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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대본

[태조 왕건] 85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7.11.17|조회수2,199 목록 댓글 0

태조 왕건 <제 85회>




씬 철원 황궁 대전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궁예가 강렬한 눈빛으로 아지태를 보고 있다. 여전히 그들 사이에 보검이 놓여 있다.

궁예 자, 아학사.

아지태 (두려워하며) 예, 폐하.

최응 ........(담담히 보고 있다)

궁예 다시 한 번 묻겠소이다. 아직도 이 보검이 필요하오? 그렇다면, 가져가시구료. 얼마든지 내 드리리다. 자, 어서.

아지태 폐하..... (당황하며) 아, 아니옵니다, 폐하. 보검 없이도 할 수 있겠사옵니다. 노력해 보겠사옵니다.

궁예 핫하하하....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오. 그래야지. 사실 말이오.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제일 미련한 것이 힘이오. 완력이란 말이오,

아지태 .......

궁예 그런데도 나는 어쩔 수 없이 힘을 내세웠소이다. 왜냐,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내가 칼을 들었는데, 다른 사람까지 칼을 들어서야 어찌 되겠소이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외다.

아지태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방금 우리가 진시황과 한나라의 한비자 이야기를 하고 있었소이다. 그 중 팔간편(八姦篇)이라는 것을 보면, 신하가 행동을 잘 못하는 여덟 가지 유형을 설명하고 있소이다.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외워보거라.

최응 예, 폐하. (담담히 읊조린다) 한비자는 신하가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는 여덟 가지를 이렇게 말했사옵니다. 그 첫째 잘못은 임금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다. 둘째는 임금의 측근에 있는 것이다.

아지태 .......

궁예 ......?

최응 (계속) 그 세 번째는 부형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 네 번째는 임금의 향락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 다섯 번째는 무지한 백성들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 여섯 번째는 유창한 말을 사용하여, 미혹하는 것이다. 그 일곱 번째는 권세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 여덟 번째는 이웃나라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사옵니다.

궁예 어떻소이까? 그럴듯하지 않소이까?

아지태 참으로..... 그렇사옵니다, 폐하.

궁예 계속하거라, 최응아. 이번에는 황제가 어떻게 하면 잘못되는 가를 듣고 싶구나.

최응 예, 폐하. 한비자의 십과편(十過篇)에 보면, 이렇게 말했사옵니다. 황제가 잘 못 되는 그 첫 번째는 하찮은 충성에 흡족해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작은 이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세 번째는 편벽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정치에 힘을 쓰지 않고,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탐욕을 내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여자의 교태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일곱 번째는 나라를 떠나서 멀리 여행하는 것이다. 여덟 번째는.....

궁예 여덟 번째는 충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자기 힘을 모르고 남을 믿는 것이다. 열 번째는 나라가 작으면서, 무리한 짓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소이다. 이 중 중요한 것은 아홉 번째요, 자신의 힘을 모르면서 남을 믿는 것이다.

아지태 ........

최응 .......

궁예 한비자는 참으로 기가 막힌 걸물이었어. 세상 이치를 손바닥 보듯이 보았단 말이야. 돌아가오. 가서 열심히 해주시구료.

아지태 예, 폐하.

궁예 나는 관심법을 쓸 줄 안다고 하였소이다. 그것은 즉 대소신료들은 물론이고 이 세상 구석구석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이오. 지금 이 나라에는 오로지 단결을 필요로 하오. 내원과도 잘 지내시오. 그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사람이오.

아지태 예, 폐하.

궁예 그리고, 곧 충주 전선에 나가 있는 왕건 장군이 돌아올 것이오. 경은 언젠가 그 왕장군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적이 있었소이다. 그렇소이다. 지금 이 나라에 기둥은 나와 그리고 왕장군이오. 경이 왕장군과 잘 지내기를 바라오.

아지태 예, 폐하.

궁예 돌아가보시오. 할 일이 많을 것이오. 참으로 많을 것이오.

아지태 망극하옵니다, 폐하.

아지태는 다시 부복하여 엎드린다. 궁예가 껄껄껄 웃고 있다. 그러면서, 아지태를 보는 그 눈이 경계심으로 번뜩인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씬 내원 외경

은부 (E) 내원어른, 염부장을 병부로 좌천시켰사옵니다.

씬 동 내원 안

종간과 은부가 마주해 있다. 종간은 눈을 감고 듣고 있다.

은부 그동안 염부장은 여러가지로 흔들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사옵니다. 물론, 공도 많았사오나, 앞으로의 일들이 염려되어, 병부로 보냈사옵니다.

종간 (끄떡인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는데....

은부 목숨을 거둘까하다가 지난 정이 있어, 그대로 두었사옵니다.

종간 .......

은부 그리고, 여기..... (서찰을 내놓는다) 박학사가.... 떠났사옵니다.

종간 (놀라며) 무슨 소린가? 학사 박유 얘기인가?

은부 그러하옵니다, 내원어른.

종간 금강산으로 가지 않았는가? 그 도인을 뫼시러 말일세.

은부 떠나기는 그렇게 떠났사오나, 실은 여기 이렇게 글을 남기고 갔사옵니다.

종간 무슨 이야기인가? (서찰을 빼앗듯 들어본다) 박학사가, 박학사가 갔단 말인가? 이런 세상에.... (읽는다)

박유 (E) 내원어른, 소인 박유는 도저히 이 무거운 현실을 감당키 어려워 산으로 돌아가옵니다.

씬 인서트

박유가 산길을 걷고 있다. 그 위로 그의 소리가 계속된다.

박유 (E) 내원어른께서는 지금의 황제폐하를 뫼시고, 제국을 건설하신 분이옵니다. 내원께서 계심으로써 오늘의 폐하가 존재하시게되었사옵니다. 그 분은 분명 이 암울한 현실을 구하실 미륵이셨사옵니다. 하오나, 욕심이 그 분의 앞길을 막았고, 눈을 흐리게 하였으며 몸을 병들게 하였사옵니다. 소인은 폐하께서 앓고 계시는 병을 잘 아옵니다. 이루실 꿈은 크고 많은데, 혼자서 가실 길이 답답하여 생기신 병이옵니다. 그 병이 후유증을 낳아, 피를 보시기 시작하셨고, 백성들을 고통과 죽음 속에 몰아 넣기 시작했사옵니다. 지금 내원께서는 그 병을 어찌 고치실까 전전긍긍하시옵니다. 하오나, 약으로 될 것이 아니고, 도인의 기로써 고칠 병이 아니옵니다. 소인이 마지막으로 한 말씀 올리옵니다. 이 난국을 타계할 사람은 지금 돌아오고 있을 왕건 장군일 것이옵니다. 그 분과 손을 잡으시고, 뜻을 세우시오소서. 아마도,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왕장군 뿐일 것이옵니다. 산으로 돌아가며 드리는 이 박유의 간절한 청이옵니다.

씬 현실

종간이 와락 서찰을 꾸겨 쥔다.

종간 가다니? 이렇게 가버리다니.... 내가 박학사를 잘 못 보았구먼. 한때는 저 아지태 같은 간신을 밀어내겠다고 이 조정에 온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힘이 좀 든다고 제 멋대로 가버려?

은부 (눈치를 보다가) 박학사는 내원어른과 폐하를 의지했던 사람이옵니다. 이미 많은 현실과 사정들이 달라져 버렸사옵니다. 폐하께오서도 다른 분이 되셨고....

종간 (긴 한숨) 그렇구먼. 사람들이 떠나고 있어. 염부장도 가고.... 그토록 의지했던 박학사도 가버리고, 사람들이 떠나고 있어. 사람들이.....

은부 두렵사옵니다.

종간 ........?

은부 사람들이 떠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옵니까?

종간 (사이) 아니야, 그렇다고 두려워해서야 될 일인가? 그만큼 우리 할 일이 많아지는 것 뿐이야. 더욱 강하게, 단단하게 조여야 할 게야.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폐하께서 사시는 길이고. 하지만, 나를 보고 왕건이와 손을 잡으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어떻게 왕건이와 손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왕건이와 말일세?

은부 .......

종간 그렇게는 안돼. 박학사를 찾도록 해. 군사들을 보내서, 박학사를 찾아보아.

은부 내원어른.....

종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박학사만이 우리의 뜻을 따라주었네. 그만한 사람이 없어. 찾아야 하네. 속히 찾도록 하게.

은부 예, 내원어른.

씬 황후전 복도

연화 (E) 태자궁에 일을 보던 박유가 떠났다는 말입니까?

씬 동 황후전 안

연화가 강장자 부부를 보고 있다. 그 옆에 진내관,제조상궁,슬이들이 서있다.

연화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버님?

강장자 오는 길에 들었사옵니다, 황후마마. 내군의 군사들이 금강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박유가 서찰을 남기고 떠났는데 그를 찾으러 간다 했사옵니다.

연화 세상에.... 그나마, 그 사람이 지난 날 폐하를 살려드렸고, 또한 우리 두 태자의 교육을 맡아 오지 않았습니까?

백씨 왜 아니겠습니까, 황후마마? 그런데, 무엇이 못마땅해서 그렇게 떠났을꼬?

강장자 아무리 높은 벼슬살이도 제 싫으면 그만이지만, 이번 일은 전혀 엉뚱해요. 왜, 도망치듯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단 말씀이에요.

연화 (생각하다가) 환멸을 느낀 것이겠지요.

강장자 환멸이라니요?

백씨 그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황후마마?

연화 지금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박학사 같이 지각 있는 사람이 어찌 그 현실을 모르겠습니까? 독재와 독선과 피가 난무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강장자부부 마마.....

연화 그만큼 많은 공부를 하고 세상사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 곳에 오래 있고 싶겠습니까? 이보게, 진내관.

진내관 예, 황후마마.

연화 좀 더 알아봐주게나. 박학사 일도 그렇지만, 앞으로 우리 태자들은 그럼 어찌 되는 것인지, 좀 알아봐주게.

진내관 예, 마마.

연화 (한숨) 자네, 제조상궁도 특별히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뜨게나. 그리고, 대전 쪽 일과 조정이 어찌 돌아가는 지를 좀 살펴봐.

제조상궁 예, 마마. 신명을 다하겠사옵니다.

연화 (백씨들에게) 두 분께서도 지난 번 말씀드렸듯이, 매사를 조심스럽게 사시어요.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폐하께서는 누군가를 찾고 계십니다.

두사람 .........(두려움)

연화 그 관심법 말입니다. 누구든 거기에 걸려들면 살아 남기 어렵습니다. 내가 황후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장자 하긴.... 옳은 말씀이옵니다, 마마. 신료들도 모두 하나 같이 전전긍긍하고 있사옵니다. 내군에서 그렇게 날뛰던 염부장 그 사람도 지금은 쫓겨나서 병부로 내려갔다 하옵니다.

백씨 그렇습니까?

강장자 그저, 몸을 움추리고 이 바람이 지나갈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처세지요. 암요.

씬 병부 외경

씬 동 병부 안

복지겸과 염상이 마주해 있다. 염상이 고개를 조아린다.

염상 병부령 어른, 그동안 소장이 내군에 있으면서 적지 않은 만용을 부렸사옵니다. 소장의 뜻이 아니었으니, 헤아려 주시오소서.

복지겸 허허허, 뭐 그렇게까지 사과를 할 것은 없소이다. 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병부는 내군보다는 그 힘이 약한 부서올시다.

염상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군인으로써 폐하의 측근에 있기 보다, 병부에 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어떠한 영이든 내려주시면 기꺼이 따르겠사옵니다.

복지겸 전선은 넓고, 또 많은 장수들을 요구하고 있소이다. 나도 이 병부령의 자리에 얼마나 있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올시다. 그때까지라도 잘 해 봅시다. 아무튼, 잘 오셨소이다.

염상 흔쾌히 받아주시니, 참으로 황공하옵니다, 병부령 어른.

복지겸 무슨 말씀을.... 너무도 어려운 정국이올시다. 잘해보십시다.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씬 아지태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아지태가 생각에 골똘해 있다. 입전, 신방, 임춘길 들이 마주해 있다. 아지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임춘길 대전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사옵니다만은...

아지태 그랬지. (도리질하며) 역시 폐하께서는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니야.

임춘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아지태 그리고, 그 어린 아이 말일세. 최응이라고 하였든가?

입전 이야기 들었사옵니다. 그 어린 신동 말이옵니까?

아지태 대단했어. 그 어렵고 방대한 경서들을 줄줄이 외고 있었어. 아무튼, 이 아지태가 한방 크게 맞았네 그려.

신방 무슨 일이 있었사옵니까?

아지태 허허허, 내가 폐하를 한 번 시험해보았었네. 역시 폐하께서는 아직도 그 총기가 여전하셨어. 물론, 비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직도 폐하는 멀쩡하셨어.

임춘길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아지태 나는 폐하께서 병이 깊어지시면서 발작 증세가 심하다고 생각했었지. 이렇게 되면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 가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단 말일세.

입전 그래서, 어찌하셨사옵니까?

아지태 무섭고, 섬찟한 일이었어. 폐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한비자의 말 중 십과편을 인용하면서, 그 중 중요한 것은 아홉 번째라고 하셨다네. 자신의 힘을 모르면서 남을 믿는 것이다.....(사이) 즉, 누구도 믿지 않는다. 이 아지태도..... 그런 말씀이셨어.

모두들 그렇사옵니까?

아지태 폐하께서는 이곳으로 오시면서부터 달라지셨네. 나는 그 정도를 확인하고 싶었지. 그리고, 확인하였네. 그 분은 영원히 혼자 가실 분이야. 그리고, 우리는 소모품에 불과해. 필요할 때마다 쓰였다가 언젠가는 버려지는 소모품 말이야.

모두들 .........

아지태 허허, 그러나 이 아지태는 아니되지. 절대로 정신병이든 광인에게 끌려 다니는 어릿광대 노릇은 아니할 것이야. 암.... (사이) 이제 곧 왕건 장군이 온다네. 조정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질 것이야.

생각하는 아지태의 표정에서...

씬 왕건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오씨, 유씨가 왕식렴 형제와 함께 마주해 있다. 모두들 분위기가 무거워 보인다.

왕신 형님께서 또 다시 혼례를 올린다 하시니, 좀 마음이 착잡하옵니다.

왕식렴 나라에서 명 하신 것일세. 또한, 현지의 사정이 그러하고.

왕신 두 분 형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사옵니까?

왕식렴 물론, 그러하시겠지. 허나, 이보게 신이 아우.

왕신 예, 형님.

왕식렴 우리 형제는 그저 형님의 일을 이해하고 따라야 하네. 자네도 조정에 부름을 받고 왔으니, 자네 일이나 빈틈없이 잘 하게.

왕신 이를 말이옵니까? 제가 당나라에 한동안 있다왔다 하여 사대에서 일하라는 명을 받았사옵니다.

왕식렴 사대는 외국말을 가르치는 곳일세. 잘 하여야 할 것이야.

왕신 예, 형님. 제 일은 알아서 하겠사옵니다만은 두 분 형수님이 걱정이 돼서....

오씨 그렇게 걱정까지 하실 것은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유씨 하지만, 아직도 나는 안 믿어지네, 아우님.

왕식렴 형수님들께서 다 이해를 하셔야 하옵니다. 저는 세 번째 형수님께서 오신다면 과연 이 집안이 어찌 될 것인가, 그것이 더욱 궁금하고 걱정이 되옵니다.

오씨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서방님께서 결정하신 일이고, 나라에서도 권한 일입니다. 누가 원망을 할 것이며, 또 섭섭해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형님?

유씨 그렇기는 하네만은...... 그냥 아무 정신이 없네, 아우님. 서찰 내용 대로라면 지금쯤 한참 혼례를 올리고 계시겠구먼. 세상에.....

씬 충주 유긍달의 집 별원

마당에는 사람들로 넘치고 있다. 잔치상들이 수없이 오가고 있고, 그 한쪽으로는 손님으로 오고 있는 수많은 호족 장자들이 보인다. 그리고, 또 그 문 밖으로는 군사들도 수없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윤신달과 전이갑 형제가 군사들을 정리하고 있다.

전이갑 대오를 갖추어라. 의장 병대는 이쪽으로 서라. 총사께서 혼례를 올리시는 날이다. 악대는 무얼 하느냐? 저쪽으로 서라.

전의갑 대오를 갖추어라. 위엄을 세워라, 뭣들 하느냐?

씬 동 집 수인의 방

수인이 수모들에 의해 옷단장을 하고 있다. 부끄러운 듯 이리저리 동경을 보고 있다. 수모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수모 아씨, 선녀가 따로 없사옵니다. 어쩜 이렇게 이쁘실까.... ?

수모1 왕건 장군께서는 복도 많으시옵니다. 충주의 미인을 부인으로 맞으시다니요. 얼마나 큰복이시옵니까, 아씨?

수인 .......(부끄럽고)

씬 동 집 사랑

유장자와 금식이 차를 마시며, 웃고 있다.

금식 대단하옵니다, 장자어른.

유긍달 대단해야지. 이 유긍달이의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 아닌가?

금식 밖에 근변의 호족 장자들이 구름처럼 밀려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유긍달 호족 장자들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그래야지.

금식 왕총사의 수하 장수들이 의장병대를 늘어놓고 있사옵니다. 장자 어른께서는 혼례를 평범하게 치루신다 하셨는데,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옵니다?

유긍달 다 이유가 있네 그려. 혼례를 크게 하려는 것보다도, 손님을 맞기 위해 그리들 하는 것일세.

금식 예? 손님이라니요?

유긍달 중요한 손님이 오실 것일세. 오늘 의식에 있어서, 최고의 귀빈이 오실 게야.

금식 예? 아니, 신랑 신부 말고 누가 최고의 귀빈이라는 것이옵니까?

유긍달 그런 일이 있네. 곧 알게 될 걸세. 그러고 보면, 그 왕장군의 군사로 있는 태평이라는 사람 말일세. 참으로 뛰어난 혜안이 있어. 오늘 같은 기회를 이처럼 절묘하게 쓸 줄을 알다니, 대단한 사람이야.

금식 예? 대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유긍달 곧 알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 우리도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네 그려.

금식 그런데, 한참 바빠야 할 집사장이 아직도 아니 보이옵니다?

유긍달 귀빈을 맞으러 갔으니, 아니 보일 수밖에...헌데, 왕장군은 준비가 끝이 났는가 어쨌는가 모르겠구먼.

금식 그 왕장군도 참으로 복이 넘치는 사람이옵니다. 아주 여복이 넝쿨 채 들어오는 사람 같사옵니다. 허허허....

씬 동 별원 일각

왕건이 막 옷을 다 차려 입었다. 혼례복 차림이다. 주변에서 유금필과 능산, 그리고 태평이 보고 있다.

유금필 허허허, 주군, 지금 심경이 어떠하시옵니까?

왕건 사람하고는 어떠하다니? 무얼 묻는 겐가?

유금필 소인은 주군을 만나 뵙기 전에, 시골에 내자를 두고 왔사옵니다. 그것은 여기 능산 아우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왕건 그런데..... ? 말하자면, 자네들은 제수씨들의 얼굴을 언제 보았는지 기억조차 없는데, 나는 장가를 세 번씩이나 간다, 해도 너무 한다 지금 그 말 아닌가?

능산 하하하, 그렇사옵니다, 주군.

왕건 그렇다면, 자네들도 또 가지 그러는가?

유금필 그런 말씀 마시오소서. 여자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홀가분 한 줄은 몰랐사옵니다.

왕건 예끼, 이사람들아, 거짓말 하지 마시게. 이런 능청들 하고는.....

모두들 와하고 웃는다. 그러다가, 왕건이 이상한 듯 태평을 본다.

왕건 이보게, 태평군사.

태평 예, 주군.

왕건 왜, 아직도 술희 아우가 아니 보이는 것인가? 전선을 돌아보러 갔다면서 아직도 아니 왔는가?

그러자, 유금필, 능산이 멈칫하며 태평을 본다. 태평이 미소 지으며 말한다.

태평 예, 주군. 곧 도착할 것이옵니다. 자, 서두르시오소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왕건 그리하세.

씬 동 별원 마당

이미 사람들로 가득하다. 열려진 문 밖으로 도열해 있는 윤신달 등의 의장 병대들이 일부 보인다. 마당은 소란스럽다. 혼례상을 사이에 두고, 이미 수인이 기다리고 있다. 왕건이 나오자, 우~ 하는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가까이 가는데, 자꾸만 문 밖을 보던 유긍달이 말한다.

유긍달 아, 아. 아직 오실 분이 도착을 아니하셨소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다.

호족1 아니, 누가 올 사람이 더 있다고 그러시오이까?

유긍달 그런 분이 계시오이다. 방금 전 기별을 받았는데, 다 오셨다고 합니다.

왕건 .......?

태평 (소근거린다) 주군, 실은 지금까지 말씀을 드리지 못하였사옵니다. 박술희 부장이 사불성에서 아자개 상부를 모셔오고 있사옵니다.

왕건 뭐라고?

태평 일의 결과가 확실치 않아, 말씀을 못드렸사옵니다만은, 다행히도 아자개님께서 쾌히 허락을 하여 지금 이리로 오고 있다 하옵니다.

바로 그때이다. 집사장이 급히 문 밖에서 달려 들어와 예를 올리며 아뢴다. 유긍달의 눈이 크게 떠진다. 태평들과 왕건들도 보고 있다.

집사장 나으리, 오셨사옵니다. 지금 문 밖에 오고 계시옵니다.

유긍달 오, 그런가? (큰소리로) 사벌주에서 귀인이 오셨소이다. 아자개님이 올시다.

왕건 .......

유긍달 자, 왕장군 나가서 손님을 맞세.

씬 동 문 밖

아자개 일행이 박술희를 앞세워 들고 있다. 아자개, 계모,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대주와 용개,보개, 그리고 군사들이 오고 있다. 수많은 기치창검을 든 왕건의 의장병대들이 그들을 맞고 있다. 소라 소리가 울리고, 대북 소리가 진동하고 있다. 윤신달과 전이갑 형제들이 소리치며 예를 올린다.

윤신달 아자개 상부께서 드신다! 제장들은 예를 올려라.

모두들 (군호를 합창한다) 충!충!충!!....... (계속)

대단한 환영이다. 소라와 북소리에 이어, 수많은 깃발들이 일제히 숙여 지며 예를 올린다. 아자개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들을 보고 있다. 감동이다. 아자개는 감격하고 있다. 그것은 계모도 마찬가지이다. 왕건과 유긍달이 문 앞에서 이들을 맞는다. 장자, 호족들도 일제히 나와 맞는다. 아자개는 백마 위에서 흐뭇하게 이들을 본다. 장졸들의 군호 소리는 여전히 메아리 치고 있다.

아자개 ......... (감격에 말을 못하고.)........

대주 ........ (냉정하다)

왕건 어서 오시오소서, 상부 어른.

아자개 (주변을 설레서 보며) 이 많은 장졸들이..... 이 아자개를 맞을 줄은 몰랐네 그려. 왕장군, (사이) 이렇게 열렬히 나를 환영해 줄줄은 몰랐어.

왕건 상부께오서 누구시옵니까? 전 사벌주를 관장하시는 분이시고, 또한 수많은 장자, 호족들 위에 군림하시는 영웅 중에 영웅이시옵니다.

아자개 내가? 영웅...........?

유긍달 그러하옵니다, 어르신. 이곳 충주의 호족 유긍달이는 오래전부터 왕장군을 통하여 어르신을 흠모하고 있었사옵니다. 이렇게 뵈오니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아자개 (목에 힘이 들어간다) 나도 그대의 이야기는 듣고 있었소. 허지만, 이렇게 청해 줄줄은 몰랐소이다.

계모 나으리, 이분들이 진정으로 나으리를 존경하고 뫼시는 것 같사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러한 대접은 처음 받는 것 같사옵니다.

아자개 아무튼 고맙소이다. 그리고, 왕장군.

왕건 예, 상부 어른.

아자개 상부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왕장군의 아버지이고, 맏형 같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왕장군이 그것을 청했고, 내가 그것을 받아 들였어. 우리는 이미 남남이 아니야.

왕건 그러하옵니다, 상부어른. 어서 안으로 드시오소서.

아자개 이보게, 술희.

박술희 예, 상부어른.

아자개 좋은 날이로다. 날씨도 좋고, 사람들 인심 또한 좋구나. 모두들 이 아자개를 그토록 생각하는 줄은 몰랐구먼. 아, 기분 좋도다. 마치, 오늘은 이 아자개의 날 같구나. 자, 들어들 갑시다.

일제히 예......

아자개가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간다. 거들먹거리는 그의 표정은 마치 황제와도 같다. 그 일각에서 태평이 미소 짓고 있다.

씬 동 집 마당

혼레집사 (크게 왼다) 합근분치..... 서부지전..

혼례집사가 길게 목청을 빼며 외면,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며 환호를 한다. 유장자가 대추를 던지고, 닭을 날린다. 사람들이 또 와 웃는다. 아자개도 보고 있다가, 대추를 던진다. 계모도 기분이 좋아 웃고 있다. 대주는 냉랭한 표정이고, 용개와 보개는 다소 풀어져 재미있는 듯 웃는다. 박술희가 그러한 대주를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대주는 다시 그 시선을 외면한다. 박술희는 아쉽다. 아자개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아자개 좋은 한쌍이로다. 내가 일찍이 왕장군을 보고 느낀 것이 있었소이다. 사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영웅이라고 하지만, 나는 늙었소이다. 진짜 영웅이 여기 있소이다. 장군 중에 장군이오, 사내 중에 사내이올시다. 아니들 그렇소이까?

모두들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맞습니다.

계모 정말 기가 막힌 한 쌍 같사옵니다.

혼례집사 자, 신랑 신부 합근례..............

그러자, 수모들이 술잔을 왕건에게 주었다가, 마시고 나면 다시 신부에게 준다. 사람들이 우하고 웃고, 탄성을 지른다. 대주가 보고 있다. 그 일각에서 계모와 아자개가 말한다.

계모 아이고, 우리 대주도 어서 짝을 맞춰주어야 할 것인데.... 이러다가, 처녀 할미 만들겠사옵니다, 나으리?

아자개 처녀 할미? 아니, 박술희가 있는데 왜 처녀 할미가 돼?

계모 아, 우리 대주가 어디 받아들여야지요. 아이고, 보기 좋다. 신랑 신부가 참 보기 좋습니다, 나으리.

아자개 그러게 말이오. 나도 한 번 더 가봤으면 좋겠네 그려.

계모 예, 아니 나으리?

그때, 유긍달이 말을 걸어온다.

유긍달 귀인께서 이렇게 왕림을 해주시니, 오늘의 혼사가 더욱 빛이 나옵니다. 앞으로도 우리 충주와 사벌주가 오래 오래 서로 화목하게 지냈으면 좋겠사옵니다.

아자개 암, 화목해야지. 아, 웃고 살아야지. 우리는 말이오, 영원히 중립을 선포했소이다. 아, 웃고 살날도 모자라는데, 왜 싸워? 아니, 그렇소, 유장자?

유긍달 이를 말이겠습니까? 그 말씀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아자개 (술을 마시며) 참 오랫동안 여러 번 여기 머루주를 마셔 왔소이다. 술 맛 한 번 기가 막힙디다. 오늘도 마셔 볼 참이오. 온천도 하고, 푹 쉬어가야겠소이다.

유긍달 이를 말씀이시옵니까? 그리하시오소서. 어르신을 뫼실 모든 준비가 다 끝났사옵니다.

아자개 허허허,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그 한쪽으로 혼례가 끝나, 두 신혼부부를 혼례집사가 어른들을 향해 절을 시키고 있다.

혼례집사 신랑, 신부, 배례...............

왕건과 수인이 절을 올린다. 유긍달과 아자개가 받고 있다.

아자개 암, 암.... 참으로 기가 막힌 한쌍이다. 이번이 세 번째라고 하였든가, 왕장군, 세 번째가 맞아?

계모 (옆구리 찌르며) 나으리....

아자개 아, 어때서? 본래 영웅호걸은 그런 것이거든... 하하하....아, 술 맛 좋다. (마시며) 정말 좋다. 그만들 가봐. 아, 힘들겠어 들.

유긍달 그래, 그만들 가보게.

혼례집사 자, 의식이 끝났소이다. 광대들은 풍악을 울려라.

왕건과 수인이 수모들에게 인도되어 가면서, 그 뒤로 탈을 쓴 처용무 광대들이 춤을 추며 등장한다. 준비된 십수명의 악대들이 가야금을 켜기 시작한다. 마당은 곧 흥겨운 그들로 가득해진다.

아자개 드십시다, 들어요. 아, 참 술 맛 좋다.

유긍달 그토록 마음에 들어하시니, 참으로 다행이옵니다. 술은 얼마든지 있사옵니다. 마음껏 드시오소서.

아자개 마셔야지, 암, 마셔야지. 허허허, 기분 좋다.

사람들의 면면이 지나쳐 간다. 금식과 세 가신과 태평과 장수들과 그리고 대주와 그 형제들도 또한 수많은 장자들의 표정이 지나친다. 잔치 마당은 풍요롭다. 그 중심으로 마당 가득히 더욱 질탕해지는 아악소리와 광대들의 춤사위에서 디졸브.....

씬 다시 동 집 외경(밤)

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집안에서는 여전히 흥겨운 소리들이 들려온다.

씬 동 집 마당

모닥불이 타고 있다. 무녀들의 무희가 화사하게 펼쳐지고 있다. 아자개는 여전히 히히덕 거린다. 취한 것이다. 계모와 둘이서 무엇이 좋은지 그렇게 깔깔거린다. 장수들도 취했고, 세 가신도 얼큰해 보인다. 무희들이 물러나고, 곧 이어 검무가 이어진다. (수박치기나 씨름도 좋습니다) 웃음소리들이 낭자하다. 그 일각에서 얼큰한 유긍달이 말한다.

유긍달 어르신, 옆에서 뵈오니 두 분의 금실이 참으로 좋아 보이시옵니다.

아자개 그렇고 말고, 첫 부인 잃고 나서 이 사람을 보았는데, 나는 그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다른 여인을 본 적이 없었소이다.

계모 아이고, 나으리. 또 그 말씀을....?

아자개 자식들 다 소용 없어요. 늙으면 그저 마누라 뿐이지.......

유긍달 그래도, 큰아드님께서는 백제국의 황제가 아니시옵니까?

아자개 황제? 지가 황제지, 나하고 상관없소이다. 나는 그저 마누라가 중요하오. 자식이 중요할 뿐이야. 그 외에는 아무것도 소용없소이다. 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지. 안그렇소이까, 부인?

계모 왜 아니겠습니까? 아, 천하의 영웅이시고 호걸이신 나으리께서 왜 자식들 신세를 지십니까? 무엇이 부족해서요?

아자개 (낄낄거리며 웃는다) 맞아요, 맞아요.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늘 이렇게 나를 치켜세우거든. 헌데, 그게 싫지는 않더라 이말이예요. 암, 그러니까 같이 사는 것인지만서도. 아니 그렇소이까, 부인?

계모 왜 아니옵니까, 나으리.

그런 그들의 표정에서....

씬 왕건의 숙소 외경

씬 동 방

촛불이 은은히 타고 있다. 왕건과 수인이 마주해 있다.

왕건 (술잔을 비우며) 한잔 하시겠소이까, 부인?

수인 예, 조금만 주시오소서. 본래 마시지는 못하오나, 오늘은 받겠사옵니다.

왕건 (따라주며) 험하고, 힘든 세상이올시다. 어쩌다보니, 나는 황도에 두 부인을 두고서도 오늘 또 이렇게 그대를 맞았소이다. 이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하오이다.

수인 참으로 말씀드리기 민망하옵니다만은, 소첩은 오래전부터 서방님의 대명을 듣고 있었사옵고, 또 사모했사옵니다. 이렇게 낭군으로 뫼시는 것이 꿈만 같사옵니다.

왕건 고맙소이다. (가벼운 한숨) 하지만, 과연 즐거운 날이 얼마나 될 지.... 나는 그것이 두렵소이다. 군인이기 때문이오. 군인은 늘 전장터에 가 있어야, 그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수인 그 또한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왕건 그렇게 이해한다니 고맙소이다.

수인 하오나..... 서방님.

왕건 말씀하시구료.

수인 소첩은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과연, 서방님께서는 혼인을 하시기 이전에 누군가를 사모해 보신 적이 있사옵니까?

왕건 (사이) 궁금하시오이까?

수인 서방님의 일이시옵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저 또한 어쩔 수 없는 여인네이기에 묻는 것이옵니다.

왕건 (한참만에) 잠시 그런 때가 있었소이다. 죽기로 열정을 태우던 시절도 있었소이다.

수인 .......그렇사옵니까?

왕건 그러나, 그 역시 운명이 갈라놓았소이다. 그리고, 지금은 잊었소이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소이다.

수인 그러하시옵니까? 젊은 날의 아픔이 그렇게 쉽게 잊어지옵니까?

왕건 처음에는 어렵더니, 그렇게 되더이다. 하지만, 다행이구료. 지금 부인을 뵈니, 부인은 바로 그 때 그 사람과 너무도 흡사하오이다.

수인 그러시옵니까?

왕건 사실이오. 부인은 참으로 아름답소이다. 다만, 부인이 옛사람과 다른 것은 그 사람은 활달하였다면, 부인은 참으로 침착해 보인다는 것이오. 철원의 두 부인과도 잘 지내시구료.

수인 이를 말이겠사옵니까?

왕건 자, 금방 얼굴이 붉어지셨구료. 이리오시오, 부인.

수인 서방님........

왕건 부인.........

그들이 포옹한다. 촛불이 일렁거린다. 그리고, 디졸브 되면서....

씬 그 곳 별원 일각

태평과 유금필, 능산이 모여 있다.

능산 이번 혼례를 끝냈으니, 주군께서는 바로 철원으로 가시게 될 것이옵니다.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나는 아주 그 황도는 정말 싫습니다. 온통 모리배들로 가득 찬 곳이옵니다.

유금필 맞아, 나도 그러하네. 지난번에 주군께서는 참으로 사지에서 살아 나셨네. 그 생각만 하면 아찔하이.

태평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생사를 건 또 다른 싸움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좀 각박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주군께서는 세 분 마님들을 잘 활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두사람 .........?

태평 그리고, 보다 많은 지방의 세력들을 끌어들이시는 길만이 주군께서 단단한 기반을 이루시는 길입니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세력 싸움이 될 것입니다. 누가 얼마만한 것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그것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아자개의 일도 예외는 아니지요.

유금필 맞아요. 군사의 그 전략은 참으로 기가 막혔소이다. 사벌주의 아자개가 온다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능산 사실입니다. 이번 일을 빌미로 하여 사벌주의 우환을 완전히 끊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이득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평 아마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또한 주군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저 아자개를 단단히 우리편으로 묶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어렵고도 힘든 요새를 오래도록 지키는 길입니다.

유금필 옳은 말이오. 헌데, 술희 아우는 아까부터 아니 보이네. 어딜 간게야?

능산 허허허, 형님도 참. 아, 대주낭자가 왔는데, 오죽 바쁘겠사옵니까?

유금필 .......?

씬 동 집 별채 후원

환하게 켜진 방안에서는 아자개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일각으로 용개와 보개가 대주와 함께 걸어나오고 있다.

용개 밤이 늦었다. 우리도 들어가 쉬자꾸나, 보개야.

보개 예, 형님.

용개 대주도 그만 들어가거라.

대주 예, 오라버니.

형제가 가고 나자, 대주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본다. 생각이 많다. 그녀도 다시 방을 가려고 마당을 나온다.

씬 동 마당 일각

대주가 나오는데, 누군가 그녀 앞을 막아선다. 박술희다.

대주 (멈칫하며) 웬일이시오?

박술희 낭자를 기다렸소이다.

대주 나를 왜요? 무엇 때문에?

박술희 몰라서 묻소이까, 낭자? 오래전부터 나는 낭자 밖에 없소이다. 참으로 너무하시오. 어떻게 그렇게 대장부의 마음을 몰라준단 말이오?

대주 (비웃듯) 박장군의 진심이오이까?

박술희 말씀이라고 하시오이까? 어찌 진심이 없이 그리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대주 그렇다면, 한가지 묻겠소이다. 이번에 우리를 청한 것도 진심이오이까? 과연, 아버님을 존경하고 흠모하여 모신 것이오이까?

박술희 아, 물론, 그것은 저.....

대주 그대들은 참으로 정략에 밝은 사람들이오. 아버님을 농락하는 줄 다 알고 있소이다. 그런데, 내가 장군의 말을 믿으란 말이오?

박술희 (더욱 속이 탄다) 믿어도 좋소이다. 나는 군인이오. 명령을 따르는 군인이오. 그러나, 낭자에 대한 진심만은 변함이 없소이다. 이렇게 청하오이다. 나의 청혼을 받아 주시오, 낭자.

대주 나도 박장군이 사내 중에 사내인줄은 압니다.

박술희 (너무 고맙다) 고맙사옵니다. 고맙사옵니다, 낭자.

대주 허나, 나는 아버님과 다릅니다. 내 형제를 배반하지 못합니다. 내 오라버니, 대 백제의 황제를 배반하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박술희 낭자........?

대주 우리는 결코 어떤 일이 있어도 맺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그것을 확실하게 말씀 드리지요. 나는 아버님과 다릅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아버님과 다릅니다.

씬 아자개의 방

아자개와 계모가 마주해 있다. 아자개가 술이 많이 취해 낄낄거리며 웃고 있다.

아자개 부인, 참 오랜만에 바깥 나들이 하였소이다. 부인도 아까 말을 하였지만은, 여기 사람들은 모조리 싹수가 있어. 얼마나 나를 어른 대접해주는가 이 말이야.

계모 왜 아니옵니까, 나으리? 나으리를 보고 영웅 중에 영웅이라고 하셨습니다. 왕건장군이 말이에요. 틀림없는 말이 아닙니까? 남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 견훤이 만이 우습게 안다 이말입니다.

아자개 에잉..... 왜, 또 견훤이 얘기는....?

계모 사실이 그렇지 않사옵니까?

아자개 (술을 또 마시며) 그 얘기는 그만하고. 이보시오, 부인. 그저 늙으면 이리저리 발 닿는 대로 다니면서 술이나 마시고, 시나 읊는 것이 즐거운 것인데 말이오, 이거 영 그렇지를 못하니.....

계모 (역시 술 마시고) 아이고, 왜 못하시옵니까? 그렇게 사세요, 나으리.

아자개 그게 마음대로 돼야지? 사방이 도둑놈들 투성이고, 누가 언제 어디서 쳐들어올지 모르니, 그럴 수도 없고....

계모 아, 오기는 누가 옵니까? 견훤이가 아니면, 올 사람 아무도 없어요.

아자개 아하, 또 견훤이 얘기? 아, 이제 그만 좀 하시구료. 듣기 싫어. 아, 취한다. 부인, 한 잔 더 따라 보시구료. 아, 맛있다. 참 술 맛있다. 에헤, 오늘따라 부인의 얼굴이 참으로 젊어 보이는 구료.

계모 취하셨습니다. 취하셨어요, 나으리. 아이고...

낄낄거리는 그들 부부의 모습에서....

씬 백제 황궁 외경(낮)

씬 동 황궁 대전

박영규가 신검이와 함께 박씨 고비와 다과를 들고 있다.

고비 태자마마, 차가 다 식습니다.

신검 예, 승평부인 마마. (마시며) 차 맛이 참 좋사옵니다. 어마마마도 드시오소서.

박씨 그럽시다, 태자. 자주 좀 어미한테 들러주시구료. 왜 그리 요즘은 뜸하시오?

박영규 하실 일이 많사옵니다. 군사 관계도 일을 보시랴, 또한 공무정사도 배우시랴 바쁘신 태자님이시옵니다.

박씨 암, 그래야지, 바빠야지. 한나라를 맡을 태자가 아니시오?

신검 망극하옵니다, 어마마마. 요즘 따라 어마마마의 표정이 밝아 보이시니, 소자도 한결 안심이 되옵니다.

박씨 호호호, 그렇소이까, 태자? 집안이 화목하면, 다 그런 법이오. 이보시게, 승평부인.

고비 예, 마마.

박씨 옛날과 달리 자네가 이렇게 자주 나를 황후라고 찾아주고, 또 태자에게도 깎듯이 잘하니 얼마나 좋은가? 아니, 그런가, 사위?

박영규 예, 황후마마. 집안이 화목하면 나랏일도 잘 된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박씨 그럼, 그렇고 말고. 헌데, 폐하는 무얼 하시는가? 모처럼 아들 사위가 다 왔는데, 와서 차나 한잔 거드시지 않고....?

씬 동 대전

견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이게 무슨 소리야?

견훤이 장계를 보다가 소리지르며 벌떡 일어선다. 능환과 최승우가 추허조와 함께 해 있다. 그 앞에 전령으로 온 군사하나가 서있다.

견훤 (장계를 다보고 내려놓으며) 아니, 이 어른이....... 갈수록 노망이 더 하시는 구먼....

최승우 무슨 일이옵니까, 폐하?

견훤 아버님 말일세. 아이쿠, (머리를 잡으며) 이 노인네가 글쎄 왕건이가 장가 가는데 하객으로 가 계신다네 그려.

모두들 예?

능환 아자개님께서 말씀이시옵니까?

추허조 설마, 그럴리가요? 아니, 거기가 어디라고 가셨겠사옵니까?

능환 그렇게까지 하시면 아니 되시는데.... 그렇게까지 하시면....

견훤 아이쿠, 아이쿠....(큰 한숨) 도저히 말릴 수 없는 분이실세. 아니 어떻게.... 아버님께서 이 아들의 적장이 치르는 혼례에 갈 수가 있으신가? 아이고, 아이고....

능환 ........ 갈수록 벽이옵니다. 그 상주 일은 정말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 같사옵니다.

최승우 그래도 어찌하겠사옵니까? 인내를 가지고, 지켜볼 수 밖에요.

견훤 에잉.... 생각 같아서는 그냥 아버님만 아니라면 확 쓸어버리면 시원하겠구먼. 아이고......왜 이렇게 갈수록 태산이신가? 왕건이 그자가 짐을 어찌 보겠는가? 얼마나 웃고 있겠는가 말이야. 아이고, 이 노인네가 정말..... 아이고.....

씬 산 길

아자개 일행이 지나쳐 가고 있다. 취기가 가시지 않는 듯 아자개는 아직도 흥얼거리고 있다. 대주, 그 형제들이 묵묵히 따르고 있다.

아자개 (흥얼거리다가) 술이란 참 좋은 것이야. 아직도 취기가 가시지 않는 구나. 한잔 취하니까 세상이 참으로 콩알만하게 보이는 구나. 대주야, 너도 어서 시집을 가거라. 우리도 잔치 한 번 해보자꾸나. 하하하.

대주 ..........

씬 유긍달의 집 별원

씬 동 집 사랑

유긍달 앞에 왕건과 수인이 마주해 앉아 있다.

유긍달 왕장군,

왕건 예, 장인어른.

유긍달 나는 아직도 왕장군이 어렵네. 비록 사위가 되긴 하였지만, 왕장군은 앞으로 너무도 큰 일을 해야 할 사람일세.

왕건 그리 생각해주시니, 고맙사옵니다.

유긍달 이곳 전선을 다른 장수들에게 맡기고, 철원으로 간다지?

왕건 예,

유긍달 이보게, 사위.

왕건 말씀하시오소서.

유긍달 우리는 목마르게 우리를 지켜 줄 사람을 찾고 있었네. 그리고, 결국은 이렇게 식구가 되었네. 우리 집의 모든 운명을 자네에게 걸었네. 딸아이는 물론이고 내 목숨까지도... 나는 자네를 아네. 자네는 황제가 될 사람이야.

왕건 장인어른...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유긍달 오랜 세월 먼 발치에서 나는 자네를 지켜보고 있었네. 그리고, 확신하였다네. 자네가 황제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택하지 않았을 것이야. 그것을 잊지 말게. 석총스님이 죽기 전에 자네에게 전해 준 그 간자 말이야.

왕건 장인어른........?

유긍달 그거야말로, 황제의 옥새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옥새 말일세....도선대사께서 예언하시고, 석총 큰스님이 자네에게 미륵의 간자를 받쳤네. 그리고, 자네는 미륵이 되었어. 미륵이 무엇인가? 미륵은 곧 이 시대의 황제가 아닌가? 황제 말이야. 황제!!!! 나는 황제의 장인이 되고 싶네. 그때까지 부디 자중하시게.

왕건 장인어른....?

< 85회 끝 >

 



첨부파일 태조왕건85.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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