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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대본

[태조 왕건] 118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7.12.05|조회수3,257 목록 댓글 0

태조 왕건 <제 118회>

 

줄거리
 

4기장은 철저하고도 은밀하게 혁명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끝마치고, 왕건의 결심을 기다리고 있다. 왕건은 신하로써의 예를 다하며 참여의 뜻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민심과 대세는 왕건을 혁명의 중심에 서도록 만들고 있었다. 한편, 종간은 고경참문을 거짓으로 만들어 왕건에게 반역의 죄를 씌우려 하고. 그러나, 궁예는 새로운 제국을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로 하고, 왕건에게 시중의 벼슬을 다시 내리는데....



 

 

씬  어느 들판(낮)

 

        흙먼지를 일으키며 수많은 병력들이 움직이고 있다. 소라소리가 요

란하고, 수많은 대북이 늘어서 있고, 병사들이 그 북을 치고 있다.

수천의 병력들이다. 총본영이 있는 군막 앞에서 복지겸과 홍유, 능

산, 배현경 들이 보고 있다. 환선길과 원극유도 나와 있다. 수천의

병사들이 사열을 하며 지나치고 있다. 때로는 공격용 장비들이 지나

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공병부대, 운제부대, 충차부대, 방패부대,

창술부대, 궁수부대, 그리고 보병들이 지나친다. 그들 사이사이로 수

백, 수천의 기병들이 갑옷을 정좌하여 질서정연하게 달려가고 있다.

수많은 깃발들이 끝도 없이 펄럭이며 벌판을 오가고 있다. 부장들의

고함소리와 목 쉰 소리들이 계속 아우성처럼 들려오고 있다.

 

부장1   운제부대, 공격 좌-----향------- !

부장2   공병부대, 정면 충차 앞으로...............!

부장3   창술부대, 정면 공격 앞으로...............!

부장4   방패부대, 공격하라.....! 궁수부대, 앞으로.......앞으로...!

 

        벌판을 끓게 하고 있는 그 훈련정경들을 기장들은 계속 보고 있다.

 

홍유    지금 벌리고 있는 전투대형은 공격 연습이올시다. 역시 믿을만한 군

대이올시다. 이 공격에 제일 선두는 늘 기병부대의 몫이지요.

능산    그렇습니다. 역시 전투는 기병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있지요.

복지겸  그러나, 아주 큰 전투는 모든 부대가 어떻게 조화를 잘 이루는가에

달려있소이다.

배현경  그렇고 말고요. 운제, 공병, 창술, 방패, 전장에서는 다 소중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훈련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환선길이 보고 있다

가 원극유에게 묻는다.

 

환선길  훈련이란 공격과 방어를 병행해야 하는 것이올시다. 헌데, 이번 훈

련은 계속 해서 공격에만 촛점이 맞춰져 있는데 어찌 된 것이오이

까?

원극유  허허허, 그거야 기장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지 이 늙은이가 무엇을

알겠소이까?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폐하께서는 주로 방어보다는 공

격을 좋아하시는 분이시니, 그것에 내용을 맞춘 것 같소이다.

환선길  (끄떡인다)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그려. 헌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는 훈련은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원극유  그렇다고 봐야지요. 동원할 수 있는 부대들은 다 동원했소이다. 앞

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고요. 허허, 참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훈련장에서 들려오는 부장들의 쉰 목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소라와

북소리와 하늘을 덮는 자욱한 흙먼지들, 전령이 달리고 기마부대가

달리고, 벌판은 끊임없이 들끓고 있다.

 

씬 임춘길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임춘길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그 앞에 부장1,2와 도우가 함께 해

있다.

 

임춘길  아니, 그래도 내가 명색이 순군부의 낭장인데, 병부에서는 왜 훈련

에 동참하라는 말이 없을꼬?

부장1   이번 훈련은 주로 기장들이 주도한다 하옵니다.

부장2   그러하옵니다, 장군. 아마도 병부에서 기병들을 선두로 하는 공격훈

련에 목적을 맞춘 것 같사옵니다.

임춘길  아, 물론 나도 그것은 연통을 받아서 알아. 헌데, 지금까지는 이런

훈련이 아니었다 하는 말씀이야. 왜 갑자기 이렇게 내용을 바꾸었을

꼬? 순군부의 역할이 거의 없지 않는가 말이야. 훈련날도 갑자기 변

경해서 앞으로 당겨놓고, 이거 참.... 

부장1   오히려 번거로운 훈련에서 빠졌으니 다행이 아니옵니까? 사실 그

훈련이 얼마나 힘든 것이옵니까?

부장2   그러하옵니다. 훈련 때마다 늘 군량미가 턱없이 모자라서 군사들의

불만이 많았사옵니다.

임춘길  그래도 그렇지. 뭔가 이상해. (사이) 하긴 뭐 폐하께서도 재가를 하

시고 내군에서도 다 확인을 했을테지만..... 그래도, 그래.

 

        임춘길은 그렇게 고개를 외로 꼰다. 그때, 집사장의 소리가 들려온

다.

 

소리    (E) 장군, 황궁에서 사람이 왔사옵니다.

임춘길  황궁에서? 아니, 누가..? 뫼셔라.

 

        그러자, 변복한 내관하나가 들어와 예를 올린다.

 

임춘길  황궁... 어느 분이 보내서.. 오셨소이까?

내관    내원어른을 뫼시는 내관이옵니다. 서찰을 전해 올리라 하여 왔사옵

니다.

임춘길  서찰을..? 아니, 얼마든지 말씀을 하시면 될 일인데, 웬 서찰을...?

 

        임춘길이 그 서찰을 받는데, 부장1,2가 일어나며 예를 올린다.

 

부장1   저희들은 그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임춘길  그렇게들 하게. (부장들이 물러가자, 서찰을 본다. 그리고, 놀란다)

아니, 이런....

도우    장군, 무슨 일이길래 그리 놀라시옵니까?

임춘길  (놀란 눈으로 도우 보다가, 다시 내관을 보며) 알겠소이다. 그대는

돌아가서 이 임춘길이가 목숨을 걸고 반드시 잘 해내겠다고 말씀을

해주시구료.

내관    예, 장군. 허면, 그리 말씀을 해 올리겠사옵니다.

 

        그렇게 내관이 나간다. 도우가 의아한 눈으로 보면, 임춘길이 그 앞

으로 서찰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말한다.

 

임춘길  내원께서 보낸 밀지이올시다. 왕건을 잡자는 것입니다. 역적 왕건을

말입니다.

도우    어허, 그런 이야기였사옵니까?

임춘길  대사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도우    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헌데, 대체 무슨 도움을...?

임춘길  왕건이는 어려서부터 그 유명한 도선대사의 예언을 받았습니다. 훗

날 삼한을 다스리는 성인이 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도우    어허..... 사실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사옵니까?

임춘길  그 때문에 아주 오래전부터 내원 그 사람은 끊임없이 왕건이를 경

계하고 수많은 함정을 파면서 빠져들기를 기다렸지요. 허지만, 그때

마다 폐하께서 막았기 때문에 실패를 했어요. 이제 황후와 태자들이

죽어나가고,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으니, 더욱 더 왕건이가 두

려워진 겝니다. 어떻게든 없애지 않으면은 안되게 된 것이지요.

도우    알만 하옵니다. 장군의 뜻도 그렇지 않사옵니까?

임춘길  그래요. 당장 도선비기가 눈앞에 있다면, 그것을 증거로 하여 왕건

이는 역모죄로서 살아 남기 어렵습니다. 허나, 그렇지가 못해요. 우

리가 이번에는 그 증거를 만들어 달라 하고 있소이다. 증거 말입니

다. 아주 그럴 듯한 증거 말이예요.

도우    그렇다면 가짜 도선비기를 만들라는 것이옵니까?

임춘길  아니올시다. 그게 아니올시다. 내원께서는 도선비기보다도 더 영향

력이 큰 고경참문(古鏡讖文)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도우    고경참문...?

임춘길  그렇습니다. 고경참문이올소이다. 이거야말로 대사께서 하실 일이지

요. 그 어려운 문구들을 누가 쓸 수 있겠습니까?

도우    (끄떡인다)........ 

해설    고경참문(古鏡讖文), 왕건(王建)의  등극과  삼국  재통일을  예언하

였다는 옛 거울 속에 있는 글이다. 모두 11수(首), 145자로 된 시구

참(詩句讖)으로, 내용은 은어(隱語)로 표현되어 있다. 고경이란 옛

거울이라는 뜻이다. 이때만해도 중국에서는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치

는 동안 정통역사에 쓰이지 않은 많은 설화들이 정사와는 다른 구

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주로 신선에 관한 이야기거

나, 도인, 도술, 혹은 요괴, 예언 따위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것을 얼마 후 송나라 태종 때 고경기(古鏡記)라는 것으로 엮어 내

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때 옛 거울의 의미가 상당히 예언이나 미신

쪽에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지금 그 예언적 증거를

종간은 주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우    해볼만하옵니다. 장군, 참으로 내원께서는 기가 막힌 생각을 내셨사

옵니다. 고경참문...? 글도 그럴 듯하고 좋아야하겠거니와, 이것이 폐

하께 전달되기까지의 과정도 또한 믿음직하지 않으면 아니되옵니다.

소승에게 맡겨주시오소서. 이야말로 소승이 해야 할 일이올습니다.

하하하...

임춘길  대사만 믿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폐하를 대신하고 있는 내원

저 사람과 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이올시다. 그만큼 장래를 보장받는

것이지요. 역시 대사는 참으로 이 임춘길이의 은인이올시다.

도우    허허허, 그리 생각해주니 참으로 고맙사옵니다. 왕건이는 이제 죽은 

목숨이올습니다. 허허허..

 

씬 황궁 내원 외경

 

씬 동 내원 안

 

        종간이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런 종간을 은부가 보고 있다.

 

은부    뭘 그리 깊이 생각하시옵니까?

종간    (한숨 섞여) 임춘길 장군의 그 도우라는 중이 잘 해낼까 모르겠네.

은부    고경참문말이옵니까?

종간    (끄떡인다)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야. 확실하게 몰아 넣어야 해. 이렇

게라도 죽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우리가 죽을 것이야. 그만큼 난국이

야. 돌이키기 어려운 난국이야.

은부    요즘 따라 내원어른을 뵈면 마치 살얼음 판 위에 서 계시는 것 같

사옵니다. 마음을 좀 넉넉히 하시오소서.

종간    위기가 와 있네 그려. 조금이라도 잘 못 디디면 그대로 천길 낭떠러

지야. 어찌 넉넉해 질 수가 있겠는가? (사이) 병부에서는 하계 군사

훈련을 앞당겨 하고 있다지?

은부    예. 폐하께서도 재가를 하시고 저희 내군에서도 확인을 했사옵니다.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사옵니다.

종간    자주 자주 점검을 하게.

은부    금대와 장일부장이 잘 하고 있사옵니다. 염려 놓으시오소서. 

종간    (끄떡이다가, 놀란다) 가만, 오늘이 무슨 날인가? 오늘이 초파일이

아닌가?

은부    그렇사옵니다. 헌데, 왜 그리 놀라시옵니까?

종간    형미, 형미라는 중 말이야.

 

        놀라는 그런 종간의 표정에서 옥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씬 옥사

 

        옥문이 열리고 형미가 웃으며 끌려 나온다. 그 앞에 금대와 장일이

보고 있고, 입전, 신방도 함께 있다.

 

형미    하하하, 참으로 복된 날이로다. 부처님께서 오신 날에 이 제자가 무

거운 육신의 옷을 벗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날이랴!

장일    .........

형미    참으로 이 나라 황제께서는 그 덕이 크신 분인 것 같소이다. 부처님

제자를 부처님 오신 날에 천상을 보내주시니 말이오. 하하하...

금대    어서, 끌고 가라. 저자 거리로 가는 것이다. 백성들이 많은 곳에서

처형하라.

 

        그렇게 형미가 끌려간다. 입전과 신방이 어쩔 줄을 모르며 초조해

한다. 장일은 말이 없다.

 

입전    벌써 거리에 백성들이 끝도 없이 모여 있소이다. 저런 고승을 죽이

다니요? 너무도 안타깝소이다.

신방    그러게 말입니다.

금대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게요? 폐하께서 내리신 영이오. 고승은 무슨 고

승..? 폐하께서 죄인이라고 하시면 죄인인 것이오. 어서 가서 형을

집행하시오.

두사람  아, 예, 예, 알았소이다.

 

씬 철원 저가 거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다. 형미가 발에 묶인 쇠사슬을 끌며 걸

어오고 있다. 사람들이 합장하며 형미를 맞고 있다. 그들이 합창하

고 있는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은 마치 형미가 부처라도 되는 것

처럼 보이게 한다. 그렇다. 한 성자가 지금 순교하고 있는 것이다.

군사들이 길을 열고 있다.

 

군사들  물럿거라. 물럿거라.

입전    (어쩔 줄 몰라) 이보게, 신방. 자네가 영을 내리게.

신방    무슨 소린가? 의형대의 수장은 자네일세. 자네가 해야지.

금대    무얼 하오? 빨리 형을 집행하오. 군사들은 뭘 하느냐? 백성들을 더

물려라. 더 물려, 더 물리란 말이다.

 

        아우성이다. 백성들은 그렇게 형미에게 수없이 염불하며 절들을 하

고 있다. 드디어 형장에 형미가 들어서고 도부수가 그 앞에 섰다.

군사들이 경계하는 와중으로 그 때 세 고승이 들어선다. 바로 사무

외대사들인 이엄, 여염, 경유 들이다. 백성들이 더욱 고개를 숙이며

크게 염불을 왼다. 금대가 눈살을 찌푸린다.

 

금대    저들은 무엇이냐?

신방    바로 사무외대사들이올시다.

금대    사무외대사..?

입전    아마도 마지막 염불을 해주러 온 것 같소이다.

금대    자, 형리들은 무얼 하느냐? 빨리 시행할 준비를 하라. 이보시오, 의

형대령 뭘 하오? 어서 형을 집행하오.

입전    아, 알았소이다. 죄인은 듣거라.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형미    입이 있으니 어찌 할 말이 없으리요. 나는 분명히 말하리다. 오늘의

죽음은 부처님 세계를 보다 빨리 열기 위해 자청한 것이오. 이미 새

시대가 와 있소이다. 나는 그걸 알리려 이렇게 죽는 것이오. 자, 사

형과 사제들이 와서 내 극락길을 열고 있으니, 무엇이 두려울까? 형

리는 어서 내 목을 치시오. 사형, 사제들도 모두 극락에서 보십시다. 

세승려  잘 가시오. 부처님이 기뻐하시리다. 나무관세음보살....

 

        세 승려가 합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눈을 감고 염주를 굴리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왼다. 백성들이 모두 따라 합창한다. 형

미가 눈을 감았다. 드디어, 입전이 소리친다.

 

입전    시행하라!

 

        그러자, 도부수가 칼을 빼들고 그대로 목을 내려친다. 형미가 선혈

을 뿜으며 옆으로 넘어진다. 백성들은 더욱 염불을 크게 외워댄다.

장일의 표정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다, 누군가를 본다. 태평이다. 막

철원으로 들어선 그런 차림이다. 태평이 충격적인 표정으로 한참을

보다가 사람들 속으로 다시 모습을 감춘다.

 

씬 그 곳

 

        태평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쳐 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비

켜가는 사람들이 있다. 도우다. 도우는 고경참문을 바쳤다는 바로

그 중국상인 왕창근이라는 자와 지나쳐가고 있는 것이다. 태평이 힐

끗 보다가 그렇게 멀어져 간다.

 

도우    이 시대에 최고의 고승하나가 죽었소이다. 그것도 자청을 해서 말이

오. 나도 아직 불문에 살고 있지만, 저런 고승의 죽음은 가슴 아픈

일이지요. 이보시오, 왕상인.

왕창근  예.

도우    이제부터는 그대의 역할이 참으로 크오. 우리는 다 같은 백제국의

사람들이오. 실수가 없기를 바라오.

왕창근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평생을 첩자로 보낸 사람이올습니다. 얼굴을

바꾸는 일은 제 생업이올습니다. 허허허....

 

        그들 그렇게 지나쳐 간다.

 

씬 왕건의 집 외경(밤)

 

씬 동 집 사랑

 

        태평이 막 절을 끝내고 있다. 두 부인과 왕식렴 형제 그리고, 왕건

이 함께 해 있다.

 

태평    그간 별일 없으셨사옵니까, 주군?

왕건    나는 나주로 가려 하는데, 능산아우가 오히려 자네를 불려 올렸네

그려. 그래, 다 편안한가?

태평    예, 주군. 마님과 공자께서도 잘 계시옵고, 유금필, 박술희 장군들도

모두 그 소임을 잘하고 있사옵니다.

유씨    시장하실 터인데 음식을 좀 내오겠사옵니다.

수인    술도 좀 마련해 올리오리까, 서방님?

왕건    그렇게 해주시오.

 

        두 여인이 나가자, 왕식렴 형제와 태평이 자리에 앉는다.

 

태평    오다가보니, 백성들이 끝도 없이 몰려 있었사옵니다. 웬일인가 보았

더니, (한숨 쉬며) 뜻밖에도 형미대사께서 참형을 받고 계셨사옵니

다.

왕건    (아픈 듯 눈을 감는다) 나도 알고 있었네. 형미대사께서 왜 그렇게

자청하여 가셨는지, 나는 지금도 그 깊은 뜻을 알면서도 안타깝기만

하네.

태평    이미 말세의 징조가 보이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왕건    말세라..? (한숨 쉬며) 말세라......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그려.

허나, 이런 말세에서 내가 어찌 해야 하는지 가닥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이 꼴이 우습기만 하네.

태평    왜 가닥이 없겠사옵니까? 다 아시고 계시오나, 주군께서는 대도를

걸으시는 분이시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시는 것 뿐이옵니다. 이제부

터는 그 길을 열어야 하옵니다, 주군. 

왕식렴  참으로 적절한 때에 잘 오시어서, 좋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

사옵니다. 형님이 하실 일은 이미 정해져 있사옵니다.

 

        그러나, 왕건은 대답 없이 한숨만 쉰다. 

 

씬 들판

 

        어둠 속에서도 훈련이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군사들의 함성이 이

어지고 여전히 북소리가 기병들이 말달리는 소리들이 천지를 진동

한다. 그 한쪽 지휘소에서 여전히 기장들이 보고 있다. 원극유는 보

이지 않고, 환선길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해 있다. 뭔가 이상한 듯

기장들과 군사들을 보고 있다. 그러나, 기장들은 태연하고....

 

씬 황궁 외경

 

씬 동 내원

 

        종간이 은부, 금대, 장일들의 보고를 듣고 있다.

 

종간    거리에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은부    그렇다하옵니다.

종간    그리고, 해동의 성자들이라는 그 사무외대사가 모두 모였다?

금대    예, 내원어른. 그들이 모두 백성들과 함께 염불을 하며 형미라는 중

의 죽음을 애도하였사옵니다.

종간    그 중은 어떻게 죽던가?

금대    웃어가며 죽었사옵니다. 자신은 이미 새 시대가 와 있다는 것을 알

리기 위해 죽는다 하였사옵니다.

종간    (아픈 한숨) 새 시대라..? 새 시대라... 그 중은 죽이는 것이 아니었

어. 그만큼 또 인심이 더 멀어졌어. 이 일은 여기서 다 끝을 내게.

더 확산시키지 말게. 사무외대사에 관한 것도, 폐하께 알려드려서는

아니되네.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은부    예, 내원어른.

종간    (두 부장에게) 군부의 훈련상황은 어떠한가?

장일    시기만 조금 앞당겼을 뿐 별 이상은 없사옵니다. 황궁 밖 야영지에

서 훈련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종간    그래, 계속 감찰하게. 그만들 나가보아.

 

        두 사람이 대답하고 나가자, 은부가 다시 묻는다.

 

은부    고경참문은 어찌 되었사옵니까?

종간    임춘길이와 그 중이 자신을 했다네. 썩 괜찮은 중인 모양이야. 거울

속에 글귀를 써넣을 정도라면 상당한 학문이 필요한 것이야. 기다려

보세. 지금쯤 이미 뭔가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야.

 

씬 임춘길의 집 사랑

 

        촛불 속에서 두 사람이 녹이 슨 동경(24센티 정도)을 보고 있다. 거

기 희미한 글귀가 빼곡하게 써 있다. 임춘길이 놀라운 눈으로 묻는

다.

 

임춘길  이것이 대체 무슨 글이오이까? 이 사람도 어지간한 글은 읽소이다

만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도우    참문이 아니오이까? 참문이란, 바꾸어 말하면 비유법으로 쓴 예언이

옵니다. 일반인들은 절대로 쉽게 이해를 못하옵니다. 허나, 많은 공

부를 한 학자들이라면 이 정도는 곧 판별을 해 낼 것이옵니다. 여러

약재로 구리쇠를 부식시켜 아주 오래된 것처럼 만든 것도 정말 일

품이올습니다. 허허, 아주 잘 만들었사옵니다.

임춘길  대체 무어라 쓴 것이옵니까?

도우    하하하, 기다려보시오소서, 장군. 당나라 상인으로 가장한 왕창근이

라는 자가 내일 아침이면 이것을 수춘부(壽春部, 국가의 각종 행사

와 의식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에 갔다가 바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곧바로 다시 대전으로 올라갈 것이고, 황제가 보게 되

겠지요. 그리고, 얼마 후면 결국은 왕건의 목이 달아나게 될 것이옵

니다. 아주 그럴 듯하게 썼으니까 말이옵니다. 하하하.....

 

        도우의 그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계속 되면서 디졸브에 이어 강한

음악과 함께 궁예의 소리가 들려온다.

 

씬 황궁 외경(낮)

 

궁예    (E) 무엇이라, 고경참문...?

 

씬 동 대전

 

        박지윤이 떨며 허리를 굽히고 있고, 궁예가 동경을 이리저리 들여다

보고 있다.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듯 보인다. 최응도 보인다.

 

궁예    (한참을 이리저리 보다가 읽는다) 삼수중사유하, 상제항자어진마요.

선조계후박압이라. 이게 대체 무슨 뜻인고? (다시 보며) 어사년중이

룡견이고, 일즉장신청목금이며.... 일즉현형흑금동이라..? 대체 이게

뭐야? 뭐라고 쓴 것이야? 의미가 잘 이해가 아니 되는 구먼.

박지윤  신도 그러하옵니다. 대체 무슨 말인지 영 글귀가 잡히지가 않아....

궁예    고경참문이란, 바로 오래전에 예언을 담아 놓은 거울이라는 뜻이오.

내가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것 같구먼. 헌데, 이걸 왜 가지고 왔소

이까?

박지윤  고경이란 폐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예언서가 아니옵니까? 당나라에서

건너 온 상인 왕창근이라는 자가 저자 거리에서 기이한 노인을 만

나 쌀 두 말을 주고 샀다 하옵니다.

궁예    그런데?

박지윤  그 노인은 얼굴이 이상하고 수염과 머리가 희며 관을 쓰고 옛날 거

사들이나 입는 도인차림이었는데, 아무래도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

았다 하옵니다. 하도 이상하여 벽에 걸어 두었는데, 거기 글귀가 보

이길래 놀라서 급히 관청에 바쳤다 하옵니다.

궁예    그래요? (호기심이 간다) 그랬지. 오랜 예언이나 신선에 관한 얘기

같은 것들은 대게 이러한 오랜 거울에 기록되어 있다 들었소. 범상

치 않구먼. 최응아, 어디 한 번 네가 읽어보겠느냐?

최응    예, 폐하.

 

        최응이 한참 읽어 내려가다가 표정이 굳어진다. 그는 잠시 그렇게

보기만 한다. 궁예가 답답해서 한참 후에 묻는다.

 

궁예    뭐라고 써 있느냐?

최응    국가의 흥망에 관한 예언같사옵니다.

궁예    그래? 그래, 무슨 예언..?

최응    신도 정확한 뜻을 알지는 못하겠사옵니다. 아무래도 학문을 많이 한

학사들과 모여 의논을 해봐야 할 것 같사옵니다.

궁예    그래? 최응이 너도 잘 모르겠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아주 어려운

글귀인 모양이다. 국가의 흥망에 관한 것이라, 점점 궁금해지는 구

나. 바야흐로 획기적인 국가부흥에 관한 안들을 마련하고 있는 때에

이런 것이 나타나다니, 하늘이 뭔가 계시를 내리는 모양이로다. 오

냐, 최응이 네가 가지고 가 알아보거라. 기왕이면 지금 가보아.

최응    예, 폐하. 금서성(禁書省- 나라의 도서와 문건들을 맡아보는 관청)에

있는 학사들과 논의해 보겠사옵니다.

궁예    허허, 그래, 그렇게 하거라. 고경참문이라..? 암, 내가 이렇게 내 모

든 것을 희생해가며 제국의 앞날을 설계하는데 어찌 하늘이 무심할

것인가? 이거 참 뜻밖의 일이 나타나 나를 설레게 하는 구먼 그래.

허허, 이거 참.... (최응이 나가고 나자) 밖에 대전내관 있느냐?

대전내관        (E) 예, 폐하. (들어온다)

궁예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어찌 나 혼자 알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가서

내원 좀 들라 하여라.

대전내관        예, 폐하.

 

씬 금서성 관아 외경

 

씬 동 관아 안

 

        학자들 몇명과 최응이 함께 해 있다. 그들은 동경을 탁자위에 놓고

모두 들여다보며 심각한 표정들을 짓는다. 송함홍, 백락, 허원과 김

행선들이다.

 

김행선  (도리질을 하며) 이보시오, 원봉성령.

최응    예, 김학사 어른.

김행선  나는 이해가 아니 가는 구료. 공과 같은 학인이 이 고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최응    예, 워낙 공부가 짧다 보니...

김행선  (도리질을 하며) 음.... 아니지. 그런 게 아닌 것 같소이다. 아니 그렇

소이까? 여기 송학사나 백학사, 허학사들도 마찬가지지만 글귀가 어

려운 것이 아니라..... 이것을 폐하께 말씀 드리기가 어려운 것이 아

니겠소이까?

최응    ........(미소) 실은 그것이 소생도 더 어려웠사옵니다.

김행선  그럴테지. 그럴테지..... 목이 몇 개나 된다고 이걸 그대로 풀어서 올

린다는 말씀이오. 나도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없소이다. 어디 백학사

가 풀어보시구료.

백락    (펄쩍 뛰며) 아니올습니다. 나도 전혀 모르겠소이다. 송학사가 말씀

하시구료.

송함홍  아니올시다. 이 사람도 학문이 짧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최응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잡아떼는 학사들을 보고

있다. 모두들 두렵고 질린 표정들이다.

 

최응    이것은 폐하의 명이십니다. 어떻게든 빨리 풀이를 해서 올리지 않는

다면 큰 경을 치실 것입니다.

김행선  허나, 목숨 보다 그게 더 중하겠소이까? 이보시오, 원봉성령. 우리도

모르겠다고 전해주시구료. 정말 모르겠다고 말이오.

최응    이 나라 최고의 학자분들께서 모르신다면 폐하께서 분명 꾸중이 내

리실 것입니다. 빨리 답을 내시오소서.

김행선들        허허, 이거 참.....이걸 어찌 하나....이걸....  

 

씬 동 황궁 내원

 

        종간과 은부가 마주해 있다. 두 사람도 몹시 초조한 표정이다.

 

은부    지금 원봉성령 최응이가 수춘부에서 올린 고경참문을 들고 금서성

의 학사들에게 갔다 하옵니다.

종간    (끄떡인다).......

은부    도대체 그 동경에 무엇이라고 써넣었을까요? 자못 궁금하옵니다.

종간    나는 이미 그 내용을 보고 받았네. 그 도우라는 중이 아주 제법 잘

썼어. 아주 그럴 듯하게 말이야.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왕건이는 아

니 걸려들 수가 없게 되어 있어. 이번에는 꼭 걸려들 게야.

은부    그 정도로 확실하옵니까?

종간    암, 지금의 폐하를 제치고 송악의 왕건이가 황제가 되어 삼한을 통

일한다는 뜻이야. 어찌 살아날 수가 있겠는가?

은부    그렇사옵니까?

종간    이 나라 최고의 학사들이 모여서 글을 풀어 낼 것이야. 그 하나로

이미 대역죄일세. 설사 폐하께서 죽이지를 않더라도 이 조정과는 끝

이 될 게야. 왕건이 말이야.

 

씬 다시 금서성 관아 안

 

        여전히 학자들과 최응의 눈빛이 교차되고 있다. 아무도 말이 없다.

 

최응    자, 어찌 하시겠습니까? 빨리 글귀를 풀어주시오소서.

김행선  이보시오, 원봉성령. 참 딱도 하오. 이미 그대도 이 글귀를 알고 있

소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택한 이유가 무엇이오? 이것을 그대로

전하면 목이 달아나기 때문일 것이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살 방도

를 일러주고  풀이를 하라고 해야할 것이 아니겠소이까? 

송함홍  참으로 옳은 말씀이오이다, 김학사.

최응    그렇다면 어차피 소생도 살고 또 여기 계시는 학사님들도 모두 사

는 방도로 글귀를 올리면 어떻겠습니까?

백락    그건.... 결국 거짓말을 하자는 것이 되지 않겠소이까?

최응    거짓말 한 번 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김행선  (그제서야 미소) 암, 어차피 폐하께서는 모르신다 하여 우리에게 내

린 글이오. 그렇게 하십시다. 다 사는 방법으로 가십시다. 자, 그럼

이 글귀의 사실을 먼저 우리끼리 알고 거짓을 올려도 올려야 할 것

이외다. 이건 즉 이렇소이다.

 

        김행선이 글귀를 짚어 가며 이야기를 한다.

 

김행선  삼수중사유하란 동서남북아래라는 뜻이고, 상제항자어진마란 상제가

아들을 진한 마한 땅에 내려보내니, 라는 것이오. 선조계후박압이라

는 것은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이고, 어사년중이룡

견이란 사년중에는 2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라는 뜻이오. 그리고, 일

즉장신청목금에 일즉현형흑금동이라 하는 것을 풀이하자면 청목은

소나무이니 송악군 사람이라는 뜻이고, 흑금은 지금의 도읍지인 철

원을 말하는 것이오. 그러니까, 지금의 폐하께서 철원에서 일어나

철원에서 망하시니, 그 상대가 바로 왕건장군이라는 것이올시다.

최응    ........... 계속 하시지요.

김행선  그리고,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왕건장군이 먼저

계림(鷄林:신라)을 얻고 후에 압록강을 거둔다는 뜻이올시다.

모두들  .............(초긴장으로 본다)

김행선  그러니 이것을 어찌 곧이 곧 대로 올리겠소이까? 왕장군에 앞서서

우리 모두의 목이 달아날 것이외다. 이 풀이를 요망스럽게 했다고

말입니다. 아니 그렇소이까, 원봉성령?

최응    잘 보셨습니다. 허면, 왕장군이 해당되는 대목을 모두 지금의 폐하

로 바꾸시면 모두가 다 좋아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김행선  그렇소이다. 그것이 다 좋은 방법이지요. 그렇게 하십시다. 우리가

곧 풀이를 글로 적어 드리리다.

 

        김행선이 곧 벼루의 먹을 찍어 종이에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모두

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미소 짓는 최응의 표정에서...

 

씬 다시 대전

 

        최응과 종간이 궁예를 보고 있다. 궁예가 끄떡이며 최응이 올려준

글을 보고 있다. 그러다가, 박장대소를 한다. 종간이 굳어진다.

 

궁예    하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길조로다. 고경참문에 이런 예언이 써 있

었다니, 참으로 길조로다.

종간    폐하, 무슨 일이길래 그리 웃으시옵니까?

궁예    글세, 고경참문이라는 것이 발견이 되었는데 그걸 최응이와 학자들

이 함께 풀이를 했소이다. 거기 이렇게 쓰여 있다는 것이예요. 철원

에서 일어난 큰 용 한 마리가 삼한을 통일하고 압록강을 건너니, 곧

대제국을 이룰 것이다 이렇게 쓰여 있다는 것이오.

 

        종간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 눈을 크게 뜨며 최응을 본다. 최응이 미

소를 짓는다. 종간은 아, 너로구나 하는 눈빛이다.

 

궁예    보시오. 이 나라 최고의 학사들이 풀이를 한 것이오. 내가 압록강을

건넌다는 것이오. 그리고, 대 제국을 이룬다는 예언이 이미 오래 전

에 이렇게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이오.

종간    폐하, 신이 이곳으로 오면서 그 내용을 잠시 들어보았사옵니다. 헌

데, 학사들의 의견이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사옵니다.    

궁예    오해라니, 뭐가 말이오?

종간    그 예언을 보면 송악군에 있는 용자 이름의 후손이 철원에서 일어

난 용을 무너트리고 옥좌에 올라 압록강을 넘는다는 뜻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궁예    그건 또 무슨 소리오? 그렇다면 왕건아우를 말하는 모양인데, 아니

그래, 이 나라 최고의 학사들이 그걸 하나를 몰라서 이렇게 풀이를

했다는 것이오? 또 그 왕건아우의 이야기... 이제 그만 좀 하시오.

종간    그렇다기 보다도... 이런 예언일수록 그 뜻을 정확히 해석해야...

궁예    한껏 기분이 좋아졌는데, 그런 말 다시는 마시구료. 허허허,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그 학사들에게 술과 상급을 후히 내리라 하라. 그리고, 그렇지. 사람

을 보내 왕건아우를 좀 들라고 하여라. 너무 오래 집안에 박혀 있는

것 같아. 이 참에 술도 한 잔 하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다

시 시중 자리를 맡겨야겠어.

종간    폐하....?

 

        종간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절망이다. 그는 눈을 감으며 긴 한숨

을 짓는다. 웃는 궁예의 목소리와 절망하는 종간의 그 표정에서....

 

씬 왕건의 집 외경(밤)

 

씬 동 집 사랑

 

        왕건과 더불어 태평, 왕식렴, 왕신, 그리고 갑옷 차림의 능산이 함께

해 있다.

 

왕식렴  훈련 중에 용케 나오셨습니다, 능산장군.

능산    예, 잠시 몸을 뺐습니다. 훈련은 아직도 계속 중입니다.

태평    훈련 규모가 아주 큰 것 같습니다.

능산    그렇습니다. 황도 주변에는 사실 군사가 그리 많지 않소이다. 때문

에 최전선의 부대는 남겨 놓고 그 사이의 예비부대 상당수를 이곳

으로 이동중에 있소이다.

왕신    지금 이동이라고 했습니까, 장군?

능산    그렇습니다. 주군, 훈련 중에 잠시 이렇게 이곳에 온 것은 다시 한

번 주군의 말씀을 듣고자 함이옵니다. 지금 저 훈련은 훈련이 아니

라 거사를 준비중인 것이옵니다. 혁명 말이옵니다.

모두들  ...........(긴장하고)

능산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사옵니다. 복지겸, 홍유, 배현경 장

군들이 제 일선에 나서 있고, 병부령 원극유와 장군 염상이 또한 참

여해 있사옵니다. 순군부와의 연결은 모두 차단되었고, 내군에서 우

리를 감시하는 것도 일단은 막는데 성공했사옵니다. 그러나, 무엇보

다도 시간이 없사옵니다. 주군, 옥좌에 오르시오소서. 이 혁명군의

총사가 되어 주시오.

왕건    나는 못한다 하였네. 적어도 신하가 되어 그 주인을 치는 일은 내가

자네들에게 해온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야. 나는 허락할 수 없네.

절대로 허락할 수가 없어.

태평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사옵니다, 주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군

이 봉기하실 날을 고대했사옵니까? 형미대사는 왜 죽었으며, 석총대

사는 왜 또한 죽음을 택했사옵니까? 수많은 백성들이 주군께서 일

어나시는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사옵니다. 허락하시오소서, 주군.

왕건    아니 되네. 나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해.

능산    시간이 없사옵니다. 더 이상 기회도 시간도 없사옵니다.

왕식렴  허락하시오소서.

왕신    허락하시오소서, 형님.

왕건    못한다고 하였어.

능산    (일어서며) 저는 다시 훈련장으로 돌아가야 하옵니다. 혁명을 주도

하는 장군들이 주군의 허락을 받아오라 다시 소인을 보낸 것이옵니

다. 가서 그렇게 말을 하겠사옵니다. 주군께서 허락하시었다고 말이

옵니다. 가보겠사옵니다.

왕건    가서 정직하게 말하게. 나는 허락한 바가 없어.

태평    주군... ?

 

        바로 그때, 요란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들 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씬 동 집 마당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거기 장일과 내군들이 서 있다.

 

장일    황궁에서 나왔소이다. 폐하의 영이시오. 왕시중을 뵙게 해주시오.

장수장  왕시중... 지금 시중이라고 하셨습니까?

장일    그렇소이다. 어서, 알려주시오.

 

        그러자, 대청마루로 왕건과 두 부인 그리고 형제들이 모두 나선다.

장일이 다가가며 군레를 올린다.

 

장일    시중어른, 내군의 장일부장이옵니다.

왕건    장부장이 어쩐 일이오? 그리고, 시중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장일    폐하께오서 소장이 오는 길에 이미 내봉성에 시중어른의 복직을 명

하셨사옵니다.

모두들  ..........

장일    어서 가시오소서. 폐하께오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왕건    잠시 의관을 정제할 것이니, 기다려주시오.

장일    예, 시중어른.

 

        잠시 생각하는 왕건의 표정에서, 능산이 인사를 한다.

 

능산    소인은 다시 훈련장에 가보겠사옵니다, 그럼....

 

        능산이 돌아서면 장일과 시선이 부딪친다. 잠시 묘한 긴장이 흐르다

가 능산은 그대로 가버린다. 왕건과 두 부인이 안으로 들어가고, 

장일은 다시 태평과 왕식렴들과 시선을 나누고 있다. 모두들 긴장,

긴장 그것이다.

 

씬 황궁 마당

 

        곳곳에 횃불들이 타오르고 있다. 순라를 돌고 있는 내군들의 모습이

지나친다.

 

씬 동 내원

 

        종간과 은부가 함께 해 있다.

 

은부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될 수가 있사옵니까? 고경참문을 거꾸로 해석

하다니요?

종간    최응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왕건이 쪽에 있었어. 우리가 몰랐던 것이

야.

은부    그 어린것이 감히, 그런.....

종간    이 나라 최고의 학사들이 폐하께 거짓말을 아뢰고 있네. 즉, 그것은

이 조정이 이미 모두다 폐하께 등을 돌렸다는 것이야.

은부    이럴게 아니라 이제 힘이 필요한 때가 온 것 같사옵니다. 우리 내군

을 동원하여 칠 것은 치고, 가릴 것은 가리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종간    (도리질) 민심이 돌아섰어. 최후의 희망을 걸었던 고경참문마저 틀

어져 버렸어. (비통하다) 하늘이 우리를 버리고 있어. (절규처럼) 하

늘이 말이야. 이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어. 군사? 힘? 그것은 잠

시 뿐인 것이야. 어느 누구도 폐하의 편에 선 사람이 없어. 민심이

돌아서면 다 끝이 난 것이야. 허허허, 이제 이 종간이의 역할도 끝

이 보이는 것 같네 그려. (눈물 글썽이며) 끝이 보여.....

은부    그렇지 않사옵니다. 내원어른마저 이리하시면 어찌하옵니까? 우리에

게는 내군의 군사들이 있사옵니다. 아직도 이 조정은 내군의 감찰

아래 놓여 있사옵니다. 힘을 내시오소서.

종간    (도리질) 아무리 내군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그것이 곧 다는 아닐

세. 우리는 이미 한계를 넘은 것이야. 아, 이 일을 어이할꼬...

 

씬 동 황궁 내군 관아 안

 

        금대와 임춘길이 마주해 있다.

 

임춘길  아니, 어떻게 최응이와 학사들이 그런 거짓말을 폐하께 올릴 수가

있단 말이오?

금대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원어른의 실망이 아주 크신 것

같습니다.

임춘길  아이고, 아이고..... 어떻게 그런 일이.... 내원어른께서 얼마나 기대를

거신 일이었는데...

금대    헌데, 이 밤 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임춘길  아무래도 지금 저 훈련이 이상해서 말이오. 일찍이 우리 순군부의

지휘부가 저런 대규모의 훈련에서 제외된 적이 없었소이다. 헌데,

어떻게 된 것이 이번에는 병부에서 다 관할을 하고 있어요.

금대    이미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이 아닙니까?

임춘길  그래도 그렇지. 이상한 게 여러 가지요. 지방에 나가 있는 많은 병

력들이 지금 황도 주변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하는 데도 소문뿐이지,

알아볼 방도가 없소이다.

금대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 소관은 모두 장일부장이 맡고 있는데, 전혀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

임춘길  하여튼, 뭐가 이상해요. 그래서, 퇴궐을 하려다가 이곳 내군에 와 본

것이외다. 자세히 좀 알아봐 주시구료.

금대    알겠습니다. 장일부장과 의논을 하지요. 하지만, 그럴 리가요....

               

        갸웃하는 금대의 표정에서.....

 

씬 야전

 

        어둠 속에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군대의 이동이 계속 되고 있다. 여

전히 그 한켠 지휘소에서 기장들이 보고 있고, 능산도 보인다. 그

대열을 한 참 보고 있던 환선길이 고개를 갸웃하며 복지겸을 본다.

 

환선길  이상합니다.

복지겸  뭐가 말입니까?

환선길  갈수록 병력이 늘어나고 있소이다. 우리가 관할하는 기병들은 저렇

게 많지가 않았습니다. 계속 지방에서 여러 부대들이 올라오고 있는

데, 대체 어찌 된 것이오이까?

모두들  .........(긴장하며 서로를 본다)

환선길  그렇지 않아도  내가 병부령에게 물어볼 참이었어요. 다들 뭔가 알

고들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순군부

의 수뇌들은 왜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소이까? 그리고, 왜 병부에서

주관을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보시오, 홍장군. 어떻게 된 게요?

홍유    (어떻게 할까 복지겸을 본다)........

복지겸  어차피 아실 일이니 말씀 해드리시오.

홍유    환장군, 보신 그대로올시다. 지방의 군대들이 올라오고 있소이다.

환선길  왜요? 지방군의 훈련은 계획에 없지를 않소이까?

배현경  혁명을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오.

환선길  (놀라며) 혁명...?

능산    그렇소이다. 혁명이오. 이미 폐하께서는 실정에 실정을 거듭하여 돌

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소이다. 그 때문에 우리 기장들이 모여

서 혁명을 논의하고 결정했소이다. 환장군에게는 기회가 없어, 지금

에서야 말하는 것이외다. 어찌하실 것이오이까?

환선길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른다)

홍유    대답을 하셔야겠소이다. 우리는 목숨을 걸었는데, 장군은 어찌하실

생각이시오?

 

        모두들 날카로운 눈빛으로 환선길을 본다. 환선길은 마른침을 삼킨

다. 대답을 못하며, 한참 동안 그들 하나하나를 본다.

 

홍유    대답하시오. 죽는가 사는가는 장군의 결정에 달렸소이다.

배현경  말씀하시오, 환장군.

환선길  (한참만에 끄떡인다) 나는 오랫동안 여기 있는 장군들과 함께 전장

터를 누볐소이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맞는 것이겠지요. 나도

그렇게 하리다.

복지겸  고맙소이다, 환장군. 이제 우리는 뜻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된 것이오.

(손을 내밀며) 자, 잘해보십시다. 거사일은 곧 알게 될 것이외다.

환선길  알았소이다.

 

        모두들 환선길의 손을 함께 잡는다.

 

능산    잘해보십시다. 우리 혁명군의 총사는 왕건장군께서 맡으실 것입니

다.

환선길  (잠시 멈칫하다가) 알겠소이다.

 

        그런 그들의 표정에서.....

 

씬 길

 

        왕건과 장일이 가고 있다. 장수장과 가솔들이 수행한다.

 

왕건    이보시오, 장부장. 내가 시중으로 복직되었다 하였는데, 참으로 뜻밖

이구료.

장일    시중어른, 어른께서 아니하시면 누가 계시옵니까?

왕건    .........?

장일    그러나, 그 벼슬이 얼마나 가겠사옵니까? 이제 곧 천지가 변하지 않

겠사옵니까?

왕건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장일    마군의 기장들이 훈련하고 있는 내용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 모든

사안을 소장이 내군에서 막고는 있으나 그리 오래 갈 수는 없사옵

니다. 시중께서 대사를 속히 앞당기시오소서. 아니면 위험할 수도

있사옵니다.

 

        왕건은 대답이 없다. 그리고, 장일도 더 이상 말이 없다. 그들은 그

렇게 간다. 그런 왕건의 표정에서.....견훤의 웃음소리가 겹쳐진다.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견훤과 최승우가 마주해 있다.

 

견훤    형미라는 고승이 그예 죽었구먼. 궁예왕에게 죽었어.

최승우  그렇사옵니다. 갈수록 태봉의 조짐은 우려할만 하옵니다. 뭔가 큰

변화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사옵니다.

견훤    그래도 그렇지. 한 나라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황제가 해서는 안될

일들이 있어. 그 중 하나가 백성들의 신앙을 건드리는 것이야. 궁예

왕이 이름난 고승을 그렇게 죽이다니...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구

먼.

최승우  첩자들이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다시 태봉국의 수도를 평양으로 옮

길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하옵니다.

견훤    아니야. 평양이라니? 지금 태봉국 사정에 어떻게 평양으로 간단 말

인가?

최승우  그러나, 일리는 있사옵니다. 제 안해와 자식들을 죽인 궁예왕이옵니

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새로운 국가의 목표를 갈고 닦기 위한 하나

의 정지작업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결국 도읍을

옮긴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견훤    하긴, 그것도 그렇기는 하고... 그러고보면 좀 무모하기는 하지만, 역

시 궁예왕은 꿈이 큰 인물이야. 커도 아주 커.

 

씬 철원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궁예와 왕건이 마주해 있다. 이미  몇 순배 술이 돈 듯 하다. 궁예

는 약간 취기가 보인다.

 

궁예    아, 뭘 하는가? 어서 들게.

왕건    예, 폐하.

궁예    나는 요즘 통 술을 아니 들었었네. 허나, 오늘은 좀 해야겠네. 그래

서, 특별히 국화주를 내오라고 하였어. 이 국화주는 향이 아주 일품

이야. 아, 들어.

왕건    예, 폐하. (마신다)

궁예    자네에게 다시 시중을 맡기는 것은 나와 함께 나란히 제국의 완성

을 보자는 것이야. 나는 내원에게도 말하였어. 기왕이면 아예 평양

으로 도읍지를 옮기자고 말이야.

왕건    평양으로 말이옵니까?

궁예    말로만 대제국을 이루지는 못하는 것이야. 의지를 분명히 하자면 도

읍부터 옮겨야지. 평양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저 중원의 당나라

수도인 장안으로 옮겨가는 것이야. 어떠한가, 아우? 그럴 듯하지 않

은가? (사이) 아, 이 사람아, 대답을 해봐. 이 얼마나 웅장한 계획인

가 말이야.

왕건    그러하옵니다, 폐하.

궁예    아, 그리고, 이보게, 아우. 그 지난 날에 관심법으로 아우를 보았던

일은 마음에서 지워버리게. 그래도, 나는 늘 아우를 생각하고 있어.

처음부터 아우를 어찌 해 보려는 생각은 없었네. 그것은 알아두게.

왕건    ..........?

궁예    생각해보아. 내가 누가 있겠는가? 내 옆에 누가 있어? 아우뿐이야.

왕건    예, 폐하.

궁예    (마시며) 이제 우리끼리 가는 거야. 우리 두 형제가 보란 듯이 가는

거야. 다 잘 될 것이야. 수춘부에서 올려온 고경참문의 예언에도 다

나와 있어. 내가 압록강을 건너 중원으로 간다고 말이야. (글을 찾

아 보여주며) 자, 봐. 보라고 아우, 이게 금서성의 학사들이 풀이를

해 놓은 것이야. 이룬다고 하였어. 우리가 제국을 이룬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어.

 

        궁예는 신이 나서 설명하고 있다. 왕건이 그런 궁예를 그저 보고만

있다.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궁예가 딱한 것이다.

 

궁예    왜? 왜 그렇게 보고만 있는 게야? 자, 들자고. 들어, 아우.

왕건    (눈물 참으며) 예, 폐하.

궁예    나는 말이야. 아우 없이는 못살 것 같아. 우리 함께 영원히 가자고.

누가 뭐래도 나는 아우는 안 버려. 지난 번에 그 관심법도 하도들

아우를 물고 늘어지길레 내가 아우를 막아주기 위해서 한 것이야,

이 사람아.

왕건    예, 폐하.

궁예    허허, 사람 하고는... 이런 눈물이 보이지를 않는가? 아니, 왜 갑자기

눈물을 보이는가? 왜, 무슨 일이 있는가? (사이) 왜?

왕건    ........(마음의 소리) 그렇사옵니다, 폐하. 일이 있사옵니다. 이것이 오

늘 우리 형제의 마지막이옵니다, 폐하. 어찌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있겠사옵니까, 형님폐하?

궁예    왜 그래? 왜 그러는 것이야? 벌써 취했는가 아우?

왕건    (그예 참지 못하고 통곡한다) 그렇사옵니다, 형님폐하. 어쩌다가 우

리가 이렇게 되었사옵니까, 폐하? 어쩌다가 세월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사옵니까? 하늘이 원망스럽사옵니다. 하늘이 원망스럽사

옵니다, 폐하.

궁예    이런 이런... 아, 다 잊으라고 하지 않았어? 내 뜻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 허허, 이런...

왕건    (계속 통곡하며) 형님, 이 아우를 용서하시오소서. 이 아우를 용서하

시오소서, 형님.

 

        통곡하며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왕건의 표정과 엇갈리는 궁예에서...

 

 

        < 118회 끝 >

 

       






첨부파일 태조왕건118.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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