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94회>
씬 1 철원 황궁 앞(낮)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장작불이 크게 타오르고 있다. 왕건은 물론이고 수많은 신료들이 겁에 질려 보고 있다. 종간, 은부, 유천궁, 강장자, 아지태, 입전, 신방, 능달, 기전, 환선길, 이흔암, 박지윤 부자, 장자1,2, 최응, 왕신과 유씨, 수인이 장수장도 함께 보고 있다. 궁예는 재미있는 듯 수달을 보며 미소 짓고 있다. 모두의 시선이 궁예와 수달에게 집중되어 있다. 연화도 마찬가지이다.
궁예 아직도 늦지 않았다. 수달아! 살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저 불 속으로 들어가겠느냐, 아니면 절을 하고 살겠느냐?
수달 ......
궁예 왜 대답이 없느냐? 겁이 나는 것이냐? 나에게 절을 한 번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살려 줄 것이야. 자, 어찌하겠느냐?
수달 지금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궁예 뭐라?
수달 지금 불 속으로 들어가도 되느냐고 물었소이다.
궁예 ......... (표정이 굳어져 버린다)
왕건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궁예 내군은 무엇들 하느냐? 기름을 한 동이 더 쏟아 부어라.
대답과 함께 내군들이 다시 기름을 갖다 붓는다. 수달이 그 기름을 다 뒤집어쓰고 빙긋이 웃으며 일어난다. 그리고는 남쪽을 향해 돌아선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다.
수달 대 백제국 황제폐하시여! 오늘 폐하의 아우이며 신하인 수달이는 적국의 땅에서 죽사옵니다. 신의 마지막 절을 받으시오소서. 그리고, 대업을 이루시고 이 교만한 마진의 왕과 신라를 멸하시오소서. 이 수달이 마지막 절을 올리옵니다, 폐하.
수달은 절규처럼 그렇게 되 뇌이고는 절을 올린다. 그리고, 도열한 장수들을 쭉 ?어 본다. 그들의 면면이 지나친다. 왕건과 부딪친다.
수달 하하하, 왕장군, 이렇게 가게 되었구료. 비록 나와는 적이었으나 그대는 참다운 영웅이오. 마지막으로 베풀어 준 그 성의는 고마웠소이다.
그리고, 걸어간다. 천천히 불 가까이 다가간다. 사람들의 면면이 궁예로부터 다시 지나친다. 왕건이 소리친다.
왕건 폐하, 신 왕건 아뢰옵니다. 수달은 비록 적이오나 이름 있는 장수이옵니다. 선처하시어 죽음만은 면하게 해주시오소서.
궁예 (도리질하며) 아닐세, 아우. 살려 놓으면 저도 괴롭고 나도 괴로워. 죽을 수 있을 때 죽게 해주는 것도 은혜를 베푸는 것이야. 들어가라! 사내답게 죽어라.
수달 옳은 말씀이오. 그러나, 죽이는 방법이 참으로 가혹하시구료. 하하하. (더욱 크게 웃는다) 하하하. 왕장군, 잘 계시오. 하하하....
수달이 큰 웃음을 던지며 불 속으로 성큼 들어선다. 그와 동시에 온 불길이 수달을 감싼다. 비명 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불덩이 하나가 그 불과 어우러지며 그렇게 타오르고 있다. 궁예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연화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고, 종간은 침묵하고, 최응은 여전히 표정이 없다. 강장자는 입을 벌리고 있고, 복지겸과 환선길, 이흔암들도 그 참혹함을 피하려 눈을 감는다. 왕건이의 표정은 그렇게 경련하고 있다. 두 부인들도 눈을 감고 있고, 그 불길, 계속 타고 있는 그 불길에서...... 길게 디졸브 된다.
씬 2 다시 그곳(석양)
석양이다. 해가 기울고 있다. 이미 그곳에는 사람들이 없다. 모진 바람이 불어와 흔적조차 없는 재를 날려보내고 있다. 그 바람소리, 바람소리에서.......
씬 3 황궁 대전(밤)
궁예가 왕건과 마주해 술을 마시고 있다.
궁예 정말 수달이라는 자는 제 이름 값을 하였어, 충신이야.
왕건 ........
궁예 모름지기 사내는 사내답게 죽어야 하는 것이야. 자네는 나를 보고 살려주라고 하였지만 인정은 쓸 때 써야 하는 것이야. 아니 그런가?
왕건 ........
궁예 자, 마시게.
왕건 예, 폐하.
궁예 우리 마진의 신료들도 수달을 보고 뭔가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할터인데 말이야. 그런 점에 있어서 나는 불행한 것 같아.
왕건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많은 신료들은 끊임없이 폐하를 칭송하고 우러러 보고 있사옵니다.
궁예 (도리질) 겉으로만 그러는 것이야. 내가 신료들을 믿지 못한 지는 오래 되었어. 아무튼 그건 그렇고 지난 나주전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단하였어. 아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야.
왕건 망극하옵니다.
궁예 (다시 마시며) 나는 요즘 소주로 살아. 헌데 이것도 이제 별로 흥미가 없어.
왕건 .......
궁예 내 소원이라면 북으로 가는 것이야. 이 삼한이 아니야. 아우도 알 것이야? 백제도 오월국과 일본에 사신을 보내며 머리를 숙이고 있어. 신라도 그랬고. 그러나, 나만이 오로지 저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어. 나도 저들과 대등한 황제이기 때문이야.
왕건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
궁예 다행히 나는 아우와 같은 백전백승의 명장을 옆에 두고 있어. 왜 저 광활한 중원을 그냥 두고 보겠는가? 욕심을 낼 만하지 않은가 말이야?
왕건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하오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궁예 (말을 막으며) 그런 소리 말게. 이상이 있으면 현실이 따라 오는 것이야. 헌데 별로 소득이 없어. 처음과 달리 뭣하나 확실하게 되는 것이 없어. 아지태도 그렇고.... 이보게, 아우.
왕건 예, 폐하.
궁예 아우가 시중을 맡아주어야겠어.
왕건 폐하......?
궁예 그렇게 해.
왕건 아니옵니다, 폐하. 신은 아직 밖에서 할 일이 너무도 많사옵니다. 그리고, 젊사옵니다. 시중이란 신료들 중 으뜸의 자리이옵니다. 아직은 아니옵니다.
궁예 그렇기는 하지만, 이 조정이 더 급해.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왕건 신은 아직 이르옵니다.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오소서.
궁예 허허, 이렇게 원.... 남들은 서로 하려고 하는데....아무튼 이 형의 마음이 그렇다는 걸 알아두게. 그리고, 좀 더 의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운을 조성할 필요가 있어. 나라 이름도 바꾸고, 연호도 다시 바꾸면 어떤가 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였어. 정부 조직도 또 바꾸고 말이야. 자, 드세.
왕건 예, 폐하.
궁예 할 일은 많은 데 시간이 없어. 모두들 눈치만 보고 일들을 하려고 하지 않아. 정말 안타깝단 말이야. 안타까워.....
궁예는 그렇게 한숨을 쉬며 허공을 본다.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신다. 왕건이 말없이 그런 궁예를 본다.
씬 4 황후전 복도
진내관, 제조상궁들이 그렇게 서있다.
씬 5 동 황후전 안
연화와 왕건의 두 부인이 함께 해 있다.
유씨 황후마마께서 이렇게 청하여 차를 내주시니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연화 무슨 말씀을...오히려 너무 늦었습니다. 자주 보아야 하는데.... (수인에게) 헌데 왜 그렇게 표정이 무겁습니까?
수인 아, 아니옵니다. 자꾸만 낮에 있었던 그 일이 생각이 나서.... 백제의 수달 장군 말이옵니다. 그렇게 사람이 타 죽는 것은 처음 보았사옵니다.
유씨 그러고 보면 전쟁이라는 것이 너무도 참혹한 것 같사옵니다. 서로가 나라를 위해 그렇게 죽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연화 그렇겠지요. 그 얘기는 그만 하십시다. 그나저나 대전에서는 술자리가 길어지려는 모양입니다. 두 분이 만나면 늘 그러시지요. (수인에게) 충주 부인이라고 하셨는 가요?
수인 예, 황후마마.
연화 어쩌면 이렇게 참하게 생기셨을꼬? 참으로 왕장군은 복도 많으십니다. 행복한 분이세요.
수인 황공하옵니다, 마마. 그토록 칭찬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연화 한 집안도 그렇지만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안과 밖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잘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서로 자주 만날 기회를 만들어 보십시다.
수인 망극하옵니다, 마마.
연화 차 드세요.
두 사람 예, 마마.
찻잔을 든 유씨는 왠지 자꾸 연화의 얼굴을 뜯어본다. 연화가 그런 유씨를 본다.
씬 6 짧은 인서트(55회 마지막 씬)
왕건이 자신을 안던 때의 모습이 스쳐간다.
왕건 오오....연화 아씨....연화 ....아씨.....
부용 (E) 아니옵니다 장군, 소녀는 황후마마가 아니옵니다. 부용이옵니다. 부용이옵니다.
왕건은 연화를 부르며 부용을 포옹한다. 부용은 눈물을 흘리며 왕건을 받는다.
왕건 오오.......연화......연화....
씬 7 현실
유씨는 그렇게 연화를 본다. 연화가 묻는다.
연화 왜 그렇게 보십니까, 부인?
유씨 하온데....
연화 말씀하세요.
유씨 그 옛날에 마마께오서는 송악에서 저희 서방님과 가까이 사셨다고 들었사옵니다만은....
연화 그렇습니다. 아주 가깝게 지냈었지요. 그때는 내 이름도 연화라고 하였답니다.
유씨 아, 그러셨사옵니까?
연화 (한숨)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이야기지요. 자, 두 부인 차를 드세요.
유씨 예, 마마......
연화 지난 이야기를 한들 무엇에 쓰겠습니까?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두분은 정말 자주들 오십시요. 이 황궁은 외로운 곳입니다.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삭막하기 그지없지요. 정말 그래요.
그 쓸쓸한 연화의 표정에서.......
씬 8 다시 동 대전
궁예는 좀 더 많이 취했다. 거퍼 술을 마신다.
궁예 술은 좋은 것이야. 많은 것을 잊게 하지. 허지만, 나쁜 점도 많아.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해.
왕건 그렇사옵니다. 폐하께오서는 예전에는 술을 가까이 하지 않으셨사옵니다.
궁예 그랬었지. 나는 승려 출신이 아닌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그랬었어. 불문에서는 이 곡차를 못 마시게 하거든.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나는 미륵이 아닌가?
왕건 그렇사옵니다. 하오나 옥체를 강건히 보존하시려면 매일처럼 이렇게 독한 술을 드시는 것은 피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궁예 허허허. 아우는 몰라. 이제 나는 이것 없이는 힘들어.
왕건 ........ 지난 번에도 신이 말씀 드린 적이 있사옵니다.
궁예 뭘 말인가?
왕건 폐하께오서는 어딘가 환후가 있으시옵니다. 그 때문에 이 독주를 가까이 하시는 것이 아니시옵니까?
그러자, 궁예는 입을 닫는다. 표정이 바뀌며 한동안 왕건을 노려본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에 잠기다가 불쑥 뱉는다.
궁예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내가 어디가 아프단 말인가? 내가 왜 아파?
왕건 폐하.......?
궁예 그건 되 먹지 못한 신료놈들이 나를 비하시키는 것이지. 미륵은 아플 수가 없어. 미륵이 왜 아프단 말인가? 미륵은 전지전능한 것이야. 알겠는가, 아우?
왕건 예, 폐하.
궁예 (노여움) 못된 놈들 같으니라구. 이 미륵을 우습게 보고 아주 헛소리들을 하고 있단 말이야. 모두들 관심법으로 살펴보아서 엄하게 다스려야지 아니되겠어. 이것들이 말이야.......미륵을 뭘로 보고...
그러다가, 통증이 왔다. 가슴을 부여잡으려다 다시 왕건을 보며 애써 참는다.
궁예 그때도 말을 했지만, 나는 아프지 않아.
왕건 폐하..... 술로써 고통을 다스린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옥체를 크게 상하시게 되는 일이옵니다. 이 아우는 폐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사옵니다.
궁예 말해 보아.
왕건 폐하께서는 먼 길을 가시는 분이시옵니다. 폐하께서 건강하지 않으시면 제국도 없사옵니다.
궁예 그 말은 맞아.
왕건 욕심을 조금 줄이시고, 때를 조금 뒤로 물리시오소서. 더 이상 서두르시면 폐하께서 상하시옵니다. 굽어 살피시오소서.
궁예 (고통 참으며)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허지만 말이야. 이제 나는 어쩔 수가 없어. 달리던 말이 갑자기 쉴 수는 없는 것이야. 힘이 들고 숨이 차지만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야. 알겠는가, 아우?
왕건 그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옵니다. 그 마음을 놓고 쉬시오소서.
궁예 그래..... 때로는 이 미륵도 힘이 들 때가 있어. 너무 힘들고 지쳐서 쉬고 싶을 때가 있어, 아우.
왕건 (눈물 그렁거리며) 그렇사옵니다. 폐하, 이 아우에게 그렇게 진심을 열어주시오소서. 이 아우는 언제나 폐하 곁에 있겠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몹시 힘이 드시옵니다.
궁예 (슬픈 듯) 나는 알아. 사람이 백년을 살면 무엇하겠는가? 하루를 살다 죽어도 할 일을 하고 죽어야 하는 것이야. 그런데 나는 그럴 수가 없어.
왕건 무엇 때문이옵니까?
궁예 그만 하세. 어쨌든 이제 그럴 수가 없게 됐어. 달리지 않으면 안되도록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어 버렸어. 이보게, 아우.
왕건 예, 폐하.
궁예 우리는 형제야, 그렇지? 저 수달이가 견훤왕을 위해서 죽은 것처럼 나와 아우는 그런 사이야.
왕건 예, 폐하.
궁예 형제란 그래서 좋은 것이야. 죽음도 갈라 놓을 수가 없으니까. 이번에 시중을 맡아.
왕건 말씀드시지 않았사옵니까? 그보다는 좀 더 바깥에서 할 일이 많다고 말이옵니다. 시간을 잠시만 더 주시오소서.
궁예 (끄떡인다) 하긴 그래. 그 많은 전선을 누가 다스리겠는가? 하지만, 약속하게. 곧 시중으로 와 주겠다고.....약속을 해.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 은혜를 잊지 않겠사옵니다. 어찌 약속을 아니 드리겠사옵니까? 그리 하겠사옵니다.
궁예 (너무 취했다, 아픔도 잠시 가신 듯 하다) 그래, 그래야지. 나는 아우 뿐이야. 정말 아우 뿐이야.
궁예는 그러다가 술잔을 떨어트리며 그대로 얼굴을 떨구고 잠이 든다. 왕건이 입을 다물고 연민의 표정으로 보고 있다. 궁예는 코를 곤다. 왕건은 오래도록 그렇게 보고 있다. 그리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용포를 들어다가 어깨를 덮어 준다. 그리고, 다시 바라보는 왕건의 표정에서.....디졸브.
씬 9 황궁 밖 밤길
바람 소리가 계속 된다. 장수장과 가솔들이 앞을 인도하고 있고, 왕건과 태평, 능산, 왕신 들이 함께 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유씨와 수인이 시녀들과 함께 가고 있다.
왕건 자네들이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밤이 꽤 늦었는데 고생들 하였구먼.
태평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주군께서 대전에 계시는 동안 황궁의 병부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사옵니다.
왕건 허허, 그랬는가?
능산 폐하께서는 좀 어떻사옵니까?
왕건 어떻다니?
능산 주변 이야기를 들으니 여전히 병이 깊으시고 독주를 많이 하신다 하였사옵니다만은.....
왕건 (사이) 글세......
태평 아무래도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왕건 (한숨) 나도 그렇게 청을 올렸네. 아직 밖에서 할 일이 많다고 말이야. (두 부인에게) 그래, 황후전에서는 재미가 있었소이까?
유씨 예, 서방님. 황후마마께서 아주 잘 대해주셨사옵니다.
수인 황후마마께오서 옛 일을 이야기해주셨사옵니다. 서방님과 가까이 사신 이야기도 말이옵니다.
왕건 허허, 그랬소이까?
유씨 그렇게 두 분도 가까이 지내셨사옵니까?
왕건 글세올시다. 지난 날은 다 잊었소이다. 기억이 없구료.
유씨 그렇사옵니까?
왕건 바람이 꽤 심하구먼. 이보게, 장수장. 빨리 가세.
장수장 예, 주군.
유씨가 왕건의 표정을 살핀다. 왕건은 전혀 변화가 없어 보인다. 그들 그렇게 사라지면서......
씬 10 황궁 내원
종간과 은부가 마주해 있다.
종간 왕장군이 돌아가고 폐하께서 침수에 드셨다?
은부 예, 방금 그렇게 보고가 올라왔사옵니다.
종간 (혀를 찬다) 보나마나 폐하께서는 많이 취하셨을 게야.
은부 그러하시다 들었사옵니다.
종간 오랫만에 왕건이를 만났으니 그러실만도 하시네.
은부 장시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사옵니다. 아마도 중요한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옵니다.
종간 .....?
은부 나라 이름을 바꾸는 것 하며 정부의 조직을 바꾸는 것과 왕장군이 시중에 오른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겠사옵니까?
종간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테지. 왕건이는 다시 전선으로 가야해. 여기서 시중이 되어서는 안돼.
은부 그러게 말이옵니다.
종간 아지태의 동정은 어떠한가?
은부 세력이 만만치 않게 늘어나고 있사옵니다. 이미 바뀌기 시작한 군부에서부터 벼슬을 관장하는 내봉성과 법을 다스리는 의형대까지 아지태의 수하들인 청주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사옵니다.
종간 그래, 나라 이름을 다시 바꾸는 것도 역시 아지태의 청이었어. 하지만 말이야.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가 않아. 나라 이름이 바뀌고 연호가 바뀌고 정부 조직이 바뀌면 어떤가? 허지만 저들 세력이 늘어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야.
은부 그러하옵니다.
종간 계속 두고 보세나. 작은 싸움에 피곤하게 자꾸 승부를 걸 필요는 없어. 결정적인 것을 잡아 내야해. 그리고 언젠가 그것은 잡힐 것이야.
은부 (끄떡인다)......
종간 겉으로는 아지태가 왕건이보다도 똑똑해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아. 왕건이는 지금까지 그 내심을 드러낸 적이 없어. 허지만 아지태는 수없이 그 계산을 밖에 내보였어. 그만큼 수가 얕다는 이야기야. 결국 문제는 왕건이야. 아지태가 아니야.
씬 11 아지태 집 외경(낮)
씬 12 동 집 안
아지태가 임춘길, 입전, 신방, 능달, 기전 들과 마주해 있다.
아지태 폐하께서 나라 이름을 바꾸는 것과 조직을 개편하는 것에 대해서 승인을 하시고 여러가지 연구를 하라 하시었네.
임춘길 이야기 들었사옵니다, 나으리.
아지태 결국 이 아지태의 청을 또 한번 들어주셨네. 덕분에 많은 우리 사람들이 여러 부처에 벼슬을 하게 되었어. 다행한 일이야.
입전 그렇사옵니다. 이만한 다행이 없사옵니다.
아지태 그러고 보면 폐하께서는 아직도 그 총기는 여전하시단 말이야. 나라 이름을 바꾸면서 조직을 바꾼다는 것은 결국 나태해지려는 국정을 다시 쇄신하겠다는 그런 뜻이거든.
임춘길 신료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옵니다.
아지태 자신의 병을 술로 감추고 또 관심법으로 관료들의 충성을 강요하고있어.
신방 그러하옵니다. 그 관심법 이야기만 나오면 누구든 벌벌 떠옵니다.
능달 그럴 수 밖에요. 얼마나 무섭사옵니까?
기전 순간적으로 목숨이 오가는 일이옵니다?
아지태 지금 이 나라는 나와 내원 그 사람과 왕건장군이 균형을 이루고 있네. 사실 폐하께서 병만 없으시다면 정말 현군이 될 사람인데... 이제는 틀렸어. 너무 어려워. 이제부터는 우리가 나서야 해.
씬 13 유천궁의 집 사랑
유천궁과 박지윤 부자, 장자1,2가 마주해 있다.
유천궁 허허허, 왕건 장군이 시중이 된다고 하였소이까?
박지윤 이미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소이다.
장자1 시중이라면 광치나 어른께서 계시는 그 벼슬이 아니옵니까?
장자2 아, 왜 아니겠습니까? 결국 장인어른께서 사위에게 벼슬자리를 물려주시는 것이 되시겠습니다 그려.
박지윤 그러고 보면 역시 폐하께서는 왕장군을 세상 누구보다도 믿고 계십니다. 시중이라니요? 그것이 사실은 신료들 중 원로가 가는 자리가 아니겠소이까?
박수문 저희들도 참으로 놀랐사옵니다. 이제 왕장군께서 서른 다섯이옵니다. 그 나이에 시중이라니요?
박수경 그렇기는 하지만 이 나라에서 그만한 공을 세운 분이 누가 있겠사옵니까?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옵니다.
박지윤 갈수록 어려운 나라 사정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나라가 안정이 된다면야 좋겠지만......
유천궁 그렇소이다. 정말 나도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물러나고 싶었는데, 내 사위든 누구든 와서 이 어지러운 정국을 제대로 잡아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지만 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지태나 내원 그 사람이 좋아할 리가 없어요. 암요.
씬 14 왕건의 집 외경
씬 15 동 집 사랑
왕건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
왕건 (E) 어쩌다가..... 어쩌다가 폐하께서 병을 얻으셨을꼬....? 내가 처음 보았을 때에 얼마나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신 폐하셨든가? (도리질) 허나 지금은 아니다. 너무도 황폐해지셨다. 이제 어찌하실 것인가? 도대체 어찌하실 것인가?
두 부인이 들어온다. 다과상을 들고 들어온다.
유씨 무얼 그렇게 생각하시옵니까, 서방님?
왕건 아니오. 그저 이것 저것 생각 좀 하느라.
수인 기왕이면 나주에 계신 형님과 함께 오실 걸 그랬나 보옵니다.
왕건 그리하려고 했지만 나를 도와줄 일이 많아서 좀 남게 되었소이다.
수인 그러고 보면 그 형님이 부럽사옵니다.
왕건 무엇이 말이오?
수인 사내대장부들만 할 수 있는 일을 그 형님이 하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왕건 하하, 그것이 무엇이 그리 부럽소이까? 그래, 집안 일은 이제 좀 많이 익히셨소이까?
수인 큰 형님께서 많이 도와주시어 열심히 하고 있사옵니다.
유씨 (웃으며) 황후마마께서도 이 아우님 칭찬을 많이 해주셨사옵니다. 만나 뵈오니 황후마마도 참으로 따뜻한 분 같사옵니다.
왕건 좋은 분이시오.
유씨 ........? (사이) 과거에 두 분이 아주 가까우셨사옵니까?
왕건 부인은 그 일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것 같소이다.
유씨 아,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왕건 앞으로도 그 이야기는 나에게 하지 마시오. 나는 아는 것이 없소이다.
유씨 아, 예... 서방님.
수인 제가 뵙기로도 정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사옵니다. 호호호... 서방님 모처럼 송악에서 고기를 올려와 맛있는 저녁을 만들었사옵니다. 함께 가시오소서.
왕건 그럽시다.
수인 참, 이럴 때 나주 형님이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꼬...?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함께 저녁을 들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아니 그렇사옵니까, 서방님?
왕건 허허허, 고마운 말이오. 과연 그렇소이다.
유씨 ...........
어색해하는 유씨와 애교 많은 수인의 표정에서......
씬 16 나주 관아 외경
씬 17 나주 관아 안
오다련과 오씨가 함께 해 있다.
오씨 (계속 서류를 넘기며) 아버님, 지난 번 싸움에 참가한 호족들에게 상당히 많은 재물을 주신 것 같사옵니다?
오다련 그렇단다. 비록 왕장군이 수군과 많은 보군을 거느리고 전쟁에 왔다만은 이곳에서 뿌리 박고 있는 도착 호족들을 끌어들이지 않고는 나주를 오래 지키기 어려운 법이다.
오씨 호호호, 그렇사옵니다. 이럴 때일수록 상급을 후히 하시고, 저들의 인심을 붙들어 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옵니다. (계속 서류 넘기며 끄떡인다) 백제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사는 백성들에게도 소금을 많이도 주셨사옵니다?
오다련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 호족들도 그렇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잡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그만 하거라.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단다. 이것이 아주 아비를 잡으려고 드는 구나. 허허허...
오씨 서방님의 일이시옵니다. 이 나주가 잘 못 되면 우리 오씨 가문도 어떻게 되는 줄은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오다련 내가 왜 모르겠느냐?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냐? 그 옛날 중원에 있던 오나라의 국호인 그 오자가 바로 우리 성씨의 본이다.
오씨 알고 있사옵니다.
오다련 가문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일인데 내가 무엇을 아까워하겠느냐?
그나저나 별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견훤군이 저렇게 가까이서 물러가지 않고 있으니....
씬 18 금성 산성 성루
김언이 왕식렴, 염상과 함께 성 밖 멀리를 보고 있다.
김언 보시구료, 왕장군. 백제군이 저렇게 가까이 있소이다. 불원간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 같소이다.
왕식렴 .....(끄떡이며) 백제군이 많이 증강되었다지요?
염상 계속 첩보가 들어오고 있소이다. 군사들을 증강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를 공격할 중장비도 크게 보강되었다 하더이다.
김언 아무래도 왕총사께서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왕식렴 이곳에는 우리 말고도 장수들이 많이 있지를 않소이까? 무얼 걱정할 게 있소이까?
염상 그렇지가 않습니다. 조금 전에 철원 황도에서 온 소식을 들었는데 수달장군이 그예 처형되었다고 하더이다.
왕식렴 예? 그것이 정말입니까? 아니 가자마자 처형했다는 것이오이까?
김언 그렇소이다. 지금쯤은 백제군의 견훤왕도 이 사실을 접했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다시 전투가 일어나는 것은 뻔한 이치이지요.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할 거예요.
그 위로 견훤의 발광같은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씬 19 무진주 성 외경
지난 회와 마찬가지로 성 밖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 수많은 군사들과 장비들이 적진을 향해 있다.
씬 20 동 성 견훤의 방
견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최승우, 능애가 함께 해 있다. 견훤이 다시 부들부들 떨며 장계를 확인한다. 최승우는 비감하게 눈을 감고 있다.
견훤 아, 아....(비명 계속) 죽었어? 수달이가 죽었어? 수달이가..........?
최승우 .........
견훤 이것 좀 보아. 수달이가 죽었다는 것이야. 수달이가 말이야.
최승우 고정하시오소서, 폐하.
견훤 궁예왕이 수달이를 보자마자 불에 태워 죽였다는 것이야. 보았는가? 지금 올라온 이 장계를 보았어?
최승우 예, 폐하. 신도 억장이 무너지옵니다.
견훤 (입을 앙 다문다) 이럴 수가 있는가? 궁예왕 그 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참혹하게 사람을 죽일 수가 있는가?
최승우 이미 마진국의 궁예왕이 이성을 잃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고 하옵니다. 자신의 신하들도 관심법인가 뭔가로 짐승처럼 때려죽이는 정신 이상자이옵니다.
견훤 아.....아......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적군의 장수라지만 이렇게 죽일 수가 있는가? 수달아! 아우야!! (통곡한다) 네가 얼마나 이 형을 원망하며 죽어 갔겠느냐? 아우야!
견훤은 계속 통곡한다. 최승우는 한 숨을 내쉬며 어쩔 줄 모른다. 능애가 비감한 듯 서 있다가 주먹을 불끈 쥔다.
능애 폐하, 지금 폐하의 장수들이 바깥에서 영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더 망설이실 것 없사옵니다. 수달장군의 원수를 갚아야 하옵니다. 출전의 영을 내리시오소서.
견훤 (계속 울며) 아, 아, 수달 아우야, 네가 그렇게 죽었구나? 물도 마시지 않고 곡기도 끊고 그렇게 죽었구나? 이 형을 얼마나 원망했겠느냐? 아우야........! 수달 아우야......(가슴을 치며) 수달 아우야, 이 형을 얼마나 원망하며 눈을 감았겠느냐? 얼마나 뜨거웠겠느냐? 그 불 속에서 죽다니......얼마나 뜨거웠겠느냐, 아우야...... (절규) 아우야.....
비틀거리며 수달을 부르는 견훤의 그 목소리가 강하고 길게 에코우 된다. 그 얼굴에서 눈을 감은 최승우의 표정으로 판하며 디졸브.
씬 21 동 성 안 회의장
눈이 벌겋게 충혈된 견훤이 제장들을 돌아보고 있다. 최승우, 능애, 공직, 애술, 신덕, 추허조, 최필, 지훤 들이다.
공직 폐하, 참으로 비감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수달 장군의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모두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추허조 (울며) 페하, 신은 바로 수달장군과 의형제이옵니다. 신으로 하여금 선봉을 서게 하시어 이 원통함을 갚게 해주시오소서. 진심으로 청하옵니다, 폐하.
견훤 그렇지. 추장군도 수달도 우리는 모두 의형제였어. 갚아야지. 원수를 갚아야 하고 말고.
신덕 폐하, 폐하의 상심은 저희 제장들 뿐 아니라 백제국 백성들 모두가 마음 아파하는 일이옵니다. 하오나 이럴 때 일수록 성심을 가다듬으시오소서.
추허조 가다듬어? 무얼 말이오? 지금 이 나라의 충신이자 폐하의 의제가 되는 장수가 죽었소이다. 무얼 더 가다듬을 게 있단 말이오?
최승우 그렇지가 않소이다. 전쟁은 감정 싸움이 아니올시다. 지난 번에도 말하였든이 적군은 사기가 충천해 있고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소이다. 지금은 우리가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소이다. 전쟁은 아니되옵니다, 폐하.
능애 파진찬께서는 언제부터 그렇게 겁이 많아지셨소? 지금 폐하의 심기를 알기나 하시오? 그 마음이 우리 장수들 모두의 마음이올시다. 싸워야 하오이다. 지금은 그 길 밖에 없소이다.
최필 폐하, 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영을 내리시오소서. 신 또한 선봉에 서겠사옵니다. 허락하시오소서.
지훤 허락하시오소서, 폐하.
견훤 그래, 더 이상 길은 없어. 나는 싸우기로 했어.
최승우 폐하...... 헤아리시오소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옵니다. 폐하.....
신덕 폐하.....헤아리시오소서.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옵니다.
견훤 싸운다고 하였어. 나는 싸울 것이야. 수달아우가 죽었어. 방장군도 죽었고, 금성은 우리 땅이야. 제장들은 모두 들으라.
모두들 예, 폐하.
최승우 .....(한숨과 함께 눈을 감는다)
견훤 준비된 군사들을 전진 배치하라. 곧 전투에 돌입할 것이다. 모두 전투대형을 갖추어 작전에 돌입하도록 하라.
모두들 예, 폐하.....
견훤 파진찬은 지금 이 전선의 군사로 나와 있어. 전략을 준비하여 제장들에게 그 소임을 주도록 하라.
최승우 .........
견훤 들었는가, 파진찬? 전쟁에 돌입한다고 하였어. 이것은 군령이야. 알겠느냐고 물었어? 나는 지난 번에도 그대에게 전략을 내놓으라고 하였어,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어. 알겠는가? 이 밤 안으로 내 놓아! 내일 해가 뜰 때까지....
최승우 예, 폐하.
견훤 이겨야 해. 이번 싸움을 위해서 모두 목숨들을 걸어. 나도 그럴 것이야. 모두 죽기로 싸워서 금성을 뺏어야 해. 알겠는가?
모두들 예, 폐하.
씬 22 상주 낙동강 전선 (견훤 측)
씬 23 동 백제군 군영
능환이 장계를 다 읽고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탁자에 놓는다. 박영규와 태자 신검이 보다가 묻는다.
박영규 이찬어른, 왜 그러시옵니까?
능환 ..........그 사람이 갔네.
신검 무슨 말씀이십니까?
능환 수달장군 말이옵니다. 그 사람이 죽었사옵니다.
두사람 (동시에) 예?
능환 이번 일은 전적으로 금성전투의 전략을 맡았던 파진찬 그 사람 때문이옵니다. 패전의 상처가 너무도 컸사옵니다.
신검 이렇게 되면 아바마마께서 그냥 계실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 급하신 성격에 대책 없이 또 군사를 일으키다가는 더욱 더 어려워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박영규 소장도 그것이 걱정되옵니다. 지금 적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옵니다.
능환 (중얼거린다) 파진찬 그 사람이.... 좀 더 치밀했어야 했어. 좀 더..... 한 동안 폐하의 은총을 믿고 그 사람이 너무 안일해졌어요. 군사라는 직책은 폐하는 물론 수천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오. 헌데 너무 안일했어.
박영규 어쨌든 금성에서 다시 큰 전투가 벌어지게 생겼습니다.
능환 (끄떡인다) 허지만 아니되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승산이 없소.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야. 흥분해서 이기는 싸움은 없어.
그렇게 도리질하는 능환의 표정에서.....
씬 24 무진주 성 외경(밤)
여전히 군사들이 공격 준비를 끝내고 대기해 있다.
씬 25 동 성 안
최승우가 대형지형도를 걸어 놓고 도리질을 하며 보고 있다. 영산강 하류와 중류 그리고 금성산성을 연결하는 몇 곳에 군사들이 대치해 있는 화살표들이 보인다. 바다에는 배들이 가득하다. 물론 마진국의 배다. 그는 승산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한 숨을 쉬는 그의 표정에서.......
씬 26 동 성루
견훤이 갑옷을 입고 제장들과 함께 먼 어둠 속을 보고 있다. 견훤도 제장들도 하나같이 결의에 차 있다. 성밖에는 준비가 끝난 그 많은 군사들의 대열이 보이고 있다.
견훤 (추허조에게) 허조야,
추허조 예, 폐하.
견훤 이번 선봉은 내가 선다.
추허조 예, 아니...폐하.....
견훤 그럴 것이야. 내 우익을 보좌하라. 그것이 형제들로써 수달의 한을 갚는 길일 것이다.
추허조 알겠사옵니다, 폐하.
신덕 (옆에서 그 말을 듣다가)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폐하께서는 대 백제국의 상징이시옵니다. 폐하께서 선봉을 서시는 일은 있을 수가 없사옵니다. 그야말로 무모한 일이옵니다.
견훤 그렇게 할 것이야. 저 금성산성만 해치우면 영산강 일대도 다 무너지게 돼있어. 내가 갈 것이야.
신덕 폐하.....
견훤 파진찬이 아직까지도 아무런 작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이제부터 이 전선은 내가 계획을 세울 것이야. 우리의 주공격 목표는 저 금성산성으로 할 것이야. 그리고 군을 두군데로 나누어 강하류에 있는 마진국의 수군군단을 막고 한편은 산성으로 갈 것이야.
모두들 ...........
견훤 추장군과 내 아우 능애는 나를 좌우에서 보좌하라.
두장군 예, 폐하.
견훤 공장군이 최필 장군과 함께 바닷가의 마진국 수군을 맡으라.
두장군 예, 폐하.
견훤 신덕과 지훤 장군은 짐의 뒤에서 지원을 맡으라. 모두들 들었는가?
모두들 예, 페하......
견훤 모두들 자신의 군대를 재점검하고 곧 있을 공격령을 대기하라. 모두 위치로 가라.
모두들 예, 폐하.....
그들이 그렇게 움직이며 사라진다. 견훤의 눈빛은 그렇게 불타고 있다.
씬 27 금성 산성 외경
씬 28 동 성 안 회의장
김언과 왕식렴, 염상과 다련군이 모여서 지도를 보고 있다.
다련군 전쟁이 또 터진 것이오이까, 김장군?
김언 (끄떡인다) 그렇다고 합니다. 적군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하옵니다.
다련군 우리 장수들은 모두 어디 있소이까?
김언 이미 각자 위치를 정해 나가 있사옵니다. 이곳에도 곧 장수들이 더 보강되어 올 것이옵니다.
다련군 아, 그렇게 되었군요? 하지만 이 늙은이는 저 독이 오른 독사처럼 다가오고 있는 백제군이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김언 물론 그럴 것이옵니다. 병력으로 치면 서로가 대등하니까요. 왕총사께서 계신다면 상황이 좀 더 유리할 수가 있을 텐데....
왕식렴 지금의 급한 상황을 철원에 알렸소이까?
김언 물론입니다. 하루에 한 번씩 계속해 전령을 보내고 있소이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왕총사를 이곳 전선에 보내주십사하고 청을 올리고 있지만 어찌될지는 나도 알 수가 없소이다. 철원이라는 곳이 워낙 복잡해서 말입니다.
다련군 그건 그래요, 허허, 이거 참.......
씬 29 철원 왕건의 집 외경
씬 30 동 집 사랑
태평과 왕건이 바둑을 두고 있다. 능산이 보고 있다. 왕건이 수에 몰리는 듯 ‘허허’하며 낙담을 한다.
왕건 이거 참... 또 진 것 같네 그려. 역시 바둑이란 정석으로 두어야지 요령을 부리며 사석을 놓다가는 이렇게 축으로
몰리기 십상이란 말이야.
태평 하하하, 주군, 그러나 세상은 바둑 같지가 않사옵니다.
왕건 그건 무슨 소리인가?
태평 정직하고 원리 원칙적인 것은 평화로운 시대나 통하는 것이옵니다. 난국일수록 법이나 정의보다는 힘과 계교를 필요로 하옵니다.
왕건 원, 사람하고는 그래도 순리대로 살아야지.
능산 (사이) 소인이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들었사온데, 지금 이 조정은 온통 아지태 그 사람의 판이라 하옵니다..
왕건 ......(반응이 없다)
능산 아지태가 자신의 세력을 급격히 키우고 있는 것은 다른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왕건 (딴 청이다) 바둑 안 두겠는가? 어서 두게.
태평 (정색하며) 능산장군의 말이 옳사옵니다. 잠시 살펴본 이 철원은 온통 위험천만한 곳이옵니다. 주군께서는 헤아리셔야 할 것이옵니다. 특히 아지태 그 사람은 더욱 그렇사옵니다. 지난 번 주군께 왔던 것은 사실 목숨을 걸고 담판하러 온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왕건 이 사람아, 바둑 아직 안 끝났어.
태평 (답답한 듯) 주군....
왕건 (비로소 돌을 놓으며) 왜들 이리 겁쟁이들이 되었는가? 도대체 그 아지태라는 자가 무엇이 그리 두렵단 말인가?
두사람 .......?
왕건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 그러나 그럴수록 침착해야 해. 정도를 걸으면서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야. 아지태 그 자는 이 바둑으로 치면 정공법을 쓰지 못하고 순간적인 기회와 이득만을 챙기며 사석을 놓는 소인배일세. 내가 왜 그런 자를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태평 하오나, 주군...
왕건 군자는 대로라 하였어. 나는 나의 길을 가고 그 자는 그 자의 길을 가는 것이야.
능산 그렇기는 하오나 아지태는 목숨을 걸고 주군께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갔사옵니다. 다시 말하면 주군의 가장 큰 적이 된 것이옵니다.
태평 그러하옵니다. 이제는 주군께서도 주군의 길을 확실하게 예비하지 않으시면 아니되옵니다.
왕건 예비라고 하였는가?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인가?
태평 이 제국은 지금 비틀거리고 있사옵니다. 미치광이 황제는 재미 삼아 사람을 죽이고 있고 사악한 아지태와 살쾡이 같은 내원이 주군의 목숨을 노리고 있사옵니다. 이럴 때 대도만을 운운하실 것이옵니까? 이제 주군의 길을 가시오소서. 많은 이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사옵니다.
왕건 나의 길을 가라....?
태평 그러하옵니다.
왕건 나를 보고 폐하를 배신하라는 것인가? 그런 것인가?
태평 이미 도선대사께서도 그리 예언하시었고 주군의 가문에서도 그것을 일찍부터 원하셨사옵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군을 우러러 뫼시려 하고 있사옵니다.
왕건 나와 폐하는 결의를 한 사이일세. 형이 잠시 고단하고 병들었다 해서 아우보고 버리라 이 말인가? 그건 어디서 배운 논리인가?
능산 주군, 폐하는 이미 망령이 든 사람이옵니다.
왕건 그러니까 버리라? 큰 일 날 사람들이로군. 그렇다면 내가 아프고 병들었을 때 자네들도 나를 버리겠네 그려. (아주 크게 호통) 정신차리게, 이 사람들아.
두사람 ...........?
왕건 사람이 정도를 걷지 못하고 다른 길로 빠진다면 멀리 가지를 못하는 것이야. 끝까지 충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의리를 다할 때에 또 다른 진리가 보이는 것이야. 폐하께서는 나를 의지하고 계시네. 모름지기 사내란 끝까지 변치 않는 것이 사내야. 알겠는가?
두사람 주군......?
왕건 도선대사께서도 내게 바로 그걸 가르치셨네. 아무리 고단하고 괴로워도 묵묵히 정의와 진리의 길로 가라. 그곳만이 구원의 길이 있다. 그렇게 말씀하셨어. 알겠는가? (사이) 알겠는가 물었어?
태평 예, 주군.
왕건 능산 아우, 내가 폐하와 형제이듯이 아우도 내 형제일세. 내 말뜻을 알겠는가?
능산 예, 주군. 주군의 깊으신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사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왕건 고맙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옥좌가 아니야. 변하지 않는 의리, 죽음의 불 속까지 함께 가는 그 의리가 이 세상 무엇보다도 값지고 소중한 것이야. 알겠는가? 그 길이 비록 몹시 힘이 들고 괴롭다 하여도 말일세. 우리는 그 길을 가는 것이야.
왕건은 그렇게 허공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런 왕건을 보는 두 사람의 감동 같은 면면에서 엔딩으로 이어지는 듯 하면서 다시 해설로.....
해설 왕건이 주장하고 있는 지금의 이 대장부들의 정도와 의리! 이 때 받은 감동 때문이었을까? 뒤에 신숭겸으로 불리우는 능산은 대구 공산전투에서 주군인 왕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장렬하게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고려조 최고의 충신으로써 그 이름을 빛내게 된다.
< 94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