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78회>
씬 1 철원 황궁 대전
궁예가 여전히 고통스럽게 가슴을 부여 잡고 있다. 아지태가 궁예를 부르고 있다.
아지태 폐하, 정신차리오소서, 폐하..... 폐하......
대전내관이 급히 뛰어 들어온다.
대전내관 불러계셨사옵니까, 폐하?
아지태 의원을 부르거라, 어서. 전의를 불러라.
그러자, 궁예가 한 쪽 손을 저으며 간신히 제지한다. 두 사람은 그런 궁예를 본다. 궁예는
비오듯 땀을 흘리며 간신히 고통에서 벗어나고 있다.
궁예 그만두어라. 아무것도 아니니라.
아지태 폐하, 의원을 부르시어.......
궁예 아니야. 내관은 물러가거라.
대전내관 예, 폐하.
내관은 그렇게 눈을 크게 뜨고 둘러 보다가 물러가고. 아지태만이 궁예를 심상치 않게 보고
있다.
아지태 폐하, 어쩐 일이시옵니까? 왜 그러시옵니까?
궁예 아무것도 아니야.
아지태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신이 뵙기로는 무척이나 불편하신 듯 하온데...
궁예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괜찮소이다. 잠시 그럴 때도 있지 무얼 그러오? 아
마도, 피곤했던 모양이오. 그만, 물러가시구료.
아지태 하오나....
궁예 허허, 걱정마오.. 짐의 이야기는 그만 하고....... 아무튼, 새 조정에서 내봉성을 맡
은 아학사의 할 일이 갈수록 많을 것이오. 잘해주길 바라오.
아지태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신을 그토록 믿고 또한 부려주시니, 백골난망이옵니다. 모든 것
이 폐하의 뜻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궁예 고맙소이다, 허허. 참으로 고맙소이다. 그만 가보시오.
아지태 예, 폐하. 하오면..
아지태가 예를 올리고, 대전을 조심스럽게 빠져 나간다. 궁예는 다시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
는다. 그는 불안하다.
궁예 (E) 대체 왜 이러는 게야? 왜 이런 현상이 또 오는 게야? (사이) 도대체 미륵인 내가
무엇이 두려워서...... 공포를 느끼고, 마음이 불안해지는 게야? 내가, 왜?
그런 궁예의 표정에서.........
씬 2 동 황궁 내원
종간과 은부, 염상이 모여 있다.
은부 내원어른, 방금 전에 내봉성의 아지태가 대전에 들었다가 나갔다 하옵니다.
종간 아마도, 조정의 벼슬아치들 때문이겠지. 이번에 많은 부서의 신료들이 바뀌지 않았는
가? 이미 폐하와 그 이야기를 끝냈네 그려.
은부 그래도, 역시 폐하께오서는 아지태보다는 내원 어른을 먼저 찾으셨사옵니다. 얼마나
신임하시는 가를 잘 나타내는 대목이 아니겠사옵니까?
종간 그런 말씀 마시게. 언제 변하실지 모르시는 분이 폐하이실세. 그래도, 내가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폐하께서는 아직 명철하게 세상 형편을 보고 계신다는 것일세.
은부 그렇사옵니까?
종간 저 중원의 사정이나, 또 우리와 대처해 있는 삼한의 사정을 꿰고 계셨네.
염상 하지만, 내원어른, 폐하께오서 백성들의 인심에 관해서는 과연 제대로 알고 계시는지
모를 일이옵니다.
종간 그건 무슨 말인고?
염상 소장이 철원 시가지를 돌아보았사옵니다. 말이 아니었사옵니다.
은부 허허, 이 사람 염부장, 그런 얘기는 왜?.........
종간 말해 보게.
염상 폐하께서는 보지 못하고 계시옵니다. 궁성 밖에 있는 철원 시가지는 그야말로 거러지
들과 시체들로 즐비하옵니다.
종간 ...........(괴로운 듯 눈을 감는다)
은부 그만 하라지 않는가? 내원께서 그 일을 왜 모르시겠는가?
염상 하오나, 맹목적인 충성보다는 때로는 올바른 진언을 드릴 수 있어야 참다운 군신관계
가 이루어지지 않겠사옵니까?
은부 그래도 이 사람이........
종간 아닐세. 옳은 말일세. 모처럼 염부장이 옳은 말을 해주었어. 그러나, 이미 들어줄 귀
가 없고, 말해줄 입이 막혀버렸다네. 어찌하겠는가? 나는 안다네. 자네만큼 다 알고 있
어. 저 불쌍한 백성들의 고통을 말일세. 그런데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아무것
도.......
한숨 섞인 종간의 표정에서.......
씬 3 철원 시가지 거리
골목마다 찬바람이 불어쳐 가고 있다. 인적들도 거의 끊겼고, 몇 몇 걸인들이 지나친다. 여
전히 죽어 있는 시체들이 맨발을 드러내고 누워있다. 그 위로 싸락눈이 뿌려 지고 있다. 물을
찾으며 죽어가는 어느 걸인의 모습도 보인다.
걸인 물......... 물............. 물을 주오. 물............
그러나, 두엇 지나치는 군졸들조차 그렇게 가버리고, 걸인을 물을 찾다 숨을 거둔다. 카메라가
쫓고 지나가면, 곳곳에 시체들은 앉거나 쓰러진 채 누워있다. 그리고, 석양이 희미하게 지고
있다. 바람소리...... 그 극한 바람소리에서.......
씬 4 황궁 외경(밤)
씬 5 동 황후전
연화가 강장자 부부를 보고 있다.
강장자 황후마마, 철원에 오신 이후 형편이 어떠하시옵니까?
연화 송악이나 이곳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황궁은 다 똑같은 곳이지요.
백씨 그래도, 송악보다는 이곳이 나아 보이옵니다. 건물들도 훌륭하고 또 깨끗하고 말이옵
니다.
강장자 아, 그렇다마다. 정전은 물론이고 대전도 아주 훌륭하게 지었고, 법당은 말도 못하게
웅장하다 하옵니다.
연화 건물이 아무리 좋은들 무엇하옵니까?
두사람 예?
연화 두 분께서도 저자 거리의 사정을 모르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병들어
죽어 가는 백성들 말이옵니다.
두사람 ..........
연화 지금껏 폐하께오서는 그에 대하여 단 한 말씀도 없으셨사옵니다.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모르신단 말이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이옵니까? 아버님도 이 나라의 신료
라 하시면, 이런 사정들을 폐하께 말씀드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강장자 천만의 말씀이시옵니다. 감히 누가 폐하께 그런 말씀을 드릴 수 있다는 말이옵니까?
그런 사람은 아마 목이 서너개 쯤은 되어야 할 것이옵니다.
연화 그러니, 이 나라 조정이 오늘날처럼 형편없이 변하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 없
기 때문에 말입니다.
백씨 아예, 그런 말씀 마시오소서. 폐하께오서 이곳에 오시기전에 이미 철퇴를 드셨사옵니
다. 철퇴말이옵니다. 누구든 조심하지 않으면, 바로 목숨을 잃는다 하옵니다, 황후마
마. 그러니, 누가 바른 말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연화 (큰 한숨) 두렵다고 모두 몸을 사려서야, 이 나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참으로 큰 일
입니다. 도대체, 이 나라에는 진정한 충신이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누
군가는 폐하를 진실로써 뫼셔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아니 보인다는 것입니다.
씬 6 동 황궁 대전
궁예가 막 절을 끝내고 있는 환설길과 이흔암, 배현경, 홍유, 김언 들을 보고 있다. 옆에서
병부령인 복지겸이 함께 해 있다. 궁예는 이들을 한참 노려 보다가 눈을 감고 입정에 든다.
모두들 긴장해서 그런 궁예를 본다. 한참 후에 궁예가 눈을 뜬다. 궁예는 무섭게 이들을 보고
있다.
복지겸 폐하, 이번에 충주에서 올라온 장수들이옵니다.
환선길 폐하, 신 환선길 문후드리옵니다.
모두들 문후드리옵니다, 폐하.
궁예 (한 참 노려보다가) 환장군, 나도 오랜만이오. 충주에서는 아주 활력이 대단하였다고
들었어.
환선길 (훔칫하며)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조령과 죽령에서 폐하의 군대를 너무도 많이
잃었사옵니다.
궁예 내가 내원에게 말하였지. 경은 머리가 나쁘다고 말이야.
환선길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그 많은 땅을 다 빼앗기고 숱한 병사들을 다 죽였어.
환선길 망극하옵니다, 폐하.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궁예 (다시 관심법으로 눈을 감고 있다 뜨며) 허지만 말이야. 내가 관심법으로 가만히 보니
그대는 머리하나 나쁜 것이 탈이지, 예나 지금이나 그 충성은 변함이 없어.
환선길 (울듯이) 폐하, 참으로 신 환선길 머리를 둘 곳이 없사옵니다.
궁예 허긴 그래. 머리가 나쁜 편이 나아. 대게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조금만 칭찬해주면 금
방 자신들의 영리를 생각하며 교활해진단 말이야.
복지겸 ........
궁예 아무튼 고생들 하였어. 이 장군.
이흔암 예, 폐하.
궁예 그리고, 배장군, 홍장군, 김장군.
그들 예, 폐하.
궁예 조령과 죽령은 왕건장군에게 맡겼으니, 경들은 이번에 신라쪽을 맡아 주어야겠어. 영
토를 더 넓히고, 깊숙이 파고 들란 말이야.
그들 예, 폐하.
궁예 백제와 싸우고 있다가 시기를 다 놓칠 것 같아. 그대들이 앞서서 백제 보다 먼저 서라
벌로 갈 수 있도록 해보게나. 알겠는가?
환선길 이를 말이옵니까? 이렇게 다시 또 기회를 주시오니, 그 은혜가 참으로 크시옵니다, 폐
하.
모두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끄떡이며 웃다가) 그리고, 이보시오, 병부령.
복지겸 예, 폐하.
궁예 내가 내봉성령에게도 말해놓았는데, 법회 말이야.
복지겸 예, 폐하.
궁예 환도 이후 처음 여는 대 법회야. 일전에도 그랬듯이 전국의 고승들을 모두 불러 들이라
고 하였어. 알고 있는가?
복지겸 예, 신도 들었사옵니다.
궁예 돌아가다가 내봉성에 일러서 그 일을 재촉하라고 하시오.
복지겸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궁예 내가 내봉성의 아학사에게 일러놓았네. 성대하게 법회를 열라고 말이야. 아학사는 내
게 말해 주었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복지겸 .........
궁예 더욱 큰 미륵으로, 더욱 큰 황제로 새 나라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이야. 나는 그래서 우
리 마진국의 연호를 이참에 바꾸기로 하였어. 성책, 성책(聖冊) 어떠한가? 성스러운
대 제국을 이곳에서 세운다 하는 뜻이야.
환선길 참으로 그 뜻이 깊사옵니다, 폐하.
궁예 뜻을 알기는 하는가?
환선길 ........
궁예 허허허, 아무튼 모든 것이 이 철원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야. 이 역사에 일등 공신은
아지태야. 아지태.... 참으로 그는 이상도 높지만은 놀라운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 사
람이야. 암, 허허허..
씬 7 아지태의 집
대문이 열려져 있고,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선물 보따리들이 곳곳에 쌓여 있다.
집사가 땀을 흘리며 이들을 막고 있다.
아집사 물러들 가시오! 나으리께서는 아니 만나신다 합니다. 물러들 가시오!
손님1 아, 그래도 먼 곳에서 왔는데 한 번 기회를 주시구료. 나는 청주 사람이오. 동향이란
말이오.
아집사 아, 글세 동향이고 뭐고 물러 가시오.
손님2 나는 벌써 사흘째 이러고 있소이다. 제발, 아지태 어른을 좀 만나게 해주시구료. 이
선물을 전해드려야 한단 말이오.
아집사 아, 글세 나으리께서는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아, 나 이거야
원....
씬 8 동 집 사랑
아지태가 웃고 있다. 능달과 임충길, 입전, 신방 등이 밖의 아우성 소리들을 듣고 있다.
아지태 저 소리들을 들어 보게나. 이런 것을 바로 세상 인심이라고 하네. 내가 좀 힘을 쓰기
시작하니까, 저렇게들 몰려 온단 말일세.
임충길 권력이 있는 곳에 사람과 재물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옵니까?
능달 그렇기는 하나,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세상의 눈이 있사옵니다.
아지태 암, 암.... 그렇고 말고. 그러나, 사람들이 이런 맛에 권력을 손에 쥐려고 하는 거 같
아. 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말이야?
그들 ........
아지태 하하하, 허나 저 미련한 것들이 나를 썩어 빠진 다른 관료들처럼 보는 것은 아주 유감
이야. 우리에게는 이상이 있단 말일세. 이 현실을 냉정히 보아야 해.
능달 그렇사옵니다. 사실 황도를 옮겨 왔지만은 백성들의 인심은 최악의 상태이옵니다.
아지태 알아, 그러나, 나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야. 이 황실 모두가 욕을 먹는 것일세. 사실
지금의 형국은 매우 위험하고 불안해. 언제 어떻게 저 불만들이 터져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거든.
입전 나으리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옵니까?
아지태 내가 눈먼 장님이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닌데, 왜 모르겠는가?
신방 그래서, 소인들이 누차 어르신께 세간의 형편을 알려 올리지 않았사옵니까?
아지태 하지만, 그렇게 겁을 먹을 필요는 없어. 언제든 최종책임은 황제가 지게 되어 있어.
모두들 ............?
아지태 우리는 그저 좀 더 지켜보면 돼. 사람들은 먼 훗날 알게 되지. 정말로 누가 진정한 역
사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을 말이야.........지금 돌아가고 있는 모든 형편은 바로 나,
아지태의 이상이 그대로 현실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야. 욕은 황제가 먹었고, 대 제국의
이상은 아지태의 것이었다고 역사는 기록을 할 것이야. 역사 말이야. 하하하.........
씬 9 황궁 내원 밖
금대와 장일들이 군사들과 함께 궁성 마당을 경계하고 있다.
종간 (E) 폐하께서 환후가 있으신 거 같네?
씬 10 동 내원 안
종간과 은부, 염상, 박유 들이 함께 해 있다.
종간 밤에 통 잠을 못 주무신다고 들었네. 아무래도 지난 날 낭인들에게 입으셨던 상처가 예
사롭지 않아.
박유 그렇게 되었사옵니까? 대체 어떠하시길래...?
은부 내관들을 시켜 알아보았는데, 밤에도 간간이 그런 발작이 오시는 것 같습니다.
종간 아무래도 전의를 보내드려야 겠어.
박유 내원께서 한 번 권해보시오소서.
종간 그래야겠어요. 한 번 더 찾아 뵙고 강하게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은부 그리고, 내원 어른, 환도 법회를 여시라고 내봉성의 아지태에게 말씀을 하신 것 같사
옵니다만은.... 법회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옵니다.
박유 그럴 것입니다. 고승들을 불러 들이는 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지요.
염상 드릴 말씀은 아니옵니다만은 지금은 그렇게 법회를 호화롭게 열 때가 아니옵니다.
종간 ...........?
염상 백성들에 대한 대책을 먼저 마련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옵니다.
은부 (만류하며) 이보게, 염부장.
염상 위기이옵니다. 내원어른께서라도 폐하를 대신하시어 이 난세를 극복하셔야 하옵니다.
종간,박유 .............
은부 (노여움을 띠며) 나는 분명히 자네에게 그에 관한 말은 삼가 하라고 하였어.
박유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소서. 염부장이야 말로 충정으로 간하고 있는 것이외다.
종간 (오래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우리는 이미 모두가 돌아설 수 없는 길목에 와있네.
(한 숨 쉬며) 염부장.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어쩌는 수가 없다고....
염상 .........
종간 법회 준비나 서둘러 주게나. 폐하께서 너무 중히 생각하시는 대 법회일세. 글세....
(한숨) 그 법회의 효력이 얼마나 나타날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해 보아야지. 자네들이
좀 서둘러 주어야겠어..
염상 그 일은 그리 하겠사옵니다. 하오나, 내원어른. 현실을 좀 더 살펴보셔야 할 것이옵니
다. 내원어른께서도 아니하시면, 누가 그리 하겠사옵니까?
종간 .........(한숨을 쉬며 눈을 감는다)
씬 11 길
군사들이 달려가고 있다. 백성들 속에 간간이 가고 있는 승려들의 모습이 보인다. 병사들은
곳곳으로 흩어지며 그렇게 달려간다. 전령들인 것이다. 그 위로 소리.
전령 (E) 전국의 수령 방백들은 들으시오. 황제폐하의 영이시오. 곧 환도 대 법회를 여니,
전국 사찰의 고승 대덕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법회에 참석해야 할 것이오. 만약에 영
을 어길 시에는 그에 마땅한 벌을 받게 될 것이오. 고승 대덕들은 들으시오. 법회에 모
두 참석하시오. 대 미륵이신 이 나라 황제 폐하의 영이시오.
그 소리들이 사라지고, 군사들의 모습이 멀어지면 백성 하나가 침을 뱉는다.
백성 대 법회를 연다고? 대 미륵이라고? 궁예가 지옥의 나찰이지. 무슨 미륵이란 말인가?
(계속 침을 뱉으며) 궁예는 미치광이 나찰이야. 그렇고 말고...
씬 12 왕건의 집 외경
씬 13 동 집 사랑
왕식렴과 왕신이 마주 해 있다.
왕식렴 송악은 별 일이 없는가?
왕신 예, 형님. 그곳 백성들은 황궁이 철원으로 옮겨간 이후 우리 왕씨 가문을 송악의 주인
으로 알고들 있사옵니다.
왕식렴 허허, 그게 무슨 소린고? 사람들 귀가 많으이. 각별히 말을 조심해야 하네.
왕신 알겠사옵니다, 형님. 이곳에 형편은 어떠시옵니까?
왕식려 그저, 하루 하루가 불안하고 초긴장일세. 아무튼 형님과 내가 없는 동안 송악 일은 신
이 아우가 잘해주어야 할 것이야.
왕신 염려 놓으시오소서. 철원에 너무도 부족한 것이 많다고 들어서, 먹을 것과 생활할 물
건들을 이것 저것 좀 올려 왔사옵니다.
왕식렴 고마우이. 두 분 형수님이 고단하시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좀 써드리게나.
왕신 예, 형님.
씬 14 동 집 안채
오씨와 유씨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오씨 형님, 신이 도련님이 송악에서 양식과 옷감하며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왔사
옵니다.
유씨 그러게 말일세. 그래도, 송악은 사정이 좀 이곳보다 낫다하니 안심일세.
오씨 그렇사옵니다. 이 철원 만한 곳이 또 어디에 있겠사옵니까?
유씨 그래, 이곳은 너무도 참담해.
오씨 곧 법회가 열린다 하옵니다. 아마도, 많은 신료들과 스님들이 모일 모양이옵니다.
유씨 하긴, 황궁을 옮겨 왔으니, 의당이 법회를 여시겠지. 그래, 언제 연다 하는가?
오씨 아무래도, 전국에 퍼져있는 큰 스님들이 철원까지 오시자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지
않겠사옵니까?
유씨 (끄떡이며) 그럴테지. 아무튼, 송악에서 이리로 온 이후에는 그저 모든 것이 불안하기
만 하이. 들리는 소문마다 어렵고 힘든 것들 투성이고, 무엇 하나 안정된 것이 없으니
말일세.
오씨 그렇사옵니다. 이 철원은 지금 인심이 말이 아니옵니다. 어디를 가도 편안한 얼굴은
볼 수가 없사옵니다.
유씨 도대체, 언제쯤 좋은 세월이 오려는가..... 오늘따라 서방님이 뵙고 싶어지네 그려.
자네도 그렇지 아니한가?
오씨 왜 아니 그렇겠사옵니까? 지금쯤 어찌하고 계시는지.....
씬 15 충주 어느 길
왕건과 박술희가 가고 있다. 그 뒤로 군사들 몇이 몇개의 짐바리들을 지고 뒤따르고 있다.
왕건 이보게, 술희.
박술희 예, 주군.
왕건 우리가 조령과 죽령을 되찾자면, 군사적인 힘만으로는 상당히 힘이 들게 되어 있어.
박술희 그러게 말이옵니다.
왕건 이번에 충주 장자 유긍달이라는 사람이 잘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구먼.
박술희 그 사람은 본래 우리에게 아주 호의적이 아니었사옵니까? (그러다가 멀리 오는 사람들
을 보며) 주군, 저기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이 아니옵니까?
왕건 ..........?
저만큼으로 유긍달과 함께 금식이 부하들과 함께 나와있다. 거리가 가까와지자 유긍달이 웃
으며 이들을 맞는다.
유긍달 허허허, 왕건 장군이 아니시오?
왕건 반갑습니다. 유장자님이 아니십니까? 이거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긍달 그렇습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기는 내가 아끼는 장
군 금식이라 합니다.
금식 소장 금식이옵니다.
유긍달 비록 관군은 아니나, 이곳 지방에서 별도의 군사를 가지고 있는 장군이올시다.
왕건 반갑소이다, 금장군.
유긍달 자, 가시지오. 저희 집으로 가서 이야기 좀 나누십시다.
왕건 예, 장자님.
그들 그렇게 가면서........ 디졸브 되면..
씬 16 유긍달의 집 외경과 마당
카메라가 외경을 잡아 안으로 들면 대단히 큰 저택이다. 머슴들과 사병들이 오가고 있고, 그
한쪽에서 하녀들이 음식상을 보고 있다. 유긍달의 딸 수인이 그런 하녀들을 돌보고 있다.
씬 17 그 부엌
수인 아버님께서 큰 손님이 오신다고 하였느니라.
하녀 이미 사랑으로 드셨사옵니다, 아씨.
수인 알고 있다. 어서, 어서 주안상을 잘 보거라. 손님은 바로 왕건 장군님이라고 하시는구
나. 너는 그 존함을 들어 보았느냐?
하녀 예, 아씨. 그분을 모르는 사람이 이 충주 땅에 어디 있사옵니까?
수인 그래....... 자, 어서 상을 들여가야 한다. 그것 이리 좀 놓고, 그것도 이리로......
수인은 그렇게 음식상을 손수 챙기며, 술병과 안주며 나물들을 놓고 있다.
씬 18 동 집 사랑
왕건과 박술희, 유긍달, 금식이 마주 앉아 있다.
유긍달 허허허. 미리 연통을 해주신 그 내용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하십시다. 우선, 왕장군께
서 사불성으로 가시는 길은 우리가 안내인을 붙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왕건 고맙습니다.
유긍달 문제는 그 보다도 군사들에 관한 일이 아니겠소이까?
왕건 그렇습니다. 고민이 많습니다, 장자 어른.
그때, 밖에서 수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인 (E) 아버님, 주안상 대령이옵니다.
유긍달 오, 그래. 어서 들이거라.
문이 열리고, 수인이 하녀를 앞세워 인사를 하며 들어와, 주안상을 들여다 놓는다.
유긍달 허허허. 왕장군, 이 사람의 여식이올습니다.
왕건 (한 참을 보다가 예를 올린다) 소생 왕건이라 합니다.
수인 (부끄러워 하며) 수인이라 하옵니다. 대 장군님을 이렇게 뵈오니, 영광이옵니다.
왕건 천만에 말씀입니다, 낭자.
유긍달 허허, 그럼 수인아, 그만 나가보거라.
수인 예, 아버님.
수인이 그렇게 나간다. 유긍달이 술을 따른다.
유긍들 자, 드십시다. 오늘 저녁은 저희 집에서 편히 유하고 가시지요.
왕건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바로 사벌주 성의 그 아자개라는 사람과 약조를 해 놓아서요.
잠시 후 또 떠나야 합니다.
금식 허허, 이거 모처럼 뵙고 싶었던 두 분을 이렇게 만났는데, 금방 떠나신다니 섭섭하옵
니다.
박술희 허허, 어쩌겠습니까? 약속도 중요하고, 또 해야할 일도 많고...
금식 이 사람이 듣자 하니, 여기 박장군님과 아자개의 딸 그 대주라는 낭자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 들었는데, 사실이오이까?
박술희 어험... 뭐 가깝다기 보다는...그저 좀 아는 사이지요.
금식 그저, 알다니요? 남녀가 어찌 그저 알 수가 있사옵니까?
왕건 허허허. 아주 난처한 질문만 골라서 하시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좋아하기는 하는
데, 서로가 칼을 겨누고 있으니 어렵지 않겠소이까? 뭐, 그런 것이올시다. 허허허.
금식 핫하하하하...... 그런 것이었구료. 알겠사옵니다. 허허허.......
유긍달 그건 그렇고... 우리가 이야기 하기로 한 그 군사 문제 말이오. 내가 오늘 여기 금식
장군을 함께 자리한 것은 왕장군의 그 어려움을 좀 덜어드릴 수 있을까 해서 입니다.
왕건 말씀하시지요.
유긍달 여기 금장군은 왕장군을 도울 의사가 있다고 합니다.
왕건 예? 그게 사실이오이까, 금장군?
금식 그러하옵니다. 소생을 따르는 무리가 적어도 한 이천 가까이는 되옵니다.
박술희 (놀라서) 그렇게 많이....
금식 왕장군의 탁월한 인품과 장수로써의 대명은 익히 들어왔사옵니다. 마침, 많은 군사력
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니, 원하신다면 기꺼이 영을 따르겠사옵니다.
유긍달 금식 장군과 잘 손을 잡아 보시구료. 도움이 될 것이외다. 사실 지방에서 이만한 군사
를 가지고 있기 어렵소이다. 물론, 그들이 모두 사냥꾼들이거나 농민들 출신이지만 말
입니다.
왕건 (금식 손을 잡으며) 고맙소이다. 이렇게 고마운 일이.... 사실 지금 우리 마진군의 이
곳 형편은 너무도 어렵소이다. 도와주신다면 이보다 큰 은혜가 어디 있겠소이까?
유긍달 내가 이 사람을 부른 것도, 그리고 여기 금장군이 자청하여 온 것도 다 왕장군의 인품
을 존경하기 때문이외다. 이 난세에 진실로 백성을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
습니까? 우리는 왕장군을 정말 존경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서고 있는 것이외다.
왕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유장자 어른.
유긍달 하하하, 자 한 잔 하십시다. 비록 곧 길을 떠나신다고는 하나 기분 좋게 한 잔 하시고
가시구료. 내 딸아이가 정성스레 만들어 온 주안상이올시다.
왕건 정말 고맙습니다, 장자 어른. 그리고, 금장군, 고맙소이다.
금식 어인 말씀을....자, 한 잔 하시지요..허허허...그렇다면, 소장도 이 자리가 파하고 나
면 충주로 가서 장군의 부장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왕건 고맙소이다. 참으로 든든한 말씀이오. 자, 그럼....(잔을 들면서)
씬 19 동 집 마당
왕건들이 대문을 나서려 하고 있다. 유긍달과 그의 딸 수인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다. 왕
건과 그녀의 시선이 부딪친다. 왕건이 훔칫하며 잠시 서서 그렇게 본다.
수인 조심해가시오소서, 장군.
왕건 예, 낭자.
왕건은 그렇게 멈짓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돌려 대문을 나선다. 유긍달과 금식이 전송을 한다.
유긍달 조심해가시구료. 사불성까지 우리 집사들이 잘 안내해 뫼실 것입니다.
왕건 고맙습니다. 이렇게 도와주시니....
금식 소장은 곧 장군의 군영으로 가 보겠사옵니다.
왕건 그렇게 하십시다, 그럼.
유긍달 빠른 시일에 다시 만나십시다. 허허허.
그렇게 그들을 보내는 유긍달의 표정에 심상치가 않다. 그는 가고 있는 왕건과 딸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그리고, 무언가 계산적인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런 유긍달에서.... 카메라는 수
인에게 옮겨지며...
해설 유긍달, 일찍이 소개하였듯이 그는 충주의 호족이었다. 그리고, 그의 딸 수인은 왕건
의 세번째 부인이 되며, 훗날 신명순성황후가 되는 사람이다. 물론, 수인이라는 이름은
극중 설정한 이름이다. 그녀는 왕건으로부터 가장 많은 자식을 낳는데, 고려 3대 황제
인 정종과 4대 황제 광종, 그리고 낙랑 공주 등 여섯 자녀를 낳은 여인이다. 많은 자식
을 낳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왕건의 여인들 중 가장 각별한 은혜를 입었던 것 같다.
씬 20 산 길
왕건과 박술희 일행들이 그렇게 가고 있다. 박술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왕건을 본다. 유긍달의
안내들인들 함께 가고 있다.
박술희 (한참 보다가) 주군.
왕건 왜 그러는가?
박술희 그...... 유장자의 여식 말이옵니다. 수인이라고 하는 낭자말이옵니다.
왕건 그런데...?
박술희 주군께오서 특별히 관심이 있게 보시는 듯 하여서....
왕건 허허, 사람 하고는. 내가 관심을 쓸 게 무엇이란 말인가?
박술희 그렇겠습지요? 헤헤헤.... 그저 세상 보는 눈이 모두 다 나와 같이 생각되어서 말이옵
니다.
왕건 그게 무엇인데?
박술희 그 낭자도 그렇거니와, 주군께서도 눈치가 영 좀 각별해 보이셨다 이런 말이옵니다.
왕건 쓸데 없는 소리 말고, 어서 길이나 재촉하세. 많이 늦었네 그려. 사불성까지는 상당한
거리야.
박술희 예, 주군. 혜헤헤. 서둘러라, 어서들 가자.
왕건 아무튼, 이번에 아자개라는 사람이 우리에 방문을 허락했다는 것도 상당히 의미가 있
는 일이야. 백제의 견훤왕이 이 사실을 안다면, 기절초풍을 할 것일세. 아니 그런가?
박술희 그렇겠습지요. 허허허. 얼마나 재미있사옵니까? 주군의 존함만 들어도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는 견훤왕이옵니다. 그 견훤왕이 주군께서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면..... 허허허...아마도, 제 정신 못차리고 펄펄 뛸 것이옵니다.
씬 21 전주 황궁 외경
씬 22 동 황궁 대전
견훤왕이 크게 웃고 있다. 능환과 최승우가 함께 해 있다. 두 태자와 능애, 박영규, 김총,
수달, 지훤, 최필, 애술, 신덕 등이 모여 있다.
견훤 내가 장계를 보았는데, 지금 궁예왕이 옮겨간 철원이 참으로 엉망이라는 구먼. 사정이
어려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보다 더하다는 게야.
최승우 궁예왕은 북쪽을 노리고 있사옵니다. 말하자면, 저 발해국을 넘어서 중원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옵니다.
능환 어림도 없는 소리. 지금 이 삼한도 정리가 안되어서 모두들 힘들어 하고 있는데 어떻게
중원으로 간다는 말인가?
최승우 그러게 말이옵니다. 하지만, 아지태라는 자가 그것을 부추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
리 백제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인물이지요.
견훤 아지태라, 아지태.....참으로 기가 막힌 인물일세 그려. 허허허..
박영규 북쪽을 노리는 궁예왕의 욕심은 그야말로 과대망상이 아니옵니까, 폐하?
견훤 허허허, 그렇지, 좀 심해. 어떻게 그만한 세력을 가지고 무모하게 그 끝도 없이 넓은
북으로 간단 말인가? 거긴 너무 멀어. 멀고 말고....우선, 저 광활한 발해를 넘어야
하고, 다시 거란을 넘어서 당나라로 가야 한단 말이야. 멀지, 너무 멀어....
추허조 하오나, 폐하, 북쪽을 보고 있는 그 궁예왕의 의지는 사줄만한 것이 아니옵니까? 언제
우리 삼한의 사람들이 북쪽을 노려본 적이 있사옵니까?
능애 그렇지는 않소이다. 그 옛날 고구려의 광개토 대제는 중원의 대부분을 차지한 적이 있
소이다. 그때 중원의 수나라가 고구려를 우습게 보고, 넘어 들어왔다가 망신을 당하고
나라마저 망했소이다.
견훤 그래, 그래, 나도 그 역사를 알고 있어. 그러고보면 궁예왕의 그 욕심도 그렇게 비웃
을 일만은 아니야. 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삼한을 통일하는 일이 더 급해.
수달 그렇사옵니다. 우리가 먼저 저 마진을 함락시키고, 신라를 병합한 뒤에 북으로 가야
하옵니다.
견훤 당연한 말이지, 그래야 하고 말고...
수달 하온데, 듣자하니 왕건이가 다시 조령에 와 있다 들었사옵니다. 마땅히 경계를 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지훤 폐하, 조령에 왕건이가 왔다면 또 싸움이 시작될 것이옵니다. 신을 그리로 보내주시오
소서.
견훤 어허, 지훤 장군은 여기 수달 장군을 도와서 그대로 무주에 있어야 해. 우리는 머지 않
아 금성을 다시 공략할 것이거든. 수달 장군과 함께 말이야.
수달 황공하옵니다, 폐하. 속히 그 영을 내려주시오소서.
견훤 아,아, 그래도 때가 되어야지.
최필 하오면, 신들을 사벌주로 보내주시오소서.
신덕,애술 그리해주시오소서, 폐하.
견훤 그럴 필요 없어. 그곳에는 공직장군과 방장군이 있어. 그들도 역전의 맹장들일세. 군
사도 저들 보다 몇 배나 많고, 중요한 거점을 모조리 아군이 장악하고 있어. 이제 그곳
은 안심해도 좋아. 암, 조령과 죽령은 이제 끝난 게야. 영원히 백제의 땅이야. 그만 하
면 아버님도 안심이 되고 말이야.
씬 23 사불성 외경
씬 24 동 성 안 마당
왕건 일행들이 들어오고 있다. 많은 군사들과 성안의 백성들이 떼지어 그들을 보고 있다. 용
개와 보개, 대주가 이들을 맞고 있다. 대주가 보고 있다 왕건에게 예를 올린다.
대주 어서오시오, 왕장군.
왕건 ........?
박술희 낭자, 그동안 별고 없으셨소이까? 주군, 대주낭자이옵니다. 무예가 아주 뛰어나옵니
다. 이곳 성주님의 따님이옵니다.
대주 먼 길을 오시었습니다, 장군.
왕건 처음 뵙소이다, 대주 낭자. 여기 박부장을 통하여 여러 번 이야기를 들은 터라 낯설지
가 않은 것 같습니다.
용개 안으로 드시지요, 왕장군.
왕건 고맙소이다.
대주 여봐라, 이 분들을 안으로 뫼시어라.
대답소리와 함께 군사들이 길을 열며 이들을 안내해 간다. 군사들과 짐바리들도 그 뒤를 따
른다. 그 위로.
아자개 (E) 왕건이가 왔어? 왕건이가?........
씬 25 동 성 안
아자개가 벌떡 일어나며, 출입구 쪽을 보는데, 그 문이 열리며 왕건이와 박술희가 들어선다.
아자개와 계모가 입이 헤 벌어져 보고 있다.
아자개 (왕건 보며) 저, 젊은이가 왕건장군이로구먼. 그렇지 않소이까, 부인?
계모 예, 첫눈에도 참 의젓해 보입니다.
아자개 어서들 오시게. 이쪽은 우리가 잘 아는 박술희 장군이고... 그대가 왕장군인가?
왕건 (군례를 드리며) 그러하옵니다, 어르신. 소장이 왕건이옵니다.
계모 세상에......정말 반듯하게도 생겼다. 과연, 소문이 사실입니다. 인품도 훌륭하고, 덕
이 많은 장수라고 하더니, 우리가 보아도 첫 눈에 그렇게 보입니다, 나으리.
아자개 암, 암.... 참 먼길을 오셨네. 옛날같으면 그래도 길이 좋았는데...지금은 백제의 군
사들이 있어서 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네.
박술희 그러나, 군사지역을 피해서 왔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사옵니다, 어르신.
아자개 암, 암.... 우리 성에 손님인데 어렵게 와서는 아니되지. 암....... 자, 들 앉게.
왕건 소장은 일찍이 어르신을 상부로 뫼시겠다고 말씀을 올려 그 허락을 받은 적이 있사옵니
다. 아버님의 예로 대하고 싶사오니, 허락해 주시옵소서, 상부님.
아자개 (설레인다) 상부라...상부라...... 암, 허락이랄 게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하
기로 하였네 그려. 그래서, 지난 번 전투에도 자네들은 우리 성을 넘보지 않았고, 우리
도 내 아들이긴 하지만서도 견훤이를 돕지 않았어요.
대주 ........
아자개 말하자면, 우리는 영원한 독립과 중립을 지키겠다 이런 말씀이야. 내 아들이 황제라
하더라도 나는 싫은 것은 싫어해. 아주 분명한 것을 좋아하지.
왕건 이를 말씀이옵니까? 소장 또한 상부어른의 그 높으신 뜻을 받들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사불성을 보호하며 존경해 올릴 것을 대장부로써 약속드리옵니다.
계모 세상에..... 얼마나 믿음직한 말입니까? 그냥 얼굴만 보아도, 믿음이 뚝뚝 흐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나으리?
아자개 허허허. 그래요, 그래요. 이러니까 이름이 그렇게 나지. 왕건이라....좋은 이름이야.
음, 이름도 좋아....
왕건 그렇게 친송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상부어른께 드리고자, 귀한 선물을
몇 가지 가져 왔사옵니다. 받아 주시오소서.
왕건이 눈짓을 하면, 함께 온 군사들이 예물을 들어 올린다. 그것은 진기한 유리 그릇들과
양탄자, 비단들이다. 아자개 내외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아자개 세상에........이렇게 귀하고 많은 선물을 가져왔단 말인가?
계모 아이구, 이쁘기도 해라. 이 유리그릇은 먼 바다를 건너온 것일텐데, 비단도 그렇고 이
옥노리개도 좀 보시어요, 나으리.
박술희 대주낭자께 드릴 찻잔도 가져왔사옵니다. 모두 그것은 당나라의 명공들이 만든 자기라
하옵니다.
대주 내것은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도록 하시오.
박술희 대주 낭자, 우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제발, 웃는 모습을 좀 보고 싶은 것
이 이 박술희 최대의 소원입니다.
대주 .........
박술희 낭자.....
계모 그렇게 하거라, 대주야. 우리에게는 큰 손님이 아니냐?
아자개 그래야지, 아, 오매불망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냐? 억지로 그렇게 화내는 척 안해
도 된다. 우리는 이제 적이 아니야. 나는 이 사람들의 상부가 되었지 않았냐? 상부, 상
부, 아버지 말이다.
대주 ............(아무 표정이 없다)
아자개 아, 무엇들 하느냐? 손님 상을 차려야 할 것이냐? 악공들도 부르고, 술도 좀 가져오
고....자, 이리들 앉게, 이리들 앉아요.
씬 26 충주 관아
유금필과 능산이 금식과 마주 해 있다.
금식 (지형도를 보며) 백제의 공직 장군과 방장군이 이끄는 군사는 너무 많소이다. 전략상
으로 중요한 곳도 다 차지하고 있고....
유금필 그렇소이다. 그래서, 답답한 것이오.
능산 좋은 방안이 있겠소이까, 금장군?
금식 비록 백제의 군사들이 조령과 죽령을 다 차지했다고는 하나 그것을 너무 겁낼 필요는
없소이다. 나와 우리 군사들은 이곳 지리에 상당히 밝소이다.
두사람 ........(끄떡인다)
금식 정공법보다는 후방의 교란 작전을 쓰는 것이 더 낫습니다.
능산 어떻게 말입니까?
금식 이곳 지리에 밝은 우리 군사들과 마진의 군사들을 소수로 나누어 저 험한 산 준령을 은
밀히 넘어 낙동강 기슭에서 반대로 저들을 치는 것이외다.
유금필 그것이 가능하겠소이까?
금식 가능합니다. 이곳 지형과 지리에 밝지 않으면 어려운 전술이지요. 낙동강 전선을 도모
할 수 있다니 곧 신라를 갈 수 있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해 볼만한 모험이지요.
유금필 (끄떡인다) 우리 총사께서 돌아오시면, 이 일을 폐하께 보고하도록 하십시다. 소생도
해 볼만한 전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뜻밖에 큰 원군을 만나 너무도 든든하오이
다, 금장군.
금식 별 말씀을..... 그나저나, 여기서 듣기로는 철원의 인심이 상당히 좋지 않다고 들었는
데, 사실이오이까?
능산 허허, 글세요. 우리야 전선에 나와있는지 오래된터라 어디 아는 게 있어야지요?
유금필 서둘러 황궁을 짓고, 농사마저 망쳤다 하니... 백성들이 아마도 고단하겠지요.
끄떡이는 금식의 표정에서.........
씬 27 황궁 외경(밤)
씬 28 동 대전
전의가 손을 떨며 눈치를 보면서 궁예를 진맥하고 있다. 종간이 그 옆에서 보고 있다.
궁예 허허허, 내원께서 그토록 권해서 의원을 보이기는 하오만은 뭐 별일이 있겠소이까?
종간 그래도, 보셔야 하옵니다. 폐하께서 강건하셔야, 이 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옵니다.
궁예 하지만, 이렇게 억지로 의원을 데리고 와서야.... 내가 그만큼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
소이까? 허허허....
종간 그래도, 끝까지 물리치지 아니 하시고, 신의 청을 가납하여 주시니 망극하옵니다, 폐
하.
궁예 어쩌겠소이까? 내원께서 그토록 이 사람을 생각하여 강권하는 것을.... 그리고, 그렇
게들 걱정을 하니 보기는 한 번 보아야 겠어.
전의는 진맥을 보며 이미 병세를 다 안 듯, 종간을 보다가 궁예를 보기를 반복한다. 뭔가 할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두 사람이 막 진맥을 끝내고 있는 전의를 본다.
궁예 별일이 없다니까 그러네.
종간 (전의에게) 어떠한가? 환후가 있으신 겐가, 없으신 겐가?
전의 그게, 저....... (말을 못한다)
궁예 허허허, 아무 일 아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안 그런가 전의?
전의 그.........그렇사옵니다.
종간 아무 일이 없다? 그런 것인가, 전의?
전의 (말을 더듬고 식은 땀을 흘리며) 그..... 그러하옵니다. 별...... 별일은 아니옵니다.
궁예 하하하하, 그렇다니까 그러네 글세. 내가 무슨 병이 있겠어? 내가..........(갑자기
헉하며 말을 멈춘다)
종간 폐하.......?
궁예 .............. (계속 고통스럽다)
종간 폐하...............? (전의에게) 너는 폐하께서 아무 일이 없다고 하였다? 어찌된 일
이냐? 폐하께 이리 괴로워하시지 않느냐? 어찌된 일이야? 왜 바른 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야?
전의 그것은 저........(다시 눈치를 보며) 그것은 저.........
궁예 (전의를 보며 엄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아무 일이 없다. 그렇지 않느냐, 전의?
전의 그, 그러하옵니다, 폐하.
궁예 (간신히) 물러...가거라... 어서.
전의 예, 폐하.
전의가 급히 도망치 듯 물러난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그제서야 종간은 눈치를 챈다. 궁예는
더욱 힘들어하며 가슴을 잡고 있다.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는다. 궁예의 의식이 흐려졌다,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그 가슴의 고동소리가 가득한 공포와 불안으로 이어진다.
종간 폐하.......? 폐하........... 어찌 된 일이시옵니까? 폐하께서는 분명 환후가 있으시
옵니다. 신에게 무엇을 숨기시는 것이옵니까? 저 전의는 왜 말을 못하는 것이옵니까,
폐하?
궁예 ..............물러 가오... 물러..........가오.......
종간 폐하....? 신에게도 말씀하시지 못할 것이 있으시옵니까? 폐하....?
궁예 물러가오...... 아무 일도 없어. 물러가......
궁예는 모질게 입을 앙 다물며 그렇게 말한다. 가슴에 고동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런
궁예의 모습을 보고 있는 종간의 표정에서...
< 78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