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86회>
씬 길
왕건 일행이 가고 있다. 왕건과 수인과 그의 시녀들, 그리고 태평, 세 가신들이 몇몇 군사들과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카메라 앞을 스쳐가면.... 카메라는 혼란스러운 왕건의 심정을 잡는다.
유긍달 (E) 자네는 미륵이 되었어. 미륵이 무엇인가? 미륵은 곧 이 시대의 황제가 아닌가? 황제 말이야. 황제!!!! 나는 황제의 장인이 되고 싶네. 그때까지 부디 자중하시게.
왕건은 한숨을 쉰다. 혼란스럽다.
왕건 (E)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 가는가? 왜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갖고 있단 말인가? 왜....?
도선대사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옛 모습이 스쳐간다. 그리고, 아버지 왕륭, 왕평달의 모습들이 스쳐간다.
도선 (F) 이 책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 달리 보이지. 오로지 선택받은 자만이 제 뜻을 알 수가 있어. 창생을 구할 길이 여기에 있으니 한자도 버리지 말고 다 마음에 담아 넣게나. (18회 27씬)
왕륭 (F) 왕씨 문중이 아닌 왕씨의 나라를 일으켜야 할 것이니라. 도선 대사께서는 말씀 하셨다. 우리 건이가 삼한의 창생들을 구할 것이라고... (18회 28씬)
왕평달 (F)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옵니다, 주군. 큰 뜻을 저버리지 마시오소서. 아버님께서 세우신 큰 원을 잊지마시오소서. 가문의 의지를 기억하시오소서. (76회)
석총 (F) 미륵을 찾아 왔소이다. 가짜 미륵이 아닌, 참 미륵을 찾아 왔소이다. 참 미륵 말이오이다. (80회 마지막 씬)
왕건은 머리를 젓는다. 그리고, 계속 긴 한숨을 내쉰다.
왕건 (E)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목하고 있다. 황제라니....? 도대체 날 보고 어쩌라는 것인가? 나는 지금으로 족하다. 도선비기를 읽었으나, 그 책 그 어디에도 내가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이만한 영광이면 족한 것이 아닌가? 답답한 일이다. 폐하께서는 왜 좀더 옛날의 총명을 되찾지 못하실꼬... 왜 이런 터무니 없는 말들이 나오도록 만드시는고....
왕건은 한숨을 쉬며 그렇게 지나쳐 간다. 세 가신과 태평이 그 뒤로 따라 가며 묵묵히 시선을 나눈다.
능산 이보시오, 군사.
태평 예,
능산 폐하께서 왜 또 우리 주군을 소환하시는지 모르겠소이다.
태평 글세올습니다. 아마도, 조령일대가 평정되었으니 새로운 정국을 의논하시려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금필 지난번에 군사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좀 찜찜합니다. 철원이 어떤 곳입니까? 온갖 모략이 난무하는 곳이 그곳입니다.
태평 그렇습니다. 더 걱정인 것은 주군께서 너무 일찍 세상에 드러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조용히 묻혀 지내셔야 할 때인데....
유금필 주군께서 영웅의 기질을 갖고 계시니, 어찌하겠습니까?
태평 그렇기는 합니다만은.......그저 철원에 가서는 다시 외방으로 나오시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철원에 계실수록 득이 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우분들도 그 점을 수시로 말씀드려야 할 것입니다.
능산 맞습니다. 우리는 그저 늘 전장터가 편한 사람들인데....
박술희 .......
유금필 그나저나, 조령전선이 과연 우리가 없어도 될는지 걱정이올습니다.
태평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윤신달 장군과 장군 전이갑 형제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또한, 확실하게 사불성의 아자개도 우리 편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괜찮을 것입니다.
그들 그렇게 간다.
씬 조령 전선
어느 산야 진지에서 윤신달과 전이갑 형제가 먼 능산을 보고 있다.
윤신달 왕건총사께서 철원으로 향하셨소이다. 이제 이곳의 책임은 우리에게 주어졌소이다. 어깨가 무겁소이다.
전이갑 그러게 말이올시다. 그러나, 워낙 방비를 단단히 해놓았소이다. 금식장군도 있고, 또 장자 유긍달 님도 힘을 합치고 있는데, 백제군이 맘놓고 오겠습니까?
전의갑 이곳은 당분간 편안하겠지만, 아마도 왕총사는 그렇지가 못할 겝니다. 왕총사를 노리는 사람이 많질 않소이까?
윤신달 그렇소이다. 인물이 뛰어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적이 많이 생기게 되는 법입니다. 왕총사의 경우도 그런 것이지요.
전이갑 하지만, 왕건장군은 부동의 명성을 얻었소이다. 그 분은 이미 전쟁 영웅이 되었어요. 온 나라가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시기를 한다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윤신달 그야 그렇습니다. 사실 이제 우리들 걱정이나 해야지요. 이 얼마나 중요한 전선에 와 있습니까?
전의갑 허허허, 그렇습니다. 왕총사가 이루어 놓은 것을 우리가 망가트려서는 아니되겠지요. 허허허....
씬 사불성 외경
아자개 (E) 갔어? 왕건이가 갔어?
씬 동 성 안
아자개와 계모, 대주, 용개, 보개가 함께 있다.
아자개 아니, 장가를 들자마자 철원으로 가버렸단 말이야?
용개 그렇다 하옵니다, 아버님.
계모 아, 장가를 갔으니, 집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전쟁터에서 색시를 데리고 다니기도 그럴 것이구요.
아자개 허긴, 그렇겠네 그려. 하지만, 이 막중한 조령과 죽령 전선을 놓아두고 그렇게 훌쩍 가버리면 어떻게 하누...? 술희도 갔다면서?
용개 예, 아버님.
아자개 하긴, 뭐 장수가 되어가지고 한 곳에만 오래 있겠느냐? 어디론가 또 가서 싸우는 것이 군인 아니겠느냐? 허지만, 아쉽구나. 어떻게 하든 이번에 대주와의 혼사 문제를 매듭지었어야 하는데 말이다.
대주 그 일은 이미 이야기를 끝냈사옵니다.
계모 끝냈어? 아니, 그럼 그 박술희 장군하고 이야기를 했단 말이냐?
대주 그렇사옵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절대로 혼례니 뭐니 하는 얘기는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아자개 뭐, 뭐라고...? 아니, 왜?
대주 왜라니요, 아버님? 소녀는 아직도 마진국을 적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소녀의 오라비가 백제국의 황제로 있는 이상 적국과의 혼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그렇게 단념시켰사옵니다.
계모 세상에, 세상에.... 굴러온 복을 발로 차다니? 얘, 대주야, 제 정신이냐?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느냐? 백제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나도 그렇고 아버님도 그렇고, 여기 용개 오라버니와 보개도 그렇다고 하지 않느냐? 왜, 너만 유난을 떠느냐, 유난을....?
용개 그렇다, 대주야. 이번에 왕장군의 혼례에 가보았다만은 그들은 우리를 마치 제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백제의 형님 생각은 그만 하거라.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게 맞는 것 같다.
계모 맞고, 말고.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대주야. 정신 좀 차려...
아자개 아무튼 박술희가 간 것은 참으로 안타깝구나. 그 자가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할 말이 많았을꼬? 정말 대주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저들이 저렇게 갔으면, 언제나 다시 볼꼬....? 언제나 다시 봐?
씬 전주 황궁 외경
씬 동 황후전
박씨가 생각에 잠겨 있다. 고비가 함께 해 있다.
박씨 폐하께서 금성으로 가 계시네.
고비 또 전쟁 준비를 하시는 모양이시옵니다.
박씨 지난 번에 조령과 죽령을 잃어버리시고, 얼마나 애통해 하시었는가? 이번에 금성에서 그 분을 풀려하시는 것 같네.
고비 언제나 전쟁이 없어질지...? 참으로 그 생각만 하면, 두려워지옵니다.
박씨 나도 그렇다네. 폐하와 태자들이 모두 전장터에 가있네. 생사가 오가는 곳이 아닌가?
고비 그런데, 폐하께서는 왜 금성까지 손수 가셨습니까?
박씨 말하지 않았는가? 조령과 죽령에서 당하신 것을 거기에서 풀려고 하신다고 말일세.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은 그것이 아버님에 대해 응어리가 진 것을 풀어 보시려고 하시는 것이야.
고비 그러실 것이옵니다. 소인도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아버님이 도와주셨으면, 이길 전쟁이었다고 말이옵니다.
박씨 그뿐인줄 아는가? 왕건이라는 적국의 장수가 장가를 가는데, 하객으로 다녀오셨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게 바로 자식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이 아닌가 말이야.
고비 정말 그렇사옵니다, 황후마마.
박씨 그 소문을 듣고 폐하께서는 펄펄 뛰셨다네. 얼마나 속이 상하셨겠는가? 그 노인네가 어찌 아버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말일세.
고비 그러게 말이옵니다, 마마.
박씨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은 그 계모 때문이야. 그러길래, 사내들이란 계집 관리를 잘 해야 하는 것이야. 그것이 어디 계모인가? 원수이지, 어디 계모인가 말일세. 아니 그런가, 자네?
고비 ......?
박씨 집안의 우환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야. 다 까닭이 있다 이말일세. 그렇지 않은가?
고비 ..........
씬 무주성 외경
씬 동 성 안
수달과 견훤이 마주 해 있다. 최승우, 능환, 박영규, 공직, 방장군, 지훤, 애술, 최필, 신덕, 능애, 추허조, 김총 들이 모여 있다.
견훤 (지형도를 보며) 여기 금성은 영산강 줄기가 생명이야. 더불어 이 강을 타고 나가면, 수많은 섬들이 있는 바다와 연결이 되게 되어 있어. 결국, 금성을 되찾는다는 것은 수륙양면에서 어떻게 작전을 펴고, 바다를 누가 먼저 장악하느냐가 관건이란 말이야.
수달 그렇사옵니다. 영상강 줄기가 중요하기는 하지만은 그보다 먼저 수많은 바닷가에 펼쳐져 있는 지역의 장자, 호족들이 문제이옵니다.
최승우 장자와 호족들은 그야말로 바로 이곳의 인심이오. 지난 날 왕건은 바로 그 인심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금성을 빼앗아 갔던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책은 서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오이다.
수달 지난날 완산주에 황도를 세울 때에 비뚤어진 인심이 이 금성을 빼앗기게 한 큰 원인입니다. 지금 그것을 복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능환 지금 마진국은 나라 살림이 극도로 나쁘다고 들었소이다. 그렇다면, 금성도 예외는 아닐 것이오. 이럴 때에 흔들리는 민심을 우리 백제로 끌어 올 수 있다면, 큰 득을 볼 수 있을 것인데...
추허조 오, 그것 참 당연하고도 분명한 작전인 것 같습니다. 사실, 마진은 지금 난리라고 들었습니다. 궁예왕인가 누군가가 미륵인지 뭔지 흉내를 내면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요.
신덕 소장도 들었사옵니다. 적국의 황제가 실정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지금 금성 인근에 오시어 앞일을 의논하시는 것은 참으로 잘하시는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박영규 그렇사옵니다. 이 기회에 금성을 꼭 도모해야 합니다.
견훤 장수들이 모두 이렇게 한결같이 용기가 충천하니, 어찌 금성이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지난날의 실패를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충분한 작전을 짜고, 그리고 확실하게 금성을 되찾아야 할 것이야.
공직 그렇사옵니다. 서두르셔서는 아니되옵니다. 금성은 전략적 가치가 높은 곳이옵니다. 아무리 마진국 내부 사정이 혼란하다 하여도 이곳을 쉽게 내줄 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애술 하지만 지금은 왕건이 아니라 김언이라는 장수가 지키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우리 백제군이 전면적으로 밀고 들어간다면, 어찌 함락시킬 수 없겠사옵니까? 폐하께오서는 너무 망설이지 마시옵고, 공격영을 내려 주시는 것이 마땅하다 사료되옵니다.
최필 그렇사옵니다. 지금까지 관망한 것으로도 충분하옵니다. 영을 내려주시오소서, 폐하.
지훤 영을 내려주시오소서, 폐하.
견훤 아, 아... 서두르지 말자고 하였네. 자만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서둘러서도 아니되고, 전쟁이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야. 아무튼, 이 금성을 충분하게 연구하고, 공격을 할 것일세. 장수들은 짐의 이러한 마음을 헤아려 주길 바라네.
장수들 예, 폐하.
견훤 우리가 수많은 첩자들을 보내서 신라와 마진국의 형편을 염탐하듯이 저들도 마찬가지야. 아마도 짐이 이곳에 와 있는 줄 알면, 틀림없이 또 다른 움직임을 보일 것일세. 우리의 정확한 작전은 그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야. 명심들 하게.
일동 예, 폐하.
견훤 (중얼거리듯) 저들이 어떻게 얻은 금성인데, 쉽게 돌려주겠는가? 이번만은 치밀하게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야. 그리고, 충분한 병력을 동원하여 짧은 시일에 전쟁을 끝내야 할 것이야. 이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야? 내 땅 안에 마진국의 깃발이 꽂혀 있단 말이야. 마진국의 깃발이.....
씬 나주 어느 전선
김언과 태수 오다련이 강 건너 먼 곳을 보고 있다.
김언 보시오소서, 태수어른. 저 강 건너에서부터 바닷가에 있는 전해안이 백제군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오다련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견훤왕이 직접 왔다지요?
김언 그러하옵니다. 예삿일이 아니옵니다. 해안과 강가를 경계로 하여 백제 쪽으로 잇닿은 곳에는 대대적인 훈련이 계속되고 있다 하옵니다.
오다련 그렇다면, 머지 않아 쳐들어오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언 그렇다고 보아야지요. 수많은 어선들이 징집되고 있고, 또한 많은 군량미가 옮겨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오다련 지금의 우리 군세로 저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김언 어려울 것입니다. 빨리 조정에 보고를 띄워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오다련 (끄떡이며) 그래야 하겠소이다. 어떻게 얻은 금성입니까? 저들에게 다시 내어줄 수는 없지요.
김언 마침 왕장군이 철원으로 돌아가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장계를 올리면, 곧 무슨 대책을 세워주겠지요. 기다려보시옵소서, 태수어른.
오다련 (한숨) 철원이 지금 한창 어렵다고 들었는데, 거긴 또 무엇하러 가는지.......
김언 그렇습니다. 어디 어려운 곳이 철원뿐이겠습니까? 이곳 금성도 태수 어른이 아니면, 그야말로 벌써 사단이 나도 났을 것이옵니다. 굶주린 백성들과 헐벗은 군사들을 사실 태수어른께서 사재를 풀어 다 돌보아주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오다련 허허, 그거야 뭐.... 사실, 내 딸아이가 왕장군에게 가면서부터 내 개인 재산은 없어졌소이다. 내 딸과 사위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맡기고 있는데, 이까짓 재산이 다 무엇이겠습니까?
김언 장하십니다. 허허허.... 왕장군은 정말 복이 많은 분이십니다, 암요.
씬 왕건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유씨와 오씨가 왕식렴이 함께 해 있다.
유씨 서방님께서 오신다고 하였는가?
오씨 예, 형님. 혼례를 올리고 나면, 곧바로 철원으로 오시라는 폐하의 영이 계셨다 하옵니다.
유씨 그렇다면 아주 오시는 게 아닌가?
오씨 일단 군무를 떠나서 오시는 것이니, 한동안은 집에 계시지 않겠사옵니까?
왕식렴 형님께서는 군인이십니다. 어느 전선으로 또 가시지 않겠사옵니까?
유씨 (한숨처럼) 그러시겠지요. 그러고 보면 이 집에 젊은 부인 한사람만 또 늘어나게 생겼네 그려.
오씨 호호호..형님, 그 말씀이 듣고 보니 참 그렇사옵니다.
유씨 뭐가 말인가?
오씨 전장터에 나가실 때마다 이 집에 여인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사옵니다. 나주에서는 제가 왔고, 이번에 충주에서는 다시 새 부인이 오고 있사옵니다. 호호호...
유씨 이 사람아 그게 어디 웃을 일인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웃는가?
오씨 재미있지 않사옵니까? 잘못하다가는 이 집안이 온통 여인들로 꽉 찰까봐 겁이 나옵니다. 아니 그렇사옵니까, 도련님?
왕식렴 설마, 그렇게야 되겠사옵니까? 하하하....
씬 길
왕건일행들이 오고 있다. 어느 만큼 가다가 수인이 묻는다.
수인 서방님,
왕건 왜, 그러시요?
수인 소첩은 철원에 가까와오니, 조금씩 두려워지옵니다.
왕건 무엇이 말이오?
수인 충주에서 지금껏 바깥 세상을 모르고 살았사옵니다. 갑자기, 폐하께서 계시는 황도로 와서 그것도 두 분 형님을 뵐 생각을 하니, 조금은 떨리는 것 같사옵니다.
왕건 하하하, 그것은 부인만 그러는 것이 아니오. 나도 그렇소이다. 두 큰 부인이 우리를 어찌 볼까 생각하면 나도 긴장이 됩니다.
수인 (웃으며) 그렇사옵니까?
왕건 그럴 수밖에요. 철원에 있는 두 부인은 사실 내가 전장터를 돌아다니느라 큰 정을 주고 받지 못했소이다. 헌데, 또 부인마저 이렇게 뫼시고 가니, 어찌 긴장이 아니되겠소이까?
수인 호호호, 여복인지 여난인지, 모를 일이옵니다, 서방님.
왕건 이런.., 부인도 농을 다하실 줄 아시는구료? 여난이라니? 다 복이라고 생각하십시다, 하하하.
수인 언제쯤 철원에 당도할 수 있사옵니까?
왕건 글세, 내일 오전쯤이면 들어가지 않겠소이까?
이들 이렇게 앞서가고, 그 뒤로 태평과 세 가신이 따르고 있다.
씬 철원 황궁 외경(석양)
씬 동 대전
궁예가 촛불 밑에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생각에 잠긴다. 그는 지금 북벌에 대한 설계에 바쁜 것이다. 생각하고, 다시 들여다보고, 또 생각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최응을 본다.
궁예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이리와 보거라.
최응 예, 폐하. (다가와서) 무슨 일이시옵니까, 폐하?
궁예 지금 온 나라가 북벌 준비에 부산하단다. 한쪽에서는 백제와 신라를 경계로 싸우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북쪽으로 가기 위해 대규모의 병단을 구성중이다.
최응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
궁예 우리가 북으로 가려면, (지형도 보이며) 여기 발해를 지나야 한다. 사실, 발해는 우리의 형제국이지. 그 옛날 고구려의 유민 대조영이란 사람이 세운 국가가 이 발해국이다.
최응 예, 신도 그렇게 들었사옵니다.
궁예 지금은 당나라와 거란의 영향을 받아 자꾸만 축소되고, 형편없이 기울어져가고 있어. 내 생각 같아서는 말이다. 사실, 이 발해와 우리가 손을 잡고서, 아율라보기가 설쳐대는 이 거란국을 밀어버리고, 그대로 중원을 차지해 버린다면 새로운 거대한 제국의 지도가 그려질 것인데... 아니 그러냐, 최응아?
최응 참으로 웅장하신 계획이시옵니다, 폐하.
궁예 그렇지?
최응 예, 폐하.
궁예 그런데, 말이야. 이 속 좁은 것들이 내가 하는 말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들을 않아.
최응 .........
궁예 그런 접에서 나는 참으로 불행한 황제야. 아니 그러냐, 최응아?
최응 ......... (대답이 없다)
궁예 대답해 보거라, 최응아.
최응 신이 무엇을 알겠사옵니까? 저들이 어리석어 먼 앞을 볼 줄 모르옵니다. 폐하께오서 헤아리셔야 할 것이옵니다.
궁예 그렇겠지?
최응 예, 폐하.
궁예 사실 말이야. 아지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거든. 그자는 내게 말했어. 대 동방국을 세우자고 말이야.
최응 ........
궁예 대 동방국이 무언가? 그건 바로 저 중원을 점령한 뒤에 세워질 거대한 제국을 말하는 것이야. 역대로 보아 고구려가 그러했었고, 또 지금의 발해가 제국다운 제국을 세웠어. 그런데, 고구려도 무너졌고, 발해도 또 무너지고 있어. 이러니 어찌 짐이 한번 나서보려고 생각을 아니하겠는가 말이야.
최응 정말 그렇사옵니다, 폐하.
궁예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아지태도 그렇고.. 믿을 사람이 적어.
최응 .......
궁예 결국은 내가 해야지 어쩌겠느냐? 최응아, 역대 중원의 황제들이 말이다. 왜 제국을 세우고, 옥좌에 앉으려고 하는 지 아느냐? 그건 말이다. 개인의 부귀와 영광, 그런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의 영원한 낙원의 국가를 세우고 싶어하는 것이야. 자신이 신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지. 그리하여, 한없이 베풀면서 자기 혼자 고고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것이야. 사람들은 그것을 권력이라 말하지.
최응 .......
궁예 헌데, 말이다. 하늘은 결코 많은 것을 인간에게 주지 않는단다. 사람은 태어나면 죽어야 하고,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가 없거든. (사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말이다. (점차 고통이 온다) 병이 든다는 것은 슬픈 것이야. 죽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할 일을 못한다는 것이 슬픈 것이야. 할 일을 못한다는 것....
궁예는 고통이 밀려오는 것을 참는다. 급히 독주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급히 마신다. 최응이 표정 없이 보고 있다.
최응 폐하, 많이 편찮으시옵니까?
궁예 아니다. 그런대로, 이 소주를 마시면 고통이 사라진단다.
최응 취하시지 않사옵니까?
궁예 물론, 취하지. 허허허,(고통을 참으며) 술이 왜 좋은 지 알 것 같구나. 술이란 고통을 마비시키지. 더불어 정신도 마비를 시켜.
궁예는 그러다가 말을 중단하고 한참을 생각에 잠긴다. 고통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궁예 해가 저문지 꽤 되었는데, 통 잠이 오지를 않는구나. 최응아, 바람 좀 쐬고 오지 않겠느냐? 나와 함께 가자.
최응 예, 폐하.
궁예 그래, 가보자꾸나. 어디 어떻게 일들을 하는지 오늘은 한 번 돌아보자꾸나.
궁예가 일어선다. 그리고, 앞서 나간다. 최응이 뒤를 따르다 말고, 다시 돌아와 얼른 소주병을 들고 챙겨 나간다.
씬 황궁 어느 전각(밤)
대전내관과 금대와 장일이 뒤를 따르고, 궁예와 최응이 앞을 섰다.
최응 폐하, 어디로 납시는 것이옵니까?
궁예 이쪽으로 가면 조정의 여러 관청이 있지 않느냐? 여기 어디 사대(史臺)가 있다고 들었는데....
최응 사대는 여러 외국의 말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옵니까?
궁예 그렇지. 바깥 나라의 사정을 모르고서야 어찌 그곳을 도모할 수 있겠느냐? 저리 가보자꾸나.
궁예가 어느 전각을 돌아 한 곳을 본다. 나무문 틈으로 전각 안의 모습들이 보여 온다. 그곳에서는 당나라 말인 중국어 학습이 한창이다. 왕신이 교수로 있고, 이를 배우는 수십명의 학인들이 보인다.
왕신 (중국어) 당나라의 황도는 장안입니다.
학인들 (따라 한다) 당나라의 황도는 장안입니다.
왕신 (중국어) 도성은 동서남북 삼십여리로 인구는 백만이 넘는 곳입니다. (우리말로) 자, 방금 당나라의 황도는 장안이라 하였소이다. 또한, 도성은 동서남북이 삼십여리가 넘으며 그 도성 안의 백성이 무려 백만이 넘는다 하였소이다. 우리는 지금 발해국을 지나 그 당나라를 도모하려고 하오이다. 여러분들 중에는 필요에 따라 많은 정보를 알고 또 나라에 전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이외다. 그리고, 외교와 더불어 그곳을 점령하게 되면, 관리의 임무도 띄게 될 것이외다. 그 때문에 외국말을 배우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올시다.
궁예가 바깥에서 보며 웃고 있다. 최응도 열심히 본다.
궁예 저자가 바로 왕건 장군의 사촌이야. 당나라에서 많은 공부를 하였다기에 교수로 부른 것이야. 어떻냐, 최응아?
최응 예, 공부를 참으로 많이 한 사람 같사옵니다.
궁예 암, 이 사대란 참으로 중요한 곳이다. 우리말도 알아야 하고, 저 당나라 말도 알아야 하고, 그리고 그곳을 다스리자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하거든. 하하하. 자,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궐 밖에 한 번 나가보자꾸나.
최응 궐 밖을 말이옵니까?
궁예 왜?
최응 밤이 너무 늦었사옵니다.
궁예 시간이 무슨 상관이냐? 가서, 어떻게 하고들 있는지 보러 가자꾸나. 북문 밖에서 군사들을 훈련시킨다 들었다, 가보자꾸나.
최응 예, 폐하.
궁예 금부장은 말을 준비하고, 앞서거라. 북문 밖으로 갈 것이니라.
금대 예, 폐하.
씬 동 내원 외경
종간 (E) 그게 무슨 소린가? 폐하께서 궐 밖으로 가셨다?
씬 동 내원 안
종간이 눈을 크게 뜨며, 은부에게 묻고 있다.
종간 아니, 왜? 이 밤 중에 무슨 일로 궐 밖으로 가셨단 말인가?
은부 처음에는 사대에 들러, 돌아보시다가 갑자기 군사 훈련을 보고 싶다 하시어 행차하셨다 하옵니다.
종간 그렇다면, 순시를 나가신 것이 아니신가?
은부 그렇게 사료되옵니다.
종간 누가 뫼시고 갔는가?
은부 최응이 처음부터 따라 뫼시었고, 저희 내군의 금대부장과 장일부장이 뫼시고 있사옵니다.
종간 (일어서며) 우리도 가세!
은부 내원께서도 가시겠사옵니까?
종간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시국인가? 불온한 백성들이라도 있어서 엉뚱한 행동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내군을 동원하게. 가서, 폐하를 뫼시도록 하게.
은부 예, 내원어른.
씬 철원 저자 거리
엄청난 삭풍이 불고 있다. 죽어 있는 거러지를 두 모녀가 열심히 옷을 벗기고 있다.
딸 옷을 벗기면, 이 사람이 추울 텐디유.
어미 아니다. 이 사람은 죽었어. 남이 가져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옷을 얻어야 한다.
딸 (계속 보며) 추울텐디....
어미 죽은 사람은 추운 걸 모른다. 여기 좀 거들거라. 어서, 이것아.
딸 예, 엄니.
그들 모녀는 옷을 벗겼다. 시체의 알몸이 드러난다. 어미는 만족한 듯 그것으로 딸의 몸을 감싸준다.
어미 오늘은 횡재했구나. 옷을 다 얻다니...
그때,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모녀는 급히 피한다. 궁예 일행이 오고 있다.
최응 폐하, 바람이 몹시 차옵니다. 괜찮으시옵니까?
궁예 하하하, 네 몸 걱정이나 하거라. 누가 뭐래도 너는 아직 어린아이니라. 손발이 얼지 않도록 잘 간수하거라.
최응 예, 폐하.
이들 얼만큼 가다가, 길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죽어 있는 알몸의 시체를 본다. 궁예가 잠시 말을 멈춘다.
궁예 사람이 아니냐? (한참 보다가) 음?.... 얼어 죽은 것이 아니냐?
금대 그런 것 같사옵니다, 폐하.
장일 폐하, 아마도 걸인인 것 같사옵니다. 보실 일이 아니니, 속히 가시오소서.
궁예 쯧쯧쯧, 어쩌다 얼어 죽었는고? 헌데, 옷이 없지 않느냐? 아마도, 술이 많이 취했던 모양이구나. 아니 그러냐? 열이 나니까 어딘가 벗어 던졌을 것이 아니냐?
최응 ........
금대 그런 것 같사옵니다, 폐하. 어서 가시오소서.
궁예 법이 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겨울에 술이 취해 옷을 벗고, 얼어 죽다니....에잉, 쯧쯧쯧....가자!
그들이 지나간다. 모녀가 다시 모습을 내민다.
딸 엄니, 폐하라고 하지 않아유?
어미 미친놈들인가 부다. 이 밤 중에 폐하가 여길 왜 오겠느냐? 지금 저자들이 폐하라면은 이 사람이 굶어 죽었는지, 술 취해 죽었는지 그것도 모르겠느냐? 가자. 따뜻하냐?
딸 예, 엄니.
그들 모녀는 그렇게 간다.
씬 북문 공역장
벌판이다. 극심한 바람소리 속에 수많은 군사들이 행군 대열을 지어 지나치고 있다. 그 한쪽에서는 공격용 무기들이 정렬해 있다. 곳곳에 군막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고, 그 한켠에 복지겸, 환선길이 이동하는 군대를 보고 있다. 이흔암, 홍유, 배현경, 김락 들이 각기 군사들을 인솔하며 지나쳐 가고 있다. 행군 연습인 것이다.
배현경 왜 이리 더딘가? 야간 행군은 속도를 생명으로 하는 것이다. 이동하라. 소리 없이 속보로 이동하라.
홍유 후미는 왜 이리 늦는가? 이동하라.
김락 보군이 앞서 갔다. 공병은 무얼 하느냐? 공격 무기를 이동시켜라.
이흔암 이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실전에서 싸울 수가 있겠느냐? 좀 더 빨리 움직여라.
그 일각에서 보고 있던 환선길과 복지겸이 고개를 끄떡인다.
복지겸 날이 춥고 밤이 늦었소이다. 오늘은 이만 하십시다.
환선길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강제로 끌어 온 군사들인지라 이거 영 통솔이 제대로 안 되고 있소이다.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소이다.
복지겸 그렇겠지요.
환선길 저 신라의 포로들이 더 문제올시다. 포로를 우리 군사로 만들려니까 더 엉망이에요. 이 자들이 말을 제대로 안들으니....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은 한쪽에서 오고 있는 불빛을 본다. 눈을 크게 뜬다. 금대와 장일들이 궁예를 모시고 오고 있는 것이다.
환선길 아니, 폐하가 아니시옵니까?
복지겸 (놀라) 그렇습니다, 폐하이시옵니다.
궁예들이 가까이 오고, 그들은 군례를 올린다.
복지겸 폐하, 이 밤 중에 어인 행차이시옵니까?
궁예 그냥 나와 보았소이다. 여러가지로 궁금한 것도 많고 해서 말이올시다. 오면서 자세히 보았소이다. 늦게까지 참으로 고생들이 많소이다.
환선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폐하께서 명하신 일이옵니다.
궁예 훈련이란 참으로 고생스러운 것이오. 더군다나 생짜를 가져다가 좋은 군인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환선길 그렇사옵니다. 나이가 어리거나 늙은이들이 많고, 더군다나 신라에서 끌어 온 포로들을 군인으로 만들려니 잘 뜻대로 아니되옵니다.
궁예 신라?
복지겸 그렇사옵니다. 적지 않은 포로들이 철원으로 왔사옵니다. 이들을 지금 우리 군대로 재편성하고 있사옵니다.
궁예 신라라.....저 멸도에서 온 썩은 군대를 어찌 우리 군대로 만들 수가 있겠는가?
복지겸 그래도, 만들어보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궁예 큰 효과가 아니 날 것이야. 신라라는 나라가 그렇단 말이야. 한 번 해보다가 아니되면 다른 방법을 쓰시구료.
복지겸 예, 폐하.
궁예 봅시다. 저 쪽에는 홍장군 같은데....? 배장군과 김락 장군도 있고. 허허, 모두들 아주 바쁘구먼 그래.
그렇게 궁예들이 보고 있다.
씬 그 일각
종간이 은부와 내군들을 이끌고 급히 달려오고 있다. 그 한쪽에서 다시 누군가가 달려 온다. 아지태와 입전, 신방, 임춘길 들이다. 그들이 곧 마주친다. 그리고, 말을 멈춘다.
아지태 허허, 내원어른이 아니시옵니까? 어인 일이시옵니까?
종간 아학사는 어인 일이신가?
아지태 폐하께서 이리로 납셨다 하길래 급히 오는 길이옵니다.
종간 허허, 그러신가? 참으로 눈물날 만한 충성이로고.
종간은 그렇게 비웃으며 앞서 가버린다. 아지태도 비웃듯 콧바람을 뀌며 그들을 따라 간다.
씬 다시 그곳
궁예와 환선길, 복지겸 앞으로 김락, 배현경, 홍유들이 다가와 군례를 올린다. 궁예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떡인다.
궁예 어려운 일들을 잘 해내고 있소이다. 만족하오. 짐은 참으로 만족하오. 그대 같은 충신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제국의 꿈은 반드시 이룰 수 있는 것이외다. 될 것이오. 우리는 반드시 북으로 갈 것이오!
그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그리고, 신라 말이야. 사람이 부족하다 해도, 그렇지. 저 멸도에서 온 게으른 무리들을 왜 군대에 집어넣었는가? 저들을 빼버리게. 근성이 나쁜 것들은 아무리 해도 아니되는 것이야.
복지겸 하오나, 폐하......
궁예 그렇게 해.
복지겸 예, 폐하.
궁예 열명의 정예병이 천명의 적을 이길 수 있다고 했어. 신라는 정예병이 될 수가 없어. 게으르고, 썩고, 미련한 멸도의 무리들이야. 생각 같아서는 모두 바다에 쓸어 넣고 싶은 존재들이란 말이야. (하다가 울컥한다) 저, 멸도의 무리들..... 멸도의 무리들.......
최응은 보았다. 궁예의 병을 간파한 것이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잠시 보는데, 최응은 얼른 독주병을 꺼내 권한다.
최응 폐하, 어주를 드시오소서. 급히 나오시느라, 추위를 막지 못하고 나오셨사옵니다.
궁예 오, 그래.... 이리 다오. (받아 마신다)
궁예는 독주를 마시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쓴다. 그때, 종간과 아지태들이 와서 멈추며 예를 올린다.
종간 폐하, 어찌 기별도 아니 주시고 이리로 납시셨사옵니까?
궁예 (정신 수습하고) 허허, 그렇게 되었소이다. 내원은 그렇다 하더라도, 아학사는 어쩐 일이시오?
아지태 폐하께서 이리로 납시셨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왔사옵니다.
궁예 맡은 일들이나 열심히들 하시구료. 애써 여기까지 무엇 하러들 나온단 말이오?
두사람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오늘 밤은 참으로 훈훈했소이다. 하나같이 모두들 열심이었어요. 제국의 앞날이 참으로 밝아. 이래야지. 늘 깨어 있어야지. 자,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돌아가자. 아 참 내원.
종간 예, 폐하.
궁예 황궁의 곳간을 풀어서 오늘 여기 장졸들에게 술과 고기를 푸짐히 먹이도록 하시구료.
종간 예, 폐하.
궁예 참, 그리고 내일 왕장군이 돌아온다고 하오. 그 아우는 개선장군이오. 문무신료들이 나가 크게 맞도록 하시오. 아시겠소이까?
종간 예, 폐하.
궁예 가자. 수고들 하오.
모두들 황공하옵니다, 폐하.
궁예와 최응은 어둠 속으로 길을 잡는다. 다시 아픔이 밀려온다. 궁예는 참으며 다시 독주를 마시고, 빈 병을 바닥에 던져 버린다. 아지태와 종간도 모두들 그것을 보고 있다. 궁예는 그들을 한 번 돌아보고서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종간 (싸늘하게 주변을 보다가) 뭣들 하오? 다들 제자리로 돌아들 가오.
일제히 예, 내원어른.
종간 아학사는 뭘 보고 있는 게요? 내봉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지태 예, 내원어른.
종간 곧 폐하께서 하사하신 술과 고기를 내릴 것이오. 그때까지 훈련을 더 계속하시오.
복지겸 예, 내원어른.
종간 가세.
은부 예, 내원어른.
씬 황궁 황후전
연화가 제조상궁에게 묻고 있다. 그 옆에 진내관과 슬이가 서있다.
연화 폐하께서 궐 밖에 나가셨다고?
제조상궁 예, 황후마마. 북문 밖 훈련장에 가셨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수행하는 군사들도 없이 말인가?
진내관 뒤늦게 내군 총사 은부장군이 군사들과 함께 갔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길게 한숨) 밤마다 고통스러워하신다지?
슬이 예, 마마. 이미 상궁 나인들 중에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하옵니다.
연화 어찌 할꼬..... 의원도 소용이 없고, 약도 소용이 없고.... 밤마다 독한 소주로 아픈 것을 대신 하신단 말이지?
진내관 예, 황후마마. 그렇다 하옵니다.
연화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언제까지 이렇게 두고만 볼 것인가? 이것이 쉬쉬한다고 해서, 언제까지 감추어 질 수 있단 말인가?
모두들 .........
연화 이러다가 더 큰 불행을 보게 될 것이야. 하루 하루 가는 것이 그야말로 살얼음판 같지 아니한가? 폐하께서 변하신 게 도대체 언제부터인데 모두들 이렇게 귀를 막고 입을 닫고 있는 게야. 무슨 불행을 더 보려고.... 어찌 한다.... 이제 밤에 궐 밖에 나가시기 시작하셨네. 또 무슨 일이 있을지.... 휴...... 그만 나가들 보게.
그들이 모두 대답하며 나간다. 슬이가 남아서 눈치를 본다.
연화 위기로구나. 폐하께서는 마치 광인처럼 변해 가시는데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하는구나. 북벌이라니? 정치를 모르는 나도 그 일이 터무니 없는 짓이라는 걸 아는데... 누구도 말리지를 못하고 있으니.....
슬이 마마, (멈칫거리다가) 왕건장군이 돌아온다 하옵니다.
연화 뭐라고?
슬이 왕장군이 충주에서 돌아온다 들었사옵니다. 그 분과 의논하심이 어떠하겠사옵니까?
연화 왕장군.... (비로소 무언가 생각나는 듯) 왕장군......왕장군...........?
씬 철원 황도 외성 문(낮)
왕건들이 성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문무신료들이 가득히 모였고, 백성들이 환호하고 있다. 내군의 군사들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그들을 맞고 있다. 광치나이며 장인인 유천궁과 박지윤 부자, 장자1,2, 아지태, 입전, 신방, 임춘길, 종간, 은부, 금대, 장일을 비롯하여 복지겸, 환선길, 염상, 이흔암, 홍유, 김락, 배현경, 왕식렴, 왕신, 강장자와 백씨도 보인다.
종간 어서오시오, 왕장군. 참으로 오랜만이외다.
왕건 예, 내원어른. 그간 별일 없으셨사옵니까?
종간 허허허, 국가의 막중지대사를 맡고 있는 몸이올시다. 어찌 별일이 없겠소이까? 개선을 감축하오.
왕건 황공하옵니다.
유천궁 어서오시게, 왕장군.
왕건 그간 안녕하셨사옵니까, 장인어른?
유천궁 나야 별일이 있겠는가? 개선을 감축드리네.
왕건 황공하옵니다.
박지윤 감축드리오, 왕장군.
모두들 감축드리오, 왕장군.
왕건 고맙습니다. 미천한 이 몸을 위하여 높으신 분들이 모두 이렇게 나와 주셨습니다. 폐하의 은혜가 너무도 크시옵니다.
아지태 큰 일을 한 사람이 큰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올시다. 너무 겸손할 것은 없소이다.
왕건 고맙습니다.
왕식렴 형님, 참으로 고생 많이 하셨사옵니다. 여기 신이도 조정에 출사를 하였사옵니다.
왕신 형님, 참으로 고생 많으셨사옵니다.
왕건 그래, 자,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꾸나. 자, 충주에서 오신 네 형수니라. 뫼시고 가거라. 나는 가서 폐하를 뵈어야 하느니라.
두형제 예, 형님.
왕건 자, 부인은 내 아우들을 따라가시구료.
수인 예, 서방님.
은부 자, 왕장군을 뫼시어라.
내군들 예.......
사람들이 갈라서고, 왕건 일행들이 은부의 내군들에 의해 인도되어 간다. 그 한켠에서 환선길, 이흔암이 복지겸과 함께 말한다.
환선길 이거 우리는 제대로 인사조차 할 겨를이 없소이다.
이흔암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복지겸 하하하, 자주 볼터인데 뭘 그러십니까? 자, 가십시다.
그 한켠에서 다시 백씨와 강장자가 장자1,2와 말을 나누고 있다.
장자1 거 참, 어쨌든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아무리 안 풀리는 전쟁도 저 왕장군만 갔다 하면 그냥 뒤집어져 버리니 말입니다.
장자2 그러게 말입니다. 왕장군은 우리 마진국의 보물이올시다.
백씨 (강장자에게) 하긴 맞는 말입니다. 왕장군은 전쟁에 있어서 만큼은 따라갈 사람이 없지요.
강장자 그건 그렇소이다, 부인. 그러니까, 폐하께서 애지중지 하시지. 그건 사실이오. 헌데, 또 부인을 데리고 오지 않았소이까?
백씨 얘기 들었습니다. 세 번째라고 하더군요. 아이고... 저런 집안에 우리 연화를 보냈다면 어찌 될뻔 했습니까? 아이고...
강장자 (눈을 흘기며) 부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게요? 이런...
백씨 (그제서야) 아이고, 이 놈의 입초사하고는....
한쪽으로 왕건들은 그렇게 가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속으로 수인들도 그렇게 간다.
씬 황궁 외경
씬 동 황궁 대전 밖
궁예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씬 동 황궁 대전 안
왕건이 막 절을 끝내고 있고, 궁예는 기분 좋은 웃음을 계속 웃는다.
궁예 이게 얼마만인가? 아우, 이게 얼마만이야? 그래, 어떠했는가? 소식은 다 듣고 있었어. 대단했다지? 낙동강까지 전선을 확보했다고?
왕건 예, 폐하. 모두가 폐하의 은덕이시옵니다.
궁예 아니야, 아니야. 그것이 어디 아우의 능력이지 내 힘일 리가 있겠는가? 지금쯤 백제의 견훤왕이 땅을 치고 있겠네 그려. 모처럼 확보한 전선을 그렇게 잃어버렸으니 말일세.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새 부인은 왜 아니 데리고 왔는가?
왕건 차후로 뵐 때가 있을 것 같아, 집에 가 있으라 일렀사옵니다.
궁예 이런, 이런.... 아무튼 잘 왔네 그려. 대단한 전공이었네. 여기도 북으로 갈 준비가 착착 진행이 되고 있네 그려.
왕건 이야기는 들었사옵니다.
궁예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아. 내가 아우를 부른 것은 그것 때문이야. 어디 누구와 의논할 데가 있어야 말이지?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내가 그토록 입이 마르게 칭찬하였던 왕건 장군이니라. 기억해 두어라.
최응 최응이라 하옵니다, 장군.
왕건 왕건이라 하오.
궁예 자, 아우. 우리 오늘 한 번 마셔 보세나.
왕건 이토록 후히 맞아 주시니, 참으로 은혜가 크시옵니다, 폐하.
궁예 무슨 소리.. 나는 요즘 소주가 꽤 늘었다네. 그래서, 늘 취해 있지. 자, 주안상 봐 오너라.
밖에서 대답 소리와 함께 주안상이 들여져 온다. 궁예가 술을 따른다.
궁예 자, 마시는 게야. 그리고, 밤 새워 얘기를 해 보세....아우가 보고 싶었어. 많이 보고 싶었어.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씬 왕건의 집 사랑
수인이 두 부인에게 절을 올리고 있다. 집 안 가솔들이 다 보고 있다. 왕식렴 형제와 장수장도 보인다.
유씨 먼 길에 고생하였네 그려.
수인 아니옵니다, 형님. 앞으로 잘 보살펴 주시오소서.
오씨 집안의 화목은 자네하기 나름일세. 아시겠는가?
수인 예, 형님.
오씨 집안의 어른은 여기 형님이시지만, 대소사를 관장하는 것은 바로 나일세. 그것도 아시겠는가?
수인 예, 형님.
오씨 호호호, 그러면 되었네. 여기는 철원이고 또한 왕씨 가문일세. 충주에서 배운 것들은 다 잊고 다시 시작해야 할 게야. 명심하게.
수인 예, 형님.
왕식렴 자, 새 형수님께서 오신 날일세. 형님이 궁궐에 다녀오시는 동안 집안을 말끔히 치우고, 잔치상을 준비해 두게나.
장수장 예, 공자님.
왕식렴 자, 형수님 피곤하실터인데 저쪽 후원으로 드시오소서. 무엇 하느냐? 새 형수님을 뫼시어라.
수인 고맙사옵니다, 도련님. (일어서며, 오씨에게) 가보아도 되겠사옵니까?
오씨 (한동안 얼떨떨하다가) 그렇게 하게.
수인이 간다. 당돌한 모습에 오씨는 유씨를 보며 표정이 굳어진다.
씬 다시 대전
궁예가 취했다. 왕건에게 잔을 따른다.
궁예 아우가 전장터에서 공을 계속 세우는 동안 나도 이곳에서 끊임없이 바빴네. 도무지 세상이 내 뜻 같지가 않아.
왕건 ........
궁예 나는 바쁘고, 시간이 없는데 신료들은 그렇지가 않아. 그래서, 법을 강화하고 법회를 엄히 하였지. (마시며) 여러가지 사건도 꽤 있었네. 지난 법회 때는 중 석총이도 죽었지. 그 얘기 들었는가?
왕건 예, 폐하. 들었사옵니다.
궁예 나를 저주하면서 죽었어. 그래서, 그 문도들을 수십명이나 다 생매장 시켜 버렸지. 어쩌겠는가? 법을 강화하려면 그 수 밖에 없어. 관심법이라고 아우도 보았을 게야.
왕건 예, 폐하.
궁예 (계속 마시며) 석총이가 거기에 걸려 들었지. 내가 미륵이 아니라는 게야. 아우가 보기에도 그런가?
왕건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폐하?
궁예 그러니까 죽인 것이야. 석총이는 죽어가면서 내게 말했지. (흉내내듯) 거짓 미륵이시오! 이제 그대의 세상이 다 되었소이다. 이미 다른 미륵이 일어나 내일의 세상을 준비하고 있소이다. 거짓미륵이여!! 저주를 받을 것이외다. 하늘의 저주가 있을 것이외다.
왕건 ......폐하.......
궁예 (다시 술을 마시며) 그런데, 말이야, 아우.
왕건 말씀하시오소서.
궁예 그 석총이가 한 말 말이야. 내 세상이 다 되었다고 하였어. 그리고, 이미 다른 미륵이 일어나서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게야. 그게 누구일까? 그 다른 미륵 말이야?
왕건 .........?
궁예 그 다른 미륵.....?
< 86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