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90회>
씬 1 왕건의 바다(밤)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여전히 큰 갑판의 제단 위에서 왕건과 태평이 제를 올리고 있다.
바람은 북서풍이다. 그 어둠 속에서 제단 앞에 화로가 타오르고 있고, 능산, 천부장이 군사들과 함께 제단 밖을 경계하고 있다. 아무 소리도 없다.
모두들 그렇게 제를 지내는 모습을 보고만 있다. 카메라는 화로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청하고 있는 태평과 그 옆에 앉아 있는 왕건을 가까이 잡는다.
태평 (주술처럼) 하늘이시여! 일월성신이시여. 굽어 살피시오소서. 대 마진국의 총사 장군 왕건이 정성을 다하여 이 바다와 하늘에 비옵니다. 바람을 주시오소서. 이 북서풍을 남동풍으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하늘의 신풍을 우리에게 주시어 이 서남해를 제압하고 삼한 통일의 초석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비옵니다. 일월성신께 비옵니다. 남동풍을 주시오소서. 저희에게 남동풍을 내려 주시오소서.
왕건 ........
어찌되었든 분위기는 경건하다.
태평이는 미친 듯 절규하는 듯 하늘에 대고 소리치고 있다.
그 모습이 하도 절실하여 제단 밖에 있는 능산은 굳은 표정으로 보고 있다.
태평의 기도와 달리 바람은 여전히 북서풍이다. 깃발이 한 쪽으로 맹렬히 흔들리고 있다.
온통 주변은 그 바람에 날리는 깃발 소리 뿐이다.
태평 바람을 주시오소서. 남동풍을 주시오소서. 하늘이시여! 마진국의 총사 장군 왕건이 비옵니다. 남동풍을 주시오소서. 남동풍을 주시오소서.
씬 2 인서트/ 그 바다
여전히 수많은 배들이 떠있다.
배마다 휘황하게 불빛들이 밝다.
씬 3 그 중 왕식렴의 배
왕식렴, 김락, 염상들이 여전히 멀리 보이고 있는 왕건의 배를 보고 있다. 이들의 배에서도 선상에 걸린 많은 깃발들이 모두 북서풍 쪽으로 향해 펄럭이고 있다. 왕식렴은 굳어 있고, 김락이 아니라는 듯 도리질을 하고 있다.
김락 도대체 저 기도를 언제까지 한다는 것입니까? 저 제사를 언제까지 올린다는 것이예요?
왕식렴 떠날 때부터 칠일이라고 하였으니 앞으로 사흘은 더 해야 할 것입니다.
염상 헌데 도무지 남동풍이라고는 불 생각이 없는 것 같지 않소이까? 아 들 보시구료. 우리가 올 때부터 계속되었던 북서풍이올시다.
김락 맞아요. 오늘은 보란 듯이 세차게 불고 있소이다. 이걸 어떻게 반대로 바꾼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늘의 조화를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왕식렴 총사께서 기도중이시옵니다. 모두가 마음을 합치자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나는 적지 않게 많은 바다를 돌아다녀보았는데, 한겨울에도 때때로 남동풍이 부는 것을 본 적이 여러 번 있사옵니다. 그것이 언제인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지요.
모두들 ......... (끄떡인다)
왕식렴 아무튼 우리는 총사께서 시키신 대로 다음에 내려질 영을 기다려야 할 것이옵니다. 전투 준비 말이옵니다. 지금 양쪽은 바람의 싸움이옵니다. 어느 쪽이 더 유리한 바람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 말이옵니다.
염상 (끄떡인다) 그렇소이다. 총사께서 함부로 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분명 무슨 복안이 있어서 저리 하실 것입니다. 좀 더 기다려 보십시다.
김락 (하늘 보며) 허지만... 바람을 바꾸다니요 생전에 이런 말은 처음 들어서 하는 말이외다. 허참....
씬 4 그 다른 전함
배현경, 홍유가 역시 멍한 표정으로 왕건의 배쪽을 보고 있다. 이곳에서도 갑판에는 크고 작은 전함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홍유 이보시오, 배장군. 이거 참으로 여우에 홀린 것만 같소이다.
배현경 그러게 말이오. 벌써 나흘 째 저러고 있지 않소이까?
홍유 그래도 다행입니다. 백제군이 아직까지 지켜만 볼 뿐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지 않고 있어요.
배현경 저들은 처음부터 공격보다는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전략을 쓰고 있소이다. 화공이지요.
홍유 (끄떡이며) 화공은 저들로써는 최상의 전략이 아니겠습니까? 이 바람을 좀 보세요. 저들이 불화살만 날리면 순식간에 우리 배들은 잿더미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배현경 그러니까 왕총사와 태평군사는 바람이 반대로 불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이 바람이 거꾸로만 분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참 기가 막힌 싸움이 될 것인데....
홍유 왜 아니겠소이까? 그야말로 남동풍만 분다면 모든 어려움이 다 풀리는 것이 아니오이까?
배현경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듯) 그런데 말이올시다, 홍장군.
홍유 왜요?
배현경 우리가 여기 서남해로 올 때 말입니다. 이건 마치 꼭 남동풍이 부는 것을 확신한 것처럼 화공에 쓰일 무기들을 실었소이다. 많은 기름과 불화살과 중원에서 가져 온 염초까지 실었소이다.
홍유 염초라면 화약이 아니오이까?
배현경 그렇소이다. 정말 남동풍이 분다면 이번 전투는 기가 막힌 전투가 되겠지만 끝내 이 북서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잘못하다가는 재도 안 남고 다 죽게 되었소이다. 기름과 불화살과 염초가 실린 이 많은 배들이 적에 공격을 받아 보시구료. 어떻게 되겠소이까?
홍유 ...........?
배현경 남동풍이라, 남동풍이라... 어떻게 이쪽으로 불던 바람이 갑자기 저쪽으로 부나....?
갸웃하는 배현경의 그 표정에서....
씬 5 인서트(새벽)
태평과 왕건이 계속해 제단에서 하늘에 빌고 있다.
그 바다로 뿌연 새벽이 밝고 있다.
바람 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깃발들이 모두 북서풍으로 향해 있다.
그 묘한 새벽의 정적 속에서...
씬 6 압해도 바닷가 견훤의
군영(낮)
해안 가까이 견훤의 배들이 가득히 떠있다.
이들을 돌아보는 견훤의 표정은 흐뭇하고 대견해 보인다. 주변의 장수들이 여전히 함께 해 있다. 최승우와 수달, 능애, 공직, 방장군, 신덕, 애술 들이 함께 해 있다.
견훤 참으로 이해가 아니 가는 구먼. 일찍이 왕건이가 저토록 이상한 짓을 한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전쟁을 할 것이야 말 것이야?
최승우 그러게 말이옵니다. 도무지 까닭을 모를 일입니다. 무엇 때문에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인지...?
수달 제깟 놈이 기도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사옵니까? 아마도 시간을 벌자는 수작 같사옵니다만은 어림도 없사옵니다.
능애 폐하, 벌써 며칠을 이러고 있사옵니다. 이러실 것이 아니라 영을 내려 주시오소서. 저들이 겁을 먹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선제공격을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공직 신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방장군 맞사옵니다, 폐하. 영을 주시오소서.
견훤 하긴 그래. 오지 않는 적들을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고.... 오히려 이제부터는 우리가 이 전장을 주도해야 할 것이야. 아니 그런가, 파진찬?
최승우 하오나, 폐하. 도대체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움직이는 것이 일단은 우리가 취해야 할 일이옵니다.
견훤 그렇기는 하지만 오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는가? 내 생각으로는 지금 저들은 이 북서풍 바람이 무서워서 못 들어오고 있는 것이야.
최승우 그렇기는 하옵니다만은 저들도 무언가 노리는 것이 있사옵니다. 저 제사와 기도는 단순한 기만술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그것을 좀 알아보아야 하옵니다.
견훤 그래야 하겠지만 방법이 없지 않는가? 어쨌든 우리는 전투대형을 다 갖추었네. 잠시 더 지켜보겠지만 끝내 저들이 오지 않으면 우리가 갈 수 밖에. 아니 그런가, 수달장군?
수달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폐하. 저 놈들은 지금 겁을 먹고 오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기다리기보다는 쫓아 나아가야 할 것이옵니다.
견훤 맞아, 맞아. 자 제장들은 듣게.
모두들 예, 폐하.
견훤 나는 저기 모함으로 가서 파진찬과 함께 전투를 지휘할 것이야. 수달 장군은 내 앞에서 선봉을 맡고 좌우측을 공직 장군과 방장군이 맡도록 하게.
그들 예, 폐하.
견훤 내 아우 능애는 영산강 중류 지점에 매복하였다가 적군을 치도록 하고 장군 신덕과 애술은 금성산성 앞에 가 있다가 이쪽 전선에서 영을 내리면 산성을 치고 들어가도록 하게.
그들 예, 폐하.
견훤 그러나 제일 승산이 빠른 것은 역시 왕건을 끌어들이고 잡는 일이야. 우리 그물 속으로만 들어와 준다면, 이 전쟁은 끝난 것인데.. 자, 수달장군.
수달 예, 폐하.
견훤 전력을 점검하고 선봉을 서게. 자 우리 함께 지휘함으로 올라 가세나.
수달 예, 폐하. 공격령을 내리오리까?
견훤 허허허, 이런 급하기는.... 저들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공격할 수가 있겠는가? 일단 가까이 가보세. 그리고, 한 이틀 더 관망하면서 전략을 다시 짜보세나. 금성을 함락시키려면 먼저 어떻게든 저 왕건이 함대들을 괘멸 시켜야 해. 그렇지 않고는 전장이 어려워져.
이들 그렇게 해안가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서...
씬 7 나주 관아 외경
씬 8 동 관아 안
다련군이 오씨를 보며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다련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왕장군은 왜 아니 오고 너만 왔느냐?
오씨 서방님께서는 전함을 지휘하고 계시옵니다.
다련군 아 누구 그걸 모르느냐? 왜 너만 이렇게 몰래 나주로 들어오고 왕장군은 저렇게 바다에서만 맴돌고 있느냐 하는 그런 말이야.
오씨 형편이 어렵사옵니다.
다련군 어려워?
오씨 그렇사옵니다. 백제군은 황제가 직접 나와 제장들을 지휘하고 있사옵니다. 군사도 많고 배도 많사옵니다. 그리고 바람까지 백제군에게 유리하게 불고 있어서 서방님의 군대가 접근을 못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다련군 내가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도 많은 첩보를 입수하고 있단다. 백제군의 이번 전략은 막강하기가 그지 없어요. 우리 마진군은 여러 가지로 형편이 나쁘다고 알고 있다.
오씨 그렇사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들어온 것이옵니다. 서방님을 도와주시어야 하옵니다.
다련군 도와줘, 어떻게?
오씨 서방님께서는 이번 전투가 일생일대에 큰 전투가 되실 것이라고 하셨사옵니다. 그리고 결코 오래갈 전투도 아니라고 말이옵니다. 만약에 백제국의 견훤왕과 맞싸워 지게 될 경우 아버님께서 주변의 호족들을 다독거리시고 이 곳을 끝까지 지키셔야 하옵니다.
다련군 이것아 나는 장수가 아니다. 고작 이곳에 태수일 뿐이야.
오씨 한 고장을 지키는 것은 군대가 아니라 인심이옵니다. 그 옛날 견훤왕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나 결국은 잃었사옵니다. 그것은 인심을 잃었기 때문이옵니다.
다련군 뭐 그거야 그렇다만은.
오씨 주변에 장자들을 챙기셨사옵니까?
다련군 아 물론 그랬지. 늘 그렇게 하고 있고.
오씨 곳간에 재물은 많이 풀었사옵니까?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넉넉히 옷을 입히는 것이 아버님께서 하실 일이시옵니다.
다련군 얘야 너는 마치 조정에서 내려 온 감찰관처럼 말을 하고 있구나. 그렇다. 곳간도 다 풀었고 인심도 잃지 않으려고 살림이 다 거덜날 판이다.
오씨 (미소) 그러실 줄 알았사옵니다.
다련군 그럴 줄 알다니? 사위 하나 때문에 우리 집안 곳간이 다 비었다는데 뭐가 그럴 줄 알아? 허허, 이런....
오씨 서방님은 저 말고도 부인이 둘이나 더 있습니다. 그 처갓집들도 모두 목숨을 내놓고 돕고 있사옵니다. 아버님도 그리 하셔야 하옵니다.
다련군 그래 알고 있다. 왜 모르겠느냐?
오씨 지금 이쪽 전선은 어떻사옵니까?
다련군 장군 김언과 종회라는 사람이 강과 산성을 맡고 있다. 백제군의 세력이 워낙 커서 어찌될지 참으로 걱정이다만은.....
씬 9 금성 산성(석양)
김언이 산성 밖 먼 산야를 보고 있다.
부장이 보고 하고 있다.
부장 장군, 백제군의 장수 신덕과 애술이라는 자가 군사 이천을 이끌고 성 밖 삼십리 지점에 진을 쳤다 하옵니다.
김언 우리 군사는 어찌 되었다드냐?
부장 아직도 바다 밖에 떠 있는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하옵니다.
김언 (답답하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야? 그토록 백제군이 무서워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하러 온 것이야? 허허, 이런.... 모두 전투 준비를 하여라.
부장 예, 장군.
김언 왕건총사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닌데....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시는고....
씬 10 바다(밤)
카메라 다가가면 왕건의 배다.
웬일인지 바람이 없다. 어느새 모든 것이 조용하고 어둠 속에 그야말로 정적 뿐이다.
씬 11 그 왕건의 배 제단
여전히 능산과 천부장이 군사들과 함께 제단을 지키고 있다.
그 제단안에서 태평과 왕건이 그렇게 앉아 있다. 고요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왕건이 뱃줄에 묶인 깃발들을 본다. 하나같이 움직이지 않고 서있다. 아주 오랫동안 태평도 그렇게 바람을 지켜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친다.
왕건 ......(한참만에) 하루가 더 지나면 자네가 약정한 칠일의 기도가 끝나네. 칠일일세.
태평 .......(미소) 그렇사옵니다, 주군.
왕건 희한하구먼. 바람이 멎은 것 같네 그려. 조용하지 않은가?
태평 그렇사옵니다.
왕건 비록 남동풍은 아니지만 북서풍 또한 멎어 버렸어.
태평 주군, 내일 이 맘 때 인시쯤이면 기도가 끝나면서 하늘이 바람을 주실 것이옵니다.
왕건 .........?
태평 작게는 한 시각(지금의 두 시간)정도, 그리고 하늘이 더 우리를 어여삐 보셨으면 반나절은 족히 주실 것이옵니다.
왕건 정말인가?
태평 지금까지 기도를 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바람이 아니 오면 소인이 군령의 위엄을 농락한 죄로 목을 내놓을 것이옵니다.
왕건 이보게, 태평군사?
태평 내일 새벽이옵니다. 준비해 놓은 화공을 지시하시어 적을 공략할 준비를 해주시오소서.
왕건 알겠네.
태평 작은 함선을 띄워 나주에도 우리의 공격을 알리시고, 협공토록 해주시오소서.
왕건 그리하겠네.
태평 또 있사옵니다. 의제가 되시는 능산 장군에게 최고의 정예병 삼백과 쾌속선을 주시어 앞서 나가게 하셔서 해안에 상륙토록 해주시오소서. 잘 하면 견훤왕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왕건 견훤왕을 말인가?
태평 그렇사옵니다. 소인은 아침까지 기도를 계속 할 것이옵니다. 이번 전투는 전격 기습하고 전격 상륙하여 빠른 시일 안에 견훤왕을 잡는 것이 목표가 될 것이옵니다.
왕건은 신기한 듯 태평을 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장담할 수 있는 것인가......
태평 마침 잘 되었사옵니다. 견훤의 전함들이 답답하다 못해 우리 쪽으로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왕건 그렇다고 하였네.
태평 내일까지 기다리시면 되옵니다. 하늘이 주군을 택하셨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그러나, 왕건은 대꾸를 못한다. 어디까지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태평 (다시 기도 자세로 들어가며) 지금부터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출전의 영을 내리시오소서. 이곳은 저 혼자면 족하옵니다. 어서 가시오소서.
왕건 (비로소 결심한다) 알겠네.
왕건이 절을 하고 제단을 내려 온다.
씬 12 동 제단 밖
왕건이 나오자 능산과 천부장이 군례를 올린다.
왕건은 다시 하늘을 보고 나서 영을 내린다.
왕건 이보게, 능산 아우.
능산 예, 주군.
왕건 태평군사는 자네가 견훤왕을 잡을 수 있다고 하였네.
능산 예? 아니 주군....
왕건 기회를 엿보다가 군사 삼백을 내려 줄 것이니 전투가 시작되거든 곧바로 앞서 나가 상륙하도록 하게. 그리고 견훤왕을 잡아 오게나.
능산 아니, 주군... 마치 전쟁이 끝나신 듯 말씀하시옵니다?
왕건 그렇다네. 적군은 우리의 화공을 받고 해안으로 도주할 것이야. 자네가 먼저 상륙하여 견훤왕을 잡으라는 것이야. 알겠는가?
능산 하오나, 주군. 어떻게 우리가 화공으로 이길 수 있으며 어떻게 견훤왕이 도주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사옵니까?
왕건 태평군사가 목을 내놓았네.
능산 예?
왕건 자 준비하도록 하게. 압해도 해안에 상륙하면 견훤왕의 군영이 있을 것이 아닌가? 가서 기다리다가 잡도록 하게.
능산 알겠사옵니다, 주군.
왕건 천부장은 듣게.
천부장 예, 총사.
왕건 전 전함에 영을 내리게. 지금부터 전 함대는 전투태세에 돌입하며 내일 인시를 기하여 적함과 마주칠 것이며 공격할 것이라고 즉시 전하게.
천부장 예, 총사.
왕건은 입을 앙다물며 바다를 본다. 바다에는 자신의 전함들이 그렇게 떠있다. 손을 들어 바람을 음미하려고 한다. 깃발은 멎어 있고 바람은 없다. 다시 하늘을 보는 왕건의 표정에서....
씬 13 그 바다
능산이 정예병들과 함께 어둠 속을 떠나고 있다.
씬 14 그 왕건의 배
왕건이 군사들과 함께 바다를 보고 있다. 제단에는 여전히 태평이 앉아 있다.
왕건 남동풍이 분다고.... 내일 새벽에...... 태평군사는 어디서 어떻게 바람을 가져온다고 하는 것인가?
그런 왕건의 표정에서......
궁예 (E)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야?
씬 15 철원 황궁 외경(낮)
씬 16 동 황궁 대전
궁예가 홀로 소주를 마시며 약간 취한 듯 묘한 표정으로 복지겸, 종간에게 묻고 있다.
궁예 왕건 아우가 그냥 바다에 떠있어? 움직이지를 않는단 말이지?
종간 그렇다고 하옵니다. 벌써 칠일이 가까워져오옵니다.
궁예 왜 그럴꼬?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아 왕건이가 누구인가? 왜 싸우지를 않고 바다 위에 배만 띄워 놓고 있을꼬....
복지겸 떠날 때부터 참으로 어려운 전투였다고 하옵니다.
궁예 아 그래도 그렇지.... 싸움은 하지 않고 피한다고만해서 되겠는가? 피해....? 아니 왕건 아우가 말인가, 허 세상에 별 일이 다 있네 그려. 왕건 아우가 견훤왕이 무서워서 피해 다니고 있어?
복지겸 뭐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겠사옵니다만은 아무튼 전장이 좀 소강상태인 것 같사옵니다.
궁예 견훤왕도 그저 보고만 있고.....?
복지겸 그렇다 하옵니다, 폐하.
궁예 허허, 서로가 뭔가 노리고 있는 게 있구먼 그래. 우리는 좀 더 두고 보십시다. 그래도 천하의 왕건이가 갔는데.....
복지겸 아무튼 참 어렵고도 힘든 전투를 수행하는 것만은 사실이옵니다.
궁예 죽고 살고 하는 일이 전쟁이란 말이오. 어렵지 않은 전쟁이 어딨어? (다른 서류를 펼쳐 보다가, 끄떡인다) 오, 아학사가 우리가 진행 중인 북벌 준비를 올려왔구먼.
궁예는 한참을 보며 끄떡인다. 만족한 모습이다. 종간은 인상을 찌푸리고 복지겸은 그런 두 사람을 본다.
궁예 (웃으며) 하여간에 이 아지태 아학사는 참으로 성실해. 이것 보시오, 내원.
종간 예, 폐하.
궁예 조정의 여러 부서 곳곳에 일 잘하는 청주인들을 앞세워 놓았어요. 사실 그래. 뭔가 일을 제대로 추진하자면 손발이 맞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해. 그런 것 아니겠소이까?
종간 ........?
궁예 우리가 청주인을 너무 많이 조정에 끌어다 쓴다고 탓만 해서는 아니된다는 이런 말이오.
종간 예, 폐하.
궁예 우리 한 번 또 어떻게 북벌 준비들을 하고 있는가 나가 보십시다. 이런 면에서 나는 꽤 복이 많은 사람이야. 내 아우 왕건이가 밖에 나가서 싸우는 사이에 나는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준비를 할 수 있지 않는가?
두사람 .........
궁예 헌데 견훤왕을 좀 보시구료. 황제라는 사람이 직접 전선에 나오지 않으면 아니되니까 얼마나 딱한가 말이오? (다시 서류 보며) 암, 암... 일들이 다 잘되고 있구먼 그래. 역시 아학사는 참으로 사람이 성실해. 이만한 사람도 참 드물어. 암, 암....
씬 17 동 황궁 내봉성
아지태와 강장자가 마주 해 있다.
아지태 폐하께 조정의 대소신료들에 관하여 보고를 올렸소이다. 폐하께서는 북쪽을 욕심내고 계시오이다. 그 일에 관해서라면 어떤 말이든 이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계시오이다.
강장자 압니다. 그것을 모르는 신료가 어디 있겠소이까?
아지태 지난 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러나 이 나라는 분명 위기올시다. 폐하께서는 중한 환후를 감추고 계시고 독재를 펴신지 꽤 되셨소이다.
강장자 그러게 말씀이외다. 섬? 섬?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아지태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폐하께서 위태로워지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올시다.
강장자 그렇지요.
아지태 그러다보니 은밀하게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소이다. 왜 내원 그사람이 왕장군을 그토록 경계하겠소이까? 바로 그것이 아니겠소이까? 옥좌 말이올시다.
강장자 그..... 그렇지요.
아지태 헌데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도선대사도 그런 예언을 했다는 것이예요. 왕장군이 대업을 받을 것이라고 말이올시다. 잘 못하다가는 앉아서 그냥 옥좌를 내어줄지도 모릅니다.
강장자 세상에.... 그....그렇게는 아니되지요. 엄연히 이 나라에 태자마마님이 두 분이나 계십니다. 황후가 계시고요.
아지태 그렇소이다. 그렇다 마다요. 허지만 폐하께서 저 자리에 오래 계시지 못하신다면 어찌 되겠소이까? (사이) 나는 그것이 걱정입니다. 물론 북벌 좋지요. 허나 얼마나 이 북벌 사업을 지탱할 수 있겠소이까?
강장자 허지만 그것을 권한 것은 아학사가 아니오이까?
아지태 물론 그랬지요. 그러나 그때는 강하고 힘있는 폐하이셨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오. 지금은 달라요. 모르시겠소이까? 폐하께서는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올시다.
강장자 그렇지요. 그렇지요.
아지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니면 엉뚱한 사람들이 폐하의 자리를 차지할 지도 모릅니다. 물론 북벌준비는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폐하께서 더 급하게 되시었다 이 말씀입니다.
강장자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아지태 내가 도와드리리다. 은연 중에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태자마마들 말씀입니다.
강장자 고맙소이다. 듣고보니 참으로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아학사께서만 도와주신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아지태 잘해보십시다. 우리 청주는 태자마마를 도울 것입니다.
강장자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씬 18 황후전
연화가 불안에 잠겨 진내관을 보고 있다.
연화 아직도 전선에서는 이렇다할 소식이 없는가?
진내관 예, 황후마마. 들리는 소문으로는 전선이 매우 불안하다 하옵니다. 여러가지로 우리 마진 군대가 백제군에 비해 모자람이 많은 것 같다고 들었사옵니다.
연화 (한숨) 하긴 왕장군이라고 해서 전쟁마다 어찌 이길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주전선은 매우 큰 전쟁이라고 들었네. 그곳에서 지기라도 한다면 이 나라는 더욱 위기에 빠질 것이 아닌가?
제조 천하의 왕건 장군이 가셨사옵니다. 그럴리야 있겠사옵니까?
연화 폐하께서는 어찌하고 계시는가?
제조 내원과 병부령을 불러 전선 이야기를 들으시고 또 북벌에 관한 일을 물으셨다 하옵니다. 아마도 곧 다시 현안들을 살피러 출궁하신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북벌이라는 것 자체를 신료들은 아무도 믿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폐하 홀로 저리 재촉하시니 어쩌면 좋을꼬.... 사방 천지가 전쟁 뿐이다. 백성들은 힘이 들고 싸움은 끝임 없이 계속되고 도대체 이 나라에 언제나 평화가 올꼬.....
씬 19 왕건의 집 외경(밤)
씬 20 동 집 안채 방
두 유씨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씨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번 전쟁이 어렵다고들 하네. 지금쯤 서방님께서 어찌하고 계실지 궁금하네 그려.
수인 그래서 작은 형님께서 따라가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나주는 작은 형님 댁이 계시는 곳이옵니다. 그나마 큰 힘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유씨 그래도 여인네 일세. 사내들이 생사를 겨루는 전장터에서 아낙네가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수인 모르시는 말씀이옵니다. 작은 형님이라면 어지간한 장수 열보다 나으신 분이옵니다.
유씨 무슨 소린가, 그게?
수인 듣지 못하셨사옵니까? 지난 번 나주 전투에서도 엄청난 활략을 했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유씨 그렇기는 하지만 어찌 매번 그럴 수가 있겠는가? 특히나 이번은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는 전장이야. 잘 되어야 할 터인데....
씬 21 나주 관아
군사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이동하는 군대들이 곳곳에 보인다.
씬 22 동 관아 안
태수인 다련군이 전령의 보고를 받고 있다.
다련군 왕건 총사가 보내서 왔다고?
전령 그렇사옵니다, 태수어른.
다련군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전령 이미 전투 돌입의 영이 내려졌사옵니다.
오씨 전투 영이 내려졌단 말이오?
전령 그러하옵니다, 마님. 이미 전 함대가 전투 태세에 돌입 했사옵니다. 다만 피아간에 접전이 있으려면 새벽은 되어야 할 것이옵니다.
다련군 그래 지금까지 제사를 지냈다는 그것은 바람을 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령 예, 태수어른.
다련군 허, 이런 기가 막혀서.... 아니 어떻게 사람이 바람을 부르고 아니 부르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오씨 아버님 서방님께서 하시는 일이옵니다. 우리는 그 분의 지시에 따라야 할 것이옵니다. (전령에게) 알았네. 장군께서 시키신 대로 새벽이 되면 모두 적진으로 이동하여 협공에 들어갈 것이네. 그리 전해주시게.
전령 예, 마님.
오씨 그예 모든 것이 결정되었나 보옵니다. 아버님도 서두르시오소서. 서방님께서 바다에서 육지로 공격하시고 우리는 협공하여 강쪽을 넘으라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다련군 하지만 얘야 어떻게 사람이 바람을 부르냐 말이다, 어떻게?
오씨 서두르시오소서. 뭔가가 있으니 이미 지시가 내려온 것이 아니옵니까?
다련군 어쨌든 알았다. 산성에 나가 있는 김장군에게 연락이 갔다하니 우리도 서두르자꾸나. 허, 바람이라 바람을 불러....?
씬 23 새벽의 여명(그 바다)
견훤이 최승우와 수달과 함께 배 위에서 먼 바다를 보고 있다.
아주 아득히 많은 불빛들이 보인다.
수달 폐하, 저기 멀리 보이는 것이 왕건이 끌고 온 마진국의 전함들이옵니다. 어찌하오리까? 좀 더 전진을 해도 되겠사옵니까?
최승우 아니오, 장군. 말하였지만 우리는 지금 왜 마진의 전함들이 저러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소이다. 그동안 여러 척의 첩보선을 띄웠으니 기다려보십시다. 서두를 필요는 없소이다.
견훤 헌데, 이상하구먼.... (하늘을 둘러보며) 그렇게 심하던 바람이 어느새 아주 조용해졌지 않은가?
수달 (그제서야) 정말 그런 것 같기는 하옵니다만은....
견훤 바람이 멎었어.
최승우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옵니다. 다시 곧 바람이 불 것이옵니다.
견훤 그야, 그렇겠지만... 아무튼 이럴 때는 그저 가까이 안 가는 게 좋지. 바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좀 기다려보세.
수달 알겠사옵니다, 폐하.
견훤은 자꾸만 고개를 외로 꼰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뭔가 이상한 것이다. 그 많은 전함들 좌우로 방장군과 공직들이 스쳐간다.
씬 24 그 새벽 바다/
왕건의 배
하늘에는 먹구름들이 물러가고 있다. 전함들이 휘황하게 불빛을 밝히며 도열해 있다. 제단에서 이미 태평은 기도를 마치는 듯 마지막 절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하늘을 보고 나서 왕건이 서 있는 쪽으로 온다.
왕건 기도가 끝났는가?
태평 예, 주군.
왕건 바람 한 점 없네 그려.
태평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왕건 그렇지가 않다니?
태평 지금 풍향이 막 바뀌고 있사옵니다.
왕건 바뀌고 있어?
태평 그렇사옵니다. 하늘이 주군의 소원을 들으셨사옵니다. 보시오소서. 저기 저 깃발을 보시오소서.
왕건은 깃발을 본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이 없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흔들리기 시작한다. 왕건의 눈이 점점 크게 떠진다. 작은 깃발들이 반대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남동풍인 것이다.
태평 보이시옵니까?
왕건 오... 그렇군 그래. 하지만 이 정도의 바람을 가지고는...
태평 하늘을 보시오소서. 먹구름이 몰려가고 있사옵니다. 곧 큰 바람이 불 것이옵니다. 지금부터 시작이옵니다. 전함대에 돌격령을 내리시오소서.
왕건 ........ ?
태평 견훤왕의 전함들이 눈앞에 와 있사옵니다. 이제 서서히 돌진하면 바람과 함께 갈 수가 있사옵니다. 속히 영을 내리시오소서.
왕건 (끄떡이며) 알겠네.
태평 능산 장군은 앞서 갔사옵니까?
왕건 이미 삼백의 정예병과 함께 출발하였네.
태평 이제 다 되었사옵니다. 하늘이 주군을 위해 마련하신 그 바람이 오고 있사옵니다. 보시오소서. 보시오소서.
그렇다. 바람은 점점 더 일기 시작한다. 깃발이 거꾸로 펄럭이고 있다. 왕건은 꿈에서 깨듯 놀라고 있다.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왕건 오, 이럴 수가 있는가? 남동풍일세. 바람이 점점 강하게 불고 있어. 남동풍이야, 남동풍이야. 부장은 듣거라.
천부장 예, 총사.
왕건 남동풍이다. 남동풍이 불기 시작했다. 소라를 불고, 대북을 쳐라. 전 함대는 백제군의 진영으로 출전하라 하라. 속히 출전을 알려라.
천부장 예, 총사. 출전이다. 전 함대는 알려라. 북을 쳐라, 소라를 불어라.
갑자기 갑판을 소란해 진다. 군사들이 이리 저리 달리고, 북소리와 소라 소리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태평은 미소 짓고 있고, 왕건은 그 바람과 깃발을 보고 있다. 바람은 점점 거세게 분다.
왕건 바람이야. 남동풍이야. 대체 이것이 어찌 된 것인가? 이보게 태평이,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태평 이번 전쟁이 끝나면 다 아시게 되실 것이옵니다. 소인도 제갈공명이 빌었던 그 방식을 깨달아 이 바람을 빌려 온 것이옵니다.
왕건 하하하, (감격) 자네는 사람이 아닌 것 같네. 자네는 신인인 것 같아.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태평 시간이 별로 없사옵니다. 이 바람은 곧 다시 북서풍으로 뒤바뀔 것이옵니다. 그 안에 백제군을 함멸시켜야 하옵니다. 이 전쟁을 독려 하시오소서, 주군.
왕건 알았네. (지휘소로 가며) 북을 더욱 세게 울려라. 전 함대는 속력을 내어 백제의 함대 쪽으로 밀고 들어가라. 소라를 더 불어라. 모두들 화공을 준비하라. 불화살과 기름을 준비하고 염초를 준비하라.
부산하다. 온통 진군을 알리는 소리들로 온 바다들이 시끄럽다.
씬 25 그 일각
왕식렴, 김락, 염상들이 멍한 표정으로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깃발들을 보고 있다. 북소리와 소라 소리들이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다.
김락 진군을 알리는 신호요. (기가 막히다) 보시오, 남동풍이올시다.
염상 그렇소이다. 남동풍입니다.
왕식렴 (역시 기가 막혀) 눈을 보면서도 믿기 지가 않사옵니다. 북서풍이 바뀌어 남동풍이 되다니? (김락에게) 장군, 뭘 하시오이까? 출전의 신호가 오고 있소이다.
김락 알고 있소이다. 전 함대가 모두 해안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소이다. 진격하라. 전 함대는 노를 저어라. 화공을 준비하고 돛을 올려라.
씬 26 다시 그 일각
배현경, 홍유 들도 그저 아연실색하여 보고 있다.
홍유 바람이 바뀌었소이다.
배현경 보고 있소이다.
홍유 머리에 털이 난 이후 이런 것은 처음 보오이다.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소이까? 자 일단 적진으로 들어가십시다.
배현경 암요. (큰소리로) 돌진하라. 화공을 준비하고 돌진하라. 전 함대는 대형을 갖추어라.
씬 27 인서트(부감)
불야성이다.
수많은 배들이 돛을 올리고, 군사들을 가득히 채운 채 가고 있다.
씬 28 견훤의 바다
견훤과 수달, 최승우가 그저 벙찐 표정으로 하늘만 보고 있다.
견훤 어떻게 된게야? 이 바람 말일세. 이 무슨 조화인가? 북서풍이 아닐세. 반대로 불고 있어.
수달 그러게 말이옵니다.
최승우 ........?
견훤 이보게, 수달이. 맞지 않는가? 바람이 반대가 아닌가 이것이?
수달 예, 폐하. 그런 것 같사옵니다. 물론 가끔씩 그럴 때가 있기는 있사옵니다만은 하필 이럴 때에....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최승우 (급하다) 배를 돌려야겠사옵니다. 전 함대에 영을 내리시오소서.
견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배를 돌리다니, 왜?
최승우 저들이 우리를 속였사옵니다.
견훤 속이다니, 뭘 말인가?
최승우 저들은 이 남동풍을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견훤 기다려? 바람을 말인가? 아니 어떻게 언제 이 바람이 올 지 알고 기다려, 누가 말인가?
최승우 저 적진 속에 틀림없이 하늘의 천문을 읽을 줄 아는 뛰어난 책사가 있는 것 같사옵니다.
견훤 무엇이라? 천문을 읽어?
최승우 급하옵니다. 이 바람을 안고 싸울 수는 없사옵니다. 적들도 이미 화공을 준비해 왔을 것이옵니다. 속히 퇴각령을 내리시오소서.
견훤 무슨 소린가? 적군이 지금 가까이 있는데 퇴각을 하면 되겠는가?
그때, 방장군의 배가 가까이 온다. 그리고, 소리친다.
방장군 폐하, 이상하옵니다. 적군이 빠른 속도로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최승우 피하시오소서, 폐하. 수달 장군, 퇴각령을 내리시오.
수달 그래도 이렇게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오이까?
최승우 급하다고 하였소이다.
폐하, 저기....
이미 북소리, 소라 소리가 더욱 더 가깝다. 왕건의 배들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수달 쏴라, 가까이 오면 화살을 쏴라.
견훤 이럴 수가 있는가? 천문을 보다니, 누가 말인가? 어떻게 바람이 방향을 바꿀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바람이...?
수달 (계속) 적을 맞을 준비를 하라. 적이 가까이 온다.
씬 29 그 일각 왕건의 배
왕건이 가까워지고 있는 견훤의 대 함대를 보고 있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태평이 한 곳을 가리킨다.
태평 주군, 저쪽에 저 큰 기가 달려 있는 배가 견훤왕의 모함인 것 같사옵니다. 화공을 시작하시오소서. 때가 되었사옵니다.
왕건 알겠네.
태평 이미 우리 전함들이 백제의 함대와 맞서 진영을 갖추었사옵니다. 저쪽이 수는 많지만 하나같이 쓸모 없는 거룻배들이 되었사옵니다. 안심하시고 다 태워버리시오소서.
왕건 (끄떡이며) 그렇게 하세. 아, 정말 하늘이 우리를 돕네 그려. 전 함대는 불화살을 퍼부어라. 염초와 기름을 쏟아 부어라.
천부장 (전한다) 전 함대는 불화살을 퍼부어라. 염초와 기름을 쏟아 부어라.
함성이 터진다. 배들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불화살이 날기 시작한다. 불길이다. 견훤의 배들이 여기저기서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대 접전이다. 장수들의 면면이 그 위로 스쳐간다. 배와 배가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백병전도 벌어진다. 대 혼란이다.
씬 30 견훤의 배
수달이 어쩔 줄 모르며 지휘하고 있다. 배 곳곳에 불길이 옮겨 붙고 있다.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불바다이다.
수달 불을 꺼라! 폐하를 뫼시어라. 함장은 기수를 돌려라. 불을 꺼라! 적선을 막아라.
견훤이 당황하며 불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다. 최숭우가 모셔가고 있다.
최승우 폐하, 신을 따르시오소서. 이곳을 벗어나야 하옵니다. 다른 배로 옮겨 타시오소서, 폐하.
견훤 오...어떻게 이럴 수가...불바다야, 모든 게 타고 있어, 모든 게 다 타고 있어.
최승우 폐하를 뫼시어라. 해안으로 가야 한다. 작은 배를 대령하라. 폐하를 뫼시어라. 자, 폐하 이쪽으로.... 수달 장군, 폐하를 뫼시어요. 이 배는 포기해야 할 것 같소이다.
수달 알겠습니다. 폐하, 자 이쪽으로 오시오소서. 이 놈들아 배를 가져오너라. 거기 작은 배를 이리 대거라.
그 황급한 상황 중에서도 작은 거룻배 하나가 다가와 견훤의 모함에 달라 붙는다.
수달 자, 이쪽으로....저 배를 타시오소서, 폐하....
그 엄청난 불길 속에서 견훤은 최승우와 함께 작은 배로 옮겨 탄다.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난무하다. 불길에 휩싸인 군사들이 꽃잎처럼 바다로 뛰어 들고 있다. 어떤 배는 송두리째 다 타며 바다 속으로 가라 앉고 있다.
씬 31 다시 왕건의 배
눈 앞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배들이 불에 타며 가라 앉고 있다.
그리고, 배와 배 사이가 얽히며 육박전을 벌이고 있는 것도 보인다. 그러나 한 눈에 보아도 마진군의 완벽한 승리이다.
왕건 해전은 우리가 이긴 것 같네 그려. 헌데, 앞서 보낸 능산 아우가 어찌되었는지 모르겠네 그려.
태평 능산장군은 이 해전을 피하여 해안 쪽으로 미리 갔사옵니다. 지금쯤 상륙을 했을 것 같사옵니다만은....
왕건 정말로 견훤왕을 만날 수 있을까?
태평 운이 좋다면 그럴 수도 있사옵니다. 적진의 형세를 보니 이 바다 말고 영산강 줄기와 금성산성 두 곳에 공격로가 보였사옵니다.
왕건 그건 나도 보았네.
태평 틀림없이 그 쪽에 군사들을 배치하여 놓았을 것이고, 결국 견훤왕은 이 바다를 빠져나가 구원을 청할 것이옵니다.
왕건 그렇겠지.
태평 그런데 우리 능산 장군이 앞질러 그 길목으로 갔사옵니다. 지켜보시오소서.
왕건 엄청난 전투일세. 견훤왕까지 잡을 수 있다니... 아, 얼마나 좋겠는가?
태평 .......(미소)
그 불바다를 보는 두 사람의 표정에서....
씬 32 압해도 해안 언덕
능산이 보고 있다.
그 넓은 바다가 불야성이다.
능산 견훤왕이 이곳을 지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 해안 쪽에서 강으로 연결되는 길은 여기 뿐이다. 모두 매복하여, 견훤왕을 놓치지 말도록
하라.
군사들 예, 장군.
씬 33 그 바닷가 포구
견훤의 거룻배가 바닷가 포구에 도착하고 있다.
많은 군사들이 뒤를 쫓아와 속속 달려온다. 그때, 방장군도 온 몸이 그을린 채 견훤에게 다가온다.
방장군 폐하, 무사하셨사옵니까? 방이옵니다.
견훤 오, 방장군 무사했구먼.
방장군 예, 폐하.
견훤은 한 숨을 돌리며 바라를 본다. 아직도 불이 타고 있는 전함들이 곳곳에 보인다.
견훤 다 타 버렸어. 우리 배들이 다 타 버렸어. 그 많은 우리 배들이 순식간에 다 타 버렸어.
최승우 잊으시오소서, 폐하. 지금 급한 것은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적군이 상륙하여 우리를 쫓는다면 진퇴양난이옵니다. 속히 서두르시오소서. 자, 방장군이 앞을 서시오. 매복군이 있을 지 모를 일이오이다.
방장군 알겠소이다. 폐하, 신을 따르시오소서.
최승우 수달장군, 폐하 뒤에서 만약에 있을 지 모를 추격군을 막아 주시오.
수달 그렇게 하겠소이다.
최승우 서두르시오. 강 중간에 있는 능애 장군을 만나야 합니다. 구원군을 불러야 해요. 자, 어서.
그들 준비된 말들 위에 오른다. 그리고, 말채찍을 날린다. 이들이 달려가기 시작한다. 가다가, 견훤이 돌아본다.
견훤 믿기 지가 않는 구먼.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도대체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런 견훤의 표정에서....
< 90회 끝 > (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