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75회>
씬 송악 황궁 대전(밤)
지난 회와 장면이 이어진다. 궁예가 종간이 올린 문안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펴 본다.. 그는 참선 자세 그대로 깊은 상념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머리가 아픈 듯 심하게 인상을 찌푸린다.(그의 심리적인 아픔, 공포, 불안 따위가 음향효과로 서서히 단계적으로 스며들면서) 종간의 말이 들려 오기 시작한다.
종간 신 종간 삼가 엎드려 그간의 일을 고하옵니다. 폐하께서 불의의 습격을 받으신 이후 정국은 촌각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불안 속에 잠겨있었사옵니다, 현장에서 붙들린 범인은 왕씨 일가를 배후로 지목하였고 그리하여 소환하고 국문한 결과 그들의 역모가 사실로 들어났사옵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해괴한 도선의 예언을 믿고 있었으며 반역을 꿈꾸어 왔었사옵니다. 저들은 폐하와 신 종간, 그리고 저들이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할 비밀을 세상에 누설하여 폐하의 위엄을 짓밟으려 하였으니 그것이 곧 폐하께서 신라의 황손이셨다는 사실이옵니다.
궁예 ........(음향효과가 점차 살아나며....더욱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린다)...?
종간 폐하께서 쓰러지신 이후 또한 여러 대소 신료들이 불온한 기미를 보이며 대역에 동조하려는 뜻을 감지하였사옵니다. 이에 신은 그들을 적절한 때에 모두 불러 기회를 주지 않고 목을 베어 훗날을 경계하려 했사온데 폐하께서 정신을 수습하시니 다만 그 경위만을 전해 올리며 결과를 기다리옵니다. 그들의 죄목과 명부는 다음과 같사옵니다. 헤아려 주시오소서.
궁에 ............(점점 더 머리가 심하게 아픈 듯).....................
종간 학사 아지태를 구금하고 참하려 했사옵니다. 그 죄목은 철원의 공역을 무리하게 폐하께 아뢰어 용안을 흐리게 하였을 뿐 아니라 철원 공역의 책임자로서 폐하께서 변을 당하신데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궁예 ...................?
종간 다음은 황후마마의 친가이며 외척인 강장자의 집안을 모두 참하려 했사옵니다. 이들은 폐하께서 승하하시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신 태자마마를 다음 보위에 올리려는 대역무도한 뜻을 품고 있음이 들어났사옵니다.
궁예 ......................(눈을 크게 뜨며 호흡마저 거칠어진다).?
종간 다음은 군권을 쥐고 있는 병부령 복지겸을 곧 소환하여 역시 참하려 했사옵니다. 복지겸은 평소 왕씨가와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이번 사건에 있어서 많은 패서인들의 중심에 서고 있음이 확인 되었사옵니다. 신천의 강장자가 복지겸과 의논하였고. 왕씨가는 물론 정주의 유장자도 복지겸과 의논하였사옵니다. 그들 모두 폐하의 위엄을 외면하고 복지겸의 군권을 이용하려했던 것이옵니다. 이 어찌 참람한 반역의 죄에 해당하지 않으오리까?
궁예 .........(불쾌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다음은 패서 호족들의 동향과 전국 승려들의 동태에 대하여 말씀을 올리겠나이다. 먼저 패서의 호족 중 장자 박지윤과 그 아들들은 불손하고도 기회주의적인 사람들로서 폐하께서 변을 당하심을 은연중 좋아하며 무리를 모아 기회를 보고 있었사옵고, 법상종의 중 석총과 더불어 많은 승려들이 폐하의 경전을 요망하다 여기며 비웃으며 배척하고.....
궁예는 다시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더 참지 못하고 그예 그 기록을 다시 덮는다. 그는 온 몸을 떨며 눈을 감고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호흡을 가다듬는다. 치미는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이다.
궁예 (소리) 나는 저들에게 미륵이었다. 나는 오로지 사심 없이 저들을 위해 살았다. 그런데, 그런데... 저들은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었다....그런데 저들은 모두가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어...내가 죽기를.......
낭인1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무서운 공포였다. 화살이 날아와 가슴에 박힌다. 그 이미지가 엄청나게 강한 에코우로 스쳐간다. 화살은 몇 번이고 다시 소리를 내며 날아와 박힌다. 궁예는 식은 땀을 흘리면서 그 때마다 죽어가며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오기로 굳어져 가는 그의 독기 어린 표정에서...클로즈 업 되면서....
씬 황후전
연화가 눈을 크게 뜨고 진내관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연화 그래서? 대전내관이 대전에 불려 들어갔었단 말인가?
진내관 그러하옵니다 황후마마 , 뿐만 아니오라 대전내관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그간의 많은 이야기를 폐하께 드렸다하옵니다.
연화 이야기를 드리다니, 내관 따위가 어떻게 폐하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가?
진내관 하오나 사실이옵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폐하께오서는 바로 내원에 일러 그간의 일을 글로써 정리해 올리라 하셨다하옵니다.
연화 (한참 생각하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예전의 건강을 되찾은 것이 아니신가?
진내관 그리 보이옵니다. 마마
연화 그렇다면...대전내관이 야기를 듣고 또 내원에서 글로 그 간의 일을 써 올렸다면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폐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시겠구나
진내관 아마도 그럴 것이옵니다. 방금 전 폐하께서 내원을 부르셨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내원을 불렀어?
진내관 예 마마, 폐하의 영을 뫼신 대전 내관이 내원으로 갔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그래...?
씬 내원
은부와 염상이 마주앉아 있다. 그들은 긴장해 있다 .
염상 장군, 내원께서 대전으로 불려가셨사옵니다. 과연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런지요.?
은부 글쎄...
염상 (눈치를 보다가) 이번 일은 내원께서 한꺼번에 나라의 걱정거리들을 정리하려고 하신 것이옵니다. 하오나 시기가 좋지 않았던 듯 싶사옵니다.
은부 나도 그런 생각이 드네 너무 시간을 끄신 것 같아,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해결을 보아야 했어.
염상 지금이라도 즉시 군사들을 보내어 저들의 목을 베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은부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어. 지금부터는 폐하께서 모든 것을 관장하시네. 황궁의 대전은 이 나라의 상징일세. 그곳에 폐하께서 태산처럼 앉아 계시는데 누가 감히 허락도 없이 중신들의 목을 벤단 말인가, 늦었어.
씬 동 대전
종간이 막 절을 끝내고 있다. 그런 종간을 궁예가 쏘아본다.
종간 폐하 찾아계시었사옵니까?
궁예 .............(그저 바라만 본다)
종간 폐하
궁예는 대답이 없다. 그냥 그렇게 뚫어져라 종간을 보고만 있다.
종간 환후는 좀 어떠하시옵니까 폐하?
궁예 (그제서야) 괜찮소이다. 한 열흘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돌아다니다 오니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구려.
종간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오선 누워 계신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사옵니다.
궁예 그런 것 같소이다.
종간 하온데.....어찌하여 신을 불러 말씀하시지 않고 미천한 내관을 통하여 국사를 먼저 물으셨사옵니까?
궁예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리되었소이다. 내원이 올려준 글을 보니 참으로 많은 생각이 있었소이다.
종간 어찌 아니 그렇겠사옵니까? 그 대역의 무리들을 신의 청대로 모두 일벌 백계하시오소서.
궁예 .........(대답이 없이 한참을 허공을 본다. 분노를 삼키고 있다.)
종간 폐하, 이번만은 사정을 두지마시오소서. 그들을 정리 하셔야만이 만년의 기업을 계획하실 수가 있사옵니다. 이것은 신이 오로지 폐하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궁예 알고 있소이다.
종간 간악한 무리들은 폐하께서 변을 당하시자 모두가 이때다 싶어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사옵니다. 이런 자들과 함께 만년의 기업을 논하신다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리까?
궁예 옳은 말이요. 내원의 말씀이 백 번 옳소이다.
종간 (감격)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이 세상에 누굴 믿을 수가 있겠소. 세상이 너무도 사악하오.
종간 그러하옵니다. 이제라도 신의 충정을 헤아려 주시니 신은 지금 곧 목숨을 다 한다 해도 아무 미련이 없사옵니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다시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는 저승에서 보았소이다. 그리고 생각을 했소이다.
종간 ..............?
궁예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 미륵이고 황제인가.....?.....(점차 흥분하며)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러고 앉아 있는가.... 도대체 궁예라는 이 중놈은 무엇 하는 놈인가, 나는 과연 세상을 구하고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이요.
종간 ............?
궁예 (실성한 듯 희죽 희죽 웃는다) 백성들이라는 게 참으로 미련하고 아주 이기적이란 말이요. 단순하기가 어린아이 같아서 매일처럼 맛있는 것만 달라고 한단 말이요. 하지만 늘 그럴 수가 있나, 때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단 말이야.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배가 고프다고 밥그릇을 들이대다가 그게 안되면 곧 바로 칼을 들이댄단 말이야. 허허허허허....아니 그렇소 내원?
종간 (아무래도 궁예가 조금 이상해 보인다)............. .
궁예 (더욱 흥분하며 소리 지른다)칼, 칼....칼 말이야.
종간 .........................(궁예가 정말 이상하다)
궁예 제놈들이 나를 미륵으로 만들어 주고 그렇게 불러 주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조금 힘이 든다고 해서 칼을 들이대?
종간 폐하.......
궁예 그래 내가 애꾸면 어떻고 신라에서 버림 받은 왕자면 어떠한가,(안대를 풀며) 자, 이 눈을 보시오. 눈이 하나라고 해서 할 일을 못한 적이 있는가?
종간 폐, 폐하....?
궁예 신라가 나를 버렸듯이 나도 신라를 버렸소이다. 신라, 저 없어져야할 멸도의 무리들을 감히 나와 비교한단 말이요. 나와...?
종간 모두가 역적들의 짓이옵니다. 헤아리시오소서.
궁예 나는 저들에게 천상의 낙원을 보여주려고 하였어. 물론 그러기 위해서 몰아부쳤지. 하지만 그게 다 잘되자고 한 것이야. 헌데 저들은 지금 나만 탓하고 있어...(사이) 실망이 커... (눈물 글성이며)...너무도 가슴이 아파.
종간 폐하......
궁예 저 저승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소이다. 할 일은 너무 많은데.... 인생은 너무도 짧다는 것이요. (사이) 사람이 천 년 만년 살 것 같지만 어느 날 아침에 잠시 숨을 멈추고 눈을 감으면 그게 다 한평생이 끝난 것이거든.....끝 말이야....
종간 ..................
궁예 이 허망하고도 찰라와 같은 인생을 저 미련한 것들은 몰라....(눈물 흘리며) 나는 인자한 미륵으로 살고 싶었소이다. 존경받고 추앙 받는 부처로 살고 싶었소이다. 하지만 틀렸소이다. (다부지게) 시간이 없기 때문이요.....이제부터 부처가 아니라 인간 궁예로서 저들을 다스리려 하니 가슴이 아프오.
종간 마땅히 엄히 하셔야 하옵니다.
궁예 내원도 거기에서 예외는 아니오.
.종간 예, 아니........ 폐하?
궁예 내가 오늘 눈물 흘리며 이렇게 외롭고 분해 하는 이유는 그 멀고 고단한 길을 결국 나 혼자서 짐을 지고 가야한다는 것이요. 왜 내원은 작은 것은 보고 큰 것은 보지 못하는지 모르겠소이다.
종간 폐하...?
궁예 죄인들에 대한 국문을 준비해 주시구료. 내가 친히 다스리리다.
종간 폐하, 그 일은 신에게 맡겨 주시면....
궁예 아니요, 내가 할 것이요....그리고 한가지 일러 두겠소이다.
종간 말씀하시오소서.
궁예 어제까지의 인자한 미륵은 바로 이 순간에 죽었소이다.
종간 폐하?
궁예 역시 인정만으로서는 정치를 할 수가 없어. 이제부터는 오로지.... 엄한 미륵만이 남아서 사악한 것과 정의로운 것을 구분할 것이오. 사람들은 새로운 미륵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오. 새로운 미륵 말이오! 허허허허..........
궁예의 웃음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왠지 종간은 차가운 냉기를 느낀다. 오늘 보는 궁예는 전혀 예전의 궁예가 아닌 것이다. 디졸브 되면......
씬 궁궐 뜰
전각 사이를 돌아 종간이 걸어 오고 있다. 얼마간 그렇게 걸어오다가 종간은 생각에 잠기며 걸음을 멈추고, 대전 쪽을 돌아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긴다. 천천히 걸으면서.......
종간 (E)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폐하께서는 전혀 예전의 모습이 아니시지 않는가....... 눈빛이며, 말씀 하시는 거며 마치 다른 사람 같았어. 일찍이 보지 못한 모습이 아니지 않는가. 이야기 하는 내내 냉기가 흐르고 있었어........ (사이) 아주 다른 분이 되어 버렸어. 다른 분이........ 어떻게 저렇게 변하실 수가 있을까? 어떻게....
종간은 그렇게 깊은 우려의 모습으로 중얼거리며 가고 있다.
씬 다시 대전
궁예가 생각에 잠겨 있다. 참선을 하듯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 그 외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염주를 굴린다.
궁예 (E) (깊은 한숨) 역시 세상은 혼자서 가는 것이다. 나는 결국 무덤까지 혼자 갈 것이다. 슬프구나. 가야할 곳은 멀고 험한데 의지할 동무하나 없이 날이 저물고 있어. 채찍을 들지 않으면 말이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이를 어이할꼬...... 신음소리와 피 냄새가 진동을 하겠구나.
씬 동 황궁 황후전 복도(낮)
강장자 부부가 걸오 들어오고 있다. 제조상궁이 맞는다.
제조 어서오시오소서. 대부인마님.
백씨 오, 제조상궁. 잘 있었는가? 마마께서는 계시는가?
제조 예, 대부인마님. 안에 아뢰올까요?
강장자 그래 주시게.
제조 (조금 큰소리로) 황후마마, 대부어르신과 대부인마님께서 드시었사옵니다.
씬 동 황후전 안
연화가 슬이와 마주 앉았다가, 이른다.
연화 뫼시어라.
제조 (E) 예, 마마.
잠시 후 강장자 부부가 들어와 예를 취하고 앉는다.
강장자 ?후마마, 감축드리옵니다. 폐하께오서 기적처럼 일어나시어 다시 옛날의 강녕을 되찾으셨다니 얼마나 기쁘시옵니까?
연화 고맙사옵니다, 아버님.
백씨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사옵니까? 도대체 그 금강산 도인이 누구이옵니까? 벌써 항간에 소문이 자자하옵니다. 그런
도인이 있다니요?
연화 저도 잘 모릅니다. 폐하를 소생하시게 하시고는 바람처럼 가버렸습니다.
강장자 참, 세상 일이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누구나 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깨어나시다니요?
연화 ........(한심하다는 듯 본다) 그러면, 돌아가실 줄 알았습니까?
강장자 아니, 뭐 그런 것이 아니라........ (하다가) 허허허, 황후마마. 아직도 지난 일로 노여워하시옵니까? 제가 태자마마의 보위 문제를 꺼낸 것은 당연한 것이옵니다. 누구나 그런 상황이 되면 제일 먼저 그 일부터 걱정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연화 그만들하시오소서.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에 폐하께 그런 이야기가 들어간다면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꾸중이 내리실겝니다.
강장자 헤헤헤.. 마마, 그러니까 혹시라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면 잘 좀 말씀을 드려주시오소서.
백씨 그리해주시오소서, 마마.
연화 ......... (한숨) 제발 부탁입니다. 두 분은 이 황궁 일에 눈을 감고 귀를 막으시어요. 딸 하나 황후가 되었으면 되었지. 무얼 또 욕심들을 내십니까? 더 이상의 권력이나 영화를 가진들 무엇 하시려구요?
강장자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십니다. 그래도, 힘이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은 법입니다. 권력이란 게 무엇이옵니까? 남보다 좀 높은 곳에 어깨를 펴고 서서 사람답게 살아보자 하는 그런 거 아니겠사옵니까?
연화 그만하시오소서, 아버님.
강장자 예, 뭐 그만 하시라면...... 그리 하겠사옵니다. 뭐, 그건 그렇고 어쨌든 폐하께서 일어나시고 또 오다들으니 내원 그 사람이 벌써 대전을 다녀갔다하옵니다. 이렇게 되면 국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 아니옵니까?
백씨 아, 그렇다고 보아야지요.
강장자 허허허. 왕씨 일가는 그럼 이제 내원이 아니라 폐하께 그 목숨들이 결정나게 생겼구먼그래.허허허.......하기야 이미 다 죽음 목숨이지만 말이옵니다. 허허허........
연화 ..............
씬 의형대 옥사
면회를 온 왕식렴이 옥사의 왕평달과 왕건들을 보고 있다.
왕건 무엇 하러 또 어려운 걸음을 하였는가?
왕식렴 어렵다니요? 그렇지 않사옵니다. 아버님과 형님은 언제든 뵐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놓았사옵니다. 그래도 내원 그 사람이 선선히 허락을 하였습니다.
왕평달 .......... 그래, 바깥의 동정은 어떠한고?
왕식렴 (주변 눈치를 보며) 며칠간 계속되었던 내원의 천하가 끝이 났사옵니다.
왕평달 그건, 무슨 소리?
왕식렴 폐하께오서는 정신을 수습하셨다 하옵니다. 곧 조회를 연다 들었사옵니다.
모두들 무어라?.....
변사부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셨다구요?
마사부 그래서.........언제 그렇게 되었다하옵니까, 공자님?
왕식렴 바로 어젯밤의 일이라 하옵니다. 온 궁궐이 술렁거리고 있고, 이미 폐하께서 그동안 내원 그 사람이 관장했던 국사를 모두 거두어 들이셨다는 소문이옵니다.
왕건 그게 사실인가?
왕식렴 몇 번씩 확인해보았사옵니다.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아지태 (뒤에서 한참을 보고 있다가) 허허,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올시다.나나 그대들이나 명줄이 아직 남은 것 같소이다. 폐하께서 일어나셨다? 암, 일어나셔야지. 다음 자리를 이어 받을 사람이 아직 없는데 덜컥 먼저 가버리시면 아니될 일이고 말고. 허허허.....아니 그렇소이까, 왕장군?
왕건은 그런 아지태를 한참이나 본다. 그러다가, 상대하기 싫다는 듯 시선을 돌린다.
아지태 (기지개를 켜다가 갑자기 왕건에게 다가와 소근거린다) 왕장군, 틀림없이 우리는 살았소이다. 살았어요.
왕건 살고 죽는 것은 폐하의 말씀에 달린 것이오. 당신은 너무나 제멋대로이구료.
아지태 그럴 수밖에..... 나는 누구보다도 폐하를 잘 아는 사람이오. 내가 왕장군을 잘 알듯이 말이오. 허허허........
왕평달 (분위기를 돌리 듯) 그래, 식렴아! 그렇다면 정국이 여러가지로 많이 달라지고 있겠구나?
왕식렴 예, 그렇사옵니다. 곧 조회를 연다고 하는 걸 보니 아마도 폐하께오서 직접 이번 사건을 친국하실 것 같사옵니다.
왕평달 그럴테지......... 그럴게야.
변사부 그렇다면 희망이 보이는 것 아니옵니까?
마사부 왜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분명 우리 잘잘못을 가려주실겝니다.
왕건 전선은 어찌 되었는가? 상주의 소식을 들은 것이 있는가?
왕식렴 이곳 송악의 일이 워낙 풍전등화와 같아서 그곳 일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왕건 우리들의 무고함이야 하늘이 있는 한 밝혀지겠지만, 상주전선이 걱정이구나. 아무 대책도 없이 이곳으로 와버렸으니.......
왕식렴 그곳은 그래도 여러 장수들이 있지 않사옵니까? 집안 어른들이 모두 이렇게 의형대에 끌려 와 계시니 형수님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옵니다. 참으로 이번 일은 집안의 최대 악재인 것 같사옵니다.
왕건 집안의 일은 사사로운 것이다. 장부는 아무리 곤경에 처해있어도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는 법이 아니다. 집안 이야기는 하지 말거라.
왕식렴 송구하옵니다, 형님. 하지만, 두 분 형수님의 걱정이 너무도 크셔서...
왕건 허허, 그래도..... ?
왕평달 다른 소식은 없느냐? 혹시....... 병부령이나, 아니면 정주 유장자한테서 무슨 이야기라도 없었느냐?
왕식렴 아무 말씀 없었사옵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왕평달 (한숨) 아니다...... 아니야...... 하기사, 이 살얼음판 같은 정국에 누가 우리를 구하러 나서겠느냐? 아니다......
도리질을 하는 그런 왕평달의 모습에서....
씬 송악 왕건의 집 외경
유장자가 집사장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사람을 부르고 있다.
집사장 이리오너라, 이리오너라!
잠시 후 대답소리와 함께 , 장수장이 수하들을 데리고 안에서 문을 연다. 그러다가, 유장자를 보고는 얼른 허리를 숙인다.
장수장 아니, 대령부룡 나으리가 아니시옵니까? 어서오시오소서.
유장자 오랜만이구먼. 식렴공자는 안에 있는가?
장수장 의형대에 어르신들을 뵈러 가셨사옵니다.
유장자 허허, 이런..... 연통을 아니하고 왔더니, 길이 어긋났네 그려.
장수장 안방 마님들은 계시옵니다. 안으로 드시오소서, 나으리.
유장자 허허, 그리하세.
이들 그렇게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서.....
씬 동 집 사랑
유씨와 오씨가 유장자에게 예를 올리고, 마주 앉는다.
유씨 어쩐일이시옵니까, 아버님? 연통도 아니주시구요.
유장자 그럴일이 있었다. 요즘 고생들이 많겠구먼.
오씨 저희들이 어찌 고생이라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죄 없이 옥에서 고생하시는 분들도 계시옵니다.
유장자 그러게 말이네. 이야말로 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것이지 무언가?
유씨 저는 한때 아버님이 야속했사옵니다. 누구 보다도 힘을 좀 써 주셔야하지 않사옵니까?
오씨 (만류하듯) 형님, 어르신께서 어찌 마음을 아니 쓰셨겠습니까?
유장자 네 말이 옳다. 마음은 있으나 몸은 그렇게 따라 주지를 못하는구나. 내원 그 사람의 서슬이 하도 시퍼래서 누구하나 숨을 쉬지 못했단다.
오씨 저희가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형님께서 답답하시어 해보는 말씀이시옵니다.
유장자 알지,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기사 이번 일로 하여 많은 사람들과 의논을 해보았었어. 그러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눈치를 살피고, 몸을 사리느라 얘기가 통해야 말이지. 어려울 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유씨 아니옵니다. 그렇게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사옵니다. 하지만 너무도 경황이 없어서.......
유장자 그럴것이야. 왜 아니 그렇겠느냐? 다들 왕장군을 걱정하고, 죄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서도 누구하나 의형대의 옥사에 얼씬 조차 못하지 않느냐? 이해를 하거라.
유씨 예, 아버님.
유장자 그리고, 내가 여기 온 것은 좋은 소식인지 아니면, 나쁜 소식인지는 모르겠다만..... 폐하께서 정신을 수습하셨다는게야.
두여인 예..?
유장자 나도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리로 왔단다. 틀림없이 이렇게 되면 폐하께서 모든 걸 직접 관여하시게 될게야. 그렇게되면 최악의 경우는 면하지 않겠느냐? 아닌말로, 목숨만은 보존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오씨 (너무 반갑다)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틀림없이 폐하께서 관장하시면 그 분들은 목숨을 구하실 것이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을 기적이라고 하나 보옵니다?
유장자 나도 그런 생각이 드네. 그래서, 기쁜 마음에 여기부터 달려온 게야. 곧 조회를 연다고 해서 말일세. 지금 쯤 이 소식을 아마 모두들 알고 있을 게야. 허허허....... 불행 중 다행이 아닌가?
오씨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사옵니다. 서방님과 어르신들은 화급한 지경을 모면하신 것 같사옵니다. 세상에.......
그런 그녀들의 밝은 모습에서.......
씬 황궁 병부령 외경
복지겸 (E) 이게 무슨 소리인가? 뭐가 어쩌고 어째?
씬 동 병부령 안
복지겸이 장계를 보다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앞에 서있는 전령을 보고 있다.
복지겸 백제의 견훤왕이 대군을 이끌고 조령으로 몰려가고 있어?
전령 그러하옵니다, 병부령 어른.
복지겸 군사가 얼마나 된다고 하느냐?
전령 줄 잡아 오천은 넘는다 들었사옵니다.
복지겸 오...천?
전령 그렇사옵니다.
복지겸 조령에 있는 우리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죽령은?
전령 조령은 유금필 장군 휘하에 병력 천 오백이 있사옵고, 죽령에는 환선길 총사 밑에 이천 오백의 군사가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복지겸 그렇다면, 죽령의 군사를 조령으로 이동을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전령 이미 환장군께서 김락, 홍유 두 분 장군과 군사 천을 주시어 조령을 구하도록 하셨사옵니다. 소인은 그것을 보는 즉시 이리로 영을 뫼셔 왔사옵니다.
복지겸 (안타깝다) 견훤왕이 직접 나섰단 말이지? 견훤왕이..........? 그것도 오천이 넘는 대병이란 말이지?
전령 예, 병부령 어른.
복지겸 견훤왕이 왕건 장군이 있던 조령으로 몰려가고 있다?........조령으로.......이 일을 어이하나?..... 드디어, 전선에 불이 붙기 시작했는데, 이 일을 어찌하나....... 병력이나 사기 문제에 있어서 이미 우리 군대가 너무도 불리하지 않는가? 허허, 이런........
씬 상주 전선(석양)
조령 전선이다. 세 장수가 산야에서 군사들을 배치해 놓은 상태에서 적진을 보고 있다. 곳곳에 수많은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고, 폭풍전야처럼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다.
능산 형님, 이상하지 않사옵니까? 백제의 견훤왕이 지금쯤 올 때가 되지 않았사옵니까?
유금필 ..........(적진만 보고 있다)
박술희 그러게 말이옵니다.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저 산아래까지는 당도했을 시각이온데, 이상하옵니다.
유금필 ...........(계속 말이 없고)
능산 죽령에 있는 환장군이 홍유 장군과 김락 장군을 보내어 우리를 지원한다 했사옵니다. 그 군대도 예정대로라면 오늘 밤쯤은 도착을 할 것 같사온데.......
유금필 뭔가 예감이 이상하이.
박술희 이상하다니요?
유금필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네. 견훤왕이 오는 길을 보면 우리 쪽보다는 죽령이 더 가깝고 지리적으로도 공격하기가 좋은 장소일세. 왜 굳이 우리가 있는 조령을 먼저 택했을까?
박술희 그야, 우리 주군이신 큰 형님께서 총사로 계시던 곳이 여기 조령이 아니옵니까?
유금필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야. 아무튼 무언가가 불길한 생각이 드네.
능산 어느새 해가 지고 있사옵니다. 아직 앞에 나가있는 척후병의 보고도 없는 것을 보니, 오늘 밤은 공격이 없는 모양이옵니다.
유금필 (골똘히 생각하며) 답답한 것은 우리가 저들의 전략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일세. 모든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 뿐이고, 저들의 속내가 어디로 가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야. 참으로 조령을 치러 오는 것인지, 아니면........위계를 써서 우리를 속이고....
박술희 아니, 형님 속이다니요? 우리를 왜 속입니까? 무엇 때문에요?
유금필 이곳 보다 더 저들에게 중요한 곳은 죽령이야. 왜냐하면, 환장군의 군대가 사실상 죽령을 넘어 이미 은정현, 안인현, 예천군에 이르기까지 내려가 있단 말일세.
능산 소인이 듣기로는 예천도 넘어서 고창군까지 이르렀다 들었사옵니다.
유금필 바로 그것일세. 환장군은 너무 깊숙이 들어가 있단 말일세. 그렇다면, 응당 그쪽 먼저 치려고 할 것인데 왜 이쪽으로 오는가 하는 이야기일세.
박술희 딴은 그렇사옵니다. 허지만, 모든 보고가 다 일치되고 있지 않았사옵니까? 이곳으로 온다고 말이옵니다.
그러나, 유금필은 도리질을 한다. 뭔가가 아닌 것이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씬 어느 산야(밤)
홍유와 김락이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다. 그들은 야산 기슭을 돌아 계속 멀리 강이 보이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
홍유 환장군이 아무래도 너무 성급하지 않았나 싶소이다.
김락 뭐가요?
홍유 견훤왕이 조령으로 간다고 해서 그걸 전부 믿을 것은 아니지 않소이까? 좀 더 차분히 확인을 하고 대책을 세워야지......
김락 하지만, 견훤왕이 이동하고 있는 길이 조령 쪽이라니 우리는 첩보병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지 않소이까?
홍유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요. 환장군은 너무 성미가 급하단 말이오. 아무래도 왕장군이 있었다면 십분 이것저것 재 보았을 것이오.
김락 그건 그렇소이다. 왕장군이야 빈틈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나저나, 한 참 남았소이다. 조령까지 도착하려면 새벽은 되어야겠소이다.
그들 그렇게 가고 있다.
씬 그곳 근처 어느 천변
냇가의 잡풀 숲목에 긴장이 감돌고 있다. 이미 많은 군사들이 숨어서 멀리 오고 있는 홍유, 김락의 군대를 보고 있다. 그들 매복군은 끝도 없이 숨어 있다. 화살부대와 장창부대, 그리고 장애물들이 수없이 놓여져 있다. 그 어둠 속에서 공직과 두 태자가 보고 있다. 어둠 속에서 군사 하나가 와서 아뢴다.
군사 장군, 적군이 오고 있사옵니다.
공직 (끄떡인다) 군사는 얼마나 되느냐?
군사 어림잡아 천은 넘는 거 같사옵니다.
공직 알았다. 물러가거라. (부장에게) 전대열에 전하라. 적군을 맞을 준비를 하라. 영이 떨어지면, 일제히 퍼부어라.
부장 예, 장군.
공직 태자마마.
두태자 예, 장군.
공직 소장이 말씀드린대로 두 분은 각자 이곳과 저쪽 후미에서 적을 맞으시오소서. 달리 이곳밖에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공격을 받으면 저들은 피할 곳이 없사옵니다.
신검 알겠소이다, 장군. 자, 아우 가세.
용검 예, 형님.
두 형제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공직은 멀리 오고 있는 마진군을 본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공직 (혼자소리) 역시 파진찬 그 사람은 가히 제갈공명과도 같은 사람이야. 죽령에서 조령으로 지원군을 보내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여기 이렇게 좋은 매복지가 있다는 것 또한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대단한 사람이야........ 여봐라, 부장.
부장 예, 장군.
공직 적이 가까이 이르고 있다. 저 천변을 다 넘거든 불화살을 쏘라 이르라. 그리고, 총공격하라.
부장 예, 장군.
부장이 그렇게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공직이 보고 있다.
씬 다시 그곳 천변
칠흙같은 어둠 속에 홍유, 김락의 군사들이 넓은 내천을 넘고 있다. 그들은 불길 한 듯 주변을 본다.
홍유 아무래도 이상하오이다.
김락 뭐가요?
홍유 길이 그렇지 않소이까? 이제부터는 산길로 접어드는데.......길이 하나 뿐이외다. 외길이예요.
김락 허긴, 그렇소이다. 어서 가십시다. 설마 여기까지 백제군이 와 있겠소이까?....
홍유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불길한 눈빛으로 주변을 보며 두어 걸음 갔을까, 이들이 막 내천을 건너 산기슭에 이르면서 갑자기 공중에서 불화살이 날아온다. 그것을 신호로 하여 이곳저곳에서 일제히 불화살이 공중으로 솟는다.
홍유 매복이오! 적군이올시다. 대열을 정비하라. 그대로, 강을 건너라.
김락 대오를 정비하라. 적군을 맞아라. 도망치지 마라.
그러자, 백제군이 벌떼처럼 일어나며 화살이 비오듯 쏟아진다. 공직이 소리친다. 그리고, 태자들이 곳곳에서 소리친다.
공직 적군이 포위망 안에 들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쏘아라!
신검 쏘아라! 저들을 모두 죽여라.
아비규환이 계속된다. 속수무책이다. 어둠 속 이곳저곳에서 말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나뒹군다. 김락이 화살을 맞아 나뒹굴고 홍유는 그런 김락을 구하려다가 달려오는 공직과 더불어 치열한 마상 접전을 벌인다.
공직 하하하하. 어서 오너라. 마진의 졸개들아. 왕건이는 어디 가고, 너희들이 왔느냐?
홍유 나는 홍유라 하느니라. 네 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공직 나는 공직이라 하느니라. 제법 배포가 있어 보이는구나. 내 칼을 받아라.
그들은 그렇게 싸운다. 그 주변에서는 이미 마진군이 무더기로 쓰러져 가고 있다. 갖가지 장애물에 걸리고, 화살에 맞고, 미처 어찌 해볼 틈도 없이 그들은 그렇게 죽어 가고 있다. 공직과 홍유의 접전은 전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공직 (한 참 싸우다가) 대단하구나. 홍유라 하였느냐? 마진에 왕건이만 있는 줄 알았더니, 너 같은 장수도 있었구나.
홍유 헛소리마라.
싸움은 계속된다. 그러나, 홍유는 주변을 보며 절망한다. 이미 자신의 군사는 거의 쓰러져 없는 것이다. 보다가 홍유가 내빼기 시작한다. 이미 김락도 그곳을 빠져 나갔다.
공직 어딜 가느냐? 홍유야. 여기서 도망칠 수는 없느니라. 이리 오너라.
그러나, 홍유는 대답도 않고 급히 도망친다. 곳곳이 시체의 벌판이다. 수많은 적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그때마다 홍유는 물살을 가르듯이 그들을 헤치고 나아간다. 가히 일당백이다. 공직과 태자들이 입이 벌어져 구경하듯 보고 있다. 홍유는 그렇게 무인지경으로 어둠속을 사라져 간다.
공직 대단하구나. 마진에 저런 장수도 있었구나. 허허.....
그런 공직의 표정에서........
씬 그 산기슭 어느 일각
홍유가 창을 들고 달려오고 있는데, 부상당한 김락이 군사 몇 명과 가고 있다가 오고 있는 홍유를 놀란 눈으로 본다.
홍유 김장군이 아니시오이까?
김락 오, 홍장군. 무사하셨구료?
홍유 우리 군사들은......?
김락 단단히 당했소이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매복에 걸렸소이다. 전멸한 것 같소이다. 전멸한 것 같아요.
홍유 우리 생각이 맞았소이다. 적들의 위계에 넘어 갔소이다. 저들의 목표는 조령이 아니라 죽령이올시다.
씬 죽령 예천성 외경
멀리 예천성의 성곽이 보인다. 견훤이 최승우와 추허조, 박영규, 능애, 김총, 방장군과 함께 성을 바라보고 있다.
최승우 지금쯤 조령 근처에서 두 분 태자마마와 공장군이 마진군대를 유린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견훤 (끄떡인다)
최승우 이제 이곳도 때가 되었사옵니다. 영을 내리시오소서, 폐하.
견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곳이 죽령 밑에 예천성일세. 아래도 내려가면 영안현이고 그 밑으로 고창군이야. 모두가 죽령을 타고 흐르는 산기슭을 배경으로 하고 있네. 이들을 모두 오늘 밤 안으로 밀어내야 해.
최승우 그렇사옵니다, 폐하.
견훤 자, 방장군.
방장군 예, 폐하.
견훤 방장군이 오늘은 선봉이다. 좌우 장수들을 격려하여 이 밤 안으로 저 성을 넘어 죽령 일대를 모두 장악하라.
방장군 예, 폐하. (주변을 보며) 폐하의 영이 떨어지셨다. 저 성을 반드시 넘어 예상 목표를 모두 점거하라. 공격하라! 전원 공격하라!
그와 함께 지축을 흔들며 군사들이 몰려가고 있다. 견훤과 최승우가 흐뭇하게 보고 있다.
씬 동 성 안
성루에서 환선길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서 보고 있다.
이흔암 속았소이다, 총사. 견훤왕이 대군을 이끌고 왔소이다.
환선길 이럴수가 있나..... 조령으로 갔다는 견훤왕의 이야기는 다 무어라 말인가?
배현경 (적진을 보며) 완전히 속았소이다. 이미 우리의 병력이 절반이나 조령으로 빠져 나갔다는 것을 알고 이리로 온 것이외다.
환선길 이 일을 어찌한다..... 적군은 무려 오천이 넘는다 하였소.
이흔암 그렇소이다, 총사. 싸워보았자 모두가 개죽음이외다. 빨리 퇴각 명령을 내리시오소서.
환선길 말도 아니되는 소리. 어찌 싸우지도 않고 퇴각을 한단 말인가?
배현경 총사, 이흔암 장군의 말이 맞소이다. 군사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소이다. 성문을 굳게 닫아놓고, 서둘러 퇴각하여 다음 전선을 유지하십시다.
환선길 도망을 치다니....? 내가 이래뵈도 총사요. 어떻게 도망을 친단 말이오?
이흔암 작전상 후퇴이올시다. 서두르시십시다. 어서요.
환선길 그럴수는 없소. 여기를 내주게 되면, 영암과 고창까지 다 내주어야 한단 말일세. 각자 위치를 고수하시오. 전원 전투 대형을 취하라. 적을 막아라! 북을 울려라. 소라를 불어라!!
이흔암 총사........
환선길 어서 위치로들 가지 않고 무얼 하는가? 막아야 한다. 여길 막아야 해!
북소리가 울린다. 소라가 울고, 군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다. 그리고, 디졸브되면서.......
씬 그곳 동 성 벽
방패부대가 앞서 오고 있다. 다음은 장창 부대. 그리고, 포차와 중장비들이 동원되면서 본격전투가 벌어진다. 돌이 성으로 날아들고, 화살이 비오듯 쏟아진다. 그리고, 포차가 성문을 부수고 새까맣게 적군이 성벽을 기어오른다. 환선길이 목이 터저라 독전하고 있다.
환선길 싸워라. 적병을 성으로 들여서는 안된다. 싸워라!
그러나, 소리 뿐이다. 위로 오르고 있는 군사들은 밖에서 날아드는 화살이 무더기로 죽어가고 있다.
이흔암 총사, 보시오소서. 적병이 개미떼 같소이다.
환선길 ........
부장 (달려오며) 장군, 성문이 부서지고 있소이다. 적병이 이미 우측 성벽을 넘고 있사옵니다.
환선길 막아라, 막아야 한다.
씬 동 성 밖
방장군이 신이 올라 소리치고 있다.
방장군 폐하께서 뒤에서 보고 계신다. 성을 반드시 함락하라. 성안에는 군사가 별로 없다. 함락하라! 함락하라!
그 일각에서 추허조와 박영규들이 성벽으로 오르는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다.
추허조 잘한다. 적은 별거 아니다. 어서 넘어라, 성문을 열어라.
박영규 성문을 열어라.
그 한쪽에서 능애와 김총이 방패로 날아오르는 화살을 막으며, 부서져나가는 성문을 보고 있다.
능애 성문이 부서지고 있다. 모두 힘을 내라. 적병들이 도망치고 있다. 힘을 내라.
그렇게 성문이 부서져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문이 뚫리고,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 들어가고 있다.
씬 동 성 안
이흔암, 배현경, 환선길 등이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적병이 이미 눈 아래 가득히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좌에서 우에서 모두가 백제의 군사들만 보이고 있다.
이흔암 도망가십시다. 내가 무어라 하였소이까? 도망가야 합니다, 형님.
배형경 총사, 어서가십시다.
환선길 아, 이게 무슨 꼴인가? 저들의 공격에 이렇게 맥 없이 무너지다니.... 이게 무슨 망신인가?
배현경 어서요, 총사.
그들은 그렇게 그 아우성 속에서 모습을 감추는데.... 이어서, 백제군의 환호 소리가 귀를 찌른다. 디졸브되면......
씬 그 성 밖 견훤의 군막
견훤이 웃으며 성쪽을 보고 있다. 최승우도 웃고 있다. 성쪽에서 계속되는 환호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최승우 폐하, 예상대로이옵니다. 성이 함락된 것 같사옵니다. 저 환호소리를 들으시오소서.
견훤 듣고 있네.
최승우 고삐를 늦추어서는 아니되옵니다. 이 여세를 몰아서 그대로 저들의 후미를 쫓아 남아 있는 군현들을 모두 장악해야 하옵니다.
견훤 옳은 말이야. 그렇게 하세나.
그때, 전령이 다가와 군례를 올리며 머리를 숙인다.
전령 폐하, 공직 장군께서 보내시어 왔사옵니다.
견훤 오, 공장군이...그래, 그쪽은 어찌 되었느냐?
전령 기뻐하시오소서, 폐하. 이곳 죽령에서 조령으로 가던 마진군사 천여명을 전멸시켰사옵니다.
견훤 전멸...? 전멸이라고 하였느냐? 전멸을 시켰어?
전령 예, 폐하.
견훤 으하하하하.............. 일찍이 이토록 통쾌한 날이 없었도다. 그래, 그렇다면 공장군과 두 태자는 지금 어찌하고 있는고?
전령 그대로 여세를 몰아 일찍이 영을 내리신 그대로 조령으로 진군하고 있사옵니다.
최승우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조령도 곧 함락될 것이옵니다.
견훤 으하하하........... 이야말로 십 년 묵은 쳇증이 내려가는 것 같구나.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있나? 그야말로, 오늘은 대 백제의 날이도다. 밀어부치라 하라. 이대로 조령과 죽령 일대에서 마진군의 그림자는 일절 보이지 않도록 하라. 애꾸눈 궁예왕의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밀어 부치라 하라!
그렇게 웃는 견훤의 표정에서........스톱모션.......
< 75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