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123회>
줄거리
청주 호족 선장과 명주 김순식의 반란이 겹쳐 일어나자 왕건은 이제 유화정책을 포기하고 청주에 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명주에는 김순식을 회유하기 위해 허월을 파견한다. 한편, 임춘길을 감시하던 내군은 청주의 반란에 임춘길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이를 청주진압에 역이용하는 계책을 세우고 환선길의 왕위찬탈계획이 구체화되는 등 혁명이후의 정국은 어수선하기만 한데.....
씬 철원 황궁 외경(낮)
내군의 군사들이 무리 지어 오가는 것들이 보인다. 비상인 것이다.
개중에는 무리를 이끌고 경계를 확인하는 장일과 지나치는 향식들
이 보인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김행선 (E) 그예 변란이 일어났사옵니다, 폐하.
씬 동 조당 안
문무신료들이 가득히 모였다. 왕건은 괴로운 표정으로 옥좌에 앉아
있다. 김행선이 계속 한다.
김행선 폐하, 아직 인심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터에 이러한 일이 동시에
두 곳에서 일어나고 있사옵니다. 속히 이 불을 끄셔야 하옵니다.
박지윤 그 동안 신들은 이 나라 원로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로 지방의 많은
호족들을 추스리려 애썼사옵니다. 그러나, 무지한 무리들이 있어 대
세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이토록 참람한 짓들을 하옵니다. 일벌백계
하시오소서, 폐하. 더 이상 타이르는 것만으로는 안되옵니다.
왕건 ..........(계속 괴롭다)
유천궁 광평성의 늙은 신료들은 조금 전 박장자가 한 말에 모두 공감하고
있사옵니다. 그리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그래도, 사신들을 보내어 한 번 더 달래봄이 어떠하오?
원극유 신 원극유 아뢰옵니다. 신은 이 나라 병부를 상징하는 병부의 수장
이옵니다. 더 이상 폐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는 아니되옵니다. 군
사를 보내시어 저들을 토벌하시오소서.
왕건 도대체 청주의 반란군들은 지금 어찌 하고 있다는 것인가?
복지겸 이미 그곳 일대에서 이천이 넘는 무리를 모아 관아를 불태우고 이
곳 도성으로 올 준비를 한다 들었사옵니다.
임춘길 ..........
박유 청주는 본래부터 폐하께 반하는 감정이 있는 지역이옵니다. 더 이상
두고보지 마시오소서. 이미 타일러도 듣지 않을 것이옵니다.
왕건 (한숨 쉬며) 명주의 김순식이는 또 어떠한고?
복지겸 첩자의 말에 의하면 명주 관내의 모든 군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들었사옵니다. 이미 출병 준비를 마치고 곧 이리로 오지 않을까 사
료되옵니다.
왕건 청주에서도 그렇고 명주에서도 그렇고.... 이걸 어찌 한다?
박질 청주는 오래 전부터 신라와 백제와 고려가 서로 경계를 이루는 지
역이옵니다. 지금 저 반란을 잠재우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환거리가
될 것이옵니다. 속히 출병을 시키시오소서.
태평 폐하, 이미 원로분들이 말씀이 한결같이 군사를 보내자 하시옵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순군부의 장수들과 잠시 회동이 있었사옵니다.
장군들 또한 모두 출병하기를 원하옵니다. 허락하시오소서. 사태가
급박하옵니다, 폐하.
모두들 허락하시오소서, 폐하.
왕건은 아직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계속 한숨만 쉬다가 결심한 듯
장수들을 본다.
왕건 그렇다면 청주는 누가 갈 것이오?
유금필 (나서며) 신 유금필 출전을 원하옵니다. 폐하의 대명으로 반군을 제
압하고 그 위엄을 높이겠사옵니다. 보내주시오소서.
홍유 신도 가기를 청하옵니다. 가서 우리 군의 위엄을 보이겠사옵니다.
김락 신도 청하옵니다.
배현경 신 또한 가기를 원하옵니다.
최응 폐하, 반란군은 청주와 명주 두 곳에서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그러
나, 청주는 가는 길이 빠르고 명주는 백두대간을 넘어야 하옵니다.
즉 명주는 아직도 상당한 여유가 있다는 뜻이옵니다. 먼저 청주를
제압하시오소서.
능산 광평시랑의 말이 합당하옵니다. 그리하시오소서.
왕건 그렇다면 그리하도록 합시다. 일단은 유금필장군과 홍유장군이 청주
로 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배현경장군과 김락장군은 순군부의 수장
들과 의논하여 명주의 반군에 대비하도록 하오.
그들 예, 폐하.
왕건 또한, 환선길장군과 능산장군은 도성 안팎을 경계하고 만약의 사태
를 대처하도록 하오.
그들 예, 폐하.
다련군 폐하, 참으로 지극히 옳으신 분부를 내리셨사옵니다. 힘에는 힘으로
써 보여주셔야하옵니다.
유긍달 그렇사옵니다, 폐하. 이번에 저들을 강력하게 응징하심으로써 천하
는 폐하의 위엄을 두려워 할 것이옵니다. 참으로 옳으신 결단을 내
리셨사옵니다, 폐하.
왕건 모든 전쟁은 신중해야 하오. 매사를 차질 없이 하도록 하오. 첩자들
계속 보내고 저들의 움직임을 잘 포착해서 실수 없는 전략을 세우
도록 하시오.
장수들 예, 폐하.
왕건 그리고, 기왕에 시작한 전투라면 반드시 승전보를 가져오도록 해야
할 것이오.
장수들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씬 철원 도성
유금필과 홍유가 이끄는 군대가 가고 있다. 도로변에 사람들이 보이
며 술렁거린다. 그 군대는 그렇게 도성을 빠져나가고 있다.
씬 임춘길 집 외경
웬 낯선 사내 하나가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문 쪽으로 다가
온다. 군사 하나가 막아선다.
군사 뭐요?
그러자 사내는 급히 귓속말로 뭔가를 소근거린다. 그러자 군사는 그
를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다시 아무 일이 없는 듯 하지만 저쪽 골
목에서 숨어서 보는 눈들이 있었다.
씬 동 집 사랑
초조한 빛의 임춘길이 서찰을 보다가 사내를 보며 역정을 낸다. 도
우가 보고 있다.
임춘길 사람들이 이렇게 무모 할 수가 있는가? 뭐라, 나를 보고 이곳 황도
에서 군사를 준비하라?
사내 예, 장군
임춘길 도대체 이곳 사정을 알고나 들 하는 소리인가? 서로가 약속을 했으
면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지... 밑도 끝도 없이 군사를 일으키면 어
찌하란 말인가?
도우 장군, 저들은 약속한 대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
니까?
임춘길 너무 성급했어요. 서로가 충분하게 연락을 취하고 분위기가 무르익
었을 때 군사를 일으켰어야지요.
도우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장군. 모르긴 몰라도 황제는 지금 전전긍긍할
것이옵니다. 이럴 때 장군께서 나서시오소서.
임춘길 그런 소리 마시오. 조정에서 회의를 하는데 모두들 나만 쳐다보고
있더이다. (사이) 하필 이럴 때에 내 집을 들락거리면 어떻게 하는
가? 내군들이 내 주변을 계속 감시하고 있어요.
도우 조심, 또 조심들 하면서 오가는 사람들입니다. 일은 급하고 연락은
취해야 하니 오지 않았겠사옵니까? 이럴 대일수록 대범하실 필요가
있사옵니다 장군. 저들의 말이 맞사옵니다. 군사를 준비하시오소서.
임춘길 군사라니요? 모두들 나만 보고 있는데 어떻게 군사를 일으킵니까?
여봐라.
사내 예, 장군
임춘길 일단 답서를 써 줄 터이니 해가 지면 여길 빠져나가 선장에게 전하
라.
사내 예, 장군.
임춘길 아무리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들 모르니......
임춘길이 붓에 먹물을 찍어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런 그들의 표
정에서......디졸브 되면
씬 다시 동집 밖 (밤)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샛문이 열리고 사내가 나와 어디론가 사라
진다.
씬 다시 언 길목
사내가 급히 걸어와 한 쪽으로 가려는데 막아서는 사람들이 있다.
장일과 내군들이다. 사내가 당황한다. 그러나 도망칠 길은 없다.
장일 청주에서 오신 손님이시렸다?
사내 .........?
장일 데리고 가라.
군사들 예.
씬 청주 관아
관아 앞에 선장 형제가 많은 반란군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고 있
다.
선장 들어라. 청주의 군사들이여. 나 선장이는 오래 전부터 돌아가신 황
제를 뫼시었다. 비록 나는 청주에만 머물렀으나, 폐하께서는 파진찬
벼슬까지도 하사하셨다. 즉 나는 전 황제의 충신인 것이다. 그대들
모두 전 황제 폐하의 군사가 아니고 무엇이냐?
모두들 와~..........
선장 역적 왕건이가 우리 황제 폐하를 시해하였다. 저 철원의 황도는 우
리 청주인들이 옮겨가 지은 궁성이다. 우리의 땅을 왕건역적이 빼앗
았다. 어찌 이를 되찾지 않으랴.
모두들 와..............
선장 먼저 우리는 이 청주 고을과 관아를 모두 접수하였다. 이제 곧 사방
에 격문을 띄우고 군사를 더 모아 황도 철원을 칠 것이다. 철원에서
도 임춘길장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곧 천하가 우리세상이 될
것이다.
계속 함성이 터진다. 그 위로 해설이 이어진다.
해설 청주, 본래는 삼국시대의 백제 땅에 속했던 지역이다. 통일신라 때
에는 지방 문화의 중심지역이 되기도 했었으나, 후삼국으로 갈라지
면서 다시 삼국의 접경지대로 떠올랐다. 따라서, 당연히 군사적 요
충지로써 그 역할이 컸었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세울 때 이곳 청
주사람들을 무려 일천호나 데려 갔다. 그것은 이 예민한 지역의 거
주민들을 인질 삼아 철원으로 데려갔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
다. 즉 그들을 데려감으로써 한편으로는 황궁을 짓는 노역을 담당케
하고 또 군인의 역할을 맡게 하면서 청주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못하도록 하는 인질적 성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
월이 가면서 궁예정권에서 뿌리를 내렸고, 철원지방 도읍지의 주인
의식을 갖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궁예가 폐위된 것과 함께 청
주의 반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씬 길
달빛이 밝은 어느 시골길에 두 필의 전령마가 달리고 있다. 그들은
급히 그렇게 사라져 가고....
씬 또 다른 길
유금필과 홍유가 군사를 몰아 가고 있다.
유금필 청주까지는 길이 한참이오. 반군의 형편이 어떤지를 전혀 모르니 답
답합니다.
홍유 앞서 정탐을 보낸 첨병들이 돌아오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금필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러자면 족히 며칠은 걸릴 겝니다. 우리는 아
는 게 너무 없어요.
그때다. 군사들이 후미에서부터 뭔가 소란이 이는 것 같더니, 두 필
의 그 전령마가 다가와 유금필에게 군례를 올린다.
유금필 너희들은 누구인가?
전령 내군의 복지겸 장군께서 보내셨사옵니다.
유금필 복장군이..?
전령 여기...
전령은 밀서 한 통과 함께 작은 보퉁이를 내어 준다. 잠시 횃불 밑
에서 그것을 보던 유금필이 미소를 짓는다.
유금필 하하하하... 아, 과연 태평학사로다. 알겠다. 복장군께 가 전해라. 참
으로 고맙다고 말이다.
전령 예, 장군.
전령들이 돌아간다. 홍유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홍유 장군, 무엇이 그리 신명이 나오이까?
유금필 하하하. 그럴 수 밖에요. 복장군이 순군부의 태평 낭중과 광평시랑
최응학사와 의논하여 아주 좋은 비책을 보내 주었소이다.
홍유 비책이라니요?
유금필 이것은 임춘길이가 청주에 보내는 밀서이외다.
홍유 밀서요?
유금필 우리가 떠나오고 바로 반란군의 말서가 임춘길이에게 간 것 같습니
다. 그걸 잡은 모양입니다. 이걸 잘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홍유 그래요? 거 참, 뜻밖의 선물이올시다. 참으로 막막했는데, 복장군이
정말 좋은 걸 보내주셨소이다. 허허허...
유금필 우리도 우리지만 명주가 걱정입니다. 김순식이라는 장군은 안하무인
이지요. 거기는 영토도 클뿐더러 군사도 많아요.
홍유 압니다. 우리가 명주를 치러 간다해도 난관이 많지요. 태백산의 그
험한 준령들이 철옹성처럼 둘러싸여 있습니다. 난공불락이지요.
유금필 그러게 말입니다.
홍유 허월대사가 가셨다니, 잘 되어야할텐데......
씬 명주성 외경
어둠 속에 출전 준비를 끝낸 군사들과 공격용 장비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횃불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고...
김순식 (E) 공격을 중단하라니요, 아버님?
씬 동 성 안
제장들이 둘러쌓아 있고. 김순식과 허월이 마주 앉아 있다.
김순식 이미 출병 준비가 다 끝났사옵니다, 아버님.
허월 무모한 전쟁이다.
김순식 왜 무모하다 하시옵니까? 왕건이는 황제페하를 시해한 역적이옵니
다. 그것을 응징함이 왜 잘못이라 하시옵니까?
허월 너는 이곳 명주에만 있어서 저간의 사정을 다 모를 것이다. 지금의
황제께서 시해한 것이 아니고, 폐주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간 것이다.
김순식 허허, 아버님도 참 딱하시옵니다. 아버님과 저는 일찍이 폐하께서
대업을 이루실 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 성을 통째로 내주었
사옵니다. 폐하는 신라의 왕자 출신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누구이옵
니까? 바로 신라 황실의 후손이옵니다. 왕건이가 폐하라니요? 용서
할 수 없사옵니다.
허월 너야말로 까막눈이구나. 세상이 다 아는 일을 너만 몰라. 폐주는 그
동안 실성을 했어. 그 놈의 거짓 관심법으로 하루에도 백명씩 죽였
다. 황후의 음부를 태워 죽인 사람이다.
김순식 ................
허월 자신의 아들들도 때려 죽였어. 그 사람이 사람이 맞느냐? 과연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냐 이 말이다. 이 미련한 것아.
김순식 아무튼,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충성과는 다른 것이옵니다. 신
하는 한 번 군신 관계를 맺으면 영원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허월 네가 죽고 네 자식이 죽고 온 나라가 불타는데도 충성이란 말이냐?
나는 일찍이 부귀영화가 싫어서 세상을 버린 사람이다. 너는 아직도
듣지 못했느냐? 삼한을 대표하는 큰 고승들이 신 황제인 등극장에
모두 와 하례를 드렸다. 그것은 무얼 뜻하느냐?
김순식 그래도, 소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사옵니다. 군사를 몰아 갈 것이옵
니다.
허월 내가 새로운 황제를 모신 것은 그 분이 우리의 부처님 세계를 밝게
이끌어 줄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상을 오게 하기
위해서 석총스님과 형미대사도 기꺼이 스스로 목숨을 던지셨다. 그
얘기도 듣지 못했느냐?
김순식 ....................
허월 바로 너 같은 맹목적인 충성이나 의리가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
이다.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명분이 있어야 한다. 지금 너는 명분이
없어. 모르긴 몰라도 네가 꼭 가겠다면 기억해 두거라. 너와 너의
군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백성들의 돌에 맞아서 죽을 것이다.
김순식 아버님..?
허월 아무리 많은 군사를 가져도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 백성들의 인심
이다. 알겠느냐? 백성들의 인심 말이다. 이 놈아.
김순식 ..............?
허월 어차피 석총과 형미 대사도 스스로 목숨을 내놓고 순교를 자청하셨
다. 나라고 왜 못하겠느냐? 정녕 가고 싶거든 이 아비의 시체를 넘
어 가거라.
김순식 아버님....?
씬 철원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안
왕건이 고민이 많다. 최응과 태평, 박유가 함께 앉아 있다.
박유 폐하, 이미 군사들이 떠났사옵니다. 마음을 편히 하시오소서.
최응 허월대사께서도 지금쯤 명주성에 도착하셨을 것이옵니다. 염려를 놓
으시오소서.
왕건 ..........(끄떡이며) 하지만, 참으로 마음이 아프이. 도대체 언제쯤 백성
들이나 호족들이 나의 마음을 알게 될꼬?
태평 너무 심려치 마시오소서. 세상 하나를 바꾸시는 일이시옵니다. 어찌
순탄하기만 하겠사옵니까?
왕건 그렇다 하더라도....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지금 이 제국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내란이라니....백제나 신라에서 우리를 얼마나 비웃
고 있을 것인가......
그때 대전 내관이 아뢰어 온다.
대전내관 폐하, 충주부인마마 납셨사옵니다.
왕건 음? 충주부인이........ 드시라 하여라.
그러자 대답소리와 함께 수인이 상궁에게 소반상을 들려 들어온다.
신료들은 예를 취하고....
수인 폐하, 얼마나 힘이 드시옵니까?
왕건 부인께서 어쩐 일이시오?
수인 나랏일에 걱정이 많으시다 들었사옵니다. 신첩이 아무리 돌아보아도
그저 마음 뿐이라 ...이렇게 다과라도 좀 드시라고 내왔사옵니다.
모두들 (흐뭇하게 보고).........
왕건 허허, 고맙소이다. 내가 계속하여 정신이 없는 고로 황후나 부인들
에게 자리 한 번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소이다. 고맙구료.
상궁이 내미는 소반상 위에는 다과와 함께 술 병 하나가 놓여 있다.
왕건 허허, 이건 술이 아니오?
수인 예, 폐하. 가벼운 미주 한 병을 내왔사옵니다. 잠시 시름을 더시오소
서.
왕건 술은 아니되오. 지금 나라 곳곳이 시끄럽고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가고 있소이다. 그런데, 황제가 앉아서 술이나 마셔서야 되겠소이
까? 치우시구료.
박유 허허허, 폐하. 그렇지 않사옵니다. 충주부인마마의 충정을 그렇게 물
리치시면 어찌하옵니까? 받으시오소서. 가벼운 미주라 하지 않사옵
니까?
태평 그리하시오소서, 폐하. 오히려 작은 휴식이 보다 큰 일을 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옵니다.
왕건 허허, 이거 참...
최응 그리하시오소서, 폐하.
박유 자, 그만 신들은 가보아야겠사옵니다. 편히 쉬시오소서.
태평,최응 (함께 일어나며) 물러가옵니다, 폐하.
왕건 허허, 왜들 그러시오? 같이 차라 생각하고 한 잔 하십시다.
박유 아니옵니다. 이제 신들은 물러갈 때가 되었사옵니다. 하오면....
왕건 허허, 이런...
박유들이 물러간다. 수인이 잔에 술을 따라 준다.
수인 어려운 때일수록 힘을 내셔야하옵니다. 가벼운 술은 옥체에도 좋다
들었사옵니다. 드시오소서, 폐하.
왕건 고맙구료.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하시었소이까? 하하하. 자, 부인도
한 잔 드시오. (따라주고) 드십시다. 약으로 알겠소이다.
수인 망극하옵니다, 폐하.
두 사람의 그 미소에서...
씬 동 황후전 복도
씬 동 황후전 안
의원이 막 진맥을 끝내고 있다.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갸웃
한다. 상궁들이 보고 있다.
유씨 대체 무슨 병이오, 전의?
전의 꼭 이렇다할 변명을 말씀 올리기보다는 피접(요양)을 가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사옵니다.
유씨 피접이라니.... 내 병이 요양을 갈 정도란 말이오?
민상궁 세상에.....
전의 그러하옵니다. 본래 심약하신 분이시옵니다. 마음의 무게가 과하여
병이 되었사옵고, 그것이 가슴을 덧나게 하였나이다.
유씨 그게 무슨 소리오?
전의 조용한 곳에서 자리를 잡아 자연을 벗 삼고 쉬시오소서. 길은 그것
뿐이옵니다, 황후마마.
유씨 그냥 이대로 지내면 어찌 되는 것이오?
전의 답답증이 더하여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실 것이옵고, 드신 것이 소화
가 아니되며 늘 불안과 초조를 견디시기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결국
에 가서는 정신을 놓으시게 되시옵니다.
민상궁 황후마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폐하께 아뢰어야 하지 않
겠사옵니까?
유씨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지금 나라에 어려운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일까지 폐하께 말씀을 드린단 말인가? 당분간은 입밖에 내지
도 말게.
민상궁 쇤네가 듣기로 폐하께오서는 천년 묵은 지초를 전의에게 맡겼다 들
었사옵니다. 황후마마.
유씨 .............?
전의 예, 그런 일이 있긴 있었사옵니다만은...
민상궁 그 지초를 황후마마의 약으로 쓰면 어떠하오?
유씨 그만하지 못하겠는가? 그것이 어디 나라를 위해 쓸 약이지, 나를 위
해 쓴단 말인가? 이 사람이 큰 일 날 사람이네 그려.
민상궁 하오나, 황후마마...
유씨 전의는 그만 물러가게. 내 병이나 그 지초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입
밖에 내서는 아니될 것이야. 알겠는가?
전의 예, 황후마마.
유씨 어서 물러가게.
전의가 대답하며 물러간다. 민상궁은 안타깝고, 유씨는 또 아픔을
느낀다. 그 표정에서....
씬 오씨의 처소
오씨가 눈을 크게 뜨고 묻고 있다.
오씨 뭐라? 충주부인이 어주상을 들고 대전으로 갔다?
박상궁 예, 마마.
오씨 허허, 기가 막혀서. 그게 무슨 요상한 짓이란 말인가? 국사를 논하
는 대전에 술상을 들고 가? 그렇다면 지금 충주부인이 폐하와 함께
대전에 있다 그 말인가?
박상궁 예, 마마. 그렇다 하옵니다.
오씨 이런, 이런... 그 사람이 아주 큰일 날 사람일세 그려. 거 무슨 망칙
한 일인가? 누구는 갈 줄 몰라 이러고 있는가? 그래도 명색이 황실
안에 어른 중 하나인데 그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허, 참...
씬 다시 동 대전
두 사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왕건 자, 한 잔 더 받아보시오, 부인.
수인 비록 약한 술이라고는 하지만 취하옵니다, 폐하.
왕건 허허, 취하기는...마셔보니 이건 그야말로 술이 아니라 차로 구료. 향
이 아주 그만이야. (한숨) 그러고보니, 내가 국사에 너무 빠져 지내
느라 충주부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했소이다.
수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왕건 전장터를 오가느라 반평생을 다 보냈어요. 충주부인뿐 아니라 황후
나 나주부인에게도 참으로 미안한 게 많고. 허허허...... 아무리 바빠
서 이제 자주 함께들 하십시다.
수인 예, 마마.
왕건 오늘은 부인으로 하여 여러 가지 생각들을 잊었습니다. 오늘 좀 더
많은 얘기를 해주시구료, 부인.
수인 부끄럽사옵니다, 폐하. 자, 한 잔 더하시오소서.
왕건 허허허, 그럽시다.
씬 황궁 내군 외경(낮)
씬 동 내군 관아
사내가 포박되어 앉아 있다. 최응과 태평, 장일과 장수장, 신방이 보
고 있다.
복지겸 참으로 어리석은 놈들이로구나. 우리는 줄곧 너희를 보고 있었는데
너희는 어째서 우리 생각을 못했단 말이냐.
사내 ...........
복지겸 보시오, 태평낭중. 역시 임춘길이가 관련이 되어 있었소이다. 헌데도
폐하께서는 믿지를 아니하십니다.
태평 믿지 아니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을 다 용서하시고 싶어하는 것
이지요.
장수장 가서 임춘길이를 포박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최응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그물 안에 들어온 새가 아닙니까? 일
단 이들이 오고 간 내용을 유장군에게 전한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
다. 그 결과를 보고 나서 처리를 해도 해야겠지요?
태평 옳은 말입니다. 유장군은 이번 밀지를 아주 유용하게 쓸 것입니다.
지모가 뛰어나신 분이니까 말입니다.
이들 그 관아를 나오며 계속 말한다.
최응 장군, 황궁을 지키는 임무를 환장군에게 주었다고 들었습니다만은..
복지겸 예, 황궁 밖의 일은 능산장군이 맡고 황궁의 숙위는 환선길 장군이
맡게 했습니다. 진실로 폐하께 충성을 하는 자인가, 아닌가를 이번
기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황도는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
있고 많은 군대가 반란을 진압하러 가버렸지요. 만에 하나 흑심이
있다면, 이번에 뭔가 보이지 않겠습니까? 즉, 함정을 한 번 파보자
는 것입니다.
최응 알고 있었습니다.
복지겸 임춘길이는 이미 끝이 났고. 이제는 환선길입니다.
씬 황궁 외경
여전히 많은 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씬 동 황궁 어느 전각안
환선길이가 아우 향식과 마주 해 있다.
향식 형님, 모든 게 우리가 우려했던 대로 가고 있사옵니다. 청주는 반란
했고, 김순식장군도 곧 군사를 몰아온다고 하옵니다.
환선길 ..............
향식 기회이옵니다. 도성이 거의 비었사옵니다.
환선길 그건 그래. 허지만, 황제를 어떻게 죽이는 가가 문제 아닌가?
향식 형님께서 이미 황궁을 숙위하라는 명을 받았사옵니다. 형님의 군대
가 황궁을 포위하고 제가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황제의 목을 벤다
면 일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사옵니다.
환선길 문제는 황제가 아니라, 내군 장군 복지겸이야. 보통 조심스러운 인
물이 아니란 말이야.
향식 그 점도 제가 눈치를 보아서 내군의 관아를 점령하고 손발을 묶어
버리겠사옵니다.
환선길 .........(끄떡인다)
향식 복지겸을 잡아넣고 황제의 목을 벤 후에 전 황제의 원수를 갚았다
고 하시오소서. 분명 명분이 되옵니다.
환선길 그건 그래.
향식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이 자연히 다 이루어지옵니다. 청주나 명주의
반란군도 결국 형님의 말을 듣게 될 것이고, 신료들도 그러하옵니
다. 그리고, 황제가 되시는 것이지요.
환선길 그래. 어차피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나는 이 조정에서 오래 못
간다. 요 며칠 사이로 기회를 보자꾸나.
향식 예, 형님.
환선길 허월대사가 명주로 간 일은 이렇다할 소식이 전혀 들어오고 있지를
않아. 그것도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야. 계속 밖에서 시끄러워
야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데 말이야.
향식 하지만, 청주는 다르옵니다.
환선길 그래. 거기서 뭔가 크게 한 번 터트려 주어야 하는데....
씬 청주 관아 외경
씬 동 관아 안
선장 형제와 그의 부장들이 앉아 있다.
선장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 지는 꽤 되었어. 지금쯤 황
도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도 있을 것인데 전혀 소식이 없어.
진선 그러게 말이옵니다, 형님. 길도 멀거니와 우리가 두려워서 못 오는
것 아니옵니까?
선장 그럴 수도 있겠지. 특히나 황도는 임장군이 있어. 그쪽에서도 무슨
행동을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고...
진선 명주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들었사옵니다.
선장 허허허, 나도 들었다. 왕건이가 제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사방에서
이렇게 일어나기 시작하면 정신 못 차릴 거야. 일단은 우리는 이곳
에서 충분하게 군사력을 수습해서 황도로 갈 것이다. 그리고, 밀서
를 보냈으니까 임춘길 장군이 우리 사정을 알면 어떤 조치를 취해
올 것이야. 일단 그 내용을 보고 나서 뭔가를 정해야지.
진선 예, 형님.
선장 이제 곧 우리 세상이 온다. 청주인들의 시대가 올 것이야. 하하하하.
씬 어느 산야
숲 속에 유금필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
홍유 장군, 청주까지는 아직까지도 족히 이틀은 더 가야 합니다. 왜 여기
서 대오를 멈추는 것입니까?
유금필 조금 더 가면 적군의 첩자들이 나와 있습니다. 일단은 우리 군대를
숨길 필요가 있습니다.
홍유 숨기다니요?
유금필 이 밀서의 내용을 보면 임춘길이가 청주의 선장이와 서로 훗날을
기약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작하여 일단의 군대를
파병하는 것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임춘길이의 군대가 도성
을 빠져 나와 청주로 왔다고 하는 것이지요.
홍유 저들이 속아 줄까요?
유금필 저들도 임춘길이가 대강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임춘길이는 뒤에 올 것이고, 선발대가 먼저 왔다고 하면서 임춘길이
의 글을 보이면 넘어 갈 것 같습니다.
홍유 (끄떡이며)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조치를 취해야겠습니다.
유금필 이미 부장에게 시켜서 정예 선발대 백여명을 모아 놓으라고 했습니
다. 그들이 들어가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우리가 밖에서 호응하여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홍유 (끄떡인다) 좋은 계책이십니다. 하지만, 장군. 부장들만을 어찌 믿겠
습니까? 적진으로 소장이 가면 어떻겠습니까?
유금필 아니, 홍장군이 말씀입니까?
홍유 허허허, 해볼만 하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나의 얼굴을 조금도 모릅
니다.
유금필 ..................?
홍유 소장이 가겠습니다.
유금필 좋습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홍장군이 가신다면 그만큼 안심이 아
니겠습니까? (부장에게) 그것을 이리 가져오너라.
부장이 주면, 다시 홍유에게 준다. 밀서인 것이다.
유금필 영락없는 임춘길이의 서찰이올시다. 똑같은 관인을 찍었고 서찰에
수결을 넣는 것도 똑같습니다.
홍유 .........(끄떡인다)
유금필 그렇다면, 잠시 후 떠나셔야겠습니다. 우리는 밤을 기해 전격 이동
하여 이틀 후면 그곳에 도착할 것이외다. 일부러 큰길을 버리고 소
로길로 택해 갈 것입니다. 첩자들의 눈을 피해야하니까 말입니다.
홍유 알겠습니다, 장군.
유금필 제발 반란은 이것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할텐데...
홍유 아직까지 명주가 조용한 걸 보면 허월대사께서 나름대로 큰 일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유금필 그러게 말입니다.
홍유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나라 안의 일로 시끄러울 때 백
제가 움직여 보세요. 참으로 곤욕을 치룰 것입니다.
유금필 그럴 수 있지요. 그래서, 술희 아우가 상주로 가지 않았습니까?
홍유 박장군이라면 모두들 또 안심이 아닙니까? 허허허. 자, 이거 소장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부장들은 차비를 하라.
부장들 예, 장군.
그들을 보는 유금필의 표정에서....
씬 충주 관아
박술희와 이흔암이 마주 보고 있다.
이흔암 도대체 박장군이 다시 오나, 내가 여기 있으나 무엇이 다르단 말이
오?
박술희 조정에서는 웅주가 이곳보다도 더 큰 요충지라서 소장보다는 장군
이 더 필요하다고 하였소이다.
이흔암 중요하고 안하고는 다 마찬가지지. 굳이 나를 그리로 보내는 이유가
무엇이오? 나 참 알 수가 없네. 거기는 여기 충주보다도 훨씬 더 아
래로 내려가는 아주 오지란 말이오. 나도 이제 나이가 있어요. 대체
그 구석까지 가서 뭘 어찌하란 말인고?
박술희 폐하의 영이시오.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흔암 폐하...(하다가) 허긴 뭐. 황제의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아무튼 잘 해보시오. 박장군과 친하다는 저 사벌주 성의 늙은이도
요즘은 병이 들어서 오늘내일 한다고 합디다. 두 사람 사이가 유별
난 모양인데 거 안되었소이다. 허허허. 수고하시오. (부장들에게) 가
자.
부장들 예, 장군.
박술희 뭐라?... 상부어른께서 그토록 위중하시다..?
그런 박술희의 표정에서...
씬 사벌주 성 외경
씬 동 성 안
아자개가 신음하고 있다. 지난번보다도 아주 더 위독해 보인다. 계
모가 눈물을 찍고 있고, 대주는 한숨을 쉰다.
아자개 (계속 신음) 아이고, 아이고.... 참으로 견디기 어렵구나. 그래서, 병
이 들면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고, 아픈 게 무섭다고 했어. 아이
고.. 아이고...아이고...
계모 어쩌면 좋사옵니까, 나으리? 의원이라는 의원이 모두 고개를 내저으
니 이를 어찌하옵니까?
아자개 너무 아파. 차라리.... 빨리 숨을 멈추는 게 낫겠는데, 그것도 안돼...
대주 일단 견훤 오라버니께 이 사실을 알렸사옵니다. 곧 무슨 조치를 취
해 주실 것이옵니다.
계모 (울다가 눈 부릅뜬다) 견훤이가 말이냐? 아이고... 맹추 같은 소리만
하는 구나. 견훤이가 뭐가 답답해서 우리를 도와줘? 뭘 어떡해? 아
마 지금쯤 속으로는 그럴 게다. 그 놈의 늙은이 두고두고 속을 썩이
더니만 아주 잘 되었다고 말이다.
아자개 뭐요? 지금 뭐라고 하시는 게요, 부인?
계모 아니 그렇습니다. 견훤이는 그런 얩니다. 네...
대주 .........(한숨만)
그때, 용개와 보개가 급히 들어선다.
용개 아버님, 아버님..?
아자개 또 웬 소란이냐? 무슨 일이야?
용개 박술희가 왔사옵니다.
아자개 (벌떡 일어나며) 뭐라고? 누가 와?
용개 오늘 아침 박술희가 고려군 총사로 다시 왔다 하옵니다.
아자개 허허허, 왔어. 술희가 왔단 말이지. 박술희가 왔단 말이지.
대주 ..............?
아자개 아이고, 왔구나. 이제야 왔구나. 왔어. (다시 아프다) 아이고... 허나,
오면 뭘 하나? 이제 나는 두 세달 밖에 안 남았는데... 이젠 죽은 목
숨인데...아이고.... 어서 좀 오라고 해라. 오라고 좀 해. 견훤이는 필
요 없다. 박술희를 오라고 해.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황궁 안
견훤이 박씨, 고비, 능환, 능애, 최승우와 함께 대주가 보낸 서신을
보고 있다.
견훤 허허, 이거 참..
박씨 ......?
고비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견훤 하긴 뭐, 연세가 있으시니 그러실 때도 되었지. 아버님께서 오늘내
일 하신다는 구료.
박씨 예..? 아니, 폐하. 아버님께서 말이옵니까?
견훤 그렇다오. 대주가 연락을 취해 왔구료.
능환 어르신께서 편찮으시다면 폐하께서 응당 어떤 조치를 취하셔야하옵
니다.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속히 의원과 약을 보내시어, 폐하의 마음을 전하시오
소서.
박씨 그 분께서 연세가 드셔서 노환이 나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
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이 폐하를 괴롭히셨습니까? 이제와서 뭘 어쩌
라는 것입니까?
능애 그래도, 부자지간이옵니다. 폐하께서 자식으로써의 최대한의 성의는
보이셔야 하옵니다.
최승우 당연하신 말씀이옵니다. 그리하셔야하옵니다. 서두르시오소서, 폐하.
견훤 (무거운 신음) 그렇게 하긴 해야겠지. 참으로... 생각할수록 답답하신
분이란 말이야. 그렇게 사시다가 결국 가시는 것을.... 왜 그렇게 이
자식을 속을 썩히셨단 말인고?
고비 폐하. 백성들의 눈이 있사옵니다. 과거의 일은 잊으시고, 속히 의원
과 약을 보내시오소서.
견훤 이 일은 파진찬이 알아서 하게. 황궁에 소속된 전의를 보내고 병에
따른 약을 충분히 찾아서 살펴 드리라고 하게.
최승우 예, 폐하.
견훤 이제서야 이 자식이 필요하신 모양일세, 허허 참...
능환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모르옵니다. 이 일을 기회 삼아 그 동안 폐
하께서 손대지 못하셨던 상주를 노려 볼만하옵니다.
능애 그럴 수도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만 참견하지 않으신다면, 왜 저
상주를 다시 빼앗지 못하겠사옵니까?
견훤 아무튼, 지금은 아버님 일이 더 급해. 이보게, 아우?
능애 예, 폐하.
견훤 아우가 의원을 데리고 한 번 다녀와.
능애 예, 폐하. 그리하겠사옵니다.
견훤 그리고, 그 일대의 경계상황도 간 김에 자세히 좀 보고와.
능애 예, 폐하.
견훤 참 그... 어찌 되었는가? 고려에 사절을 보내라고 한 것 말일세.
최승우 예, 길을 떠났사옵니다. 몇 가지 예물을 준비하느라 좀 늦었사옵니
다. 지금쯤 고려의 황도 가까이에 이르고 있을 것이옵니다.
견훤 고려왕 왕건이가 내 사신들을 보면 기절초풍을 할 것일세. 어떻게
사신까지 다 보내왔을까 하고 말이야.
능환 그럴 것이옵니다, 폐하.
견훤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제국을 가지고 서로 대결하고 있는 사이
야. 이 기회에 이 백제 황제의 넓은 가슴을 보여 줄 필요가 있어.
저 왕건이에게 말이야. 아니 그런가?
최승우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폐하.
씬 황도 주변 시골길
한 필의 전령이 등에 기를 꽂고 달려가고 있다. 화급하게 멀리 사라
지고 나면 이윽고 저 먼 곳에서 견훤이 보낸 백제의 사절일행들이
나타나고 있다. 무려 20여명에 달하는 군사와 관리들이다. 그들을
고려의 기병들이 인도해 가고 있다. 그들은 왕건에게 바칠 예물들을
가득히 말 위에 실었고, 관리들은 그 복장이 깨끗하고 화려해 보인
다.
해설 견훤이 보낸 왕건의 등극 축하 사절, 후삼국이 서로 사력을 다해 대
치하고 있던 그 시기로 볼 때 견훤이 축하사절을 보냈다는 것은 생
각하기에 따라서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견
훤이 왕건이가 바로 자신의 절대적 상대였음을 공식으로 인정했다
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또 견훤이라는 인물의 호방하고
도 대범함을 어렵잖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왕건은 자신
의 첫째 가는 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축하사절을 보냈던
것이다.
씬 철원 황궁 외경
왕건 (E) 무엇이라고? 백제에서 축하사절이 오고 있어?
씬 동 대전 안
왕건과 최응이 마주 해 있다.
왕건 아니, 견훤왕이 내게 축하사절을 보냈다? 내게 말인가?
최응 예, 폐하. 참으로 뜻밖의 일이옵니다. 이미 여러 고을을 지나 지금
황도로 들어서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왕건 믿기지 않는 일이로구먼. 견훤왕이 내게 사절을 보냈다?
최응 역시 백제의 왕은 예사인물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왕건 그렇네 그려. 범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는가?
최응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감을 내보이는 오만일 수도 있사옵니다.
왕건 .................?
최응 하오나, 지금으로써는 마다할 이유가 없사옵니다. 더욱이 여러 곳에
서 반란이 일어나 시끄럽사옵니다. 이럴 때 백제의 왕이 페하의 등
극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오고 있다는 것은 나라 안의 여러 호족
과 백성들에게 나름대로 뜻 있는 일이 될 것이옵니다.
왕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럼, 저 사절들을 맞아야겠네 그려.
최응 그리하시오소서. 백관들을 다 물러 모으시고, 황실의 위엄을 세우시
여 기왕이면 성안 대중전에서 크게 맞으시오소서.
왕건 그리 함세. 자네가 광평성과 내봉성에 전해 주게. 백제의 사신이 황
도에 들어오면 쉴 곳을 마련해 주게. 그리고, 내일 아침에 크게 맞
을 것이니 모두들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이르게.
최응 예, 폐하.
끄떡이는 왕건의 표정에서..
씬 철원 저자 거리
백제의 사신들이 들어오고 있다. 내군들이 그들을 호위해 오고 있
다. 백성들이 보고 있다.
씬 황궁 안
상궁, 나인들이 부산하다. 내군들이 지나치고 속속 열려진 황궁문
쪽으로 나가는 것이 보인다. 장일이 수하들에게 이르는 것이 보인
다. 그 한쪽에 복지겸이 보고 있고.
장일 서둘러라. 내일이면 황궁 외성으로 백제의 사신들이 온다. 위엄을
보여야 한다. 우리의 군기를 보여 줘야 한다. 서둘러라.
복지겸 ..................(그렇게 보고 있고)
향식이 수하들과 함께 오다가 그 모습들을 보고 있다. 복지겸에게
예를 올린다.
복지겸 허허, 번을 서고 이제 퇴궐하시는 모양이 구료.
향식 예, 장군. 왜들 이렇게 부산하옵니까?
복지겸 허허, 아직 모르셨구료. 백제에서 사신이 왔소이다. 축하사신이라 내
일 폐하께서 황궁의 외성으로 나아가 맞는다 하십니다. 대대적인 자
리가 될 것 같아요.
향식 아, 예. 하오면....
향식은 그렇게 가고. 복지겸은 계속해 수하들에게 지시한다.
복지겸 내군들도 물론이거니와 신료들에게도 속히 파발을 보내라. 내일 중
으로 모두 참석해야 한다. 폐하께서 직접 납시는 일이다.
군사들 예.......
끄떡이는 그런 복지겸의 표정에서...
씬 환선길의 집 외경(밤)
씬 동 집 사랑
환선길과 향식이 마주 해 있다.
환선길 백제의 사신이 왔단 말이지?
향식 예, 형님. 견훤왕이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까? 아니 어떻게 축하사절
을 다 보낼 수가 있사옵니까?
환선길 그러게 말일세. 참으로 엉뚱한 사람이로구나.
환선길처 지금 나라 안이 도처에서 시끄러운데 아주 알맞게 사신이 온 것 같
습니다. 그 동안 황제가 궁지에 몰려 있었는데 이 일로 얼마나 어깨
를 펴겠습니까?
향식 그렇사옵니다. 형님, 이번 일이 우리에게는 다시없는 기회 같사옵니
다.
환선길 .............?(갈등한다)
향식 오면서 내군의 동향을 알아보았사옵니다. 황제는 아무래도 이번의
사신건을 가지고 나라 안팎에 크게 과시를 하려는 것 같사옵니다.
그 때문에 조당에서 사신을 맞지 않고 조당 밖의 외궁 대중전에서
맞는다 하옵니다.
환선길 그래?
향식 그러니까 궁궐 안 대전에 있다가 대전밖에 대중전에서 신료들이 모
두 모이고 사신이 도착하면 황제는 그때 대전을 나가려 할 것이옵
니다.
환선길 그래서..?
향식 대중전과 황궁의 대전 사이에는 대궐의 중문이 있사옵니다. 황제가
나가기 전에 그것을 닫아 버리는 것이지요.
환선길처 ...............?
향식 군사가 많을수록 불리하옵니다. 형님께서 정예병 오십명만 데리고
미리 대전주변에 있다가 황제를 치시오소서. 저는 그 틈을 이용해
내군들이 외궁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형님이 계시는 쪽으로
오겠사옵니다.
환선길 잘될까?
향식 지금 갑자기 온 사절들 때문에 황궁이고 신료들이고 내군이고 모두
정신이 없사옵니다. 특히나 내군들 또한 내일 사절들에게 위엄을 보
이고자 모두 동원되기로 되어 있다 하옵니다. 기회이옵니다. 내일
황제가 나가기 직전에 대궐 중문을 닫으면 다 끝나는 것이옵니다.
환선길처 내가 누차 말했습니다. 장군께서도 충분히 보위를 보실 수 있다고
요. 특히나 저들이 장군을 눈에 가시처럼 보고 있사옵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환선길 ...............(끄떡이다가) 네 계획이 그럴 듯 하다. 황제를 지키는 내군
이 모두 외성으로 바로 나간 그 틈을 이용하자는 것이지?
향식 예, 형님. 황제를 죽이고 나면 바로 형님께서도 새로운 혁명을 공포
하시는 것이옵니다. 우선 지난 혁명을 주도한 사기장을 목 베고 임
춘길이를 앞세워 군대를 장악하고 옥좌에 앉으시는 것이옵니다. 가
능하옵니다, 형님. 충분히 승산이 있사옵니다.
환선길 (한참 생각하다가) 그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다. 준비를 하자.
향식 예, 형님.
환선길과 향식과 환선길처의 긴장한 모습에서....
씬 황궁 대전
왕건이 기분 좋게 술잔을 들고 있다. 수인이 거퍼 따라 주며 함께
해 있다.
수인 보시오소서, 폐하. 하늘이 폐하를 돕고 계시옵니다. 백제의 왕이 폐
하의 등극을 인정하고 사신을 보냈사옵니다.
왕건 암, 암... 그나마 참으로 큰 위안이 되었소이다. 신료들도 아주 기뻐
하고 있어요. 내일은 아마 이 고려가 생긴 이래 최대의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수인 사신을 맞는 절차를 아주 크게 하신다 들었사옵니다.
왕건 그래야지요.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들의 자신감을 은연중 보이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고려국의 내부사정을 좀 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니, 크게 할 수 밖에
요. 우리에 국력을 있는 대로 다 보여주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수인 예, 폐하. 알 것 같사옵니다. 한 잔 더 드시겠사옵니까?
왕건 주시구료. 요 며칠 참으로 마음을 조렸는데 그래도 부인 덕에 상당
한 위로가 되었소이다.
수인 부끄럽사옵니다.
왕건 잘 풀려 갈 겝니다. 하나 둘 나랏일들이 풀려 갈 거예요.
그런 왕건의 표정에서....
< 123회 끝 >