우이.
부용 모자라는 점이 많사옵니다. 숙부님께오서 많이 타일러 주시오소서.
평달 그게 무슨 말인가? 건이 조카는 명실공히 이 왕씨 가문의 주인이라네. 나는 그저 숙부로서 작은 일들을 돕고 있을 뿐이야.. 참으로 다행 중 다행일세.. 조카며느리를 이렇게 둘씩이나 보게 되었어.
두 여인 ..........
평달 내 조카라서가 아니라 우리 건이 조카는 나라에서는 제일가는 장수요, 집안에서는 언제나 조용하고 합리적인 집안의 어른일세.
왕건 어인 말씀을.... 이 집안의 어른은 숙부님이시옵니다.
평달 허허허... 나이만 먹은 어른일세. 참다운 어른 자리는 건이 자네에게 있는 것이야. 그리고 두 조카며느리에게 부탁을 하겠네만은 이 송악의 장래는 자네들 하기에 달려 있네. 건이 조카는 많은 날들을 전장터로 나가 있다네. 집안을 이끌고 화목하게 하고 더 단단히 하는 것은 자네들 몫이야.. 알겠는가?
두 여인 명심하겠사옵니다.
평달 다행인 것은 아우가 되는 둘째 조카 며느리가 성정이 활달하고 또 이해심이 많다는 것이야. 모쪼록 앞으로도 끝까지 그렇게 우애 있게들 지내주시게. 알겠는가?
오씨 예, 숙부님.. 염려 놓으시오소서. 형님을 잘 받들고 집안을 꾸려가겠사옵니다.
평달 허허허허... 되었네.. 참으로 든든허이.. 자 그럼 피곤할 터이니 조카 며느리들은 그만 돌아가 쉬도록 하고 건이 조카는 좀 남아 있게나. 긴히 할 이야기가 있네.
부용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일어서며) 허면....
부용과 오씨가 절을 올리고 그렇게 나간다. 잠시 뜸을 들이던 평달이 긴 한숨을 내쉬며 왕건을 본다.
왕건 숙부님,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평달 그렇다네... 먼저 이걸 읽어 보게. (종간의 서찰을 건넨다)
왕건 어인 서찰이옵니까?
평달 내원이 염부장을 통해 보내온 것일세.
왕건 ...예? 아니 숙부님, 내원께서 서찰을 보내왔다는 말이옵니까?
평달 그렇다네..
왕건 ............?
씬 동 안채 방
오씨와 부용이 안으로 들어선다. 부용이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오씨 이 곳은 이 집안의 안방이옵니다. 바로 형님깨서 기거하실 곳이옵니다. 예전에는 시어머님께서 계시던 곳이옵니다.
부용 그런 방을 제가 쓴다는 것입니까?
오씨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형님은 이 집의 안주인이 아니시옵니까? 그리고 말씀 낮추시오소서. 듣기 민망하옵니다.
부용 하지만 부인 역시 정실 부인이 아닙니까?
오씨 그렇기는 하지만 서방님께서 분명히 위 아래를 구분해 주셨사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부를 받들기로 약조를 드렸사옵니다.
부용 하지만.......
오씨 편안히 대해 주시오소서. 비록 서방님 한 분을 같이 뫼시지만 우리는 자매처럼 우애 있게 지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부용 .........?
오씨 저를 친아우로 생각해 주시오소서. 저 또한 형님을 그렇게 친언니로 뫼실 것이옵니다.
부용 너무도 고마운 말씀입니다.
오씨 또 존대를 하시옵니까? 민망하옵니다. 말씀을 낮추시오소서, 형님..
부용 고... 고맙네..
오씨 잘 뫼시겠사옵니다. 이 아우도 어여삐 대해주시오소서.
부용 이를 말이겠는가? 고맙네 아우님..
씬 다시 사랑
왕건이 서찰을 내려놓는다. 생각이 많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오가고 있다.
평달 조카는 어찌 생각하는가? 왜 이 시점에서 내원이 우리를 보자고 하는 것일까?
왕건 어려운 시국이옵니다. 함께 돌파구를 찾자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평달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네만은 과연 이러한 관계가 얼마나 유지되겠는가?
왕건 그러나 어찌하겠사옵니까? 지금은 서로가 손을 잡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어렵게 되어 있사옵니다.
평달 아니야... 우리 식렴이도 그런 말을 했지만 내원이란 사람은 우리와 길게 뜻을 같이할 사람이 아닐세. 그 동안 우리에게 대해온 것을 보면 모르겠는가?
왕건 대국적으로 생각하시오소서. 작은 섭섭함을 자꾸 생각하면 큰 일을 이루기가 어렵사옵니다.
평달 그야 뭐... 그렇기는 하지만서두.. 영 개운하지가 않네.. 내원 그 사람의 속을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왕건 어쨌든 저 쪽에서 먼저 청을 넣어왔으니 만나보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저도 실은 언젠가 때가 되면 내원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사옵니다. 잘 되었사옵니다.
평달 마음을 놓지 말게. 저들은 언제나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보고 있단 말일세. 한 편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또 한 쪽으로는 언제 우리를 그물 속으로 몰아 넣을까..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야.
왕건 어쨌든 숙부님께서 약속 자리를 정하셨다 하니 만나보시지요.
평달 그리 함세.. 허면 준비를 허게. 내 객관 쪽에 자리를 보라 일러두었네.
왕건 알겠사옵니다. 허면 일어나시지요.
그들 일어난다.
씬 길(밤)
왕건과 평달이 가고 있다. 왕식렴과 장수장이 함께 가고 있다. 평달은 여전히 무거운 표정이다.
평달 대체 내원은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할 것 같은가?
왕건 그것은 만나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겠지요.
평달 내가 알기로 그 동안 내원은 내군의 사람들을 풀어서 우리 뿐만 아니라 많은 장자들을 경계하며 뒷조사를 해왔네.. 그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조카와 더불어 조정에 참여해 있는 많은 패서의 호족들을 다독거리려는 심사가 아니겠는가?
왕건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가서 만나 보시지요.
씬 객관 외경
염상을 비롯한 내군들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다.
종간(E) 어서들 오시오소서.
씬 동 객관
종간이 들어서는 왕건들을 맞고 있다. 은부와 박유도 함께 있다.
종간 자 이리로 앉으시지요.
왕건들이 자리에 앉는다.
종간 혼례를 치르느라 경황이 없었을 터인데, 이렇게 시간을 내게 하여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왕장군.
왕건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내원께오서 나라 일로 부르시는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사옵니까?
종간 (주변을 보며) 허허허.. 이 곳 예성강의 객관은 언제 보아도 참으로 대단하오이다. 역시 내력이란 무서운 것이예요. 송악의 객관은 참으로 그 역사가 깊지요?
왕평달 허허허.. 뭐 깊다기 보다는 그저 장사하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 정을 붙여 오던 그런 곳이옵니다.
박유 허허허.. 이 곳이야 말로 송악의 상징이 아니겠사옵니까? 왕장군의 선친대부터 유명한 곳이라 들었사옵니다.
왕건 예... 유명하다기 보다는 그저 장사꾼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옵니다. 헌데 내원께오서 어인 일로 소인들을 청하시었는지요?
종간 갑작스레 이런 자리를 청해 좀 어리둥절하셨을 겝니다. 서찰로 말씀드린대로 나라가 하도 어수선하여 의논을 모을까 해서 이렇게 뵙자고 했소이다.
왕건 황궁에서 뵈어도 될 터인데 굳이 이런 곳까지 어렵게 나오신 것 같사옵니다만은...?
종간 그렇소이다. 이야기에 따라서 장소도 적절한 곳이 따로 있는 법이라오. 오늘은 그저 마음을 다 풀어놓고 왕장군과 함께 편하게 이야기 하고 싶어 밖으로 나온 것이외다.
은부 왕장군, 내원어른께오선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이 난국을 장군과 함께 헤쳐나갈 방안을 찾고자 하시오이다.
왕건 허허허허.. 아둔한 이 사람이 무엇을 알겠사옵니까?
종간 ...............?
박유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움에 처한 나라 일을 함께 걱정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알기로 나라의 모든 정책은 여기 내원께서 관여를 하여 살피시고 나라 밖의 일은 장군께서 큰 힘을 보태고 계시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자리를 마련한 것 같습니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들을 하시지요.
왕건 내원께오서 먼저 말씀을 주시오소서.
종간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십시다. 장군도 알겠지만 이 나라가 지금 암흑 속으로 빠져들고 있소이다.
왕건 .........
모두들 ..........
종간 그토록 영명하신 폐하께오서 어느 날 아지태를 만나신 이후 급격히 변해가고 계시오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소이다.
왕건 계속 하시지요.
종간 측근에서 폐하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위기를 느껴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외다. 왕장군, 고견을 주시구려.
그러자 왕건은 눈을 감는다. 모두들 왕건을 본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계속된다.
박유 지금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당면한 현실을 깨쳐 나가야 할 때입니다. 내원께서는 지금 그 길을 묻고 계십니다.
왕평달 ..........
왕건 (한참만에) 길은 그리 어려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위 아래가 단합하고 좌우가 화목한다면 어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종간 화목이라....
왕건 기왕에 이렇게 어렵사리 모인 자리이니 소장이 솔직하게 여쭙고 싶사옵니다. 내원 어른.
종간 말하시오, 왕장군.
왕건 이 사람이 보기에 내원께서는 누구보다도 폐하를 충성스럽게 모시며 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생각하시는 분이시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소장에게만은 그리 야박하시온지요?
모두들 .........
왕건 서로의 심중을 거짓없이 드러내지 않고는 원하는 대답을 찾기 어려운 것이옵니다. 말씀해 주시오소서. 왜 소장을 그토록 경계하시옵니까? 이 몸이 무엇을 그리 큰 잘못을 저질렀사옵니까?
종간은 대답이 없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 모두들 마른 침을 삼킨다.
씬 동 객관 마당
염상과 그 군사들이 여전히 경계를 서고 있다. 왕식렴과 장수장들이 마치 서로를 대적하듯 객관안의 표정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종간의 웃음 소리가 나즉히 들려온다.
씬 다시 동 객관 안
종간이 나즉히 웃고 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점차 커지며 방안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는다.
종간 (웃다가 정색하며) 그것을 대답해 주리다. 내가 왕장군을 경계한 것은 폐하를 걱정했기 때문이오.
모두들 ...........
종간 왜냐? 왕장군은 이 마진국 나라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폐하와 마주할 수 있는 영웅의 기질이 있기 때문이오. 한 시대에 영웅이 둘이 될 수는 없는 것이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었소.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모두들의 눈빛이 긴장하고 있다. 이번에는 왕건이 웃는다.
왕건 내원 어른, 참으로 고맙사옵니다. 미천한 이 몸을 그토록 올려 보아주셨으니 이 고마움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사옵니까? 허나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사옵니다. 폐하가 아니 계시는 왕건이는 없사옵니다. 폐하의 영광 아래서만이 이 왕건이는 살아 있는 것이옵니댜. 아시겠사옵니까?
종간 하하하하.. 그런데도 나는 늘 걱정이란 말이오. 그 옛날 이 나라의 최고 고승이었던 도선대사도 장군의 앞날을 예언했다 들었소이다. 송악은 청솔이라 했던가....?
왕평달 ..........(놀라며 침을 삼키고) ..........
종간 대성인이 이 땅에서 일어나 삼한의 백성을 고통에서 구해낸다고 했던가요?
은부 .........
박유 요설이올습니다. 예언이란 언제나 과장되고 부풀려지고 거짓이 많사옵니다.
왕건 내원 어른, 이 송악은 오로지 폐하를 위해 예비된 곳이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데 폐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삼한의 영웅이 될 수는 없사옵니다. 믿어주시오소서.
종간 좋소이다. 그리 말을 해주시니 믿기로 하십시다.
왕건 그렇게 믿어주시겠다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소장의 주변에 대한 경계를 풀어주시오소서.
은부 ....경계라니요? 그런 것은 없소이다.
종간 아니 아니... 그렇게 하겠소이다. 분명히 있었소이다. 아지태가 철원에서 난리를 피우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많은 호족들을 감시하고 경계해 왔소이다. 그것은 그만큼 나라 안팎의 어려움이 많아졌기 때문이오. 이제 그런 것을 없애겠소이다.
왕건 고맙사옵니다, 내원어른..
종간 자 이번엔 내가 묻겠소이다. 이 어려움을 어찌 극복할 수 있다고 보시오?
왕건 지금 내원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호족들의 불만과 백성들의 저항일 것이옵니다.
종간 그렇소이다.
왕건 아마 그 중에서도 호족과 신료들에 대한 불안이 크실 것이옵니다.
종간 그렇소이다. 그에 관한 것을 왕장군과 더불어 여기 계신 왕장자께서 맡아주셨으면 하오이다. 어차피 철원의 도읍은 기정사실이올시다.
왕평달 하지만 저희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종간 송악은 패서인들의 중심이올시다. 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나 폐하께오서는 송악분들에게 거시는 기대가 크오이다. 실은 이번에 새로운 광치나 자리에 여기 왕장자 분을 천거하셨소이다.
왕평달 예? 아니 세상에... 이 사람이 그 광치나 자리를......
종간 왕장군은 나라 밖의 일을 도맡아 하는 실질적인 일을 하고 있고 게다가 이제 내정까지도 여기 왕장자께서 맡으셨소이다. 어찌 이 사람이 지금의 일들을 의논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왕건 .......
종간 이 위기를 잘 헤쳐나가 보십시다. 진실로 손을 잡고 잘해보십시다. 오로지 폐하를 위해서 말씀이오. 그 동안 섭섭한 것이 있었다면 우리 서로 다 풀어버립시다.
왕평달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그리 하겠사옵니다, 내원어른..
왕건 소장은 곧 전선으로 가옵니다. 하오나 오늘 내원께서 하신 말씀을 명심하겠사옵니다. 소장도 폐하를 위해서 말이옵니다.
종간 고맙소, 왕장군... 오늘의 만남은 참으로 의미가 있소이다. 하하하하.. 역시 이렇게 만나길 잘한 것 같소이다. 잘해보십시다.
그러나 종간은 여전히 그 표정에 어두운 것이 꿈틀거리고 있다.
씬 철원 공역장
아지태가 공역장을 둘러보고 있다. 입전, 신방이 뒤를 따른다.
아지태 왜 이리 진척이 더디단 말인가? 내 더욱더 다그치라 하지 않던가?
입전 최대한 일을 하고 있사옵니다. 더 이상은 무리이옵니다.
아지태 그 무슨 나약한 소린가? 이렇게 해서 어떻게 내년 봄에 황궁을 옮길 수 있겠는가?
입전 ...........
아지태 서둘러야 하네.. 폐하께 그리 약조를 드렸단 말일세. 곧 주문을 드릴 시간이니라.. 그만 일을 중단시키게.
신방 예.. 그만 일을 멈추어라!
인부들이 일을 멈추고 모여든다.
아지태 주문을 드릴 시간이니라. 미륵 부처이신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주문을 외는 자는 누구든 금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도솔천에 오를 수 있다고 하셨느리라. 자 모두 따라서 외도록 하라. ‘옴마니 반메홈’
인부들 (따라서)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아지태 계속 외거라. 폐하께서 너희들을 구할 것이니라.
인부들 (계속해)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씬 산사 외경
범종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석총이 휘적거리며 걸어와 법당 쪽을 본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린다.
씬 동 법당 안
승려들이 모여 역시 주문을 외고 있다.
승려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함참 외는데 석총이 들어서며 일갈을 한다.
석총 지금 무엇들을 하는 겐가? 부처님 앞에서 이 무슨 해괴한 짓들이란 말인가?
주지 큰 스님?
석총이 주지 앞에 놓인 여러 권의 경전을 보다가 찢어버린다. 주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본다.
주지 큰 스님, 폐하께서 내리신 경전이옵니다. 우리 승려들은 이 새로운 경전을 공부하라 명받았사옵니다. 이것을 찢으시다니요?
석총 경전이라니... 이것이 어디 경전이란 말인가? 요망한 요설일 뿐이니라. 이것을 가져다 태워버려라.
주지 하오나 큰스님, 황제 폐하의 영이시옵니다. 미륵의 영을 어찌 이리 하시옵니까? 잘못되면 이 절이 통째로 불바다가 되옵니다.
석총 이 딱한 중생들아, 죽는 것이 그리도 두렵단 말인가?
주지 하오나 큰스님...
석총 다른 곳은 몰라도 진실로 미륵부처를 뫼시고 따르는 우리들은 저 거짓 미륵의 요설을 믿을 수는 없노라. 다 치워버리거라. 어서 치우거라. 어서..!
석총은 놓여진 경전을 마구 내던지기 시작한다. 주지와 다른 스님들이 떨며 분노해 하는 석총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 표정에서.
씬 황궁 외경
옴마니 반메홈을 외는 소리로 가득하다.
씬 법당
이곳에서도 주문을 외고 있다. 많은 신료들이 모두 참석하여 법당안은 입추의 여지가 없다. 그 법당 밖에는 내군들이 경계를 서고 있고 법당은 법석 주변으로는 승려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궁예의 자리는 아직 비어 있다.
씬 동 대전
궁예가 참선에 들어 있다.
씬 황후전
연화가 생각에 잠겨 있다. 조용히 도리질을 한다. 제조상궁이 들어와 아뢴다.
제조상궁 황후마마, 궁중 법회에 가실 시각이옵니다. 모두들 이미 와 계신다 하옵니다.
연화 ........알았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궁중 안에서 웬 법회를 이리 자주 여신단 말인고? 대체 어찌하려고 이리 하시는가?
슬이 황후마마, 어서 서두르시오소서. 폐하께오서 먼저 오셨을까 두렵사옵니다.
연화 그래, 폐하의 영이시니 어찌하겠느냐? 가자꾸나..
한숨을 쉬는 연화의 모습에서..
씬 황궁 길
궁예가 내관들과 동남동녀들의 호종을 받으며 법당으로 가고 있다. 궁예는 이전 법회 때 입었던 화려한 옷을 입고 금책을 쓰고 있다.
씬 법당
대전내관의 ‘황제폐하 납시오’하는 소리에 이어 궁예가 법당으로 들어선다. 숱한 신료들과 궁중 사람들, 그리고 승려들이 일어나 합장하며 궁예를 맞는다. 궁예는 그들에게 인자하게 손을 흔들며 마련된 법석에 가 앉는다. 모두들 일제히 그렇게 합장한 채로 궁예를 향해 옴마니 반메홈의 주문을 드리고 있다. 궁예가 그들을 제지하며 조용히 주장자를 친다.
궁예 대중들은 들을지어다. 그대들은 어떠하던고? 육자진언 옴마니 반메홈은 지난 번에도 이야기하였듯이 불법의 모든 것이니라. 이 여섯자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그대들은 모두 아귀수라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였느니라.
모두들 ........
궁예 사람들은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조차도 의심을 한다. 그러나 나 미륵은 경고를 하겠노라. 의심이 많은 자들은 불행할 것이다. 이 육자진언을 외우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모두 열심히 외울지어다. 나는 누가 열심히 하였고, 아니 하였는지를 다 안다. 왜냐하면 미륵이기 때문이니라. 미륵은 관심법으로서 누구든 그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니라. 그대들 자신을 속이지 말지어다. 오로지 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고 맡겨진 책무들을 정성으로 수행할 것이니라. (스스로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운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계속)
궁예를 따라 신료와 승려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법당안은 온통 주문 소리로 가득하다. 왕평달도, 박지윤도 그리고 장자들도 모두 그렇게 따라한다. 종간과 은부도 그렇게 따라한다. 유장자와 강장자 부부도 열심히 합창을 한다. 그러나 박유는 입을 다물고 있다. 연화는 여전히 안타깝게 궁예를 본다. 궁예의 그 만족한 표정에서...
씬 길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가고 있다. 왕건은 깊은 생각에 잠기며 그렇게 가고 있다. 종간의 소리가 들려온다.
종간(E) 그토록 영명하신 폐하께오서 어느 날 아지태를 만나신 이후 급격히 변해가고 계시오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소이다.
왕건 .........(한숨만)......
종간(E) 이 위기를 잘 헤쳐나가 보십시다. 진실로 손을 잡고 잘해보십시다. 오로지 폐하를 위해서 말씀이오. 그 동안 섭섭한 것이 있었다면 우리 서로 다 풀어버립시다.
왕건은 그렇게 가고 있다.
씬 사불성 외경
아자개(E) 왕건이 오고 있어?
씬 동 아자개의 처소
아자개와 계모, 대주, 용개, 보개가 모여 있다.
아자개 어느 곳으로 온다더냐? 이 곳 충주 쪽으로 온다더냐?
용개 예, 그러하옵니다.
아자개 그래..?
보개 견훤 형님의 군사들도 이 곳 근처에 이미 도착해 있다 하옵니다.
아자개 견훤이가 직접 왔느냐?
보개 아니옵니다. 수하 장수 추허조가 왔사옵니다.
아자개 뭐라, 추허조? 추허조 그 불한당 같은 놈이 왔단 말이지? 그래서 어찌하고들 있다더냐?
대주 아직은 모르옵니다. 양쪽이 모두 대치중인 것으로 아옵니다.
아자개 이상한 일이다. 서로가 보고만 있다 이런 말이 아니냐? 도대체 무슨 꿍꿍이들일꼬....?
씬 백제 황궁
견훤과 제장들이 모여 있다. 최승우, 능환, 능애, 수달 들이 모여 있다.
견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왕건이까지 오고 있다면서 전선에 전혀 별다른 동요가 없다?
최승우 말씀드린 그대로이옵니다. 저들의 내부사정을 밖으로 돌려 교묘하게 위장하려는 술책이옵니다.
능환 워낙 농간을 잘부리는 저들이니 좀 더 지켜 보시오소서.
견훤 음.....(생각에 잠기는데)....... 그렇다면 파진찬의 말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보여지는데.....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폐하.. 철원에서 있었던 아지태의 암살 기도 사건 이후 마진국에서는 궁예왕이 갑작스레 종교의식을 강화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이 또한 범상치 않은 일이옵니다.
견훤 (끄떡이며) 그럴 수 있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마진국은 지금 무언가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 틀림없어.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그들의 내분을 십분 이용해야 하옵니다.
능환 지금 급한 건 당면해 있는 전선일세. 어찌 되었든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준 왕건이가 상주 전선에 와 있어. 우선 다가오는 적부터 막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파진찬?
최승우 물론 그렇기는 하옵니다. 하오나 지금의 상황은 마진국의 궁예왕이 현실을 모면하기 위해 꾸민 궁여지책이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는 이상 과민하게 말려들 필요가 없다고 보옵니다.
견훤 허면 그에 대비할 계책은 무엇인가?
최승우 잠시만 더 신에게 시간을 주시오소서. 이미 그 대비책을 면밀히 마련 중에 있사옵니다.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옵니다. 궁예왕이 무너지면 마진도 무너지는 것이옵니다.
견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궁예왕이 무너지다니? 어떻게...?
최승우 복안을 마련 중에 있사옵니다. 곧 말씀을 올리겠사옵니다.
견훤 궁예왕이 무너진다..? 궁예왕이....
최승우 신에게 맡겨주시오소서. 곧 좋은 소식을 올리도록 하겠사옵니다.
씬 송악 황궁 외경(밤)
씬 36 동 대전
궁예가 참선에서 깨어나며 자신이 지은 경전들을 넘겨보고 있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다. 어디선가 환청처럼 육자진언인 옴마니 반메홈의 소리가 우아하게 들려온다. 궁예는 취한 듯 그 소리를 듣고 있다. 궁예는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다.
궁예(E에코) 그 동안 세상은 끊임없이 불안하고 힘이 들었다.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나 그 고통을 없애겠다고 일어나 싸웠고 명멸해 갔다. 그들은 모두 미륵이었다.
환청의 그 주문 소리는 궁예를 사로잡듯이 노래처럼 점차 다가든다.
궁예(E에코) 나는 알고 있다. 많은 이들이 내가 미륵임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 나는 미륵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미륵이다. 이미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세웠을 때에 나는 미륵이 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 세상을 구할 것이다. 대제국을 이룩하는 길만이 내가 진정한 미륵이 되는 길이다. 그 때까지는 모두가 고통스러우리라. 모두가 아파하며 신음하리라. 그러나 나는 이루리라. 그 아픔 위에 진정한 미륵의 세계를 반드시 이루리라.
육자진언의 주문 소리가 장중하게 커지면서 그 궁예의 얼굴 위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