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80회>
씬 1 철원 황궁 외경(낮)
황궁 주변으로 황량한 겨울 바람이 불어 치고 있다. 어느 때나 다름없
이 내군들의 경계는 삼엄하다. 바람 소리는 극성이다. 카메라 디졸브
되면...
씬 2 동 황궁 뜰
수많은 전각들 사이로 상궁 내관들이 오가고 있고, 내군들이 경계를
서며 지나치고 있다. 카메라 그 중 어느 높은 정자를 잡으면 그곳에
궁예가 보인다.
씬 3 동 정자
정자 밑으로 많은 내관과 상궁들이 허리를 숙여 서있다. 궁예를 모시
는 금대와 장일도 그곳에 군사들과 함께 보인다. 궁예는 망중한을 즐
기듯 황궁의 먼 곳들을 훑어 보고 있다. 거센 겨울 바람이 뜰에 나뭇
잎들을 훑어 가고 있다. 그 바람소리들.....
궁예 겨울이로구나. 어느새 겨울이야. 인생이나 계절이나 오고 가
는 것은 어김이 없구나.
궁예는 그렇게 한동안을 서있다. 그러다가, 문득 대전내관에게 묻는
다.
궁예 오늘 신료들이 든다고 하였느냐?
내관 예, 폐하.
궁예 그래, 그렇다면 조당에 갈 준비를 해야 겠구나....(사이) 그
옛날에도 말이다 아주 추웠던 겨울에 이 철원에 들어왔었지.
내관 ........그러하셨사옵니까, 폐하?
궁예 아주 대단했었지. 삼한의 많은 백성들이 나 미륵을 보려고 몰
려들었었어. 허허... 그런데, 나는 오늘 또 여기에 와있단 말
이야. 황제가 되어 가지고 말이지.
대전내관은 대꾸가 없다. 궁예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궁예 (정자를 나서며) 이곳 철원에 백성들이 많이 힘들어 한다지?
내관 소인 같이 천한 것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궁예 저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꿈이 없기 때문이야. 배가 고프고,
춥고, 힘들어도 미륵인 나를 믿고 따르면 다 행복할 것인
데.... 그것들을 모르거든. 얘야, 내관.
내관 예, 폐하.
궁예 너는 나를 믿느냐?
내관 어인 말씀이시온지....
궁예 내가 미륵으로 보이느냐 하는 말이다?
내관 이를 말이옵니까? 폐하께오서는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대 미
륵이시옵니다.
궁예 그래, 그래..허허...헌데, 딱한 것들이 그것을 모른단 말이
다. 그래서, 내가 신료들을 불렀다. 관심법으로 좀 보려고 말
이야.
내관 .........
궁예 신료들이 들어오려면, 아직 한참이 걸릴게다. 오늘 궐 안이나
좀 더 걸어 보자꾸나.
내관 예, 폐하. 얘들아, 폐하를 뫼시어라.
내관들 일제히 대답하며 앞서간다. 대전내관이 가까이 따라 붙고, 금
대와 장일들이 내군들과 함께 경계하며 간다.
씬 4 왕건의 집 외경
씬 5 동 집 마당
두 부인이 막 차림을 하고 나서고 있는 왕식렴을 배웅한다.
유씨 도련님, 왜 갑작스럽게 조회를 연다 하시옵니까?
왕식렴 저같은 사람이 어찌 알겠습니까? 어쨌든 갑작스레 부르시니,
가보아야지요.
오씨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옵니까?
왕식렴 글세올습니다. 듣자하니, 폐하께오서 직접 영을 내려 급히 이
루어진 조회라 하옵니다.
오씨 매사를 조심하시오소서, 도련님. 이곳 철원에 온 이후로 조정
에 모든 일이 하나같이 불안하고 위태 위태하옵니다.
왕식렴 하하하,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요즘에는 그저 귀를 막고, 입
을 닫고 있으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안전하옵니다.
오씨 아시면 되었습니다. 장수장, 어서 앞서 뫼셔 가게.
장수장 예, 마님.
그들이 나가자, 유씨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린다.
유씨 이보시게, 아우님. 왜 폐하께서 갑자기 조회를 연다하시었을
꼬?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나는 그저 폐하의 말씀만
나오면 가슴이 두근두근 한다네.
오씨 호호호, 형님은 늘 걱정을 사서 하십니다. 서방님은 전선에
나가 계시옵니다. 이렇게 사정이 안 좋을 때에 황도를 벗어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옵니까? 이 철원의 사정이 더욱 더
악화되고 있다고 하옵니다, 형님.
유씨 나도 들었네. 어쩌면 좋은가, 아우님?
오씨 그저, 지켜 볼 수 밖에요.
씬 6 철원 저자 거리
대소신료들이 들고 있다. 백성들이 지나치는 그들을 보고 있다. 유장
자와 박지윤 부자들이 가고 있고, 장자1,2의 뒤를 이어서 입전, 신방
그리고 임충길들이 가고 있다.
박지윤 (유장자에게) 갑작스럽게 조회를 여신다하니, 왠지 불안하오
이다.
유장자 뭐가요?
박지윤 아, 폐하께서 조회보다 법회를 먼저 여신다고 하지 않으셨소
이까? 그런데, 뜬금 없이 조회를 여신다니요?
유장자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비록 신료들의 윗자리에 있다고는 하
지만, 아는 게 있어야 대답을 드리지요. 나도 왜 조회를 갑자
기 여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소이다.
박지윤 허허, 대체 왜 갑자기 우리를 부르셨을꼬?
유장자 가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때, 저만큼 아지태가 지나가다가 이들을 보며 아는 채를 한다.
아지태 허허, 광치나 어른이 아니시오이까?
유장자 오랜만이구료, 내봉령.
아지태 박장자께서도 참으로 오랜만이올시다. 요즘 어찌 지내십니까?
박지윤 그럭 저럭 잘 지내고 있소이다. 많이 바쁘셨다 봅니다.
아지태 폐하께서 자주 찾으시니, 바쁠 수 밖에요. 자, 어서들 가십시
다. 어흠...
유장자가 인상을 찌푸린다. 그들 그렇게 가면....
씬 7 황궁 황후전 복도
진내관과 내관들, 상궁들이 서있고.
연화 (E) 조회를 여신단 말인가?
씬 8 동 황후전 안
연화가 제조상궁에게 묻고 있다.
연화 언제 그런 영을 내리셨다던가?
제조 어제 영을 내리셨다하옵니다.
연화 갑자기 무슨 일이실꼬? 법회를 여신다고 하셨는데....
제조 지금 신료들이 모두 궁으로 들고 있사옵니다. 아마도 중요한
말씀을 하시기 위해 대소신료들을 모이라 한 것이 아니겠사옵
니까?
연화 그렇기는 하시겠지만... 헌데, 슬이야. 진내관은 어디 갔는
가?
슬이 밖에 있사옵니다.
연화 좀 들라고 하여라.
슬이가 대답하고 나간다. 그 사이에 다시 묻는다.
연화 이보게, 제조상궁.
제조 예, 황후마마.
연화 내가 알아 보라고 한 그것은 어찌 되었는가? 의원 말일세. 이
곳에서 나간 이후로 소식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제조 그렇사옵니다.
연화 이상하지 않느냐? 늘 옆에서 폐하를 보좌해야 할 어의가 밑도
끝도 없이 사라져 버리다니...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제조 여러 곳으로 은밀히 알아 보았으나, 알길이 없었사옵니다. 내
원에 불려 갔다가, 밖으로 나갔다고는 들었사오나....
연화 왜 그리 되었을꼬? 왜 소식이 없을꼬....폐하에 대해서 좀 더
알아 볼 것이 많은데....
그때, 진내관이 들어선다.
진내관 불러계셨사옵니까, 황후마마?
연화 나는 황궁 바깥의 소식을 진내관에게 자주 알려달라고 하였
어. 폐하께서 갑작스럽게 조회를 여시는 까닭이 무엇인가?
진내관 소인이 어찌 알겠사옵니까만은....
연화 말해보게.
진내관 아마도, 법회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신료들을 나무라시기
위해 조회를 여시는 것 같사옵니다.
연화 그걸 진내관이 어찌 아는가?
진내관 황후마마께오서 폐하의 주변을 늘 염려하시는고로, 사람들을
붙여 놓았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어제 밤 내봉성령 아지태와
내원을 부르시어, 심히 꾸중을 하셨다 하옵니다.
연화 법회 때문에 말인가?
진내관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곧바로 조회를 열라 영하셨다 들었사
옵니다.
연화 (긴 한숨) 폐하께서는 여전히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는가?
진내관 그런 것으로 아옵니다. 주무시다가도 몇 번씩 깨어나시어, 독
한 소주를 드신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독한 소주를...?
진내관 예, 마마. 그리고, 고통을 애써 참고 계신다 하옵니다.
연화 그러기에 전의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고 한 것이야. 그 자는
무언가를 내게 숨기고 있었어. 그리고, 그 자도 갑자기 사라
져 버렸어.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그런가, 진내관?
진내관 ...........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황후마마, 대부인께서 드셨사옵니다.
연화 드시라 하여라.
백씨가 웃으며 들어선다.
백씨 나으리께서 조회에 참석하시는 길에 같이 왔습니다. 황후마
마, 요즘은 좀 어떠시옵니까?
연화 어떤 일이 뭐 있겠사옵니까?
백씨 이제서야 나라가 좀 안정이 되는가 보옵니다. 드디어, 폐하께
오서 조회를 여시지 않사옵니까?
연화 글세옵습니다.
백씨 아이고, 제발 그래야지요. 요즘은 어디를 가나 힘들다는 사람
들 뿐이고...
연화 ........
씬 9 내원
종간이 수북한 장계를 일일히 보며 고뇌에 잠겨 있다. 그러다가, 허공
을 보며, 한숨을 계속 쉰다. 은부,염상,박유가 마주해 있다.
은부 신료들이 조당에 거의 다 들었사옵니다.
종간 .........
염상 내원어른께서도 가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종간 그래야겠지. 이 장계들을 보게나. 전국 곳곳에서 모두다 한
결같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들이야. 이번 겨울은 참으로
춥고도 기네 그려.
은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박유 소생도 보았습니다. 이곳 철원 뿐만 아니라 여러 지방 고을들
이 대부분 식량이 바닥나고, 얼어 죽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고 들었사옵니다.
종간 .........
박유 법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옵니다. 오늘 같은 조회에서 실은 이
러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논해야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종간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염상 조금 전까지도 황궁 뜰을 산보하시다가, 조회에 납시기 위하
여 조당으로 향하셨다 하옵니다.
종간 그렇다면, 우리도 어서 가세.
씬 10 조당 앞 마당
소리 황제폐하, 납시오!
내군들이 도열하여 끝도 없이 서있다. 대소신료들이 화려한 차림으로
동남동녀를 앞세우고 오고 있는 대 미륵 궁예를 보고 있다. 아지태도
종간도 그리고, 유장자, 박지윤, 복지겸들도 모두들 보고 있다. 강장
자와 장자1,2들도 그리고 입전,신방, 임충길 들도 모두 보인다. 왕식
렴과 박수문, 박수경 형제도 보인다. 궁예가 이들 곁을 지나며 천천히
안으로 든다. 모두들 허리를 숙이며......
씬 11 동 조당 안
신료들이 배석해 앉았고, 궁예가 옥좌에 앉았다. 조당 안은 숨소리 하
나 없이 조용하다. 궁예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관심법을 하고 있다.
카메라는 긴장해 있는 신료들의 면면을 훑어 다시 궁예에게 간다. 한
참 시간이 흐른 뒤에 궁예가 서서히 눈을 뜬다. 그리고, 또 그들을 하
나하나 본다. 그럴 때마다 신료들은 불안해한다.
궁예 경들은 들으오.
모두들 예.....
궁예 내가 지금 한동안 입정하여 가만히 관심법으로 보았소이다.
모두들 ..........
궁예 관심법이 무엇인가? 나의 마음으로 경들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야. 그렇게 읽어서 보았는데.... 도대체, 경들이 이 나라의
벼슬아치들인지, 아니면 뒷간의 똥막대기인지.... 그걸 알 수
가 없단 말이야. 그대들의 머리 속은 하나같이 똥으로 가득
차 있어. 똥 말이야.
유장자며 박지윤들이 흙빛이 된다. 종간도 표정이 굳고, 박유도 그렇
다.
궁예 미륵인 나는 달리려고 하는데, 너희 똥막대기들이 쫓아 오지
를 않아. 이 말을 알아 듣겠는가? 알아 듣는가 하는 말이야?
모두들 ...........
궁예 나는 그대들에게 육자진언인 옴마니반메홈을 외우게 함으로써
극락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어. 그리고, 대 법당을 세우고
고승대덕들을 불러 법회를 열자고 하였는데, 소식이 없어. 이
보시오, 광치나.
유장자 예, 폐하.
궁예 어쨌든 그대는 벼슬아치 중 가장 우두머리야. 짐의 영이 왜
서지를 않는 것인가? 왜?
유장자 (긴장하며) 송구하옵니다, 폐하. 여러가지로 독려는 하고 있
사오나,
궁예 (실성한 듯 한참 웃는다) 독려라고 하였는가? 독려...?
유장자 망극.....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나는 이 나라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온 미륵이야. 이 인간
세계를 저 불국정토로 인도해 갈 미륵이란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경들이 미련하게 그것을 몰라. 그러니까 나라가 이 모
양이 아닌가 말이야? 법회라는 것은 국가의 안녕과 그대들 자
신을 지옥에서 구하기 위한 것이야. 그런데, 왜 이리 지체하
고 있는가? 왜?
아지태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료들이 미련하여 아직도 폐하의 진심
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이들은 지금의 조회보다도 법회의 자
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큰 것인지 모르옵니다. 용서하시고, 다
시 한 번 기회를 주시옵소서.
궁예 바로 그것이야. 잘못을 알고, 빌 줄 아는 것이 내일의 발전
을 위한 지름길이야. 왜 모두 이렇게 솔직해지지 못하는고?
왜? 내 잠시 더 관심법으로 보아야 겠구먼. 과연, 누가 이 조
정에서 도태되어야 할 것인지... 누가 쓸모 없는 허접 쓰레기
인지 말이야.
궁예는 다시 관심법을 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모두들 그렇게 긴장해
있다. 침묵이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모두들 마른 침을 삼키고 있다.
그때다. 어느 구석에선가 마른 기침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시선이 그
리로 향한다. 궁예가 그 외눈을 번쩍 뜬다.
궁예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관료1 신......신이 옵니다, 폐하. (다시 마른 기침)
궁예 (한참 뚫어져라 보다가) 참으로 딱하구나. 지금 짐이 관심법
을 하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가 있느냐, 이 미련한 것
아?
관료1 소..송구하옵니다, 폐하. 용서하시어 주시오소서.
궁예 내가 가만히 보니, 네 놈 머리 속에는 마군이가 가득 차 있구
나. 쯧쯧.... 여봐라, 내군은 들어라.
내군들 예........
궁예 저 자의 머리 속에는 마군이가 가득하다. 그 마군이를 때려
죽여라.
종간 ...........?
유장자 폐하.....
궁예 염부장은 무얼 하는가? 어서, 저 자를 쳐라.
염상 폐하.....
궁예 (벌떡 일어나며) 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저 놈은 마군이야.
저 놈을 죽이란 말이다. 저 놈을.... 장부장 네 놈은 무얼 하
느냐? 저 마군이를 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장일 예, 폐하.
장일은 그대로 철퇴를 빼고 들어가 관료에게 다가간다. 모두들 경악해
서 보고 있다.
장일 폐하의 영이시니라 눈을 감아라.
관료1 사...살려 주시오소서. 살려 주시오소서, 폐하...살려 주시오
소서.
장일이 주변을 훑어 보더니 그대로 철퇴를 두어 번 내려 친다. 신료들
이 눈을 감는다. 비명 소리와 함께 관료1이 쓰러져 절명한다. 장일의
철퇴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흐르고 있다.
궁예 나는 송악에서 이곳으로 오기 전에 분명히 말하였어. 그대들
모두 철퇴를 기억하라고 말이야. 시체를 치워라.
금대 예, 폐하. 어서, 시체를 치워라.
시체가 치워지는 장내는 계속 얼어 붙어 있다. 궁예가 옥좌에서 내려
와 신료들 앞을 이리저리 훑어 보며 걸어다닌다.
궁예 문제는 정신이야. 얼마나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
하느냐 하는 것이지. 이보시오, 광치나.
유장자 예, 폐하.
궁예 내원을 도와주시구료. 그래서, 조속히 법회를 여시오. 알겠소
이까?
유장자 예, 폐하.
궁예 내원은 들으셨소이까?
종간 예, 폐하.
궁예 박장자께서도 들으셨소이까?
박지윤 예, 폐하.
궁예 어떠한가, 병부령도 들으셨는가?
복지겸 예, 폐하.
궁예 다들 들었는가?
모두들 예, 폐하. 망극하옵니다.
궁예 (옥좌에 다시 올라가 앉으며) 짐의 말은 곧 법이라 하였다.
경들이 짐의 말을 잘 이행하지 못하면, 곧 법이 무너지는 것
이야. 나의 관심법에 걸려들지 않도록들 하라. 그대들의 인생
이 끝나는 것이야. 알겠는가?
모두들 망극하옵니다.
궁예 그대들의 목숨을 중히 여기라는 말이야. 중히....(하다가, 가
슴을 부여 잡는다, 고통스럽다) 알겠는가? 중히....
종간 (이미 눈치 채고 다가와) 폐하....
모두들 ..........
궁예 (애써 참으며) 이번의 법회는 황궁의 법당이 아니라 밖에서
열 것이야. 황궁 밖에서... 야단법석(野壇法席)으로 열 것이
야.
궁예는 더욱 고통스럽다. 외눈을 부릅뜨며 가슴으로 손이 간다. 종간
이 눈치 채고 얼른 소리 지른다.
종간 폐하께서 주관하시는 조회가 끝이 나셨소이다. 그만 모두들
돌아가시오. 모두들 돌아들 가시오.
궁예는 애써 위엄을 찾으며 앉아 있고, 신료들은 길게 대답하며 허리
를 숙인다. 번뜩이는 종간의 그 매서운 표정과 궁예의 독한 모습에서
디졸브 되면....
씬 12 철원 시가지(석양)
씬 13 박지윤 집 사랑(밤)
박지윤과 두 아들이 함께 해 있다. 한동안 모두들 서로를 보며 말이
없다.
박지윤 폐하께서는 옛날의 모습이 아니시다.
박수경 그렇사옵니다. 마치 사람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나찰같았사옵니다.
박수문 소자가 보기로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박지윤 맞아. (도리질 하며) 정상이 아니야. 그렇고 말고.... 문제는
일부러 저리 하시는지 아니면, 정말로 사람이 달라진 것인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야.
박수경 조회가 끝날 무렵 폐하께서는 상당한 고통을 참는 듯한 표정
이셨사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서둘러 내원이 막았사옵니다.
뭔가가 있는 듯하옵니다, 아버님.
박지윤 그러게 말이다. 우리 모두 조심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그렇고 말고....언제 그 놈의 관심법에 걸려 들지 모를 일이
아니냐?
공포에 어린 박지윤의 표정에서.....
씬 14 왕건의 집 마당
씬 15 왕건의 집 사랑
왕식렴과 유장자, 그리고 왕건의 두 부인이 함께 해 있다.
유씨 세상에..... 조당 안에서 신료를 때려 죽였단 말씀이시옵니
까, 아버님? 세상에...
오씨 폐하께서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실 수가....
유장자 아무래도 한동안 피바람이 계속 될 것 같은 조짐이 든다. 이
럴 때일수록 모두 조심하고, 몸을 잘 보존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야. 아니 그런가, 사돈?
왕식렴 그렇사옵니다, 광치나 어른.
유장자 내가 오늘 퇴청 길에 이리 들린 것은 앞으로의 정국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세. 사돈은 왕장군이 없는 이
집안의 어른일세. 모쪼록 폐하의 눈에 크게 뜨이지 않도록 하
시게.
왕식렴 알겠사옵니다, 광치나 어른.
유장자 사돈하기에 따라서 전선에 나가 있는 왕장군도 그 거취가 영
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탁을 하는 것이야.
오씨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옵니다. 이 살얼음판 같은 정국에 언제
내원 같은 사람이 또 술수를 부리고, 서방님을 함정에 몰아
넣을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유장자 아무튼, 조심 또 조심들 해야 할 것이야.
왕식렴 명심하겠사옵니다. 소생이 생각하여도 참으로 불안하고 무서
운 정국이옵니다. 낮에 그 일을 생각하면, 등에 식은 땀이 나
옵니다.
유장자 조심해야지, 그저 조심해야지.
씬 16 아지태의 집 사랑
아지태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입전, 신방, 임춘길 들이 아지태의
눈치를 보고 있다.
입전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어떻게 조당에서 그런 일을.....
아지태 ............
신방 무서운 일이 아니옵니까? 눈 하나 깜짝 않으시고, 신료를 죽
이셨사옵니다.
임춘길 어르신께서 폐하의 그 일을 어찌 생각하시옵니까?
아지태 중증이실세. 폐하께서는 지금 중한 환후를 앓고 계시는 게야.
임춘길 그렇사옵니까?
아지태 모두들 오늘 보았을 것이야. 그리고, 느끼고들 있을 게야. 언
제든 자신들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일세. 폐하께서
는 칼을 드셨네. 그 칼로 어디를 치실까 하는 것은 이 아지태
만이 알 수가 있지. 나만이 알 수가 있어........
씬 17 황궁 외경
금대, 장일들의 내군들이 곳곳에 경계를 서고 있다.
씬 18 황궁 내원
종간이 은부, 박유, 염상과 함께 생각에 잠겨 있다.
은부 결국, 법회에 관한 일은 내원 어른께 다시 돌아왔사옵니다.
종간 .........
은부 폐하께서 저리 서두르시고, 엄히 하시니 아무래도 우리 내군
역시도 강공책을 써야겠사옵니다.
종간 어떻게 말인가?
은부 강제로라도 이름 있는 승려들을 잡아 올리고, 각 사찰들을 지
방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일일이 감찰하라 이르겠사옵니다.
염상 이미, 그리하고 있사옵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별로 움직이고
있지 않고 있사옵니다.
종간 그래도 상당수의 승려들이 이곳 철원에 와 있다고 하였는
데....
박유 소생이 듣기로는 그 승려들은 폐하께오서 말씀하시는 큰 스님
들이 아니라 하옵니다.
종간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문제는 법회가 아니야. 폐하께서
환후를 앓고 있다는 것이지.
박유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서는 그 눈빛마저 달라지셨사옵니다. 예
전의 폐하가 아니시옵니다.
종간 (큰 한숨) 병이시오. 오늘 조당에서 그리 하신 것도 다 병 때
문이시오. 폐하는 지금 환후 중이시오. 그것을 고쳐 드려야
하오.
염상 어떻게 말이옵니까? 지난 번 죽은 그 전의도 이미 불가하다가
말하지 않았사옵니까?
종간 .......... 그래도, 고쳐 드려야 하네. 방법을 찾아 보아야
지. 갈수록 더 하실 게야. 나는 그것이 두려워. 이보시오, 박
학사.
박유 예, 내원어른.
종간 다시 한 번 도와주셔야겠습니다. 그 금강산 도인 말입니다.
어떻게 다시 모셔올 방법이 없겠소이까?
박유 글세올습니다.
종간 그 도인이라면 폐하께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소이다. 한
번 더 힘을 써주시구료. 박학사께서 힘을 좀 써봐 주시오.
박유 산천을 벗 삼아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옵니다. 이번에도
또 와줄지는 자신이 없사옵니다.
종간 박학사께서 직접 가보시구료. 직접 좀 가봐주시구료.
박유 알겠사옵니다.
그들 모두 한숨을 쉰다. 종간은 도리질을 한다. 그 모습에서....
씬 19 산길(낮)
석총이 걸어 오고 있다. 눈바람이 모질게 몰아 친다. 어느 만큼 걸어
가는데 계곡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허월 이보시게, 거기 오고 있는 땡초는 석총이 아닌가?
석총 (보다가) 허허허, 누군가 했더니 허월 늙은이로구먼 그래. 이
추운 날씨에 거기서 무얼 하는가?
허월 땡초가 온다기에 기다리고 있었네.
석총 내가 오는 지를 어떻게 알았는고..?
허월 허허허, 자네가 있는 절의 주지가 사람을 보냈네. 아무래도
길을 떠날 때 심상치 않았다는 게야.
석총 허허, 그자가 괜한 짓을 하였구먼. 아직도 절 밥을 덜 먹은
모양이야. 오고 가는 것에 무엇을 그리 연연해 한단 말인가?
그들은 그렇게 가까워진다. 허월이 웃는다.
허월 어디로 가는 겐가?
석총 이 근처 절에 자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보고 갈 참
이었네. 아랫 쪽으로 유람을 가는 길일세.
허월 아무래도, 죽으러 가는 게로군. 그런 겐가?
석총 예끼, 죽다니? 끝없이 윤회하는 이 세상일세. 영원히 죽을 수
만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가? 그렇지 못하니까 탈이지. 술
한잔 하겠는가?
허월 허허, 좋지. 내가 있는 절집으로 갈까?
석총 아닐세, 그렇게 되면 시간이 너무 없어. 저 아래 저자거리로
가서 한 잔 하세나. 갈 길이 바쁘이.
허월 정 그렇다면 그리 하세나. 어차피 옷을 벗으려고 작정한 땡초
가 뭐가 그리 성급하단 말인가? 가세.. 나도 동무 삼아 자네
따라 가려네.
석총 허허, 그렀다면 아주 반가운 일일세. 어차피, 혼자 가기 적적
했네 그려.
그들 그렇게 길을 간다.
씬 20 저자 거리 주막
두 노승이 탁주를 마시고 있다.
허월 이보게, 석총. 말을 들으니, 자네는 스승의 간자를 들고 나왔
다지?
석총 쯧쯧.... 그 어리석은 것이 그 말까지 하던가?
허월 진표율사의 간자는 이 나라의 중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일세.
자네가 그것을 들고 절을 떠났다는 것은 엄청난 것을 의미하
네.
석총 .........(술을 마신다)
허월 (자신도 마시며) 아래쪽으로 간다고 하였는데, 어디로 가는
겐가?
석총 허허허, 이보게 허월 대사. 한소식 했다는 중이 왜 이렇게 궁
금한 것이 많은가?
허월 나도 부처님의 제자이고, 그대도 또한 그러하네. 누구보다도
자네는 미륵 부처님을 모시는 종파의 어른일세. 그리고, 희대
의 선승이셨던 진표율사의 법제자이고...... 도대체, 그 분께
전해 받은 그 간자를 가지고 어디로 가는 겐가?
석총 스승께서 여러 대를 걸쳐 전해 내려주신 간자를 가지고 내가
산문을 떠났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허월 그러니까 묻는 것이 아닌가?
석총 미륵을 따르고 모시는 제자가 스승의 간자를 가지고 갈 곳이
딱히 어디 있겠는가? 바로 이 시대의 참 다운 미륵이 아니겠
는가?
허월 (놀라며) 그 미륵이 누구인가? 자네가 생각하는 그 미륵말일
세.
석총 허허허. 정 궁금하면 나를 따라 오세나. 이미 본 것이 있고,
들은 것이 있고, 정한 곳이 있어서 나선 길이네. 자, 술이나
드시게.
석총은 맛있는 듯 술잔을 벌컥 벌컥 들이킨다. 허월은 그런 석총을 의
아해서 보고, 그런 그들의 표정에서....
씬 21 부감, 산야
부감으로 보여오는 험준한 산길을 몇 몇 무리들이 삼삼오오 등짐을 지
고 넘고 있다. 아득한 그들의 모습을 산 어느 곳에서 왕건과 세 가신,
그리고 금식, 태평이 보고 있다.
금식 장군, 말씀 드린 대로 엄선된 우리 수하들이 여러 곳에서 적
의 후방으로 침투하고 있사옵니다.
왕건 (멀리 가고 있는 그들 보며) 저들이 안전하게 백제군의 후방
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만은...
금식 허허, 그 점은 염려를 놓으시옵소서. 이 근변의 지리를 손바
닥 보듯 하는 자들이옵니다. 이제부터는 장군의 영을 기다릴
뿐이옵니다.
유금필 주군, 저들이 각자의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는 이삼일이 소
요되옵니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에 여러 곳에서 일제히 백제
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사이에 우리 주력군을 움직여야 하옵
니다. 여러 가지 정황이 너무 급박한 것 같사옵니다만은..
왕건 허지만, 그 방법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네.
능산 백제군의 공직장군이 조령에 있고, 방장군이라는 자가 죽령에
있다 하옵니다. 어느 곳을 먼저 치실 것이옵니까?
왕건 우리는 똑같은 방법을 쓸 것일세. 그 옛날 견훤 왕이 우리에
게 썼던 그 방법 말이야. 조령을 치는 척하면서, 죽령을 칠
것이야.
박술희 그것 참 좋은 방안이옵니다. 금장군의 수하들이 적의 후미 여
러 곳에서 상황을 어지럽게 만드는 사이에 우리는 정면에서
조령으로 몰려가는 척하며 죽령을 친다는 말씀이 아니옵니까?
왕건 그렇다네. 일전에도 이야기를 하였지만, 전공석화처럼 빠르게
밀어 부쳐야 해. 다행히 죽령 근처 고창군에 우리 연결 통로
가 남아 있으니, 해볼만한 일일세.
금식 그러하옵니다. 이제 이틀 남았사옵니다. 그동안 소장의 군대
를 일부만 조령에 남겨 놓고 나머지 모두를 죽령 쪽으로 이동
시키겠사옵니다.
태평 낮에 이동하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적군도 척후병들을 풀어
놓고 있사옵니다. 밤에 군사를 은밀히 옮기시오소서.
금식 옳은 말이야. 저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야. 저 험준
한 산준령들을 이 겨울밤에 우리 군사들이 넘는다는 사실을
말이야.
태평 이번 전쟁은 적을 얼마나 안심시키고 속일 수 있는 가에 달려
있사옵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아주 순조롭게 되어 가고 있
는 것 같사옵니다.
금식 자, 장군, 유장자 어른께오서 충주 쪽에 하루 편히 쉬실 온천
을 보아 두셨다 하옵니다. 지금 그리로 가셔야 할 것 같사옵
니다.
왕건 그 온천 이야기는 나도 들었사옵니다. 허나, 많은 장졸들이
이 추위에 고생을 하고 있는데, 어찌 나만 그곳에서 편히 쉴
수 있겠소이까?
금식 장수가 쉬는 것은 편안하고자 함이 아니옵니다. 보다 중요한
내일을 위해서가 아니옵니까? 장자 어른께서 특별히 청하시는
것이니, 가보시지요.
박술희 그리하시오소서, 주군. 아마도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지 않
사옵니까?
태평 그리하시오소서.
왕건 허허, 이것 참.....
씬 22 충주 온천(밤)
주변이 온통 설경으로 어우러져 있다. 그 한 켠에 노천 온천이 가득히
흰 김을 품어 올리고 있다. 왕건과 유긍달이 술자리를 함께 하고 있
다. 수인이 하녀와 함께 술 시중을 들고 있다. 안주를 놓고 술을 준비
해 주며 뒤로 물러난다.
유긍달 이곳은 뜨거운 물이 사철 솟아오르는 충주의 온천이올시다.
오늘은 가볍게 한 잔 드시고, 푹 쉬십시오, 장군.
왕건 많은 전쟁터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온천 구경은 처음이옵니
다.
유긍달 장군께서는 충주에 오래 계시지 않았사옵니까?
왕건 물론 그렇사옵니다만은 온천에는 온 일은 없었사옵니다. 허
허...
유긍달 (끄떡이며) 그것은 그만큼 왕장군께서 사사로이 개인의 편안
함을 도모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
오이까?
왕건 허허, 그리 말씀하시니 부끄럽사옵니다.
유긍달 자, 드시지요.
왕건 예.
그들 술을 마시며, 한동안 김이 솟는 온천을 보다가 유긍달이 다시 말
을 잇는다.
유긍달 장군,
왕건 예, 장자어른.
유긍달 내 금장군에게 다 들었습니다. 백제군의 공략할 준비가 잘 되
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왕건 그 모두가 장자 어른에 도움이옵니다. 오늘의 이 은혜를 폐하
께 상주하여 반드시 그 보답을 받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유긍달 하하, 한때 받는 상 따위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올습니다.
왕건 예?
유긍달 내가 오늘처럼 이렇게 손발을 걷어 부치고 나선 것은, 왕장군
께서 이 충주 고을은 물론이오, 우리 가문에 앞날까지도 책임
을 져줄 분이기 때문에 그리 한 것입니다.
왕건 무슨 말씀이시온지...
유긍달 수인아!
수인 예, 아버님.
유긍달 이리와 장군께 한 잔 따라 올려라.
왕건 아니, 저....
그러나, 수인은 대답하며 다가와 술을 따른다. 왕건이 황급히 받는다.
유긍달이 웃고 있다.
유긍달 왕장군,
왕건 예, 장자 어른.
유긍달 참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는 세상이올시다. 앞으로
이 삼한의 정국이 어찌 될 지 과연 누가 삼국을 통일할 것인
지, 그리고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현실이
올시다.
왕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대미륵이신 우리 황제 폐하께오서 삼한
의 주인이 되실 것이옵니다.
유긍달 (진지하게) 왕장군, 과연 그렇다고 보십니까?
왕건 예?
유긍달 마진국의 수많은 백성이 유리걸식하거나 얼어 죽고 있소이다.
철원황궁은 무리한 공역으로 만들어진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
이올시다. 우리가 어찌 그분께서 진정한 삼한의 주인이 되리
라 믿겠습니까?
왕건 .......
유긍달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장군을 보아 왔소이다. 그리고, 그 인
품을 살펴 보았고, 오늘에 이르렀소이다. 내가 장군을 돕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 가문을 길이 맡기기 위함이오.
왕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유긍달 청이 있소이다. 내 딸을 받아 주시겠소이까?
수인 ..........
왕건 (놀라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장은 부인이 있습니다.
그것도 어쩌다 보니 둘이나 되옵니다.
유긍달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이까? 단순한 부부지연을 위해서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이것은 서로가 살기 위해 드리는 간곡
한 청이올시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왕건 장자 어른, 그 말씀만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사옵니다. 소장은
이미 장자어른의 신세를 졌고, 또 그것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따님의 이야기는.......
유긍달 왕장군, 더 이상의 사양은 우리의 호의를 물리치는 것으로 밖
에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이번 전쟁을 포기하실 참입니까?
왕건 장자 어른......
유긍달 이번 뿐만 아니라 이 난세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많은 가문들
이 앞으로도 수없이 장군께 청혼을 해 올 것입니다. 우리도
그 중에 하나 이올시다. 당장 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
람의 뜻을 받을 용의가 있는 가, 하고 물은 것입니다.
왕건 장자 어른.....
유긍달 수인아 무얼 하느냐? 낭군이 되실 분이시다. 술 한 잔 더 따
라 올려라.
수인 예, 아버님.
왕건 허허, 낭자. 낭자...허허, 이 일을 어이 할꼬... 이 일을....
씬 23 인서트
달빛이 밝다. 산 속과 맛 닿은 계곡의 어느 곳을 삼삼오오 짝을 이룬
금식의 특별 부대원들이 지나쳐 가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 이곳 저곳
에서 그렇게 멀어져 가면....
씬 24 충주 관아
세 장수가 긴장하여 서로를 보고 있다.
유금필 금식 장군의 군사들이 이미 상당수가 산과 계곡을 지나, 후방
으로 잠입했네. 우리들도 군사들 준비해야 할 것이야.
능산 이미 그리하고 있사옵니다.
박술희 우리 군사들 일부가 조령 쪽에 불을 놓고 요란하게 공격하는
척 하는 사이 금식 장군과의 연합군이 죽령을 공격할 것입니
다.
태평 주군의 깃발을 여러 개 만드시오소서.
유금필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태평 주군께서 조령에도 계시는 것처럼 하고, 죽령에도 또한 계시
는 것으로 하면 적들이 당황할 것이옵니다.
능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유금필 ........(끄떡인다) 알겠네. 자, 주군이 오실 때까지 각자의
군사들을 잘 단속하게.
모두들 예....
씬 25 사불성(아자개의 성)
씬 26 동 성 안
아자개가 고개를 외로 꼬고 있다. 계모와 대주, 용개, 보개가 함께 해
있다.
아자개 거 참 이상하단 말이야. 왕건이라는 장수가 온지 꽤 되었는
데, 아직도 전혀 싸울 기미를 보이지 않고 조용히 있단 말이
야.
계모 싸움도 형편과 때를 보아서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지금이야,
견훤이 군사들이 워낙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그러는 것이겠
지요.
아자개 그렇다고 해도 너무 조용해.
대주 뭔가 꿍꿍이 들어 있을 것이옵니다.
용개 산세는 험하고 높은 데다가, 엄동설한의 겨울이옵니다. 군사
를 움직이려면 아마도 해동이 된 삼월은 되어야 할 것이옵니
다.
아자개 허긴.... 그렇기는 허다. 눈 쌓이고 얼어 붙은 저 험한 산준
령을 어떻게 많은 군사들이 넘어 올 수가 있겠느냐? 그러고
보면, 이 겨울은 아주 조용하게 생겼다. 음, 조용하겠어.
씬 27 죽령 방장군의 성 외경
씬 28 동 성 안
방장군이 부장들과 어울러 술을 마시고 있다. 조금은 취했다.
방장군 글세, 공직 장군은 이 방장군을 아주 어린애 취급을 한단 말
이야. 만날 때마다 조심, 조심 그놈의 조심 소리는 원.....
부장1 공장군께서는 역전의 노장이 아니시옵니까? 장군을 아끼시어
그리 하시는 것이지요.
방장군 아, 그래도 그렇지. 나도 하나의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가 아
닌가 말이야? 자네들도 생각해 보게. 저 얼어붙은 철벽같은
산맥을 어느 놈이 넘어 오겠는가 말이야. 이런, 쯧쯧.... 자,
술이나 마시세. 그저 술이나 실컷 마시면서 이 겨울을 편안히
나는 것이야. 암.......
씬 29 전주 황궁 외경
씬 30 동 황궁 대전
견훤과 최승우가 마주해 있다.
견훤 신료들 모두가 금성을 치자고 한다 그말이지?
최승우 예, 폐하.
견훤 허긴, 그 이야기는 내가 먼저 꺼냈네. 마땅히 또 그리 할 때
도 되었고. 사실 말이지, 그 금성을 빼앗기고 난 이후 너무
답답해졌어. 우리가 추진해오던 오월국과의 교류도 아주 어렵
지 않은가 말이야.
최승우 사실이 그렇사옵니다.
견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아우 수달 장군의 면목을 세워 주어야
해. 내 그 아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 그 금성을 잃고 나
서부터 사람이 안절부절 제 정신이 아니야.
최승우 알고 있사옵니다.
견훤 막혀 있는 오월국과의 교류도 다시 뚫어야 하고 또 내 아우의
체면도 되찾아 주고.... 금성을 도모해야겠어. 신료들과 잘
의논해서 서둘러 보세나, 파진찬.
최승우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해설 금성! 지금 견훤이 말하고 있는 오월국과의 외교 관계 이야기
는 참으로 의미가 깊다. 견훤은 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면서
일찍부터 중원의 오월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고, 나라와 황제
자리를 인정 받았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교류를 하며 그 입지
를 넓혔던 과거와 무관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견훤은 궁예
보다 앞서서 일찍부터 외교에 눈을 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에 금성, 즉 나주를 빼앗기면서부터 그 통로를 방해받아
답답해하고 있는 것이다.
견훤 아무튼, 파진찬이 알아서 잘 준비하고 서둘러 보게. 금성은
반드시 되찾아야 해.
최승우 예, 폐하.
견훤 그 왕건이라는 장수가 지금 상주에 있다는데, 공직 장군과 방
장군에게 특별히 유의하라고 이르게. 절대로 만만히 보지 말
고 방비를 철저히 하라고 말이야.
최승우 예, 폐하. 두 장군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옵니다. 참으로 왕건
이라는 장수는 우리 군 모두가 조심을 해야 할 것이옵니다.
견훤 맞아,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야.
씬 31 충주 온천
왕건이 생각에 잠겨 있다. 유긍달이 잔에 술을 채운다. 그 한켠에 여
전히 수인이 함께 해 있다.
유긍달 밤이 상당히 깊었구료. 한 잔 더 드시구료.
왕건 (받으며) 고맙사옵니다.
유긍달 나는 곧 폐하께 이 충주 전선의 사실을 별도로 전해 올릴 것
이외다. 그리고, 내가 장군께 청한 혼사 문제를 재가 받으려
하오이다.
왕건 말씀드렸지만, 그 일만은 대답 올리기가 참으로 어렵사옵니
다.
유긍달 왕장군의 대답을 듣자는 게 아니라, 폐하의 재가를 받자 하는
것이외다. 아시겠소이까? 장군께서는 난처하실 터이니 말입니
다.
왕건 그렇습니다. 참으로 당혹스럽사옵니다. 철원에 있는 부인들에
게 어떻게 이런 일을 허락 해 달라고 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그리고, 또 주변에서는 뭐라 하겠사옵니까?
수인 .........
유긍달 하하하, 진정한 장부는 아무리 많은 부인을 두어도 책을 잡히
지 않는 법이올시다. 일단 이야기가 나왔으니, 모든 건 이 사
람에게 맡겨주시구료.
왕건 난감합니다. 참으로 난감한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시옵니다.
유긍달 난감할 것 없소이다. 수인아, 한 잔 더 따라 올려라. 그리고,
장군께 온천욕을 해드릴 준비를 하거라.
수인 예, 아버님.
바로, 그때이다. 수인이 술병을 드는데, 밖에서 왁자한 소리들이 들린
다.
소리 여기가 어딘줄 알고 이 소란인고? 장군께서는 아니 계신다고
하지 않는가?
석총 (E) 다 알고 물어 물어 왔소이다. 중요한 일이니 뵙게 해주시
구료.
두사람 .......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 어허, 물러가래도....?
유긍달 웬 소란이냐?
그때, 군사들의 제지를 물리치며 석총이 들어선다. 왕건이 놀란다.
왕건 아니, 석총대사가 아니시옵니까? 이 밤중에 여기까지 어인 일
이시옵니까?
유긍달 ...........?
석총 하하하, 어인 일이냐고 물으셨소이까, 장군?
왕건 그렇사옵니다. 어인 일로 여기까지......?
석총 미륵을 찾아 왔소이다. 가짜 미륵이 아닌, 참 미륵을 찾아 왔
소이다. 참 미륵 말이오이다.
왕건이 놀란다. 유긍달, 수인도 모두 놀란다. 석총은 웃고 있다.
< 80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