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87회>
씬 1 송악 황궁 대전(밤)
지난 회와 연결된다.
궁예가 왕건을 빤히 보며 다시 말한다.
궁예 석총이는 말이야, 법상종이라는 종파에 최고 고승이라는 게
야. 미륵을 모시는 종파 말이야.
왕건 .....
궁예 그런데, 그자가 그렇게 말을 했어. 이미 다른 미륵이 내일의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이야.
왕건 폐하, 폐하께서는 이 불모지의 땅에서 일어나시어 유일무이한
대 미륵이심을 세상에 보이셨사옵니다.
궁예 그랬지.
왕건 그리고, 오늘의 마진 제국을 이룩하셨사옵니다. 무릇, 한 나
라를 건설하는 일은 하늘의 뜻과 부합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궁예 아우도 그리 생각하는가?
왕건 분명히 그리 생각하옵니다.
궁예 그런데, 석총이라는 놈이 그런 요언을 남기고 죽었단 말이야.
(술 마시며)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고.......
궁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뭔가를 생각한다. 그런 궁예를 한 참 보다
가 왕건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왕건 폐하, 폐하께오서는 신을 아우로 부르시옵니다.
궁예 암, 자네는 내 아우지. 이 세상에 혈육 한 점 없는 나야. 자
네는 내 유일한 아우야. 그렇고 말고.
왕건 하오면,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궁예 음, 말해보게.
왕건 신이 알기로, 백성들과 신료들은 그 옛날과 달리 폐하를 두려
워하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궁예 그건 저들 탓이야. 도무지, 진실이라는 것이 없어. 하나같이
눈치들만 보면서 나를 속이려 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무서운
게야. 양심이 바르고, 마음을 옳게 쓴다면 뭐가 두렵고 무서
울 게 있겠는가?
왕건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폐하.
궁예 그렇지가 않아?
왕건 예, 폐하. 좀 더 따뜻한 눈으로 세상과 만물을 보시오소서.
폐하께서는 신이 뵙기로 뭔가에 쫓기고 계시는 것 같사옵니
다.
궁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왕건 폐하, 무엇이 그리 초조하시옵니까? 무엇이 그리 바쁘시옵니
까? 이미 세상이 폐하를 미륵으로 인정하였사옵니다. 지금은
북벌이 급한 것도 아니고, 또한 아무도 폐하의 그 권위와 위
엄을 넘을 자가 없사옵니다. 하온데도 폐하께서는 서두르고
계시옵니다.
궁예 (정색하며 술잔을 놓는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야, 아우?
왕건 석총 대사를 죽이신 것은 잘못하신 일이옵니다. 또한, 그 문
도들을 생매장 시켰다는 것은 지금도 도저히 믿기가 어려운
말씀이옵니다. 예전의 폐하이시라면 그리 하실 리가 없사옵니
다.
궁예 (격앙되어) 신료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 백성들이 말이
야. 저들이 모두 나를 그렇게 만들었단 말이야. 나는 다 알
아. 내가 관심법으로 보면, 모두 훤히 보여. 다 보인단 말이
야. 그런데도, 저것들이 나를 속이려 하고 있어. 나를 말이
야.
왕건 폐하,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도 미륵이신 폐하를 속이지 못
하옵니다. 믿으시오소서.
궁예 암, 그렇고 말고. 그러니까, 저것들이 나의 관심법에 걸려서
죽는 것이야. 나는 말했어. 시간이 없다고 말이야. (슬픈 듯)
해는 지고 있는데, 저것들이 가려고 하지를 않아. 저것들이
말이야. 아우는 몰라.
왕건 폐하, 해는 내일 다시 뜨옵니다. 옛날로 돌아오시오소서. 현
명하시고, 총명하시며 또한 자비로우신 미륵으로 돌아오시오
소서.
궁예 나의 자비는 끝났어.
왕건 폐하, (강렬하게) 이 철원으로 황도를 옮겨오면서부터 일이
잘못되고 있었사옵니다. 연이어 가뭄과 흉년이 들었고, 백성
들이 온갖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사옵니다. 호족들은 과중한
세금에 원성이 높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노역에 끌려 다니느
라 황폐해져 있사옵니다. 이를 폐하께서 아니 살피시면, 누가
살피오리까?
궁예 그럼 내가 아니 살핀다는 말이야?
왕건 폐하, 돌아오셔야 하옵니다. 지금 급한 것은 삼한을 통일하는
것이옵니다. 북벌은 그 이후의 일이옵니다.
궁예 모르는 소리야. 우리는 삼한 중 제일 북쪽에 있어. 저까짓 백
제나 신라는 아무것도 아니야. 통일을 해봤자, 바다에 막혀
갈 곳이 없어. 우리는 북으로 가야해.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
으면, 안돼. 강한 나라를 만드는 게야. 대 제국을 건설하면,
백성들이 모두 영원히 잘 살 수 있어.
왕건 폐하...
궁예 지금 발해가 썩어서 흔들거리고 있어. 우리 조상들이 일으켰
던 대제국이야. 그 위로 당나라가 있는데, 그것도 무너져서
사분오열이야. 그런데, 우리는 이 작은 곳에 머물면서 금쪽같
은 세월을 허비하고 있단 말이야. 내 말 알아 듣겠는가? 지금
의 고통은 짧아. 우린 긴 복락을 위해서 싸우려고 하는 것이
야.
왕건 가까운 현실이 더 급하옵니다. 제발 현실을 살피시오소서, 폐
하. 간신들의 감언이설에 속지마시오소서. 세상을 살피시오소
서, 폐하.
궁예 (버럭 역정을 내며) 지금 나를 훈계하고 있는 겐가, 아우가?
아우가 나를? (갑자기 아픔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아우가, 나
를.....?
왕건 폐하?
궁예 (독주 마시며) 그건 소인배들 소리야, 소인배들. 아우는 그렇
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 부른 건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게야? 지금 무슨 소리를....
왕건 폐하, 어디가 편찮으시옵니까?
궁예 그래, 가슴이 아파. 아우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내 마
음이 아파. 마음 말이야, 마음.....!
왕건 폐하?
씬 2 동 황궁 내원 외경
종간 (E) 왕장군이 아직도 폐하와 함께 있다고?
씬 3 동 내원 안
은부와 종간이 마주 앉아 있다.
종간 술자리가 꽤 길어지고 있는 모양이구먼 그래.
은부 폐하께오서는 일찍부터 취기가 있으셨다 하옵니다.
종간 (한숨) 그 병때문이실세. 그것을 이기고 감추시기 위해 그 독
한 소주를 들고 계시지 않는가? 지난번에도 그 밤에 밖에서
그리 하셨고..... 걱정일세. 병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계셔.
은부 그렇사옵니다. 황실은 물론이고, 신료들도 알 사람은 다 아는
눈치였사옵니다.
종간 이제 왕건이도 알게 될 것이야. 그것이 두렵네. 지난번 왕건
이의 개선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모두 대대적
으로 열렬히 환영을 했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네.
무서웠어.
은부 내원어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왕건이 공이 좀 있다하여,
잠시 사람들이 반긴 것이지, 그렇게까지야.....
종간 (도리질하며) 그런 말 말게. 나는 아네. 많은 인심이 이미 이
황실을 떠나고 있네. (간절히) 어이할고..... 저 폐하의 병을
도대체.... 어찌 돌봐드릴 수가 있을고.... 누가 어떻
게.....?
괴로워서 눈을 감는 종간의 표정에서....
씬 4 동 황궁 황후전
연화가 제조상궁에게 묻고 있다.
연화 왕장군이 폐하와 어주를 들고 계신다고?
제조 예, 황후마마. 초저녁부터 줄곧 드시고 계신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한숨) 왕장군도 지금쯤은 다 알고 계실 게야. 이미 폐하께서
병이 깊으시다는 것을 말일세.
슬이 한번쯤 마마께서 조언을 구하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연화 글세다. 너는 지난번에도 그런 말을 하였다만은.... 왕장군이
라한들 어떤 묘책이 있겠느냐? 그 많은 신료들이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내원까지도 말이다. 앞으로가 걱정
이다.
두사람 ........
연화 신료들과 백성들이 모두 원성이 높다고 들었다. 언제 어떻게
변하실지 모르시니, 나도 좌불안석이로구나.
슬이 왜, 이름있는 의원들을 아니 찾으시는지 모를 일이옵니다.
제조 소인이 듣기로는 폐하를 담당할 의원들이 없다고 들었사옵니
다. 그 때문에 지난번 어의도 황궁을 나가버렸고...
연화 (한숨) 우리 태자들이 걱정이로다. 아니, 그보다도 갈수록 더
하시다 들었는데, 폐하는 저러다가 어찌 되실꼬?
슬이 왕장군을 한 번 만나보시오소서.
연화 (끄떡이며) 그래,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여보게, 진내
관.
진내관 예, 황후마마.
연화 적당한 기회를 한번 만들어보도록 하게나.
진내관 예, 마마.
연화 아,아, 어이할꼬.... 정말 어이할꼬.....
씬 5 다시 대전
이미 궁예는 많이 취해 있다. 통증이 가라앉은 듯 왕건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 한쪽에서 최응이 담담히 보고 있다.
궁예 이보게, 아우.
왕건 예, 폐하.
궁예 사내로 이 세상에 한 번 나왔으면, 야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야. 내가 준비하고 있는 북벌군에 총사를 맡게나.
왕건 폐하, 지금은 백제와 신라의 전선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현실
이옵니다. 북벌은 그 이후에 도모하시오소서.
궁예 어, 허... 이렇게 말을 못 알아 듣는가? 아우가 이거 왜 이렇
게 약해졌어?
왕건 폐하...
궁예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내가 의형대에 지시했던 것 말이야. 그것 좀 이리 가지고 와
봐.
최응 예, 폐하.
최응이 한 권의 책을 들고 조심스럽게 바친 후 물러난다.
궁예 이건 말이야. 중원의 역대 황제들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썼던
형벌들을 간추린 것이야. 즉, 강력한 법을 집행하는 법 말이
야.
왕건 ...... (답답하고, 한심스럽다)
궁예 법을 강하게 세우려면, 형벌도 따라 주어야해. (책장 넘기며)
자, 이것은 끓는 기름가마에 사람을 쳐 넣어 죽이는 것이고,
또 이쪽은 산채로 태워 죽이는 것이고,
왕건 ...........
궁예 (계속 넘기며) 이쪽은 참형, 이쪽은 생매장해서 죽이는 것이
고, 이쪽은 코를 잘라 죽이는 비형이고, 이쪽은 이마에 인두
를 지져 넣는 도형이고, 기가 막힌 형벌들이 아주 많아요.
왕건 폐하, 법은 정의로써 세우는 것이옵니다. 결코, 형벌이 아니
옵니다, 폐하. 자비로써 백성들을 다스리시오소서.
궁예 (던지듯 책을 놓으며) 아우가 영 달라졌어. 옛날에는 결코 나
에게 이러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관심법을 한 번 써야 할
까봐?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최응 ..........
왕건 ........(절망적이다)
궁예 아니지, 그래도 내가 어떻게 아우에게 관심법을 쓰겠는가? 어
쨌든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넓고 크게 세상을 보란 말이야.
아우는 내 분신이야. 어떻게하든 대 제국 건설에 참여를 해야
해. 알겠는가?
왕건 (마지 못해) 예, 폐하......
궁예 하하하, 사내란 꿈이 없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야. 나와 함께 북으로 가는 것이야. 우리 곧 예성강에 있는
수단(水壇) 훈련장으로 가보세. 자네 사촌아우가 그곳에 책임
자로 있지? 해군의 총 본산이야.
왕건 예, 폐하.
궁예 (미친 듯 웃으며) 내가 살아있을 때 제국의 완성을 보아야해.
나와 아우가 그 일을 꼭 해내야해. 꼭 말이야. 꼭...하하하하
하.......
궁예는 계속 웃는다. 왕건이 침묵으로 보고 있다. 미쳤다. 궁예는 흡
사 실성한 사람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씬 6 저자 거리, 아지태집
외경
씬 7 동 집 안
아지태가 생각에 잠겨 있다. 임춘길, 입전, 신방이 마주해 있다.
임춘길 아학사어른, 뭘 그리 깊이 생각하시옵니까?
아지태 그 왕건 장군 말일세. 철원으로 돌아올 때 모습을 보지 않았
는가?
임춘길 아, 그것 말이옵니까? 마치, 폐하께서 행차하시는 것처럼 대
단들 했사옵니다.
아지태 그랬었지.
입전 그럴만 하지 않사옵니까? 어려운 전투 때마다 나가서 전장에
판도를 바꾸어 놓은 사람이옵니다.
아지태 그러게 말이다.
신방 헌데, 결국 그렇게 많은 신료들이 나와서 대대적으로 환영을
했다는 것은 폐하 스스로 위엄에 손상이 가지 않겠사옵니까?
아지태 그럴 수 있지. 신하가 황제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황실의 권위를 깎아 내리는 일이 되지.
임춘길 지금 같은 정국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사옵니까?
아지태 맞는 말이야. 난 지금 그걸 생각하는 중이야. 세상의 인심이
지금의 황제를 떠나고 있어. 황제의 병이 깊어질수록 예측하
기 어려운 일들이 계속 될 게야.
임춘길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 아니옵니까?
아지태 이미 걱정은 시작되었네. 얼마나 더 가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
겠지. 새로운 사람이 필요해. 왕건이라면 아주 적격인데.....
너무 우유부단하고 조심성이 많아.
임춘길 아학사어른께서 나서시면 어떻겠사옵니까?
아지태 내가 말인가? 하하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직
도 우리는 그러기에는 여러모로 기반이 약해. 정치란 여러가
지 고리로 서로 얽혀 있는 것이야. 세상에 인심도 얻어야 하
고, 또 군부의 힘도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아직 우리는 아
니야.
임춘길 그렇다면 왕장군을 한 번 만나보시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아지태 (끄떡인다) 그래, 한 번 이야기는 나누어 볼 필요가 있어. 지
금의 때가 그럴 때이고....
씬 8 새벽길
아침이 밝아 오고 있다. 장수장과 가졸들이 왕건을 모셔가고 있다.
왕건은 말을 타고 가며 생각이 많다. 도리질을 한다.
궁예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미친 듯한 웃음소리....
왕건 (E) (긴 한숨) 너무도 변하셨구나. 뭔가가 있으시다. 돌이킬
수 없고, 결코 해결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병이
깊으신 것이다. 병이시다.
왕건이 긴 한숨을 쉬며 그렇게 멀어지는 모습에서 디졸브되면....
씬 9 왕건의 집 외경(낮)
씬 10 동 집 사랑
세 여인과 두 형제, 그리고 세 가신과 태평, 유천궁들이 모여 있다.
차를 마시고 있다.
유천궁 어제는 황궁의 대전에서 밤새 술을 들었다고?
왕건 예, 장인어른.
유천궁 폐하께서는 술이 아주 세신데, 고생했겠네 그려.
왕건 허허, 이제 저도 어지간히 마시옵니다, 장인어른.
유천궁 조정에 나가는 길에 잠시 들렸네. 새 식구도 좀 보고 싶고
해서. 참으로 참하고 영특해 보이네.
수인 아까부터 이렇게 칭찬만 주시옵니다.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
다.
유씨 자네가 품성이 그리해 보이니, 말씀을 하시는 게지.
수인 고맙사옵니다, 큰형님.
오씨 정말 빈틈이 없는 아우가 아닙니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고
아주 당당하옵니다. 대가집 며느리는 이래야지요.
수인 감사하옵니다, 형님.
오씨 감사는 무슨... 아무쪼록 그 기개를 잃지 말게나.
수인 예, 형님.
이들의 말속에는 뼈가 있다. 왕식렴이 눈치채고 거든다.
왕식렴 아무튼, 세 분 형수님이 계시니 집안이 든든하옵니다. 아니
그런가, 신아우?
왕신 어찌 아니 그렇겠사옵니까? 넓고 커보이던 이 집이 정말 훈기
가 가득한 것 같사옵니다, 하하하...
유천궁 내가 보아도, 모두들 정말 화목해 보이고. 좋아보이네 그려.
암... 집안이 편안해야 바깥일도 다 좋은 것이야. 그리고, 태
평이라고 하였는가?
태평 예, 광치나 어른.
유천궁 자네 얘기는 많이 들었네. 우리 사위가 복이 있어서 자네 같
은 사람을 만났네 그려. 많이 도와주시게나.
태평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유씨 (눈치를 잡고) 자, 바깥일들 의논하시는데 우리는 그만 일어
나세.
오씨 예, 형님.
세 여인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나간다. 그들이 나가자 분위기는 금방
변한다.
유금필 폐하와 밤을 새우셨다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겠사옵니다?
왕건 뭐, 술이 워낙 취하여 별 기억이 없네 그려.
능산 주군께서 보시기는 어떠하셨사옵니까? 폐하 말씀이옵니다.
왕건 ........ 어떻다니?
능산 많은 소문들이 무성하게 나돌고 있사옵니다.
박술희 .......
왕건 신하된 자로써 어찌 폐하를 가늠하는 말을 하는가? 그것은 불
경일세. 해서는 아니될 말이야.
왕식렴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를 않사옵니다. 지금 이 철원은 그야말
로 아귀지옥이옵니다.
왕건 ........(눈을 감는다)
태평 이곳에 와서 잠시 귀동냥을 해보았사옵니다. 사실 힘이 들고
처참하고 어렵기가 말로 다 할 수 없었사옵니다.
왕건 큰 일을 하시자면, 때로는 어려움도 있는 법이라네.
유천궁 물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일 것이야. 허나, 사정
이 그렇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폐하께서는 미륵의 자리에서
떠나신지 오래되셨어. 매일처럼 신료들은 과연 누가 그 관심
법에 걸려 들 것인가? 그것만을 생각한다네. 자네 아우의 말
처럼 이 철원은 지금 지옥이야.
왕건 장인어른께선 신료 중 가장 윗자리에 계시옵니다. 현실이 그
렇다하더라도 말씀은 살펴서 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유천궁 나는 이 벼슬이 싫네 그려. 물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관
심법이 무섭기 때문이지. 자네도 주의해야 할 것이야. 한 번
걸리는 것으로 끝이 난단 말일세.
왕건 (한숨) 모두들 걱정하고 계시는 것을 잘 아옵니다. 제가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하지만, 누구보다도 우리는 주의를 해야 하
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우리 집을 향해 있사옵니
다.
유천궁 허허허, 그건 그러하이. 이미 폐하 다음으로 사람들은 내원이
나 아지태보다 자네를 주시하고 있어. 옳은 말일세. 옳은 말
이야, 암....
씬 11 황궁 병부
복지겸, 염상, 환선길, 김락, 홍유, 배현경, 이흔암, 천부장 들이 모
여 있다.
복지겸 폐하께서 수단에서 훈련 중인 우리 수군을 보신다 하오이다.
환선길 아, 당연한 일이지요. 그 추운 밤 중에 우리 보군과 마군의
훈련장에도 오신 폐하이시오이다. 우리 수군은 중요한 군대올
시다. 당연히 궁금하시겠지요.
이흔암 허지만, 수단은 아직 우리 보군이나 마군보다도 준비가 덜 되
었을 것인데...
복지겸 사실, 말이 아니올시다. 편성된 군사들의 수도 부족하고, 배
는 많이 징집해 놓았지만, 훈련도 부족하고....
홍유 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보이는 수 밖에 없지 않겠소이까?
김락 그렇기는 하지만, 폐하께서 노하실까 그게 두려운 것이지요.
배현경 그건 그렇소이다. 폐하께서 하도 엄해지셔서 말입니다.
염상 매사를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요즘따라 폐
하의 심기가 많이 불편하시니 말입니다.
환선길 뭐가 들 그렇게 겁이 나서 전전긍긍하시오이까? 폐하께서는
다 아십니다. 아, 그 관심법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노력하면
노력한대로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잘 못 됐으면 벌도 들 받
아야지요. 다 충성심이 부족해서 그래요. 충성심 말이오.
이흔암 옳은 말입니다, 형님. 아, 폐하께서 실성하시지 않고서야 왜
함부로 아무나 혼을 내시겠습니까? 안그렇소이까?
모두들 ........?
환선길 (헛기침하며) 아, 이 사람아. 그렇다하더라도 실성이 뭔가,
실성이? 거, 자네도 영 글을 배우지 못해놔서... 에잉...쯧쯧
쯧..
이흔암 아, 그렇게 되었습니까요? 어흥, 어음..음...
복지겸 아무튼, 걱정이 앞섭니다. 걱정이예요.
씬 12 길
궁예와 왕건, 연화, 최응, 그리고 종간, 은부들이 내군들의 호위 아래
가고 있다. 제조상궁, 슬이, 진내관, 대전내관들도 따른다. 그 뒤로
유천궁을 비롯한 박지윤 부자, 장자1,2, 강장자, 왕식렴, 왕신, 세 가
신과 태평, 그리고 아지태, 입전, 신방, 임춘길 들도 따르고 있고, 복
지겸, 환선길, 이흔암, 홍유, 김락, 배현경, 염상, 천부장들도 보인
다. 신료들이 총 동원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궁예 (왕건에게) 좋은 날씨로다. 이러고 보면 우리가 오랜만에 송
악으로 가는 것 같네 그려. 족히 이틀 길은 될 것이야.
왕건 그럴 것이옵니다.
궁예 군대는 역시 보군이나 마군과 더불어서 수군의 힘이 커. 특히
나, 이 삼한처럼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고, 큰 강이 많은 나
라에서는 수군의 힘이 절대적이지.
왕건 그렇사옵니다.
궁예 이보시오, 황후.
연화 예, 폐하.
궁예 우리가 왕장군과 함께 길을 나서는 것도 참 오랜만이오.
연화 그렇사옵니다, 폐하.
궁예 하긴, 왕장군은 늘 바빴어. 많은 시간들을 전장터에 있었거
든. 저 뒤에 오고 있는 아우의 그 부장들 말이야?
왕건 말씀하시오소서.
궁예 병부에서 올라온 장계를 보니, 충주전선에서 활약이 대단했더
구먼. 그에 마땅한 상급들을 내려야 할 것인데.
왕건 이미 폐하의 크나크신 은총을 받고 있사옵니다, 별다른 상급
이 뭐가 필요하겠사옵니까? 이미, 장수들의 반열에 올라있사
옵니다.
궁예 아, 마땅히 장수가 되어야지. 새로운 군사도 하나 얻었다지?
왕건 예, 태평이라는 자이온데, 학식이 많고 지략에도 밝았사옵니
다.
궁예 그게 다 왕장군의 복이고, 나라의 복이야.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이제 저들을 좀 더 넓고 크게 써야 할 것이야. 늘 왕장군 그
늘에만 있게 할 것이 아니라 장수로써 독자적인 지휘경험을
쌓아야 하거든.
왕건 그건,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궁예 한 번 생각해보게나. 내 병부에도 얘기를 함세.
이들은 길을 지나고, 어느 촌락을 지난다. 민가들이 여러 채 보인다.
궁예 일행이 그 민가 사이를 지나고 있다.
씬 13 그 곳
백성들이 길가에 엎드려 있고, 담 한쪽에는 다른 백성들이 숨어서 가
고 있는 궁예들을 보고 있다. 백성하나가 툴툴거린다.
백성1 저, 애꾸놈이 이 나라의 황제라네. 백성이 죽던 말던, 저밖에
모르는 미치광이야.
백성2 왜, 아닌가? 이 나라의 고승들을 때려 죽이고, 신료들도 마구
죽인다지?
백성1 그것 뿐인가? 백성들은 굶어 죽으며 유리걸식하는데, 제 놈은
매일처럼 술만 처먹고 산다네.
백성2 고얀 놈일세. 어디 돌맹이 세례나 보여주세 그려.
백성1 좋지.
궁예들이 가까이 오고 있다. 백성들은 담 밖에 숨어서 사정권 안에 들
기를 기다리다가 일산을 쓰고 오고 있는 궁예를 향해 돌을 던진다. 그
중 하나가 내관에 맞았고, 또 하나가 날아오더니 궁예의 머리에 맞았
다. 백성들은 이미 도망쳤다. 궁예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내군들이
다가와 에워싼다.
왕건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세상에, 이럴 수가.....
연화 폐하....?
종간 무엇 하느냐? 폐하를 뫼시어라.
은부 폐하를 뫼시어라.
금대를 비롯해 장일과 내군들이 궁예를 가까이 에워싼다. 은부가 급히
소리친다.
은부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궁예 (끄떡인다, 분노 같은)......
은부 (그제서야) 무엇들 하느냐? 돌을 던진 놈을 잡아오너라. 어
서....
종간 폐하를 한쪽으로 뫼시거라, 어서. 의원을 오라하라.
아수라장이다. 신료들도 하얗게 얼어 붙었고, 그 혼란 속에서 궁예가
말에서 내려선다. 그리고, 한쪽으로 옮겨진다. 디졸브 되면...
씬 14 동 마을
내군들이 뒤지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울부짖고, 피폐한 모습의 백성들
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장일이 지휘하고 있다.
장일 누구냐? 누가 폐하께 돌을 던졌느냐?
노인1 우리는 모르오, 아무것도 모르오.
장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끌어 내거라. 다 끌어 내라.
군사들이 대답소리와 함께 여기서도 아우성들이다. 아비규환이다.
씬 15 그 길 어느 일각
의원이 궁예의 돌 맞은 상처를 돌보고 있다. 치료가 끝난 듯 눈치를
보며, 어물거리자 궁예가 가라고 손짓한다. 궁예는 분노로 떨고 있다.
신료들이 우 다가와 묻는다.
유천궁 괜찮으시옵니까, 폐하?
궁예 ......
박지윤 세상에, 이런 불경스러운 무리들이 있는가? 폐하께 이런 욕을
보이다니... 이런 세상에....
환선길 아, 군사들은 무엇을 하는 게야? 왜 범인을 잡아 오지 못하는
게야?
왕건 .......
아지태 백성들이 폐하께 돌을 던지다니, 이것은 이 고을을 지키는 관
리부터 책임을 물어야 할 일 같사옵니다.
그 한쪽으로 장일이 늙고 어린 백성들을 무더기로 끌고 오고 있다.
은부가 보다가 묻는다.
은부 어느 놈이 돌을 던졌느냐?
장일 누가 범인인지는 알 수 없사옵니다. 그 때문에 남아 있는 백
성들을 모조리 끌고 왔사옵니다.
종간 누구냐? 누가 돌을 던졌느냐? 누가?
노인1 우리는 모르오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소이다.
왕건 돌을 던진 자들은 아마도 도망을 친 듯 싶사옵니다.
궁예 허허, 내가 백제군의 화살은 맞아 보았지만 백성들의 돌을 맞
은 것은 처음이야. 이런 무지렁이들이 있는가? 글세, 백성들
이 이래.
모두들 ........
궁예 이보시오, 광치나.
유천궁 예, 폐하.
궁예 그대가 신료들 중 으뜸이야. 어떻게 백성들을 가르쳤길래 이
모양인가?
유천궁 황공하옵니다, 폐하. 워낙 어리석은 백성들인지라....
궁예 되지 않는 나무는 빨리 베어 버려야해. 그걸 잘 키우려다가
다른 나무까지 상한단 말이야. 이보게, 은장군.
은부 예, 폐하.
궁예 이 불쌍한 것들을 모조리 우리 속에 한꺼번에 집어넣고, 태워
버리게나.
왕건 폐하......?
궁예 이 마을도 모조리 불 질러 없애 버리고, 살아 있는 가축과 짐
승들은 끌어다가 도축하여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게 하라.
은부 예, 폐하. 폐하의 말씀을 들었느냐? 속히 시행하라!
내군들 예......
금대 이 자들을 끌고 가라. 마을을 불태워라.
노인1 (끌려가며) 폐하, 살려주시오소서. 폐하....
노인2 저희는 죄가 없사옵니다. 은헤를 베푸시오소서, 폐하...
왕건 폐하,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오소서. 폐하께오서는 이들의 어
버이시며, 이 나라의 황제폐하이시옵니다. 폐하....
모두들 ........
왕건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오소서, 폐하.
궁예 그럴 일이 아니야. 저들이 나를 버렸는데, 나만 어떻게 용서
를 한단 말인가? 이미 틀린 싹이야. 없애는 게 나아. 어서,
시행하라.
내군들 예, 폐하.
왕건 ........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내군들이 달려오고, 백성들이 울부 짖으며 끌
려간다. 궁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상처를 만지며 보고 있다. 왕건은
다시 한 번 절망한다. 마을에 불이 붙고 있다. 왕건은 어쩔 줄 모른
다. 태평은 그런 왕건을 보고 있고, 연화도 어쩔 줄 모르며 왕건을 본
다. 그들의 시선이 그렇게 잠시 교차되어 지나치면서.. 백성들의 비명
소리와 그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다시 왕건의 표정이 디졸브되
면......
씬 16 수단 훈련장(밤)
군사를 사열하는 궁예의 모습이 보인다. 북소리와 함께 소라 소리가
들리고, 수많은 전함들이 위풍당당하게 궁예 앞을 지나쳐 가고 있다.
신료들도 모두 일사불란하게 보고 있다.
왕식렴 폐하, 이번에 새로 건조된 폐하의 전함들이옵니다.
궁예 지금 잘 보고 있네. 아주 좋아. 저들이 모두 마진의 수군이란
말이지?
왕식렴 예, 폐하.
궁예 형은 수륙양면에서 뛰어난 장수이고, 동생은 또한 바다의 명
장일세 그려.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환선길 대단하옵니다, 폐하. 여기 병부령이 우리 수군에 준비가 덜
되었을 것이라고 한참 걱정을 하던데.... 그렇지가 않은 것
같사옵니다.
복지겸 하오나, 폐하, 수군은 전함과 더불어 육지에 상륙하는 육전대
가 있어야 하옵니다. 아직 그 점이 좀.... 준비가 덜 되었다
고 들었사옵니다.
궁예 아, 그거야 그럴 수가 있지. 훈련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
다는 것은 나도 알아. 자, 수단령.
왕식렴 예, 폐하.
궁예 계속 보여주게나. 지금 많은 배들이 지나가고 있어. 이제 뭍
으로 상륙하는 것을 좀 보고 싶은데 말이야.
왕식렴 예, 폐하. 하오면 잠시 해안 쪽으로 이동을 하셔야겠습니다만
은.
궁예 아, 그렇게 하세나. 자, 저쪽으로 옮겨가서 보세나.
씬 17 동 근처 해안
역시 궁예와 신료들이 자리를 잡았고, 말들이 달리고 있다. 배에서 상
륙하는 기마병들이다. 흡족한 듯 궁예가 끄떡인다. 곳곳에 횃불들이
타오르고 있다. 사다리가 내려지고, 군사들이 옮겨지고, 공격용 중장
비들이 옮겨지고 있다. 궁예는 연신 끄떡인다. 그러다가, 궁예가 멈칫
하며 한쪽을 본다. 성문을 공격하는 포차를 운반하다가 바퀴가 빠져
주저 앉았다. 아무래도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왕식렴 (민망한 듯) 폐하, 아마도 실수가 좀 있었나보옵니다.
궁예 음,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훈련이 필요한 게 아닌가?
왕식렴 신라의 포로들 중에서 쓸만한 자들을 골라 우리 군사로 훈련
을 시키고 있사온데, 아무래도 그리 뛰어 나지는 못하옵니다.
궁예 신라? 지금 신라라고 하였어?
왕식렴 예, 폐하.
궁예 신라라니? 이보시게, 병부령.
복지겸 예, 폐하.
궁예 아니, 내가 뭐라고 하였어. 지난 번 환장군에게 갔을 때에 신
라의 군사들을 다 빼라고 하였잖아?
복지겸 그렇기는 하오나, 워낙 군사들의 수가 부족한지라....
궁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게야? 신라라니? 저 썩어 빠진 것들이
어떻게 전쟁을 해? 저건 우리 백성이 아니야.
왕건 ........
궁예 오늘 날 신라가 왜 주저 앉고 있는가? 정신이 썩어서 그런 것
이야. 정신이.... 이보게, 수단령.
왕식렵 예, 폐하.
궁예 여기 지금 신라 출신이 얼마나 되는가?
왕식렴 오늘 전투에 참가한 자들이 백여명 정도가 되옵니다.
궁예 그래, (잠시 관심법을 쓴다, 눈을 뜨고) 안되겠어. 다 끌어내
게.
왕식렴 예?
궁예 다 끌어내서 없애버려.
모두들 .........
왕건 .......?
궁예 아, 무얼 하는 게야? 저 멸도에서 온 쓰레기들을 치우라고 하
잖아?
왕식렴 폐하, 배..... 백여명이 넘사옵니다.
궁예 아, 없애라고 하지 않는가? 다 끌어내.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배위로 끌고 올라가 바닷속에 쳐 넣어라.
종간은 눈을 감는다. 아지태는 담담히 보고 있고, 연화는 가슴을 부여
잡고 벌벌 떨고 있다. 신료들은 모조리 얼어 붙어 있다. 그들의 면면
이 그렇게 지나친다. 이번에는 왕건도 아무말을 하지 못한다. 보고 있
던 은부가 소리친다.
은부 폐하의 영이시다. 신라 포로 출신들은 모조리 끌어 내라.
내군들 예........
다시 한 번 아비규환이다. 내군들이 달려들어, 신라 출신들을 모조리
배 위로 끌고 간다. 참담한 일들이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살려달라고
빌고, 비명을 지르고, 그들을 모두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 그대로
바다 속에 쳐 넣는다. 바다는 시체로 덮이기 시작한다.
해설 궁예의 엄청난 만행, 고려사 실록 권1에 보이는 당시의 상황
을 요약해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벑溜㎰?이르러 궁예는
신라로부터 항복해온 자들을 다 죽이었고, 나날이 포악해져
갔다. 또한, 반역이라는 죄목을 덮어 씌워 하루에도 백여명씩
죽이었다. 이때 장수나 정승으로써 해를 입은 자가 많았고,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관심법을 취득하여, 무엇이든
알아 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사가 비록 승자의
기록이어서 그 표현이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분명 궁예가 변하
여 몰락해 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그 무렵 마진에서는 이렇게 무서운 폭정이 자행되고 있
을 때 견훤은 여전히 마진이 나주라고 부르는 그 금성 가까이
에 있었다.
씬 18 무진주 성 외경(낮)
씬 19 동 성 안
견훤과 장수들이 가득히 모여, 새로 그려온 나주 관내의 지형도를 보
고 있다. 그것은 무주의 군현도이다. 그 내용을 보며, 영산강 일대와
더불어 무주(광주)와 경계하고 있는 지점들을 표시하고 있다.
강변과 섬들이 있는 해제현(해제면)과 무안군(무안읍), 회진현(다시
면)과 금성군(나주시)으로 이어지는 영산강 일부에 전함들이 수없이
늘어져 있다.
수달 (설명한다) 우리는 지금 현재 여기 해제현과 압해군(지금의
임자도 해역) 사이를 마진국과 경계로 하고 있사옵니다. 더불
어, 이 해안지역과 영산강 일대의 거리는 불과 수십리에 불과
하옵니다. 그 사이에 무안군이 있사옵니다. 우리는 이미 해군
력을 확보하였고, 또한 삼천의 기마병과 이천의 보군, 그리고
또 다시 이천의 예비부대를 편성하여 놓았사옵니다. 이번 전
투는 우리가 반드시 이길 것이옵니다.
최승우 이것은 해안전선의 부대편성이고, 후방의 편성은 어떻소이까?
수달 후방은 군사의 재편성과 보급기지를 여기 무안군 뒤로 하고,
그훈련은 함풍현과 다기현에서 실시될 것이며, 그 총 본사는
무진주에 둘 것이올시다.
견훤 옳은 말이야. 여기 무진주와 최전방인 압해군 지점에 중간 기
지를 두는 것은 아주 잘했어. 우리 해군력은 어디에 포진시킬
것인가?
수달 마진의 왕건이는 분명 대대적인 함선을 이끌고 내려올 때에
이쪽 서해를 횡단하여 해제면 가까이에 이르러 이 섬들 사이
를 지날 것이옵니다. 그리고, 서서히 압해군으로 들어오면서
예전처럼 영산강의 목포로 들어가려 할 것이옵니다. 이들을
이 압해군 염해현에서 막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옵니다.
견훤 나도 그렇게 보았어. 어차피, 이번 전쟁은 수전이라기 보다
내륙전쟁이야. 저들을 유인하여 해안으로 끌어 들인 다음 배
와 병사들을 몰살시킨다면 좋지 않겠는가?
능환 기가 막힌 전술이옵니다. 이미 폐하께서 나와 계시니 저들은
긴장하고 있사옵니다. 분명 왕건이 올 것이고, 많은 함선이
동원될 것이옵니다.
신덕 그럴 것이옵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바람이 북서풍이옵니다.
즉, 내륙에서 바다 쪽으로 불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저들에게
불리하옵니다.
추허조 아무튼, 우리 쪽이 여러모로 우위를 점하고 있사옵니다. 군사
도 많고, 배도 많고, 무엇보다도 그 준비를 오랫동안 단단히
해왔사옵니다. 이번이 기회일 것이옵니다.
박영규 길게 더 시간을 끌 것이 아니라, 이제 공격을 시작하면 어떠
하오이까?
능애 허허, 그것을 몰라서 이러고 계시는 것이 아닐세. 폐하께서는
지금 단 한편에 전쟁을 끝내려고 하시는 것이야.
애술 한판이라니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능애 쉽게 말한다면, 왕건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일세. 왕건이가
많은 군사와 배들을 가지고 오면, 기다렸다가 전멸을 시키시
려는 것이야. 다시는 이 금성을 넘보지 못하도록 말이야.
견훤 잘 보았네. 아우가 잘 보았어. 내가 기다리는 건 바로 그것이
야. 다시는 마진국의 군대가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야. 경들도 그 점을 명심하게. 이번 전쟁만은 목숨을 다하여
야 할 것이야.
모두들 망극하옵니다.
견훤 그리고, 이쪽에 전쟁이 커질수록 또 다른 쪽이 걱정 되게 되
어 있어. 이보게, 이찬.
능환 예, 폐하.
견훤 그리고, 사위.
박영규 예, 폐하.
견훤 두 사람은 황도로 돌아가게. 수도를 오래 비워 둔다는 것은
아니될 말이야.
능환 하오나, 폐하 신도 이곳에서.....
견훤 그렇게 해. 또, 추장군과 김총, 지훤, 최필 장군은 다시 낙동
강 전선으로 가게. 거기서, 마진국의 동태를 살펴야 할 것이
야.
그들 예, 폐하.
견훤 그리고, 이곳 전선의 총사는 수달 아우가 맡고, 공장군과 방
장군 말이야.
두사람 예, 폐하.
견훤 지난 날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를 여기서 복구하도록 하게.
두사람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목숨이 문제가 아니야.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야. 명예말이야.
사내는 목숨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명예야. 나는 지금 그것을
되찾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야.
두사람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견훤 하늘은 우리 편이야. 왕건이 오기를 기다리세. 그리고, 그 위
에 대 백제국의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천하에 알려주도록 하
세.
씬 20 나주 관아 외경
군사들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긴장이 감돌고 있다.
씬 21 동 관아 안
김언, 오다련 두 사람이 심각하게 마주보고 있다.
김언 태수어른, 백제군의 동향이 갈수록 심각하옵니다.
오다련 황제가 나와 있소이다. 견훤 황제 말입니다. 그러니, 심각할
수 밖에요. 이번에는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것 같소이
다.
김언 수많은 배들이 다 징집되었다고 하옵니다. 영산강으로 들어오
는 해안가 백여리가 모조리 백제군의 전함으로 덮여 있다고
하옵니다.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오다련 우리의 수군은 그 상당수가 지금 송악에 돌아가 있소이다. 전
투병력도 상당수는 그곳에 있구요. 전투가 벌어지면, 그때 내
려오는 조건으로 돌아가 있소이다. 그들이 와야지요.
김언 그렇게 되겠습니까? 지금 나라 사정이 엉망이라고 합니다. 북
벌이니 뭐니 해서 폐하께서 직접 단속을 하고 계신다 들었습
니다. 이곳에 과연 신경을 쓸 겨를이 있겠습니까?
오다련 수차례 급한 전령을 보냈소이다. 기다려 보십시다. 어렵게 얻
은 이 나주를 그렇게 내주기야 하겠소이까?
씬 22 철원 시가지/
인서트(밤)
씬 23 황궁 어느 전각
유천궁과 박지윤, 장자1,2가 모여 있다.
유천궁 전선에서 병부로 계속 장계가 올라오고 있다 하오이다.
박지윤 나도 얘기 들었습니다.
유천궁 견훤왕이 직접 전선에 나와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답니다.
조속히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인데....
장자1 대책이 무엇이겠소이까? 군사와 장수들을 빨리 보내주는 것이
대책이 아니겠습니까?
장자2 그게 아니되니까, 답답한 것 아니겠소이까? 아, 지금 북벌 준
비에 바쁜데 나주로 빼돌릴 병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박지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북벌이라니요? 백제군과 신라군이 턱
밑에 와서 칼을 대고 있는데, 북벌이라니요?
장자1 그렇습니다. 이 나라가 과연 어찌되려고 그러는지... 지난 번
그 송악에서........아이구.....
장자2 허, 왜 이러십니까? 목이 몇 개나 되신다고 그런 말씀을....?
사방에 귀가 있소이다.
장자1 뭐, 그렇기는 하지만서도....
씬 24 황후전
연화가 공포에 질려 생각에 잠겨 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
옆에 백씨와 슬이가 함께 해 있다.
연화 더는 안돼. 이대로는 더는 안돼!
백씨 .......
연화 슬이야.
슬이 예, 마마.
연화 도대체, 진내관은 어디 갔느냐, 어디에 갔길래 보이지를 않
아?
슬이 지난번에 황후마마께서 말씀하신 그 일을 알아보고 있는 줄로
아옵니다.
연화 그 일이라니, 무슨 일?
슬이 왕건 장군을 만나 뵙는 일 말이옵니다.
백씨 세상에, 마마...지금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건 장군을
만난다고 하셨습니까, 마마?
연화 그렇습니다, 어머님.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중신들과 백성들
만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곧 죽게 됩니다. 모르십니까?
백씨 그렇다 하더라도, 마마께서 왕장군을 만나신다면.... 대체 그
걸 폐하께서 아신다면 어쩌시려고...?
연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벌벌 떨며 눈치나 보다
가 속절없이 죽게 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황궁이 무너집
니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폐하께서는 제 정신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어머님도 또한 아버님도 조심하라고 하는 것 아닙니
까?
백씨 아무리, 그렇지만....
연화 누구라도 만나야 합니다. 지금은 그럴 때입니다, 어머니.
씬 25 왕건 집 외경
씬 26 동 집 사랑
왕건이 생각에 잠겨 있다. 태평이 그 옆에서 한마디 거들고 있다.
태평 주군, 아무래도 이 철원에는 오래 계셔서는 아니될 것 같사옵
니다.
왕건 ....(끄떡인다)
태평 폐하께서는 이성을 잃은지 오래되셨습니다. 폭군이라고 말하
기보다는 실성한 사람이 맞을 것이옵니다.
왕건 너무 많이 변하셨어.
태평 일신을 보존하시려면, 이곳을 떠나셔야 하옵니다. 듣자하니,
나주와 더불어 여러 전선들이 불안하다 하옵니다. 자원을 하
시오소서. 떠나셔야 하옵니다.
왕건 글세.... 어떻게 해야 할 지 나도 모르겠네. 이곳 철원은 너
무 많이 변해서 말이야. 모든 것이 생소하고 낯이 설어.
그때, 밖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지태 (E) 계시오이까? 계시오이까? 아지태란 사람이 왔소이다. 왕
장군 계시오이까?
씬 27 동 마당
아지태 (E) 계시오이까? 계시오이까? 아지태란 사람이 왔소이다. 왕
장군 계시오이까?
장수장과 집사장이 달려가 문을 열자, 그곳에 아지태와 임춘길이 서있
다. 아지태가 웃으며 말한다.
아지태 왕장군은 계시는가?
장수장 예, 아학사 어른이 아니시옵니까?
아지태 그렇다네. 은은한 녹차 한잔 생각이 나서 왔다네. 어허, 저기
나오시는 구먼.
왕식렴과 왕신 형제, 그리고 그 뒤에서 왕건과 태평이 나오고 있다.
세 여인도 이미 나와 허리를 숙이며 아지태를 맞는다.
유씨 내봉성에 아학사 어른이 아니시옵니까?
아지태 그렇소이다, 부인. 천하가 다 존경해마지않는 왕장군을 좀 뵈
러 왔소이다.
왕건 나를 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아지태 허허허,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왔습니다. 처음부터 내쫓을
듯한 말씀이십니다 그려. 안으로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모두들 .........(그 면면이 보이고)
왕건 (잠시 갈등하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소이다.
아지태 여기서 대답하기에 너무도 크고 중요한 일이올시다. 장기를
두어 본지 하도 오래되고 해서, 왕장군과 한 판 두어보고자
왔소이다.
오씨들 .......?
태평 ........?
아지태 다시 한 번 물어보십시다. 그냥 돌아가오리까, 아니면 안으로
들여주시겠소이까?
왕건 ..........?
<87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