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117회>
줄거리
어느 산야에 시체로 버려진 연화.그녀의 손에는 왕건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런 연화를 사무외대사인 형미가 상여에 태워 백성들과 함께 철원 시가지를 돌기 시작한다.그렇게, 연화의 죽음은 민심을 궁예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하였다. 한편, 능산,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의 기장들은 궁예의 폭정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혁명을 위해 군부를 장악하기에 이르는데...
씬 황궁 외경(낮)
씬 동 의형대 옥사
은부가 옥안에 갇혀 있는 형미를 보고 있다. 승려들도 가득하다.
은부 네 이놈, 정신이 나간 놈이 아니고서야 어찌 죄를 받고 죽은 죄인들
의 상여를 낸단 말이냐? 네 놈이 제 정신이냐?
형미 (껄껄 웃으며) 이보시오, 장군. 제 정신인가 아닌가는 내가 묻고 싶
소이다. 그것이 어디 황후만의 상여이겠소이까?
은부 그건 또 무슨 소린가?
형미 허허허, 이런... 그 상여는 바로 이 태봉국의 초상을 치르는 상여였
소이다.
은부 뭐라?
형미 죽은 태봉국을 조상하는 상여말이외다. 하하하...
은부 이런, 실성한 놈을 보았는가? 닥치지 못할까?
형미 태봉국은 이미 황후마마와 더불어 그 운이 다했소이다. 그것을 백성
들에게 알리려고 조상한 것이외다. 하하하....
은부 ...........?
금대, 장일 ...........?
씬 동 내원
종간과 허월이 마주해 있다.
종간 대사님, 어쩌자고 저런 무리들과 어울려 계셨사옵니까?
허월 ........(미소만).......
종간 지금이 어떤 시국이옵니까? 왜 대사께서 그것을 알지 못하시고, 저
런 무리들과....
허월 이보시오, 내원.
종간 예.
허월 그 상여 앞에 섰던 사람은 바로 형미라는 고승이올시다. 백제, 신라
이 태봉을 통 털어서 그 중 네 명의 스님을 해동에서 제일 뛰어난
고승이라고 하오. 그 사람들을 또 다른 이름으로 사무외대사라 하는
데, 그 중 한 분이 바로 그 형미라는 승려올시다.
종간 예?
허월 이런, 쯧쯧... 나는 누구보다도 내원을 잘 압니다. 그러나, 내원은 황
제와 황실만 알았지. 세상을 모르는 것 같아요. 이미 인심이 이 나
라를 떠났소이다.
종간 물론, 어려움이 있었사옵니다. 하오나, 그 인심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허월 무엇으로 말이오? 나는 그 옛날에 지금의 폐하께서 나라를 이루고
자 하실 때 가장 먼저 저 명주(강릉)성을 통째로 바친 사람이올시
다.
종간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폐하께오서도 대사님만은 지금도 변함없이
존경하고 계시옵니다. 향리로 돌아가시오소서.
허월 이미 제국에 낙조가 드리웠는데, 어찌 그냥 돌아가겠소이까?
종간 대사?
허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폐하께서 변하시는 것이 아니
라, 바로 그대들 같은 이 나라의 권력을 총괄하는 사람들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외다. 자, 내원, 내가 감옥으로 가야겠소이
까? 아니면, 나가도 좋겠소이까?
종간 향리로 돌아가시오소서. 부탁이옵니다, 대사님. 그나마도 지난 공이
크시어, 이만큼이나마 배려를 드리는 것이옵니다.
허월 글세올시다. 허허허...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허면 가 보아
야겠소이다. 어차피, 형미대사는 이미 이승의 옷을 벗으려고 작정한
사람이고....
종간 .........?
허월 허나, 알아두시구료. 형미대사가 죽는 그 순간이 바로 이 나라가 무
너지는 신호가 될 것이외다.
종간 대사님..?
허월 또 볼지 모르겠소이다. 허허허....
허월이 그렇게 웃으며 나간다. 종간은 허공을 보며 긴 한숨을 터트
린다.
씬 대전 외경 복도
씬 동 대전 안
종간과 은부가 궁예와 마주해 있다. 최응이 여전히 그 옆에 있다.
궁예 사무외대사..?
종간 예, 폐하. 삼한을 통털어 네 사람의 고승이 있다 하는데, 그들을 일
컬어 그리 부른다 하옵니다.
궁예 사무외대사라...?
해설 사무외대사(四無畏大士), 불교용어로써 흔들림이 없는 경지에 서 있
는 당대 네 사람의 고승을 일컫는 것으로 지난 회에도 설명을 하였
다. 그 중 형미는 경유, 이엄, 여염 등 네 사람 중에서 두 번째 연장
자였다. 이들은 모두 중국에 유학했고, 같은 스승 밑에서 수학한 사
형, 사제간이었다.
궁예 사무외대사, 저들이 그토록 도력이 높단 말인가? 그토록 많은 공부
를 했어?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이 미륵을 어찌 보고... 그 따위
망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백성들을 선동한 것이 아닌
가? 뭐가 어쩌고 어째? 산속에 버려진 황후와 태자들의 시체를 끌
어 내서 상여를 태워 돌았어? 이런 놈들을 보았는가?
모두들 ........
궁예 도대체 그런 놈들이 존경을 받고 있다니, 하늘이 웃을 일이야. 처형
을 하게.
종간 폐하..?
궁예 왜 그러시오, 내원?
종간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있사옵니다. 저들이 어리석어 미처 사안을 분
별치 못하고 그저 인정에서 한 일이옵니다. 목숨만은 부지케하여 주
시오소서.
궁예 목숨을 놓아줘? 아니, 죄인들을 상여에 싣고 곡을 하며 돌았는데,
그것을 살려두란 말이오?
종간 큰 벌을 내리시더라도 나중에 하시오소서. 지금은 황후마마와 태자
마마들의 일로 하여 세간의 인심이 흉흉하옵니다. 이럴 때에 그래도
세상에 이름께나 얻었다는 고승을 처형하심은 때가 좋지 않사옵니
다.
궁예 때가 좋지 않다? 아니, 언제부터 내원이 그렇게 눈치를 보고 살았소
이까?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찌 한 제국을 운영할 수가 있겠
소?
종간 신의 청을 가납해주시오소서. 지금은 아니되옵니다. 처형을 하시더
라도, 조금만 더 미루시오소서.
궁예 허허, 이런... 좋소이다. 그렇다면, 아주 보란 듯이 하십시다. 얼마 안
있으면 곧 부처가 이 세상에 왔다는 초파일이올시다. 부처의 제자들
이 잘못을 하면 어떻게 되는 지를 그때 아주 보란 듯이 알려주십시
다.
종간 ...........(미처 대답을 못한다, 절망이다)
궁예 그리고, 그 시체와 상여들은 거두어서 태워버리시오. 흔적도 남기지
말고 다 그렇게, 태워서 없애버리란 말이오. 은장군이 해야겠구먼.
은부 예, 폐하.
궁예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쓸 것 없소이다. 그렇게들 처리하기로 하
고, 이제부터는 제국의 앞날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
을 생각해야 할 것이외다. 지난 것은 이것으로 모두 씻고, 지금부터
이 제국을 다시 시작한다 이 말이오. 아시겠소이까?
종간 (마지못해) 예, 폐하.
궁예 처음으로 돌아왔소이다.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것
이외다. 다시 말이오. 허허허.....
씬 왕건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왕건과 허월이 마주해 있다. 두 유씨가 차를 올리고 물러난다.
허월 (그 차를 마시며) 형미대사가 스스로 죽음을 자청해 순교를 결심한
것 같소이다. 그 옛날 석총대사처럼 말이오.
왕건 (한숨) 예, 대사님.
허월 수백년을 내려오며 이 땅의 백성들과 함께 했던 불교올시다. 오늘날
황제가 망령이 들어 그 불법을 폐하고 세상을 지옥의 도가니로 만
들었어요. 형미대사는 스스로를 하나의 불꽃으로 생각하고, 그 불법
을 살리려 하는 것이올시다.
왕건 허지만, 그 한 분이 그러신다 하여 갑자기 밝은 세상이 오겠사옵니
까?
허월 왕장군이 일어나신다면, 가능한 일이지요.
왕건 대사님..?
허월 이미 세상이 그렇게 보고 있지를 않소이까? 형미대사가 내게 부탁
한 것은 더 이상 우물쭈물 하지 말고 장군이 결심을 할 때가 되었
다는 것을 알려주라는 것이었소이다.
왕건 (긴 한숨)........
허월 진정한 불국정토를 이루고자 수없이 많은 목숨들이 하나 둘 스스로
초석이 되며 죽어가고 있소이다.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아니되오.
백성들을 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은 공의 책임이오.
왕건 .........
허월 이제 공의 시대가 온 것이외다. 왕장군의 시대 말이오.
씬 어느 집 사랑
사기장이 모여 있다. 모두들 표정이 긴장되고, 눈이 빛난다.
홍유 소식을 들으셨소이까? 지난 밤에 형미라는 고승이 황후마마와 태자
들의 시신을 싣고 상여를 돌았다 하오이다.
배현경 들었소이다. 이미 내군이 출동하여 행렬을 해산시키고 형미스님은
가두었다 하더이다.
복지겸 거기 허월대사도 계셨다 들었소이다.
능산 그렇다고 합니다. 내원 방으로 갔다가, 그 분은 다시 풀려났다고 들
었습니다.
배현경 상여의 의미가 무엇이오이까? 이미 이 나라가 무너졌다는 것을 말
하는 것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우리의 뜻을 굳히고, 거사를 성사
시켜야 합니다.
복지겸 능산장군, 왕장군께 뜻은 전하셨는지요?
능산 아직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워낙 완강한 분이시니...
복지겸 허나, 이미 우리가 뫼실 분은 그 분으로 정해져있소이다. 뜸을 오래
들이면 밥이 타는 법이올시다.
홍유 수많은 역경을 거치면서도 그 분은 단 한 번도 다른 뜻을 가져본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능산장군이 쉽게 이야기를 못 꺼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배현경 그러나, 잘못 시기를 놓치다가는 오히려 우리들의 큰 뜻을 망칠 수
도 있습니다.
능산 어차피 우리가 행동에 나서면 그 분께서는 결정하실 수밖에 없게
되어 있소이다. 그보다도 우리가 원만하게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체
제를 마련해야하오이다. 그리고, 거사 이후의 일들도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복지겸 그건 그렇소이다. 일단 내군의 감시를 피하면서 일을 이루자면 병부
령을 포섭하고 동시에 순군부의 명령체제를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홍유 그보다 앞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내군의 감시체제를 우리에게서
떼어놓아야 합니다.
능산 그건 필수적일 것입니다. 내군은 일단 은부장군이 통솔하고 있으나,
그 밑으로 금대와 장일부장이 군과 백성들을 나누어 감찰하고 있습
니다. 지난 번 나주에서 올라오면서 장일부장이 조금 흔들리는 모습
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모두들 오, 그래요?
능산 당시 장일부장은 험악한 나주의 분위기 그대로라면 목숨을 잃을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왕장군께서 막아주셨습니다. 그 분위기
를 그 사람은 알고 있어요. 접근해 볼만합니다.
배현경 그렇다면 내군출신인 염상장군을 움직여보면 어떻겠소이까?
복지겸 좋은 생각이올시다. 염장군은 능히 우리에게 동조할 사람입니다.
홍유 병부령을 우리에게 끌어들이고, 염장군을 포섭하는 것은 좋습니다.
허나, 우리 기장들 중에서 환선길 장군 또한 무시할 수가 없소이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능산 그는 아니됩니다. 사람이 일방적이고 다혈질이며 오로지 황제에 대
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는 사람입니다. 방해가 될 것입니다.
복지겸 (끄떡인다) 그럴 수 있어요. 또 있습니다. 순군부의 수장인 임춘길이
올시다.
배현경 임춘길이는 제 한 목숨 건지기 급급한 졸장부올시다. 벼슬만 높지
그렇게 영리한 편이 아닙니다. 적당히 돌려만 놓으면 될 것입니다.
복지겸 그렇다면 각자의 역할을 나누십시다. 이 사람과 배장군이 병부령과
염상 장군을 만나겠소이다. 환선길 장군의 동정은 홍장군이 잘 다독
거리면서 무마시키도록 하는 게 좋겠소이다. 또한, 능산장군은 누구
보다도 왕장군과 가까우시니 일단 왕장군께 우리들의 뜻을 전할 필
요가 있습니다.
능산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두들 ........(끄떡인다)......
복지겸 자, 일이 잘못된다면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다. 각
자가 맡은 군대는 철저하게 장악을 하면서 지금 우리가 나눈 일들
을 빨리 추진하도록 하십시다.
그들 모두 그렇게 끄떡이면서......
씬 병부 관아 외경
씬 동 관아 안
원극유와 염상이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원극유 조정인심이 아주 흉흉하오이다.
염상 그러게 말이옵니다. 황후마마 사건이후로 또 다시 형미라는 고승이
하옥되었다고 하옵니다.
원극유 요 며칠 어떻게 장수들이 조정에 출사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려.
염상 특별한 영이 계신 것도 아니고, 장수들이야 자신들이 속한 군대를
잘 관할하면 소임이 끝나는 것이 아니옵니까?
원극유 그렇기는 하지만서도... 세상이 하도 어지러우니.... 내군에서도 요즘
따라 매일처럼 군대의 현황을 보고하라고 난리입니다. 행여나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하는 눈치들이예요.
염상 내군은 황제의 직할 부대이옵니다. 그럴만 하옵니다. 그게 바로 인
심이 사납다는 증거가 아니겠사옵니까?
원극유 그러게 말이오. 그러게.... 이제 그만 이 조정을 물러나야 할 때가 되
었는데, 이러고 앉아 있구료. 나도 너무 늙었어요.
염상 무슨 말씀을... 이럴 때일수록 나이 드신 신료 분들이 조정을 잘 운
영해주셔야지요.
원극유 지금 조정이 어디 있소이까?
염상 ..........?
씬 환선길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환선길이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환선길 이거 도대체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것이야? 모든 게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 군대를 훈련시키라는 명령도 요즘은 없고, 폐하께서는 도대
체 그 엄청난 일들을 해치우시고서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실까? 이럴
때는 그저 북벌이라도 나가는 것이 좋겠구먼.
그때, 환선길의 처가 들어와 찻상을 놓으며 말한다.
환선길처 장군,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옵니까?
환선길 무료해서 그러오. 군인은 그저 전장터가 제격인데... 하는 일 없이
황궁에서 지내고 있자니, 답답해서 말이오.
환선길처 차 드시오소서.
환선길 차는 무슨, 술이나 한 상 내오시오.
환선길처 그보다도 장군, 폐하께서 정말로 황후마마를 죽이실 때 그게... 그렇
게 죽이셨사옵니까?
환선길 뭘 말이오?
환선길처 (간드러지게 웃으며) 참으로 폐하께서도 짖궂기도 하셔라. 아니, 신
료들이 다 보는데서 여인네의 그 은밀한 곳을 벌 주셨단 말입니까?
아이고, 호호호.
환선길 이런, 쯧쯧... 아니, 부인 그것이 무엇이 우습단 말이오? 폐하께서는
미륵이시오. 그 분 마음이 가는 곳이 곧 법이오. 어떻게 죽이든 그
야 폐하 마음이지. 하지만, 아니 되었어.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는 없
는데...
환선길처 그래도, 그렇지. 벌써 세상 사람들이 그 일을 다 안다 하옵니다. 호
호호.
그때, 집사장의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E) 장군, 손님이 오셨사옵니다.
환선길 손님?
씬 동 밖
그 방 밖 마당에 홍유가 서 있다. 문이 열리고 환선길이 보다가 눈
을 크게 뜬다.
환선길 아니, 홍장군이 아니시오? 어쩐 일이시오?
홍유 그저 여러 가지로 무료하고 답답해서 찾아 왔습니다. 술이나 한 잔
마실 수 있을까 해서요. 허허허.
환선길 거,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술 생각이 날 참이었어요.
자, 들어오시구료. 어서.
환선길처 들어오십시오, 장군. 곧 상을 마련해 올리겠사옵니다.
홍유 예, 허면....
홍유가 그렇게 안으로 들어간다. 환선길처가 묘하게 고개를 꼬고 보
면서 디졸브.....
씬 다시 동 집 사랑
술 잔을 들며 홍유가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묻는다.
홍유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처남분도 상주로 가 계신다 들었고...
환선길 맞아요. 내 처남 이흔암 장군도 상주에 가 있어서 요즘 좀 그렇소이
다. 처남 매부를 떠나 술 동무였거든요. 허허허.
홍유 (마시고) 요즘 군부가 모두들 일손을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딱히
큰 전선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환선길 그러게 말이오. 나도 이거 무료해서 죽겠소이다.
홍유 허허허, 다들 그렇습니다. 헌데, 장군, 그... 지난 번에 황후마마의 일
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환선길 아, 그 일이오? 좀 심하셨지요. 허지만, 뭐, 폐하께서 관심법으로 보
신 일이니 우리가 어찌하겠습니까? 황후도 결국은 폐하 앞에서는
신하의 반열에 있는 것입니다.
홍유 그야 그렇지요.
환선길 헌데 왜요? 왜 갑자기 그 이야기는 꺼내십니까?
홍유 저도 그저 답답해서 해 본 말입니다. 어디 큰 전선이나 있다면 청해
서 나가고 싶습니다. 이 철원은 답답해서 말입니다.
환선길 허허허, 기회가 있다면 우리 함께 가십시다. 나도 그래요. 나도 이렇
게 오래 쉬는 것은 몸이 근지러워서 말이오. 허허허, 자, 듭시다.
홍유 예, 장군.
환선길 (함께 마시다가) 거 생각 밖으로 홍장군이 찾아와 주니, 술맛이 더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 서로 서로 다른 장군들도 들 만나서 이
렇게 술자리를 해야 하는데 말이오.
홍유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한 번 주선을 해보겠습니다, 장군.
환선길 하하하, 그렇게 하십시다. 술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소이까? 하하하.
씬 원극유의 집 외경(밤)
씬 동 집 사랑
원극유가 놀라서 배현경, 복지겸을 보고 있다. 염상도 함께 있다.
원극유 (떨며) 지금 거사라 하셨소이까?
복지겸 그렇습니다. 거사라기 보다는 혁명이올습니다.
염상 이곳으로 오기 전에 저도 두 분 장군들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정했
사옵니다.
배현경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일이올습니다. 병부령께서는 원로 대신이시
고, 군대의 모든 명령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원극유 허지만, 나는 그저 문서나 만지작거리는 늙은이올시다. 실제적인 지
휘권은 내군과 순군부가 가지고 있어요.
배현경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계질서가 그렇지 실제로는 야전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것은 바로 병부령 앞에 있는 저희 기장들이올습니다.
원극유 그야....(끄떡이며) 그야, 그렇지요. 허지만,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금
방 저들의 눈에 드러납니다. 어떻게 하시려고...?
복지겸 병부에서 정례적인 군사훈련에 관한 영을 조금 앞 당겨 내려주십시
요. 장마가 있다거나, 농사를 핑계 대고 말이옵니다. 의심을 받지 않
게끔 하고 내군과 순군부의 지휘부를 속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끝
나는 것이옵니다.
원극유 정말로..... 정말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오이까?
염상 병부령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한 것이옵니다. 저도 이미 내군의 통제
를 막는 소임을 받았사옵니다. 일이 아주 구체적으로 되어 가고 있
는 것이옵니다, 병부령 어른.
원극유가 고개를 끄떡인다. 허나, 두렵다. 눈치를 본다.
복지겸 어차피, 모두가 목숨을 내놓고 있사옵니다. 어찌하시겠사옵니까? 대
답을 아니 주시면, 우리가 돌아갈 수 없게 되었사옵니다.
원극유 그야 그렇겠지요. 비밀을 다 알아버렸으니 말이오. 좋소이다. 그리하
십시다. 나도 기꺼이 나서겠소이다. 어차피 누군가 앞을 서면 따라
야 할 입장이었어요. 내가 병부에서 군대의 이동을 책임지고 맡으리
다.
모두들 고맙사옵니다.
원극유 허지만, 내군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 나라 권력은 모두 그
곳에서 통제했소이다. 내원과 은부장군이 누구이오이까?
염상 그 일은 제가 맡기로 한 일이옵니다. 잘 해보아야지요.
원극유 (한숨) 결국은 이렇게 되는 구료. 일이 이렇게 되고 있어요. 허허..
씬 황궁 내군 관아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은부가 몇 번이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금
대와 장일을 보고 있다. 금대, 장일 옆으로도 다른 부장들이 여러
명 함께 있다.
은부 몇 번씩 말하는 것이지만, 내원어른께서 지금 이 시국을 폐하께서
집권하신 이래 최대의 위기로 보고 계시네.
두사람 ........
은부 각군에 배치되어 있는 내군들을 잘 다스려서, 군의 이동상황을 어느
때보다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할 것이야. 알겠는가?
두사람 예, 장군.
은부 특히나 군부에는 왕건장군을 따르는 장수들이 많아. 그 일을 잘 통
제하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것이야. 다시 말한다면
국가 위기의 상황으로 갈 수가 있다는 것이야.
금대 알겠사옵니다, 장군.
은부 백성들의 동태나 문신들의 경우는 별 걱정이 안돼. 문제는 군대야.
순군부에 임춘길 장군이 있지만, 사람이 그리 명석하지를 못해. 역
시 믿을 것은 우리 내군뿐이야. 우리는 군대 곳곳에 첩자를 보내놓
고 있어. 그들을 잘 관리하고 못하는 것이 곧 제국의 운명과도 직결
되어 있어. 지금까지는 잘 해 왔어. 앞으로는 더욱 더 잘해야 되는
것이야.
두사람 예, 장군.
은부 나도 느끼겠어. 뭔가 수상할 정도로 조용해.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
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 뭔가가 말이야.
장일 .........
씬 왕건의 집 외경
씬 동 집 안채 방
두 유씨가 걱정스럽게 서로를 보고 있다.
유씨 도무지 서방님께서는 이렇다할 말씀이 없으시니, 답답하네.
수인 황후마마께서 그런 변을 당하셨는데, 무슨 경황이 있으시겠사옵니
까? 그나저나, 나주에서도 무척 궁금해할 것인데....
유씨 사람을 시켜 이곳 소식을 전해 보냈네. 도착할 때가 되었구먼.... 그
나저나, 사랑에서는 아주 중한 일이 있는 모양이네. 서방님께서 주
변을 다 물리치고 능산장군만을 방으로 들이지 않으셨는가?
수인 그러게 말이옵니다. 왜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작금의 일들이 하나같
이 그렇지 않사옵니까? 뭔가 의논이 있으시겠지요.
씬 동 집 사랑
능산과 왕건이 마주해 있다.
왕건 나를 보고 거사에 가담을 하라..?
능산 주군, 거사가 아니라 혁명이옵니다. 이미 때가 차고 넘쳤사옵니다.
이 황폐한 나라를 구하실 분은 주군이시옵니다.
왕건 허나, 그것은 반역이야. 나는 반역의 길에 설 수 없네.
능산 백성을 구하는 길이 어찌 반역이옵니까?
왕건 나는 못하네.
능산 이미 저를 비롯한 사기장이 합세하였사옵니다. 기장이 무엇이옵니
까? 기병군단을 거느리는 장군들이옵니다. 이 나라 군의 핵심들이옵
니다. 허락하시오소서, 주군.
왕건 성공하리라고 보는가?
능산 그럴 수 있사옵니다. 이미 적과 아군을 분류하여 포섭에 나섰사옵니
다. 병부령도 합류를 한 것으로 아옵니다.
왕건 당장 그만 두게. 그래도, 황제폐하가 아니신가? 어찌 신하가 폐하를
몰아낼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다시 나주로 가려고 하는 중이네.
역시 그곳이 낫겠어.
능산 아니되옵니다. 이미 돌아가실 여유도 없사옵니다. 오히려 그곳에 있
는 태평학사를 불려 올려야 하옵니다. 금필 형님과 술희 아우는 만
약에 대비해 나주에서 군을 장악하고 있다 하더라도, 태평학사는 올
라와야 하옵니다. 시간이 없사옵니다, 주군.
왕건 물론, 이 제국은 운명을 다한 듯 보이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칼을
들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도, 형제의 의를 맺었던 분이야.
능산 이미 형님이 아니라 모든 정신을 잃어버린 광인에 불과하옵니다.
왕건 나는 못한다고 하였어. 나는 못해.
능산 허락 하셔야하옵니다. 시간이 없사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주군께
내려져 있던 그 예언이 이제 때를 만나고 있는 것이옵니다. 이 나라
최고의 장수들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는 일이옵니다. 허락하시오소
서, 주군. 그리하셔야하옵니다.
왕건 대답할 수 없네. 충고하건데, 그 일은 그만 두게. 신하의 도리는 어
쩔 수 없는 것이야. 그게 운명이 아니겠는가? 나주로 갈 생각이나
하세.
능산 주군, 시간이 없다고 말씀드렸사옵니다. 이미 장수들이 움직이고 있
사옵니다, 주군.
왕건 나는 못하네. 나는 못해.
능산 주군.......
왕건 나주에 그냥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씬 나주 관아 외경(낮)
씬 동 관아 안
다련군과 오씨가 마주해 있다. 그들도 역시 긴장되어 있기는 마찬가
지이다. 오씨가 서찰을 다 읽고 한숨을 쉰다.
오씨 그동안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 것 같사옵니다. 철원에 계시
는 큰형님이 보내신 이 서찰을 보면 큰 사단이 있었사옵니다.
다련군 그랬어?
오씨 예. 다행히 서방님께서는 간신히 그 목숨을 구하셨사옵니다만은 황
후마마와 두 태자께서 변을 당하셨다 하옵니다.
다련군 뭐라고? 황후마마와 태자분들이 변을 당해?
오씨 예. 황제가 정말로 이제 그 끝을 보이는 모양이옵니다. 이야말로 사
람으로써는 할 수 없는 짓이 아니옵니까? 방망이를 불에 달구어 사
람을 죽였다 하옵니다.
다련군 뭐라고? 이런 세상에... ?
그 위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안
박씨와 고비가 함께 해 있고, 견훤이 웃으며 서찰을 접고 있다. 최
승우도 역시 미소를 띄우며 보고 있다.
견훤 하하하, 이것 보게나. 자네 말대로 되었네. 궁예왕이 정말로 어떻게
된 모양일세. 사람이 되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제 처자
식을 때려 죽인단 말인가?
박씨 예..? 아니, 폐하, 궁예왕이 그렇게 했단 말이옵니까?
고비 아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
최승우 뭔가 일이 있어도 아주 크게 있었던 모양이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겠사옵니까?
견훤 그러게 말이야. 아무래도 궁예왕이 다시 발작을 일으킨 모양이야.
최승우 그런 것 같사옵니다. 나주에서 불려 올라간 왕건이도 크게 문책을
받았다 하옵니다. 아무래도 태봉국의 내정이 심상치 않은 것 같사옵
니다.
견훤 그러길래, 그러길래, 한 집 안이 편안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
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이 얼마나 무
서운 말인가 말이야. 집안이 편안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암, 그래야
지. 그래야 하고 말고...(하다가) 에잉...쯧쯧..하긴, 그래. 나라고 큰
소리 칠 건 하나도 없네 그려. 아버님 생각을 하면 말이야.
박씨 그것이 어디 폐하 탓이옵니까? 아버님의 망령 때문이지요. 그보다도
폐하 주변을 좀 더 엄히 살피시오소서. 작은 불씨 하나가 잘못하면
큰 것을 태운다고 하였사옵니다.
견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박씨 폐하께서 다 장성한 큰 아이들은 나 몰라라 하시고 승평부인이의
금강이만 총애하신다고 난리들이옵니다. 새겨들으시오소서.
고비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견훤 허허, 이런, 이런..... 이거 어떻게 된 게 얘기만 나오면 그걸 물고 늘
어지는가? 이런 쯧쯧쯧.... (다시 서찰 보며) 하여간, 태봉이 참 묘하
게 되어 가고 있어. 궁예왕이 분명히 뭔가가 있어.
씬 철원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안
궁예가 단정히 앉아 책들을 넘기며 종간을 보고 있다.
궁예 이제 황실의 일은 다 정리가 되었소이다. 모두 다시 힘을 모아서 국
력을 키워야 할 것이외다. 그러자면 먼저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어
요. 그 하나는 신라와 백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우리 태봉국이 어떻게 북진을 계속 할 것인가 하는 것이오.
종간 예, 폐하.
궁예 (책장을 넘기며) 그래서, 이야기인데... 지금 신라, 백제, 우리 태봉
삼국이 모두 소강상태에 있어요. 우리가 군대를 정비해서 신라로 가
는 길을 열어야 할 것이외다. 아니 그렇소이까?
종간 예, 폐하. 하오나, 그렇게되면 백제국과의 대 전투가 불가피하옵니
다. 지금은 아직 농사철이옵니다.
궁예 그렇기는 하겠지요. 그건 백제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생각하기로는
지금 저 상주 말이오. 그 쪽으로 해서 신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른
데... 우리가 지금 백제국과 어느 쯤에 대치해 있소이까?
종간 상주에는 지금 이흔암 장군이 나가 있고, 낙동강 일부까지 우리 세
력권에 들어 와 있사옵니다. 하오나, 백제국 견훤왕의 아비가 되는
아자개라는 인물이 여전히 상주에 본 성인 사불성을 장악하고 있사
옵니다.
궁예 그렇다면 빼앗아야지.
종간 빼앗기보다는 친화정책을 쓰고 있사옵니다. 견훤왕 부자 사이가 좋
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궁예 허허허, 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요. 그러나, 어떻게든 그곳을 확실하
게 우리 땅으로 해두어야지 머뭇거리다가는 다 놓치고 맙니다. 병부
와 순군부에 일러서 방책을 강구해보라고 하시오.
종간 예, 폐하.
궁예 그리고, 말이오. 우리가 북벌을 효과적으로 하자면 내 생각으로는
이 수도를 다시 옮기는 것이 낫겠어.
종간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궁예 옛 고구려의 정신을 잇는 것이 우리 국가의 초기 정책이었소. 지금
은 나아가 대 동방국의 기치를 세우고 있소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수도도 그럴 듯 해야지요. 평양으로 가는 게 어떻겠소이까?
종간 평양 말씀이시옵니까?
궁예 연구를 해보십시다. 이 철원은 너무 작아. 좀 더 큰 곳으로 가십시
다. 옛날 고구려는 그곳에서 중원 일대를 호령했어요. 어떻소이까,
내원?
종간 너무 갑작스럽게 말씀하시니 당황스럽사옵니다. 연구를 해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궁예 그래, 서둘러주시오. 이제부터 일로 매진이오. 오직 한 길로 힘을 내
서 달려가는 것이올시다. 허허허.....
종간 하옵고, 그 형미라는 중 말씀이옵니다.
궁예 왜요?
종간 아무래도 죽이시는 것보다는 훈계하여 방면하심이...
궁예 아니 될 소리입니다. 그야말로 요승이오. 죄인의 초상을 치루다니...
그걸 어찌 용서하란 말이오? 이른대로 다가오는 초파일에 저자거리
에 내다 죽이시오.
종간 .......(한숨만)......
씬 황궁 내군의 관아 일각
염상과 장일이 마주 앉아 있다. 장일이 경계의 눈빛으로 염상을 본
다. 장일이 뭔가 올려온 두루마리를 검토하며 확인하고 접는다.
장일 어떻게 염장군께서 수하들을 보내시지 않고 직접 오셨습니다.
염상 허허허, 하도 오래 장부장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말일세. 겸사겸사
해서, 한 번 들려 보았네 그려.
장일 군대의 훈련을 왜 이렇게 예정보다 일찍 하려 하시옵니까?
염상 이미 병부에서도 일리가 있다고 폐하께 주청을 드린다 하였네. 농번
기이기도 하고 곧 장마가 아닌가?
장일 (노려보다가) 병부에서 폐하께 올리겠다고 하니, 그렇게 알겠습니다.
은부장군께도 말씀을 드리지요.
염상 (주변 눈치를 보다가) 이보게, 장부장.
장일 .........?
염상 나도 과거에 오랫동안 내군에 몸 담고 있었네. 그러다가, 내 스스로
은부장군께 말씀을 드리고 이곳을 떠났네. 왜 그랬는지는 자네도 알
것이야.
장일 (듣다가 냉정히) 소장은 모르옵니다.
염상 이보게, 내가 가만히 보니 황후마마를 처형할 때에 자네 얼굴 빛이
많이 흔들리더구먼.
장일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염상 자네는 옛날의 나처럼 많은 죄인들을 몸소 죽이거나, 잡아들이는 일
을 해왔네. 그리고, 지금은 이 나라 군부 전체를 감찰하는 자리에
있어. (얼굴빛 정색하며) 세상이 이미 변하였네.
장일 .........?
염상 내가 자네를 아껴서 하는 말일세. 변하는 세상을 보아야 하네.
장일 (두려워 주변 보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안 들은 것으
로 하겠습니다. 돌아가시지요.
염상 자네는 나주에서 죽을 수도 있었어. 그때 나주에 있던 장수들은 자
네를 죽이자고 하였다더군. 그것을 왕장군이 구해주었다네. 알고 있
나, 자네?
장일 돌아가시라 하였습니다.
염상 나는 자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싶네. 그것뿐일세.
내 말 명심하게나. 자네가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눈앞에
있네.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일세.
그때, 저만큼 금대가 들어오고 있다. 들어오며 아는 체를 한다.
금대 허허, 염장군께서 어쩐 일이시옵니까?
염상 그저 오랜만에 지나가다가 들렸다네. 우리 마군의 훈련과정을 보고
도 할 겸해서....
금대 그거야 수하 부장들이 있지 않습니까? 헌데, 요즘 어떻사옵니까? 옛
날에 내군에 계실 때보다는 형편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 것 같
사옵니다.
염상 허허허.... 이 나라에서 이 내군만큼 좋은 요직이 어디 있겠는가? 다
음에 술이나 들 한 잔 하세. 그럼.... 자, 장부장 가네.
장일 ...........?
금대 (가는 염상을 보며, 장일에게) 염장군이 여기는 웬일일까? 내군을
나간 이후 통 걸음을 아니한 사람인데....
장일 군의 이동 훈련에 관한 일을 보고하러 왔다지 않는가? (계속 일을
보며) 별 일은 없는가?
금대 하긴 나도 그 일로 병부에 다녀오는 길일세. 병부에서 군의 하계 훈
련을 좀 앞당겨야 할 것 같다고 해서 말이야. 농사철이라나, 뭐라
나...
장일 훈련이란 수시로 변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긴, 농사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금대 그래도, 군의 이동에 관한 것은 철저히 살피라는 영이 계셨네. 세상
이 너무 어수선해서 말이야.
장일 ..........?
씬 황궁 병부 어느 곳
관복 차림으로 원극유와 복지겸이 마주 해 있다.
원극유 여름의 군사 훈련은 장장 한 달 간이나 계속됩니다. 그것을 앞당겨
달라고 폐하께 이미 청해 올렸소이다. 물론, 순군부에도 그것이 어
떻겠는가 하는 의례상의 절차를 띄웠지요.
복지겸 의심을 아니하던가요?
원극유 내군에서 금대부장이 나와 그 사유를 철저히 알아보고 갔소이다. 그
래서, 그저 여러 장수들과 이 병부령의 의견이 그렇다 했지요.
복지겸 잘 하셨습니다.
원극유 염상장군도 내군으로 직접 갔소이다. 자신들의 기병군단이 황도와
제일 가까운 곳에 있으니 직접 허락을 받아야겠다는 핑계로 간 것
지요. 허나, 실은 거기 장일부장을 만나러 간 것이지요.
복지겸 알만 하옵니다.
원극유 훈련 날짜를 당기고 늦추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올시다. 크게 무리
없이 허락이 날 것이외다.
복지겸 그리고, 나주에 가 있는 태평군사를 좀 올려와야 할 것인데....
원극유 아, 그 정도 인사에 관한 일은 병부의 소관이외다. 벌써 군령을 내
렸소이다.
복지겸 잘 하셨사옵니다. 병부령의 힘이 참으로 크십니다.
원극유 무슨 말씀을... 나 같은 늙은이야 그저 뒷바라지나 하는 것이지요.
씬 병부 또 다른 어느 곳
염상과 배현경, 능산, 홍유 들이 모여 있다.
염상 내군의 장일이 분명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일들
을 얘기하면서 그 의중을 떠보았는데...
배현경 그래, 어떤 반응을 보입디까?
염상 그 표정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것 같습니다. 이번 군의 이
동 상황을 어찌 처리하는가 보면 그 진심을 알 수 있겠지요.
홍유 과연, 그렇겠소이다. 장부장이 어찌 은부장군에게 보고를 하는가에
따라서 형편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 말이외다.
능산 환선길 장군은 어찌하고 있습니까?
홍유 지금까지는 별다른 징후가 없소이다. 일단은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
다. 믿을만한 수하들을 시켜 그 동정을 다 점검하고 있소이다. 복병
이 있어서는 이 거사를 성공시킬 수가 없으니까 말이외다.
염상 물론입니다. 우리 편이 아닐 때는 철저히 관찰을 해야 합니다.
배현경 일을 오래 끌수록 불리한 법인데.... 그래, 왕장군께서는 뭐라고 하십
니까?
능산 아직까지는 대답을 아니 주고 계십니다.
배현경 허허, 이거야 원... 어떻게든 설득을 하셔야 합니다. 길은 그것뿐이에
요.
능산 알고 있습니다.
씬 왕건의 집 사랑
왕건과 왕식렴, 왕신이 함께 해 있다.
왕식렴 통 두문불출이시옵니다, 형님.
왕건 딱히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곧 폐하께서 무슨 영이 계시겠지. 철
원에 있으라든지 나주로 다시 가라든지 말일세.
왕식렴 형님, 소제는 능산장군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사옵니다.
왕건 ........?
왕신 소제도 아옵니다. 그 일을 허락하시오소서.
왕식렴 형님,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사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오
지 않사옵니다.
왕건 아우들이 나설 일이 아니야.
왕식렴 군부가 하계 군사 훈련을 앞당긴다 하옵니다. 이미 뭔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왕건 아우들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하였어. 역모는 아니되네. 신하가 되
어 그 주인을 배반하면 다시 또 다른 신하가 배반의 칼을 드는 것
이야. 내가 아니된다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야. 자신이 저지른 일을
결코 감출 수 없기 때문이지. 떳떳한 옥좌가 아니라는 것이야.
왕식렴 지금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옵니다, 형님.
왕건 더 이상 말하지 말게. 나는 듣고 싶지 않아.
두형제 형님...?
왕건 ............
씬 황궁 내원 외경
씬 동 내원 안
종간이 고민에 쌓여 있다. 혼자 한숨 쉬며 도리질한다. 그런 종간을
은부가 안타깝게 보고 있다.
은부 왜 그러시옵니까, 내원어른?
종간 (큰 한숨) 이미 기력을 다한 소가 끝도 없이 넓은 밭을 갈겠다고 쟁
기를 달고 나섰네. (사이) 이미 기력을 다한 소가 말일세.
은부 폐하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종간 (끄떡이며) 상주를 치고 길을 열어, 신라로 가시자 하시네. 그리고,
황도를 다시 옮겨 평양으로 가시자 하시네. 사실 그대로만 된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들인가?
은부 해서 아니될 것이 무엇이옵니까?
종간 백성들이라는 말이 가려고 하지를 않아. 다 들 너무 지쳤어.
은부 ..........?
종간 형미라는 중을 끝내 죽이자 하시네. 그 또한 스스로 섶에 불을 지르
는 일일세.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그 상여를 뒤쫓았다고 하던가? 소
름끼치는 일일세. 이보게.
은부 예, 내원어른.
종간 형미라는 중이야 이미 세상에 드러나서 어쩔 수 없다지만, 그와 함
께 잡아들인 승려들은 모두 방면하게.
은부 알겠사옵니다.
종간 그리고, 누누이 당부를 하네만은 군부의 동향은 아주 민감한 것일
세. 철저하게 감찰하게.
은부 아직까지 이렇다할 일은 없사옵니다.
종간 그래야지. (끄떡이며) 그리고, 또.... 저 왕건이를 어떻게든 처리를 해
야 하는데 말일세. 이렇게 좋지 않은 세월이 계속 된다면 결국은 모
든 걸 뻔히 알면서도 왕건이에게 우리 목을 송두리째 내어 주는 결
과가 오게 될 것이야. 죽여야해. 그것도 가급적 빨리!
은부 이미 우리 통제하에 들어있는 왕건이옵니다. 무얼 그토록 두려워하
시옵니까?
종간 두려운 것은 인심이야. 인심이 천심이라고 하였어. 그것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단 말일세. 그리고, 왕건에게 가 있어. 어찌 아니 두
렵단 말인가? 제거를 해야 해.
은부 차라리, 자객을 보내면 어떻겠사옵니까?
종간 어리석은 소리.. 그리 쉽게 될 일인가? (도리질) 보다 확실한 방법이
필요해. 뭐가 없을까? 아, 아...왕건이만 없다면 무얼 이렇게까지 걱
정하겠는가? 정말, 방법이 없을까?
은부 (생각하다가) 왕건이는 위기 때마다 재주를 부려 그물을 빠져나갔사
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많이 변하셨사옵니다. 왕건이 반역과 연
결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만 만들어 낸다면 이번만은 어렵지 않겠
사옵니까?
종간 (눈을 크게 뜬다) 그건 그래.... 헌데, 뭘..? 뭘, 어떻게...?
은부 이럴 때 도선비기라도 눈앞에 있다면, 폐하께 보여드리고 왕건의 죄
를 묻게 할 수도 있겠사옵니다만은....
종간 도선비기..?
은부 거기에 왕건이가 역모할 것이 라고 써있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종간 가만, 가만... 도선비기...? (생각하다가) 그렇구먼. 내가 왜 그 생각을
진작 못했을까? 자네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해주었네. 도선비기가 아
니라면 어떤가? 방법이 있을 것도 같네 그려. 그래, 방법이 있을 것
도 같아.
은부 예..?
종간 순군부의 임춘길이 집에 꽤나 공부를 많이 한 중이 있다고 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은부 그렇사옵니다.
종간 그 자를 좀 알아보아야겠네 그려. 내가 할 일이 있어. 선을 좀 넣어
주게.
은부 알겠사옵니다.
종간 요즘 따라 마음이 안정이 되지를 않네. 다시 한 번 말해두네. 군부
말이야. 그건 자네 책임이야. 철저하게 파악을 하게.
은부 예, 내원어른. 계속 수하들을 다그치고 있사옵니다.
씬 내군 관아 어느 곳
금대와 장일이 많은 책자들을 검토하고 있다. 그 뒤편으로 다른 내
군 관리들도 많이 보인다.
금대 황도는 물론이고 전국 곳곳에서 올라오는 군부의 동향일세. 사실 페
하께서는 우리 내군이 계시기 때문에, 막강하게 위엄을 나타내시는
것이야.
장일 그건 그러하이.
금대 헌데, 내원께서는 요즘 좀 심할 정도로 채근을 하신단 말일세. 군부
는 아무 일이 없는데도 확인하라, 또 확인하라... 아, 참, 병부에서
올려온 그 훈련사안은 어떻게 할까?
장일 벌써 폐하께 올라간 사안일세. 그리고, 지금은 내원어른이나 은부장
군께서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때일세. 이럴 때일수록 편안하게
해드려야 하네. 별 것 아니니, 그냥 넘기세.
금대 하긴 그렇지. 폐하께서도 다 아실테니까. 아, 참 요즘 같아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갑자기 너무 바빠졌어.
장일 나도 그렇다네. 그리고 말일세. 이제 이 황궁이 지긋지긋하이. 어딜
가나 피 냄새만 나는 것 같아.
금대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그래도 우리는 폐하께서 자랑스러워하시는
내군이야. 나약한 소리는 하지 말게.
장일 물론, 알고 있네. 하지만, 그저 그렇다는 것이야.
금대 내군은 폐하의 군대 중에서 가장 신임 받고 손꼽히는 친위군단일세.
오로지 충성뿐일세. 그걸 잊어서는 아니되네. 우리는 오로지 폐하를
위하여 죽는 운명들이야.
장일은 그러나 대답이 없다. 뭔가 깊은 생각에 골똘해 있는 것이다.
씬 동 대전 안
여전히 최응은 표정 없이 보고 있다. 궁예가 고개를 끄떡이며 많은
서류들을 넘기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 힘이 솟는 표정이다.
궁예 병부에서 농사철과 장마를 피해 훈련을 조금 앞당기겠다는 구나.
암, 암.... 농사도 중요한 것이지. 그래야, 군량미를 많이 확보하지.
훈련은 물론 계속 해야하고 말고. 그래야 강한 군대가 되는 것이야.
아니 그러냐?
최응 예, 폐하.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궁예 보아라, 최응아. 새로운 제국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제국
말이다. 나는 말하였다. 이 삼한은 너무 적다고 말이다. 작은 땅덩어
리 하나를 가지고 백제와 신라와 우리가 다투고 있어.
최응 ..........
궁예 (큰 모션을 취해 보이며) 대 제국이다. 나는 이 삼한을 빨리 통일하
고, 저 중원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다. 나에게 짐이 되었던 모든 것
들을 나는 내 스스로 잘랐다. 역시 위대한 영웅은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내게는 제국의 역사를 다시 써야할 소명이 있
다. 대 제국의 역사 말이다. 아니 그러냐,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상주를 넘으면서 백제를 치고 그 길로 신라로 달려가 천년수도 계
림(경주)을 우리 수중에 넣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태봉국의 정예군
들이 저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나는 이미 내원에게 옛 고
구려의 도읍지인 평양으로 황도를 옮기자고 하였다. 그래야만이 대
북방 정책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머지 않았다. 대 제
국의 깃발이 중원 천지를 흔들 날이 머지 않았다. 왕건을 총사로 하
고, 전 백성을 군대화 할 것이다. 그리고, 진군해 갈 것이다. 대 태
봉국의 천년제국을 중원에 세울 것이다. 아무리 말을 타고 달려도
결코 해가 지지 않는, 천년 제국을 말이다.
그렇게 웃는 궁예의 그 광기어린 표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